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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읽는 하루

― 가르치려면 배운다



《어린이 시》

 요시다 미즈호 글

 이오덕 옮김

 온누리

 1984.1.20.



  하루아침에 글을 잘 쓰는 아이나 어른은 없을 만하지만, 따로 틀을 세우지 않으면 처음 붓을 쥐는 자리부터 눈을 밝히면서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낸다고 느낍니다. 길잡이로 서는 어른으로서 “우리가 보내는 하루를 그대로 쓰면 됩니다” 하고 들려줄 수 있다면, 아이도 어른도 눈물과 웃음을 스스럼없이 밝히면 되는 줄 받아들인다면, 잔소리도 큰소리도 목소리도 노랫소리도 그저 즐거이 담으면 넉넉한 줄 알아차릴 수 있으면, 모든 글은 바로 내가 되읽고 새로읽을 밑글이라는 대목을 마주한다면, 길든 짧든 빛나는 글 한 자락을 쓴다고 느낍니다. 따로 보람(성과·결과)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쓰는 글이 아닙니다. 언제나 스스로 곁에 두면서 마음을 돌아보고 되새기면서 기운을 내는 밑동을 이루는 글이라고 봅니다.


  저마다 누리고 짓고 그리고 가꾸고 일구면서 나누는 삶을 그리기에 틀(표준)을 잡을 수 없는 글입니다. 글뿐 아니라 말도 억지로 틀(표준)을 잡을 수 없어요. 살아가는 하루도, 살림짓는 보금자리도, 사랑하는 사람도, 따로 낫거나 나쁜 틀(표준)을 못 세웁니다. 모든 사람이 다 다르게 타고나는 몸이듯, 아이어른 누구나 다 다르게 하루를 살아가면서 스스럼없이 쓰는 ‘삶글’입니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빚는 꿈그림을 바라보면서 손수 여민 살림살이를 그저 수수하게 쓰는 ‘살림글’입니다. 밉거나 싫거나 좋다는 틀이 아니라, 스스로 샘솟거나 우러나오는 포근하면서 밝은 햇빛과 별빛과 같은 사랑을 티없이 쓰는 ‘사랑글’입니다.


  책을 널리 읽기에 눈이 넓지 않다고 느낍니다. 종이로 묶은 책만이 아니라, 바람과 하늘이라는 책이 있어요. 바다와 샘과 냇물이라는 책이 있어요. 멧새와 들새와 바닷새와 철새와 텃새라는 책이 있어요. 온갖 풀벌레라는 책이 있고, 벌나비와 개미와 지렁이라는 책이 있어요. 연구소라는 곳에 깃들면서 딱정벌레를 오래오래 지켜본 바를 담아서 묶어야 ‘곤충도감·곤충학 논문’이지 않듯, 아이 눈으로 딱정벌레를 두고두고 살펴본 바를 담아도 알뜰살뜰 빛나는 ‘벌레이야기’를 이루게 마련입니다. ‘오늘’과 ‘하루’라는 책을 읽으면서 담아낼 수 있고, 서로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눈빛을 읽으면서 담아낼 수 있는 글이라고 봅니다.


  노래하면서 놀이하는 아이 곁에서, 노래하면서 살림하는 어른으로 선다면, 서로서로 늘 즐겁게 빛나는 말 한 마디를 주고받으면서 이야기가 자랍니다. 이 이야기를 문득 옮기니 글일 테지요. 겨울 한복판이나 끝자락에도, 새봄 첫머리나 한복판에도, 우리를 둘러싼 푸른바람을 나란히 그리는 이야기를 누릴 수 있기를 바라요.


  모든 글은 저마다 마음꽃일 테니까요. 모든 말은 스스로 생각씨앗일 테니까요. 모든 이야기는 서로서로 사랑길을 테고요.


  《어린이 시》(요시다 미즈호/이오덕 옮김, 온누리, 1984)는 1967년 6월에 처음 옮긴 꾸러미입니다. 1983년 10월에 이 묵은 꾸러미를 추슬러서 처음으로 바깥에 선보입니다. 이오덕 님 스스로 쓴 책이 있되 애써 이웃나라 책을 옮겼습니다. 옮긴 책 앞자락에 밝히듯이 ‘우리가 널리 배울 길’이 있기에 옮깁니다. 이오덕 님은 2001년에 《한 사람의 목숨》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어린이와 푸름이가 쓴 노래(시)를 조촐히 옮겨서 선보인 적이 있습니다. 다만 여느 새책집에는 안 넣었습니다.


  《어린이 시》를 애써 옮기셨는데 이 책을 알아보거나 살핀 손길은 매우 드물다고 느낍니다. ‘한국글쓰기연구회’ 길잡이도 이런 책이 나온 줄 까맣게 모르거나, 나온 줄 더러 알았어도 안 읽었다고 느낍니다. 전두환 등쌀에 시달린 탓도 있고, 들너울을 일으키는 데에 뜻을 두기도 했다지만, 막상 어린이 곁에 서려고 하지 않은 탓에 모르거나 안 읽었다고 느낍니다.


  누가 어린이 곁에 있었을까요? 우리는 1987년에 드디어 우두머리를 끌어내렸습니다만, 그때 어린이 곁을 지키면서 어린이가 하루하루 새롭게 익히고 가꿀 살림살이를 이끌거나 가르친 어른은 누구였을까요? 지난날도 오늘날도 매한가지입니다. 아이들이 ‘손전화’에 지나치게 파묻힌다고 핀잔에 꾸지람을 하지만, 정작 아이들 곁에서 함께 일하고 살림하고 노래하면서 보금자리를 일구는 어른이 너무 드뭅니다. 아이들을 그만 나무라고서 아이들 곁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이들 핑계는 접고서 집안일과 집살림부터 찬찬히 돌보고 마을일과 마을살림을 바라보는 매무새를 일구는 작은걸음부터 내딛을 하루를 열어야 하지 않을까요?


  서로 손을 잡거나 어깨를 겯으면서 함께 나아가려는 길을 일본 한자말로 ‘연대(連帶)’라 하고, 길을 나란히 걷는 사람을 반길 적에 일본 한자말로 ‘환대(歡待)’라 하더군요. 아직까지 일본 한자말을 그냥그냥 쓰기에 나쁠 일이 없지만, 손을 맞잡을 적에는 어린이도 알아듣도록 ‘손잡기’라는 우리말을 할 수 있고, 어깨를 겯을 적에는 어린이도 나란하도록 ‘어깨동무’라는 우리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함께 나아가니 ‘함께걷기’이고, 같이 걸어가니 ‘같이걷기’입니다. 너와 나를 아우르려고 하기에 ‘나란히’라 하지요.


