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어린이와 푸름이하고 함께 읽는 잡지

<파란씨앗> 창간준비호에 나란히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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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란 참으로 쉽다

말꽃삶 37 글 그릇 그루 그림



  우리는 눈으로 글을 읽습니다. ‘글’은 눈으로 보면서 알아보도록 적은 무늬라고 여길 만합니다. 눈으로 읽는 글이라면, 귀로 듣는 말이 있습니다. ‘말’은 눈으로 못 봅니다. 말은 늘 귀로 들어요. 그런데 말은 누가 들려주고 나면 어느새 우리 곁을 떠납니다. 누구한테서 들은 말을 나중에도 떠올리려고 종이나 바닥에 새기기에 ‘글’이라고 합니다. ‘글’이란 “그린 말”이라고 여길 만합니다. “‘말’을 눈으로 읽으면서 뜻을 알려고 그린 무늬가 ‘말’이다”처럼 간추릴 수 있습니다.


  소리로 내어 들려주고 듣는 말인데, 이 말이란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는 서로 마음을 ‘말’이라는 소리로 바꾸어서 들려주기에 알아들어요. 네가 밝히려는 마음은 네가 들려주는 말에 소리로 담깁니다. 내가 알고 싶은 네 마음은 바로 네 말을 듣는 동안 차근차근 알아보거나 떠올릴 만합니다.


 마음 → 말 → 글


  말이 있기에 글이 있습니다. 마음이 있으니 말이 있어요. 우리는 ‘글’이라고 하는 그림을 눈으로 보면서 서로 어떤 마음인지 알려고 합니다. ‘글’은 “그린 말”이면서 “마음을 담은 소리”를 옮긴 얼거리입니다. 그래서 “글 = 그린 말 = 담은 마음”이기에 “글 = 그려서 담은 마음소리”로 여길 만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먹거나 다룰 적에 ‘그릇’을 씁니다. 밥을 담아 ‘밥그릇’입니다. 국을 담아 ‘국그릇’입니다. 풀꽃을 심어서 돌보려고 ‘꽃그림’입니다. 돈을 차곡차곡 모으려면 ‘돈그릇’을 둘 테지요.


  사람이 푸르게 바람을 누리는 길에는 나무가 이바지합니다. 나무가 서기에 온누리가 푸르게 우거지는 숲입니다. 나무가 든든히 줄기를 올리는 밑동을 ‘그루터기’라고 해요. 그리고 나무를 셀 적에는 “나무 한 그루”나 “나무 두 그루”처럼 셉니다. 어른이 일하는 곳 가운데 ‘주식회사’란 이름이 있어요. ‘주식’이라는 한자말에서 ‘주(株)’는 ‘그루’를 가리킵니다. 나무는 한 그루만 있을 적에는 아직 ‘숲’이 아니에요. 숱한 나무가 어울리기에 숲입니다. 어른이 일하는 ‘주식회사’라는 곳은 여러 사람이 ‘여러 나무’를 돌보듯 뜻과 힘을 모은다는 얼거리입니다.


 글 : 마음을 담은 말을 담는 노릇

 그릇 : 살림을 담는 노릇

 그루 : 숲을 담는 노릇


  글쓰기가 안 쉽다고 여기는 분이 제법 있습니다. 그런데 말을 못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저는 어릴 적에 오래도록 말더듬이였습니다. 바야흐로 쉰 살에 가까운 나이에 이르렀는데, 아직 이따금 말을 더듬곤 합니다. 사람은 모두 다르게 마련이라, 어떤 사람은 혀가 길고 말소리를 내기 안 어렵습니다만, 어떤 사람은 혀가 짧고 말소리를 내기 꽤 어렵습니다.


  저는 혀짤배기에 말더듬이라는 몸을 타고났는데, 혀가 짧고 말을 더듬더라도 제가 하고픈 말을 즐겁게 합니다. 겉보기로는 소리가 새거나 말을 더듬되, 제 나름대로 할 말을 하거든요. 그렇다면 글을 쓸 적에는 어떠할까요? 우리가 말소리를 낼 때가 아닌 글로 말을 옮길 적에는 어느 누구도 “이 사람이 말을 더듬는지 소리가 새는지” 하나도 못 느낍니다. 더구나 글쓰기를 할 적에는 스스로 되읽으면서 글손질을 할 수 있어요. 말은 마주보는 사람하고 바로바로 소리를 내야 하지만, 글은 오늘 쓴 글을 몇날에 걸쳐 다듬고 손보고 추슬러서 읽힐 수 있습니다.


  말하기가 좀 어려울 수 있습니다만, 소리가 새거나 더듬더라도, 때로는 앞뒤가 안 맞거나 갈팡질팡하더라도, 이대로 말을 하면 됩니다. 창피하거나 부끄럽지 않습니다. 중얼거리든 속삭이든 시끄럽든 다 다르게 하는 말일 뿐입니다.


  이와 달리, 글쓰기는 우리가 적어 놓은 말과 마음을 얼마든지 가꾸고 다듬고 손볼 수 있어요. 곰곰이 본다면, 글쓰기야말로 쉽습니다. 처음 쓴 글을 그대로 내보인다면 창피할 수 있다고도 할 테지만, 한 벌 고쳐쓰고, 두 벌 손보고, 석 벌 다듬고, 넉 벌 추스르고, 다섯 벌 어루만지고, 여섯 벌 가다듬고, 일곱 벌 되새기고, 여덟 벌 손질하는 사이에, 어느덧 즐겁게 펼 새 이야기 한 자락이 태어나요.


 글쓰기 : 마음을 담은 말을 하나씩 달래면서 옮기는 일


  나중에 보태고 손보면 됩니다. 첫벌부터 훌륭하거나 뛰어나게 쓰려고 여기니 어쩐지 어렵다고 느낄 뿐입니다. 첫벌쓰기를 할 적에는 그저 마음을 슥슥 고스란히 옮길 노릇이에요. 첫벌쓰기는 그냥 가볍게 부는 바람처럼 슬슬 쓸 일입니다. 이렇게 첫벌을 마치고 나서는 집안일도 돕고 여러 살림을 추스르고서, 느긋이 두벌쓰기를 하면 됩니다. 이윽고 다른 일을 더 보고서 석벌쓰기를 할 만합니다.


  아무래도 동무나 이웃이나 어버이하고는 조잘조잘 거리낌없이 말을 할 수 있어도, 우리 마음을 글로 옮겨서 읽히려고 하면 부끄러울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부끄러운 마음을 그저 부끄럽다고 받아들이면 되어요. 자랑스러우면 자랑스럽다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슬플 적에는 슬프다고 받아들여요. 기쁠 적에는 기쁘다고 받아들여요. ‘말’이란, 마음을 담은 소리예요. 우리 마음을 고스란히 담기에 서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들려주고 들은 말을 하나하나 돌아보면서 천천히 ‘그리’면 되어요. “이야기한 말을 그려서 담는 글”이에요.


  느낀 바를 그대로 담기에 글 한 줄이 사랑스럽습니다. 아픈 일은 아픈 느낌을 그대로 쓰기에 서로 아픈 멍울과 생채기를 나눠서 풀어요. 반갑고 뿌듯한 일은 반갑고 뿌듯한 느낌을 그대로 쓰기에 서로 활짝 웃으며 북돋아요.


  글은 꾸며서 쓰지 않습니다. 말도 꾸며서 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그대로 담기에 말이 말답고, 글이 글다워요. 남한테 잘 보이려고 할 말이 아니요, 남이 잘 읽어 주어야 할 글이 아닙니다. 서로 마음을 나누면서 북돋우고 다독일 뿐 아니라, 생각을 빛낼 씨앗을 살필 글입니다.


