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동화를 어떻게 쓸 것인가
이오덕 지음 / 삼인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오덕 읽는 하루

― 누가 쓰고 누구한테 읽히나



《동화를 어떻게 쓸 것인가》

 이오덕 글

 삼인

 2011.9.16.



  오늘날 우리나라를 보면, 다 다른 모습을 안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훨씬 깊구나 싶습니다. 다 똑같다면 받아들일 까닭이 오히려 없고, 다 다르기에 그야말로 받아들이는 길을 배우게 마련인데, 나랑 조금이라도 다르면 틀어지거나 등돌리기 일쑤입니다. 곳곳에서 ‘다름(다양성)’을 말하면서 가르치기도 하지만, ‘아주 다른’일 적에는 뜻밖에 ‘미움(혐오)’이라 여기면서 내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아주 다른 ‘저놈’을 끌어안고 헤아릴 적에 비로소 ‘너름새(포용)’이지 않을까요? 나랑 비슷하거나 우리랑 닮을 적에는 끌어안거나 헤아린다면, 이런 몸짓이야말로 ‘따돌림(차별)’에 밉질(혐오)로 쏠립니다. 나랑 안 비슷하거나 우리하고 안 닮은 ‘남·놈·이웃’을 수더분하게 바라보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비로소 참답게 너름새입니다.


  누구나 글을 쓰고서 조촐히 꾸러미로 묶을 수 있는 터전이라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몇몇만 글을 쓰거나 번듯하게 꾸러미로 묶는 터전이라면 담벼락이고 사슬터인 갑갑한 굴레라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보면, 이미 우리나라는 너름새 아닌 담벼락인 굴레로 오래 흐른 터라, 누구나 글을 쓰는 길을 열기가 외려 힘들구나 싶습니다. 나라에서도 이런 너름글을 안 반기고, 우리부터 너름글로 좀처럼 안 나아갑니다.


  누구나 마음을 스스럼없이 말로 옮기면서 두런두런 어울리기에 아름다이 보금자리요 마을이요 나라일 테지요. 몇몇만 목소리를 높인다면, 숱한 사람들은 그저 따라가거나 듣기만 해야 한다면, 이러한 곳은 집도 마을도 나라일 수도 없다고 느낍니다.


  우리나라에 처음부터 있지 않던 ‘맞춤길·띄어쓰기’입니다. 이웃나라도 매한가지입니다. 어느 나라 어느 겨레에도 ‘맞춤길·띄어쓰기’는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맞춤길·띄어쓰기’는 바로 ‘몇몇(소수 특권층·권력자)’이 엮어서 굴레처럼 씌우는 길에 나타났습니다.


  오늘날 적잖은 분들이 글을 마음껏 못 쓰거나 책을 신나게 못 내는 까닭이 있어요. 바로 ‘맞춤길·띄어쓰기’가 첫째요, ‘나 같은 사람 삶이 무슨 글이나 책이 될 만한가?’ 하고 스스로 깎아내리고 맙니다. 이러면서 글보람(문학상)을 받은 책이 있으면 덥석덥석 사들이는 물결입니다. ‘오직 글빛’을 보려는 눈이 아니라, ‘글보람이라는 허울’에 따라서 휩쓸리는 나라입니다.


  글읽기 없는 글쓰기란 없습니다. 이웃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먼저 귀담아듣지 않는 사람은 제대로 ‘말하기’를 못 하거나 혼자 큰소리로 떠들면서 둘레 모든 사람이 입을 다무는 굴레로 치닫기 일쑤입니다. 이른바 잘난책(베스트셀러)을 쓰는 분을 보면 ‘글읽기·책읽기·이웃소리 듣기’를 아주 못 하거나 아주 조금 하거나 아예 안 한다고 느낍니다. ‘아름책(평생 곁에 둘 책)’을 쓰는 분을 보면 이분이 글이나 책을 바지런히 내놓더라도 언제나 ‘글읽기·책읽기·이웃소리 듣기’가 밑바탕이게 마련입니다.


  2011년에 나온 《동화를 어떻게 쓸 것인가》는 이오덕 님이 1980년 언저리에 쓴 글을 모읍니다. 이오덕 님은 이 꾸러미를 1980∼90년 무렵에는 책으로 내놓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온나라에 들너울이 몰아치던 1980∼2000년이기도 했고, 이럭저럭 들너울이 자리를 잡던 2000년 즈음부터는 몹시 몸앓이를 하느라, 그만 꾸러미를 제때 선보이지 못 했습니다.


  《동화를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책은 ‘동화’라는 이름을 굳이 붙여야 글이 되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자꾸 ‘문학·소설·동화·동시·시’ 같은 허울에 매달리려고 하는구나 싶기에 짬짬이 쓴 글을 모았다고 할 만합니다. 이오덕 님은 ‘동화’가 아닌 ‘글’을 쓰자는 길을 말씀합니다. ‘문학’이 아닌 ‘삶글·살림글’을 쓰자고 말씀하지요.


  어린이는 어른으로 자라고, 어른은 어린이를 낳습니다. 어린이는 어른으로 크는 길을 걷고, 어른은 새로 빚는 어린이 목숨을 늘 몸속에 건사합니다.


  어른이 되면서 어린이였던 나날을 잊는 사람이 많은데, 참말 뼛속까지 몽땅 잊는 사람이 많은데,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스스로 아름다이 살아갈 길을 찾으려고 마음을 바치고 땀을 흘릴 수 있다면, 언제라도 어린이 넋을 되찾으면서 사람다운 꿈을 길어올릴 수 있으리라 봅니다.


  아이들을 바라보며 노상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신나게 놀거나 심부름을 하거나 잠드는 모습은 아이들이 저희 어버이 두 사람한테서 물려받은 사랑씨라고 느껴요. 이와 함께, 아이들이 미운짓을 한다거나 소리만 꽥꽥 지르면서 뒷북놀이를 한다면, 이때에도 이 슬프거나 못난 매무새란 저희 어버이 두 사람한테서 이어받은 아픔이나 생채기라고 느껴요.


  착한 넋으로 사랑스레 살아가는 어버이일 적에는 착한 넋으로 사랑스레 살아가는 아이들이에요. 샘내는 몸짓으로 안쓰러이 살아가는 어버이일 적에는 샘내는 몸부림으로 안쓰러이 살아가는 아이들이고요. 어버이는 어버이 스스로 즐거우면서 아름다울 길을 찾을 일입니다. 어버이인 나부터 즐거울 적에 우리 아이들도 즐겁습니다. 아이들만 곱게 자랄 수 없어요. 아이들만 숱한 배움터를 다니며 똑똑할 수 없어요. 아이들만 서울로 나아가서 일꾼(회사원)이 되어 돈을 많이 벌며 ‘잘살’ 수 없어요. 어버이와 아이가 나란히 잘살 노릇입니다. 어버이와 아이가 함께 배우며 살림할 일입니다. 어버이와 아이가 다함께 곱게 살아야지요. 어버이와 아이가 서로서로 사랑을 나누며 이야기꽃을 펼 하루입니다.


  저는 우리 어버이한테서 이원수나 권태응이나 권정생이나 임길택이나 현덕을 듣지도 배우지도 못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어린배움터 길잡이였는데도 집에서 글(동시·동화)을 읽어 준 적도, 동시집이나 동화책을 챙겨 준 일마저 없습니다. 어린배움터 길잡이였던 우리 아버지는 날마다 밤늦도록 술을 퍼마시고서 고주망태짓을 실컷 했을 뿐입니다.


  어릴 적에는 도무지 읽을 겨를도 책도 없었으나, 싸움터(군대)를 다녀온 1998년부터 스물서넛 언저리 나이에 비로소 스스로 글(동시·동화)을 혼자 찾아보고 찾아읽는 하루였습니다. ‘집안에 책이 없으’니 ‘집밖서 책을 찾을 수 있던’ 셈이라 할 만하지요. 집안에 책이 없으니 그저 안 읽고서 살 수 있고, 고주망태로 시끄러운 우리 아버지 술버릇을 그대로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만, 이 모두 받아들일 마음이 터럭만큼도 없었습니다.


