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건네줄 수 있을 뿐


 책은 건네줄 수 있을 뿐입니다. 알맹이까지 알려줄 수 없습니다.

 맛있는 밥을 손수 차려서 대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맛을 제가 느껴 줄 수 없습니다. 밥을 먹는 사람 스스로 느낄 맛입니다.

 자전거를 탈 때에 흐르는 땀이 우리 몸을 얼마나 시원하게 해 주는지 글로 써서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는 짜릿함과 힘듦을 제가 모두 느껴 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자전거를 타면서 느낄 짜릿함이요 힘듦입니다.

 보는 재미나 구경하는 재미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우리가 몸소 해 보는 재미만큼 클 수 없습니다. 듣는 재미나 읽는 재미가 제아무리 크다 한들 우리가 손수 말하고 쓰는 재미보다 클 수 없습니다.

 논밭에 곡식을 심어서 거두어들이는 보람도 크다고 하지만, 거두기까지 하루하루 땀흘리며 가꾸고 돌본 보람보다 클 수 없습니다. 마지막에 열매를 맺어서 거두는 일이란 그동안 애써 일한 보람 가운데 아주 작은 한 가지입니다.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봅니다. 우리가 함께 나누거나 즐겁게 읽으면 좋을 책을 얼마든지 추천할 수 있고 알려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가서는 나한테 좋을 책은 나 스스로 골라야 해요. 책읽기뿐 아니라 ‘책 고르기’가 아직 서툴다고 한다면, 처음에는 저나 다른 누가 알려줄 수 있겠지요. 그런데, 저라고 해서 모든 책을 다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저는 제가 아는 만큼만 이야기합니다. 저한테 도움을 받는 분이건 다른 분한테 도움을 받을 분이건, ‘어느 한 사람이 살아오며 좋아하거나 즐기던 책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서로서로 어떠한 삶을 꾸리면서 어떠한 넋으로 어떠한 책을 사랑하는가를 짚으려 한다면, 애써 추천받는 책을 찾아 읽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누구나 내 삶을 꾸려야지 남 삶을 구경할 수 없습니다. 내 삶을 돌보며 내 삶에 마음을 쏟아야지 남 삶에 기대거나 마음 쏟을 수 없어요.

 아이한테 삶을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아이한테 지식 또한 물려주지 못합니다. 어버이는 아이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을 뿐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는, 어버이 몸가짐 그대로 아이한테 일깨워 주기만 합니다. 아이는 제 어버이를 바라보면서 하나하나 익히되, 아이 몸과 마음에 걸맞게 받아들입니다. 아이 몸과 마음에 걸맞지 않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버이가 열 마디를 하더라도 이 가운데 한 마디를 알아듣기까지 몇 달 몇 해가 걸립니다. 글을 가르치든 말을 가르치든 여러 해가 걸립니다. 아이가 손수 밥하기를 하도록 이끌자면, 아이가 손수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며 동생을 돌보도록 이끌자면, 얼마나 기나긴 해에 걸쳐 얼마나 숱한 땀을 흘려야 할까요.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서 홀로 우뚝 섭니다. 책읽기라는 길에 접어들고 싶은 분이라면, 누구나 ‘책을 건네줄 수 있으나 읽도록 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홀로서는 책읽기요, 홀로서는 삶입니다. (4344.1.2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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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쓸기 책읽기


 언제쯤 겨울 날씨 풀려 우리 집 얼어붙은 물이 녹을까 하고 기다립니다. 참말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오늘은 풀릴까 이듬날은 풀릴까 손가락 빨면서 기다립니다. 오늘 아침, 하늘은 찌뿌둥합니다. 이 찌뿌둥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아침을 맞이하자니, 그래, 또 눈이로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참말 눈은 솔솔 내립니다. 쌓인 눈이 어느 만큼 녹을 즈음 새로운 눈이 곱다시 내립니다.

 겨울눈은 곱습니다. 자동차 복작대지 않는 멧골자락 겨울눈은 아주 곱습니다. 들짐승이나 멧짐승은 눈을 훑어먹습니다. 겨울에는 멧골자락에서 물을 마실 수 없지만, 들짐승이나 멧짐승은 눈을 훑어먹으면 됩니다.