  이리하여 ‘마음씨’하고 ‘말씨’하고 ‘글씨’라고도 합니다. ‘씨’는 ‘씨앗’을 줄인 낱말이면서, ‘심(힘)’을 나타내는 낱말이고, ‘심다’로 잇는 얼개입니다. 마음씨란, 마음에 심는 씨앗이란 뜻입니다. 말씨란, 말로 심는 씨앗이란 뜻입니다. 글씨란, 글로 심는 씨앗이란 뜻이고요.


  우리가 쓰는 글은,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을 스스로 남기고 일구려는 꿈을 그대로 드러내는 씨앗이라고 할 만합니다. 글을 꾸며서 잘 쓰려고 할 적에는 ‘꿈’하고 멀어요. 꾸민 글이라면 겉치레로 기웁니다. 꾸밈없이 쓰는 글, 이른바 우리 마음을 그대로 담은 글이라면, 속으로 빛나면서 사랑스럽습니다.


  말을 잘 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됩니다. 말더듬이에 혀짤배기인 저처럼, 그저 어떤 마음을 나타내고 싶은지 하나하나 헤아려 봐요. 글을 잘 쓰려고 꾸미지 않으면 됩니다. 두런두런 나눌 마음과 생각을 차분히 짚으면서 담아 봐요.


 글쓰기 = 말을 담기 = 마음쓰기


  ‘글쓰기’란 ‘마음쓰기’하고 맞닿습니다. 마음을 쓰는 하루가 그대로 글을 쓰는 손길입니다. 서로 마음을 쓰면서 이야기가 태어나고 자라요. 함께 마음을 쓰고 글을 같이 써 보면서, 눈을 밝히고 오늘을 사랑하는 동무로 만납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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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 / 숲노래 말넋


말꽃삶 36 ‘좋아하는 말’은 없습니다

― ‘말’을 보는 ‘마음’



  우리말 ‘좋다’는 안 나쁩니다. 그렇다고 딱히 좋은 낱말이라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모든 말은 그저 마음을 담을 뿐입니다. 이 말이라서 좋거나 저 말이라서 나쁘지 않습니다. 말은 마음을 담는데, 마음이란 우리가 지은 삶을 담은 빛이에요. 우리가 지은 삶을 마음에 담게 마련이라서, 삶에서 좋음과 나쁨이란 없어요. 가싯길도 삶이고 꽃길도 삶이에요. 미움도 삶이고 사랑도 삶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이 삶을 어떻게 가꾸거나 짓느냐에 따라서 마음이 다르게 마련입니다. 시샘하거나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하루라면, 마음에도 시샘과 미움과 싫음이 고스란히 흐릅니다. 새롭게 찾아드는 하루를 시시하게 보거나 시답잖게 여기거나 시큰둥히 바라본다면, 마음에서 시시하고 시답잖으며 시큰둥한 빛이 어립니다.


  어느 말은 거칠거나 깎아내리거나 얕보거나 따돌리거나 괴롭히는 뜻이 깃들기 때문에 ‘나쁘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칠어도 거친 삶이고, 깎아내려도 깎아내리는 삶이고, 따돌리거나 괴롭혀도 따돌리거나 괴롭히는 삶입니다. 눈물이 나기에 눈물나는 삶이고, 슬프기에 슬픈 삶이며, 아프기에 아픈 삶입니다. 이렇게 다 다른 삶을 섣불리 ‘좋다’나 ‘나쁘다’로 가를 수 없습니다. 자꾸 ‘좋다’나 ‘나쁘다’로 가르는 탓에 오히려 삶을 가두다가 마음을 가두고 말까지 가둔다고 여길 만합니다.


  누가 누구를 괴롭히기에 ‘괴롭힘말’이 태어납니다. 괴롭히는 몸짓과 삶과 매무새가 그대로 마음에 깃들어서 말로 태어나거든요. 누가 누구를 사랑하기에 ‘사랑말’이 깨어납니다. 사랑하는 몸짓과 삶과 매무새가 고스란히 마음에 흐르면서 말로 깨어나요.


  거친말이나 막말이나 삿대말이나 더럼말이 있다면, 우리 삶터에 거칠거나 막되거나 삿대질을 일삼거나 더럼짓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거친말을 없애자”고 외친들 거친말은 안 사라집니다. 이른바 ‘비속어·욕·차별어’를 없애자고 외치더라도 ‘비속어·욕·차별어’는 안 없어집니다. 왜 그럴까요? 말이란 마음이 드러나는 소리요, 마음이란 삶을 담아서 드러내는 그릇이거든요.


  어느 말이 거친말(비속어)이라고 한다면, 거친말이 불거지는 삶을 치울 노릇입니다. 얄궂고 안타깝고 딱한 삶을 그대로 두면서 말(거친말·비속어)만 치워낼 수 없습니다. 어느 말이 막말(욕)이라고 한다면, 막말을 어른한테서 배운 아이들만 탓할 수 없습니다. 막말을 아무 곳에서나 마구 읊는 어른부터 마음과 매무새와 말씨와 삶을 아름답게 바로세우거나 다잡을 노릇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 말씨를 흉내내거나 따라하거나 배웁니다. 아이들이 먼저 막말(욕)을 쓰는 일은 없습니다. 둘레에서 막말을 하니까 “나도 써야겠어!” 하고 느끼면서 젖어들 뿐입니다. 둘레에서 사랑말을 하고, 살림말을 펴고, 숲말을 나눈다면, 아이들은 저절로 사랑말과 살림말과 숲말로 삶을 누리면서 마음에도 사랑말과 살림말과 숲말이 흐르고 피어나고 깨어납니다.


 좋아하는 말이 있나요?


  으레 한글날 언저리에 “좋아하는 말이 있나요?”나 “사람들한테 알려주고 싶은 ‘좋은말’을 뽑아 주셔요!” 하고 묻는 분이 있습니다. 한글날이 아니어도 이렇게 묻는 분이 제법 있습니다. 이렇게 묻는 분한테 으레 ‘좋다’라는 낱말부터 말밑을 풀어내어 들려줍니다.


  우리말 ‘좋다’는 ‘좇다’에 ‘좁다’가 얽힙니다. 뜻으로만 본다면 “좋다 : 마음에 들다”요, “나쁘다 : 마음에 안 들다”입니다. 마음에 들려면 ‘좁혀’야 합니다. 이쪽도 저쪽도 그쪽도 다 좋을 수 없어요. 그저 다 좋다고 하는 말은 하나도 안 좋다고 여기는 셈일 뿐 아니라, 다 싫거나 나쁘다고 손을 놓는 셈이기도 합니다.


  마음에 드는 자리로 좁히기에 ‘좋’습니다. 마음에 든다고 하는 ‘좋다’이기 때문에, 스스로 마음에 드는 쪽으로 ‘좇’습니다. 이러다가 ‘쫓기’듯 서두르거나 바빠요. 어느 쪽만 좋아할 적에는 그만 좁은 마음으로 기울면서 좇고 쫓기다가 ‘조용’합니다. 말을 해야 할 적에 말을 않기 일쑤예요. 좋아하는 쪽만 좇기에, 안 좋아하는 쪽에는 아무 마음이 없이 등지는 터라, 가까이에서 벌어지는 일에도 눈길조차 없으니 아무 말을 않는 ‘조용’한 팔짱질로 흐르곤 하더군요.


  이리하여 “저는 좋아하는 말이 없습니다. 이미 어느 말이건 ‘좋은말·나쁜말’로 가를 수 없고, 눈길을 좁혀서 마음까지 좁으려는 뜻이 없기 때문에, 저는 늘 ‘사랑할’ 말을 헤아립니다.” 하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랑은 뭘까?