  서른 살에도 마흔 살에도 쉰 살에도 꾸준히 글(동시·동화)을 읽습니다. 이제는 글(동시·동화)을 쓰기도 합니다. 마음을 살찌울 글을 바랐기에 집밖에서 오래오래 길을 찾아나섰다면, 스스로 어버이란 자리에 서서 두 아이를 곁님하고 낳아서 살림하는 동안에는 ‘내가 스스로 되읽’을 글에다가 ‘우리 아이들이 물려받을 글’은 바로 어버이가 몸소 쓸 노릇이라고 깨닫습니다. 온누리 모든 어버이는 아이한테 이야기를 남겨주어야 참하고 어질고 착합니다. 온누리 모든 엄마아빠는 아이 곁에서 하루를 노래하는 이야기를 말이나 글로 물려주면서 아름답고 슬기롭고 즐겁습니다.


  두 아이를 곁님과 함께 낳고 살아가면서 언제나 찬찬히 돌아봅니다. 이 아이들 나이 즈음에 나는 우리 어버이하고 어디에서 어떻게 지냈을까 하고 곰곰이 되새깁니다. 나는 다섯 살이던 1980년에 뭘 했는지 떠올리고, 열 살이던 1985년에 무엇을 보았는지 되새기고, 열다섯 살이던 1990년에 어떤 마을에서 지냈는지 곱씹습니다.


  그저 곰곰이 되짚습니다. 도무지 안 떠오르든 환하게 생각나든, 그동안 걸어온 길과 오늘 걸어가는 길을 맞물립니다. 지난날 어리석거나 어설픈 대목을 뉘우치면서, 오늘 이곳에서 새롭게 심고 가꿀 꿈씨앗과 살림씨앗을 그립니다.


  어버이란, 늘 아이 곁에 있는 동무이자 이웃입니다. 아이란, 언제나 어버이 곁에서 노래하는 이웃이자 동무입니다. 둘은 사근사근 어울리면서 어깨동무합니다. 처음부터 어른인 사람은 없고, 나이가 들어도 어른이 아닌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낳은 아이를 돌보건, 이웃집 아이를 헤아리건, 한결같이 아이 곁에서 하늘빛으로 꿈을 그리면서 하루를 일구는 손길과 몸짓일 적에 천천히 어른으로 자라는 셈이라고 느낍니다.


  어버이인 내가 먹고 싶은 밥을 아이도 먹고 싶습니다. 어버이인 내가 즐겁게 차려서 맛나게 먹는 밥을 아이도 맛나게 먹어요. 어버이인 나부터 아이하고 곁님한테 곱게 가다듬은 빛나는 말씨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아이도 나와 곁님한테 곱게 가다듬은 빛나는 말결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지만, 이보다는 ‘흐르는 사랑’이로구나 싶습니다. 나한테서 아이한테 흐르는 사랑이 있고, 아이한테서 나한테 흐르는 사랑이 있어요. 나한테서 곁님한테 흐르는 사랑처럼, 곁님한테서 나한테 흐르는 사랑이 있습니다.


  착하고 참한 길을 반가이 맞아들이면, 어버이요 어른인 나부터 기쁜 나날을 누립니다. 착하고 참한 길을 반가이 맞아들이는 어버이요 어른하고 함께 살아가는 아이라면, 이 아이는 하루하루 씩씩하게 착하고 참한 길을 반가이 맞아들이면서 어여삐 자랄 수 있어요. 어버이 스스로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아이들 삶이 달라요. 이름나다는 배움터나 훌륭하다는 책만 붙잡는들, 아이들 삶이 나아가거나 자라지 않아요. 아이들은 배움터에 넣으면 안 돼요. 아이들은 어버이가 살아가는 곳에서 함께 살고 살림하면서 저마다 스스로 사랑꽃을 피울 수 있으면 돼요.


  아이에 앞서 어른부터 아름답고 푸르디푸른 숲을 품으면서 흙을 사랑하는 나날을 일구는 터전이면 넉넉합니다. ‘학교’란 이름에 매일 까닭이 없습니다. ‘동화’나 ‘문학’이나 ‘작가’라는 이름에 붙잡힐 까닭이 없습니다.


  어른부터 일찌감치 쳇바퀴를 떠나야 합니다. 아이를 살리고 어른 스스로 살아나고 싶다면 시골에서도 쳇바퀴를 붙잡으면 안 됩니다. 아이를 살리는 길이란 누구보다 어버이요 어른인 나부터 살리는 길입니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 살아나면서 어깨동무할 꿈누리를 이루는 길을 걸어가야 사랑과 꿈을 이룹니다. 맨발로 흙을 디뎌야 합니다. 맨손으로 흙을 만져야 합니다. 흙에서 태어나는 아름다운 목숨인 이 삶을 깨닫고, 흙으로 돌아가는 아리따운 목숨을 알아차려야지요.


  가을바람이 잠들면서 겨울바람이 다가옵니다. 가을햇볕이 내리쬐니 이윽고 가을걷이를 마치고, 어느새 겨울햇볕이 찾아옵니다. 해는 봄부터 겨울까지 골고루 내리쬡니다. 철마다 다르게 흐르는 빛과 볕과 살을 읽기에, 천천히 철들면서 찬찬히 차오르는 참눈을 틔웁니다.


  《동화를 어떻게 쓸 것인가》는 어떤 책일까요. 이오덕 님은 속삭입니다. ‘동화를 쓰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무엇보다 ‘사랑’을 해야 한다고 밝힙니다. 어린이를 사랑해야 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어른인 나부터 스스로 사랑해야 한다고 밝힙니다. 사랑이 없이는 아무런 글을 펼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랑이 없을 적에는 어떠한 일도 일굴 수 없다고 밝힙니다. 또한, 글만이 아니라 나라(정치·사회·교육·노동·환경)도 늘 사랑으로 마주할 노릇이라고 밝힙니다. 잔재주나 이름값이나 바깥힘이나 돈으로는 어느 길도 어질게 펼 수 없다고 밝혀요.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무엇을 가르칠까요. 사랑이 없는 나라에서는 무슨 길이 나올까요. 사랑이 없는 가게에서는 무엇을 장만할까요. 사랑이 없는 새뜸(신문·방송)에는 어떤 이야기를 실을까요.


  오늘날 숱한 글바치는 그야말로 ‘글로 글을 쓰’고 ‘지식으로 지식을 다룹’니다. 글로 쓰는 글은 무슨 보람인지 아리송합니다. 지식으로 지식을 다룰 적에는 누구한테 이바지하는지 알쏭합니다.


  ‘글로 쓰는 글’이나 ‘지식으로 다루는 지식’에는 사랑이 없어요. 따뜻하지 않아요. 너그럽지 않을 뿐 아니라, 꿈조차 없어요. 저는 이 삶에서 부스러기(지식)를 쌓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밭에 글조각을 채우고 싶지 않아요. 이 삶을 알차게 일굴 나무 한 그루가 사랑스러워요. 이 삶을 알뜰히 보듬을 풀 한 포기가 반가워요.


  제가 어릴 적에는 이름조차 모르고 읽지도 못하던 이원수·권태응·권정생·현덕·임길택 같은 분이 남긴 글을 차근차근 읽습니다. 다 읽고 나서 다시 읽습니다. 또 읽고서 거듭 읽습니다. 아이들을 무릎에 앉혀서 읽히다가, 아이들이 스스로 소리내어 읽습니다.


  ‘동화’는 어른이 써서 어린이한테 읽힙니다. 그런데, 어린이는 동화책이든 동시책이든 스스로 돈을 치러서 장만하지 못해요. 어린이가 읽는 동화책이나 동시책은 모두 어른이 책집에서 사서 내밀어야 합니다. 짐(독후감 숙제)으로 읽히는 동화책이든, 마음밥으로 살찌우는 이야기꾸러미이든, 한결같이 어른이 사들인 다음에 어린이가 읽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동화’란 어른이 써서 어른이 읽는 글입니다. 어른이 써서 어른이 읽은 다음에, 찬찬히 거르거나 가리거나 솎아서, 우리 아이한테 조금씩 베푸는 이야기라고 할 만합니다. 어린이와 살아가는 어른이 온사랑을 기울여 쓴 글(동화·동시)을 어린이와 살아가는 또다른 어른이 온사랑을 기울여 알뜰살뜰 읽은 다음에, 온사랑을 기울여 보살피는 우리 아이한테 글을 읽혀야 아름답습니다.


