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푸른말씨를 심는 푸른사람

― 작은배움숲 7 작은손으로 쓰는 작은노래



  국립국어원 낱말책에서 ‘습득’을 뒤적이면, 줍거나 얻는다는 뜻인 한자말 ‘습득(拾得)’하고, 배우거나 삭인다고 하는 한자말 ‘습득(習得)’ 사이에, 중국 당나라 무렵 중이라는 ‘습득(拾得)’이라는 사람이름을 뜬금없이 실어놓습니다. 그저 뜬금없고 얄궂습니다. 먼 옛날 당나라 무렵 중이라는 사람이름을 왜 우리 낱말책에 실을까요? 그런데 이처럼 중국사람이며 영국사람이며 독일사람이며 미국사람이며 일본사람이며 온누리 여러 나라 사람이름을 잔뜩 실은 국립국어원 낱말책입니다.


  곰곰이 짚자면, 주울 적에는 ‘줍다’라 하면 됩니다. 얻을 적에는 ‘얻다’라 하면 됩니다. 배울 적에는 ‘배우다’라 할 노릇입니다. 익힐 적에는 ‘익히다’라 할 노릇입니다. 이런 일을 ‘拾得’이나 ‘習得’으로 가려서 쓸 까닭이 없습니다.


  손가락을 써서 ‘집’습니다. 손아귀로 ‘잡’습니다. 바닥에 있기에 ‘줍’습니다. 바닥에 받치려고 ‘짚’습니다. 안쪽으로 모으려고 ‘접’습니다. 지나가려는데 조이는 듯한 틈이나 길이라서 ‘좁’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늘 쓰는 말마디부터 차근차근 짚으면서 생각길을 넓힐 노릇입니다. 말씨를 차분히 가다듬지 않으니 눈썰미가 좁아요. 해마다 새롭게 씨앗이 깃들어야 푸르게 우거지는 숲인데, 막상 우리 스스로 마음자리에 말씨(말씨앗)를 제대로 못 심거나 안 심기 일쑤입니다. 때로는 얄궂거나 뒤엉킨 채 어지럽히는 말치레에 휩쓸리기도 합니다.


  집밖으로 나가서 바깥일을 보노라면 숱한 사람을 마주합니다. 웬만한 분은 손전화를 쓸 적에 소리를 끄거나 소릿줄을 귀에 꽂습니다. 그렇지만 소리를 크게 틀면서 노닥거린다든지, 소릿줄은 그냥 안 챙기는 이가 곧잘 있습니다. 탈거리(버스·전철)에서 소리를 쩌렁쩌렁 키운 이가 둘레에 있으면 어수선한데, 어리건 젊건 늙건 철없이 군다면, 사람살이를 하나도 안 배운다는 뜻이로구나 싶습니다.


  늦여름이 지나고서 첫가을로 접어든 가을에 풀벌레 노랫가락이 한결 깊고 너르면서 반짝입니다. 다 다른 숱한 풀벌레는 노랫가락으로 소리너울을 일으킵니다. 이와 달리 숱한 사람은 노래길이나 노래꽃이나 노래빛이 아닌 시끌마당으로 뒹굴어요. 꽃빛하고는 먼 채 읊어대는 말이라면 마음마저 없거나 메마른 소리늪엘 테지요. 누구보다 이녁 스스로 갉는 소리불늪이라고 할 테고요.


  사람은 손수 심은 씨앗에 따라서 낟알과 열매를 거둡니다. 사람이 손수 안 심어도 바람과 새와 벌레와 비와 뭇짐승이 심은 씨앗이 익으며 낟알과 열매를 얻습니다. 푸른숲은 푸른씨가 푸른빛으로 번지고 어울리면서 모두를 살리고 밝히는 푸른터를 이룹니다. 우리 사람은 어떤 길인가요? 우리는 사람으로서 푸른말(푸른말씨)을 심는 푸른하루인지요? 우리는 사람으로서 푸른글(푸른글씨)을 나누는 푸른살림인가요?


  오늘(2026.9.14.)은 부산으로 ‘이야기마실’을 갑니다. 이웃님이 전남 고흥 시골자락에 깃든 〈숲노래 책숲〉으로 찾아와서 ‘푸른책’이며 ‘씨앗책’을 함께 읽으면서 배움자리를 누리기도 하고, 제가 어느 먼길이든 사뿐히 나서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배움자리를 마련하기도 합니다. ‘강의·강좌·강연’이나 ‘수업·공부·클래스’ 같은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아서 ‘이야기마실’을 가서 ‘이야기꽃’을 함께 피운다고 말합니다. 낱말 하나부터 처음부터 새롭게 지어서 나누면, 서로서로 생각을 새롭게 밝히는 말씨(말씨앗)를 마음에 심을 만합니다. 우리는 ‘좋은책(양서)’이나 ‘길책(교재)’을 곁에 두지 않아도 됩니다. 모든 책을 늘 새롭게 마주하면서 배우는 ‘길동무책’이자 ‘푸른책(삶과 마음을 푸르게 일구는 길을 스스로 익히는 책)’으로 삼으면 됩니다.


  “찾아가는 배움자리”이기에 ‘이야기마실’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더 많은 이웃을 한자리에 모아서 혼자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배움자리에 모인 누구나 마음을 밝히는 말을 주고받는 자리로 꾸립니다. 함께 이야기를 밝히다가 문득 쪽종이를 한 자락씩 쥐고서 손을 놀립니다. 조그마한 종이 한 바닥만큼 쪽글을 적어 봅니다. “쪽종이에 짧게 맺고 끊는 글”을 살며시 가다듬으면, 어느새 노래(시) 한 자락으로 거듭나는 길을 누리는 모임입니다.


