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말하는 글쓰기

― 이승철, 홍일선, 이재무 그대들은 잘 계신가?



  1998년이었지 싶다. 그해에 대학교를 그만두었는데, 동아리에서 늦도록 즐거운 이야기잔치를 누렸다.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은 술병을 앞에 놓고서 ‘숨기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고 말하기’를 돌아가면서 했다. 숨기려 하거나 거짓말을 하면 술잔을 비우기로 하고서 한 사람씩 ‘털어놓기’를 돌아가면서 하는데, 아무도 ‘속마음 드러내기’를 못했다. 돌고 돌아 나한테 오기 앞서 다른 이들 모습을 볼 적에 ‘왜 이렇게 다들 속마음을 못 드러내지?’ 싶었으나, 정작 내 몫이 되니 나도 내 속마음을 못 드러냈다. 달이 가고 해가 흘러 2018년에 새삼스레 생각한다. 이제는 굳이 가슴에 묻어둘 일은 아니라고 여긴다. 이제는 말할 수 있어야지 싶다. 말하지 않으니 서로 모른다. 말하지 않기에 안 달라진다. 이름을 숨기니까 다들 모를 뿐 아니라, 그 이름인 사람도 스스로 달라질 낌새가 없다. 좋은 님한테 “난 네가 좋아” 하고 말할 수 있어야겠지. 궂은 이한테 “난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할 테고. 나는 1999년에 출판사 영업부 일꾼으로 들어가면서 ‘책으로만 보던 숱한 작가나 문인’을 ‘얼굴로도 보고 목소리로도 듣고 술자리에서나 일터에서나 으레 마주했’다. 출판사 막내였기에 모든 술자리에 ‘술 따르는 젊은 사내’로 불려갔고, 문단뿐 아니라 책마을 ‘어른’이라 일컫는 이들은 ‘젊은 가시내’뿐 아니라 ‘젊은 사내’가 따라 주는 술이 아니고는 마실 생각을 안 했다. 더구나 막내인 내가 술자리가 힘들어 그만 집에 가야 한다고, 전철 끊어지니 돌아가야 한다고 하면, 문단 어른이나 책마을 어른은 으레 한 마디를 했다. “야 임마, 너희 출판사 사무실에서 자면 되잖아. 사무실 바닥에 신문지 깔고 자면 되지.” 이러면서 밤을 지나 새벽에 이르도록 붙잡으니 매우 고되었다. 그때에는 몰랐지. 참으로 몰랐지. 왜 나이든 ‘문단 어른·책마을 어른’이라는 이들이 젊은 가시내뿐 아니라 젊은 사내 손이나 허리나 볼이나 허리나 엉덩이나 허벅지를 쓰다듬거나 만지는 줄 까맣게 몰랐지. 그러나 속으로는 되게 더러웠다. 그래서 그때에는 짜증스럽고 싫어서 막술을 마시면서 그런 더러운 손길을 잊으려 했다. 그들은 몰랐으리라. 그들이 더러운 손길로 내 볼을 살살 쓰다듬는 짓이 싫어서 술잔을 한칼에 털어넣은 까닭을. 그들은 그저 내가 술을 잘 마시는 젊은 사내인 줄로만 여겼겠지. 이제 나는 그런 짜증스럽고 싫고 더럽던 이들 손길을 잊고자 막술을 마시지 않는다. 맛난 술을 가끔 알맞게 즐기려 한다. 이러면서 한 가지를 생각한다. 