  동화가 이러하다면, ‘동화 비평’이나 ‘동시 비평’은 어떻게 해야 하는 일일까요. 동화나 동시 모두 사랑으로 쓰고 사랑으로 읽는다면, 동화와 동시를 비평하는 글은 어떻게 써야 참답게 비평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할까요.


  오직 하나일 테지요. 글쓰기도 사랑으로 이루고, 글읽기도 사랑으로 이룹니다. 글나눔이든 글꽃이든 모두 사랑으로 이룹니다. 우리 삶도 사랑이며, 우리 아이들 삶도 사랑입니다. 이웃과 동무 모두 사랑이에요. 풀꽃나무와 벌레와 짐승 모두 사랑입니다. 구름과 바람과 들판과 바다와 멧자락 모두 사랑이에요. 사랑이 없이 쓴다면 쭉정이입니다. 사랑을 잊은 채 쓰고 읽는다면 허수아비입니다. 사랑을 등지거나 속이면서 쓰고 읽는다면 꼭두각시입니다. 사랑을 모르거나 안 배우면서 쓰고 읽는다면 얼뜨기입니다.


  많이 읽기에 많이 쓰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읽고서 사랑으로 삭이기에 사랑으로 씁니다. 사랑으로 듣고서 사랑으로 풀기에 사랑으로 짓습니다. 우리는 으레 “저 사람 참 글 많이 쓰네!” 하고 여기기도 하는데, 많이 쓰든 적게 쓰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무엇’을 쓰는지 볼 노릇이고, ‘어떻게’ 쓰는지 살필 일입니다. 사랑이 없는 채 ‘조금’ 쓰면서 잘난책을 내놓는다면, 하나도 안 아름답습니다. 언제나 사랑으로 피어나면서 기쁘게 아름책으로 여민다면, 이렇게 태어나는 책은 한 해에 100자락이더라도 ‘안 많’습니다. 아름답게 사랑으로 일구는 책은 한 해에 100자락이더라도 거꾸로 ‘적다’고 느낄 만합니다.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책을?’ 하고 여기면 이미 스스로 갉고 할퀴고 깎는 바람에 스스로 아프고 스스로 무너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주고받는 마음이라면, 우리가 함께 나눌 말이라면, 바로 ‘가장 작고 낮고 수수하고 흔한 오늘 이야기’일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나처럼 작은사람’이니까 글을 쓸 노릇이고, ‘나처럼 작은일’이니까 책으로 묶을 일입니다.


  마음에 그리는 꿈을 담은 ‘하루(일상·생활)’를 손수 일구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이야기이기에 ‘오늘(역사·문화)’을 이룹니다. 굳이 어렵거나 일본스런 말씨인 ‘일상·생활·역사·문화’라는 낱말을 안 써도 됩니다. 그저 우리가 여느 자리에서 여느 사람으로서 주고받는 ‘하루·오늘’이라는 낱말로 나를 나타내고 너를 맞이하면서 이야기하면 넉넉합니다. “하루를 돌아보며 오늘을 이야기하는 글”이라면 누구나 쓸 만하고, 하나하나 아름답게 마련이라고 느낍니다.


  꾸미려고 하기에 맞춤길에 따라야 합니다. 번듯하게 치레하려 하기에 띄어쓰기를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글이란, 모름지기 말입니다. 말을 옮기기에 글입니다. 말이란, 언제나 마음입니다. 마음을 소리로 담아서 나누려 하니 말입니다.


  이 얼거리를 읽어낼 수 있다면, 다 다른 사람은 늘 다 다르게 ‘사투리’를 하면서 마음을 나누는 하루인 줄 알아봅니다. 우리는 ‘우리말(나로서 너로서 우리로서 하는 말)’을 하면 됩니다. 내가 하는 ‘우리말’이란, 내가 내 삶터에서 스스로 삶을 짓듯 스스로 마음을 지으면서 스스로 말로 그리는 ‘사투리(나답게 사람답게 사랑으로서 나누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저 즐겁게 쓰고 읽어 보셔요. 그러니까 그냥 그대로 쓰고 읽어 보서요. 그저 그대로 쓰고 읽으면서 그냥 그대로 담는 글이기에 빛난다고 느낍니다.


+


《동화를 어떻게 쓸 것인가》(이오덕, 삼인, 2011)


요즘은 어린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이 없다. 어머니고 할머니고 아버지고 텔레비전을 들여다보면서 벙어리가 되었고,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보는 텔레비전을 함께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11쪽)


동화문학이란 것을 좀더 자세히 말하면,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참모습을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는 이야기로 쓰는 글”이다. 또는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어린이들이 알 수 있는 이야기로 쓰는 글”이다. (17쪽)


인간으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야 동화를 쓸 수 있다 … 인간과 사회에 대한 성실성, 어린이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있으면 되는 것이다 … 참으로 어린이를 사랑하고 그들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만이 동화작가가 될 수 있다. (20쪽) 


우리 모두가 참되게 살아가기 위한 더욱 높은 자리에 서서 나날의 일들을 바라보게 된다면 그 나날의 일들이 결코 평범한 이야기로 처리될 수 없을 것이다. (25쪽)


이 생각(주제)을 그대로 바로 쓰면 설교가 되고 논문이 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 속에서 감동으로 느껴지도록 쓰면 소설이 되고 동화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주제는 이야기 속에,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사람의 행동과 말과 사건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가 있어서 독자들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는 동안에 자신도 모르게 그 생각에 따르고 공감하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주제는 지은이의 인격을 보이는 것이라 하겠으니 훌륭한 삶의 태도와 인생관,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라야 훌륭한 동화를 쓸 수 있는 것이다. (28쪽)


동화를 어린애들에게 주는 장난감이나 과자 같은 것 정도로 보아 온 작가들에게는 어려운 것이 당연하지만, 어린이와 겨레가 살아가는 문제를 진정으로 생각하고 있는 부모나 교사들이라면 철학이 있어야 동화를 쓸 수 있다는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29쪽)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들에게 바르고 아름다운 우리 말을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무리 그 뜻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33쪽)


문장이 어려운 것은 그 뜻이 깊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내용은 아무것도 아닌데 글이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36쪽)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벌써 오래 전에 민간설화를 모아 정리하는 일을 끝내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저마다 자기 나라의 풍토에 맞는 아동문학을 창조해 왔으며, 2차 대전 이후에는 아프리카·동남아의 여러 약소국가들도 모두 설화를 수집·정리·보존하는 일에 힘을 기울여 왔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도 사회에서는 거의 내버려둔 상태다. (59∼60쪽)


민중을 멸시하고 민족을 열등시하는 처지에 서 있는 사람은 민중의 전통을 멸시하고 옛이야기를 열등시할 것이 당연하다. 민중을 높이 보고 민족에 애정을 갖는 사람만이 민중들의 느낌과 말을 사랑하고 그들이 남긴 이야기를 속속들이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66쪽)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의 문화유산을 아끼고 가꾸려는 태도는 대단하며, 아이들도 그렇게 풍부하게 기록된 옛이야기를 즐겨 읽으면서 자라고 있다. (67쪽)


이렇게 옷을 깁고 신을 삼으면서 아이들에게 들려주던 것이 옛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러니 이야기가 전수되던 자리는 온 식구가 모여 앉아 일을 하는 자리, 생산을 하는 자리였다는 것, 이야기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창조하는 사람과 받아 누리는 사람, 어른과 아이가 온전히 하나로 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민중성의 본질을 이해해야 되는 것이다. (75쪽)


이러한 민중들의 소망과 지혜가 담긴 교훈성이 있기에 옛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문학으로서 살아 있는 것이다. (79쪽)


어린이들은 어른들(더구나 글을 쓰는 사람들)같이 사색에 잠기거나 추상된 이론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직감으로 진리를 깨닫는다. 삶 속에 움직인다. 공상도 어디까지나 현실에서 출발한다. (80∼81쪽)


저들을 잡아먹으러 올라오는 호랑이에게 도리어 올라오는 수를 가르쳐 주는 아이들이기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고, 기적이 기적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마음, 아이들의 말은 하늘과 땅의 모든 목숨에 가 닿는다. 하느님이 아이들의 소원을 어찌 모르겠는가. (131쪽)


농과대학을 나와도 농사지을 줄 모르고, 대학을 나와도 취직할 데가 없어 빈둥거리면서 놀고, 그러다가 그제야 무슨 기술을 배운다고 전문대학에 다시 입학하는 꼴로 되어 있는 것이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153쪽)


