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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8일에

부산에서 편 이야기꽃 자리에서

여러 이웃님한테 나누어 준

밑글(원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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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꽃 / 숲노래 말넋 2024.7.19.


2024.7.17. 말에 담는 마음을 읽는 길

― 부산청년들, 2024 청년도전 지원사업 위닛캠퍼스 “우리말과 글” 이야기



  ㄱ


  저는 낱말책을 짓습니다. ‘낱말책’이란, 낱말을 묶은 꾸러미라는 뜻입니다. 낱말을 여미는 꾸러미를 일본말로는 ‘사전’이나 ‘국어사전’이라 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그냥그냥 ‘사전·국어사전·백과사전’ 같은 일본 한자말을 씁니다만, 예전에 ‘국민학교’라는 일제강점기 이름을 어렵사리 ‘초등학교’로 바꾸었듯, ‘국어·국어사전·사전’ 같은 부스러기 일본말도 이제는 우리말로 풀거나 옮기거나 새롭게 여밀 노릇이라고 봅니다.


  ‘국민’이나 ‘국어’는 일본말이되, 그냥 일본말이 아닌, 총칼로 이웃나라로 쳐들어가던 ‘군국주의 일본’이 억지로 만든 말입니다. 일본은 워낙 ‘일본어’라 했고, 우리는 ‘조선어’라 했고, 중국은 ‘중국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1800년대가 저물 즈음 “일본 우두머리를 섬기면서 아시아를 크게 하나로 묶어야 한다”고 외치면서 총칼을 부추겼어요. 이때에 일본은 ‘일본어·일본문학’이라는 이름을 ‘국어·국문학’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러면서 ‘국어·국문학’이란 이름을 우리나라와 중국과 대만 모두 쓰라고 윽박질렀어요.


  대만은 1980년 즈음부터 ‘국어’라는 일제강점기 부스러기를 털었습니다. 일본은 1970년 즈음에 ‘국어’라는 제국주의 부스러기를 털었어요. 우리나라는 2024년에 이르러도, 오히려 나라에서는 ‘국립국어원’이란 이름을 버젓이 쓸 뿐 아니라, ‘국어·영어·수학’처럼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ㄴ


  첫머리부터 좀 어렵거나 너무 낯선 이야기였을까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하는 일을 자기소개서나 직업소개서에는 ‘사전편찬자’로 적습니다. 이런 이름을 적으면 우리나라에 사전편찬자가 몇이나 있기에 적느냐고, 그냥 ‘작가’로 뭉뚱그리라는 핀잔을 곧잘 들어요. 이른바 ‘회사원’이나 ‘공무원’처럼 뭉뚱그리라는 뜻일 테지요.


  그러나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뜻인 ‘작가’로 뭉뚱그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을까요? 뭐, 공무원이라면 대통령도 공무원이고 시장도 공무원이니, 그분들도 다 ‘공무원’이라고 적을는지 모르겠어요. 은행원이건 우체국 일꾼이건 그냥 ‘회사원’일 수 있어요.


  더 헤아려 보니, 자동차공장에서 일하건 자전거공장에서 일하건 다들 ‘노동자’조차 아닌 ‘회사원’으로 적는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일(직업군)에는 아직 ‘노동자’란 칸이 없지 않나요?


  저는 사전편찬자라는 일을 하기에 그저 이렇게 적을 뿐인데 ‘작가’라는 이름으로 퉁치고 싶지 않아서, 이따금 ‘살림꾼’이라고 적기도 합니다. ‘살림꾼’이란, ‘가정주부’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일본 한자말 ‘가정주부’는 ‘아줌마’만 가리켜요. 그래서 우리말로 ‘살림꾼’으로 적습니다. 집안일을 하는 아저씨는 아줌마가 아니니까 ‘주부’라 할 수 없거든요.



  ㄷ


  어떤 일을 하는지 적는 자리에서 좀 까칠하지 않느냐고 여길 만한데,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구태여 뭉뚱그리거나 퉁쳐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일을 쉬면 ‘쉽니다’라 적으면 되어요. 일을 찾아나서면 ‘일을 찾습니다’라 적으면 되어요.


  여러모로 까칠해 보이는 이런 매무새는 어릴 적부터 건사한 삶길입니다. 나이가 아무리 많은 분이라 하더라도 잘못은 잘못인걸요. 이를테면, 대여섯 살 무렵이나 예닐곱 살 무렵에, 마을에서 어느 아저씨나 할머니가 쓰레기나 꽁초를 길바닥에 버리면 “아저씨, 왜 길에 쓰레기 버려? 안 되잖아?” 하고 따졌어요. “할머니, 할머니가 버린 쓰레기 도로 가져가. 왜 아무 데나 버려?” 하고 치맛자락을 잡았습니다.