  서로 마음을 기울여서 마주하는 자리일 적에는, 우리가 나누는 모든 말은 어느새 노래로 깨어납니다. 서로 아무 마음을 안 기울이면서 시끄럽게 떠들거나 목청을 높이거나 손전화를 켤 적에는, 그야말로 북새통이면서 소리늪입니다.


  책으로 숲을 이루기에 책숲입니다. 우리는 아직 일본말 ‘도서관’이나 ‘박물관’이라는 이름을 못 내려놓습니다. ‘관(館)’ 같은 한자를 붙여야 크거나 좋다고 잘못 여깁니다. 그러나 ‘관(館)’은 ‘집’을 가리키는 한자인걸요.


  우리는 아직 우리말이 무슨 뜻과 결과 빛과 숨과 씨인지 제대로 못 짚거나 안 짚을 뿐 아니라, 못 가르치거나 안 가르칩니다. 한자말 ‘우주(宇宙)’가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아는 분은 얼마나 될까요? ‘우주(宇宙) = 집(宇) + 집(宙)’인 얼개입니다. 집과 집을 함께 두기에 ‘누리(우주)’가 되는 얼개입니다. ‘누리’란, 셀 길이 없도록 숱한 집이 가없이 있다는 밑뜻입니다.


  그러면 ‘집’이 어떤 곳인지 헤아려야겠지요. ‘집’은 ‘지붕’만 얹은 ‘채’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살림을 집에서 ‘짓’습니다. 밥살림과 옷살림을 하려고 먼저 ‘집’부터 찬찬히 알맞게 세워요. ‘지음터(짓는 터전)’인 집부터 세워야, 이곳에서 누구나 넉넉하고 느긋하게 모든 살림을 손수 지어서 지내고 즐겁게 즈믄해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집에서 짓지 않으면 지겹게 마련입니다. 지으며 지낼 집이 아니라면 지치고 맙니다. 짓는 손길과 마음을 잊거나 팽개치니 짐에 파묻혀서 집니다(쓰러집니다).


  시골 옛배움터(폐교)에 마련한 작은배움숲은 푸른말로 푸른씨를 심고 나누는 배움자리이기도 하고, 노래자리이기도 하며, 이야기자리에다가, 생각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머잖아 사라질 수 있다고 여기는 시골(군단위 지자체)이라면, 옛배움터를 작은배움숲으로 살리는 길을 조그맣게 열어서 조촐히 나누는 길을 찾아볼 만합니다. 이미 서울과 큰고장으로 떠난 어린이와 푸름이를 시골로 붙잡아 올 수 없어요. 굳이 붙잡으려고 할 일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작은씨 한 톨을 손수 심어서 푸른숲으로 가꾸는 작은길을 누구나 나누면서 넉넉히 어울려 지낼 터전을 천천히 가꾸면 되어요. 누구나 나무 한 그루를 손수 심고서 두고두고 지켜볼 작은집을 작은배움숲 곁에서 지을 수 있으면 됩니다.


  전남 고흥에서 부산으로 가려면 두나절(일고여덟 시간)이 걸립니다. 시외버스와 길에서 한참 보냅니다. 이동안 책도 읽지만 손으로 글종이에 노래도 씁니다. 버스와 길에서 쓴 노래 몇 자락을 배움자리에서 만나는 이웃님한테 드립니다. 작은시골에서 길어올린 이야기를 큰고장에도 푸른터가 싹트기를 바라면서 건넵니다. 작은손으로 여민 작은노래가 온고을에 오롯이 온빛으로 오달지게 온꽃으로 올망졸망 피어날 앞날을 그리면서 작은수다를 즐깁니다.


  다함께 푸른말씨로 푸른집을 일구는 푸른마음을 나눌 수 있기를 바라요. 우리집과 이웃집 모두 두런두런 이야기씨앗을 부드럽게 펴고서 받는 푸른하루를 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씩 하면 됩니다. 함께 해보면 됩니다. 파랗게 일렁이는 하늘빛으로 함박웃음을 짓는 손길로 어깨동무하면 됩니다. 2026.9.16.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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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발닿는 곳으로 들락날락 책숲을

― 작은배움숲 8 마을에 나무와 어린이를



  부산으로 이야기마실을 다녀왔습니다. 고흥으로 돌아오자마자, 새로 고흥교육장이 된 분한테 찾아가서 손글(손편지)을 건네었습니다. 다만, 새 교육장님은 고흥교육지원청에 안 계셔서 곁일꾼(비서)한테 맡겼습니다. 이러고서 이튿날은 고흥 어린이하고 글놀이꽃(시쓰기 수업)을 폈고, 오늘에서야 겨우 숨돌립니다.


  새로 장만한 책을 주섬주섬 꾸려서 우리 〈숲노래 책숲〉으로 나릅니다. 누렇게 물결치는 가을들을 바라보면서 먼고을 이웃님이 마주하는 책살림을 헤아립니다. 부산에서는 ‘구’를 넘어서 ‘동’에까지 부산시에서 꾸리는 책놀이터(도서문화예술공간)를 늘리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서울은 이미 어느 마을에서나 가볍게 거닐며 드나들 작은책숲이 무척 많다지요. ‘살림꽃(문화도시)’이기를 바라는 부산이기에, ‘들락날락’이라는 이름으로 책놀이터를 늘리는구나 싶은데, 전남광주는 어떤 모습일까 하고 헤아립니다.


