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 숲노래 책넋

2025.3.25. 땀바구니



  서울에서 살며 책마을 일꾼으로 지내던 때에는 전철도 잘 안 탔다. 길삯까지 털어서 필름과 책을 사면서 걸었다. 걷고 새로 걸은 지 쉰 해에 이른다. 나는 두온해(200년) 즈음은 그저 등짐으로 걸으려고 생각한다. 읽는 사람이자 쓰는 사람이기에 걷고 걷고 걸으며 걷는다.


  걷지 않고서 읽거나 쓸 수 있을까? 안 걷는다면 안 읽거나 안 쓴다는 뜻이지 않을까? 기저귀를 손으로 애벌빨래로 하고서 삶기에, 아이들이 자라는 결을 느끼고 읽고 배운다. 옷가지와 이불을 손발로 애벌빨래를 하고서 두벌빨래와 석벌빨래를 다시 손발로 하기에, 우리집 살림결을 헤아리고 살피고 배운다.


  집안일과 살림을 안 하면서 읽거나 쓸 수 있지는 않다고 본다. 이오덕 어른이 가르친 예전 멧골마을 아이들은 다 걷는 아이였다. 집안일과 살림을 짓던 아이였다. “이오덕 글쓰기 배움길” 수수께끼란, 걷기와 짓기와 살림과 들숲메바다라고 본다. “일하는 아이들”이란 온몸과 온마음으로 집살림·옷살림·밥살림을 일구는 아이들이라는 뜻이요,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배우고 익히는 동안 “무엇을 쓸는지 스스로 알아보고 나눌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즐겁게 쓰고 싶다면 걸으면 된다. 기쁘고 반갑게 읽고 싶다면 걸으면 된다. 이른바 누리길(sns)조차 걸어다니는 매무새일 적에 즐겁게 할 수 있다. 손잡이를 쥐고서 부릉부릉 몰기만 할 적에는 다른 일조차 아예 못 한다.


  걸으면 늘 새로 깨어난다. 걷기에 젊지 않다. 걸으니까 늘 새몸이다. 땀으로 씻고서 이슬로 추스르는 길이 걷기이다. 젊은몸을 바라며 걷는 분이라면 오히려 몸이 낡고 닳아서 일찍 늙는다고 느낀다. 일하고 살림하는 몸짓으로 해바람비를 머금으며 걸으면, 늘 눈부시게 튼튼하다고 느낀다.


  책집지기는 일하는 사람이다. 살림지기는 일하는 사랑이다. 손수 가다듬고 추스르고 매만지는 일꾼한테서 손빛을 배운다. 글은 조금 덜 읽더라도 손으로 집안일을 한다. 글은 조금 덜 쓰더라도 두다리로 걸어다니면서 등짐을 나른다. 땀바구니를 주렁주렁 품고서 걷는다. 땀으로 전 옷과 가방을 손으로 빨아서 햇볕에 말린다. 잘 마른 바구니와 가방을 다시 걸치고서 새롭게 마실을 나선다.


ㅍㄹㄴ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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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살림말 / 숲노래 책넋

2025.3.26. 두 시간 기다리기



  시골에서는 두어 시간에 슥 지나가는 버스를 타려고 여러 시간 앞서부터 집일을 하면서 때를 살핀다. 나가는 시골버스와 들어오는 시골버스는 딱 하나씩이다. 이때에 맞추어서 모든 읍내볼일을 바람처럼 휘날리며 빈틈 하나 없이 후루룩 마쳐야 한다. 1분조차 허투루 못 보내는 시골길이다. 게다가 2022년 즈음부터 일요일과 공휴일 시골버스가 차츰 줄더니 2025년에는 아예 안 다니다시피 한다.


  서울·부산·대구·인천·대전·광주뿐 아니라, 순천·강릉·구미·춘천·진주·전주 같은 큰고장에서 “버스 안 다니는 일요일”을 생각할 수 없겠지. 오늘날 시골사람은 자가운전을 안 하면 ‘다리꽃(이동권)’조차 없는 셈이다.


  서울 부산 인천으로 바깥일을 보러 길을 나서면, 눈앞에서 지나가려는 버스나 전철을 그냥 즐겁게 보낸다. 조금 있으면 뒤이어 널널한 다른 버스나 전철이 올 테니까.


  고흥으로 돌아가는 오늘은 가운터(센트럴시티)에서 두 시간 남짓 서서 고흥버스를 기다린다. 다섯 시간이 안 되도록 엉덩이를 붙여야 하니까 기꺼이 서서 기다리며 밖에서 해바라기를 한다. 고흥읍에 닿으면 택시를 불러야 한다. 시골에서 면허증 없이 살려면 오래오래 기다린다. 그러니까 글을 쓰거나 책을 읽으려면 시골사람처럼 살림하면 된다. 길에서 오래오래 서서 기다려야 하니 다릿심을 저절로 기르며 늘 튼튼할 뿐 아니라, 따로 운동을 할 까닭이 없고, 쓰거나 읽을 틈이 허벌나게 많을 뿐 아니라, 언제나 해바람비를 온몸으로 맞아들이기에 숲빛을 스스로 읽을 만하다.