  밝게 웃으면서 맞이한다는 뜻으로 ‘반기다·반갑다’ 같은 우리말이 있습니다. 한결 품을 넓히면서 손을 잡거나 어깨동무를 하려는 길이라면 ‘나눔’을 바라볼 만합니다. ‘나눔’이라는 우리말을 멀리하면서 ‘분배·배분·공유·할당·부조·노블리스 오블리제·공존·안배·평등·자선’이나 ‘커머닝(commoning)’ 같은 바깥말에서 맴돈다면, 우리는 여태 손잡기나 어깨동무나 반가운 마음하고는 멀다는 뜻이라고 느낍니다.


  남(그들)하고 맞붙어서 이긴다거나, 남(저놈)하고 싸워서 꺾으려는 뜻이라면, 아무래도 손잡기나 어깨동무나 나눔하고는 멀구나 싶어요. 어느 누구도 이기거나 지지 않는 길이어야 비로소 ‘손잡기·어깨동무·나눔’이라고 느낍니다. 아이들은 뜻이 달라도 같이 놀아 왔고, 다른 마음이나 몸이어도 깍두기로 여겨 언제나 얼싸안았는데, 이제 아이들 사이에서도 손잡기가 잊히고 어른들 사이에서도 어깨동무가 매우 흐리다고 느낍니다.


  참다우면서 착하고 아름다이 빛나는 어깨동무와 나눔이라면, “품 넓히기(연대 확장)”란 무엇인지 다시 짚을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끼리끼리 갈라서 붙으려는 굴레가 아닌, 너나없이 자라는 들풀과 나무가 어울리는 ‘숲’을 바라보고서 배우는 길이 “품 넓히기”일 텐데 싶습니다.


  어쩐지 우리는 스스로 어린이였던 나날을 너무 쉽게 잊는 듯합니다. 어른이란 몸을 입은 뒤에는 어린이와 손을 잡거나 어깨를 겯을 뿐 아니라, 이웃하고 나란히 걸어가는 길도 그만 잊는 듯합니다.


ㅍㄹㄴ


앞의 생각은,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민간 교육운동으로서의 글짓기 교육의 성과가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 때문이겠고, 뒤의 생각은, 수난의 역사만을 거듭한 우리 민족에 비해, 그래도 그들은 매우 행복한 자리에 놓여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는 어린이들의 시에서 가장 솔직한 모양으로 그 나라 그 민족의 생활과 호흡을 느낄 수 있읍니다. 그러니 우리의 어린이들의 시에 우리의 역사적힌 현실이 솔직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과, 참된 시 교육을 하여 우리의 어린이들을 불행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린이를 구하는 것이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 아닙니까? 요시다 씨가 서문에서 말한 것같이 시 교육은 “언어로서 세계를 창조해 나가는 일”임을 우리 모두 명심해야겠읍니다. (5쪽)


일본 어린이의 시는 동요→아동자유시→생활시→생활행동시, 이렇게 발전해 왔읍니다. 그리고 생활시 이후의 시 지도는 생활적이고 사회적인 가치가 있는 제재를 찾도록 장려하여, 거의 40년 동안 그 방향이 변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토대 위에 올라서서 여러 가지 개성이 나타나는 작품 지도를 주장하는 요시다 씨로서는 마땅히 할 만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통도 아무것도 없고, 더구나 사회 형편이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아주 다른 우리나라에서는, 이 요시다 씨의 방법을 그만한 자리에서 그만한 거리를 두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더구나 우리나라에서는 10여년 전부터 작문 교육이라면 시고 산문이고 그저 덮어놓고 어린애들의 귀여운 재롱만을 흉내내게 하는 우스꽝스러운 교육이 성행하여 왔으니, (5∼6쪽)


교육이란 것이 허울좋은 상품이 아니고, ‘관리’하는 것도 아니고, 뒤숭숭한 푸닥거리는 물론 아니고, 진실로 그것이 과학이라면, 우리는 동서고금()의 모든 인간의 땀과 결정을 받아들이기에 인색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참된 시 교육의 기운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6쪽)


+


후지산은 / 한 번 폭발했다. / 우리들같이 / 불의 심장이 있다. / 선생님과 동무들은 / 이렇게 말한다. / “후지산은 이제 죽었다.” / 한다. / 그러나 나는 / 후지산은 / 살아 있다고 / 믿고 있다. (20쪽/사하꾸 후시꼬. 도꾜 2년 여)


순자야, / “바다에 안 빠지게 조심해!” / “아버지, 어머니 말 잘 듣고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해!” / “빨리 한국말 배워라!” / “1학년 2반 동무들 잊지 말고!” / “이따금 편지 보내 줘!” / 모두 / 차례 차례 말했다. / 순자는 / 기차 창문에서 눈물을 흘리며 / 꾸벅, 인사를 했다. / 찌리링……하고 벨이 울린다. / “잘 가거라!” / “잘 가!” 하고 / 모두들 달렸다. / 순자 아버지도 / 모자를 벗고 인사했다. / 칙 칙 칙 / 커덩 커덩, 하고 / 기차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 결국 가 버렸다. (49쪽/나구이 이찌로오. 아오모리 1년 남)


길을 간다. / 좋은 꽃 냄새가 난다. / 머리를 들면 / 높다란 오동나무 꽃이다. / 저녁해에 물들어 / 자주빛으로 향기를 풍기고 있다. / 벌들이 꽃가루를 온 배에다 묻히고 / 꽃 속에 뛰어들어갔다가 / 나왔다가 한다. / 오동꽃은 마치 / 어머니처럼 / 말 없이 꿀을 먹이고 있다. (101쪽/오까모도 마스모리. 오까야마현 5년 남)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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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아이들 - 아이들 시 모음, 새로 고침판 이오덕의 글쓰기 교육 7
이오덕 엮음 / 양철북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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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읽는 하루

― 사랑으로 말하고 쓴다



《일하는 아이들》

 이오덕 엮음

 청년사

 1978.2.15.



  글이란 언제나 그림입니다. ‘글’이라는 낱말은 ‘그리다’에서 비롯했습니다. 모름지기 ‘글·그림’은 같지만 다른 말입니다. ‘글’은 노래·놀이가 물처럼 언제나 즐겁게 흐르듯이 피어나는 결을 그린다면, ‘그림’은 눈으로 넉넉히 담아내는 결을 그립니다.