  둘레에서 으레 흔히 자주 늘 쓴다고 할 만한 ‘사랑’입니다만, 오히려 사랑이 왜 어떻게 사랑인지 모르는 분이 아주 많습니다. 사랑은 “좁히는 마음”도 아니고 “넓히는 마음”도 아닙니다. 사랑은 해바람비와 들숲바다처럼 그저 온통 품어서 풀어내는 푸근한 결입니다. 날씨가 다르더라도 해는 온누리에 고루 비춥니다. 날씨는 다르지만 바람과 비도 온누리에 두루 찾아듭니다. 들숲바다는 뭇목숨을 너르게 품는 터전입니다.


  사랑이란, 이쪽도 저쪽도 그쪽도 아닌 오롯이 ‘나’이고 ‘너’이면서 ‘우리’인 ‘하나’라고 여길 만합니다. 나는 너를 보고, 너는 나를 봅니다. 너랑 나는 서로 다른 넋이면서 하나인 숨빛이기에 ‘우리’로 어울리고 어우르고 아우르면서 포근히 안습니다. 겨울을 녹이는 포근하고 푸근한 품이 사랑입니다. 언제나 따뜻하게 모두 풀어내는 풀빛처럼 푸르게 빛나는 사랑입니다.


  내리사랑과 치사랑이라는 말이 있듯, 사랑은 기울지 않고 오르내리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저 바라보고 나아가면서 함께 있고 같이 서며 나란히 걷습니다.


 사람이란?


  우리가 사람이라면, 사랑을 하는 사이로서 들숲바다를 품고 해바람비를 머금는다는 뜻이라고 느낍니다. ‘사람·사랑’은 ㅁ과 ㅇ이 다를 뿐이면서 하나인 낱말입니다. 닿소리 ㅁ은 모두는(모으는) 결을 나타내고, 닿소리 ㅇ은 알고 아우르는 결을 나타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포근히 해가 들고 바람이 깃들기에 새롭게 마주합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새’가 날듯, 스스로 생각하면서 새롭게 이 삶을 일구고 가꾸고 짓고 돌볼 줄 아는 사랑으로 들숲바다를 품으면서 노래하기에 사람입니다.


  사람은 서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서로 사랑합니다. 사람은 좋거나 나쁘다고 가르려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아우르면서 너나없이 우리(하늘·한울)를 이루려고 태어납니다.


  우리말 ‘하늘·한울’은 “하나인 울”입니다. 울·우리가 하나이기에, 함께이기에, 하얗게 햇빛이기에, 함초롬하고 함함히 빛나기에 하나인 나와 너입니다. 이러한 결을 읽어 본다면, 누구나 “나는 어떤 말을 사랑하는 하루일까?” 하고 곱씹을 만합니다. 이리하여 “그렇다면 어떤 말을 사랑하나요?” 하고 누가 묻는다면 빙그레 웃으면서 한 마디를 들려줍니다.


 나는 ‘사랑’이라는 말을 사랑합니다


  사랑을 사랑합니다. 사람으로서 사랑을 사랑하려는 하루를 살고 살림하려고 합니다. 사랑을 배우고 알아가려고 숲을 품는 길을 찾습니다. 사랑말을 나누고 싶기에 숲말을 익혀서 펴고, 살림말을 일구면서 살림글로 옮깁니다.


  사랑말을 한다면 하나도 안 어렵습니다. 사랑글을 쓸 적에도 참으로 쉽습니다. 사랑이 없기에 어렵고 딱딱한 말이나 글입니다. 사랑을 등지기에 굳이 딱딱하고 어렵게 말을 하거나 글을 쓰더군요. 일본말씨나 옮김말씨(번역체)나 영어나 일본한자말이나 중국한자말이 ‘나쁘’지 않습니다. 일본사람은 일본말을 하면 되고, 미국사람은 미국말을 하면 되고, 중국사람은 중국말을 하면 되어요.


  우리는 이 땅에서 나고자라면서 이 땅에서 이웃과 동무를 마주하는 살림살이인 터라, ‘좋은말’도 ‘나쁜말’도 아닌 ‘우리말’을 ‘우리글’로 펼 뿐입니다. 너와 나를 아우르는 말인 ‘우리말’입니다. 너랑 나를 사랑으로 마주하는 말인 ‘사랑말 = 우리말 = 살림말 = 숲말’입니다.


  이쪽이 좋으냐 저쪽이 좋으냐 하고 따지거나 가르려고 하면, 으레 싸움박질로 번집니다. 어느 쪽에 서든 고요히 사랑일 적에는 반짝반짝 웃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어깨동무를 이루는 아름말과 아름글로 눈뜹니다.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저절로 아름답습니다. 사랑을 잊은 목숨붙이라면 아무리 덧씌우거나 치레하거나 꾸미더라도 ‘사랑척·사랑흉내·사랑시늉·사랑탈’일 뿐입니다. ‘척·흉내·시늉·탈’은 겉모습이에요. 사랑하고 아주 멀고, 사랑을 하나도 모르는 술레입니다.


  한글날이건 한글날이 아니건, 말을 보는 마음을 함께 읽기를 바랍니다. 좋아하는 굴레에서 사르르 빠져나와서 사랑하는 살림을 초롱초롱 맑은 눈과 반짝반짝 밝은 마음으로 즐겁게 노래하기를 바라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숲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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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을 쓰는 사람한테는

공휴일도 주말도 없고

주5일이나 8시간노동도 없다.


그저 365일 내내 일에 또 일이다.

그래서 이 일을 물결이 일듯 즐겁게 일어나는

하루노래로 여기려고 한다.


한글날을 앞두고 즐겁게 읽어 보시기 바라며,

조금 더 깊이 헤아리고 싶다면

<우리말꽃>을 비롯한 숲노래 씨 책을

사서 읽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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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 / 숲노래 말넋

말꽃삶 20 집옷밥 밥옷집 옷밥집



  저는 어른이란 몸을 입은 오늘날에도 ‘의’를 소리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동안 생각하고 가다듬고서야 비로소 ‘의’를 소리냅니다. 혀짤배기에 말더듬이란 몸으로 태어나고 자란 터라, 어릴 적에는 더더욱 고단했습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요새는 둘레에서 이모저모 ‘입 속에서 혀랑 이를 어떻게 놀리면 되는가’를 밝히거나 알려주는 이웃을 쉽게 만날 만하고, 지난날에는 ‘‘의’를 비롯한 여러 소리를 어떻게 내면 되는가’를 차근차근 보여주거나 알려준 이웃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을식주 으식주


  ‘을식주’는 무엇이고 ‘으식주’는 뭘까요? 제가 어린배움터(국민학교)를 다니던 1982∼87년 무렵에는 날마다 시키고 때리는 길잡이(교사)가 많았습니다. ‘시험’이란 이름이 붙은 일도 끝이 없었는데, ‘중간시험·기말시험’뿐 아니라 ‘월말시험·쪽지시험’이 꼬박꼬박 뒤따랐어요. 어느 갈래 어느 시험인지는 어렴풋하지만, ‘의식주’로 풀이(답)를 적어야 하는 일(문제)이 있었고, 적잖은 또래는 ‘을식주·으식주’처럼 틀린 풀이를 적었습니다.