그토록 알뜰히 배우고 널리 익혔지만, 정작 가장 중요하고, 그 모든 배움의 알맹이가 되고 밑바탕이 되는 것은 못 배웠다. 그것이 무엇인가? 사람의 목숨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기르고 가꾸고 해서 그것을 장만하는 일이다. (159쪽)


아이들의 놀이 속에는 교육, 문학, 철학, 정교, 그밖에 우리 어른들이 쌓아 놓은 모든 고귀한 것들의 알맹이가 되고 바탕이 되는 것, 근원이 되는 것이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195쪽)


놀이가 없는 공부는 참 공부가 될 수 없다 … 사람은 누구든지 놀이로 된 어린아이들의 삶을 그대로 연장해서 죽을 때까지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196쪽)


어른들이 아이들을 억압해서 자라나는 것을 방해하거나 비뚤어지게 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아이들이 자연스럽고 평화스러운 자리에서 놀게만 한다면, 이 아이들은 지금까지 어른들이 상상도 못했던 참으로 놀랍고 훌륭한 공부를 스스로 즐기면서 하게 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200쪽)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살고 있는 아이들은 모두가 시인이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친다고, 문학교육을 한다고 아이들을 방 안에 가두어 놓고 죽은 글만을 읽게 하고 외우게 하는 것이 오늘날의 교육이다. 이래서 아이들과 교육은 교과서에 올려놓은 그 죽은 글과 함께 죽어 가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자연은 그 모든 것이다. 자연을 잃은 아이들은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자연을 빼앗긴 아이들은 모든 것을 빼앗긴 것이다. 아이들에게 자연은 언제나 포근하게 안아 주는 어머니가 된다. (207쪽)


일제시대에 쓴 작품, 더구나 아동문학 작품에서는 이런 잘못 쓴 말을 그대로 두지 말고 마땅히 우리 말로 고쳐서 읽도록 하는 것이 옳고, 그렇게 해야 작품을 써서 남긴 분의 뜻도 바로 이어 주는 일이 된다고 본다. (275쪽)


잘못된 공부라는 짐에 짓눌려 그 몸과 마음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아이들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곧 아이들에게 삶을 어떻게 돌려줄 수 있겠는가? (307쪽)


거의 모든 동요시인들이 겨레의 삶과 아이들의 현실을 등지고 방 안에서 읽은 글 속에 갇혀 머리로 고운 말만 꾸며 만들어 내어서 아이들에게 읽히고 노래 부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어린이들의 참된 삶과 노래의 전통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되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다행히 아이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서 그들의 눈이 되고 귀가 되고 입이 되어 준 동요시인이 있었다. 권태응과 이원수 두 사람이다. (318쪽)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오덕 읽는 하루

― 가르치려면 배운다



《어린이 시》

 요시다 미즈호 글

 이오덕 옮김

 온누리

 1984.1.20.



  하루아침에 글을 잘 쓰는 아이나 어른은 없을 만하지만, 따로 틀을 세우지 않으면 처음 붓을 쥐는 자리부터 눈을 밝히면서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낸다고 느낍니다. 길잡이로 서는 어른으로서 “우리가 보내는 하루를 그대로 쓰면 됩니다” 하고 들려줄 수 있다면, 아이도 어른도 눈물과 웃음을 스스럼없이 밝히면 되는 줄 받아들인다면, 잔소리도 큰소리도 목소리도 노랫소리도 그저 즐거이 담으면 넉넉한 줄 알아차릴 수 있으면, 모든 글은 바로 내가 되읽고 새로읽을 밑글이라는 대목을 마주한다면, 길든 짧든 빛나는 글 한 자락을 쓴다고 느낍니다. 따로 보람(성과·결과)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쓰는 글이 아닙니다. 언제나 스스로 곁에 두면서 마음을 돌아보고 되새기면서 기운을 내는 밑동을 이루는 글이라고 봅니다.


  저마다 누리고 짓고 그리고 가꾸고 일구면서 나누는 삶을 그리기에 틀(표준)을 잡을 수 없는 글입니다. 글뿐 아니라 말도 억지로 틀(표준)을 잡을 수 없어요. 살아가는 하루도, 살림짓는 보금자리도, 사랑하는 사람도, 따로 낫거나 나쁜 틀(표준)을 못 세웁니다. 모든 사람이 다 다르게 타고나는 몸이듯, 아이어른 누구나 다 다르게 하루를 살아가면서 스스럼없이 쓰는 ‘삶글’입니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빚는 꿈그림을 바라보면서 손수 여민 살림살이를 그저 수수하게 쓰는 ‘살림글’입니다. 밉거나 싫거나 좋다는 틀이 아니라, 스스로 샘솟거나 우러나오는 포근하면서 밝은 햇빛과 별빛과 같은 사랑을 티없이 쓰는 ‘사랑글’입니다.


  책을 널리 읽기에 눈이 넓지 않다고 느낍니다. 종이로 묶은 책만이 아니라, 바람과 하늘이라는 책이 있어요. 바다와 샘과 냇물이라는 책이 있어요. 멧새와 들새와 바닷새와 철새와 텃새라는 책이 있어요. 온갖 풀벌레라는 책이 있고, 벌나비와 개미와 지렁이라는 책이 있어요. 연구소라는 곳에 깃들면서 딱정벌레를 오래오래 지켜본 바를 담아서 묶어야 ‘곤충도감·곤충학 논문’이지 않듯, 아이 눈으로 딱정벌레를 두고두고 살펴본 바를 담아도 알뜰살뜰 빛나는 ‘벌레이야기’를 이루게 마련입니다. ‘오늘’과 ‘하루’라는 책을 읽으면서 담아낼 수 있고, 서로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눈빛을 읽으면서 담아낼 수 있는 글이라고 봅니다.


  노래하면서 놀이하는 아이 곁에서, 노래하면서 살림하는 어른으로 선다면, 서로서로 늘 즐겁게 빛나는 말 한 마디를 주고받으면서 이야기가 자랍니다. 이 이야기를 문득 옮기니 글일 테지요. 겨울 한복판이나 끝자락에도, 새봄 첫머리나 한복판에도, 우리를 둘러싼 푸른바람을 나란히 그리는 이야기를 누릴 수 있기를 바라요.


  모든 글은 저마다 마음꽃일 테니까요. 모든 말은 스스로 생각씨앗일 테니까요. 모든 이야기는 서로서로 사랑길을 테고요.


  《어린이 시》(요시다 미즈호/이오덕 옮김, 온누리, 1984)는 1967년 6월에 처음 옮긴 꾸러미입니다. 1983년 10월에 이 묵은 꾸러미를 추슬러서 처음으로 바깥에 선보입니다. 이오덕 님 스스로 쓴 책이 있되 애써 이웃나라 책을 옮겼습니다. 옮긴 책 앞자락에 밝히듯이 ‘우리가 널리 배울 길’이 있기에 옮깁니다. 이오덕 님은 2001년에 《한 사람의 목숨》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어린이와 푸름이가 쓴 노래(시)를 조촐히 옮겨서 선보인 적이 있습니다. 다만 여느 새책집에는 안 넣었습니다.


  《어린이 시》를 애써 옮기셨는데 이 책을 알아보거나 살핀 손길은 매우 드물다고 느낍니다. ‘한국글쓰기연구회’ 길잡이도 이런 책이 나온 줄 까맣게 모르거나, 나온 줄 더러 알았어도 안 읽었다고 느낍니다. 전두환 등쌀에 시달린 탓도 있고, 들너울을 일으키는 데에 뜻을 두기도 했다지만, 막상 어린이 곁에 서려고 하지 않은 탓에 모르거나 안 읽었다고 느낍니다.


  누가 어린이 곁에 있었을까요? 우리는 1987년에 드디어 우두머리를 끌어내렸습니다만, 그때 어린이 곁을 지키면서 어린이가 하루하루 새롭게 익히고 가꿀 살림살이를 이끌거나 가르친 어른은 누구였을까요? 지난날도 오늘날도 매한가지입니다. 아이들이 ‘손전화’에 지나치게 파묻힌다고 핀잔에 꾸지람을 하지만, 정작 아이들 곁에서 함께 일하고 살림하고 노래하면서 보금자리를 일구는 어른이 너무 드뭅니다. 아이들을 그만 나무라고서 아이들 곁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이들 핑계는 접고서 집안일과 집살림부터 찬찬히 돌보고 마을일과 마을살림을 바라보는 매무새를 일구는 작은걸음부터 내딛을 하루를 열어야 하지 않을까요?