  무척 오래도록 시골에는 책숲이 없다시피 했습니다. 이러다가 읍내에 ‘군립도서관’이 태어납니다. 읍이 둘이 있는 군이라면 더 큰 읍에 먼저 하나 열고, 한참 뒤에 다른 읍에 하나 엽니다. 군에서는 책숲은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여기기 일쑤였으나, 이럭저럭 긴 나날이 흐른 끝에 작은책숲이 면에도 하나둘 엽니다. 다만 시골 면에서 여는 작은책숲은 서울에 있는 동이나 아파트에서 여는 작은책숲에 대면 아주 조그맣습니다.


  시골에서 살며 철마다 다른 시골빛을 누리는 아이어른을 만나기는 안 쉽습니다. 오히려 서울사람이 철마다 다른 숲빛을 누리거나 느끼려고 애쓰는 듯합니다. 읍내에 사는 어린이와 푸름이는 외려 서울아이보다 들살림을 모르기 일쑤요, 면소재지에 사는 어린이와 푸름이도 서울아이보다 멧살림이나 바다살림을 모르기까지 합니다. 이미 시골배움터는 ‘서울로 수학여행’을 다녀올 뿐 아니라 ‘서울에 가서 신호등에 따라 건널목 건너기’라든지 ‘에스컬레이터 타기’라든지 ‘지하철 타기’라든지 ‘버스 갈아타기’를 미리 일러주고서 ‘해보기(수학여행으로 체험학습)’를 시키는 얼개라고도 할 만합니다.


  시골이라면 철마다 다를 뿐 아니라 달마다 다른 해바람비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만, 아직 이렇게 들려주거나 배우는 길은 없다시피 합니다. 따로 ‘작은배움숲(학교 밖 학교)’을 꾸리지 않고서야 첫봄해와 첫가을해가 어찌 다른지 알려주기란 어렵습니다. 한봄비와 한가을비는 어찌 다른지 들려주려면, 늦봄밤과 늦가을밤은 또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하려면, 그냥그냥 흘러가는 ‘서울바라기 제도권교육’으로는 하나도 못 합니다.


  왜 자꾸 시골은 줄어들 뿐 아니라 사라지려 하는지 돌아보기에는 한참 늦은 듯합니다. 그러나 한참 늦었어도 이제라도 처음으로 돌아가서 짚을 노릇이지 싶습니다. 사람도 일터도 돈도 서울에 몰렸고, 펴냄터도 책도 서울에 넘칩니다. 시골사람은 시골에 책집이 없으니 누리책집으로 시켜서 책을 사읽게 마련인데, 시골에서 살아가며 책을 사읽는 사람도 대단히 적습니다. 여러모로 보면, 이미 가을빛과 겨울빛부터 읽지 않는 터라 책빛도 시큰둥할 만합니다. 여름빛과 봄빛을 반기려는 마음이 스러진다면, 애써 주머니를 헐어서 책을 사읽으려는 마음도 없을 테고요.


  요즈음은 시골 읍내나 배움터에서 마련하는 책숲도 꽤 크고 책도 제법 갖춥니다. 그렇지만 “이곳이 왜 이곳인지” 짚거나 다루는 책은 어디 있는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고흥군이라면 고흥군이 왜 ‘고흥’이며, 이곳에서 어떻게 살림을 지으면서 푸른빛을 누리고 품고 나눌 만한지 들려주는 책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다른 곳 고을책숲(지역도서관)은 고을지기(지역작가)가 쓴 책을 앞장서서 알리기도 하고 읽히기도 할 뿐 아니라, ‘서울바라기’를 멈추고서 ‘마을바라기’를 하자는 뜻을 넓힙니다. 이와 달리 아름다운 들숲메바다를 품은 시골일수록 ‘관광객’과 ‘기업유치’와 ‘개발투자’에 얽매일 뿐, 막상 이곳 시골에서 나고자란 어린이와 푸름이가 이곳을 사랑하며 살림하는 길을 들려주고 알려주고 배우면서 함께 일굴 이야기는 없다시피 합니다.


  무엇을 사랑할 만한지 이야기하지 못 하면서 ‘관광객’과 ‘대형 토목사업’에 치우치는 행정이라면 ‘지자체’를 하는 뜻이 있을까요?


  서울 영천동 영천시장 끝자락에 〈골목책방〉이라는 마을책집이 있었습니다. 1970해부터 2021해까지 하루조차 안 쉬면서 책집을 열었다고 했습니다. 쉰 해 남짓 책빛을 일군 셈입니다. 이곳에 마지막으로 책마실을 다녀온 때가 2017해였지 싶습니다. 그 뒤로는 좀처럼 발걸음을 못 했습니다. 시골에서 서울마실이란 멀거든요. 이러다가 〈골목책방〉 아주머니가 전화로 책집을 닫는다고 알려주셔서 마지막길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우리 책숲을 추스르다가 한참 앞서 〈골목책방〉 아저씨가 고흥으로 보낸 꾸러미를 보았습니다. 되도록 안 버리고 모으다 보니, 책짐을 받을 적에도 빈 꾸러미(상자)를 포개어서 건사하곤 합니다. 빈 꾸러미 한켠에는 〈골목책방〉 아저씨가 슥슥 적은 손글씨가 고스란합니다. 손글씨가 남은 곳을 잘라서 쓰다듬습니다. 저는 “쉰 해 남짓 땀흘리다가 흙으로 돌아간 작은책집 일꾼이 남긴 손글씨 한 자락”도 길(역사)이라고 느낍니다. 누가 책(역사문서)으로 이런 손글씨를 남기지는 않을 테지만, 우리가 날마다 짓는 모든 살림살이야말로 우리 스스로 이루고 일구는 빛이요 씨앗이라고 여깁니다.