 문득, 오늘 우리 터전 거의 모두를 차지한다는 도시를 떠올립니다. 도시에서는 어느 누구라도 눈을 훑어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도시에 깃을 들인 비둘기나 까치나 참새는 눈을 훑어먹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자동차 다니기 좋도록 화학방정식 소금을 잔뜩 뿌려 놓았어도 이렇게 녹은 끔찍한 눈물을 마셔야 합니다.

 겨울날, 시골집에서는 눈을 쓸어야 합니다. 손이 시리도록 눈을 쓸고 거듭 쓸어야 합니다. 겨울날, 시골집에서는 바닥에 이불을 잔뜩 깔아 놓고 손을 녹이며 책을 읽습니다. 겨울에는 딱히 논일 밭일 없으니까요. 겨울에는 겨울잠 자는 멧짐승마냥 사람도 따스한 아랫목을 찾아다니며 옹크리며 지냅니다. (4344.1.2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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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인과 책읽기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책을 지난 2007년에 사서 읽다가 퍽 오랫동안 밀쳐 두었다. 놀랍게 썼다 싶은 논문이지만, 이 책은 책이 아니라 논문이기 때문에 ‘책으로 읽는 맛’이 없다. 아파트를 파헤치거나 들여다보는 눈썰미를 찾는 대목에서는 훌륭하다 여길 만하다. 그러나 논문은 ‘보고·분석·정리’에서 그칠 뿐, 논문이 다루는 이야기를 사람들 삶에 어떻게 녹아들도록 하느냐를 짚거나 살피지 않는다. ‘사례조사·통계·비교’ 또한 훌륭하다 할 만하지만,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사랑하거나 아끼는 길찾기에서는 그다지 아름답지 못하다.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책을 네 해 만에 다시 들추어 본다. “대단지 아파트로 대표되는 한국의 주택 문제에 대해 대다수 건축가들과 지식인들의 입장은 모호함을 그 특징으로 한다(111쪽).”는 대목을 읽는다. 건축가들과 지식인들이 아파트라는 곳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밝히는 글이란 거의 없거나 흐리멍덩하다. 프랑스사람 발레리 줄레조 님 글이 아니더라도, 한국땅 건축가나 지식인 가운데 아파트에서 살지 않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거의 다 아파트에서 살아간다. 더구나, 건축가나 지식인이라는 이들이 쓴 글을 읽을 사람 또한 으레 아파트에서 살아간다. 글쟁이(작가)와 즐김이(독자) 모두 아파트사람이라 할 수 있는 한국땅이다.

 가만히 살피면, 건축가나 지식인 스스로 아파트에서 살아갈 뿐 아니라, ‘아파트 굴리기’를 흔히 하는 데다가 ‘돈불리기’를 한다. 이들 삶이 이러하니, 이들 건축가가 건축을 한다든지 지식인이 지식을 펼친다든지 할는지 모르나, 막상 스스로 또아리를 튼 삶터를 놓고 비평을 하거나 논평을 할 일이란 없다. 아파트에서 살아가며 “아파트는 불구덩이야!” 하고 외치는 글쟁이가 어디에 있는가. 밤하늘 별빛이 아닌 밤도시 불빛을 우러러 마지 않는 도시사람 아닌가. 아파트 높은층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면서 아름답다고 여기는 도시사람 아닌가. 건축가라든지 지식인이라든지 하나같이 시골사람 아닌 도시사람인데, 이들 입에서 아파트를 다루는 글이 나오기를 바랄 수 없다. 더구나, 그림쟁이가 아파트를 멋스레 그리는 일이란 없고, 사진쟁이가 아파트를 예쁘게 찍는 일 또한 없다. 제 삶터를 그림감이나 사진감으로 삼지 않는다. 아주 마땅히, 건축가나 지식인은 아파트를 글감으로 삼지 않는다. 아파트는 어떤 지식인한테도 이야기감이 되지 못한다.