  예전 배움터에서는, 이처럼 틀린 풀이를 적으면 길잡이가 종이(시험지)를 하나하나 넘기면서 ‘틀린 풀이를 적은 아이’를 자리에서 일으켜세웠어요. “야, 이게 뭐냐? 넌 우리말도 몰라? 어떻게 ‘의’를 ‘을’로 적을 수 있어?” 하고 꾸짖으면서 놀림감으로 삼았습니다. 저는 그때 틀린 풀이를 안 적었기에 놀림감이 안 되고 얻어맞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종이에 글로 적는 일’은 틀리지 않았으나, ‘입으로 소리를 내는 일’은 으레 버벅거리거나 헤맸어요.


 옷밥집


  한자말 ‘의식주’를 우리말로 옮기면 ‘옷밥집’입니다. 저는 혀짤배기에 말더듬이입니다만, 우리말 ‘옷밥집’은 소리가 안 새면서 말할 수 있고, 더듬지 않고도 수월하게 소리를 낼 만합니다.


  아스라한 지난날이기는 합니다만, 1982∼87년 그무렵 어린배움터에서 ‘의식주’가 아닌 ‘옷밥집’을 적으라 했으면, 동무들도 ‘을식주·으식주’ 사이에서 틀리지 않고 똑똑히 ‘옷밥집’을 적지 않았을까요? 때로는 ‘밥집옷’이나 ‘밥옷집’으로, 또는 ‘옷집밥’이나 ‘집밥옷’이나 ‘집옷밥’으로 적기도 했을 테고요.


 밥옷집


  남녘에서는 한자말로 ‘의식주’라 하고, 북녘에서는 한자말로 ‘식의주’라 합니다. 그런데 남북녘은 서로 옳다고 티격태격합니다. 얄궂은 노릇입니다. 옷을 먼저 적든 밥을 먼저 적든 무엇이 대수로울까요.


  남북녘은 ‘의식주·식의주’ 사이에서 다툴 까닭이 없어요. ‘옷밥집·밥옷집’ 모두 받아들이면 됩니다. 올림말(표준말)을 하나만 세워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 살림살이를 단출히 아우르는 낱말을 여섯 가지 올려놓아도 즐겁고 아름다우면서 알뜰합니다.


  ‘옷밥집·옷집밥’에 ‘밥옷집·밥집옷’에 ‘집옷밥·집밥옷’을 저마다 마음이 가는 대로 즐겁게 쓸 수 있으면 넉넉합니다. 남북녘은 누가 옳거니 그르거니 싸우거나 다투거나 겨루거나 아웅다웅하지 않아도 되어요. 서로서로 우리 살림살이를 사랑으로 보듬으면서 도란도란 북돋울 노릇입니다.


[숲노래 낱말책]

밥옷집 (밥 + 옷 + 집) : 밥과 옷과 집. 살아가며 누리거나 가꾸거나 펴는 세 가지 큰 살림을 아우르는 이름. 살아가며 곁에 두는 살림살이. (= 밥집옷·옷밥집·옷집밥·집밥옷·집옷밥. ← 의식주, 식의주)


  낱말풀이를 할 적에 ‘나란히 쓸 낱말’을 붙여 주면 됩니다. 그리고 어떤 한자말이나 영어를 손질하거나 풀어내었는지 덧붙일 수 있습니다.


  어느 한 가지를 어느 한 낱말로 가리키겠지요. 그런데 온누리에는 한 사람만 살지 않아요. 숱한 사람이 살고, 숱한 아이가 태어나서 자랍니다. 얼핏 보면 똑같은 한 가지이되, 다 다른 숱한 사람이 바라보는 터라 온갖 말이 태어나거나 깨어나거나 자라날 만합니다.


  넉넉히 즐겁도록 여러 말씨를 품고 돌아보면서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밥도 즐기고 옷도 누리고 집도 돌보면 됩니다. 옷도 짓고 밥도 짓고 집도 지으면 됩니다. 우리 집을 추스르고 우리 밥을 나누고 우리 옷을 펴면 되어요.


 바르다 곧바르다 올바르다 똑바르다


  ‘바르다’ 하나를 놓고서 여러 낱말이 가지를 뻗습니다. 바탕은 ‘바르다’인데, ‘곧-’을 붙이느냐 ‘올-’을 붙이느냐 ‘똑-’을 붙이느냐에 따라 결이 조금씩 다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바르다’를 알맞게 살피면서 마음도 생각도 삶도 새록새록 가꿀 만합니다.


  여기에 새말을 슬며시 얹을 수 있어요. 이를테면 ‘뜻바르다’나 ‘꽃바르다’나 ‘길바르다’나 ‘삶바르다’나 ‘사랑바르다’나 ‘참바르다’라 할 수 있어요. 뜻이 바르고, 꽃처럼 바르고, 길이 바르고, 삶이 바르고, 사랑스레 바르고, 참다이 바르다는 뜻으로 새말을 여밀 수 있습니다.


  ‘바른길·바른넋·바른꿈·바른말·바른몸·바른짓·바른일·바른빛·바른꽃·바른숲’처럼 ‘바른-’을 앞에 놓고서 뒷말을 바꾸어 볼 만합니다. ‘꽃바른넋·꽃바른꿈’처럼 앞뒤에 한 마디씩 붙이는 새말을 여미어도 즐겁습니다.


 꽃 + 바른 + 말


  뜻을 즐거우면서 곱게 담아서 소리를 내기에 수월하도록 엮는 말씨를 지어 봅니다. 누구나 살찌우는 말살림입니다. ‘입바른말(입바른소리)’을 해도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저는 ‘꽃바른말’을 하고 싶습니다. ‘꽃바른길’을 걷고 ‘꽃바른일’을 하면서 ‘꽃바른숲’으로 보금자리를 보듬고 싶습니다.


  ‘꽃다운삶’을 누리고 ‘꽃다운날’을 보내면서 ‘꽃다운글’을 쓸 생각입니다. 이리하여 ‘꽃담은삶’으로 나아가고 ‘꽃담은날’을 노래하면서 ‘꽃담은글’을 펼 만하지요.


  철이 들어 상냥하면서 어질게 빛나는 사람이기에 ‘어른’입니다. 나이만 먹을 적에는 ‘어른’이 아닌 ‘늙은이’입니다. 철들고 빛나는 수수한 ‘어른’이어도 아름다울 테고, 철들고 빛나면서 곱게 ‘꽃어른’으로 설 수 있다면 새삼스레 반가워요.


  꽃아이 곁에 꽃어른이 있으니, 서로 꽃사람입니다. 봄꽃을 사랑하는 봄꽃사람은 봄꽃마음으로 서로 만나면서 봄꽃글을 주고받습니다. 늦은꽃은 고즈넉하고, 이른꽃은 의젓합니다. 아침꽃은 해사하고, 저녁꽃은 그윽합니다. 꽃별처럼 초롱초롱한 마음이요, 꽃숲처럼 향긋하게 살리는 터전입니다.


 풀꽃책


  저는 ‘식물도감’을 펴지 않습니다. 으레 ‘풀꽃책’을 폅니다. 풀꽃나무를 담은 책이면 ‘풀꽃나무책’이라는 이름이 어울립니다. 풀꽃을 밥으로 삼으니 ‘풀밥·풀꽃밥’입니다. 굳이 ‘채식·비건’을 할 마음이 없습니다. ‘푸른밥’을 먹고 ‘풀빛밥’을 나눕니다. ‘푸른글·푸른말’을 헤아리면서 ‘푸른책·풀꽃책·숲책’을 옆구리에 끼고서 들길을 걷고 숲길을 지납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숲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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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 / 숲노래 말넋


말꽃삶 19 탈가부장

갇힌 말을 깨우다



  조선이란 이름을 쓰던 나라는 500해에 걸쳐서 ‘중국 섬기기’를 했고, 이 나라 사람을 위아래로 갈랐습니다. 중국을 섬기던 조선 나리하고 벼슬꾼은 집안일을 순이한테 도맡기고, 나라일은 돌이만 도맡는 틀을 단단히 세웠지요. 곰팡틀(가부장제)을 일삼았습니다.


