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읽는 나 + 읽는 바보

읽는 쪽



  아기는 아이로 자라면서 차츰차츰 철들어 푸른눈을 밝혀서 어느덧 새롭게 어른으로 선다. 아기가 아이를 지나고 푸른날을 지내며 어른으로 서기까지 ‘어버이’가 ‘어른’으로서 제몫을 할 노릇이다. ‘오늘어른’이 ‘다음어른’을 돌보면서 북돋운달까.


  어린이와 푸름이는 ‘어버이’를 바라보면서 배우고 살피면서 새삼스레 가다듬고 추스른다. 어버이는 ‘어머니 + 아버지’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아우르기에 ‘어버이’인 터라, 둘 가운데 한쪽이 낮거나 높지 않다. 둘이 나란할 노릇이다. 우리는 한 손만으로도 쥐거나 들거나 옮길 수 있지만, 빚고 짓고 가꾸려면 두 손을 쓸 노릇이다. ‘빚다’란 ‘비비’듯 반죽을 해서 새롭게 이루는 길을 나타내는데, 빚든 비손(기도)을 하든, 왼손과 오른손을 모은다. 둘을 나란히 다룰 적에 빚고 짓고 가꾼다고 한다.


  이 삶에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란히 있을 노릇이고, 이 터전에는 왼손과 오른손을 나란히 쓰고 다루고 나누는 숨결이 흐를 노릇이다. 한쪽만 옳을 까닭이 없고, 한쪽은 늘 틀려야 할 일이 없다. 아직 덜 배운 탓에 모를 수 있으니, 모자라거나 모를 적에는 서로 사근사근 가르치고 들려주고 이야기하면서 배우면 된다고 본다. 누가 옳으니 그르니 가를 잣대가 아닌, “자, 봐. 이런 일이 있어.” 하고 알려주고, “자, 보렴. 이런 길이 있지.” 하면서 길잡이로 나서면 된다.


  어버이라면 아이 손을 잡고서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하고 말하며 걸음마를 이끈다. 어버이라면 둘이서 아이 왼손과 오른손을 나란히 잡고서 하늘로 붕 띄운다. 어버이라면 아이한테 나비와 벌을 알려주고, 나무와 풀꽃을 알려주며, 바람과 비와 해와 별을 알려준다. 어버이는 아이곁에서 늘 푸른숲이요 파란바다이며 푸른들이자 파란하늘이다.


  왼쪽에 서서 할 일이 있되, 오른쪽이 받쳐야 왼길을 걷는다. 오른쪽에 서서 할 몫이 있되, 왼쪽이 밑바탕으로 있어야 오른길을 간다. 어느 길과 쪽이든 둘이 늘 나란할 노릇이면서, 왼날개와 오른날개를 펴는 몸통인 가운데가 튼튼해야 할 테지. 이래야 하거나 저래야 한다는 틀을 앞세우느라 그저 싸움박질에 넘친다. 왼쪽만 맞거나 오른쪽만 옳다고 내세우느라 더 피튀기게 죽이려 하는구나 싶다.


  왼손과 오른손은 다르기 때문에 ‘두손모아’ 빚고 빌어서 빛을 이룬다. 서로 다른 두 손과 눈과 길과 귀와 다리를 함께 여미는 삶을 바라보아야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어른이 어질게 일어선다. 우리는 두 손을 함께 쓰는 사람이니까. 두 눈으로 함께 보고, 두 귀로 함께 듣고, 둘(너와 나)로 있는 사이를 하늘빛으로 어우르는 사랑이고.


  이제야말로 ‘함께’와 ‘같이’와 ‘나란히’라는 세 마디를 마음에 고이 담고서 이야기를 열 때이지 싶다. 왼오른은 싸울 사이가 아닌, 함께하고 같이하면서 나란히 피어나는 길을 열 사이를 봐야지 싶다. 왼오른손을 나란히 펼쳐야 빚고 짓고 가꾸는 오늘을 노래해야지 싶다.


  숲에는 왼쪽도 오른쪽도 없이 ‘온쪽·온곳’만 있어서 ‘온누리’라고 한다. 들에는 왼길도 오른길도 아닌 ‘온길·온걸음’만 있어서 ‘온밥’을 누릴 수 있다. 아이어른이 함께 숲빛을 품기에 사랑스럽다. 어른아이가 나란히 하늘빛으로 말을 섞기에 아름답다.