  그려서 글인데, 글이란 늘 말을 그립니다. ‘말’을 옮기기에 글이라고도 하지만, 제대로 들여다보면 모든 글은 “말을 눈으로 그림처럼 보도록 그린 모습”이라고 여겨야 알맞습니다. 우리는 말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그리는 ‘글’을 펴면서 서로 말을 나누는 셈입니다. 글을 남긴 분이 이미 즈믄해쯤 앞서 이 땅을 떠났어도 글을 읽는 사이에 ‘떠난 글님’하고 말을 섞을 수 있습니다.


  이제 말이 무엇인지 살펴야 할 테지요. 말이란 ‘마음’을 담은 소리입니다. 말을 안 하더라도 눈짓이나 몸짓에도 마음이 묻어나기에, 눈짓과 몸짓으로 마음을 알아보기도 합니다. 다만 숱한 사람들은 한 마디를 하지요. “말을 안 하는데 네 마음을 어떻게 알아?” 하고요.


  우리가 글을 쓴다고 할 적에는 바로 “마음을 담은 소리인 말을 다시 눈으로 쉽게 바로 그때그때 언제까지나 알아보려는 뜻으로 그린다”고 할 만합니다. 이 얼거리를 읽어낸다면 ‘글쓰기 = 말그림 = 마음쓰기’인 줄 알아채면서 어떤 마음을 어떤 말로 담아서 어떤 글로 그릴 적에 스스로 빛나는 줄 깨달을 만합니다. 이 얼거리를 읽지 않는다면, 꾸밈글과 치레글과 허울글과 겉글에서 맴돌고요.


  잘 쓴 글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쓴 글”만 있습니다. 때로는 “마음을 안 쓰고서 꾸미는 글”만 있을 테지요. 이를테면 보람(상·당첨)을 노리며 쓰는 글이라면 마음이 아니라 딴청을 하면서 허울을 드러내는 글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잘 쓴 글 = 그저 꾸며서 속이는 글”입니다. “마음을 쓴 글 = 마음을 나누려는 글”입니다. 마음을 나누려는 말이나 글은 “잘하다 못하다”가 아닌 오롯이 “마음을 나누려는 빛”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란 무엇인지 짚어야 할 테지요. 마음이란 바로 ‘삶’입니다. “좋은 삶”도 “나쁜 삶”도 “기쁜 삶”도 “슬픈 삶”도 아닌, 그저 내가 나로서 오늘을 누리는 삶이 고스란히 깃드는 마음입니다. “마음을 말로 나타낸다”고 할 적에는, 내가 스스로 오늘이라는 삶을 보낸 모든 이야기를 가리거나 숨기거나 보태거나 꾸미지 않으면서 “그저 그대로 담아서 편다”는 얼거리입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보고 짚는다면, ‘글쓰기 = 말그림 = 마음쓰기 = 삶쓰기’라는 길을 환하게 맞아들일 테고, 이 글결을 읽기에 낱말을 하나하나 깊고 넓게 짚고 다루면서 ‘글쓰기’라는 하루를 짓는다고 느낍니다.


  《일하는 아이들》이 책으로 태어난 1978년에 깜짝 놀란 사람이 많은 우리나라입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1978년까지도, 또 이해 뒤로도 우리나라는 여태 ‘꾸밈글’을 “잘 쓴 글”로 삼습니다. 스스로 보낸 삶을 쓰는 ‘삶글’을 눈여겨보지 않은 글밭(문학계)입니다. 스스로 짓는 살림을 담는 ‘살림글’은 새봄글(신춘문예)로 안 뽑은 글밭(문학단체)입니다. 어린이가 읽는 책도 어른이 읽는 책도 온통 ‘꾸밈글’이 흘러넘쳤습니다.


  이오덕 님은 《일하는 아이들》을 묶어내기 앞서 ‘어린이가 스스로 삶과 살림과 사랑을 담은 글’을 꾸준히 여미었고, 이렇게 길잡이(교사)가 아이 곁에서 길동무에 삶동무로 지내면서 북돋우자고 가르쳤습니다. 이오덕 님한테서 배운 분으로서는 이 책이 그리 대수롭지 않았어요. 진작에 나올 만한 책이 이제서야 겨우 나올 수 있었다고 여길 뿐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먼먼 옛날부터 어버이 곁에서 함께 일했습니다. 굳이 ‘아동노동’ 같은 일본말을 빌지 않더라도, 아이도 언제나 일꾼입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쉬잖고 일하는 어버이를 지켜보는 아이들은 먼저 스스럼없이 “어무이, 나가 뭐 도울 일 없나?” 하고 여쭙니다. “아부지, 나가 좀 도울랑게.” 하면서 소매를 걷어요. 아이들은 어버이 일감을 조금 나누어 받으면서 온몸으로 깨닫고 온마음으로 배웁니다. “아, 나는 고작 요 조그마한 일감일 뿐인데 얼마나 손이 시리고 힘들고 등허리가 결리는가! 울 엄마아빠는 날마다 어떤 일을 하면서 이 보금자리를 일구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숱한 시골 엄마아빠는 하루 24시간 가운데 22시간을 일하더라도 가난했습니다. 낛꾼(소작인)은 땅이 없어서 땅을 빌리는데, 땅지기는 굳이 일을 안 하더라도 낛꾼한테서 받는 몫으로 배부를 뿐 아니라 해가 갈수록 살림이 불어납니다. 시골 엄마아빠는 눈을 붙일 짬조차 없이 바쁘고 고되기도 하지만, 배움터에 나갈 일도 없고, 글을 읽거나 배울 짬도 없습니다. 이 나라 멧골자락 가난한 집 시골아이도 거의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배움터 없던 시골과 멧골”에 작은곳(분교)이 생겼고, 이 작은곳을 다니는 아이들은 비로소 ‘글구경’을 합니다. 적잖은 ‘작은길잡이(분교장)’는 아이들을 팽개쳤지만, 이오덕 님처럼 뜻있는 작은길잡이도 드문드문 있었어요. 그리고 이오덕 님은 작은길잡이로서 일군 열매를 둘레에 널리 나누었습니다. 멧골아이가 처음으로 쥐는 글붓으로 처음으로 적은 쪽글을 알뜰히 여미어 하나씩 베풀었어요. 1950∼70해무렵 멧골아이는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 있는 “내가 쓴 글을 실은 책”을 누렸습니다.


  《일하는 아이들》에 실은 어린이글을 보면, “아이 목소리를 담은 글”일 뿐 아니라, “엄마아빠는 말할 틈도 글쓸 짬도 없으나, 아이가 엄마아빠 일살림을 고스란히 담아낸 글”이기도 합니다. 이 아이들이 일한 삶과 살림과 사랑을 옮긴 글이란, 이 아이들 엄마아빠가 어릴 적에 똑같이 하던 일이라고 할 만합니다.