 도시에서 동네 골목 조그마한 살림집을 얻거나 빌려 가난하고 수수하게 살아갈 때에 비로소 ‘대규모 재개발’이라든지 ‘4대강 막삽질’이라든지 ‘올림픽과 월드컵 유치’처럼 막나가는 ‘돈에 미친 경제정책’을 올바로 바라보며 올바로 말할 수 있다. 스스로 가난하게 살아갈 마음이 없고, 스스로 가난을 모르면서, 스스로 가난하고는 멀리 떨어진 채 부자요 권력자로서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건축가나 지식인은 입으로는 ‘서민·대중·인민·시민·민중·민초·백성’ 같은 말마디를 읊을는지 모르나, 건축가나 지식인 스스로 서민이나 백성이 되지 않는다. 스스로 살아가지 않으면서 말할 수 없고, 말하기 앞서 알지 못하며, 알기 앞서 깨닫거나 껴안지 못한다.

 누구나 저 스스로 선 자리에 맞게 글을 쓴다. 누구나 저 스스로 살아가는 자리에 따라 책을 읽는다.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으니까 처세책을 보고, 지식을 더 갖추고 싶으니까 지식책을 본다. 더군다나 아름다운 어린이책이나 문학책마저 ‘독후감 실적 쌓기’로 여기며 읽는다. 아이들은 대학입시 때문에 문학책을 외우며, 어른들은 심심풀이로 문학책을 옆구리에 낀다. 아름다운 삶을 즐기면서 밝히는 문학책을 손에 쥐면서도 문학책에 깃든 아름다운 삶을 건드리거나 바라보거나 어깨동무하지 못한다. 어쩔 수 없이, 저마다 저 스스로 선 자리에서 책을 느끼거나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먼저 마음이 착한 다음에 책을 쥐어야 한다. 먼저 참다이 꾸리는 삶을 사랑하고 나서야 책을 들어야 한다. 먼저 곱고 바른 말을 나누는 매무새를 가다듬은 뒤에 책을 마주해야 한다. 껍데기가 그럴싸한 삶이 아니라, 속살이 아름다운 삶일 때라야 아름다운 책을 알아보면서 눈물과 웃음으로 맞아들인다.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동안 책읽기는 부질없다. (4344.1.2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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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거리와 책읽기


 책을 읽고 느낌글을 쓰는 사람들은 으레 줄거리를 줄줄 늘어놓습니다. 읽으며 떠오르거나 좋았다 싶은 줄거리일 테니 이처럼 줄줄 늘어놓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느낌글이란 줄거리 늘어놓기가 아닙니다. 책읽기란 줄거리를 줄줄 읊도록 머리로 외우는 일이 아닙니다.

 줄거리는 조금도 몰라도 되는 책읽기입니다. 줄거리는 하나도 안 밝혀도 될 느낌글 쓰기입니다. 책을 읽겠다 할 때에는 줄거리가 아닌 ‘책을 쓴 사람 삶과 넋’을 헤아릴 노릇입니다. 책을 읽고 나서 느낌글을 쓰고자 할 때에는 ‘이 책이 내 삶에 어떻게 스미는가’를 느낌 그대로 밝힐 노릇입니다.

 책을 읽고 나서 줄거리만 밝히는 사람이란, 책을 못 읽거나 안 읽은 셈입니다. 학교에서는 으레 줄거리만 다루거나 줄거리를 놓고 시험 문제를 뽑아서 내니까, 학교를 오래 다닐수록 책읽기를 하더라도 줄거리 살피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달 수 있겠지요. 그러나, 학교교육을 떠나 나 스스로 책을 사랑한다면 줄거리 아닌 ‘글쓴이 삶과 넋’을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4344.1.20.나무.ㅎㄲㅅㄱ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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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음과 책읽기


 젊기에 책을 읽습니다. 어리기에 책을 모르고, 늙기에 책을 멀리합니다. 젊기에 책을 찾습니다. 어리기에 책보다 재미난 놀이를 찾고, 늙기에 지겨운 책읽기를 귀찮아 합니다. 젊기에 책을 사랑합니다. 마음이 젊고 생각이 젊으며 넋이 젊기에 책을 아낍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젊은이가 책을 사랑합니다. 삶을 사랑하는 젊은이가 늘 책을 손에 쥡니다. 젊음은 나이가 아닌 내 마음밭이요 마음씨요 마음결 얼굴입니다. (4344.1.2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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