  우리는 숲빛을 잊으면서 잃느라, ‘이쪽(아군)·저쪽(적군)’으로 갈라서 미워하고 싫어하면서 괴롭히려고 하는 몹쓸 불씨가 자꾸 번진다. 이쪽으로 들어오면 무슨 짓을 해도 봐주고, 저쪽이나 그쪽이나 다른쪽에 서면 무슨 일을 짓고 베풀어도 도무지 쳐다보지 않는 담쌓기도 나란히 퍼진다. 어른스러운 빛을 잊기에 불씨를 심고, 아이로서 뛰놀 나날을 잃기에 미움씨를 채우는구나 싶다. 온사람을 바라보면서 온숨결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과 꽃잎과 풀잎을 나란히 살피는, 서로서로 손길과 눈길을 살살 다독이면서 살그머니 어루만지고 살며시 살피는 길을 배우고 익히며 나눠야 할 텐데. ‘옳은말’이 아닌 ‘숲말’과 ‘하늘말’을 펴야 할 텐데. 2026.7.6.달.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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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숲

책숲하루 2026.7.10. 노래손질


―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 (국어사전 짓는 도서박물관)

: 우리말 배움터 + 책살림터 + 숲놀이터



  노래책(시집)을 새로 냅니다. ‘날마다 시쓰기’를 하는 나날을 모처럼 추스릅니다. 언제나 종이에 손으로 노래를 쓰는 터라, 종이에 쓴 노래는 차곡차곡 늘어납니다. 여러 일을 돌보면서 ‘종이글을 누리글로 옮기기(타자입력)’는 아예 안 하다시피(또는 못 하다시피) 합니다. 모처럼 ‘누리글로 옮기기’를 하기까지 여섯 달 즈음 들였습니다. 이런 뒤에는 고치고 손질하고 다듬느라 다시 여섯 달을 보냈습니다. 마침내 펴냄터로 보내어 판에 앉힌 뒤에는, 서로 돌려읽기를 자꾸자꾸 하면서 새삼스레 고치고 손질하고 다듬었습니다.


  여느 글책이 아닌 노래책을 낼 적에도 ‘펴냄지기’하고 글손질을 새롭게 합니다. 지은이(작가)는 틀림없이 한 사람이되, 첫 읽님(독자)이자 “가장 가까이에서 오래도록 들여다보는 읽님(최고독자)”이 바로 펴냄지기입니다. 어느 글을 책으로 묶든 펴냄지기가 들려주는 곳을 되짚고 되새기면서 손볼 노릇이라고 여깁니다. 못 고칠 글이란 없습니다. 손질을 안 할 까닭이 있는 글도 없습니다. 손질할수록 한결 빛나면서 새롭게 피어날 글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살림살이는 ‘손질’을 하기에 오래오래 건사합니다. 우리가 품는 모든 살림살이는 ‘손끝’이 닿기에 언제나 반짝반짝합니다. 손을 대지 않기에 아직 피어나지 않습니다. 손을 대기에 피어납니다. 마치 꽃가루받이를 하듯 ‘손길’이 어리면서 꽃으로 피어나는 첫길을 여는 ‘글꾸러미(원고)’입니다.


  어느 분은 ‘작품’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저는 여태껏 ‘작품’을 내놓지 않습니다. 저는 언제나 ‘손살림’을 내놓습니다. 제가 손수 살아낸 하루를 글로 옮기고, 어느 날 문득 꾸러미를 추스르면서 ‘지난손길’을 되새기면서 가다듬습니다. 이윽고 책이라는 종이묶음으로 선보여서 이웃님과 나눌 적에는 ‘새손길’이 닿아서 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새로 태어날 노래책(시집)은 ‘작품·문학작품’이 아닌 ‘열매’입니다. 시골에서 두 아이랑 곁님이랑 하루하루 일군 보금숲에서 거둔 빛살을 온나라 모든 이웃님하고 나누고 싶은 열매이기에 종이묶음인 책으로 내놓습니다. 이 열매는 단맛도 짠맛도 신맛도 쓴맛도 떫은맛도 아닙니다. 그저 숲맛과 들맛과 멧맛과 바다맛과 하늘맛과 별맛을 손맛으로 그러모은 길입니다. 손으로 빚고 일구고 가꾼 열매이기에, 이 열매인 노래책을 손에 쥘 이웃님도 손끝으로 천천히 따라쓰기(옮겨쓰기)를 해보시기를 바라지요. 함께쓰면서 함께짓습니다. 함께읽으며 함께갑니다. 모든 노래는 온누리 뭇사람 손길을 타면서 파랗게 일렁일렁 싱그럽게 부는 바람이 됩니다.