  어느 글바치도 삶글과 살림글과 사랑글을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문학’뿐 아니라 ‘역사’와 ‘철학’과 ‘종교’와 ‘예술’도 ‘삶글·살림글·사랑글’은 시시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멋글’을 쓰기에 바빴습니다. 그들은 멧골도 시골도 아닌 ‘서울’에서 꾸밈글만 써대었습니다.


  《일하는 아이들》은 온몸과 온마음으로 온삶을 일군 땀방울도 담아내지만, 사투리도 고스란히 담아냅니다. 스스로 지은 삶을 스스로 적으면서, 스스로 빛나고 스스로 노래하는 말글을 선보여요. 우리말을 우리말답게 살린 꾸러미를 꼽는다면 바로 《일하는 아이들》일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말을 고스란히 담은 글이요, 마음을 고스란히 담은 말이요, 삶을 고스란히 담은 마음입니다.


ㅍㄹㄴ


이 시집을 펴내는 뜻은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시를 알고 시를 씀으로써 인간답게 살아가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다음 또 하나는 교사와 부모들이 순진하고 정직한 아이들의 마음을 알고 그들과 함께 시의 세계에서 살아가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교과서를 가지고 시험 점수 따기 공부만을 하기에 몸과 마음이 병들어 있는 데다가, 글짓기까지도 상타고 이름 내기 위해 하는 거짓스런 말재주놀이가 되고 있다. 특히 괴상한 동시란 것을 쓰면서 저도 몰래 꾀부리고 거짓을 꾸미는 사람답지 못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3쪽/이오덕)


봄아, 봄아, 오너라. / 나는 봄이 오면 / 따뜻한 곳으로 지게 지고 / 나무하러 간다. / 나무를 가득 지고 / 집에 갖다 놓고 / 또 나무하러 간다. / 봄이 오면 나는 날마다 나무하고 / 보리밭도 멘다. (12쪽/안동 대곡분교 2년 이용옥 71.2.6.)


퇴비를 이고 / 재까지 오니 / 고개도 아프고 / 학교가 보여서 / 가지고 가기 싫어졌다. / 이것을 가지고 가지 않으면 / 선생님한테 혼이 난다. / 또 머리에 이고 / 걷기 시작했다. / 학교에 다다랐다. / 퇴비를 가지고 온 여자아이는 / 보이지 않는다. / 교문을 들어설 때 /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 그래도 꾹 참고 / 교문 앞에 두고 …… (39쪽/문경 김룡 6년 최영순 72.)


아버지는 소를 몰고 나와 막 때린다. / 소는 들로 뛰어다닌다. / 아버지는 소 뒤를 따라가다가 소 고삐를 밟는다. / 소는 확 돌아서 눈물을 흘린다. (64쪽/문경 김룡 5년 송원호 72.4.)


우리는 촌에서 마로 사노? / 도시에 가서 살지. / 라디오에서 노래하는 것 들으면 참 슬프다. / 그런 사람들은 도시에 가서 / 돈도 많이 벌일 게다. / 우리는 이런 데 마로 사노? (101쪽/안동 대곡분교 2년 김종철 69.10.6.)


파랑새야, 어얘 사노? / 사람이 총으로 쏘기도 하고 / 약도 놓고 하면 어얘 사노? / 파랑새야, 너는 약을 놓으면 / 밥이라고 먹다가 죽는다. / 파랑새야, 약을 먹지 말아라. (128쪽/안동 대곡분교 3년 김해자 68.12.11.)


언니가 / 아침에 일어나서 / 밥을 하는데 / 손이 발발 떤다. / 그래 나는 불쌍하다 / 할라 항깨 그렇고 / 안 할라 항깨 안 됐다. (146쪽/상주 청리 2년 전윤희 62.12.4.)


땅을 파니 / 새싹이 돋아나느라고 / 노랗게 올라옵니다. / 따뜻한 니가 / 올라옵니다. (232쪽/상주 공검 2년 김진순 59.3.25.)


논물에 / 하늘이 보인다. / 하늘이 기쁘다. / 그 논길에 걸어가니 / 어리어리하네. / 곧 빠질라 한다. / 고이 고이 갔다. (266쪽/안동 대곡분교 3년 홍옥분 69.6.1.)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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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시를 써요 - 아이들 시 쓰기 이오덕의 글쓰기 교육 6
이오덕 지음 / 양철북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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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읽는 하루

― 오늘 읽기



《우리 모두 시를 써요》

 이오덕

 양철북

 2017.9.25.



  일하다가 다치기에 나쁘지 않습니다. 집안일을 하다가도 누구나 으레 다칩니다. 아이는 다치면서 어느새 낫고, 앓으면서 조금씩 삶과 몸을 알아가면서 천천히 철들어 어른으로 나아갑니다.


  오늘날 숱한 ‘일자리’는 “일하는 자리”가 아니라, “돈을 벌어서 서울에 터를 잡고 버티는 자리”이기 일쑤입니다. “일을 하며 살림을 가꾸고 보금자리를 일구어서 스스로 즐겁고 한집안이 오붓한 길을 바라는 일자리”는 어떤 ‘틀(회사·공장·공무원)’로도 이루지 못 하거나 않습니다. 먼지 하나라도 들어왔다가는 공장 기계가 망가지니, 공장은 그토록 깐깐하고 모질며 차갑습니다. 누구한테나 고르게 맞추려는 틀을 잡으려고 하기에 ‘공직사회’도 똑같이 깐깐하고 모질며 차가울 뿐 아니라, 이러한 틀(회사·공장·공무원)에 스스로 맞추어서 “돈을 버는 자리”를 얻으려고 하니, 아주 마땅히 힘들고 지치게 마련입니다.


  서울(도시)에 있는 일자리 가운데, 햇볕을 넉넉히 쬐면서, 풀꽃과 나무를 늘 마주하는 곳에 세운 일터가 있을까요? 아마 한두 군데 있을는지 모르나, 모든 공공건물과 회사건물과 공장에는 나무는커녕 들풀 한 포기조차 자랄 틈이 없고, 멧새나 풀벌레나 개구리는커녕 매미조차 깃들지 못 합니다.


  그런데 시골에서조차 농약과 비료와 기계와 비닐로 덮어씌웁니다. 이뿐 아니라, 이제는 ‘스마트팜’이라는 이름으로 멀쩡한 논밭에 시멘트로 터를 다져서 유리온실을 때려짓고는 와이파이로 다룹니다. ‘공장식 축산’과 똑같은 ‘공장식 농업’으로 간다면서, 몇 조 원도 아닌, 몇 백 조 원을 들이붓는 나라입니다.