  부산시에서 꾀하는 ‘들락날락’처럼 전남광주 작은시골 작은마을마다 ‘작은배움숲’이 싹틀 수 있으면 아름다울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고흥군 도화면 시골마을 한켠에서 폐교인 흥양초를 〈숲노래 책숲〉으로 살려쓰듯, 다른 이웃님은 다른 마을에서 폐교를 빌려서 책숲이며 배움숲이며 노래숲이며 이야기숲이며 그림숲으로 살릴 만합니다. 빈집이나 헛간을 살려서 이음숲을 꾸릴 만합니다.


  목돈을 들이는 토목사업이 아닙니다. 더 크거나 멋지게 세울 학교나 아트센터도 아닙니다. 작은마을에 작은책숲이 있으면 됩니다. 마을을 둘러싼 들과 숲과 메와 바다를 아우르면서 배우고, 우리가 두고두고 남기는 작은책에 흐르는 이야기를 되새기면서 배우는 터전을 열면 됩니다.


  시골에서 여러 배움터를 묶으면(통폐합) 100억이니 200억이니 나라에서 내려준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꾀할 수도 있습니다만, 시골에 있는 여러 배움터를 자꾸 없애면서 읍내로 쏠리는 얼개로 뻗으면, 읍내 배움터도 머잖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면소재지 배움터’는 ‘읍내 배움터’로 빠져나간다면, ‘읍내 배움터’는 ‘서울 배움터’로 빠져나가거든요. 이렇게 빠져나간 어린이와 푸름이와 젊은이는 다시 시골로 돌아올 마음이 없기 일쑤입니다. 나고자라는 시골에서 “시골이 왜 푸른터요 아름터인지 듣거나 겪거나 배운 바가 없다”면,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거나 일자리를 얻은 뒤에 굳이 시골로 돌아갈 까닭을 하나조차 찾기 어렵습니다.


  바람이 들락날락 흐르는 틈이 있기에 모든 숨붙이가 싱그럽습니다. 햇볕이 들락거릴 틈새가 있기에 모든 씨앗이 싹틉니다. 빗물이 스며들 틈이 있기에 나무가 자라서 푸르게 우거집니다. 이제 시골에서는 해바람비라고 하는 푸른빛을 한복판에 두고서 ‘푸른바라기’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마을과 고을이 저마다 알맞게 흐르면서 어울리고 만날 때라야, 서울도 알맞게 몸집을 줄이면서 넉넉히 어울리는 한나라 한살림 한노래로 피어나리라고 봅니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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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꽃

손바닥만큼 우리말 노래 29


1994년에 ‘새터’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이제는 시골에서도 이 이름을 듣지만, 그무렵에는 낯설었는데, “새내기 새로 배움터”를 줄인 낱말이라고 하더라.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른바 ‘오리엔테이션(orientation)’이나 ‘신입생 환영회·교육회’를 우리 나름대로 풀어낸 얼개이다. 시골에서는 사람들이 땀흘려 맨손으로 새로 일군 터전을 ‘새말·새마을·새골·새고을·새터’라 한다. 여러모로 보면 시골마을 이름에서 살며시 딴, 또는 시골마을 이름을 새롭게 살린, 함께 즐겁게 어울리자는 뜻을 품은 ‘새터’라고도 여길 만하다.



산들바람 선들바람

우리말은 ‘ㅏ·ㅓ’하고 ‘ㅗ·ㅜ’가 늘 맞물린다. ‘산들바람’이 있으면 ‘선들바람’이 있다. 사람들은 으레 ‘선선하다·서늘하다’만 쓰지만, ‘산산하다·사늘하다’라는 우리말이 있다. ‘사늘하다’를 세게 나타내니 ‘싸늘하다’이다. ‘산들바람’이라면 산산히 드나드는 바람이다. ‘선들바람’이라면 선선히 드나드는 바람이다. 산들바람 같은 매무새에 말씨이기에 ‘사근사근’하다. 선들바람 같은 몸짓에 말결이라서 ‘서글서글’하다. ‘산들·선들’은 그냥 가볍거나 그냥 시원하기만 한 바람이지 않다.


산들바람 (산들 + 바람) = 산산하다 : 1. 산산하다고 느낄 만큼 부는 바람. 보드라우면서 가볍게 감싸듯 시원한 바람. 2. 마음·몸짓·말글·모습이 보드라우면서 가볍게 감싸듯 마주하거나 다가오다.


선들바람 (선들 + 바람) = 선선하다 : 1. 선선하다고 느낄 만큼 부는 바람. 부드라우면서 조금 가볍게 감싸듯 시원한 바람. 2. 마음·몸짓·말글·모습이 부드러우면서 퍽 가볍게 감싸듯 마주하거나 다가오다. 거칠거나 까다롭게 굴지 않다.



하얀눈이

독일 옛이야기에 나오는 ‘Schneeweisschen’을 영어로는 ‘Snow White’로 적는다. 이 말씨를 일본에서는 ‘しらゆきひめ(白雪姬·白雪公主)’로 옮겼다. 우리는 일본말씨를 그대로 소리만 따서 ‘백설공주’라 쓰는데, 이제는 독일말 ‘Schneeweisschen’과 영어 ‘Snow White’를 우리말씨로 가만히 풀어서 ‘하얀눈이’로 쓸 만하다. ‘하얀눈꽃’이나 ‘흰눈꽃’처럼 이름을 붙여도 어울린다.