  나리·벼슬꾼이 나아가는 곰팡틀은 한문만 글이었습니다. 세종 임금이 여민 ‘훈민정음’은 ‘중국말을 읽고 새기는 소릿값’으로 삼는 데에 그쳤어요. 오늘날 우리가 안 쓰는 ‘훈민정음’이 제법 있습니다. 우리 소릿값이 아닌 중국 소릿값을 담아내는 틀이었기에, 굳이 살릴 까닭이 없어서 하나씩 사라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여느사람(백성·평민)은 글(한문)을 못 배우도록 틀어막았습니다.


  조선이란 나라가 아닌, 고구려·백제·신라·발해·가야·부여에서도 나리하고 벼슬꾼은 집안일을 안 했을 테지만, 곰팡틀까지 일삼지는 않았어요. 이 곰팡틀은 이웃나라 일본이 총칼로 쳐들어오며 외려 더 단단하였고, 일본이 물러간 뒤에도 서슬퍼런 총칼나라(군사독재)가 잇는 바람에 곰팡틀을 걷어낼 틈이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곰팡틀을 이제 겨우 걷어내는 판입니다. 지난날에는 나리·벼슬꾼 사이에서만 곰팡틀이 퍼졌다면, 일본이 총칼로 억누르던 무렵에는 모든 사람한테 곰팡틀이 퍼졌고, 총칼나라에서는 이 굴레가 깊디깊이 스몄습니다.


  살림을 사랑스레 가꾸는 집안이라면 집안일을 순이돌이가 함께합니다. 토막으로 갈라서 누구는 이만큼 하고 누구는 저만큼 하는 얼개는 살림짓기하고 한참 멉니다. 밥짓기든 옷짓기든 집짓기든 순이돌이가 나란히 할 줄 알아야 보금자리를 알뜰살뜰 아름답게 건사합니다.


  순이가 아기를 낳아 돌볼 적에 누가 밥살림에 옷살림을 해야겠는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마땅히 돌이가 맡아야지요. 가시버시 가운데 한 사람이 다치면 집안일뿐 아니라 집밖일을 누가 맡겠는지 생각해 봅니다. 마땅히 둘 모두 집안팎일을 나란히 다스릴 줄 알아야 집안이 아늑하면서 즐거워요.


  중국을 섬기던 나리·벼슬꾼이 쓴 글(한문)은 우리말이 아닌 중국말입니다. 나리·벼슬꾼이 쓰던 글은 오늘날 ‘중국 한자말’하고 ‘일본 한자말’이란 꼴로 남습니다. 지난날 글을 하나도 모르는 채 수수하게 살림하고 사랑으로 아이를 돌본 사람들이 쓰던 말은 ‘사투리·시골말’로 남았으며, 이 사투리는 차근차근 자라고 뻗으면서 ‘삶말·살림말·사랑말·숲말’로 새롭게 태어나려고 합니다.


  곰곰이 본다면, 우리는 우리말을 쓴 지 아주 오래이지만, 우리말을 우리글로 제대로 담은 지는 얼마 안 되어요. 세종 임금이 훈민정음을 여미던 때에는 “중국말을 훈민정음으로 가끔 담았”습니다. 주시경 님이 훈민정음이란 이름을 ‘한글’로 바꾸고서 ‘우리말길(국어문법)’을 처음으로 세우고 펴던 무렵부터 “우리말을 우리글로 늘 담는 살림”을 비로소 누릴 수 있었고, 일제강점기·군사독재를 한참 지나 1990년쯤 이른 무렵부터 “근심걱정이 없이 우리말을 우리글로 언제 어디서나 담는 하루”를 제대로 누린다고 할 만합니다.


  다만 1990년쯤 이르면, 그만 영어물결이 드높고 말아, “우리말을 우리글로 담는 하루”가 흔들리지요. 2000년을 넘고 2020년을 넘어도 영어물결은 안 낮습니다. 더구나 그동안 ‘중국 한자말’이 꽤 걷혔지만, 일본수렁부터 ‘일본 한자말’이 나라 곳곳에 퍼진 바람에,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중국 한자말·일본 한자말·영어’ 등쌀에 눌리거나 밟히면서 “우리말을 우리글로 담는 하루”가 무엇인지 차근차근 짚거나 살피거나 배우거나 나누는 길하고는 퍽 멀어요.


  우리는 왜 우리말을 우리말로 제대로 못 담을까요? 바로 ‘곰팡틀(가부장제)’이 여태껏 크게 춤추거든요. ‘곰팡틀 = 꾼’이기도 합니다. ‘꾼 = 전문가’입니다. ‘곰팡틀에 갇힌 말 = 꾼말’이요, 이는 ‘전문용어 = 가부장 권력에 찌든 말’인 얼개이니, 오늘날 이 나라에서 널리 쓰는 숱한 꾼말(전문용어)은 하나같이 ‘일본 한자말’이거나 영어이거나 옮김말씨(번역체)입니다.


  우리가 보금자리뿐 아니라 삶자리하고 마음자리에서 곰팡틀을 걷어낼 줄 알아야, 비로소 “우리말을 우리글로 담는 하루”를 이룹니다. 일본앞잡이(친일부역자)를 걸러내기만 해서는 우리 삶을 되찾지 않아요. 일본 한자말이 ‘좋거나 나쁘다’고 가릴 일이 아닌, 곰팡틀에 갇힌 마음으로 함부로 퍼뜨리고 써온 말씨에 백 해 가까이 길들다 보면, 꾼이 아닌 여느 순이돌이조차 꾼말을 안 쓰면 마치 뒤처지거나 바보인 듯 스스로 깎아내리는 마음이 싹틉니다.


  사투리하고 시골말을 가만히 헤아릴 노릇입니다. 글(한문)을 모르고 배움터를 다닌 적이 없고 책을 읽은 일조차 없던 수수한 순이돌이는 거의 다 흙사람이었습니다. 지난날 거의 모든 수수한 순이돌이는 글은 한 줄조차 모르고 못 읽었으나, 늘 말로 이야기를 펴고 들려주고 남겼습니다. 지난날 흙사람인 순이돌이는 제 보금자리에서만 지냈으니 먼 마을이나 이웃고장은 아예 모르며 살았는데, 다 다른 고장에서 살던 다 다른 순이돌이는 다 다르게 사투리를 스스로 지어서 썼습니다.


  사투리는, 스스로 지은 말입니다. 사투리는, 삶·살림·사랑을 스스로 지은 사람들이 삶·살림·사랑을 고스란히 담아 스스로 지은 말입니다. 사투리는, 어버이가 아이한테 물려주는 삶·살림·사랑을 고스란히 담은 말입니다. 사투리는, 모든 삶·살림·사랑을 스스로 짓도록 북돋우는 마음이 빛나는 말입니다. 사투리는, 바로 우리말입니다. 시골사람이 지어서 쓰고 흙사람이 지어서 쓴 사투리는, 두고두고 삶·살림·사랑을 밝힐 ‘즐거우면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숲말입니다.


  하나하나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리·벼슬꾼은 중국을 섬기면서 집일을 하나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돌보았어요. 이와 달리 흙사람인 순이돌이는 스스로 일구면서 집일을 함께하고 아이를 사랑으로 낳아 돌보았어요. 나리·벼슬꾼이 쓴 글(한문)은 임금이나 중국을 치켜세우는 뜬구름 같은 줄거리만 판칩니다. 글을 모르고 말로 삶·살림·사랑을 여민 수수한 순이돌이가 남긴 이야기(옛이야기)는 매우 쉽고 상냥하게 아이어른 모두한테 슬기로운 길잡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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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섭(金晉燮) : [인명] 수필가·독문학자(1908∼?)