  ‘일’이란 무엇인지부터 처음으로 돌아가서 들여다볼 적에 비로소 실마리를 푼다고 느낍니다. 왜 “지불되지 않는 사회”일까요? 삶자리·보금자리·살림자리·사랑자리가 아닌, 더구나 일자리조차 아닌 ‘돈벌자리’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나라에서 사람들을 ‘돈벌자리’로 내모는 탓이 하나에, 나라가 사람들을 ‘돈벌자리’로 내모는 줄 알면서도 그냥그냥 ‘서울에 깃들어서 돈벌자리를 쥐는 우리 스스로’ 모든 수렁을 깊이 판다고 느낍니다.


  《우리 모두 시를 써요》는 어린이한테 들려주는 길잡이책입니다. 노래를 즐겁게 쓰는 길을 알려주는 줄거리입니다. 그런데 어린이한테 노래쓰기를 들려주고 이끄는 몫은 어른이요, 어른으로서 어린이한테 노래쓰기를 들려주고 이끌려면 먼저 어른부터 노래를 쓸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 시를 써요》는 아이어른이 함께 노래를 쓰고 엮고 짓고 부르면서 어깨동무하는 길을 밝히는 얼거리입니다.


  어른은 어떻게 노래를 쓸 만할까요? 바로 어른 스스로 짓는 일을 쓸 노릇입니다. 아이는 어떻게 노래를 쓰면 될까요? 바로 아이 스스로 누리는 놀이를 쓰면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숱한 어른은 ‘일’이기보다는 ‘돈벌이’에 매입니다. 일을 하는 어른이 아닌, 돈을 버는 서울살이에 매인 몸이라서, 막상 어른부터 노래를 쓰거나 부를 겨를이 빠듯합니다.


  아이도 매한가지입니다. 오늘날 숱한 아이는 서울에서도 시골에서도 못 놀거나 안 놀아요. 온나라 아이들이 손전화에 고개를 처박는데, 그나마 손전화를 가끔 들여다보는 아이들은 이미 배움수렁(학교·학원)에 갇힌 채 온하루를 보냅니다. 어른도 갇히고 아이도 갇혀요. 아니, 어른이 먼저 스스로 가둔 탓에 아이도 가두었다고 보아야 옳습니다.


  아픈 이웃한테 귀를 기울이려면, 서울부터 떠나면 된다고 느낍니다. 사람한테 시달리고 죽는 뭇소리부터 귀를 기울여야, 드디어 사람이 왜 아프고 죽는지 알아본다고 느낍니다. 가을겨울에 봄이면 우리나라는 모든 곳에서 가지치기를 끔찍하게 일삼는데, 길나무 가지를 마구마구 자를 적에 “내 팔이 잘리는구나” 하고 느끼는 분이 갈수록 줄어듭니다. 서울(도시)을 넓히면서 들숲메를 깎아내는 삽질이 날마다 불거지지만, 살갗으로 하나도 안 아픈 사람도 갈수록 늘어납니다. 나라에서 몇 백 조 원에 이르는 돈을 ‘해상 국립공원’ 바다에 쏟아부어서 태양광과 풍력시설을 박는데, 바다가 앓고 아픈 줄 느끼는 사람도 갈수록 사라집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을 키우려면, 먼저 들숲바다가 앓아눕고 죽어가는 소리를 들어야 하지 싶습니다.


  노래를 쓰려면 노래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노래란 ‘유행가·대중가요’가 아닙니다. 놀면서 터져나오는 웃음가락이 바로 노래입니다. 놀이란 노래하면서 짓는 가볍고 신나는 노을빛 같은 몸짓입니다. 노래하고 놀이는 늘 하나입니다. 놀이하기에 노래하고, 노래하기에 놀이하는 얼개이니, 아이어른이 함께 기쁘게 일하고 어울리는 삶자리에 있을 노릇입니다.


  사람이 노래하고 새가 노래합니다. 풀벌레가 노래하고 개구리가 노래합니다. 나무가 노래하고 풀꽃이 노래합니다. 별이 노래하고 바람과 바다가 노래합니다.


  우리가 노래를 쓴다고 할 적에는 이 모든 노래에 귀를 기울이면서 마음을 담는 하루를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온누리 푸른노래에 등돌리는 굴레라면 노래를 모르지요. 온누리 파란노래에 눈감는 쳇바퀴라면 노래를 아주 잊고 잃습니다.


  누구나 쓰는 노래요 글입니다. 누구나 부르고 읽는 노래요 글입니다. 어린이도 어른도 나란히 노래님으로 서는 터전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요. 손을 잡고 걷는 하루를 살고, 어깨를 겯고 웃고 춤추는 오늘을 지어야지 싶습니다. 겉으로 꾸미는 흉내가 아닌, 우리 삶을 우리 손으로 가다듬으면서 속삭이고 나누는 노래쓰기와 글쓰기를 돌아볼 일입니다.


  노래쓰기란 오늘쓰기입니다. 글쓰기란 하루쓰기입니다. 오늘쓰기란 삶쓰기요, 하루쓰기란 살림쓰기입니다. 모든 쓰기는 짓기에 빚기에 가꾸기에 가다듬기에 나누기입니다. 오늘을 숲빛으로 사랑하면서 부드러이 일구는 둘 사이로 빛나기에 스스럼없이 노래가 샘솟습니다.


ㅅㄴㄹ


시는 누구든지 쓸 수 있다. 그리고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 (5쪽)


슬픔을 느끼지 못하고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사람은 참 기쁨도 모릅니다. 그리고 시를 쓸 수 없습니다 … 남의 아픔을 내 아픔같이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리 나이 많아도 어린이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입니다 … 시를 쓰는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7쪽)


무엇이든 멀리 하고 있으면 이해를 못 하고, 싫고, 밉고, 적이 되고 말지요. 옛날의 어린이들은 밤에 개구리 소리를 들었을 때 자장가를 듣는 기분이 되어 잠을 잤는데, 요즘 어린이는 도리어 그 소리가 귀에 거슬려 짜증이 나고 잠이 안 오는 것 같으니 이건 뭔가 크게 잘못된 것 아닐까요? (15쪽)


‘내 그림, 내 글은 내 마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남의 시를 읽을 때 얼마나 훌륭한 말로 유식하게 썼나 하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다만 마음에 울려오는 것이 있나 없나, 곧 감동이 느껴지나 안 느껴지나 하고 보아야 합니다. (34쪽)