지난날 어떤 ‘어른들께서’ 어떤 짓을 했는지, 문득문득 떠오르면 ‘그분들 이름’을 하나하나 털어놓을 만하구나 싶다. 최영미 시인이 고은 시인 이야기를 들추는 시를 썼다는 얘기를 듣고 곧장 1999년 그해부터 2004년까지 보고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참 지저분한 고은 시인이라서 그이 시집은 안 쳐다본다고 하는 ‘책마을 여자 어른’이 많았다. 최영미 시인을 비아냥댄 이승철이라는 시인이 있는데, 이이는 2004년에 나를 해코지한 사람이다. 이승철이라는 시인이 나를 해코지할 적에 이녁 곁에 홍일선 시인이 나란히 앉아 이죽거리면서 “야, 왜 너 안 받아 줘? 네가 받아 줘야지? 이 xx가 말이야?” 하면서, 이승철하고 홍일선 이 두 사람은 성추행을 손사래치는 나한테 “문단이나 출판계에서 너 같은 놈 매장시키는 건 일도 아니야.” 따위를 읊었다. 이 둘 곁에 이재무 시인이 있었고, 이재무 시인은 “난 소주만 있으면 돼.” 하면서 이승철·홍일선 두 사람이 나를 해코지하는 짓을 흘려넘겼다. 이른바 방관자. 이들이 하는 짓이 참 터무니없기도 했지만, 2004년 이날 뒤로 문단 어른이나 책마을 어른이라는 분, 또는 작가나 평론가라는 이들을 굳이 만나지 않기로 했다. 이들이 있는 모임이나 자리에 누가 나를 데려가려고 해도 몽땅 손사래쳤다. 그들이 나를 문단이나 책마을에 못 들어오게 막든 말든, 나 스스로 문단에 발을 들이지 않기로 하고, 이들이 권력을 부리는 큰 출판사하고는 등돌리기로 했다. 이 때문에 앞으로 열 해쯤 먹고살 길이 막혀 굶을 수 있었으나, 이쯤 얼마든지 견디면서 헤쳐나가자고 여겼다. 황해문화 김명인 편집위원이 매체와 만나서 한 말을 기사로 읽어 보는데, ‘절대다수 남자 문인이나 평론가’는 ‘동조자나 방조자’라는 그럴싸한 말은 하되, 그런 짓을 한 사람들 이름은 하나도 안 밝힌다. 말만 그럴싸하게 하고서, 어떤 잘난 문단 어른이 잘난 짓을 하셨는지 하나도 안 밝히고 그대 가슴에만 묻어둔다면, ‘절대다수 남자 문인이나 평론가는 동조자이자 방조자’ 따위 말은 읊지도 말기를 바란다. 그런 마음이라면 평론질도 대학교수질도 그만두기를 바란다. 작품을 비평할 적에만 작가 이름을 들지 말 노릇이다. 막짓이나 막말을 일삼은 이들을 나무랄 적에도 그들 이름을 들기를 바란다. 이제는 말하는 글쓰기가 되기를 바란다. 청소 좀 하자. 먼지가 너무 오래 쌓여서 더께가 되었다. 더께를 벗기자니 아주 박박 문질러야 한다. 다들 소매를 걷어붙이자. 지저분한 집을 참말로 말끔히 치우는 글쓰기를 하자. 2018.2.12.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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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란 무엇이고 글쓰기란 무엇일까요?