  나리·벼슬꾼은 이름을 남겼을 테지요. 국립국어원이 낸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이처럼 나리·벼슬꾼 이름이 잔뜩 나옵니다. 우리 낱말책에 ‘우리말’이 아닌 ‘나리·벼슬꾼 이름’이 끔찍하도록 많이 실려요. 그런데 이들 ‘나리·벼슬꾼 이름’을 가만히 보면 죄다 사내(남성)입니다. 이른바 ‘곰팡틀 사내(가부장 권력 남성)’ 이름을 《표준국어대사전》에 줄줄이 실어요.


  우리가 쓰는 말은, 우리가 쓸 말은, 우리가 아이한테 물려줄 말은, 나리도 벼슬꾼도 아닌 수수한 순이돌이가 스스로 지어서 쓴 ‘삶말·살림말·사랑말·숲말’입니다. 이름도 없고 글도 없이 조용하게 살면서 아이를 사랑으로 낳아 돌보았고 살림살이도 손수 가꾸고 짓던 흙사람이 지은 말이야말로 우리가 즐겁게 돌보고 아름다이 사랑할 말입니다.


  이 밑뿌리를 읽어낼 수 있다면 ‘중국 섬기기(사대주의)에 길든 곰팡틀(가부장 권력)’이란, 고작 ‘조선 500년 나리·벼슬꾼’에 ‘오늘날 벼슬꾼·글바치·전문가’일 뿐인 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수수하게 보금자리를 보살피면서 하루를 사랑하는 여느사람은 언제나 집안일·집살림을 함께하고 어깨동무하는 마음으로 우리말을 우리글로 넉넉히 담아낼 만하다고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새롭게 서려는 자리에서 ‘탈 가부장’ 같은 어려운 말을 써도 안 나쁩니다만, 굳이 어렵게 말해야 하지 않아요. 우리는 저마다 ‘살림돌이·살림순이’로 노래하면 즐겁습니다. ‘살림꾼·살림님’이란 이름을 스스로 붙이면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가정주부·주부’가 아닌 ‘살림꽃’으로 서기에 사랑스럽습니다.


  말 한 마디부터 찬찬히 읽으면서 생각을 가꿀 적에 곰팡틀을 싹 털어낼 만합니다. 말 한 마디부터 사랑으로 다독여 즐겁게 꽃피울 적에 모든 꾼말을 말끔히 걷어내고서, 이 자리에 삶말·살림말·사랑말이 자라나서 푸르게 우거지는 숲으로 나아가도록 북돋울 만합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숲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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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8일에

부산에서 편 이야기꽃 자리에서

여러 이웃님한테 나누어 준

밑글(원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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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꽃 / 숲노래 말넋 2024.7.19.


2024.7.17. 말에 담는 마음을 읽는 길

― 부산청년들, 2024 청년도전 지원사업 위닛캠퍼스 “우리말과 글” 이야기



  ㄱ


  저는 낱말책을 짓습니다. ‘낱말책’이란, 낱말을 묶은 꾸러미라는 뜻입니다. 낱말을 여미는 꾸러미를 일본말로는 ‘사전’이나 ‘국어사전’이라 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그냥그냥 ‘사전·국어사전·백과사전’ 같은 일본 한자말을 씁니다만, 예전에 ‘국민학교’라는 일제강점기 이름을 어렵사리 ‘초등학교’로 바꾸었듯, ‘국어·국어사전·사전’ 같은 부스러기 일본말도 이제는 우리말로 풀거나 옮기거나 새롭게 여밀 노릇이라고 봅니다.


  ‘국민’이나 ‘국어’는 일본말이되, 그냥 일본말이 아닌, 총칼로 이웃나라로 쳐들어가던 ‘군국주의 일본’이 억지로 만든 말입니다. 일본은 워낙 ‘일본어’라 했고, 우리는 ‘조선어’라 했고, 중국은 ‘중국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1800년대가 저물 즈음 “일본 우두머리를 섬기면서 아시아를 크게 하나로 묶어야 한다”고 외치면서 총칼을 부추겼어요. 이때에 일본은 ‘일본어·일본문학’이라는 이름을 ‘국어·국문학’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러면서 ‘국어·국문학’이란 이름을 우리나라와 중국과 대만 모두 쓰라고 윽박질렀어요.


  대만은 1980년 즈음부터 ‘국어’라는 일제강점기 부스러기를 털었습니다. 일본은 1970년 즈음에 ‘국어’라는 제국주의 부스러기를 털었어요. 우리나라는 2024년에 이르러도, 오히려 나라에서는 ‘국립국어원’이란 이름을 버젓이 쓸 뿐 아니라, ‘국어·영어·수학’처럼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ㄴ


  첫머리부터 좀 어렵거나 너무 낯선 이야기였을까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하는 일을 자기소개서나 직업소개서에는 ‘사전편찬자’로 적습니다. 이런 이름을 적으면 우리나라에 사전편찬자가 몇이나 있기에 적느냐고, 그냥 ‘작가’로 뭉뚱그리라는 핀잔을 곧잘 들어요. 이른바 ‘회사원’이나 ‘공무원’처럼 뭉뚱그리라는 뜻일 테지요.


  그러나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뜻인 ‘작가’로 뭉뚱그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을까요? 뭐, 공무원이라면 대통령도 공무원이고 시장도 공무원이니, 그분들도 다 ‘공무원’이라고 적을는지 모르겠어요. 은행원이건 우체국 일꾼이건 그냥 ‘회사원’일 수 있어요.


  더 헤아려 보니, 자동차공장에서 일하건 자전거공장에서 일하건 다들 ‘노동자’조차 아닌 ‘회사원’으로 적는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일(직업군)에는 아직 ‘노동자’란 칸이 없지 않나요?


  저는 사전편찬자라는 일을 하기에 그저 이렇게 적을 뿐인데 ‘작가’라는 이름으로 퉁치고 싶지 않아서, 이따금 ‘살림꾼’이라고 적기도 합니다. ‘살림꾼’이란, ‘가정주부’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일본 한자말 ‘가정주부’는 ‘아줌마’만 가리켜요. 그래서 우리말로 ‘살림꾼’으로 적습니다. 집안일을 하는 아저씨는 아줌마가 아니니까 ‘주부’라 할 수 없거든요.



  ㄷ


  어떤 일을 하는지 적는 자리에서 좀 까칠하지 않느냐고 여길 만한데,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구태여 뭉뚱그리거나 퉁쳐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일을 쉬면 ‘쉽니다’라 적으면 되어요. 일을 찾아나서면 ‘일을 찾습니다’라 적으면 되어요.


  여러모로 까칠해 보이는 이런 매무새는 어릴 적부터 건사한 삶길입니다. 나이가 아무리 많은 분이라 하더라도 잘못은 잘못인걸요. 이를테면, 대여섯 살 무렵이나 예닐곱 살 무렵에, 마을에서 어느 아저씨나 할머니가 쓰레기나 꽁초를 길바닥에 버리면 “아저씨, 왜 길에 쓰레기 버려? 안 되잖아?” 하고 따졌어요. “할머니, 할머니가 버린 쓰레기 도로 가져가. 왜 아무 데나 버려?” 하고 치맛자락을 잡았습니다.


  어린이가 너무 까칠할까요? 이제는 초등학교로 바뀐 국민학교에서도 매한가지였습니다. 1982∼87년에 어린배움터(국민학교)를 다니면서, 담임교사이든 담임 아닌 교사이든 골마루에서 달리거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건널목을 빨간불에 건너면 “선생님! 선생님이라고 해서 잘못하면 안 되지요!” 하고 빽 소리를 질렀어요.