하얀눈이 (하얗다 + -ㄴ + 눈 + -이) : 얼굴빛과 살빛이 겨울눈처럼 하얀 사람. 《그림 동화》에 담긴 독일 옛이야기에 나오는 아가씨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 하얀눈꽃·흰눈꽃. ← 백설공주白雪公主)



온누리

따로 낱말책에 없지만, 일찍부터 누구나 흔히 쓰던 낱말 가운데 ‘온누리’하고 ‘온나라’가 있다. 국립국어원 낱말책에 안 실렸으니 ‘온 누리’나 ‘온 나라’처럼 띄어야 할까? 아니면 ‘온마리·온바탕·온몸·온통’처럼 붙여쓰기를 해야 어울릴까? 우리는 붙여쓰기를 할 노릇이다. 낱말책이 없던 먼먼 옛날부터 누구나 ‘온마음·온몸·온마을’을 그저 한 낱말처럼 삼았다. 우리나라 낱말책은 ‘온누리·온나라’뿐 아니라 ‘온마음·온마을’조차 아직 올림말로 못 다룬다. 이제는 ‘온’을 오롯이 볼 노릇이다. 온빛과 온꽃을 보고, 온말과 온글을 보며, 온숨과 온나무를 품을 노릇이다.


온누리 (온 + 누리) : 1. 모든 숨결이 함께 있고 어울리고 살고 지내는 곳. (← 우주, 세상, 세계) 2. 우리가 살아가는 별에 있는 모든 나라. (← 전세계, 지구, 지구촌) 3.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나 자리나 터. (← 사회, 세상, 세계) 4. 처음 이 땅에 와서 마지막으로 이 땅을 떠나기까지 살아온 날. (← 평생, 일생) 5. 널리 움직이거나 일하거나 어울리거나 지내는 곳 6. 오늘 있는 곳. 오늘 살아가는 자리. 오늘 있는 터전. (= 이곳. ← 지상, 현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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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잠들려는 암사마귀하고

― 작은배움숲 6 ‘못난 나’를 토닥토닥



  암사마귀 한 마리가 힘을 거의 못 쓰면서 몸을 흔들흔들합니다. 틀림없이 〈숲노래 책숲〉 안쪽 어느 책시렁에 알을 낳은 듯합니다. 아직 사마귀알집을 찾아내지 못 했습니다. 이제 막 낳은 알집이니, 이듬해 새봄에 깨어날 테고, 새봄까지 찾아내면 됩니다. 사마귀알집을 찾아내어야, 이 알집이 깨어날 첫봄 즈음에 풀밭에 내놓을 수 있습니다.


  배가 홀쪽한 암사마귀하고 한참 눈을 맞추었습니다. 그야말로 기운을 다한 나머지, 걷기도 서기도 힘들어 합니다.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몸집으로 올봄에 깨어나서 첫가을에 이를 때까지 꾸준히 허물벗기를 하며 새몸으로 거듭났고, 마침내 알을 속으로 품고서 내놓았으니, 대견하게 한해살림을 해냈습니다.


  힘없는 암사마귀를 풀밭 한켠에 옮겨주었습니다. 이 아이가 굳이 우리 책숲으로 들어와서 알을 낳을 까닭은 없지만, 엊그제 마을에서 풀베기를 엄청나게 해대었기에, 풀베는 소리라든지 사람들한테 놀란 탓에 알을 느긋이 낳을 곳을 못 찾았구나 싶어요. 윙윙윙 큰소리와 함께 사르르 무너지는 풀밭을 바라보던 암사마귀로서는, 쇳소리도 칼날도 없는 곳을 문득 찾아내었다고 느낍니다.


  엊저녁에 이웃님 한 분이 들려주는 말씀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못 하고, 모자라고, 모르는’ 모습과 몸짓을 어떻게 해야 할는지 힘들어하는 말씀을 가만히 들었습니다. 어떻게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할까 하룻내 곱씹었습니다. 작은시골 작은배움숲에서 작은말씨로 일구는 작은이야기를 들려주자고 여기면서 글월을 적어 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어질게 다루면서 즐겁게 편다면, 우리 누구나 속에 깃든 넋을 깨워서 참하게 살림하는 하늘빛을 이루는구나 싶습니다. 언뜻선뜻 이때에는 이렇게 잘못하고, 저때에는 저렇게 넘어지고, 그때에는 그렇게 흔들린다고 느낄 수 있는데, 잘못하거나 넘어지거나 흔들려도 됩니다. 잘못하고 넘어지고 흔들리기에 배우거든요.


  다치면 아프게 마련이고, 앓으면 고단하고 지치고 힘겹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아프거나 앓기에 싫거나 미울 수 없습니다. 아프면서 배우고, 앓으면서 익히는 삶입니다. 아기가 목을 가누기까지 꽤 긴날을 들입니다. 하루아침에 목을 가누지 않아요. 더구나 갓난아기는 젖을 빨기까지도 한참 걸려요. 갓 태어난 아기는 엄마가 젖을 물린대서 바로 빨아먹지 못 합니다. 게다가 아기는 알맞게 젖을 빨아먹는 길을 모르는 나머지, 서두르다가 목에 걸린다든지 얹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기한테 젖을 물리는 어버이는 천천히 토닥이면서 느긋이 먹으라고 다독입니다. 또한 젖을 다 먹은 아기를 어깨에 가만히 걸쳐서 등을 두들기지요. 아기가 트림을 할 때까지 토닥토닥합니다.