‘글을 쓰는 길’을 놓고서

조금 더 부드러이 밝히려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같은 때에는

서로 만나기 어려운 만큼,

이렇게 누리판에서 누리집에 띄우는 글로,

이야기를 엮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갈무리하고서

《나는 글쓰는 사람입니다》란 이름을 붙여

‘글을 쓰는 길’ 이야기를

책으로 여미려고 생각합니다.

즐거이 누려 주셔요.


+ + +


숲노래 글쓰기

[나는 글쓰는 사람] 4. 좋아하지 않으면



  저는 책을 좀 읽는다고 할 만합니다. 다만 많이 읽는다고는 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모로 일거리가 많고, 집살림이랑 아이를 지켜보는 하루가 있기에, 책은 으레 꼬랑지 자리예요. ‘좀 읽는 책’이라면 한 해에 즈믄(1000)을 가볍게 넘깁니다. ‘많이 읽는 책’이라면 한 해에 골(10000)을 거뜬히 넘기겠지요.


  아무튼 종이꾸러미는 이쯤 읽는데, ‘책을 좀 읽었’기에 좋거나 훌륭하거나 아름다운 책을 이웃보다 한결 잘 알아본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좋은 책을 찾고 싶다면 마음에 “아, 오늘은 좋은 책을 만나고 싶어” 하는 생각을 심어요. 훌륭한 책을 만나고 싶으면 마음에 “음, 오늘은 훌륭한 책을 사귀고 싶어” 하는 생각을 심고, 아름다운 책을 곁에 두고 싶을 적에는 “그래그래, 오늘은 아름다운 책을 곁에 두겠어” 하는 생각을 심지요.


  우리는 늘 스스로 찾는 대로 찾아냅니다. 스스로 찾으려는 마음이 없다면 언제나 못 찾아요. 스스로 무엇을 찾고 싶은가 하는 마음이 없을 적에는 마땅히 아무것도 못 찾습니다. 옛말에 “업은 아기를 허둥지둥 찾는다”고 했고 “파랑새는 우리 집 마당에서 산다”고 했어요. 우리나라에서든 이웃나라에서든 ‘코앞’에 있을 뿐 아니라 ‘품’에 안았으면서도 ‘마음이 없는 몸’일 적에는 하나도 못 알아보는데다가 값어치조차 헤아리지 못한다고 이야기했어요.


  흔히들 “좋은 책을 어떻게 찾아요?”라든지 “좋은 책 좀 알려주셔요!” 하고 묻습니다만, 이렇게 물을 까닭이 없어요. 좋은 책을 찾고 싶으면 스스로 ‘좋은 마음’으로 바꾸면 됩니다. 스스로 좋은 마음으로 바꾸면 우리 눈길은 언제나 좋은 눈길이 되고, 우리 손길이며 발길은 좋은 손길에 발길로 거듭나거든요. 쪽종이에 책이름을 몇 가지 적어 놓고서 책집에 찾아가는 손님은, 언제나 ‘쪽종이에 적은 책이름’만 바라보고 그쳐요. 둘레에 아름책이 잔뜩 있어도 못 보고 못 느낍니다.


  글길이란, 글을 쓰는 길이란, 언제나 마음길이면서 삶길이에요. 어떤 마음인가요? 글을 쓰면서 좋아하는 마음인가요? 글을 쓰면서 사랑하는 마음인가요? 글을 쓰면서 아프거나 눈물짓는 마음인가요? 어떤 마음이어도 돼요. 우리는 어떤 글이든 다 쓸 만해요. 때로는 기쁜 이야기를 쓰고, 때로는 아픈 이야기를 쓰며, 때로는 벅찬 이야기, 때로는 시린 이야기, 때로는 괴로운 이야기, 때로는 놀라운 이야기, 때로는 꿈같은 이야기 …… 그야말로 우리 스스로 마음에 심은 그대로 다 씁니다.


  좋아하지 않으면 만나지 못해요. 사랑하지 않으면 품지 못해요. 즐기지 않으면 어우러지지 못해요. 노래하지 않으면 그리지 못해요. 춤추지 않으면 헤아리지 못해요. 하나씩 생각해 보기로 해요. 무엇을 좋아하나요? 무엇을 좋아하고 싶나요? 내 나름대로 좋아하는 길을 느끼거나 찾았다면, 이다음을 생각해 봐요. 어떻게 사랑하고 싶나요? 우리는 스스로 어떤 사랑인가요? 사랑은 어디에서 샘솟거나 흐르나요?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가요?

.

― 때로는 좋아하는 길로 가되, 마침내 이를 곳은 사랑하는 꿈길이네

.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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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란 무엇이고 글쓰기란 무엇일까요?

‘글을 쓰는 길’을 놓고서

조금 더 부드러이 밝히려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같은 때에는

서로 만나기 어려운 만큼,

이렇게 누리판에서 누리집에 띄우는 글로,

이야기를 엮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갈무리하고서

《나는 글쓰는 사람입니다》란 이름을 붙여

‘글을 쓰는 길’ 이야기를

책으로 여미려고 생각합니다.

즐거이 누려 주셔요.