ㅍㄹㄴ


* 새로운 우리말꽃(국어사전) 짓는 일에 길동무 하기

http://blog.naver.com/hbooklove/28525158


*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 지기(최종규)가 쓴 책을 즐거이 장만해 주셔도 새로운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짓는 길을 아름답게 도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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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읽는 나 + 읽는 바보

읽는 목소리 (검열)



  이제는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라는 얌전(고상)한 이름으로 바뀐 곳에 조그맣게 깃든 ‘간행물윤리위원회’라는 데가 있다. ‘간행물윤리위원회’는 나라에서 가위질을 대놓고 하는 곳이었다. 이 나라에서 태어나는 모든 글(책·신문방송·교과서·잡지)과 그림(영화·사진·영상·예술)과 노래(음반)는 맨 먼저 ‘간행물윤리위원회 검정필·심의필’을 받아야 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은 ‘검정필·심의필 가위질’을 신나게 휘둘렀다. 김대중 무렵에도 이들 가위질은 걷히지 않았다. 노무현 무렵에 이르러서야 겨우 ‘검정필·심의필 가위질’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정태춘·박은옥 씨는 ‘검정필·심의필 가위질’을 받지 않겠다는 뜻으로 ‘무단음반’을 한참 내놓았고, 서태지 씨가 ‘검정필·심의필 가위질’을 받느니 “음반을 안 내겠다”고 외친 뒤로 하루아침에 “음반 검정필·심의필 가위질”은 자취를 감추었다.


  어떤 목소리이든 홀가분하게 낼 수 있어야 들꽃누리(민주국가)이다. 외곬로 길들이거나 물들일 적에는 사슬나라(독재정치)가 판치게 마련이다. 여태 ‘검정필·심의필 가위질’을 치워내려고 기나긴날에 걸쳐 숱한 사람이 땀흘렸고 피흘렸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나라가 거꾸로 돌아간다. ‘입틀막법(2026.7.7.허위조작정보 근절법)’이 태어나고야 만다. 그야말로 ‘입틀막’을 하겠다는 재갈이자 차꼬이다. 겉으로는 ‘거짓말(가짜뉴스)’을 솎아낸다고 하지만, 들꽃길(민주주의)은 ‘이야기(대화·타협)’로 모든 일을 풀어가는 얼거리일 뿐이다. 재갈이나 차꼬를 물리는 입틀막으로는 어떤 들꽃길로도 못 간다. 이름만 바꾼 ‘검정필·심의필 가위질’을 선보이면서 잘못값(제제금·과징금·벌금)을 크게 물리겠다고까지 하는 판이다.


  “거짓말만 바로잡겠다는데 뭐가 잘못이냐?” 하고 말하는 분은 참으로 가위질에 휘둘리는 셈이다. 나라(정부)가 잘못 매기고 엉뚱하게 따져서 서른 해나 쉰 해 동안 눈물로 지새운 분이 수두룩하다. 우리 스스로도 나라가 휘두르는 몽둥이와 주먹질에 호되게 시달렸다. 굴레(일제강점기·군사독재)를 벌써 잊었을까? 조선 500해에 걸쳐서 ‘임금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한 마디라도 읊다가는 목아지가 날아가던 일을 잊었을까? ‘임금뿐 아니라 벼슬아치(양반·사대부) 앞에서 굽신거리지 않으면, 땅바닥에 엎드리고 고개숙이지 않으면 목숨을 빼앗기던 일’을 어느새 다 잊었을까?


  우리는 ‘이야기’로 서로 만나서 말을 나누면서 일을 풀 노릇이다. ‘가위질(근절법)’을 앞세워서 미리 도려내고 값(벌금)을 잔뜩 물리는 재갈을 세우지 않아야 할 일이다. 나라는 사람들이 누구나 왼쪽에 서건 오른쪽에 서건 가운쪽에 서건 스스로 즐겁고 아름답게 어울리는 길을 틔우는 일에 땀흘려야지. 애먼 칼자루를 나라가 쥐면서 휘두르지 말아야지.