감동은 없지만 재미로 읽히는 것, 재미로 불리는 것, 이것이 동요입니다. 이런 동요는 어른들이 씁니다.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더구나 저학년 어린이들에게) 재미있게 읽히기 위해 써 보이는 것이니, 이런 것을 흉내내어 써서는 안 됩니다. (39쪽)


남 따라 그럴싸한 말을 생각해 내어 써서는 결코 시가 되지 못합니다. (89쪽)


유행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유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예 시를 쓸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121쪽)


시가 삶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면 마땅히 일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일하는 기쁨을 보여주는 시가 많아야 할 것인데 사실은 일하는 시가 아주 드뭅니다. 드물다기보다 거의 없습니다. 어른들이 쓰는 시도 그렇고 어린이가 쓰는 시도 그렇지요. (231쪽)


어린이들이 그 깨끗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느낀 것을 그대로 정직하게 말하면 그것이 훌륭한 비판이 되기 예사입니다. 이런 어린이들의 소리를 슬기로운 어른들은 귀담아듣고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250쪽)


+


도리어 그 소리가 귀에 거슬려 짜증이 나고 잠이 안 오는 것 같으니 이건 뭔가 크게 잘못된 것 아닐까요

→ 도리어 이 소리가 귀에 거슬려 짜증이 나고 잠이 안 온다고 하니 뭔가 크게 잘못이 아닐까요

15쪽


‘할머니가’라고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 ‘할머니가’라고 써야 맞습니다

→ ‘할머니가’라고 쓰기를 바랍니다

212쪽


이런 어린이들의 소리를 슬기로운 어른들은 귀담아듣고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 이런 어린이 소리를 슬기로운 어른은 귀담아듣고서 크게 깨닫습니다

250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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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읽는 “이응모임” 9걸음

― 새롭게 있고, 찬찬히 읽고, 참하게 잇고, 느긋이 익히고



때 : 2025.1.19.토. 20시

곳 : 부산 연산동 〈카프카의 밤〉

님 : 숲노래 × 곳간출판사

곁 : 《이오덕 일기》를 미리읽기, 또는 〈카프카의 밤〉에서 사기



줄거리

가. ‘학교’인가 ‘배움터’인가

 ㄱ ‘교도소’로 바뀐 곳

 ㄴ 시골도 서울도 없는 곳

 ㄷ 참살림 없이 참교육만?

 ㄹ 참말을 모르느 거짓말로

 ㅁ 말을 짓기에 사투리


나. 놀이터 없는 나라

 ㄱ ‘놀이기구’가 없어야 논다

 ㄴ ‘애늙은이’와 ‘철바보’

 ㄷ 아직 ‘군대’ 같은 나라

 ㄹ 반공, 애국, 충성, 효도, 희생

 ㅁ ‘일’과 ‘노동’과 ‘근로’


다. 숨막히는 나라

 ㄱ ‘서울’도 ‘시골’도 매캐한

 ㄴ ‘민주화’ 한복판

 ㄷ ‘말’이 없으니 ‘글’도 없는

 ㄹ ‘돈자루’를 못 쳐낸 그들

 ㅁ ‘박정희’ 다음에도 줄서기


라. 하루쓰기

 ㄱ 남이 아닌 나를 본다

 ㄴ 나를 보며 너를 본다

 ㄷ 나하고 너를 아우르는 우리

 ㄹ 사람인 줄 깨닫고 나서

 ㅁ 사람 곁에 새와 들숲바다


+


아홉걸음 : 책을 빼앗겼으나 책을 쓰다 (신경림)


  이오덕 님은 ‘글빗(비평·평론)’을 쓰는 길에 “우리나라 어린이문학 발자취”도 추스르려고 부지런히 책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사슬나라 한복판에 모두 빼앗겼고, 빼앗긴 책은 ‘색동회 윤석중 무리’ 가운데 하나인 이재철한테 넘어갔습니다. 빼앗긴 책을 되찾으려고 기나긴 해를 나라하고 싸웠습니다. 김대중 씨는 나라지기로 서면서 책을 돌려주겠노라 다짐했다지만, 막상 나라지기로 선 뒤에는 입을 씻었습니다.


  그러면 이오덕 님은 책을 왜 사슬나라한테 빼앗겼을까요? 이오덕 님은 창작과비평서가 ‘창비아동문고’를 내기를 바라며 한참 여러 사람들한테 말을 넣었습니다. 백낙청·염무웅 같은 이들하고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했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다가 ‘이오덕이 한삶을 바쳐 모은 책’을 알았고, 이들은 ‘창비 글바치’하고 만나는 자리에서 ‘이오덕이 건사한 책’을 들려주었다지요. 이때에 신경림 씨는 ‘월북문인 시집’을 꼭 ‘원본’으로 빌려서 읽고 싶어했습니다.


  이오덕 님은 서슬퍼런 나라인 줄 뻔히 알기에 섣불리 ‘월북문인 시집’을 둘레에 말할 마음이 없었지만, 이미 창비 사람들이 ‘소문’을 내버렸습니다. 안 빌려주려고 했으나 “읽고서 이튿날 바로 돌려주겠습니다” 하고 절을 하며 다짐을 하기에 어쩔 길 없이 신경림 씨한테 빌려주었는데, 신경림 씨는 이오덕 님한테서 월북문인 시집을 빌린 그날, 이 시집을 바지 뒷주머니에 척 꽂고서 팔자걸음으로 서울 인사동을 누비다가, 천상병 짝꿍인 목순옥 씨가 꾸리는 찻집 〈귀천〉으로 들어서는데, 〈귀천〉에 들어설 적에 뒷주머니에 꽂은 시집을 척 꺼내어 오른손에 높이 들고 팔랑이면서 “어이, 여 봐라. 이게 뭔지 아나?” 하면서 큰소리를 치면서 웃었다지요. 이때에 신경림 씨를 좇던 사복형사가 바로 오른손목을 비틀고 왼손을 붙들면서 “이게 뭔데? 이게 뭐야? 이 새끼야!” 하면서 책을 나꿔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날 신경림을 비롯해 ‘귀천에 있던 모든 문인’이 남영동으로 끌려갔고, 신경림 씨는 “그건 내 책이 아니고 이오덕한테서 빌린 책이오” 하고 털어놓으면서 이오덕 님도 곧바로 남영동으로 끌려갔을 뿐 아니라, 책을 모조리 빼앗겼습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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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 살아있는 교육 2
이오덕 지음 / 보리 / 199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숲노래 책읽기 2024.12.21.


이오덕 읽는 하루

― 시키지 않고 같이 쓰기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

 이오덕

 보리

 1993.8.15.



