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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시론 - 굴렁쇠 생각 3
이오덕 지음 / 도서출판 굴렁쇠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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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오덕 읽는 하루

― 헌책집에서 만난 이슬


《兒童詩論》

 이오덕 글

 세종문화사

 1973.1.30.



  《兒童詩論》(이오덕, 세종문화사, 1973)은 아주 잊힌 책이었습니다. ‘내가 이오덕을 잘 아는 제자요!’ 하고 내세우는 분들 가운데 이 책을 읽었거나 건사한 사람을 아예 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오덕 제자’라고 내세우는 분들이 《아동시론》을 읽은 적도 구경한 적도 없나 아리송했습니다. 그런데 《아동시론》뿐 아니라 《까만 새》라는 이오덕 어른 노래책(동시집)을 까맣게 모르는 분도 수두룩했습니다. 《별들의 합창》 같은 조금 묵은 노래책은 더더구나 모르더군요.


  말로는 스승이라 여기고 우러른다고 하면서, 정작 ‘스승이 쓴 책’을 곁에 놓지 않을 뿐 아니라 읽지도 않는다면, ‘스승이 펴는 뜻’을 헤아리지 못 하거나 모를 테지요. 스승이 쓴 책조차 사지도 읽지도 않고서 스승 꽁무니만 좇는다면 그야말로 허술하고 엉성하며 뜬구름잡는 셈일 테고요.


  저는 《아동시론》을 헌책집에서 만났습니다. 자주 만났습니다. 저한테는 한 자락만 있으면 되니, 제 몫으로 한 자락을 놓고, 이웃이며 동무이며 동생한테 한 자락씩 사주었습니다. 1999년에 들어가서 일한 보리출판사 편집부에도 사주었고, 2001년부터 들어가서 일한 토박이출판사(《보리 국어사전》을 내놓은 곳)에도 사놓았습니다.


  헌책집을 다니면서 《아동시론》을 척척 찾아내어 건네니 둘레에서는 화들짝 놀랍니다. “아니? 어떻게 이 귀한 책을 그렇게 쉽게 찾아요?” “쉽게 찾는다고요? ○○님이 헌책집을 안 다니니까 안 보일 뿐이에요. 헌책집을 다니면서 스스로 한나절씩 눌러앉아 이 책 저 책 골고루 읽고 누리다 보면 어느 날 문득 만날 수 있습니다. 틈이 없어서 헌책집을 못 간다는 핑계는 그만 대셔요. 저녁에 술 좀 그만 마시고 틈을 내어 이틀이나 사흘마다 헌책집에 가서 한나절씩 책을 읽고 누리다 보면 누구라도 다 만날 수 있는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음이 있을 적에 만납니다. 마음이 없을 적에 안 만납니다. 마음이 있으면 어느 책이라도 곧 만납니다. 마음이 없기에 못 만날 뿐 아니라, 판이 예전에 끊긴 아름책을 찾아내려고 헌책집을 찾아다니는 발걸음이 없어요.


  2023년에 문득 헤아리니 오랜 《아동시론》을 30만 원 값에 파는 헌책집이 있습니다. 이 값은 비쌀까요, 안 비쌀까요? 1999년에 헌책집에서 《아동시론》을 5000원이나 1만 원에 사서 둘레에 건네었는데 “이렇게 낡은 책이 5000원이나 한다고?” 하면서 비싸다고 손사래친 분을 꽤 보았습니다. 이분을 빤히 보다가 “○○님, 이 책에 5만 원 값을 붙이면 헌책집지기를 아주 미친놈으로 여기시겠네요?”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1974년에 나오고서 첫판조차 안 팔리고 사라진 《까만 새》는 값이 얼마여야 안 비싸다고 여기려나요? 1966년에 나온 《별들의 합창》하고 1969년에 나온 《탱자나무 울타리》는 헌책집에서 얼마로 팔아 주어야 안 비싸다고 여길 만한가요? 저는 이오덕 어른이 남긴 책 가운데 아직 《별들의 합창》만 만나지 못 했습니다. 1994년부터 헌책집에서 하나둘 만났습니다.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도 헌책집에서 찾아내어 볼에 눈물자국을 내면서 읽었습니다. 때로는 이오덕 어른이 누구한테 건네면서 남긴 손글씨가 깃든 판을 헌책집에서 보았고, 어른 손글씨가 있는 책을 이웃한테도 스스럼없이 건넸어요.


  책이란 무엇일까요? 헌책이란 무엇일까요? ‘헌’은 “손길을 거친”을 뜻합니다. ‘새’이기에 좋지 않고 ‘헌’이기에 나쁘지 않습니다. “아직 손길을 안 거친” 살림이니 ‘새’일 뿐이고, “손길을 거치면서 손빛이 흐르”는 살림이기에 ‘헌’입니다.


  ‘새책 = 처음으로 읽힐 책’입니다. ‘헌책 = 새롭게 읽힐 책’입니다. ‘새책 = 낯선책’입니다. ‘헌책 = 손길책·손빛책’입니다.


  ‘새 = 사이’를 가리키고, ‘새 = 멧새’이기도 합니다. 하늘하고 땅 사이에 있기에 ‘새’요, 내가 나로서 나답게 나를 바라보고 사랑할 줄 알아서 날개를 달고서 하늘로 날아오르기에 ‘새’입니다.


  ‘헌 = 한’하고 맞닿습니다. ‘허’라는 말밑은 ‘허허바다’로 잇거든요. ‘허허바다’란 ‘하늘’처럼 가없이 잇는 ‘크고 하나’를 나타내요. 그래서 ‘헌책 = 한책 = 허허바다책 = 하늘책’이기도 합니다.


  겉보기로 허름한 책이기에 꾀죄죄하거나 나쁠 수 없습니다. 겉보기로 가난하거나 글을 모르는 멧골아이라서 모자라거나 나쁠 수 없습니다. 이오덕 어른은 서울아이도 대구아이도 아닌 멧골아이 곁에서 멧새가 되어 노래하는 하루를 짓고픈 꿈으로 배움길을 걸었습니다. 이 대목을 좀 헤아려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오덕 어른은 스스로 멧사람이기를 바랐고, 마지막숨을 한 줄기 쉬고 눈을 감을 적에 “나는 멧새로 돌아간다”는 마음을 남겼습니다.


  새로 나오기에 값지지 않습니다. 오래되었기에 낡지 않습니다. 철이 들지 않을 적에만 낡거나 늙습니다. 철이 들 적에는 늙음도 낡음도 아닌 어질거나 슬기로운 눈빛입니다. ‘헌책 = 철빛을 읽는 철든 책’이라고 느낍니다. ‘하늘빛을 담기에 헌책’이요, ‘멧새가 노래하는 숨결을 담기에 새책’이로구나 싶습니다. ‘새책 = 아이다운 눈망울로 하나씩 배우려는 책’이고, ‘헌책 = 어른스런 눈빛으로 하나씩 나누려는 책’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또한 헌책집은 모든 갈래 온갖 책을 두루 품습니다. 새책집은 갓 나온 ‘낯선책’을 건사하는 책터라면, 헌책집은 손길을 거친 모든 ‘새로배움책’을 아우르는 책바다요 책누리요 책잔치요 책숲입니다. 헌책집을 마실하면서 이오덕 어른 예전 책을 찾아나설 뿐 아니라, 사람들 손길을 덜 타거나 새록새록 되읽힐 아름책을 만나는 이웃님이 늘기를 바랍니다. 헌책은 값싼 책이 아니라, 되읽힐 아름책입니다. 새책만 쳐다보다가는 그만 책이 왜 책인가를 잊고 맙니다.