  아기뿐 아니라, 아이일 적에도 으레 넘어지고 다치고 울면서 자랍니다. 모든 아이는 다치면서 큽니다. 어린이라는 길로 접어들고 푸름이라는 꽃으로 피어날 무렵에도 매한가지예요. 늘 다치고 아프고 앓는 나날을 맞아들입니다. 싫어할 일이 없고, 미워할 까닭이 없습니다. 되면 되는 대로 반갑고,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고마운걸요. 모두 배움날이고 배움길이며 배움씨인데다가 배움빛이니까요.


  나랑 네가 무엇을 못 하는지 느낄 수 있다면, 이미 하나부터 배웠다는 뜻이로구나 싶습니다. “난 이럴 적에 이런 일을 참 못 하는구나!” 하고 배우고, “너는 이때에 이렇게까지 못 하네!” 하고 배웁니다. 모든 때에 배우는 줄 느낀다면, 싫거나 밉다는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려고 할 적에 눈을 살며시 감고서 마음을 다독일 만해요. 서두르지 말자고, 섣불리 붙들지 말자고, 이 같은 일을 마주하면서 무엇을 배우며 노래할 만한지 헤아리자고, 천천히 혼잣말을 읊을 노릇입니다.


  밥을 먹다가 목에 걸릴 적에는 뱉으면 돼요. 뱉어낸 밥찌꺼기는 행주나 걸레로 훔쳐서 치우면 되고요. 행주나 걸레는 빨래해서 물을 짜고 말리면 되지요. 그러니까 나쁘거나 잘못은 하나도 없어요. 그저 차근차근 하나씩 하면 됩니다. 쌈지를 길에 흘려서 잃었으면, 쌈지를 새로 짓거나 장만하면 되고, 잃은 돈은 다시 일해서 벌면 됩니다. 늘 이뿐입니다.


  아름다운 책을 다 읽고서 마지막 쪽을 덮으면 그야말로 아쉽습니다. 그러나 아쉽다고 여기기에 아름책을 나중에 새롭게 읽어요. 애벌로 읽고 그칠 아름책이 아니기에, 두벌읽기에 석벌읽기를 지나서 열벌읽기에 스무벌읽기로 잇습니다. 마침내 온벌읽기(100번째 독서)에 이를 만하고, 두온읽기(200번째 독서)도 할 수 있어요. 온누리 모든 어린이는 스스로 마음에 드는 그림책을 적어도 즈믄읽기(1000번째 독서)를 합니다. 두즈믄읽기를 하는 어린이가 흔합니다. 어린이는 으레 마르고 닳도록 한 가지 책에 꽂혀서 내내 되읽기를 하는데, ‘낡고 닳은 책’은 고이 모셔 놓고서 ‘똑같은 새책’을 장만해서 ‘끝없는 되읽기’를 하기를 바랍니다. 즐기고 배우면서 온마음이 자라기에 온읽기와 즈믄읽기를 가뿐히 하는 어린이입니다.


  기쁘게 읽을 때뿐 아니라, 슬프게 배울 적에도 다시금 기꺼이 맞아들이려는 마음이면 넉넉하구나 싶어요. 오늘 한끼를 배불리 먹었기에 이튿날 굶거나 열흘쯤 안 먹어도 되지는 않아요. 다만, 어느 분은 ‘열흘한끼’로 배부를 수 있습니다. 어느 분은 ‘하루두끼’나 ‘하루석끼’여야 배부를 수 있어요. 모든 사람은 다 다르게 끼니를 잇고 누리면 됩니다. 우리가 스스로 배울 적에도 “저 사람은 저렇게 하루아침에 깨닫듯 배우는데, 난 왜 서른 해가 넘도록 못 깨닫지?” 하고 푸념할 일이 없습니다. 마흔 해째에 깨달을 수 있고, 예순 해째에 깨달을 수 있거든요.


  나 스스로 모자란 줄 느끼는 일이란, 나 스스로 사랑하는 길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라고 느낍니다. 나 스스로 나부터 품지 못 하는 줄 알아챈 일이란, 나 스스로 곱게 품어서 오늘 하루를 새롭게 노래하려는 첫발을 뗀 몸짓이지 싶습니다. 그러니까 하루에 한 발짝을 내딛으면 되고, 하루하루 차근차근 이을 삶이라고 봅니다.


  서로서로 무엇을 못 하거나 미루거나 못마땅하거나 모자란지, 그저 느긋하면서 즐겁게 웃는 말씨로 나눌 노릇이라고 느껴요. 짜증을 내거나 불타오르면서 “넌 왜 이렇게 못 해?” 하고 따지면 불바다(전쟁)입니다. 여태 서로서로 불바다로 손가락질을 해왔다면, 이제는 서로서로 파란하늘을 담은 파란바다와 같이, 찰랑찰랑 노랫가락을 담은 말소리로 “내가 보기에 너는 이럴 적에 좀 못 하는 듯하더라. 넌 왜 이럴 적에 좀 못 한다고 느껴?” 하고 말을 걸고서 어떻게 대꾸할는지 기다릴 만합니다.


  말을 나누는 일이란 마음을 나누는 길이고, 마음을 나누는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동안에 언제나 씨앗 한 톨을 말씨로 고이 묻어서 그대로 가꾸어서 빛내는 하루라고 봐요. 함께 살림하는 살림말을 살피고, 함께 생각하는 생각말을 가다듬고, 함께 사랑하는 사랑말을 혀끝과 손끝에 얹자고 여기면, 어느새 내 목소리와 눈길과 몸짓이 참하게 나무 한 그루처럼 서는 줄 느낄 만해요. 이윽고 내 목소리와 눈길과 몸짓은 착하게 나비 한 마리처럼 나풀거리는 줄 느껴요. 이제 내 목소리와 눈길과 몸짓은 차오르는 별빛 한 줄기처럼 흐르는 줄 느낄 테고요.