  입맛에 맞는 추킴말(주례사비평)만 들으면서 구름에 올라앉고 싶은 무리가 늘 가위질이라는 무시무시한 주먹을 휘둘렀다. 지난날(1970∼2010)에는 ‘간행물윤리위원회 검정필·심의필’이었다면 오늘날(2026)에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라는 허울좋은 이름으로 우리 입에 재갈을 물리고 팔다리에 차꼬를 채우면서 입틀막을 하려는 짓이다.


  눈을 떠야지 싶다. 민낯을 읽어내고 참빛을 보아야지 싶다. 이 나라는 ‘국가보안법’부터 아직 멀쩡하다. ‘십지지문채취’라는 넋뜬짓을 아직 고스란히 한다. 엊그제(2026.7.5.) “아이돌 리센느 거제사투리를 난데없이 일베말씨라고 헐뜯은 김현지 피디(이분은 '어른 김장하'를 찍었다고 한다)와 조국 씨”가 있는데, 이렇게 뜬금없이 사투리를 깎아내리며 비아냥대는 ‘거짓말(가짜뉴스)’조차 ‘법’이 아닌 ‘들불’로 다스려서 쳐내면 될 뿐이다. 말을 나누면서 마음을 틔우는 곳이 들꽃누리이다. 다 다른 사람이 나란히 말을 섞으면서 생각을 밝히는 터전에서 어깨동무가 싹튼다. 우리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모든 허튼짓을 바로 우리 손으로 다시금 걷어낼 일이다. 2026.7.6.달.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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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읽는 나 + 읽는 바보

읽는 노나냐가누



  “무섭노”는 ‘일베말씨’일 수 없다. “집이노·어디노·뭐하노·밥먹었노”도 일베말씨일 수 없다. 지난날에는 경상사람이 흔히 쓰면서 온나라 여러 고장에서도 곧잘 썼다면, 이제는 꼭 경상사람이 아닌 어느 곳 사람이든 홀가분히 쓸 수 있는 말씨이다.


  말끝에 ‘-노’를 붙이기도 하지만, ‘-나’나 ‘-냐’나 ‘-가’나 ‘-누’를 붙이기도 한다. ‘-니’를 붙이거나 ‘-는데’나 ‘-쟈’나 ‘-자’나 ‘-제’를 붙이기도 한다. “무섭노”뿐 아니라 “무서운데”나 “무섭쟈”나 “무섭제”나 “무섭누”나 “무서운가”나 “무섭냐”처럼 말끝이 다르다. 예전에는 고장과 고을과 마을에 따라서 다른 말씨였다면, 요즈음은 서로서로 이웃으로 어울리면서 넘나드는 말씨로 번진다.


  이미 오래도록 자리잡은 말씨 가운데 하나인 ‘-노’인데, 이 말씨가 마치 ‘일베말씨’라고 못박으면서 “쓰면 몹쓸놈!”이라고 얽매려 한다면, 참으로 어쭙잖은 노릇이다. 말은 나라(정부)에서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따져서는 안 되는 살림길이다. 굴레(독재정권)를 씌우려는 무리는 예부터 ‘말(언어)·눈금(도량형)’을 함부로 바꾼다고 했다. 이 말씨는 이래서 나쁘고 저 말씨는 저래서 좋다고 섣불리 눈금을 매기는 짓은 언제나 사람들 사이를 쩍쩍 가르면서 싸움불씨를 붙이게 마련이다. ‘이쪽(아군)’과 ‘저쪽(적군)’을 가르려고 말부터 가르는 셈이다.


  나는 인천에서 나고자랐어도 ‘노나냐가누’를 비롯한 온갖 말끝을 다 듣고 나란히 썼다. 워낙 인천은 “서울에 깃들지 못 하지만 서울에 깃들려 하는 숱한 사람이 온나라에서 모이는 곳”이라서, 그저 인천에서 나고자라기만 해도 ‘온곳말씨’를 듣고 나눈다. 전라이웃을 마주하면 전라말씨를 듣고, 강원이웃을 만나면 강원말씨를 나누고, 경상이웃을 어울리면 경상말씨를 주고받는다. 서울도 지난날에는 “우리나라를 이루는 고을(지역)” 가운데 하나라서, ‘표준말’이 아닌 ‘서울사투리’가 따로 있다. 《민중자서전》(뿌리깊은나무)을 읽은 분이라면, 글을 하나도 모르며 일한 서울내기가 들려주는 서울사투리가 무척 낯설어 거의 못 알아들을 수 있다. 요즈음 자리잡은 ‘서울표준말’은 억지로 짜맞추며 태어났다. 새뜸(신문방송)에 내고, 나라(정부)에서 내놓는 “틀에 박은 말씨로 만들었다”고 할 만하다.