  왼손에 새책을 놓는다면, 오른손에는 헌책을 놓아요. 오늘은 새책을 읽었으면, 모레에는 헌책을 읽어요. 이오덕 어른이 왜 멧골아이 곁에서 노래하는 멧새가 되기를 바랐는가 하는 마음을 읽으면서 헤아리고픈 이웃님이라면, 아무쪼록 자그마한 마을새책집하고 마을헌책집을 나란히 나들이하면서 ‘책숲마실’을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책은 헌책입니다. 모든 책은 새책입니다. 모든 책은 숲입니다. 모든 책은 사랑입니다. 모든 책은 바다요 하늘이요 땅이요 풀꽃나무이면서, 모든 책은 살림이고, 모든 책은 사람입니다.


ㅅㄴㄹ


우리의 아동들에게는 시가 없다. 그들의 일상의 말과 행동과 마음속에 충만해 있는 참된 시의 세계는 그릇된 어른들에 의해 철저히 짓밟히고 봉쇄당하여, 대신 시와는 얼토당토 않는 기묘한 흉내내기 놀이를 하고 있으니, 이런 사람답지 못한 원숭이 흉내가 곧 아동들이 쓰고 있는 동시라는 것이다. (9쪽)


윤석중 씨의 동요 세계는 그 후 20여 년 동안 전국의 아동 작품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고, 동요란 이름이 거의 없어진 지금에도 여전히 그 동요적 세계는 판을 치고 있어서 참된 아동시의 발아를 저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 아동들에게 그들 스스로의 생활의 노래를 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머리속에서 나온 ‘재미’와 ‘웃음’의 동심이라는 것을 강요할 때, 그것은 골계(滑稽)에 가까운 말재주로밖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17∼18쪽)


만일 아동들이 자기 자신의 생활과 마음을 자기의 말로 쓰게 된다면, 거기 유사 모조품이란 거의 있을 수 없다. 천 명의 아이가 쓴 천 편의 시는 천의 얼굴처럼 다 다를 것이 당연하다. 또한 같은 아이가 쓴 같은 제목의 시라도 어제 쓴 것과 오늘 쓴 것이 달라야 한다. (25쪽)


전국에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상을 타기 위해 다투어 이런 바보놀음을 하여 왔던가? 다투어 어린애의 몸짓이나 재롱을 피워서 그런 것을 좋아하는 어른들의 마음에 들도록 하여 온 것인가? (36쪽)


우리는 아동들이 시인이 되기를 원하고 있는가? 시를 쓰는 직업인이 되기를 원하고 있는가? 아니다. 우리는 마음이 정직하고 행동이 순진하고, 용감하고, 인간성이 풍부하고, 개성이 뚜렷한 창조적 인간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74쪽)


아이들이 쓰는 것이라도 시면 시지, 하필 ‘동’ 자를 붙일 필요가 없다. (210쪽)


‘사투리가 들어 있는 시’, ‘사투리로 쓰는 시’를 써 보자고 한다. 몇 번을 이렇게 사투리로 쓰게 하면 어렵지 않게 동시적인 것을 버리고 그들의 신선한 생활의 세계로 돌아지 않을까 한다. (220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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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 - 시 쓰기 이오덕의 글쓰기 교육 3
이오덕 지음 / 양철북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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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읽는 하루

― 너나없이 날아오를 노래님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

 이오덕

 지식산업사

 1988.10.5.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이오덕, 지식산업사, 1988)라는 책을 처음 만나던 날 온몸으로 번쩍 하고 벼락이 떨어졌습니다. “어린이여야 하늘나라로 간다”는 말을 다르면서 새롭게 들려주는 말이 “어린이는 모두 노래님(시인)이다”라고 느꼈어요. 어린이 마음을 잊거나 잃으면 ‘어른 아닌 늙은이’요, 어린이 마음을 고이 건사하면서 즐겁고 아름답게 설 줄 알기에 ‘철든 사람’으로서 사랑꽃을 피우는 숨결이 되리라 느껴요.


  어린이를 가르칠 까닭이 없습니다. 어린이한테서 배우면 됩니다. 어른은 가르칠 몫이나 자리가 아닌, 배우고 사랑할 몫이자 자리입니다. 어린이는 배우는 사람이 아닌, 어버이를 가르쳐 어른으로 거듭나도록 북돋우는 빛살입니다.


  오늘날 배움터를 보면 하나같이 ‘어린이를 가르치려 듭’니다. 이른바 ‘교육·학습·훈육·양육·훈련·양성·육성’ 따위 일본스런 한자말을 함부로 들먹이잖아요? 이 모든 일본스런 한자말로 밀어대는 짓은 어린이 숨결을 짓밟고 어린이 마음을 망가뜨리고 어린이 넋을 들볶는 사나운 칼부림이라고 여길 만합니다.


  어린이는 스스로 살림을 짓는 어버이 곁에서 모든 삶을 받아들입니다. 스스럼없이 지켜보고 꾸밈없이 바라보면서 나비처럼 날고 나무처럼 서지요. 어린이는 ‘어른 아닌 늙은이’처럼 ‘돈·이름·힘’ 앞에서 굽실거리지 않습니다. 어린이 마음을 잊다가 잃은 ‘어른 아닌 늙은이’가 언제나 ‘돈·이름·힘’ 앞에서 굽실거려요.


  우리가 어른이라면, 허울뿐인 늙은이가 참말로 슬기롭고 어질고 참하며 착하고 사랑스레 밝은 어른이라면, 어린이를 안 가르칩니다. 어린이를 돌아보면서 사랑하는 하루를 지을 뿐입니다. 우리가 어른이 아니기에, 자꾸 어린이를 가르치려 듭니다. 어른이 아닌 늙은이인 탓에 철이 안 든 채 자꾸자꾸 어린이를 길들이려 하지요.


  철든 숨결이자 눈빛이라면 아무도 안 가르칩니다. 보셔요. ‘스승’은 가르치는 자리나 몫이 아니에요. 스승은 스스로 살림을 짓는 삶을 누리면서 사랑을 길어올려서 펴는 사람입니다. 스승도 스님도 안 가르쳐요. 그저 곁에서 빙그레 웃고 노래하면서 기쁘게 북돋아 ‘어린이가 놀도록 자리를 내어줄’ 뿐입니다. 어린이가 마음껏 놀도록 마음을 쓰고 보금자리를 가꾸기에 ‘어버이에서 어른이란 이름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어린이를 가르치려고 닦달하면서 배움터(학교·학원)로 몰아세우기에 ‘어른 아닌 늙은이’예요.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는 어린이한테 노래짓기(시쓰기)를 안 가르칩니다. 어린이가 저마다 하늘빛으로 노래하는 사랑어린 마음이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고 차근차근 보여줄 뿐입니다. 그리고 ‘어른 아닌 늙은이’한테 들볶인 나머지 빛살을 잃고 말아 ‘낡은 굴레에 갇힌 딱한 아이들’이 ‘틀박이(기계)처럼 만들어내는 겉발림 동시’가 무엇인지 가만히 보여줍니다.