  서로 손을 잡거나 어깨를 겯으면서 함께 나아가려는 길을 일본 한자말로 ‘연대(連帶)’라 하고, 길을 나란히 걷는 사람을 반길 적에 일본 한자말로 ‘환대(歡待)’라 하더군요. 아직까지 일본 한자말을 그냥그냥 쓰기에 나쁠 일이 없지만, 손을 맞잡을 적에는 어린이도 알아듣도록 ‘손잡기’라는 우리말을 할 수 있고, 어깨를 겯을 적에는 어린이도 나란하도록 ‘어깨동무’라는 우리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함께 나아가니 ‘함께걷기’이고, 같이 걸어가니 ‘같이걷기’입니다. 너와 나를 아우르려고 하기에 ‘나란히’라 하지요.


  밝게 웃으면서 맞이한다는 뜻으로 ‘반기다·반갑다’ 같은 우리말이 있습니다. 한결 품을 넓히면서 손을 잡거나 어깨동무를 하려는 길이라면 ‘나눔’을 바라볼 만합니다. ‘나눔’이라는 우리말을 멀리하면서 ‘분배·배분·공유·할당·부조·노블리스 오블리제·공존·안배·평등·자선’이나 ‘커머닝(commoning)’ 같은 바깥말에서 맴돈다면, 우리는 여태 손잡기나 어깨동무나 반가운 마음하고는 멀다는 뜻이라고 느낍니다.


  남(그들)하고 맞붙어서 이긴다거나, 남(저놈)하고 싸워서 꺾으려는 뜻이라면, 아무래도 손잡기나 어깨동무나 나눔하고는 멀구나 싶어요. 어느 누구도 이기거나 지지 않는 길이어야 비로소 ‘손잡기·어깨동무·나눔’이라고 느낍니다. 아이들은 뜻이 달라도 같이 놀아 왔고, 다른 마음이나 몸이어도 깍두기로 여겨 언제나 얼싸안았는데, 이제 아이들 사이에서도 손잡기가 잊히고 어른들 사이에서도 어깨동무가 매우 흐리다고 느낍니다.


  참다우면서 착하고 아름다이 빛나는 어깨동무와 나눔이라면, “품 넓히기(연대 확장)”란 무엇인지 다시 짚을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끼리끼리 갈라서 붙으려는 굴레가 아닌, 너나없이 자라는 들풀과 나무가 어울리는 ‘숲’을 바라보고서 배우는 길이 “품 넓히기”일 텐데 싶습니다.


  어쩐지 우리는 스스로 어린이였던 나날을 너무 쉽게 잊는 듯합니다. 어른이란 몸을 입은 뒤에는 어린이와 손을 잡거나 어깨를 겯을 뿐 아니라, 이웃하고 나란히 걸어가는 길도 그만 잊는 듯합니다.


ㅍㄹㄴ


앞의 생각은,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민간 교육운동으로서의 글짓기 교육의 성과가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 때문이겠고, 뒤의 생각은, 수난의 역사만을 거듭한 우리 민족에 비해, 그래도 그들은 매우 행복한 자리에 놓여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는 어린이들의 시에서 가장 솔직한 모양으로 그 나라 그 민족의 생활과 호흡을 느낄 수 있읍니다. 그러니 우리의 어린이들의 시에 우리의 역사적힌 현실이 솔직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과, 참된 시 교육을 하여 우리의 어린이들을 불행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린이를 구하는 것이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 아닙니까? 요시다 씨가 서문에서 말한 것같이 시 교육은 “언어로서 세계를 창조해 나가는 일”임을 우리 모두 명심해야겠읍니다. (5쪽)


일본 어린이의 시는 동요→아동자유시→생활시→생활행동시, 이렇게 발전해 왔읍니다. 그리고 생활시 이후의 시 지도는 생활적이고 사회적인 가치가 있는 제재를 찾도록 장려하여, 거의 40년 동안 그 방향이 변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토대 위에 올라서서 여러 가지 개성이 나타나는 작품 지도를 주장하는 요시다 씨로서는 마땅히 할 만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통도 아무것도 없고, 더구나 사회 형편이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아주 다른 우리나라에서는, 이 요시다 씨의 방법을 그만한 자리에서 그만한 거리를 두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더구나 우리나라에서는 10여년 전부터 작문 교육이라면 시고 산문이고 그저 덮어놓고 어린애들의 귀여운 재롱만을 흉내내게 하는 우스꽝스러운 교육이 성행하여 왔으니, (5∼6쪽)


교육이란 것이 허울좋은 상품이 아니고, ‘관리’하는 것도 아니고, 뒤숭숭한 푸닥거리는 물론 아니고, 진실로 그것이 과학이라면, 우리는 동서고금()의 모든 인간의 땀과 결정을 받아들이기에 인색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참된 시 교육의 기운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6쪽)


+


후지산은 / 한 번 폭발했다. / 우리들같이 / 불의 심장이 있다. / 선생님과 동무들은 / 이렇게 말한다. / “후지산은 이제 죽었다.” / 한다. / 그러나 나는 / 후지산은 / 살아 있다고 / 믿고 있다. (20쪽/사하꾸 후시꼬. 도꾜 2년 여)


순자야, / “바다에 안 빠지게 조심해!” / “아버지, 어머니 말 잘 듣고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해!” / “빨리 한국말 배워라!” / “1학년 2반 동무들 잊지 말고!” / “이따금 편지 보내 줘!” / 모두 / 차례 차례 말했다. / 순자는 / 기차 창문에서 눈물을 흘리며 / 꾸벅, 인사를 했다. / 찌리링……하고 벨이 울린다. / “잘 가거라!” / “잘 가!” 하고 / 모두들 달렸다. / 순자 아버지도 / 모자를 벗고 인사했다. / 칙 칙 칙 / 커덩 커덩, 하고 / 기차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 결국 가 버렸다. (49쪽/나구이 이찌로오. 아오모리 1년 남)


길을 간다. / 좋은 꽃 냄새가 난다. / 머리를 들면 / 높다란 오동나무 꽃이다. / 저녁해에 물들어 / 자주빛으로 향기를 풍기고 있다. / 벌들이 꽃가루를 온 배에다 묻히고 / 꽃 속에 뛰어들어갔다가 / 나왔다가 한다. / 오동꽃은 마치 / 어머니처럼 / 말 없이 꿀을 먹이고 있다. (101쪽/오까모도 마스모리. 오까야마현 5년 남)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하는 아이들 - 아이들 시 모음, 새로 고침판 이오덕의 글쓰기 교육 7
이오덕 엮음 / 양철북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오덕 읽는 하루

― 사랑으로 말하고 쓴다



《일하는 아이들》

 이오덕 엮음

 청년사

 1978.2.15.



  글이란 언제나 그림입니다. ‘글’이라는 낱말은 ‘그리다’에서 비롯했습니다. 모름지기 ‘글·그림’은 같지만 다른 말입니다. ‘글’은 노래·놀이가 물처럼 언제나 즐겁게 흐르듯이 피어나는 결을 그린다면, ‘그림’은 눈으로 넉넉히 담아내는 결을 그립니다.


  그려서 글인데, 글이란 늘 말을 그립니다. ‘말’을 옮기기에 글이라고도 하지만, 제대로 들여다보면 모든 글은 “말을 눈으로 그림처럼 보도록 그린 모습”이라고 여겨야 알맞습니다. 우리는 말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그리는 ‘글’을 펴면서 서로 말을 나누는 셈입니다. 글을 남긴 분이 이미 즈믄해쯤 앞서 이 땅을 떠났어도 글을 읽는 사이에 ‘떠난 글님’하고 말을 섞을 수 있습니다.


  이제 말이 무엇인지 살펴야 할 테지요. 말이란 ‘마음’을 담은 소리입니다. 말을 안 하더라도 눈짓이나 몸짓에도 마음이 묻어나기에, 눈짓과 몸짓으로 마음을 알아보기도 합니다. 다만 숱한 사람들은 한 마디를 하지요. “말을 안 하는데 네 마음을 어떻게 알아?” 하고요.