  어떤 일을 잘 해냈다고 할 적에도 서로 북돋우고 말을 나눌 일입니다. 어떤 일을 못 해낸다고 할 적에도 서로 토닥이고 말을 주고받을 일입니다. 그저 모든 하루는 스스로 배우고 나란히 배우면서 서로서로 가르치는 이야기꽃입니다.


  가을이 깊을수록 낮볕은 짧지만 마지막까지 따끈따끈 내리쬡니다. 가을이 깊어가니 밤이면 찬바람이 훅 번지면서 춥습니다. 〈숲노래 책숲〉 어느 곳에 잘 자리잡았을 사마귀알집과 긴긴 겨울을 포근하게 나자고 생각합니다. 꽃밭길도 길이고, 가시밭길도 길이니, 모든 길을 고스란히 ‘온길’로 여기면서 함께 나아갈 새길을 그립니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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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서울 한복판에 작은들 한 뙈기를

― 작은배움숲 5 들빛(ㄷ)에 띄우는(ㄸ) 틈새(ㅌ)



  틈틈이 나누는 글 한 자락은 스스로 돌보고 가꾸는 살뜰한 글씨(글씨앗)를 이루곤 합니다. 틈내어 들려주는 말 한 마디는 스스로 되새기고 일구는 알뜰한 말씨(말씨앗)로 잇습니다. 틈을 내기에 나부터 어떤 하루인지 알아보고, 틈을 내지 않기에 나부터 닫아걸면서 숨막힙니다.


  국립국어원은 틀린말(비표준어)이라 여기지만 ‘튿다’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서울말(표준어)은 ‘뜯다’라 하지요. 황해도 말씨가 남은 우리 할아버지(1985해 무렵 가심)도, 충청도 말씨가 흐르던 우리 어머니도, 어릴적에 마을(인천 중·동·남구)에서 마주한 아주머니나 아저씨나 또래나 언니오빠도 ‘튿다’라는 말을 으레 썼습니다. 쉰 해 남짓 살아오며 여러 고장 여러 이웃을 만나서 문득 “옆구리가 튿어졌어요” 하고 말하곤 하는데, ‘튿’이라는 말씨를 그대로 받아쓰거나 함께쓰는 분이 무척 많습니다. ‘튿’을 처음 듣는다는 서울사람도 곧잘 만났습니다.


  우리말에서 ‘ㅌ’하고 ‘ㄸ’하고 ‘ㄷ’는 한동아리로 움직입니다. 세기와 높낮이가 다를 뿐, ‘ㄷ·ㄸ·ㅌ’는 뿌리가 하나이면서 가지만 옆으로 다르게 뻗는다고 할 만합니다. ‘틈’과 ‘뜸’과 ‘듬’이 맞물립니다. 트고 틔우기에 드나들어요. 뜨고 띄우기에 새롭게 오가거나 나아갑니다. 눈을 들어서 봅니다. 눈을 뜨면서 보고요. 눈을 트면서 봐요.


  틈이 밭으면 바쁠 뿐 아니라 답답하고 지칩니다. 뜸을 들여야 밥과 국이 속으로 폭 익습니다. 들·들녘·들판은 온씨(온갖 풀꽃나무 씨앗)가 홀가분히 드나들면서 드넓게 이루는 땅이자 터입니다.


  얼핏 아주 조그맣게 난 곳인 ‘틈’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참말로 커다란 곳을 ‘틈’이라 하지 않습니다. 틈이 있어서 바깥바람이 들어오고, 틈이 나기에 새롭게 마음을 기울여서 일할 수 있으면서 만납니다. 틈이 없으니 서두르거나 허둥지둥합니다. 틈이라고 하는 ‘작은길’을 내려고 눈을 뜨면서 마음을 일으킬 적에는, 온숲과 온누리에 작은씨앗 한 톨을 심어서 차근차근 푸른숲으로 나아가듯, 우리를 둘러싼 모든 일을 부드럽게 풀어가는 첫발을 이룹니다.


  빈틈이 없다고 여기니 단단합니다. 빈틈없이 막으니까 못 들어가요. ‘빈틈없다 = 물샐틈없다’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릇에 물을 담아서 마시려면 단단하게 닫아야 합니다. 물이 새는 틈이 있으면 물그릇으로 못 써요. 곧 ‘닫다 ≒ 담다’인 얼개입니다. ‘닫다·담다’는 비슷한말입니다. 단단히 닫아야 담을 수 있습니다. 틈이 있으면 스르르 새기에 못 담아요. 그런데 너무 단단히 닫아걸면 ‘담’이 되어요. 살림을 건사하려고 ‘담다’이지만, 끼리끼리 어울리거나 돌라먹기를 하려는 ‘담(담벼락)’이란 무서운 돌더미입니다.


  틔우는 작은길이란, 서로 마음을 담아서 다가가고 다가오는 자리라고 할 만합니다. 조그맣게 틔우기에 바람과 햇볕이 드나들어요. 바람과 햇볕이 드나들고 빗물이 드리울 수 있기에 ‘들’이며, ‘들’은 ‘논밭’을 가리키는 여러 이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떤 씨앗이든 우리 손으로 심어서 돌볼 수 있는 푸른터가 ‘들’입니다.