  어떤 이는 떠난 누구를 놀리거나 비아냥대거나 헐뜯으려는 꿍꿍이로 ‘-노’를 마구마구 붙일는지 모른다. 어떤 이가 쓰는 말씨는 사투리라 하더라도 말끝이 늘 다른 줄 헤아리지 않으니 억지스러울 수밖에 없다. 어떤 이가 엉뚱하면서 얄궂은 꿍꿍이로 ‘-노’를 마구잡이로 붙인대서, 사투리일 뿐 아니라 그저 ‘우리말씨’인 ‘-노’를 쓰면 몹쓸놈(혐어표현자)이라고 갈라놓아도 될까? 여태 사투리를 쓰던 사람뿐 아니라, 사투리를 쓰는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는 사람을 그냥 싸잡아서 ‘-노’를 쓰면 안 된다고 읊는 잣대야말로 “어깨동무(민주·평화·화합)와 어긋나게 윽박지르면서 쇠그물에 가두는 몹쓸짓”이라고 느낀다.


  말을 가두려는 무리는 사람들 마음을 가두려는 속셈이다. 말을 옭아매려는 무리는 사람들이 마음껏 이야기를 펴는 길을 몽땅 끊고 잘라서 끼리끼리 담벼락을 치기를 바라는 뒷뜻이다. 말을 쫙쫙 갈라서 싸움을 붙이는 불씨를 퍼뜨리는 무리는 사람들 스스로 생각을 지피는 씨앗인 ‘말씨(씨앗인 말 한 마디)’를 짓밟는 주먹질이기도 하다.


  “누가 그랬노”나 “누가 그랬누”나 “언제 왔노”나 “언제 왔나”나 “이제 온나”나 “이제 오는가”나 “맛있게 먹노”나 “맛있게 먹쟈”나 “사랑하노”나 “사랑한데이”나 “뭘 찾노”나 “뭘 찾는감”이나 그저 마음과 마음을 잇는 씨앗인 말씨이다. 말씨를 함부로 건드리면서 손가락질을 하려는 무리는 부디 넋을 차리고서 마음에 이슬 한 방울을 맑게 두기를 빈다. 갈라치면서 싸움을 부추기려고 하지 말자. 말과 마음을 맑게 읽으면서 사람이 되어야 할 노릇이다. 2026.7.5.해.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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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리센느 '무섭노' 논쟁에 등판…"부산 사람 구별법 참조하길"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448/0000624448?sid=102


"무섭노" 걸그룹의 이 말, 사투리? 일베식 표현?...정치권도 논란 가세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8/0005381612?sid=102


'노' 구별법 올린 조국…이준석 "이 시대의 '쥬고엔 고짓센'"

https://n.news.naver.com/article/057/0001957000


‘일베몰이’ 당한 리센느 원이, 사투리 쓰는 게 죄는 아니잖아[스경연예연구소]

https://m.entertain.naver.com/home/article/144/0001124453


리센느 “무섭노”가 일베 말투? “부산말 달라” “지나친 낙인”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5/0003535418?sid=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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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읽는 나 + 읽는 바보

읽는 눈길



  나는 전남 고흥에 2011해에 깃들 때까지 ‘후박나무’를 몰랐다. 후박나무를 몰랐으니 ‘후박엿’도 몰랐다. 둘레에서 아무렇게나 읊는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호박엿’”이라는 말도 이냥저냥 지나쳤다. 뱃사람이 먹는 후박엿은 후박알과 후박꽃차례와 후박잎과 후박껍질을 고아서 얻는다. ‘박달나무·동박나무’처럼 ‘박’으로 잇는 말씨이고, 지붕에 하얗게 크게 열리는 ‘박’은 ‘밝다’를 가리킨다. 뒤늦게 알고 보니 ‘朴’이라는 한자는 “후박나무 박”이다.


  후박나무에 깃들고 알을 낳는 나비가 있다. 까만 바탕인 날개에 푸른띠가 눈부시게 돋는 나비로, 여름이 무르익을 무렵 마당과 마을을 반짝반짝 밝힌다. 푸른띠를 날개에 놓은 나비가 휙 날면 놀랍도록 곱다. “푸른띠가 있는 나비”이지만, 나비책에는 ‘청띠제비나비’란 이름으로 오른다. ‘푸른띠제비나비’라 해야 올바른데.