+ + +


[나는 글쓰는 사람] 3. 배우고 싶은 길



  몇 시에 눈을 뜨고 일어나고 싶다면 ‘몇 시에 일어나야지’ 하는 마음을 어디엔가 새깁니다. 누구는 이 마음을 몸에 새깁니다. 몸에 이 마음을 새기면 딱 그때가 되어 저절로 눈을 뜨고 일어나요. 누구는 이 마음을 시계에 새깁니다. 시계에 이 마음을 새기면 딱 그때에 시계가 울리기를 기다리면서 귀를 쫑긋 세우는 몸이 되어요. 다만 이때에는 몸 아닌 시계에 마음을 새겼기에 시계가 울릴 적에 귀찮아하거나 미루려는 생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몸에 걱정이라는 마음을 새기면 몸은 우리가 새겨 놓은 걱정이라는 생각에 맞추어 움직입니다. 몸에 기쁨이라는 마음을 새기면 몸은 우리가 아로새긴 기쁨이라는 생각에 따라 움직여요. 몸에 무엇을 새겨 볼까요?


  몸이 아닌 옷에다가 마음을 새기는 분이 많아요. “이 옷을 입어야 예쁠까?”라든지 “저 옷을 둘러야 멋질까?” 하고 생각하지요. 이러한 마음이 되면 이 옷이나 저 옷이 아닐 적에는 우리 몸이 호졸곤합니다. 잘 헤아려 봐요. 우리 몸이 어떤 옷을 걸치든 즐겁고 산뜻하며 아름답다는 생각을 새긴다면, 우리는 어떤 옷을 갖추어도 언제나 즐겁고 산뜻하며 아름다워요.


  얼굴가루를 발라야 얼굴이 고울까요? 우리 얼굴에 고운 마음을 새길 적에 참으로 고운 빛이 흐르지 않을까요? 속으로는 근심걱정에다가 짜증이 가득한데, 얼굴로만 웃으려고 하면, 억지웃음(감정노동)을 지으려면 몸이 대단히 힘듭니다. 근심이 있으면 근심이 있다고 털어놓고서 풀 노릇입니다. 짜증이 났으면 짜증이 달아나도록 개운하게 다스릴 일이에요.


  우리한테 근심걱정이나 짜증이나 두려운 마음이 찾아들었다고 해서 싫어하거나 꺼리지는 말아요. 그저 모두 어느 한때 거쳐서 지나가는 길이에요. 이와 매한가지인데, 반갑거나 고맙거나 즐거운 일도 어느 한동안 슬며시 거쳐가는 길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삶을 차분하게 바라보는 마음이면 되어요. 들뜨거나 조바심을 내지 말고 하나하나 지켜보면 되어요.


  글쓰기란, “배우고 싶은 삶을 글씨라는 생각씨앗으로 담는 놀이나 일”이라고 할 만합니다. “배우고 싶은 삶”이란 ‘졸업장학교를 다니면서 수업을 듣거나 교과서를 외우는 길’이 아닙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밥을 차리고 치우며, 수다를 떨고, 빨래를 해서 말리고 걷고 개어 제자리에 놓는 살림이란 늘 배움길입니다.


  책을 읽거나 강의·수업을 들어야만 배우지 않아요. 늘 배웁니다. 아기는 어버이 품에서 아늑히 지내면서 내리사랑을 배워요. 어버이는 아기를 고요히 품으면서 치사랑을 배우지요. 비오는 날은 비내음을 지켜보면서 맞아들이고 배워요. 후끈거리는 날은 햇볕을 듬뿍 받아들이면서 배워요. 마음을 틔우고서 오늘 맞이한 하루를 새롭게 헤아리는 꿈을 몇 마디 말씨로 얹어 봐요. 배움길은 삶길이고, 삶길은 사랑길이고, 사랑길은 살림길이고, 살림길은 어느새 말길에 글길이 됩니다.


― 새로 보고 듣고 겪고 하니까 모두 배우는 하루, 배우고 싶은 길이란 살아가고 싶은 길


ㅅㄴㄹ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520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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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란 무엇이고 글쓰기란 무엇일까요?