  노래하기에 어린이입니다. 놀기에 아이예요. 노래하며 놀기에 어린이요, 노래하며 노는 마음을 고스란히 건사하면서 사랑으로 돌보는 어진 숨빛을 밝혀서 든든하게 자라난 사람이기에 비로소 ‘어른’입니다. 이리하여, 어린이 마음을 고이 잇는 사람인 어른이라면 ‘일하며 안 지쳐’요. 즐겁게 놀이를 하듯 즐겁게 일할 줄 아는 어른은 ‘지치는 일’이 없고 ‘고단한 일’이 없습니다. ‘일 아닌 돈벌이’만 하기에 ‘어른 아닌 늙은이’일 뿐 아니라, 언제나 힘겹고 지치고 나른하고 괴로운 굴레에 스스로 갇혀서 못 헤어나오고 말아요.


  놀이하는 아이가 일하는 어른으로 피어납니다. 노래하는 아이가 사랑하는 어른으로 깨어납니다. 놀며 노래하는 아이가 살림을 짓고 숲을 품는 어른으로 눈뜹니다.


  놀지 못 한 아이는 그만 늙은이로 시들시들합니다. 노래를 못 부른 아이는 어느새 팍삭 늙어서 아프고 맙니다. 놀지 못 하고 노래하지 못 했으니 사랑이 아닌 ‘짝짓기’만 하려고 눈먼 몸짓에 허덕입니다.


  어린이는 누구나 노래님입니다. 어린이가 입으로 읊는 모든 말은 노래입니다. 어린이가 읊는 즐겁거나 슬픈 모든 말을 글로 옮기니 저절로 노래(시)를 이룹니다. 따로 글을 써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입으로 읊는 말씨를 글씨로 담아내면 됩니다. 구태여 종이에 글을 얹어야 하지 않습니다. 도란도란 주고받는 말을 잇고 살려서 이야기로 여미니 어느새 글자락으로 태어날 뿐입니다.


  우리가 어른이라면 노래하는 아이 곁에서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춥니다. 우리가 어른이라면 ‘낳은 아이’뿐 아니라 ‘이웃 아이’를 모두 상냥하게 마주하면서 하루를 짓는 빛나는 살림꽃을 도란도란 이야기로 들려주면서 환하게 웃을 테지요.


  아이들은 ‘직업훈련’이 아닌 ‘살림짓기’를 보고 듣고 함께하면서 자랄 적에 어른으로 섭니다. 우리는 아이들한테 일자리(직업)를 알려주어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놀이판을 마련하고, 노래판을 갖추어서, 마당이 넉넉한 보금자리를 가꾸면 됩니다. 나무를 심을 마당이 있어야 어른이라 할 살림입니다. 풀꽃을 곁에 두고 벌나비를 부르는 오늘을 지어야 어른스럽다고 할 삶입니다. 풀벌레랑 개구리하고 동무하면서 같이 노래하고 춤추기에 바야흐로 어른답게 빛나는 눈망울입니다.


  노래는 숲에서 흐릅니다. 살림은 숲에서 얻습니다. 말은 숲에서 태어납니다. 마음은 숲을 품으면서 푸릅니다. 생각은 숲하고 한동아리로 흐르면서 빛납니다. 사랑은 숲하고 사람이 한몸에 한마음인 줄 깨닫는 자리에서 씨앗 한 톨로 돋아납니다.


  노래를 부르고, 노래를 쓰고, 노래를 읽기로 해요. ‘시·동시·문학’이 아닌 ‘노래’를 함께 부르고 나누기로 해요.


ㅅㄴㄹ


슬픔을 느끼지 못하고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사람은 참기쁨도 모릅니다. 그리고 시를 쓸 수 없읍니다. 어른들은 생명을 짓밟고 죽이기를 예사로 합니다. 아주 어렸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차츰 나이 많을수록 사람은 이상하게 되어 갑니다. (4쪽)


옛날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연 속에 살면서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벌레소리들가 함게 개구리소리도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로 느끼고 들었읍니다. 그런데 요즘 어린이들은 자연을 모르고 자연에서 떠나, 사람이 만들어 낸 기계적인 환경에서 기계들이 내는 소리만 들으면서 살지요. (12쪽)


“여자 놓든 남자 놓든 / 엄마 마음대로 놔,”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지” 하고 한탄하다가도 결연한 말로 “설움만 받고 크는 아기 / 어째서라도 나는 / 아기를 키우고야 말겠다.” 이처럼 맺고 있는 이 아이의 용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74쪽)


만약 어른들이 아이들을 자연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여 삭막한 콘크리트 집 안에 가둬 놓고는, 온갖 잡동사니 지식을 공부라고 하여 머리에 쑤셔넣고, 점수따기 경쟁을 채찍질로 시켜서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모조리 병들게 하지만 않는다면, 어린이는 모두 시인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삶의 이치를 저절로 느껴 아는 놀라운 시인이 된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137쪽)


생활을 얘기하는데 자연이 저절로 나타나 있고, 자연을 얘기하는데 삶이 그 속에 저절로 표현되어 있는 상태가 가장 좋다고 할 수 있지요. (159쪽)


머리로 시를 만들어 내어서는 안 되고, 사실과 진실을 정직하게, 즉 가슴으로 온몸으로 써야 하지만, 아직도 어른들은 머리로 글재주를 부리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199쪽)


여기에는 시 같은 것을 써 보이려고 어떤 몸짓을 하거나 말재주를 부린 흔적이 없읍니다. 시는 이런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정직한 마음, 이것이 시의 마음입니다. 시의 길이 곧 사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208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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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산처럼 - 이오덕의 자연과 사람 이야기 나무처럼 산처럼 1
이오덕 지음 / 산처럼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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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읽는 하루

― 해를 품은 하루


《나무처럼 산처럼》

 이오덕

 산처럼

 2002.10.10.



  《나무처럼 산처럼》(이오덕, 산처럼, 2002)이 나오던 무렵, 저는 서울 종로구 교동이라는 골목마을 작은집에서 살았습니다. 이제 ‘서울 종로구 교동’은 길그림에서 가뭇없이 사라지고 잿더미(아파트단지)로 바뀌었습니다만, 2002년 무렵 서울 한복판이라 할 그곳에 ‘밑돈(보증금) 1000에 달삯 10’인 오랜 나무집(목조주택)이 있었어요.