  예전에 어린이가 선생님한테 선생님 잘못을 짚거나 따지면, “그래, 네 말이 맞구나. 내가(선생님이) 잘못했어.” 하고 점잖게 고개숙이지 않았습니다. “네까짓 게 어디서 큰소리야?” 하면서 불벼락이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저는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도 교사가 침을 아무 데나 뱉거나, 끌신을 꿰고 운동장을 거닐면 “선생님이라고 해서 함부로 하면 안 되지요!” 하고 코앞에서 따졌습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주먹이나 발길질을 받았습니다.



  ㄹ


  왜 어떻게 낱말책을 쓰는 길, 이른바 사전편찬자로 걸어올 수 있었나 하고 돌아보면 여러 가지가 떠오릅니다. 첫째, 저는 아주 오래도록 말더듬이로 애먹었습니다. 혀짤배기라서 소리가 쉽게 새기도 합니다. 혀가 짧은 말더듬이가 소리를 못 내는 낱말이 꽤 많습니다. 열 살 무렵까지는 잘 몰랐습니다만, 열 살 무렵에 마을 할아버지한테서 천자문을 배우면서 “아! 내가 소리를 못 내거나 틀리게 내는 낱말이 몽땅 한자말이었잖아!”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열 살부터 열세 살에 이르는 때에, 교과서 읽기를 시키면, 미리 익힌 우리말을 헤아리면서 교과서를 다르게 읽었어요. 소리를 내기 어려운 한자말을, 소리를 내기 쉬운 우리말로 몽땅 바꾸어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서 늘 출석부로 머리통을 얻어맞았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서 들어간 대학교에서도 비슷한 일은 마찬가지였어요. 나중에 일자리를 얻기 좋도록 중간·기말시험에 점수를 잘 받아야 한다면서, 다들 교수한테 뭘 선물한다느니, 알랑방귀를 뀐다든지, 여학생이라면 팔짱을 끼고 달라붙어서 사근사근한다든지, 또 일부러 남자교수 수업에 깡똥치마 차림으로 듣는다든지, 이렇게 해서 점수를 올려받는 또래나 윗내기가 수두룩했습니다.


  1994년에 들어간 대학교에서 언제나 어이없어서 혀를 내둘렀습니다. 설마 싶었지만, 깡똥치마를 두른 여학생과 바지를 꿴 여학생이 받는 점수가 확 달라서 “우리나라 민낯이 이렇게 추레하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이런 대학교를 더 다닐 수 없어서 그만두었어요. 저는 사내라는 몸이니 군대를 다녀오고서 1998년 12월에 그만두었습니다. 대학교를 자퇴로 떠나기 앞서 마지막 1998년 두 학기는 전공 과목이 아닌 부전공으로 신문방송학과 수업 네 해치를 욱여서 들었습니다. 더는 대학교란 데를 쳐다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ㅁ


  그런데 제가 다닌 대학교는, 서울에 있는 한국외대 네덜란드말 학과입니다. 제가 다니던 무렵에는 네덜란드 낱말책이 없었습니다. 낱말책도 없이 이웃말(외국어)을 가르친다는 엉터리 배움터였어요.


  이제는 낱말책이 있습니다만, 제가 새내기이던 1994년에 네덜란드 낱말책에 밑글(원고)을 셈틀로 토닥토닥 쳐넣는 자원봉사도 했습니다만, 그러니까 1학년 새내기가 ‘사전 원고 입력 자원봉사’를 하는 우스꽝스러운 민낯인 외국어대학교입니다만, 그래도 통번역이라는 길을 가고 싶어서 들어간 대학교인데, 그저 캄캄해서 그만두기로 했어요.


  이웃말을 배울 적에는 우리말을 나란히 배워야 합니다. 영어만 잘 한대서 통번역을 못 합니다. 들은 영어를 우리말로 쉽고 또렷하면서 단출히 옮겨야 하잖아요? 그리고 우리말을 영어로 옮기려면 우리말이 어떤 결인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통번역이라는 길을 가려면, ‘이웃말(외국어) : 이웃살림(외국문화) : 우리말 : 우리살림(한국문화)’ 네 가지를 ‘3 : 2 : 3 : 2’로 가다듬을 노릇입니다. 두 나라 말과 살림을 나란히 살필 적에 비로소 통번역을 제대로 옳게 알맞게 슬기롭게 합니다. 그러나 여러모로 보건대, 우리나라 어느 대학교에서도 ‘3 : 2 : 3 : 2’로 안 가르치거나 못 가르치더군요.


  저는 대학교를 그만두기로 하면서 ‘이웃말·이웃살림’은 그만 배우기로 했습니다. 오롯이 ‘우리말·우리살림’을 배우는 길을 혼자 걸었어요. 이때가 1994년 7월입니다.



  ㅂ


  대학교를 다닐 적에 구내서점과 대학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했습니다. 살림돈도 벌어야 했고, 스스로 배움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구내서점과 대학도서관에서 한 달쯤 일하면서 보자니, 대학교 구내서점과 도서관에서 읽을 만한 책이 더 없더군요. 고작 한 달 만에 읽을거리가 바닥났어요.


  그저 안쓰러웠습니다. 이렇게 책도 제대로 안 갖추고서 구내서점과 도서관이라는 이름만 허울로 붙이는구나 싶더군요. 그때에는 서울에서 신문배달을 하면서 자취를 했는데, 신문배달을 하는 자전거로 서울 곳곳에 있는 헌책집을 찾아다니면서, 우리나라 모든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국어국문학과 교재를 다 찾아내어 읽었습니다. 여섯 달 걸리더군요. 여섯 달쯤 이렇게 하니 우리나라 국문학 책을 더 읽을 만하지 않았습니다.


  어쩐지 우리나라는 배움밭(학문)이 매우 얕더군요. 그렇지만 이토록 얕은 배움밭을 제대로 바라보거나 깨닫는 분이 잘 안 보여요. 그래서 1994년 12월 29일에 스스로 〈우리말 한누리〉라는 이름인 ‘우리말 동아리’를 열었습니다.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가르치자고 생각했습니다. 배운 만큼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새로 배우면서 서로 가르치는 길을 찾기로 했습니다.


  이러면서 ‘1인 소식지’를 이해 이때부터 냈어요. 1994년 12월부터 혼자서 여미어 둘레에 그냥 나누어 주는 ‘1인 소식지’를 2024년 7월까지 1013호쯤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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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깥에서 보자면, 고졸입니다. 낱말책을 쓰는 길을 가기에 언제나 종이를 잔뜩 짊어집니다. 낱말을 모으는 꾸러미(수첩)를 챙기고, 말밑(어원)을 살피는 꾸러미를 챙기고, 우리말로 이야기를 엮어서 노래(시)를 쓰느라, ‘시 창작수첩’도 여럿 챙깁니다. 낱말책에 담는 낱말은 마음으로도 헤아려야 하기에, ‘마음으로 쓰는 하루글(일기)’을 적는 꾸러미도 챙깁니다.


  이 대목에서 갸웃할 분이 있을 텐데, 사전편찬자는 ‘글로 남은 밑동(기초자료)’만으로 낱말을 캐거나 찾거나 살피지 않습니다. 미나리는 왜 미나리일까요? 부추와 정구지와 솔이라는 이름으로 다르게 가리키는 나물은 왜 고장마다 다르게 가리킬까요? 구름은 왜 구름이고 비는 왜 비일까요? 바람이며 이슬은 무엇일까요?