  우리가 글을 쓴다고 할 적에는 바로 “마음을 담은 소리인 말을 다시 눈으로 쉽게 바로 그때그때 언제까지나 알아보려는 뜻으로 그린다”고 할 만합니다. 이 얼거리를 읽어낸다면 ‘글쓰기 = 말그림 = 마음쓰기’인 줄 알아채면서 어떤 마음을 어떤 말로 담아서 어떤 글로 그릴 적에 스스로 빛나는 줄 깨달을 만합니다. 이 얼거리를 읽지 않는다면, 꾸밈글과 치레글과 허울글과 겉글에서 맴돌고요.


  잘 쓴 글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쓴 글”만 있습니다. 때로는 “마음을 안 쓰고서 꾸미는 글”만 있을 테지요. 이를테면 보람(상·당첨)을 노리며 쓰는 글이라면 마음이 아니라 딴청을 하면서 허울을 드러내는 글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잘 쓴 글 = 그저 꾸며서 속이는 글”입니다. “마음을 쓴 글 = 마음을 나누려는 글”입니다. 마음을 나누려는 말이나 글은 “잘하다 못하다”가 아닌 오롯이 “마음을 나누려는 빛”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란 무엇인지 짚어야 할 테지요. 마음이란 바로 ‘삶’입니다. “좋은 삶”도 “나쁜 삶”도 “기쁜 삶”도 “슬픈 삶”도 아닌, 그저 내가 나로서 오늘을 누리는 삶이 고스란히 깃드는 마음입니다. “마음을 말로 나타낸다”고 할 적에는, 내가 스스로 오늘이라는 삶을 보낸 모든 이야기를 가리거나 숨기거나 보태거나 꾸미지 않으면서 “그저 그대로 담아서 편다”는 얼거리입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보고 짚는다면, ‘글쓰기 = 말그림 = 마음쓰기 = 삶쓰기’라는 길을 환하게 맞아들일 테고, 이 글결을 읽기에 낱말을 하나하나 깊고 넓게 짚고 다루면서 ‘글쓰기’라는 하루를 짓는다고 느낍니다.


  《일하는 아이들》이 책으로 태어난 1978년에 깜짝 놀란 사람이 많은 우리나라입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1978년까지도, 또 이해 뒤로도 우리나라는 여태 ‘꾸밈글’을 “잘 쓴 글”로 삼습니다. 스스로 보낸 삶을 쓰는 ‘삶글’을 눈여겨보지 않은 글밭(문학계)입니다. 스스로 짓는 살림을 담는 ‘살림글’은 새봄글(신춘문예)로 안 뽑은 글밭(문학단체)입니다. 어린이가 읽는 책도 어른이 읽는 책도 온통 ‘꾸밈글’이 흘러넘쳤습니다.


  이오덕 님은 《일하는 아이들》을 묶어내기 앞서 ‘어린이가 스스로 삶과 살림과 사랑을 담은 글’을 꾸준히 여미었고, 이렇게 길잡이(교사)가 아이 곁에서 길동무에 삶동무로 지내면서 북돋우자고 가르쳤습니다. 이오덕 님한테서 배운 분으로서는 이 책이 그리 대수롭지 않았어요. 진작에 나올 만한 책이 이제서야 겨우 나올 수 있었다고 여길 뿐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먼먼 옛날부터 어버이 곁에서 함께 일했습니다. 굳이 ‘아동노동’ 같은 일본말을 빌지 않더라도, 아이도 언제나 일꾼입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쉬잖고 일하는 어버이를 지켜보는 아이들은 먼저 스스럼없이 “어무이, 나가 뭐 도울 일 없나?” 하고 여쭙니다. “아부지, 나가 좀 도울랑게.” 하면서 소매를 걷어요. 아이들은 어버이 일감을 조금 나누어 받으면서 온몸으로 깨닫고 온마음으로 배웁니다. “아, 나는 고작 요 조그마한 일감일 뿐인데 얼마나 손이 시리고 힘들고 등허리가 결리는가! 울 엄마아빠는 날마다 어떤 일을 하면서 이 보금자리를 일구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숱한 시골 엄마아빠는 하루 24시간 가운데 22시간을 일하더라도 가난했습니다. 낛꾼(소작인)은 땅이 없어서 땅을 빌리는데, 땅지기는 굳이 일을 안 하더라도 낛꾼한테서 받는 몫으로 배부를 뿐 아니라 해가 갈수록 살림이 불어납니다. 시골 엄마아빠는 눈을 붙일 짬조차 없이 바쁘고 고되기도 하지만, 배움터에 나갈 일도 없고, 글을 읽거나 배울 짬도 없습니다. 이 나라 멧골자락 가난한 집 시골아이도 거의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배움터 없던 시골과 멧골”에 작은곳(분교)이 생겼고, 이 작은곳을 다니는 아이들은 비로소 ‘글구경’을 합니다. 적잖은 ‘작은길잡이(분교장)’는 아이들을 팽개쳤지만, 이오덕 님처럼 뜻있는 작은길잡이도 드문드문 있었어요. 그리고 이오덕 님은 작은길잡이로서 일군 열매를 둘레에 널리 나누었습니다. 멧골아이가 처음으로 쥐는 글붓으로 처음으로 적은 쪽글을 알뜰히 여미어 하나씩 베풀었어요. 1950∼70해무렵 멧골아이는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 있는 “내가 쓴 글을 실은 책”을 누렸습니다.


  《일하는 아이들》에 실은 어린이글을 보면, “아이 목소리를 담은 글”일 뿐 아니라, “엄마아빠는 말할 틈도 글쓸 짬도 없으나, 아이가 엄마아빠 일살림을 고스란히 담아낸 글”이기도 합니다. 이 아이들이 일한 삶과 살림과 사랑을 옮긴 글이란, 이 아이들 엄마아빠가 어릴 적에 똑같이 하던 일이라고 할 만합니다.


  어느 글바치도 삶글과 살림글과 사랑글을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문학’뿐 아니라 ‘역사’와 ‘철학’과 ‘종교’와 ‘예술’도 ‘삶글·살림글·사랑글’은 시시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멋글’을 쓰기에 바빴습니다. 그들은 멧골도 시골도 아닌 ‘서울’에서 꾸밈글만 써대었습니다.


  《일하는 아이들》은 온몸과 온마음으로 온삶을 일군 땀방울도 담아내지만, 사투리도 고스란히 담아냅니다. 스스로 지은 삶을 스스로 적으면서, 스스로 빛나고 스스로 노래하는 말글을 선보여요. 우리말을 우리말답게 살린 꾸러미를 꼽는다면 바로 《일하는 아이들》일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말을 고스란히 담은 글이요, 마음을 고스란히 담은 말이요, 삶을 고스란히 담은 마음입니다.


ㅍㄹㄴ


이 시집을 펴내는 뜻은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시를 알고 시를 씀으로써 인간답게 살아가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다음 또 하나는 교사와 부모들이 순진하고 정직한 아이들의 마음을 알고 그들과 함께 시의 세계에서 살아가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교과서를 가지고 시험 점수 따기 공부만을 하기에 몸과 마음이 병들어 있는 데다가, 글짓기까지도 상타고 이름 내기 위해 하는 거짓스런 말재주놀이가 되고 있다. 특히 괴상한 동시란 것을 쓰면서 저도 몰래 꾀부리고 거짓을 꾸미는 사람답지 못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3쪽/이오덕)


봄아, 봄아, 오너라. / 나는 봄이 오면 / 따뜻한 곳으로 지게 지고 / 나무하러 간다. / 나무를 가득 지고 / 집에 갖다 놓고 / 또 나무하러 간다. / 봄이 오면 나는 날마다 나무하고 / 보리밭도 멘다. (12쪽/안동 대곡분교 2년 이용옥 71.2.6.)


퇴비를 이고 / 재까지 오니 / 고개도 아프고 / 학교가 보여서 / 가지고 가기 싫어졌다. / 이것을 가지고 가지 않으면 / 선생님한테 혼이 난다. / 또 머리에 이고 / 걷기 시작했다. / 학교에 다다랐다. / 퇴비를 가지고 온 여자아이는 / 보이지 않는다. / 교문을 들어설 때 /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 그래도 꾹 참고 / 교문 앞에 두고 …… (39쪽/문경 김룡 6년 최영순 72.)


아버지는 소를 몰고 나와 막 때린다. / 소는 들로 뛰어다닌다. / 아버지는 소 뒤를 따라가다가 소 고삐를 밟는다. / 소는 확 돌아서 눈물을 흘린다. (64쪽/문경 김룡 5년 송원호 72.4.)