  글을 어떻게 쓰라고 굳이 가르쳐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글은 한참 못 써도 됩니다. 말부터 차근차근 펼 줄 알면 됩니다. 예전에는 누가 옆에서 말을 받아적거나 담아야 했다면, 요즈음은 손전화로 말을 그대로 담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글을 잘 쓸 만한가 하고 따지거나 배우려 하지 말고, 내 마음을 어떻게 한집안 사람하고 동무하고 이웃한테 고스란히 말로 들려줄 만한가 하는 하루를 되새길 노릇입니다.


  마음을 소리로 담아서 말입니다. 그렇기에 말을 꾸민다면 마음을 꾸민다는 뜻입니다. 나한테 없는 마음을 남한테 잘 보이려는 뜻에서 말을 꾸미면서 마음을 덩달아 구며요. 너랑 내가 한집안을 이루는 사랑으로 지내려고 고스란히 말을 합니다. 너랑 내가 동무에 이웃으로 만나면서 마음을 나누려는 뜻으로 고스란히 말을 하지요.


  다만, 말은 더듬어도 됩니다. 말소리가 새거나 사투리를 써도 즐겁습니다. 글을 쓰며 맞춤길이나 띄어쓰기가 틀릴 수 있듯, 말을 하면서 더듬거나 새거나 어긋날 수 있어요. 게다가 고장마다 다른 삶결이 묻어나는 사투리를 쓸 적에는 말맛이 살게 마련입니다.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는 열일곱 살 언저리 푸름이한테 눈결을 맞춘 길잡이책입니다. ‘말하기’를 살피고 추스르면 될 열일곱 살 푸름이일 테지만, 막상 말보다는 ‘글쓰기’에 꽂힌 푸름이를 살살 타이르는 꾸러미입니다. 굳이 글을 잘 쓰려고 용쓰거나 애쓰거나 힘들지 말라고 달래는 이야기입니다. 글이란 말을 담고, 말이란 마음을 담고, 마음이란 삶을 담고, 삶이란 살림을 담고, 살림이란 사랑을 담고, 사랑이란 꿈을 담으며, 꿈이란 넋을 담습니다. 이오덕 님은 이 얼거리 가운데 ‘삶·살림’까지만 짚으시는데, 우리가 적어도 삶과 살림을 짚을 줄 안다면, 저마다 새롭게 사랑과 꿈과 넋도 짚으면서 이 길을 노래할 만합니다.


  돋보이는 글이란, 남을 깔보는 글입니다. 눈에 띄는 글이란, 남을 밟고 올라선 글입니다. 여러 글 가운데 어느 글이 돋보이거나 뜨일 만합니다만, 모든 글은 ‘남보다 잘 썼구나’ 하고 느낄 적에는 영 허울스럽습니다. 모든 글은 ‘이 글을 쓴 분이 어떤 삶과 마음과 꿈이로구나’ 하고 느낄 적에 그야말로 사랑스럽습니다.


  글밥을 먹건 안 먹건 ‘글이란 곧 말’이면서 ‘말이란 곧 마음’인 줄 모르는 분이 너무 많고, 모르는 척하는 분도 대단히 많고, 배운 적 없는 분이 참으로 많고, 그냥 등지는 분이 숱하게 많습니다. 예전에는 배움책(교과서)이 순 우두머리(독재자)를 치켜세우는 줄거리였다면, 오늘날에는 배움책이 그만 ‘캐릭터북’으로 바뀌었어요. 얼추 2015년 즈음부터 우리나라에는 배움책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여길 만합니다. 알맹이란 사라진 채 손꼽히는 ‘웹툰작가·그림책작가’를 끌어들여서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꾸미는 허울책이 넘쳐납니다.


  지난날에 배움터를 다닌 분이라면, 그저 외우고 시키고 나이로 줄을 매기면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한자리를 거머쥐려고 용썼습니다. 이런 발버둥이 모여서 우두머리(독재자)한테 고분고분한 글담(문학단체·권력)을 한켠에서 이루고, 우두머리를 꾸짖고 나무라면서 뒤에서는 술판·계집질을 일삼는 안쓰러운 글담(문학단체·권력)을 다른켠에서 이루었습니다. 추레한 술판을 저지른 사람은 고은 한 사람뿐이 아니지만, 고은 한 사람 이름만 불거졌고, 고은하고 술판을 걸쭉하게 누리고 함께하던 이들이 여태까지 글담 한복판을 주름잡습니다. 우두머리한테 조아리는 글담도 이제껏 바보짓을 뉘우친 적이 없습니다만, 우두머리한테 맞선다면서 목소리를 높인 글담도 이제까지 얼뜬짓을 뉘우친 적이 없습니다.


  왜 이런 두 갈래 글담이 생겼을까요? 우리 스스로 안 배운 탓입니다. 예전에 배운 사람은 예전대로 꼰대스러운 모습으로 글담을 움켜쥐면서 ‘스스로 마음과 말부터 안 바꿉’니다. 오늘은 오늘 배운 사람대로 꾸미고 덧바르고 매만지는 글담을 휘어잡으니 ‘스스로 마음과 말부터 안 바꾸’는 얼거리는 나란합니다.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를 곰곰이 읽어 본다면, 우리 가운데 어느 누가 스스로 ‘어른’이라는 이름을 쓸 만한지 아리송합니다. 아마 하나같이 ‘어른 아닌 꼰대’이지 싶습니다. 꼬부라지고 꼬인 꼰대입니다. 꼿꼿하게 서서 곱게 피어나서 아이들한테 선선히 자리를 내주는 ‘꽃대’는 도무지 안 보입니다.


  말끝 하나로 ‘꼰대’하고 ‘꽃대’를 가를 만한데, 말끝 하나란 무엇인지 헤아려 봐요. 예전 배움책에 익숙한 대로 외워 버릇한 늙은꼰대는 ‘시골사람이나 어린이나 학교를 덜 다니거나 못 다닌 사람 눈높이’를 살피며 쉽게 쓰는 글은 아예 안 쳐다봅니다. 오늘 배움책에 익숙한 대로 캐릭터북에 길든 젊은꼰대는 ‘꾸미고 덧붙이고 베끼고 흉내내고 멋부리는 굴레’에 사로잡혀 바쁜 터라, 젊은꼰대는 젊은꼰대대로 ‘내가 나답게 서는 나로서 나를 사랑하는 말’을 바라보는 길하고 스스로 등졌습니다.