  개구리와 사마귀와 여치는 어떤 숨빛을 품은 이웃일까요? 낱말책에 ‘아기’나 ‘기저귀’라는 낱말을 올림말로 삼아서 뜻을 붙일 적에 어떻게 해야 알맞을는지 생각해 보셔요.


  그리고 ‘생각·마음·넋·사랑’ 같은 낱말에 뜻풀이하고 보기글을 붙일 적에 어떻게 해야 어울릴는지 헤아려 보셔요. 무엇보다도 ‘헤아리다·살피다·가누다·여기다’ 같은 낱말이 어떻게 비슷하고 다른지 어떻게 갈라야 할까요? ‘닮다·비슷하다’라든지 ‘휘다·굽다’라든지 ‘곱다·아름답다’는 어떻게 다르게 쓰는지 어떻게 갈라서 풀이해야 걸맞을까요?



  ㅇ


  말더듬이 어린이는 열 살에 이를 때까지 날마다 놀림을 받고 얻어맞았습니다. 열 살 뒤에도 얻어맞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만, 말더듬이를 스스로 풀어내는 길을 하나씩 찾아내면서 천천히 삶을 가꾸어 왔습니다. 혀가 짧아도 둘레에서 제 말소리를 또박또박 알아듣도록 혀랑 이랑 입이랑 목이랑 턱이랑 뱃속이랑 허파를 어떻게 가누어야 하는지 하나하나 스스로 찾아내며 살았습니다.


  군대에 갈 수 없을 만큼 코머거리였던 터라, 코로 숨을 못 쉬는 나날을 서른아홉 살까지 보내야 했는데, 마흔 살을 앞두고서 숨쉬기를 드디어 깨달아서, 그 뒤로는 코로 즐겁게 숨을 쉽니다.


  저는 운전면허증조차 안 땁니다. 걸어다니거나 두바퀴(자전거)를 달립니다. 낱말책을 쓰는 사람이라서, 온누리 모든 말을 살피고 담아야 하니, 부릉부릉 몰 수 없어요. 되도록 걸으면서 그때그때 종이에 모든 말을 가다듬고 살펴서 적바림합니다. 그런데 두바퀴로 우리나라 골골샅샅을 다니면서 여태까지 적잖이 쇳덩이(자동차)한테 치였습니다. 신문배달을 하던 1998년에도 크게 뺑소니로 치여서 죽을고비를 넘겼고, 2006년까지 거의 해마다 쇳덩이가 뒤나 옆에서 갑자기 들이받아서 길바닥에 무릎과 손목과 어깨가 팔꿈치가 모질게 갈렸어요. 뼈가 보일 만큼 갈려서 한참 못 걷거나 손과 팔을 못 쓰기 일쑤였는데, 어찌저찌 이럭저럭 등짐도 잘 나르고 집안일도 제법 하면서 살아갑니다.


  저는 면허증도 안 따지만, 병원도 안 갑니다. 늘 집에서 조용히 드러누워서 몸앓이를 하면서 달랩니다.


  꽤 어리석은 삶을 보낸다고 여길 만합니다. 그런데 낱말책을 짓는 사람은 이 모든 삶을 두루 겪고 헤아리면서 ‘좋고 나쁨이 없는 삶’이라는 대목을 읽어야 하더군요. 뺑소니로 치여서 나쁘지 않습니다. 뺑소니로 치였을 뿐입니다. 팔다리가 갈려서 몇 달 동안 한 손과 한 다리를 못 썼지만, 이동안 왼손으로 빨래하고 밥을 짓고 배달자전거를 몰면서 일하는 길을 익혔습니다. 한 다리로만 살아야 하면서 외걸음이란 무엇인지 새록새록 배우기도 했습니다.



  ㅈ


  낱말책은, 낱말을 담은 꾸러미라고 했습니다. 낱말이란 ‘낱으로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전이란 ‘= 낱말책’이면서 ‘말책’입니다. 말을 담기에 말책인데요, 말이란 마음을 담은 소리예요. 마음을 소리로 그리니 ‘말’입니다. 우리가 읽는 ‘글’은 ‘말’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그린 무늬입니다.


  하나하나 짚으면, 글은 말이요, 말은 마음인데, 마음은 우리가 누리는 하루인 삶에서 비롯합니다. 삶이 있기에 마음이 있어요. 삶이 없으면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좋은 삶이나 나쁜 삶이 아닌, 그저 삶을 누려요.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마음을 새롭게 일구는 하루를 살아내면서, 이 마음을 말로 옮기고, 이 말을 글로 다시 담습니다.


  아무렇게나 말한다면, 우리 스스로 마음을 아무렇게나 팽개친다는 뜻입니다. 아무렇게나 글을 쓴다면, 우리 마음이 아무렇게나 마구잡이로 뒹굴라면서 내버린다는 뜻입니다.


  말 한 마디는 씨앗이기에, 어떤 말씨를 입에 담고 손에 얹느냐에 따라서, 우리 삶을 우리가 스스로 바꿉니다. 이 삶을 사랑으로 가꾸고 싶다면, 오직 사랑으로 빛나는 말을 혀에 얹고 글로 옮길 노릇입니다.


  깎음말이라 할 ‘욕’은 남을 못 깎아요. 욕은 늘 남이 아닌 나를 스스로 깎고 갉습니다. 욕을 자주 읊는 사람은 남을 못 괴롭혀요. 욕을 하는 스스로 괴롭힐 뿐입니다.


  겉으로 달콤하거나 좋아 보이거나 멋져 보이는 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겉치레나 허울에 가득한 삶으로 뒹구는 얼거리입니다.



  ㅊ


  말에 담는 마음을 읽는 길을 살피면서 스스로 사랑하는 넋으로 서려고 낱말책을 짓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은 낱말책을 이웃님이 장만해서 읽기를 바라지요.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마음과 마음을 잇는 길인 ‘이야기’로 바라보거나 받아들이기를 바라면서 낱말책을 펴냅니다.


  우리는 낱말을 더 많이 알아야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낱말책을 달달 외워야 글을 잘 쓰지 않습니다. 스스로 오늘 이 하루를 사랑할 줄 아는 마음으로 살아낼 적에 비로소 “내 살림은 내가 사랑이라는 숲빛으로 가꾸는구나” 하고 알아챌 만합니다.


  낱말 하나를 제대로 뜻풀이를 하고 말밑을 캐내기까지, 때로는 10분 만에 끝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열 해나 스무 해가 걸립니다. 그저 한 걸음씩 걸어갑니다. 낱말책을 제대로 쓰자면, 국립국어원이나 무슨무슨 대학교나 연구소 같은 데에 들어가면, 다달이 따박따박 나오는 일삯을 받으면서 걱정이 없을 만하다고 여길 수 있을 텐데, 막상 우리나라 국립국어원이나 무슨무슨 대학교나 연구소에서 여태껏 제대로 낱말책을 여민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길을 틔울 때라야 낱말을 제대로 바라보더군요. 일자리가 있어야만 낱말책을 알뜰살뜰 추스르지 않아요. 여러모로 외롭거나 고달픈 길일 수 있습니다만, 바깥에서 보는 눈으로 살아갈 마음은 없습니다. 남이 나를 추키거나 낮춘다고 해서 제가 높거나 낮지 않아요. 저는 제가 저를 사랑으로 바라볼 적에 스스로 사랑으로 밝은 넋일 뿐입니다.


  아무쪼록 말 한 마디에 온사랑을 담아서 봄바람과 가을꽃처럼 지피는 하루를 천천히 여미어 보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즐겁게 하루를 살면서 기쁘게 말 한 마디 풀어내 보시기를 바라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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