  대여섯 달이 넘도록 틈틈이 〈숲노래 책숲〉을 추스릅니다. 전남 고흥에서 열여섯 해를 살아내는 올해(2026해)인데, 책숲(도서박물관)으로 삼는 작은배움터(폐교)를 더는 쓸 수 없다면 새터를 찾아서 새곳으로 떠나야 하는가 하고 한참 헤아려 보았습니다. 이러다가 문득 다시 생각합니다. 처음 전남 고흥에 깃든 예전(2011해)에 열여섯 달에 걸쳐서 먼지를 쓸고 곰팡이를 닦고 묵은냄새를 뺐습니다. 스무 해 즈음 닫힌 작은배움터는 그야말로 먼지판에 곰팡이판이었습니다.


  먼지는 열여섯 달 만에 걷었지만, 곰팡이를 마지막으로 걷어내기까지는 여섯 해쯤 걸렸습니다. 책꽂이에 곰팡이가 더 번지지 않기에 한숨을 돌렸지만, 그래도 곰팡이는 이따금 나뭇바닥에서 살며시 올라옵니다. 다시 쓸고닦고 바람길을 틔우면서 건사하는 나날인데, 앞으로 어떤 일을 맞이하든 처음 이곳에 깃들던 때처럼 큰쓸이(대청소)를 해봅니다. 모든 집일은 살림짓기를 하는 손길에서 비롯하듯, 〈숲노래 책숲〉이라고 하는 이곳도 비질과 걸레질을 비롯해서 차곡차곡 더 손끝을 보태어 가다듬고 갈무리하는 일부터 다시 펴려는 마음이랄까요.


  서울에 집이 모자라서 새로 지어야 한다고 말이 많습니다. 그런데 서울에는 이미 집이 너무 많습니다. 서울에는 집이 모자라다기보다 ‘들’이 없고 ‘숲’이 모자랍니다. 서울사람은 서울에서 들(논밭)을 일구지 못 합니다. 서울 한복판은 땅값이 비싸니까 더 높이높이 치솟는 잿더미(시멘트 구조물)를 놓아야 한다고 여기더군요. 그러나 곰곰이 헤아려 볼 노릇입니다. 모든 잿더미(시멘트 구조물)는 되쓰지 못 합니다. 그저 쓰레기(건축폐기물)입니다. 올해에 쉰겹이나 일흔겹으로 높다랗게 올리더라도, 앞으로 쉰 해나 예순 해 뒤에는 어쩔 셈인지 헤아려야지요.


  나무 한 그루는 서른 해만 자라도 우거집니다. 나무 한 그루는 쉰 해만 자라도 아름드리로 뻗습니다. 나무를 잔뜩 심어야만 숲을 이루지 않습니다. 나무 한 그루가 쉰 해를 느긋이 자라면서 두온(200)이나 즈믄(1000)이라는 해를 느긋이 살아낼 수 있는 터일 적에 비로소 ‘마을’이라는 이름이 걸맞습니다.


  우리나라는 일본굴레(일제강점기)에 시달리면서 아름나무를 잔뜩 빼앗기고 잃었습니다. 잇달아 터진 한겨레싸움(한국전쟁)에서는 온나라 온숲이 망가지고 불타야 했습니다. 지난날에는 어떤 작은마을이어도 어귀에 아름드리로 나무가 여러 그루 우람하게 섰습니다. 또한 ‘숲정이’라는 오랜 낱말처럼, 모든 마을은 나무로 푸르게 감싸는 모습이었습니다.


  서울은 새집을 더 짓지 않아야 합니다. 서울은 ‘이미 있는 높은 잿집(아파트)’을 하나씩 허물어서 ‘즈믄해(1000년)를 살아낼 나무’가 자랄 푸른터로 돌릴 노릇입니다. 이러면서 시골 작은마을에서 빈집을 고쳐서 느긋하면서 오붓하게 살아갈 보금자리라는 길을 함께 열 노릇이라고 봅니다.


  시골에서도 서울에서도 나무를 돌보고 사랑하는 손길로 함께 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크거나 넓다란 잿집이 아닌, 수수하고 조촐한 작은집에 마당과 뒤꼍과 뜨락을 함께 품으면서 나무를 심을 수 있는 ‘푸른집’으로 거듭나야지 싶습니다. 이제는 틈을 내는 길을 생각할 때 아닐까요? 이제는 집마다 띄엄띄엄 떨어져서 사이에 나무가 우거지는 ‘푸른마을’로 피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커다란 흙수레로 커다랗게 짓는 커다란 논밭이 아닌, 누구나 손으로 가볍게 일구어서 짓고 나누는 작은들(작은논밭)부터 서울 한복판에 들어서기를 빕니다.


  시골은 작은들을 없애면서 노래가 사라졌고, 노래가 사라지면서 어린이가 사라졌고, 어린이가 사라지면서 놀이가 사라졌습니다. 손으로 심고 가꾸고 지을 만한 땅뙈기를 모든 살림집이 누릴 때부터 어떤 새일(4차산업)도 즐겁게 싹틀 만합니다. ‘살림짓기’부터 집집마다 자리잡을 수 있어야 ‘서울쏠림’을 풀면서 온나라가 한마음 한뜻 한살림으로 나아갈 만하다고 봅니다. 별빛처럼 배롱배롱 밝은 배롱꽃이 얼추 온날(100일)째 피고 집니다. 배롱꽃과 누런들이 나란한 가을빛을 시골뿐 아니라 서울이웃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앞길을 그립니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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