‘글을 쓰는 길’을 놓고서

조금 더 부드러이 밝히려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같은 때에는

서로 만나기 어려운 만큼,

이렇게 누리판에서 누리집에 띄우는 글로,

이야기를 엮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갈무리하고서

《나는 글쓰는 사람입니다》란 이름을 붙여

‘글을 쓰는 길’ 이야기를

책으로 여미려고 생각합니다.

즐거이 누려 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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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쓰는 사람] 2. 보여주기



  잘 쓴 글이나 못 쓴 글이란 없습니다만, 때로는 ‘잘 쓴 글’하고 ‘못 쓴 글’을 가르곤 합니다. 먼저 ‘잘 쓴 글’이란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즐기고 사랑하면서 스스럼없이 쓴 글입니다. 다음으로 ‘못 쓴 글’이란 우리 삶을 즐기거나 사랑하지 못한 채 쓴 글이거나, 우리 삶을 감추거나 꾸며서 쓴 글이거나,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베끼거나 흉내내거나 따라하듯 쓴 글이거나, 남한테 보여주려고 쓴 글입니다.


  아기 이야기를 다시 해본다면, 아기는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목을 가누거나 젖을 빨거나 뒤집기를 하거나 기거나 서거나 걷지 않아요. 아기는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웃지 않아요. 다만, 아기가 울 적에는 좀 다를는지 모르나, 아기는 스스로 바라는 길이 있어서 하나하나 나아갑니다.


  우리가 쓴 우리 글을 왜 남한테 보여주어야 할까요? 우리가 쓴 우리 글은 바로 우리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면서 우리 삶을 새롭게 읽도록 스스로 되새기려는 이야기꾸러미이지 않은지요?


  글은 보여주어도 되지만, 굳이 보여줄 까닭이 없기도 합니다. 우리가 쓴 글을 보여주고 싶다면 ‘우리 마음을 보여주고 싶을 때’이면 됩니다. 내가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가고 사랑하고 살림하는가를 마음으로 이야기하고 싶을 적에 ‘우리가 쓴 글을 비로소 보여줍’니다. 우리 삶을 자랑하려고 글을 보여주지 않아요. 내가 쓴 글이 멋지거나 그럴싸하거나 훌륭하거나 대단하다고 여기면서 남한테 보여주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공모전이나 신춘문예 같은 데에 붙을 뜻으로 쓰는 글은 ‘글이 아니’라고 할 만해요. 돈이나 이름이나 힘을 얻으려고 써서 보여주려고 한다면 ‘자랑·겉치레·꾸밈질·흉내’에 그칩니다.


  우리는 바로 우리 스스로 읽으려는 뜻으로 글을 씁니다. 때로는 곁님이나 아이나 어버이나 동무한테 ‘난 이렇게 생각해’라든지 ‘내 마음은 이래’ 하고 이야기하려고 글을 써서 보여줄 수 있어요.


  이러한 길을 헤아릴 수 있다 싶으면 비로소 붓을 들어요. 이러한 길을 다스릴 수 있구나 싶으면 이제 셈틀을 켜서 글판을 쳐요. 아직 이러한 길을 모르겠다면 붓을 내려놓아요. 좀처럼 이러한 길이 갈피가 안 잡힌다면 셈틀을 켜지 마요.


  글감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는 애써 안 따져도 됩니다. ‘표현기법’이나 ‘수사법’은 배우지 맙시다. 오직 우리 삶을 바라보고 생각하며 마음에 담기를 바라요. 우리가 쓸 글이란 우리 삶이요, 우리가 쓴 글을 읽을 사람은 바로 우리 스스로입니다. 이 대목을 제대로 헤아려서 깊디깊이 깨달았다면 언제라도 무슨 이야기이든 글을 쓸 만합니다.


― 나는 내가 스스로 살아가며 사랑하는 마음을 나누고 싶어서 스스럼없이 글을 써서 보여준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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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란 무엇이고 글쓰기란 무엇일까요?