  아직 서울에서 살던 그무렵 둘레에서는 제가 살던 달삯집을 못 믿었습니다. “임마, 서울 종로구 한복판에 어떻게 보증금 1000에 월세 10짜리 집이 있냐?” 하고 따지더군요. 그러나 이렇게 따지던 분들을 데리고 저희 집으로 부르니 “와, 어떻게 이런 골목이 다 있고, 이런 골목에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이 남았어? 저 앞 경교장보다 여기 이 적산가옥이야말로 근대문화유산 아니냐? 서울에 화장실 없는 적산가옥이 있다고?” 하면서 놀라더군요.


  이른바 ‘한일 월드컵’이 열린 2002년에 서울 종로구 교동 옆 ‘서대문구 냉천동·현저동’에도 ‘뒷간 없는 작고 값싼 달삯집’이 꽤 있었습니다. 그 작고 값싼 달삯집은 ‘밑돈 300에 달삯 10’이라든지 ‘밑돈 500에 달삯 10’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작고 가난한 살림칸을 용케 알아본다며 혀를 내두르는 분들한테 “저기요, 가난한 살림으로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작고 값싼 집이 잘 보여요.” 하고 얘기했습니다.


  나무디딤칸(나무계단)을 오르내릴 적마다 삐걱거리던 오랜 달삯집에는 모기그물조차 없고, 달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즐거웠어요. 봄부터 가을까지 ‘골마루 미닫이’를 다 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이던 나무집은 2층에 골마루가 있고, 이 골마루에 붙은 오래된 미닫이를 열면 밤새 하얗게 밝은 을지로나 종각까지 훤히 보였습니다. 가까이 ‘경희궁’이 있는데, 이 경희궁 작은숲에는 다람쥐나 오소리나 족제비도 살았다고 느껴요. 왜냐하면, 여름날에 골마루 미닫이를 활짝 열고서 책을 읽을라 치면 으레 다람쥐나 오소리나 족제비가 불쑥 창턱에 올라앉아 빼꼼 들여다보다가 휙 사라졌거든요.


  작고 값싼 삯집에 깃드는 사람들은 나란히 작고 가난합니다. 그무렵 1층에 살던 가난한 이웃은 아주머니가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더라도 살림을 잇기 벅찼고, 그 집 아이는 하루 내내 혼자 토끼우리에 있는 토끼한테 배춧잎을 먹이면서 심심하게 놀았어요. 그 집 아저씨는 일을 않고 핀둥핀둥 놀기만 하다가 밤늦게 들어오는 아주머니를 때리면서 싸움이 불거지고, 이틀마다 경찰이 찾아와서 아저씨를 나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런 살림집에서 하루를 보내던 저는 서울 내발산동으로 일하러 다녔습니다. 한창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자료조사부장으로 일했어요. ‘국어사전 집필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너무 허름한 살림집에서 지낸다고 여긴 분들이 “그래도 그렇지, 사전 편집장이나 되는 자리에 있으면서 너무 가난한 집에서 살지 않는가? 월급이 그렇게 적나?” 하고 물으셨고, “몸뚱이 하나를 누이면 집이면 됩니다. 달삯은 많지도 적지도 않습니다. 저는 더 크거나 좋은 집에 돈을 쓸 마음이 없어요. 낱말책을 새롭게 쓰는 편집장이기에 ‘집에 들일 돈이 있다’면 ‘책을 사는 돈으로 쓰려’고 합니다.” 하고 대꾸했어요.


  낱말책을 여미든 이야기책을 쓰든 글꽃(문학)을 밝히든, 배부르게 살지 말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배부른 돈이 아닌 넉넉한 마음이 되어 하늘을 보고 별을 바라고 풀꽃을 품고 나무를 어루만질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잿집(아파트)에서 사는 몸이라면 낱말책을 여밀 만하지 않을 뿐 아니라, 글을 쓸 수 없고, 그림을 그릴 수 없으며, 빛꽃(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잿집(아파트)은 발바닥이 땅바닥에 안 닿아요. 배부른 몸으로는 이웃을 읽지 못 하고 만나지 않아요.


  《나무처럼 산처럼》은 책이름대로 나무처럼 살아가기를 바라고 멧숲처럼 푸르게 노래하기를 꿈꾸는 마음을 들려줍니다. 나무가 들려주는 말을 듣는 마음을 속살이고, 멧새가 알려주는 노래를 나누는 길을 밝혀요. 시골에서 살든 서울에서 살든 우리 마음밭을 나무빛으로 보듬는 하루를 이야기합니다.


  해를 품으니 햇살처럼 눈부십니다. 해를 안으니 햇빛처럼 무지개입니다. 해를 그리니 햇볕처럼 포근합니다. 해바람비는 뭇목숨을 살립니다. 해바람비가 깃든 낟알하고 열매로 밥살림을 지으니 누구나 든든하면서 푸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땅밑길을 지나는 전철을 아침저녁으로 타고서 일터를 오가던 2002년에 이오덕 어른 책을 읽고 거듭 읽는 동안 ‘아무리 매캐하고 시끌벅적하고 별빛을 만나기 어려운 서울 한복판이어도 풀벌레 노랫소리가 온몸을 휘감고 미리내가 밤마다 가만히 토닥여 주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글 한 줄로 티끌을 훅 씻어내는 길을 보았습니다. 글 두 줄로 먼지를 싹 걷어내는 살림을 만났습니다. 글 석 줄로 앙금을 털어내는 사랑을 느꼈습니다. 글 넉 줄로 생채기가 아물도록 가꾸는 사랑이로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나무처럼 서고 싶습니다. 나는 나비처럼 날고 싶습니다. 나는 나로서 나답게 생각하려고 합니다. 나는 너랑 도란도란 어우러지는 살림살이를 지피고 싶습니다.


  나는 언제 어디에서나 숲빛이고 싶습니다. 내가 쓰는 글은 숲글이요, 내가 읊는 말은 숲말이며, 내가 부르는 노래는 숲노래이도록 온마음을 기울이고 싶습니다.


ㅅㄴㄹ


그분들은 모두 아이들을 위한 글을 쓰는 분들이었는데 매미 소리를 모르고 있었다. (5쪽)


사람이 그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개나 소나 돼지만큼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싶다. 사람이 무슨 학문이고 철학이고 예술이고 문학이고 떠벌리면서 거짓과 속임수로 살지 말고, 저 풀숲에서 우는 벌레만큼 고운 울림으로 자연 속에 어울려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것이 내 꿈이었는데. (52쪽)


세상에서 사람의 아이치고 어른들 개 잡는 것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구경할 아이가 어디 있겠는가? 이것이 아이들 마음이고, 하늘이 준 자연의 마음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하도 그런 어른들의 행동을 자주 보게 되고 그런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질서 속에 살다 보니 그만 그 아이들도 차츰 감각이 둔해지고 본성이 흐려지고 길이 들여져서 어느새 병든 어른으로 되어 버린 것이다. (81쪽)


이것이 모두 어린이들과 삶을 같이 하지 못 하고 책만 읽어서 시를 쓰고, 아이들을 멀리서 한갓 풍경으로 바라보고 생각만으로 썼기 때문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155쪽)


글쓰기만 해도 그렇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시나 소설 같은 것, 동화 같은 것이 아니면 글이 아닌 줄 압니다. 가치가 없는 글로 여깁니다. 서울이고 지방이고 각처에서 문학강좌 같은 것을 열고 있는데, 그런 자리에 가 보면 참 가관입니다. (180쪽)


지루한 글이 되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나 잘못 쓴 말이 있으면 지적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 소름끼치는 인간들의 끝장을 부디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188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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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쓸모 있을걸 창비아동문고 60
이오덕 지음, 이혜주 그림 / 창비 / 1984년 10월
평점 :
절판


이오덕 읽는 하루

― 씨앗을 심는 어린이



《이사 가는 날》

 이오덕 엮음

 창작과비평사

 1984.10.30.



