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어디에서나 :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든, 스스로 하늘을 품고 풀꽃나무를 사랑하면서, 바람결에 묻어나서 흐르는 노래를 맞아들인다면, 하루를 즐겁게 짓는 길이 되지 싶다. 큰고장(도시)에 살 적부터 스스로 즐겁지 않다면, 나중에 살림을 숲(자연)으로 옮기더라도 스스로 즐겁지 못한 나머지 그저 헤매고 말더라. 어디에서나 스스로 홀가분히 꿈꾸는 사랑일 적에는 시나브로 숲을 가까이 두기 마련이지만, 이 마음결이라면 큰고장에서도 빛나는 눈으로 우리랑 한집님이랑 이웃님이랑 동무님을 모두 넉넉히 아우르는 살림이 될 테지. 달아나듯 큰고장을 미워하거나 싫어하면서 떠나면 다시 큰고장으로 가는 길이 된다. 큰고장에 넘치는 매캐한 바람을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말자.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 어디에서나 스스로 하늘빛을 머금는 어질며 참한 사랑님인 줄 느끼자. 우리 어버이가 나를 숲터에서 낳아 숲아이로 돌보았든, 우리 어버이가 나를 아파트에서 낳아 아파트아이로 키웠든,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어디에서나 우리가 스스로 닦는다. 해는 푸른별을 고루 어루만진다. 바람은 푸른별을 두루 달랜다. 눈비는 푸른별을 골고루 품는다. 매캐한 큰고장이 갑갑하다면 그 큰고장 귀퉁이나 골목이나 빈터에 씨앗을 심어 보자. 앞으로 숲터에 보금자리를 짓는 꿈을 그리면서 ‘오늘 살아가는 이 큰고장’을 숲정이로 가꾸어 보자. 씨앗을 흙에 묻는 손길로 풀꽃나무를 쓰다듬는 마음길을 다스리는 하루를 누리기에 우리 몸은 어느새 숲구름을 타고서 홀가분히 날아오른다. 2007.4.5.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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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살림말