  우리집 네 사람은 날씨알림을 아예 안 보고 안 듣지만 날씨를 미리 알 뿐 아니라 바꾸는 길도 안다.


  봄볕이 뜨뜻하고 곱다. 시외버스는 더워서 땀이 난다. 맨뒤에 앉아서 미닫이를 연다. 별돋을 무렵에 읍내에 닿아서 택시를 부르면, 보금자리에는 깊은저녁에 들어설 테지. 뉘엿뉘엿 해가 기우는 모습을 바라본다. 다시 졸립다.


  집에 닿으면 쓰러져 곯아떨어질 테니 아직 기운이 남은 이즈음 글조각 하나를 얼른 남겨놓는다.


ㅍㄹㄴ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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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26. 한 시간째 꿈을 비는



  서울 가운터(센트럴시티)에서 한 시간째 시외버스를 기다린다. 앞으로 한 시간 즈음 더 기다리면 고흥 가는 버스가 온다. 이곳에서 쩌렁쩌렁 누구를 헐뜯는 수다로 거의 한 시간째 떠드는 아지매 둘이 바로옆에 앉았다. 이 두 분은 왜 이곳에서 남을 뜯고 갉으며 웃을까. 그리 궁금하지 않다. 두 분은 나랑 고흥 가는 버스를 타지는 않을 듯하다. 그저 묵은 노래책 하나를 되읽는다. 이미 여러벌 읽은 문익환 님 노래책이다.


  사슬터에 갇혀서 밤비소리에 눈물지었다는 아스라한 이야기를 돌아본다. 나는 이곳 서울 가운터에서 어떤 소리를 듣고 쓰고 읽는가.


  열린터에서 거친 막말로 누구를 뜯는 소리에 둘레 다른 사람들이 힐끗힐끗한다. 헐뜯쟁이는 아마 그들 목소리에 둘레에서 쳐다보는 눈길을 받아먹는 듯싶다.


  짐을 모두 내려놓은 자리에 “대나무 아닌 대나무 시늉 플라스틱”이 빽빽하다. 나무가 없이 나무 흉내를 하는 서울이라면, 그냥 꾸밈새가 아닌 이곳 삶자락 속낯이리라 본다.


  서울에도 모든 마을과 길에 들꽃이 오르고 나무가 자랄 수 있기를 빈다. 봄맞이새하고 텃새가 나란히 깃들 나무가 우거지기를 빈다.


ㅍㄹ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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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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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25. 악플이란 없다



  우리는 으레 ‘악플’이란 이름을 붙이지만, 정작 ‘악플’은 없다. “배우려 하지 않기에 귀를 닫고 눈을 감고 등을 돌리고 마음을 막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미움불씨”를 볼 뿐이다.


  적잖은 사람들은 ‘악플’이라는 이름인 ‘미움불씨’를 심는다.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쓴소리를 하나도 안 들을 뿐 아니라, 싫은소리가 오히려 피와 살이 되는 이바지말인 줄 몰라보니까.


  우리가 어떤 소리가 ‘싫다’고 느낄 적에는, 우리 스스로 마음을 사랑으로 다스리지 못 하거나 않는다는 뜻이다. 싫은 소리란 없고, 좋은 소리도 없다. 다시 말해서, 누가 나나 너를 추킨다(칭찬)고 해서 즐거울 일이란 없다. 스스로 꿈으로 그린 길을 걸어갈 적에 즐겁다. 남이 나나 너를 추키더라도 하나도 안 즐겁다. 그래서 남이 나나 너를 깎아내리거나 할퀴거나 갉더라도 아랑곳할 까닭이 없다. 그저 그분들은 스스로 안 배우려고 하는 나머지, “그분들뿐 아니라 우리까지 안 배우면서 같이 구렁텅이에 박혀서 쌈박질을 벌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악플’이라는 이름인 미움불씨를 훅훅 날리고 심고 뿌린다.


  가만히 보자. 그야말로 어디에도 ‘악플’은 없다. 이 글자락(악플)을 읽거나 스치는 사람이 확 타오르면서 이글이글 ‘다른 미움불길’을 일으키려는 장작이 있을 뿐이다. 때린이(가해자)는 맞은이(피해자)가 때린이하고 똑같이 주먹을 휘두르기를 바란다. 그래서 둘레 여러 사람들이 “아니, 누가 때린놈이고 누가 맞은놈이야? 둘 다 진흙수렁 싸움판이잖아?” 하고 느끼기를 바란다.


  미움불씨일 뿐인 악플을 심으려는 누가 있다면, 즐겁게 지나가면 된다. 우리는 우리 하루를 꿈으로 그려서 생각씨앗을 심을 뿐이다. 예부터 미운아이한테 떡 하나 더 준다고 했듯이, 미움불씨를 심는 이들한테 빙그레 웃음을 짓고서 지나가면 된다. 우리가 그분들한테 할 만한 말이란 오직 하나이니, “즐겁게 배우셔요. 언제나 즐겁게 하루를 그리셔요.”이다.