  《이사 가는 날》(이오덕 엮음, 창작과비평사, 1984)은 어린이·푸름이 글모음입니다. 이오덕 어른이 가르친 아이들이 쓴 글도 모으고, 한국글쓰기연구회 길잡이로 지내는 분이 가르친 아이들이 쓴 글도 모읍니다. 1984년에 처음 나온 책에는 책자취(판권)에 “편자와의 협약에 의해 검인 생략” 하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펴냄터인 창작과비평사(창비)는 1990년에 바뀐 한글맞춤길에 따라 책을 모두 판갈이를 해야 하던 무렵부터 슬그머니 ‘저작권자 이오덕’을 지우고서 ‘저작권자 창작과비평사’로 바꿔치기를 했습니다. 이오덕 어른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창작과비평사(창비)가 이렇게 ‘저작권 훔침질(도용)’을 한 줄 까맣게 몰랐습니다.


  이오덕 어른은 1984년에 처음 글모음을 선보일 적에는 ‘책 끝에’라는 이름으로 어린이·푸름이가 쓴 글이 어느 꾸러미(학급문집)에 실렸는지 낱낱이 밝혔는데, 창작과비평사(창비)에서 ‘저작권자 이오덕’을 지우고서 ‘저작권자 창작과비평사’로 바꿔치기를 하던 무렵부터 ‘책 끝에’도 슬그머니 잘라냈습니다.


  이오덕 어른은 ‘창비아동문고’에 어린이글이 꼭 있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어른들이 쓴 글만 어린이한테 읽혀서는 안 되고, 어린이 스스로 어린이 삶을 밝힌 어린이 목소리를 여럿 꾸준히 선보여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손수 《이사 가는 날》을 비롯한 여러 글모음을 엮어서 선보였습니다. 이렇게 선보여서 받은 글삯은 모두 한국글쓰기연구회에서 펴내는 달책(회보)을 펴내는 밑돈으로 삼았어요. ‘글쓰기 회보’라고 줄여서 가리키는데, 이 글쓰기 회보는 바로 ‘어린이 목소리를 살리고 사랑하는 줄거리’를 담는 작은 책이었습니다.


  창작과비평사(창비)는 이오덕 어른이 엮은 글모음을 1984년에는 ‘매절 계약’으로 냈습니다. 그무렵에는 우리나라에서 저작권법을 제대로 지키는 곳이 없다시피 했어요. 그러나 예전에도 틀(법)은 버젓이 있었고, 2000년부터는 ‘세계저작권협약’을 지키기로 한 우리나라이니, 늦어도 2000년부터는 이 틀을 어겨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 앞서 맺은 출간계약이라 해더라도 ‘매절계약은 무효이고, 그 뒤 새로 찍어서 매절 계약금을 넘게 나온 글삯(인세·저작권료)은 돌려받기(소급적용)를 할’ 노릇입니다.


  창작과비평사(창비)는 저작권법을 크게 어겼을 뿐 아니라 성명표시권(저작권자 표기)까지 ‘저작권자 이오덕’을 지우고서 ‘저작권자 창작과비평사’로 바꿔치기를 오랫동안 해왔습니다. 한두 해도 아닌 거의 스무 해를 이렇게 했지요. 그러나 창작과비평사(창비)에서는 이 말썽거리를 쉬쉬했고,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창작과비평사(창비)에서는 이제 더는 이오덕 어른 책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 끊었거든요.


  어린이 숨결을 헤아리는 눈빛을 어린이가 스스로 쓴 글을 사랑어린 손길로 살펴서 여민 아름책인 《이사 가는 날》은 이제 다시 나오기 몹시 어려울 듯싶습니다. 헌책집에서 겨우 찾아볼 수 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헌책집이 있기에 새로 만날 수 있고, 헌책집이 있어서 두고두고 되읽히리라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책숲(도서관)은 《이사 가는 날》처럼 오랜 책은 쉽게 버리거든요.


  1984년에 태어난 《이사 가는 날》은 1970∼80해무렵이라는 나날을 살던 어린 눈망울을 들여다보고 느낄 값진 이야기씨앗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순이를 깎거나 낮추려는 고약한 틀이 단단했는데, 어린이가 조용히 남긴 글자락에는 ‘어머니를 때리거나 괴롭히는 아버지’를 나무라는 이야기가 줄줄이 흐르고, ‘딸을 하찮게 여기는 나라’에 눈물젖다가도 새로 기운을 내어 ‘어린 동생(순이)’을 언니로서 씩씩하게 돌보겠노라 다짐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른답지 못 한 사람들을 꾸짖는 착한 마음을 어린이 글자락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작고 수수한 어린이 글모음 《이사 가는 날》은 1970∼80해무렵에 어린이·푸름이로 살던 맑은 숨빛이 ‘나중에 내가 어른이 되면 이 나라 이 땅 이 마을 이 집을 이렇게 바꾸어 사랑이 흐르는 아름터로 바꾸겠노라’ 하는 따사로우면서 듬직하면서 상냥하면서 환하면서 고운 마음이 듬뿍 흘러나온다고 할 만합니다. 지난날에는 아이였으나 오늘날에는 어른이 되어 이 나라를 새롭게 가꾸는 손길을 이 글모음으로 돌아볼 만합니다.


  저는 1982∼87년에 어린배움터를 인천에서 다녔습니다. 어릴 적에 어머니랑 신포시장으로 버스를 타고 저잣마실을 다녀올 적에 ‘할머니나 할아버지를 안 태우고 내쫓는 버스일꾼하고 차장’을 곧잘 보았습니다. 참말로 그때 적잖은 버스일꾼하고 차장은 ‘버스에 타려는 할머니나 할아버지’한테 대놓고 “이그, 늙었으면 집에서 드러눕거나 자빠질 것이지 뭣 하러 돌아다녀? 언제 죽으려나 몰라?” 하고 떠들었어요. 어린 마음에도 이런 말을 들으면 소름이 돋고 참 싫었습니다. 그러나 따지지 못 했어요. 그무렵에 어린이가 이런 엉터리짓을 따지면 억센 주먹으로 얻어맞았거든요. 사납고 무서운 주먹에 눌려 끽소리를 못 하던 지난날 아이들이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제가 새파랗게 질리면서도 말을 참는 줄 느꼈고, 이다음 저잣마실을 할 적에는 버스를 안 타고 한참 걸었습니다. “안 힘드니?” “네, 안 힘들어요. 해를 보고 바람을 쐬니 좋은걸요.” “그래, 그 사람들은 저희도 늙으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는 줄 모르나 봐.” “네.” 어머니는 더 말하지 않고 걸었습니다. 이러다가 버스에서 차장이 사라졌습니다.