운동권 책읽기 : 다섯 학기만 다니고 그만둔 대학교인데, 이동안 ‘운동권 친구·선후배’는 많았다. 나는 운동권이 아니었다. 검은돈을 거머쥐려는 대학재단이며 이사장이랑 싸울 적하고, 민주하고 어긋난 나라꼴에 맞서는 집회·시위에는 으레 함께했지만, 한두 시간 뒤에는 내 일터(신문사지국 또는 학교도서관 또는 구내서점)로 가야 했다. 새벽마다 신문을 돌리고, 날마다 학교도서관·구내서점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해야 했기에 집회·시위에 웬만하면 나가더라도 살짝 있다가 바로 내 일터로 달려가는 나날이었다. 모든 곁일을 마치면 신문 돌리던 자전거를 몰아 헌책집으로 갔다. 이때에 ‘운동권 친구·선후배’를 으레 불러서 “야, 같이 책 보러 가자!”라든지 “선배, 책 보러 가시죠?” 하고 팔짱을 끼고 잡아당기는데, 다섯 학기에 걸쳐 딱 사흘만 꼭 세 사람이 나를 따라서 책마실을 갔고, 이때마저도 책을 산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다들 하는 말은 “책 읽을 틈 없어!”였다. 나는 이들한테 내내 따졌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서 무슨 운동을 한다고 그래?” 이들은 “공부를 안 해도 알 건 다 알아.” 하고 대꾸했고 “네가(선배가) 뭘 아는데?”로 맞받았다. 운동권 친구·선후배는 대학교를 다니는 내내 운동을 하느라 책을 읽을 틈이 없다고 했다. 이들은 대학교를 마친 뒤에는 돈을 버느라 책을 읽을 틈이 없다고 했다. 이들은 정치일꾼이나 행정일꾼이나 회사원이 된 뒤에는 정치랑 행정이랑 회사일이 바쁘기에 또 책을 읽을 틈이 없다고 했다. 아, 이들은 책을 읽을 틈만 없지 않더라. 이웃을 들여다볼 틈이 없고, 삶을 바라볼 틈이 없고, 숲을 마주할 틈이 없고, 아이랑 놀 틈이 없고, 하루를 돌아볼 틈이 없고, 꿈을 그릴 틈이 없고, 그야말로 아무런 틈이 없다. 그저 ‘운동’만 한다는데, 무슨 운동을 하는지 나로서는 영 모르겠다. 그 운동권 사람들이 국회의원이나 장관이나 작가나 평론가나 피디나 기자나 영화감독이나 교사나 이거나 저거나 참 많이 하는데, 나는 그냥그냥 하나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하고도 만나지도 말을 섞지도 않는다. 2020.6.26.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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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아이 : 우리 집 두 어린이는 아기수레에 탄 적이 없다. 두 어린이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업거나 안은 품에서 자랐다. 언제인가 곁님이 말했다. “아기를 수레에 태우는 짓은 차마 못하겠어요. 우리나라는 가뜩이나 길이 안 좋아서 반반한 길이 없어 수레를 밀면 덜덜 떨릴 텐데, 아기를 수레에 태우면 아기는 내내 덜덜 떨리는 채 살아야 해요.” 두 아이를 낳기 앞서 혼자 살 무렵에는 늘 자전거를 탔기에 우리나라 길바닥에 얼마나 엉터리인지 잘 안다. 곁님 말마따나 엉터리투성이 길바닥에서 아기수레를 굴리자면 아기는 수레를 벗어나는 날까지 ‘덜덜덜거리는 길바닥’에서 둘레를 쳐다보아야 한다. 잠인들 제대로 잘까? 포대기나 처네에 감겨 어머니나 아버지한테 업히는 아기는 온누리에 둘도 없이 해맑은 낯빛이기 마련이다. 아기를 업은 어버이는 한여름에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아기를 업어야 하는데, 우리 집 두 아이를 떠올리노라면, ‘아기는 어버이 땀내음에 밴 싱그러운 사랑’을 고스란히 받아먹으면서 착하고 아름답게 크는구나 싶다. 업혀서 자라는 아기는 어버이를 사랑하고 이웃을 아끼는 마음을 저절로 배운달까. 이와 달리 수레에 덜덜덜 끌리면서 보내야 하는 아기는 어버이를 사랑하기 어렵겠다고 느낀다. 내내 덜덜 떨리면서 길바닥을 구르면서 시끄럽고 고단하니 자꾸 악에 받치고 사나운 마음으로 바뀌는구나 싶다. 아기를 수레에 앉히지 않으면 좋겠다. 아기수레가 아예 없으면 좋겠다. 아기는 안거나 업으면 좋겠다. 어버이는 아기를 안거나 업기만 하면서도 아기한테 사랑을 가르치면서 물려주고, 아기는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배우면서 물려받으니까. 수레에 탄 아기는 뭘 보고 느낄까? 덜덜질 빼고 뭐가 있을까? 2020.6.26.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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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잡이 : 생각해 보면, 슬기로운 길잡이는 과학책도 만화책도 사진책도 그림책도 시집도, 그 어느 책도 가리지 않고 읽는다. 길잡이라는 사람은 가릴 까닭도 일도 자리도 없겠지. 처음부터 한켠으로 기울지 않고, 나중에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비로소 길을 볼 테니까. 길잡이라면 스스럼없이 마주한다. 길잡이라서 선선히 맞아들인다. 길잡이일 적에는 받아들이는 바람에 새롭게 마음을 얹어 따스하거나 너그럽게 바꾼다. 스스로 배울 대목은 배우고, 즐길 대목은 즐기고, 노래할 대목은 노래하면서 살림을 짓는 길을 가기에 길잡이라고 할 만하다. ‘아는 길만 가는 사람’은 길잡이가 아니다. 아는 길만 가는 사람은 ‘종’이거나 ‘심부름꾼’이거나 ‘허수아비’이거나 ‘쳇바퀴·톱니바퀴’이다. 길잡이는 알든 모르든 어느 길이든 간다. 왜냐하면, 길잡이는 길잡이 스스로뿐 아니라 우리한테 ‘판에 박히거나 틀에 박히거나 뻔하거나 똑같거나 되풀이하거나 쳇바퀴를 돌거나 제자리걸음을 시키는 길’이 아닌 ‘어제 갔던 길도 새롭게 보도록 이끄는 길’로 다스려 내는 사람이거든. 1991.3.5.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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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しるべ:考えてみると、賢い道しるべは、科学の本も漫画も写真本も、絵本も、詩集も、どの本も区別なく読む。 道しるべという人はわきまえるわけも仕事も席もないだろう. 片方に偏らず、後に片方に偏らず、初めて道を見ることができます。 道しるべなら気兼ねなく向き合う。 道しるべなので快く迎え入れる. 道しるべである時は受け入れたため、新しく心を入れ替えて暖かく寛大に変える。 自ら学ぶべきことは学び、楽しむことは楽しみ、歌うべきことは歌いながら、生活を営む道を行くのに道しるべと言える。 「知る道だけ行く人」は、道案内人ではありません。 知る道を行く人は「奴隷」か「使い魔」か「案山子」か「車」か「歯車」だ。 道しるべは知るか知らんがどの道を行く。 なぜなら、道しるべは道しるべ自らだけでなく、私たちに「板にはまったり型にはまったり同じだったり、繰り返したり、車輪を回ったり、足踏みさせたりさせる道」ではなく、「昨日行った道も新しく見えるように導く道」として治める人だから。 1991.3.5. (作 : 森の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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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석줄글

[시로 읽는 책 447] 누가



  절집에는 절이 있겠지

  하늘은 하늘에 있잖아

  마음은 마음밭에 있고



  누가 절집(예배당·교회)에서 하느님을 찾는다고 이야기하면, “네, 그러시군요. 절집에 가셔서 절을 만나시네요.” 하고 말합니다. 누가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가르친다고 이야기하면, “아, 그러시군요. 학교에 아이를 보내서 길들이시네요.” 하고 말합니다. 아이 스스로 마음속 하늘님을 바라보도록 이끌어 준다면, 아이는 언제 어디에서나 아름답고 사랑스레, 또 즐거이 노래하는 하루를 누린다고 생각해요. 웃을 줄 아는 마음이 동무를 사귀는 마음이 되겠지요. 웃고 노래하는 마음으로 지내기에 스스로 배우겠지요. 다른 곳에서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 아니라, 다른 어느 누가 아니라, 웃을 줄 아는 마음이 스스로 있을 적에 누구나 하늘님이라고 봅니다. 절집에 가면 언제나 절을 볼 뿐, 하늘도 하늘빛도 하늘노래도 만나지 못하더군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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