  종이에 찍거나 새기거나 옮긴 글씨를 첫줄부터 끝줄까지 죽 넘긴다고 해서 ‘읽기’라 하지 않는다. 책을 쥐고서 종이를 넘기면 ‘넘기다’이다. 글씨를 죽 훑으면 ‘훑다’이다. 사람을 위아래로 훑거나 차림새를 훑는들 ‘읽어내’지는 못한다. ‘훑다’는 겉모습만 문득 스치는 몸짓을 가리킨다. 책을 아무리 많이 사더라도, 한 쪽 두 쪽 넘기더라도, 모든 글씨를 훑더라도 “읽는 눈길”하고는 멀다.


  팔등에 나비나 잠자리나 풀벌레를 앉히기에 나비나 잠자리나 풀벌레를 알아보지는 않는다. 먼발치에서 보더라도, 살짝 만나고서 헤어지더라도, 나무에 앉은 모습을 지켜보더라도, 온마음에 사랑을 담으면 비로소 ‘읽어낸’다. 읽어낼 때라야 누구나 속으로 가만히 깊게 넓게 고르게 곱게 맞아들인다.


  우리가 ‘읽다’라고 여길 일을 하려면, 바람과 바다가 일듯 먼저 스스로 밑바닥으로 차분히 가라앉고서 이제부터 어디로 가려는지 그릴 노릇이다. 나부터 고스란히 바라보고서 모든 짐을 내려놓을 적에, 새롭게 나아갈 길을 틔우고서 마주할 수 있다. 일으키면서 일구고, 일구는 길을 찬찬히 가꾸고 돌보는 사이에, 차근차근 새기며 가다듬어 익히기에 ‘읽다’라 한다. 수수하고 오랜 우리말을 짚자면, ‘읽다 = 일다 + 익다’이다. 바람이 일면서 바람을 익히니 읽는다. 바다가 일면서 바다를 익히니 읽는다. 그런데 일으켰어도 익히지 않으면 덧없다. 익히려면 먼저 꿈씨를 그리고 심어서 일굴 노릇이다.


  우리가 읽는 눈길이라면, “온누리에 책이 얼마나 많은데! 이 많은 책을 언제 다 읽어!” 같은 푸념이나 핑계를 안 댄다. 그저 사읽고, 그대로 삭이고, 곰곰이 품어서 풀어내는 하루를 살 테지. 가리지 않으며 헤아리고 살펴야 읽을 수 있다. 이 책은 이래서 가리거나 저 책은 저래서 손사래치면, 아예 안 읽는 셈이다. 이 책은 이런 대목을 배우려고 쥐고, 저 책은 저런 눈썰미를 알아보려고 잡을 적에 비로소 ‘읽기’라는 조그마한 길로 접어들 수 있다.


  자, 보자. 스승이 말하는 대로 안 들으며 뭘 배우겠는가. 〈취권〉이라는 보임꽃에 잘 드러난다. 젊은이는 스승이 시키는 집안일을 지겨워한다. 발차기나 지르기부터 알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스승은 발차기도 지르기도 안 시킨다. 그저 집안일을 시킬 뿐이다. 스승은 어느 날 문득 “넌 이미 다 익혔어.” 하고 속삭인다. 집안일을 하는 동안 온몸이 고르게 자랐고, 마음과 몸을 다스리는 길을 깊이 들였다고 알려주지.


  집안일이란 ‘살림’이다. 살리는 일이기에 ‘집일·집안일’이다. 우리가 글을 쓰거나 책을 읽고 싶다면, 먼저 ‘살림’인 집안일부터 즐겁게 오래오래 할 노릇이다. 집안일부터 도맡을 적에 솜씨길을 익힐 수 있다. 재주부터 들이면 하나같이 자랑질로 기울어서 망가진다. 책을 읽고 싶으면, 아이를 낳거나 돌보면 된다. 책을 읽으려면 바람과 바다부터 읽고서, 나무랑 나비를 읽으면 된다. 다들 거꾸로 갈 뿐 아니라, 샛길로 빠지면서 땀을 안 내려고 하니까 ‘읽는시늉·읽는흉내·읽는척’으로 뒹군다. 2026.7.1.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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