  1984년이면 저로서는 어린배움터 3학년인 나이인데, 그때에는 《이사 가는 날》 같은 글모음이 있는 줄 까맣게 몰랐습니다. 이해에 《몽실 언니》가 나왔으나, 그런 책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창비아동문고’라는 책은 1994년에 열린배움터(대학교)에 들어가서 번역가·통역사가 될 꿈으로 네덜란드말을 배우던 무렵, 우리말을 우리말답게 제대로 익히려고 하면서 이오덕 어른 《시정신과 유희정신》이랑 《일하는 아이들》이랑 《삶과 믿음의 교실》을 만나면서 비로소 알았어요. 1994년 봄날 헌책집에서 《이사 가는 날》에 《우리 반 순덕이》에 《나도 쓸모 있을 걸》 같은 어린이 글모음을 만나서 읽으며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어요. 어린이일 적에 만나지 못 한 아름다운 글을 만나서 눈물이 흘렀고, 1984년 언저리에 ‘어린이가 스스로 제 목소리를 내도록 곁에서 사랑으로 보살핀 어른이 있었구나’ 싶어 놀랍고 반가운 마음에 울었습니다.


  어린이가 쓴 글은 대단하지 않습니다. 어린이가 쓴 글은 그저 사랑입니다. 어린이가 쓴 글은 훌륭하지 않습니다. 어린이가 쓴 글은 오롯이 마음을 담은 살림꽃입니다. 사랑을 놓고서 대단하다거나 안 대단하다고 가를 수 없어요. 살리는 꽃송이를 보면서 훌륭하다거나 안 훌륭하다고 나눌 수 없습니다. 사랑은 늘 사랑이고, 꽃은 언제나 꽃입니다.


  어린이는 늘 사랑이기에 어린이는 모두 ‘노래님·놀이빛’입니다. 구태여 ‘시인·가수’ 같은 허울스런 이름을 쓸 까닭이 없습니다. 어린이는 모두 노래하고 놀이합니다. 어린이는 모두 꽃으로 피어나고 마음밭에 꿈씨앗을 심습니다. 어린이는 천천히 자라나면서 나비처럼 날갯짓을 하기에 철이 드는 어른으로 섭니다.


  그래요, 철이 들기에 어른이고, 철이 안 들기에 늙은이입니다. 어린이를 사랑할 줄 알기에 어른이요, 어린이를 때리거나 괴롭히기에 늙은이입니다.


  오늘날에는 어린이 목소리를 고스란히 담아서 책으로 여미는 어른이 몇쯤 있을까요? 이 터전을 아름답게 사랑으로 가꾸어 내고픈 꿈을 씨앗으로 마음에 심는 어린이가 스스로 빛내면서 쓰는 글자락을 눈여겨보고 품는 어른은 몇쯤 있는가요?


ㅅㄴㄹ


무용이 다 끝나고 집에 와 보니 아버지께서 세수를 하고 계셨다. 아버지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면 굴 속에 들어가셔서 우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탄을 캐내고 월급은 조금밖에 없다는 것이 나타나 있다. (아버지―강원 사북국 5년 박영희/59쪽)


내가 1학년 때 부산 망미동으로 이사를 왔다. 나는 진주보다 부산이 더 좋은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인심도 없고 사치만 하고 돈밖에 모르고 자기들만 아는 체하고 옥에 갇힌 것같이 갑갑했다. (시골에 살다가 도시에 와 보니―부산 감전국 6년 정희웅/98쪽)


할머니께 “할머니는 무거운 것 들고 힘드실 텐데 왜 걸어가셔요? 차 타고 가시지요.”라고 여쭈었다. “뭐 오래 걸린다고 버스 타고 다니냐? 돈 아깝게…….” 어떤 아주머니는 짐 하나 없이 10분도 안 되는 거리를 차 타고 다니는데 우리 동네 할머니는 한 시간도 더 되는 거리를 걸어다니신다 … 그러면 왜 그러실까? 내 생각으로는 돈 때문이기도 하지만 차를 타면 마음이 편하지 않으셔서인 것 같다. 언젠가 버스를 타고 가는데 한 할머니께서 버스를 타려고 하니 차장 아저씨가 못 타게 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 버스 안이 비좁기는 했어도 할머니 한 분이 탈 자리는 있었건만 “늙은이가 집에나 있지 왜 돌아다녀?” 하며 태워 주지 않았다. (우리 마을 아주머니 할머니들―충남 대천여중 3년 김선미/117쪽)


우리 소는 내가 소를 먹이러 가면 좋아서 펄쩍펄쩍 뛴다. 그렇게 해서 매일마다 간다. 우리 소는 연한 것을 좋아한다. 소가 어떻게 먹이를 먹는지 자세히 관찰하여 보니까 연한 것을 먹고 난 다음 가만히 있다가 다시 올려서 씹는다. (우리 집 소―성주 대서국 4년 유해정/182쪽)


내 동생은 “오늘은 저녁놀이 깊게 잠을 자는구나. 어제 늦게 동안 물이 들어 피곤해서 잠을 자는구나.” 하고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로 우리들은 저녁놀을 좋아했다. 나는 저녁놀을 향하여 “저녁놀아! 저녁놀아! 아름다운 저녁놀아! 내일도 모레도 저녁놀이 끼어 내 마음을 기쁘게 해 다오!” 하고 힘차게 외쳤다. (해질 무렵―경북 의성국 5년 김희정/200쪽)


나는 죄인을 착하게 만드는 것은 감옥도 아니고 법률도 아니고 경찰관도 아니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다만 사랑만이 가장 위대한 힘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도 학교에서 사랑에 대한 것을 배우고 노래도 부르는데 그냥 듣기만 하고 부르기만 한 것 같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장발장이 자베르 경감의 목숨을 살려 주었을 때 나는 정말 감동했다. 나에게 친절히 해 주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은 쉽지만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레미제라블을 읽고―경남 거창 샛별국 5년 김성경/252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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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신 유희정신 - 어린이문학의 길 이오덕의 문학 1
이오덕 지음 / 양철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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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읽는 하루

― 서울을 버리고 숲을 품기



《詩精神과 遊戱精神》

 이오덕

 창작과비평사

 1977.4.25.



  《시정신과 유희정신》(이오덕, 창작과비평사, 1977)이 어렵다고 얘기하는 분이 제법 많습니다. 1977년에 처음 나온 책은 “詩精神과 遊戱精神”처럼 한자로 적었기에, 이 한자를 못 읽느라 선뜻 손이 안 갔다는 분도 많습니다. 그러나 막상 책을 펴면 ‘한자를 드러낸 대목’은 없다시피 합니다.