우리는 촌에서 마로 사노? / 도시에 가서 살지. / 라디오에서 노래하는 것 들으면 참 슬프다. / 그런 사람들은 도시에 가서 / 돈도 많이 벌일 게다. / 우리는 이런 데 마로 사노? (101쪽/안동 대곡분교 2년 김종철 69.10.6.)


파랑새야, 어얘 사노? / 사람이 총으로 쏘기도 하고 / 약도 놓고 하면 어얘 사노? / 파랑새야, 너는 약을 놓으면 / 밥이라고 먹다가 죽는다. / 파랑새야, 약을 먹지 말아라. (128쪽/안동 대곡분교 3년 김해자 68.12.11.)


언니가 / 아침에 일어나서 / 밥을 하는데 / 손이 발발 떤다. / 그래 나는 불쌍하다 / 할라 항깨 그렇고 / 안 할라 항깨 안 됐다. (146쪽/상주 청리 2년 전윤희 62.12.4.)


땅을 파니 / 새싹이 돋아나느라고 / 노랗게 올라옵니다. / 따뜻한 니가 / 올라옵니다. (232쪽/상주 공검 2년 김진순 59.3.25.)


논물에 / 하늘이 보인다. / 하늘이 기쁘다. / 그 논길에 걸어가니 / 어리어리하네. / 곧 빠질라 한다. / 고이 고이 갔다. (266쪽/안동 대곡분교 3년 홍옥분 69.6.1.)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 모두 시를 써요 - 아이들 시 쓰기 이오덕의 글쓰기 교육 6
이오덕 지음 / 양철북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오덕 읽는 하루

― 오늘 읽기



《우리 모두 시를 써요》

 이오덕

 양철북

 2017.9.25.



  일하다가 다치기에 나쁘지 않습니다. 집안일을 하다가도 누구나 으레 다칩니다. 아이는 다치면서 어느새 낫고, 앓으면서 조금씩 삶과 몸을 알아가면서 천천히 철들어 어른으로 나아갑니다.


  오늘날 숱한 ‘일자리’는 “일하는 자리”가 아니라, “돈을 벌어서 서울에 터를 잡고 버티는 자리”이기 일쑤입니다. “일을 하며 살림을 가꾸고 보금자리를 일구어서 스스로 즐겁고 한집안이 오붓한 길을 바라는 일자리”는 어떤 ‘틀(회사·공장·공무원)’로도 이루지 못 하거나 않습니다. 먼지 하나라도 들어왔다가는 공장 기계가 망가지니, 공장은 그토록 깐깐하고 모질며 차갑습니다. 누구한테나 고르게 맞추려는 틀을 잡으려고 하기에 ‘공직사회’도 똑같이 깐깐하고 모질며 차가울 뿐 아니라, 이러한 틀(회사·공장·공무원)에 스스로 맞추어서 “돈을 버는 자리”를 얻으려고 하니, 아주 마땅히 힘들고 지치게 마련입니다.


  서울(도시)에 있는 일자리 가운데, 햇볕을 넉넉히 쬐면서, 풀꽃과 나무를 늘 마주하는 곳에 세운 일터가 있을까요? 아마 한두 군데 있을는지 모르나, 모든 공공건물과 회사건물과 공장에는 나무는커녕 들풀 한 포기조차 자랄 틈이 없고, 멧새나 풀벌레나 개구리는커녕 매미조차 깃들지 못 합니다.


  그런데 시골에서조차 농약과 비료와 기계와 비닐로 덮어씌웁니다. 이뿐 아니라, 이제는 ‘스마트팜’이라는 이름으로 멀쩡한 논밭에 시멘트로 터를 다져서 유리온실을 때려짓고는 와이파이로 다룹니다. ‘공장식 축산’과 똑같은 ‘공장식 농업’으로 간다면서, 몇 조 원도 아닌, 몇 백 조 원을 들이붓는 나라입니다.


  ‘일’이란 무엇인지부터 처음으로 돌아가서 들여다볼 적에 비로소 실마리를 푼다고 느낍니다. 왜 “지불되지 않는 사회”일까요? 삶자리·보금자리·살림자리·사랑자리가 아닌, 더구나 일자리조차 아닌 ‘돈벌자리’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나라에서 사람들을 ‘돈벌자리’로 내모는 탓이 하나에, 나라가 사람들을 ‘돈벌자리’로 내모는 줄 알면서도 그냥그냥 ‘서울에 깃들어서 돈벌자리를 쥐는 우리 스스로’ 모든 수렁을 깊이 판다고 느낍니다.


  《우리 모두 시를 써요》는 어린이한테 들려주는 길잡이책입니다. 노래를 즐겁게 쓰는 길을 알려주는 줄거리입니다. 그런데 어린이한테 노래쓰기를 들려주고 이끄는 몫은 어른이요, 어른으로서 어린이한테 노래쓰기를 들려주고 이끌려면 먼저 어른부터 노래를 쓸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 시를 써요》는 아이어른이 함께 노래를 쓰고 엮고 짓고 부르면서 어깨동무하는 길을 밝히는 얼거리입니다.


  어른은 어떻게 노래를 쓸 만할까요? 바로 어른 스스로 짓는 일을 쓸 노릇입니다. 아이는 어떻게 노래를 쓰면 될까요? 바로 아이 스스로 누리는 놀이를 쓰면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숱한 어른은 ‘일’이기보다는 ‘돈벌이’에 매입니다. 일을 하는 어른이 아닌, 돈을 버는 서울살이에 매인 몸이라서, 막상 어른부터 노래를 쓰거나 부를 겨를이 빠듯합니다.


  아이도 매한가지입니다. 오늘날 숱한 아이는 서울에서도 시골에서도 못 놀거나 안 놀아요. 온나라 아이들이 손전화에 고개를 처박는데, 그나마 손전화를 가끔 들여다보는 아이들은 이미 배움수렁(학교·학원)에 갇힌 채 온하루를 보냅니다. 어른도 갇히고 아이도 갇혀요. 아니, 어른이 먼저 스스로 가둔 탓에 아이도 가두었다고 보아야 옳습니다.


  아픈 이웃한테 귀를 기울이려면, 서울부터 떠나면 된다고 느낍니다. 사람한테 시달리고 죽는 뭇소리부터 귀를 기울여야, 드디어 사람이 왜 아프고 죽는지 알아본다고 느낍니다. 가을겨울에 봄이면 우리나라는 모든 곳에서 가지치기를 끔찍하게 일삼는데, 길나무 가지를 마구마구 자를 적에 “내 팔이 잘리는구나” 하고 느끼는 분이 갈수록 줄어듭니다. 서울(도시)을 넓히면서 들숲메를 깎아내는 삽질이 날마다 불거지지만, 살갗으로 하나도 안 아픈 사람도 갈수록 늘어납니다. 나라에서 몇 백 조 원에 이르는 돈을 ‘해상 국립공원’ 바다에 쏟아부어서 태양광과 풍력시설을 박는데, 바다가 앓고 아픈 줄 느끼는 사람도 갈수록 사라집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을 키우려면, 먼저 들숲바다가 앓아눕고 죽어가는 소리를 들어야 하지 싶습니다.


  노래를 쓰려면 노래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노래란 ‘유행가·대중가요’가 아닙니다. 놀면서 터져나오는 웃음가락이 바로 노래입니다. 놀이란 노래하면서 짓는 가볍고 신나는 노을빛 같은 몸짓입니다. 노래하고 놀이는 늘 하나입니다. 놀이하기에 노래하고, 노래하기에 놀이하는 얼개이니, 아이어른이 함께 기쁘게 일하고 어울리는 삶자리에 있을 노릇입니다.


  사람이 노래하고 새가 노래합니다. 풀벌레가 노래하고 개구리가 노래합니다. 나무가 노래하고 풀꽃이 노래합니다. 별이 노래하고 바람과 바다가 노래합니다.


  우리가 노래를 쓴다고 할 적에는 이 모든 노래에 귀를 기울이면서 마음을 담는 하루를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온누리 푸른노래에 등돌리는 굴레라면 노래를 모르지요. 온누리 파란노래에 눈감는 쳇바퀴라면 노래를 아주 잊고 잃습니다.