‘글을 쓰는 길’을 놓고서

조금 더 부드러이,

그리고 오늘날 같은 때에는

서로 만나기 어려운 만큼,

이렇게 누리판에서 누리집에 띄우는 글로,

이야기를 엮으려고 합니다.


《나는 글쓰는 사람입니다》란 이름을 붙여

‘글을 쓰는 길’ 이야기를

책으로 여미려고 생각합니다.

즐거이 누려 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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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쓰는 사람] 1. 글이란



  걷고 싶다면 걸으면 됩니다. 걷지 못하는 몸이라면 걸을 수 있기를 꿈꾸면 됩니다. 걷지 못하는 몸인데 어떻게 ‘걸을 수 있는 꿈’을 품느냐고 물을 만하지요. 꿈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봐요. 꿈은 ‘앞으로 이루고 싶어서 오늘부터 마음에 심는 새로운 생각’입니다. 이 꿈이 있기에 누구나 즐겁게 자라고 튼튼하게 서요. 꿈이 없다면 스스로 마음에 생각을 새로 심지 않으니 언제나 쳇바퀴를 돌리는 몸짓이고요.


  갓 태어난 아기가 목을 가눌 줄 알고, 어버이하고 눈을 맞출 줄 알며, 어버이가 들려주는 말을 알아차리고, 어느새 손아귀에 힘을 주더니, 젖을 힘차게 빨고, 슬슬 뒤집으려 하며, 이내 기어다니다가 우뚝 서서 걷기까지 얼마쯤 걸릴까요? 아이를 돌보았거나 보살피는 어버이라면 곰곰이 돌아보셔요. 아직 아이가 없는 몸이라면 둘레에서 아기하고 아이를 가만히 보셔요.


  어쩌면 하루아침에 말을 조잘조잘 터뜨린다든지 우뚝 설 뿐 아니라 달리는 아기가 있을는지 몰라요. 네, 그런 아기가 드물게 있겠지요. 그러나 거의 모두로구나 싶은 아기는 ‘목 가누기’ 하나조차도 여러 달 걸립니다. 서기까지도 제법 걸리지요. 서서 걷기까지는 또 얼마나 오래 걸리나요?


  지나고 보면 몇 해 사이에 모두 이루는 일이라지만, 갓 태어난 아기라는 몸으로 볼 적에는 모두 엄청난 허물벗기요 거듭나기입니다. 하루 내내 그 꿈, 그러니까 걷고 싶다는 꿈, 서고 싶다는 꿈, 달리고 싶다는 꿈, 말을 터뜨리고 싶다는 꿈, 스스로 똥오줌을 가리고 수저를 쥐고 싶다는 꿈으로 살아내었기에, ‘얼핏 보면 누구나 으레 해낸다 싶은 그 일’을 이루는 하루가 되어요.


  스스로 글을 못 쓴다고 여기신다면, 이렇게 여기셔도 됩니다. 다만, 스스로 글을 못 쓴다고 여기는 마음이라면 앞으로도 글을 못 쓰겠지요. 그렇지만 ‘글을 못 쓴 나’는 어제에 내려놓고, 오늘부터는 ‘글을 쓰는 나’를 꿈으로 그리면 좋겠어요.


  다시 아기를 생각해 봐요. 아기가 ‘잘 걸어야’ 하나요, ‘걸으면’ 되나요? 아기가 ‘잘생긴 얼굴’로 태어나야 하나요, ‘아기로서 아기다운 얼굴’로 태어나면 되나요?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입니다. 다 다른 우리가 글을 쓴다면 모두 다른 글이 태어나야 맞아요. 다 다른 사람 가운데 잘나거나 못난 사람은 따로 없어요. 모두 다르기에 모두 값지며 아름다운 숨결입니다. 이 모습처럼, 우리가 쓰는 글은 더 잘난 글이나 더 못난 글이 따로 없습니다. 그저 ‘내가 쓴 글’입니다. 그래서 글쓰기를 하려고 할 적에는 무엇보다 이 마음이 되시기를 바라요.


― 나는 내가 스스로 살아가며 사랑하는 오늘 하루를 스스럼없이 쓴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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