  이오덕 님은 뒷날 《우리글 바로쓰기》를 펴냈지만, 전두환이 이오덕 님을 어린배움터에서 솎아내며 괴롭히던 때까지 글에 곧잘 한자를 썼습니다. 어린배움터에서 마지막까지 아이 곁에 있지 못 하고 떠나야 하고 나서, 열린배움터(대학교)에서 이태 동안 가르친 적이 있는데, 이무렵 우리나라 젊은이가 글을 너무 못 쓰고 말을 너무 모르는 줄 깨달았다지요. 우리 젊은이가 왜 이토록 말글을 모르는가 하는 뿌리를 파헤치면서 ‘우리말 우리글’부터 제대로 들려주고 배우지 않으면 이 나라가 통째로 썩고 뒤틀리고 흔들릴 수밖에 없겠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1990년 앞뒤로 몹시 바쁘게 하루를 보내었고, 부르는 곳이 있으면 어디라도 이야기꽃을 피우려고 달려가다 보니, 어느새 여린 몸이 더 지치고 말아 끝내 드러눕다가 권정생 님보다 먼저 흙으로 돌아간 이오덕 님입니다. 그동안 써낸 책 가운데 《시정신과 유희정신》만큼은 쉬운 우리말로 고쳐쓰고픈 마음이었지만, 옛글을 고쳐쓰기보다는 새글을 쓰는 일에 더 힘을 쏟느라 《시정신과 유희정신》은 1977년에 나온 판 그대로 남았습니다.


  총칼을 휘두르는 우두머리가 춤추던 1977년 무렵, 이 나라 앞길을 헤아리면서 꿈씨앗처럼 남긴 두 마디인 ‘시정신’하고 ‘유희정신’을 오늘 우리 어린이한테 들려줄 쉬운말로 옮기자면 ‘노래얼’하고 ‘놀이넋’입니다. “시정신과 유희정신 → 노래얼이랑 놀이넋”입니다. 한자말 ‘정신’을 앞뒤에서 다르게 풀었는데, 노래를 부르고 나누는 숨결은 ‘얼’을 차리면서 스스로 ‘알아’가는 길입니다. 놀이를 하고 노느는 숨빛은 ‘넋’을 깨우면서 ‘너나’없이 하나로 가는 살림입니다.


  우리말 ‘노래·놀이’는 말밑이 같습니다. ‘노’는 ‘높다·노을’하고도 맞물리고, ‘노을’을 줄인 ‘놀’은 ‘너울’을 가리키기도 하고, ‘노느다·나누다’로도 잇닿아요. ‘놀·너울’이란 ‘널리’ 뻗는 길이자, ‘너머’로 가는 다릿길입니다. 노래하고 놀이를 하기에 ‘넉넉’히 마음을 가꾸고, 누구하고나 ‘나눌’ 줄 아는 착하고 참한 숨소리로 퍼져요. 높이높이 오르는 노랫가락은 어느새 하늘에 닿아 파랗게 물드는 바람으로 번지고, 이 바람은 휘파람으로 감기고, 바다로 물결치고, 바닥(땅)으로 내려와서 마음밭(마음바탕)을 이룹니다.


  노래하고 놀 줄 알기에, 나비처럼 날개돋이를 하면서 홀가분하게 날아오르는 ‘나’를 만나요. 노래를 잊거나 빼앗긴다면 놀지 못 할 뿐 아니라, 날개가 꺾이고 ‘나’를 잃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어린이가 노래하고 놀지 못 하도록 틀어쥐거나 억누르거나 짓밟으면서 셈겨룸(시험)으로 내모는 오늘날 배움터란, 어린이를 죽이는 수렁입니다. 모든 어린이가 시골에서든 서울에서든 마음껏 노래하고 놀도록 울타리를 걷어내고서 하늘빛으로 어울리는 ‘우리다움’을 찾을 적에 비로소 홀가분(자유)히 나래를 펼 수 있어요.


  《시정신과 유희정신》을 보면, ‘구경(완상玩賞)’이란 무척 무시무시한 짓이라는 대목을 낱낱이 밝힙니다. 구경꾼 어른이 어린이를 꼭두각시로 내모는 짓이 ‘동심천사주의’이고, 이 동심천사주의는 ‘윤석중·박목월·유경환’이 이끌었는데, 어느새 ‘동심천사주의 윤석중·박목월·유경환’ 같은 이들이 어린글밭(아동문학계)을 집어삼켰습니다. ‘구경 아닌 삶짓기’를 글(시·동화)로 담아내어야 어른일 텐데, 막상 우리나라에는 어른스레 글을 여미는 손길이 얕았고, 하나같이 돈(상업주의)에 팔려 ‘구경(완상)’하는 겉치레만 쏟아내었다고 여길 만합니다.


  그나마 《시정신과 유희정신》이 처음 나온 1977년 무렵만 해도 아직 시골에서 살림을 짓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뒤 쉰 해 가까이 흐르는 동안 시골은 아작났습니다. 이제 거의 모두 서울(도시)에서 살고, 서울에서도 잿집(아파트)에서 삽니다. 큰고장에서 골목집 살림을 잇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손바닥만 한 텃밭이나 마당을 누리면서 풀꽃나무를 흙에 묻고 돌보는 손길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어느 풀꽃나무도 꽃그릇을 안 반깁니다. 꽃그릇은 나쁘지 않되, 풀꽃나무한테는 사슬터(감옥)입니다. 그릇 크기를 넘게 자라거나 뻗을 수 없으니, 풀꽃나무로서는 그릇에 심기면 ‘갇혀’ 버리는 꼴입니다.


  우리는 언제쯤 모든 꽃그릇을 걷어치우고서 맨땅에 풀씨랑 꽃씨랑 나무씨를 심을 터전으로 가꾸려나요? 우리는 언제쯤 높다란 잿집을 걷어내고서 누구나 ‘마당·텃밭을 누릴 조촐한 집’을 보금자리로 삼으려나요? 우리는 언제쯤 어린이를 ‘배움터(학교)란 이름인 사슬터(감옥)’에서 풀어놓을 수 있을까요?


  스스로 ‘서울에 갇혀’서 ‘풀꽃나무를 꽃그릇에 가두’는 손길이기에, ‘어린이를 울타리(학교·학원)에 가두어’ 놓고도 ‘가르침(교육)’을 시킨다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맙니다. 둘레를 봐요. 시골에도 서울에도 빈터랑 풀밭이 사라졌습니다. 어린이가 뛰놀거나 쉬거나 깃들 데가 사라졌습니다. 서울에서는 쇳덩이(자동차)가 모든 곳을 차지하고, 시골에서는 죽음물(농약)하고 비닐이 몽땅 뒤덮습니다.


  갇힌 어린이가 할 수 있는 ‘짓’이라고는 고작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는 손전화 빼고 무엇이 있을까요? 뛰놀 수도 쉴 수도 없도록 갑갑한 ‘꽃그릇 수렁(보기좋은 감옥)’에 갇힌 어린이를 알아보지 못 하는 눈길이니, 예나 이제나 숱한 글(동시·동화)은 ‘동심천사주의’에서 못 헤어나옵니다. 이뿐 아니라 ‘사실적 표현’을 한다는 글조차 ‘학교·학원생활 울타리’에서 못 벗어납니다.