  수저를 안 쥐려고 하는 사람한테 억지로 수저를 쥐여 준들, 이분들은 밥을 맛나게 못 즐긴다. 스스로 수저를 쥐고서 느긋이 먹으려고 해야 비로소 맛을 느끼고 밥차림에 깃든 손길을 느끼면서, 밥살림이란 늘 사랑이라는 대목을 어렴풋이 헤아린다. 그러니 미움불씨가 둘레에서 이래저래 퍼지면 가만히 마음을 다독이면서 우리 꿈그림을 다시 생각할 노릇이다. 이다음에 새삼스레 방긋방긋 웃으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면 된다.


  일본말씨로 “무지의 소치”란, 우리말씨로 “어리석은 짓”이다. 또는 “얼뜬 짓”이나 “모르는 짓”이다. 배우려 하지 않으니 모를 수밖에 없고, 모르니 어리석고, 어리석으니 얼뜬다. 얼뜬 짓을 하는 사람더러 “넌 왜 얼뜬 짓을 하니?” 하고 물은들 또다시 미움불씨를 마구마구 뱉을 뿐이다.


  우리는 ‘사람’이라서 악플에 불끈하거나 발끈하기 쉽다고 말씀하는 분이 제법 있다만, 우리는 ‘사람’이기에 어떤 악플이나 미움불씨도 ‘사랑’으로 풀고 녹이고 달래면서, 우리 스스로 그저 스스럼없이 꿈길을 걸어갈 만하다. 굳이 안 달려도 된다. 거닐면 된다. 바람을 읽고 하늘을 마시고 들꽃과 동무하면서 찬찬히 걷는 동안 모든 수수께끼를 풀 수 있고, 언제나 활활 날개를 펴면서 홀가분히 노래할 수 있다.


ㅍㄹ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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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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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24. 아침비하고



  이른새벽에 별이 안 보일 만큼 구름이 덮었다. 이른아침에 먼지잼이 스쳤다. 이윽고 구름이 걷히며 해가 난다. 오늘은 서울로 미리 움직이는 길이다. 어디로 갈는지, 아니 어느 책집에 들를는지 가늠하지 않았다. 집에 쌓은 책더미부터 확 줄이자고 여기며 책을 굶는, 그러나 진작 장만한 책을 주섬주섬 읽는 나날이다.


  그래도 책집에 들를 테고, 두어 곳 들르고서 글붓집을 거쳐서 일찍 짐을 풀자고 생각한다. 책더미 못잖게 글더미도 엄청나게 쌓았다.


  아침비하고 가볍게 놀았다. 우리집 봄꽃내음을 맡고서 우리집 나무빛을 담은 몸으로 움직인다. 우리집 두 아이가 배웅을 했고, 나는 옆마을로 달렸다. 등짐차림으로 달린다.


  열여덟 살부터 묵직등짐차림으로 달렸다. 고2와 고3이라는 죽음밭을 이틀마다 책집마실을 하려고 뒷배움(보충수업)과 혼배움(자율학습)을 제끼고 달아났다. 죽음밭에서 살아남으려고 달아났다. 그때는 30분쯤 쉬잖고 인천 배다리책거리까지 땀을 옴팡 흘리며 달렸다. 길삯 150윈조차 아껴서 책값으로 보탰다.


  아침에 흰새가 우리집 앞을 슥 날았다. 우리집 동박나무 옆으로 스치는 흰새는 고즈넉이 날갯짓소리조차 없이 지나갔다. 논두렁을 달려서 옆마을로 가다가 흰새를 만났다. 어느새 이 나라로 건너온 봄맞이새무리도 나란히 보았다.


  숨을 고른다. 10분 기다려서 시골버스를 탄다. 빈자리에 앉는다. 한참 달리니 이웃 면소재지에서 할매 둘이 탄다. 일부러 내 옆에 서시는데 안쪽에 빈자리가 있다. 그리 가시면 된다. 다른 빈자리를 두고서 내가 앉은 빈자리를 바라셔야 할 까닭이 없다. 오늘까지 쉰 해를 살며 돌아보건대, 나는 버스와 전철에서 1만이 넘도록 내 자리를 할매할배한테 내어주었는데 그동안 “고맙다”는 말을 100이 채 안 되게 들었다고 느낀다. 굳이 안 셌는데, 어느 날 어느 이웃님이 “어쩐지 할매할배들이 모든 자리가 이녁 자리라 여기는 듯 하다”고, “자리양보는 당연한 일이 아닌데 너무 당연히 여겨 고마움이라는 마음을 어르신 스스로 잊고 잃는다”고 들려준 적이 있다. 이 말을 듣고서 한참 돌아봤다. 곁님과 아이들하고 곧잘 이야기한다. 우리는 거저받을 수 있는 일이란 없고, 아주 작은 일부터 고맙다고 잘못했다고 반갑다고 아니라고, 우리 마음을 밝힐 줄 알아야지 싶다.


  아마 나는 이제까지 “고맙다”란 말을 10억 넘게 했을 테고, “잘못했다”는 말을 3억 넘게 했으리라 본다. 앞으로도 두 말은 가없이 내 입에서 흘러나오리라.


ㅍㄹㄴ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나한테는

모든 책집이 책숲(도서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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