  누구나 쓰는 노래요 글입니다. 누구나 부르고 읽는 노래요 글입니다. 어린이도 어른도 나란히 노래님으로 서는 터전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요. 손을 잡고 걷는 하루를 살고, 어깨를 겯고 웃고 춤추는 오늘을 지어야지 싶습니다. 겉으로 꾸미는 흉내가 아닌, 우리 삶을 우리 손으로 가다듬으면서 속삭이고 나누는 노래쓰기와 글쓰기를 돌아볼 일입니다.


  노래쓰기란 오늘쓰기입니다. 글쓰기란 하루쓰기입니다. 오늘쓰기란 삶쓰기요, 하루쓰기란 살림쓰기입니다. 모든 쓰기는 짓기에 빚기에 가꾸기에 가다듬기에 나누기입니다. 오늘을 숲빛으로 사랑하면서 부드러이 일구는 둘 사이로 빛나기에 스스럼없이 노래가 샘솟습니다.


ㅅㄴㄹ


시는 누구든지 쓸 수 있다. 그리고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 (5쪽)


슬픔을 느끼지 못하고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사람은 참 기쁨도 모릅니다. 그리고 시를 쓸 수 없습니다 … 남의 아픔을 내 아픔같이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리 나이 많아도 어린이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입니다 … 시를 쓰는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7쪽)


무엇이든 멀리 하고 있으면 이해를 못 하고, 싫고, 밉고, 적이 되고 말지요. 옛날의 어린이들은 밤에 개구리 소리를 들었을 때 자장가를 듣는 기분이 되어 잠을 잤는데, 요즘 어린이는 도리어 그 소리가 귀에 거슬려 짜증이 나고 잠이 안 오는 것 같으니 이건 뭔가 크게 잘못된 것 아닐까요? (15쪽)


‘내 그림, 내 글은 내 마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남의 시를 읽을 때 얼마나 훌륭한 말로 유식하게 썼나 하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다만 마음에 울려오는 것이 있나 없나, 곧 감동이 느껴지나 안 느껴지나 하고 보아야 합니다. (34쪽)


감동은 없지만 재미로 읽히는 것, 재미로 불리는 것, 이것이 동요입니다. 이런 동요는 어른들이 씁니다.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더구나 저학년 어린이들에게) 재미있게 읽히기 위해 써 보이는 것이니, 이런 것을 흉내내어 써서는 안 됩니다. (39쪽)


남 따라 그럴싸한 말을 생각해 내어 써서는 결코 시가 되지 못합니다. (89쪽)


유행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유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예 시를 쓸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121쪽)


시가 삶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면 마땅히 일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일하는 기쁨을 보여주는 시가 많아야 할 것인데 사실은 일하는 시가 아주 드뭅니다. 드물다기보다 거의 없습니다. 어른들이 쓰는 시도 그렇고 어린이가 쓰는 시도 그렇지요. (231쪽)


어린이들이 그 깨끗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느낀 것을 그대로 정직하게 말하면 그것이 훌륭한 비판이 되기 예사입니다. 이런 어린이들의 소리를 슬기로운 어른들은 귀담아듣고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250쪽)


+


도리어 그 소리가 귀에 거슬려 짜증이 나고 잠이 안 오는 것 같으니 이건 뭔가 크게 잘못된 것 아닐까요

→ 도리어 이 소리가 귀에 거슬려 짜증이 나고 잠이 안 온다고 하니 뭔가 크게 잘못이 아닐까요

15쪽


‘할머니가’라고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 ‘할머니가’라고 써야 맞습니다

→ ‘할머니가’라고 쓰기를 바랍니다

212쪽


이런 어린이들의 소리를 슬기로운 어른들은 귀담아듣고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 이런 어린이 소리를 슬기로운 어른은 귀담아듣고서 크게 깨닫습니다

250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오덕 읽는 “이응모임” 9걸음

― 새롭게 있고, 찬찬히 읽고, 참하게 잇고, 느긋이 익히고



때 : 2025.1.19.토. 20시

곳 : 부산 연산동 〈카프카의 밤〉

님 : 숲노래 × 곳간출판사

곁 : 《이오덕 일기》를 미리읽기, 또는 〈카프카의 밤〉에서 사기



줄거리

가. ‘학교’인가 ‘배움터’인가

 ㄱ ‘교도소’로 바뀐 곳

 ㄴ 시골도 서울도 없는 곳

 ㄷ 참살림 없이 참교육만?

 ㄹ 참말을 모르느 거짓말로

 ㅁ 말을 짓기에 사투리


나. 놀이터 없는 나라

 ㄱ ‘놀이기구’가 없어야 논다

 ㄴ ‘애늙은이’와 ‘철바보’

 ㄷ 아직 ‘군대’ 같은 나라

 ㄹ 반공, 애국, 충성, 효도, 희생

 ㅁ ‘일’과 ‘노동’과 ‘근로’


다. 숨막히는 나라

 ㄱ ‘서울’도 ‘시골’도 매캐한

 ㄴ ‘민주화’ 한복판

 ㄷ ‘말’이 없으니 ‘글’도 없는

 ㄹ ‘돈자루’를 못 쳐낸 그들

 ㅁ ‘박정희’ 다음에도 줄서기


라. 하루쓰기

 ㄱ 남이 아닌 나를 본다

 ㄴ 나를 보며 너를 본다

 ㄷ 나하고 너를 아우르는 우리

 ㄹ 사람인 줄 깨닫고 나서

 ㅁ 사람 곁에 새와 들숲바다


+


아홉걸음 : 책을 빼앗겼으나 책을 쓰다 (신경림)


  이오덕 님은 ‘글빗(비평·평론)’을 쓰는 길에 “우리나라 어린이문학 발자취”도 추스르려고 부지런히 책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사슬나라 한복판에 모두 빼앗겼고, 빼앗긴 책은 ‘색동회 윤석중 무리’ 가운데 하나인 이재철한테 넘어갔습니다. 빼앗긴 책을 되찾으려고 기나긴 해를 나라하고 싸웠습니다. 김대중 씨는 나라지기로 서면서 책을 돌려주겠노라 다짐했다지만, 막상 나라지기로 선 뒤에는 입을 씻었습니다.


  그러면 이오덕 님은 책을 왜 사슬나라한테 빼앗겼을까요? 이오덕 님은 창작과비평서가 ‘창비아동문고’를 내기를 바라며 한참 여러 사람들한테 말을 넣었습니다. 백낙청·염무웅 같은 이들하고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했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다가 ‘이오덕이 한삶을 바쳐 모은 책’을 알았고, 이들은 ‘창비 글바치’하고 만나는 자리에서 ‘이오덕이 건사한 책’을 들려주었다지요. 이때에 신경림 씨는 ‘월북문인 시집’을 꼭 ‘원본’으로 빌려서 읽고 싶어했습니다.


  이오덕 님은 서슬퍼런 나라인 줄 뻔히 알기에 섣불리 ‘월북문인 시집’을 둘레에 말할 마음이 없었지만, 이미 창비 사람들이 ‘소문’을 내버렸습니다. 안 빌려주려고 했으나 “읽고서 이튿날 바로 돌려주겠습니다” 하고 절을 하며 다짐을 하기에 어쩔 길 없이 신경림 씨한테 빌려주었는데, 신경림 씨는 이오덕 님한테서 월북문인 시집을 빌린 그날, 이 시집을 바지 뒷주머니에 척 꽂고서 팔자걸음으로 서울 인사동을 누비다가, 천상병 짝꿍인 목순옥 씨가 꾸리는 찻집 〈귀천〉으로 들어서는데, 〈귀천〉에 들어설 적에 뒷주머니에 꽂은 시집을 척 꺼내어 오른손에 높이 들고 팔랑이면서 “어이, 여 봐라. 이게 뭔지 아나?” 하면서 큰소리를 치면서 웃었다지요. 이때에 신경림 씨를 좇던 사복형사가 바로 오른손목을 비틀고 왼손을 붙들면서 “이게 뭔데? 이게 뭐야? 이 새끼야!” 하면서 책을 나꿔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날 신경림을 비롯해 ‘귀천에 있던 모든 문인’이 남영동으로 끌려갔고, 신경림 씨는 “그건 내 책이 아니고 이오덕한테서 빌린 책이오” 하고 털어놓으면서 이오덕 님도 곧바로 남영동으로 끌려갔을 뿐 아니라, 책을 모조리 빼앗겼습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