  어린이한테 들려주는 말이라면, 모든 말마디가 오직 사랑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른이면서 오직 사랑이라면, 어린이한테 들려줄 ‘모든 말마디’를 하나씩 바로잡고 다듬고 고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어른으로 무르익지 않거나, 아직 사랑이 무르익지 않았으면 “뭐 이쯤은 그냥 쓰지!” 하면서 넘어갑니다. 우리가 어른이라면 아이가 묻는 모든 말을 함께 생각할 뿐 아니라, “그래,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나한테 물어보니? 네가 아는 바가 있어서 말하고 싶지만 내(어른)가 어떻게 보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지 않니? 내(어른)가 어떻게 보든 대수롭지 않으니까, 네가 보고 듣고 느낀 그대로 먼저 이야기를 하면 돼.” 하며 길잡이 노릇을 합니다.


  이오덕 님이 그동안 쓴 여러 책에서 밝히기도 하는데, 어쩌면 못 알아차리는 분이 많을 텐데요, 이오덕 님이 어린이나 푸름이한테 글쓰기를 가르칠 적에는 ‘쓰라고 시키기’만 하지 않습니다. 이오덕 어른도 늘 곁에서 같이 씁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글쓰기 교사’나 ‘담임 교사’를 보셔요. 아이들한테 숙제를 맡기거나 시키기만 할 뿐, 정작 같이 쓰는 분은 몇인가요? 그래도 더러 아이하고 같이 쓰는 분이 있기에, 오늘날 우리글과 우리말이 아직 안 죽었다고 느껴요. 그저 너무 드물게 같이 쓸 뿐이라, 아이들 눈빛이 살아나기 어려울 뿐입니다.


  우리가 손쉽게 사다먹는 주전부리를 돌아봐요. 주전부리 껍데기에 어떤 글이 적혔나요? 작은 동사무소·면사무소에 있는 글자락(서류)을 봐요. 배움턱을 디디지 못 한 사람한테는 대단히 어려운 일본한자말이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2024년 12월에 모지리 같은 우두머리가 ‘계엄’을 폈는데, ‘계엄’은 어느 나라 말일까요? 아니 ‘대통령’이란 이름부터 일본말인 줄 아는 사람은 몇일까요? ‘국회·국회의원’도 우리말이 아닌 줄 알아보는 사람은 몇인가요? 우리말은 ‘고장·고을·마을’인데, ‘시도·구군·동읍면’ 같은 일본말을 여태 못 버리거나 못 바꾸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글쓰기란, 말쓰기이면서 마음쓰기이고 삶쓰기에 살림쓰기입니다. 바야흐로 사랑쓰기에 꿈쓰기에 넋쓰기입니다. 이리하여 글쓰기란, 숨결쓰기에 사람쓰기에 하루쓰기입니다. 글쓰기란, 오늘씨기에 나쓰기(너쓰기)에 씨앗쓰기입니다. 글쓰기란, 별빛쓰기에 해쓰기에 바람쓰기에 비쓰기에 숲쓰기에 나무쓰기에 풀꽃쓰기입니다. 머리를 쥐어짜서 겉으로 멋스러이 꾸밀 적에는 ‘글쓰기’가 아닌 ‘꾸미기’입니다. 예전에 아직 국민학교라는 이름이던 무렵에 아이들한테 ‘만들기’를 짐으로 내주기 일쑤였는데, 오늘날 적잖은 글은 ‘글만들기’에 갇혔습니다.


  서로 마음을 쓰듯 글을 쓰기에 서로 반갑습니다. 서로 살림을 짓듯 글을 짓기에 함께 웃습니다. 그러나 꾸미고 만들고 멋부리는 동안에는 그만 담벼락이 높습니다.


  날마다 부지런히 써도 안 나쁩니다만, 이레에 한 꼭지를 써도 아름답습니다. 보름이나 달마다 한 자락을 써도 빛납니다. 철이 바뀌거나 해가 갈 적에 하나를 써도 즐겁습니다. 손으로 짓고 발로 다니고 몸으로 겪고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넋으로 사랑하는 하루를 쓸 줄 안다면, 마음과 말과 글이 나란히 반짝일 만합니다.


ㅅㄴㄹ


아이들에게 저마다 삶을 바로 보게 하여 그것을 소중히 여기면서 정직한 글을 쓰게 하지 않고, 삶을 덮어두고 삶을 등지고 돌아앉아 거짓스런 말장난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어른들의 글을 흉내내는 손재주를 문예 교육이니 창작 교육이니 하는 이름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4쪽)


어른들이 길을 막고 있다고 간단하게 말했지만, 생각하니 어른들의 무지와 횡포는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나지 못하게 억누르는 온갖 교육과 문화의 조건으로 나타나고 있다. (12쪽)


아이들에게 자기가 보고 듣고 한 일을 쓰게 하지 않고 책에 나온 어른들의 글을 따라 쓰게 하거나 책에 나온 낱말을 문법에 맞추어서 쓰게 하는 것을 글짓기 공부라 해서 시킬 때 아이들은 글을 못 쓰게 된다. 쓰더라도 아주 맛없는 글, 죽은 글밖에 못 쓴다. (17쪽)


우리 아이들은 오래 전부터 마음의 숨을 못 쉬고 있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숨구멍을 꽁꽁 틀어막는다. (25쪽)


글쓰기 교육의 목표는 아이들을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으로 키우는 데 있다. (44쪽)


정직하게만 썼으면 그만인가? 정직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정직은 진실을 얻기 위함이다. (60쪽)


죽어가는 흙과 흙 속의 생명을 살리는 교육을 해야 한다. 이것이 삶을 가꾸는 교육이다. (72쪽)


정직하게 쓴 시인데 별로 감동이 오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이 시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거나 삶을 높여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설거지가 지겹고 신경질이 난다고만 했으니까요. (138쪽)


글을 쓴다고 하니 공연히 마음이 굳어져서 근사한 말재주를 부리고, 그래서 어렵고 재미없는 글이 된 것이겠다. 아이들이 이런 선생님의 글을 읽고 닮아갈 것이 아닌가 싶어 걱정된다. (191쪽)


내가 알기로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자기들의 집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 겨레의 마음이었다. (202쪽)


아이들이 쓴 책을 내는 것은 아이들이 보도록 하기 위함이지만, 한편 어른들도 좀 읽어서 배우란 뜻이다. (246쪽)


잘못된 환경과 교육으로 현실을 도피하는 아이들은 자기의 삶과 자기의 말이 아닌 남의 삶과 남의 말로 거짓된 표현을 하는 곡예를 익혀서 그 마음이 점점 더 깊이 병든다. (324쪽)


글을 쉬운 말로 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터인데 도리어 부끄럽게 여긴다. 그리고 아이들이 읽을 수 있게 써 놓은 글은 가치가 없는 글이라 생각한다. (362쪽)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이오덕, 보리, 1993)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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