  2020년을 넘어선 뒤로는 ‘이웃빛(동물권)’을 담는 글이 하나둘 나오고 배움책(교과서)에도 실린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숲에서 안 살고, 시골을 떠났고, 서울 높다란 잿집에서 쇳덩이를 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웃빛 글(동물권 문학)’을 쓸 수 있을까요? 흙을 밟지도 만지지도 않으면서, 풀꽃나무가 흙에 뿌리를 내리면서 해바람비를 마시는 터전에서 함께 살아가지도 않으면서, 참말 어떻게 ‘이웃숨결을 헤아리는 글’을 쓸 수 있을까요? 모두 겉발린 허울이지 않나요?


  오늘날처럼 온통 잿더미에 먼지투성이로 매캐한 판에서는 ‘그냥그냥 녹색·초록·그린·친환경·자연·생태’를 들먹이는 글이 아닌, ‘수수하게 숲을 품고 스스로 푸르게 하루를 노래하는’ 글을 쓰고 읽고 나눌 노릇입니다. 이제는 글을 쓰려면 서울(도시)을 떠나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어른’이란 이름을 밝히고 싶다면 모든 허울을 떨치고서 쇳덩이(자동차)를 버리고 잿집(아파트)에서 나와야 합니다. 맨몸으로 해바람을 쐬고, 맨손으로 빗물을 받고, 맨발로 풀밭에 서서 우리를 둘러싼 이 별빛을 오롯이 누리고 살림을 짓는 사랑을 일굴 노릇입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마당·텃밭이 있는 조촐한 보금자리’를 어린이랑 오순도순 열 해이고 스무 해이고 서른 해이고 가꾼 뒤에 붓을 들어야지요. ‘농사·농업’이 아닌 ‘여름지이·열매짓기·흙살림·들살이’를 해야지요. 돈바라기에 갇히는 ‘농사·농업’이 아닌 ‘손수 살림을 짓는 숨결로 손수 들숲바다를 맞아들이는 작은길’을 갈 적에라야 붓을 쥐어 글을 쓸 만한 사람인 어른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이오덕 님이 한숨을 쉬면서 나무란 ‘훔침글(표절작가)’ 이야기라든지 ‘겉치레글(위선·허례허식·가식적 문장)’은 우리 스스로 ‘어른 아닌 늙은이’인 몸으로 돈·이름·힘에 얽매였기에 불거집니다. 철이 들면서 어질고 참하고 착하면서 고운 사람이기에 ‘어른’입니다. 나이만 먹고서 나이를 앞세워 그저 윽박지르며 높낮이(위계질서)를 가르기에 ‘늙은이’입니다. 이른바 ‘선생·원로·기성세대’는 모조리 늙은이입니다. 우리가 어린이 곁에 서려면 ‘선생·원로·기성세대’ 같은 고리타분한 허물을 싹 털어내고서 수수하게 ‘어른’ 하나를 돌아볼 줄 아는 눈빛일 노릇입니다.


  《시정신과 유희정신》을 그냥 읽으면 그냥 못 알아봅니다. 《시정신과 유희정신》을 읽고 싶다면, 먼저 서울·쇳덩이·잿집을 버려야 할 뿐 아니라, 종잇조각(졸업장·자격증)도 버려야 하고, 이름값(선생·원로·기성세대)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을 쥐고서 들숲바다 가운데 한 곳으로 가기를 바랍니다. 멧골에 올라도 즐겁습니다. 풀벌레하고 새가 노래하는 곳에서 책을 펼칠 일입니다. 바다가 물결치고 바람이 일렁이는 곳에서 빗물수다를 들으면서 책을 넘길 일입니다.


  집안일을 하던 손으로 읽을 《시정신과 유희정신》입니다. 비질에 걸레질을 하던 손으로, 천기저귀를 갈고 빨래하던 손으로, 아기를 안고 젖을 물리던 손으로, 아이한테 자장자장 노래를 들려주는 눈망울로, 밤마다 별빛을 보고 낮마다 햇빛을 보는 눈짓으로,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달리는 몸으로, 껍데기를 버리고서 이웃이랑 어깨동무하는 매무새로, 천천히 읽고 새기면서 스스로 노래얼이랑 놀이넋을 밝힐 책 한 자락입니다. 같이 노래해요. 함께 놀아요. 나란히 이야기를 펴고, 새롭게 오늘을 써 봐요.


ㅅㄴㄹ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국이나 영국 같은 부유한 나라 사람들보다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큰 집을 지어 살려고 하는가? (9쪽)


아동문학이 아동을 위한 문학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아동의 건전한 성장과 그들의 미래가 밝고 빛나는 세계가 되기를 염원하는 작가의 철학을 기반으로 창조되어야 한다. 따라서 작가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사회적 현실을 양심으로 파악하고 아동의 생활을 정직한 눈으로 보고 거기서 진실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24쪽)


그런 ‘인간적’인 것을 찾아내는 노력, 그런 인간적인 것이 짓밟혀 시들어지는 것을 애통히 여기고 그것을 지키고 키워가는 작업, 이것이 교육이고 문학임을 확인하자. (66쪽)


아동이란 존재를 사회와 역사 속에 살아가고 있는 생명체, 주인공으로서 작가의 온 인생관과 문학관으로 이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작품에 좀더 절실하고 진지한 주제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104쪽)


동심주의 동요가 가져온 해독은 아이들이 참된 시의 세계로 찾아가는 것을 완고하게 방해하고 있는 일뿐만 아니다. 그것은 또 아이들의 정신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13쪽)


우리가 창조하는 아동문학, 그것은 미국의 것도 일본의 것도 중국의 것도 그밖의 어떤 나라의 것도 될 수 없는 바로 우리 한국의 것이다. 한국이란 땅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주는 문학이요, 한국이란 특수한 풍토에서 피어난 문학이다. (136쪽)


아동문학의 간판을 내걸어 놓고는 아동을 멸시하고 아동과 상관없는 글을 쓰는 작가들도 문제지만, 얕은 손재주를 팔고 있는 상업주의의 유행도 문제고, 위선과 호언장담을 유일한 문단 처세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사람도 있어, 이들은 항시 정직한 작가의 발언을 봉쇄하기에 광분하고 이 땅의 아동과 민족의 앞날을 염원하는 양심적 작가들을 해치려고 하고 있다. (163쪽)


그토록 아이들을 사회와 절연된 세계에서 아무 생각 없이 귀엽게만 바라보는 것으로 작품을 쓸 수 있는 시인이 있었던가. (178쪽)


아이들은 철저하게 생활인인 것이고, 생활 속에서만 시를 느끼고 시를 생활하고 있는 것이 아동이다. (224쪽)


결국 동시는 시인의 세계와 아동의 세계가 하나로 일치되는 자리에서 비로소 참되게 씌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226쪽)


신현득의 동시는 사물을 달콤하고 아름답게만 보이려고 하는 순응주의로 하여 그 뜻한 바 교화적 의도조차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물 미화의 작기 방법은 근본적으로 그가 동심주의적 아동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때문이라고 본다. (252쪽)


글짓기 교육을 예술작품 창작교육으로 오해하고 있다. (334쪽)


우리 자신을 찾아 가지는 일이야말로 민족의 역사적 과제요 아동문학의 나아갈 길이다. (351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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