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숲노래 책넋
푸른씨앗
마을앞 첫 시골버스를 타고서 읍내로 나가서 순천으로 건너간다. 순천에서 시내버스를 타고서 북초 앞에서 내린다. 가을물이 조금씩 드는 길나무 사이로 걷는다. 어린씨나 푸른씨를 헤아리는 고을지기(지자체장)에 배움지기(학교장)라면, 어린씨와 푸른씨가 늘 다니는 길부터 작은숲으로 가꾸게 마련이다. 새벽바람으로 일찍 움직이기에 느긋하기도 하되, 작은숲길을 순천 한켠에서 만나기에 더 천천히 걷는다.
예전 순천여중이 세빛중으로 이름을 바꾸었단다. 새길을 가며 이름을 뜻깊게 붙인 대목이 놀랍다. 우리는 나라이름을 ‘대한민국’ 아닌 ‘한나라’나 ‘한빛’으로 바꿀 수 있을까? 바꾸지 못 하더라도, 바꾸자는 마음을 낼 수 있을까? 세빛푸른터 길잡이와 푸른씨는 '셋'이라는 낱말에 깃든 속뜻을 얼마나 알는지 궁금하다.
‘하나(나)’가 눈뜨며 ‘둘(너)’을 바라보기에 문득 빛을 틔워서 새롭게 서는 길로 나아가기에 ‘셋(우리)’이니, ‘두길’을 잇고서 펼치니 비로소 판(마당·너비)을 이루어 ‘세모’라 이른다. 셋부터 ‘길목’과 같은 ‘모’를 연다. 하나는 ‘꼭지’이고, 둘은 ‘길’이며, 셋은 ‘너비(밭)’이다. 하나는 ‘씨앗’이고, 둘은 ‘땅’이며, 셋은 ‘하늘’이다. 이리하여 곧 ‘집’을 ‘짓’고서 ‘지낸’다.
푸른씨앗 두걸음(중학교 2학년)을 아침에 만난다. 푸른씨앗 석걸음(중학교 3학년)을 낮에 만난다. 아침낮에 걸쳐 여섯 시간 남짓 마주하고서 보금숲으로 돌아간다. 온하루를 어울렸네. 어느덧 해가 넘어가고, 별이 천천히 돋는다. 어린씨랑 푸른씨를 헤아리는 마을과 고을과 나라일 적에 이 터전에 앞길이 밝다. 모든 길(정책)은 어린씨랑 푸른씨하고 어깨동무를 하는 살림살이로 꾸릴 노릇이다.
어느 푸른씨가 묻는다.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푸른씨가 속으로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느낀다. 느끼기에 살며시 다르게 풀어서 들려주기로 한다. “여러분이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대통령’은 일본말입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처음에 ‘통령’이라고만 적었어요. 이승만이라는 분은 힘(권력)을 아주 좋아하는 터라 일본말을 덥석 받아들였고, 이러면서 그이 스스로 높이려고 ‘대(大)’까지 앞에 붙입니다. ‘대통령’은 바로 일본바라기 이승만이 내세운 창피한 이름입니다. 우리가 이런 얼거리를 제대로 바라본다면, 구태여 나라일꾼 이름에 일본말을 그대로 쓸 까닭이 없으니, 바꿀 수 있어요. 더구나, 나라에서 첫손꼽는 큰일꾼을 맡을 적에는 스스로 고개숙일 줄 알 노릇이니까 ‘대통령’도 ‘통령’도 아닌 ‘나라지기’쯤으로 수수하게 이름을 바꿀 줄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아마 ‘대통령·통령’이라는 일본말을 제대로 들려주거나 가르치는 배움터는 드물 테고, 이 얼거리를 아는 어른도 드물리라. 푸른씨한테 한 가지 이야기를 보태어 들려준다. “저는 지난 뽑기(선거)에서는 ‘기호9번 어린씨’를 종이(투표용지)에 적었습니다.” “네? 9번이요? 얘들아, 9번이 누구야?” “기호9번은 종이에 안 적혔어요. 그래서 제가 종이에 ‘기호9번 어린씨’라고 적어서 냈어요. 나라일이건 고을이건, 어른으로서 일하려고 한다면 맨 먼저 어린씨와 푸른씨를 헤아리는 길(정책)부터 펴야 하고, 언제나 어린씨와 푸른씨 곁에서 일할 줄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아직 이런 일꾼이나 어른이 안 보여서 지난 뽑기에서는 ‘기호9번 어린씨’를 뽑으려고 종이에 적었어요. 다가오는 새뽑기가 있고, 군수와 교육감을 뽑을 텐데, 그때에는 ‘기호7번 푸른씨’를 종이에 척척 적어서 내려고 합니다. 이곳 세빛중학교 여러분을 비롯해서 모든 어린이와 푸름이를 헤아리는 길잡이가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내가 뽑는 종이(투표종이)는 빈종이(무효표)가 아니다. 꿈종이에 씨앗종이를 그린다. 내가 종이에 적는 글은 ‘문학’이나 ‘시’나 ‘창작’이 아니다. ‘예술’도 아니고 ‘사전집필’도 아니다. 오직 우리 살림살이를 숲빛으로 풀어서 사랑으로 그리는 꿈씨앗 한 톨이고, 푸른씨앗 두 톨이며, 사랑씨앗 석 톨에, 마음씨앗 넉 톨이다. 2025.10.29.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