뱀이 속삭이다 (뱀 수다)
어릴 적부터 어쩐지 풀밭은 맨발로 디뎌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멧길을 탈 적에도 신을 벗고 맨발로 올라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시골에서든 도시에서든 작은 풀밭을 만나면 으레 신을 벗고 양말을 얌전히 신에 넣고서 맨발로 디뎌 보곤 했습니다. 이때마다 흙이며 풀잎이 간질간질 건드려 주는 결이 아주 반가웠습니다. 우리 책숲집에서 맨발로 쪼그려앉아서 맨손으로 낫을 쥐고 풀을 베어 주는데, 발바닥으로 어떤 목소리가 찾아듭니다. 어디에 숨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언제 꼬리를 뺐는지 알 길도 없지만, 뱀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다음부터는 뱀이 풀밭하고 흙을 거쳐서 저한테 마음으로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얘, 얘, 너희(사람)는 왜 우리(뱀)를 그렇게 끔찍히 멀리하는지 몰라
1. 이제 너희는 과학으로 밝혀서 아는 사람도 있기도 하던데, 아직도 우리를 모르는 사람이 참 많더라. 우리는 눈으로 앞이나 둘레를 보면서 다니지 않아. 우리는 소리하고 결(주파수·진동)로 느끼면서 다녀. 소리하고 결이라고 했지만, 이 소리도 결하고 같아. 우리는 흙이 있는 풀밭을 아주 조용하게 슬슬 기듯이 붙어서 다니면서 이 땅에 몸을 댄 숨결이 어떻게 어디에 있는가를 바로 알아챈단다.
2. 너희는 풀이 우거진 곳에 들어설 적에 으레 긴바지에 긴소매에 두툼한 신을 꿰어야 한다고 여기지? 그래야 우리가 너희를 안 문다고 여기더라. 참 우습지. 왜 우리가 너희를 물어야 하는데? 그다지 맛있지도 않은 너희 살점을 뭣 하러 물어야 하는데? 우리가 너희를 물어서 우리한테 좋을 일이 뭐가 있니? 생각해 봤니? 우리가 너희를 왜 물어야 하니?
3. 잘 생각해 봐. 우리가 너희를 물 때는 깜짝 놀란 나머지 우리 목숨이 너희한테 빼앗길까 싶었기 때문이야. 우리는 우리 몸을 지키려고 우리 몸을 내던져서 너희를 물어. 우리한테 물린 너희가 바닥에 주저앉아서 우리를 안 볼 때까지 기다리지. 너희가 우리한테 물려서 주저앉으면 이때다 싶어 재빠르게 꼬리를 빼지.
4. 너희는 너무 모르는데, 너희가 맨발로 다리를 훤히 드러내면서 풀밭을 거닐면, 우리는 너희가 풀밭에 발을 디딘 줄 곧장 알아챌 수 있어. 너희가 두툼한 신, 그 플라스틱 신을 꿰니까 우리는 너희가 어디에 있는지 하나도 몰라. 너희는 “뱀을 쫓는다”면서 긴 나뭇가지를 손에 쥐고 풀밭을 헤치거나 땅바닥을 울리기도 하더라. 참 우습지. 이런다고 우리가 꼬리를 빼겠니? 살결을 느낄 수 없이 나뭇가지가 풀밭을 헤칠 적에는, 이게 바람이 풀밭을 건드리는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우리는 으레 바람이 풀밭을 건드린다고 여겨서 가만히 있곤 해. 바람은 우리를 괴롭히거나 잡아죽이려 하지 않거든.
5. 너희가 나뭇가지를 우리 앞에서 빙빙 돌리거나 흔들거나 쑥 내밀면 깜짝 놀라. 아무런 숨기운이 없어 보이는 나뭇가지가 어떻게 혼자 움직이지? 스스로 숨결을 내지 않는 나뭇가지가 우리 앞에서 빙빙 돌 때면 우리도 빙빙 돌아서 어떻게든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지만, 나뭇가지를 물어서 주저앉히지 않으면 꼬리를 뺄 틈이 없으니, 나뭇가지를 덥석 물려고 하지. 그런데 너희가 일부러 이렇게 하지 않기를 바라. 너희한테 너희 목숨이 대수롭다면, 우리한테도 우리 목숨이 대수롭단다.
6. 아무리 풀이 우거진 곳이라 하더라도, 너희가 여럿이 풀밭을 거닌다면 꼭 한 사람이라도 맨발로 있어 주기를 바라. 그래야 우리는 사람을 느끼지. 다른 목숨이 땅을 밟았구나 하고 느껴. 우리는 발자국을 발결로 알아채. 그리고 너희 발바닥에 깃든 발내음을 살펴. 숲을 사랑하는 발내음인지, 숲을 싫어하는 발내음인지, 숲을 두려워하는 발내음인지, 하나하나 살펴. 너희가 숲을 사랑하는 발내음이라면, 우리는 일부러 너희가 다 지나갈 때까지 곁에 얌전히 있기도 한단다. 숲을 사랑하는 밝은 기운을 오래도록 누리고 싶거든.
7. 때로는 우리가 한 자리를 고이 지키며 있기도 해. 알을 품었을 때야. 알을 품으면 굼뜨지. 그리고 알을 낳으려 할 적이라든지, 알을 낳은 뒤에도 한 자리에서 꼼짝을 안 해. 이때에 우리는 끊임없이 숨결(진동·주파수)을 내뿜어. 제발 우리 가까이에, 곁으로 오지 말라고. 우리가 보내는 숨결을 느끼거나 들을 수 있다면 우리가 있는 쪽으로 안 오겠지.
8. 그러니까, 너희는 너희 발결을 우리가 느낄 수 있도록 맨발로 풀밭에 들어오기를 바라. 그리고 우리가 너희한테 보내는 숨결도 너희가 제발 느껴 주기를 바라. ㅅㄴㄹ
(숲노래/최종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