  어린이가 너무 까칠할까요? 이제는 초등학교로 바뀐 국민학교에서도 매한가지였습니다. 1982∼87년에 어린배움터(국민학교)를 다니면서, 담임교사이든 담임 아닌 교사이든 골마루에서 달리거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건널목을 빨간불에 건너면 “선생님! 선생님이라고 해서 잘못하면 안 되지요!” 하고 빽 소리를 질렀어요.


  예전에 어린이가 선생님한테 선생님 잘못을 짚거나 따지면, “그래, 네 말이 맞구나. 내가(선생님이) 잘못했어.” 하고 점잖게 고개숙이지 않았습니다. “네까짓 게 어디서 큰소리야?” 하면서 불벼락이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저는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도 교사가 침을 아무 데나 뱉거나, 끌신을 꿰고 운동장을 거닐면 “선생님이라고 해서 함부로 하면 안 되지요!” 하고 코앞에서 따졌습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주먹이나 발길질을 받았습니다.



  ㄹ


  왜 어떻게 낱말책을 쓰는 길, 이른바 사전편찬자로 걸어올 수 있었나 하고 돌아보면 여러 가지가 떠오릅니다. 첫째, 저는 아주 오래도록 말더듬이로 애먹었습니다. 혀짤배기라서 소리가 쉽게 새기도 합니다. 혀가 짧은 말더듬이가 소리를 못 내는 낱말이 꽤 많습니다. 열 살 무렵까지는 잘 몰랐습니다만, 열 살 무렵에 마을 할아버지한테서 천자문을 배우면서 “아! 내가 소리를 못 내거나 틀리게 내는 낱말이 몽땅 한자말이었잖아!”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열 살부터 열세 살에 이르는 때에, 교과서 읽기를 시키면, 미리 익힌 우리말을 헤아리면서 교과서를 다르게 읽었어요. 소리를 내기 어려운 한자말을, 소리를 내기 쉬운 우리말로 몽땅 바꾸어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서 늘 출석부로 머리통을 얻어맞았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서 들어간 대학교에서도 비슷한 일은 마찬가지였어요. 나중에 일자리를 얻기 좋도록 중간·기말시험에 점수를 잘 받아야 한다면서, 다들 교수한테 뭘 선물한다느니, 알랑방귀를 뀐다든지, 여학생이라면 팔짱을 끼고 달라붙어서 사근사근한다든지, 또 일부러 남자교수 수업에 깡똥치마 차림으로 듣는다든지, 이렇게 해서 점수를 올려받는 또래나 윗내기가 수두룩했습니다.


  1994년에 들어간 대학교에서 언제나 어이없어서 혀를 내둘렀습니다. 설마 싶었지만, 깡똥치마를 두른 여학생과 바지를 꿴 여학생이 받는 점수가 확 달라서 “우리나라 민낯이 이렇게 추레하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이런 대학교를 더 다닐 수 없어서 그만두었어요. 저는 사내라는 몸이니 군대를 다녀오고서 1998년 12월에 그만두었습니다. 대학교를 자퇴로 떠나기 앞서 마지막 1998년 두 학기는 전공 과목이 아닌 부전공으로 신문방송학과 수업 네 해치를 욱여서 들었습니다. 더는 대학교란 데를 쳐다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ㅁ


  그런데 제가 다닌 대학교는, 서울에 있는 한국외대 네덜란드말 학과입니다. 제가 다니던 무렵에는 네덜란드 낱말책이 없었습니다. 낱말책도 없이 이웃말(외국어)을 가르친다는 엉터리 배움터였어요.


  이제는 낱말책이 있습니다만, 제가 새내기이던 1994년에 네덜란드 낱말책에 밑글(원고)을 셈틀로 토닥토닥 쳐넣는 자원봉사도 했습니다만, 그러니까 1학년 새내기가 ‘사전 원고 입력 자원봉사’를 하는 우스꽝스러운 민낯인 외국어대학교입니다만, 그래도 통번역이라는 길을 가고 싶어서 들어간 대학교인데, 그저 캄캄해서 그만두기로 했어요.


  이웃말을 배울 적에는 우리말을 나란히 배워야 합니다. 영어만 잘 한대서 통번역을 못 합니다. 들은 영어를 우리말로 쉽고 또렷하면서 단출히 옮겨야 하잖아요? 그리고 우리말을 영어로 옮기려면 우리말이 어떤 결인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통번역이라는 길을 가려면, ‘이웃말(외국어) : 이웃살림(외국문화) : 우리말 : 우리살림(한국문화)’ 네 가지를 ‘3 : 2 : 3 : 2’로 가다듬을 노릇입니다. 두 나라 말과 살림을 나란히 살필 적에 비로소 통번역을 제대로 옳게 알맞게 슬기롭게 합니다. 그러나 여러모로 보건대, 우리나라 어느 대학교에서도 ‘3 : 2 : 3 : 2’로 안 가르치거나 못 가르치더군요.


  저는 대학교를 그만두기로 하면서 ‘이웃말·이웃살림’은 그만 배우기로 했습니다. 오롯이 ‘우리말·우리살림’을 배우는 길을 혼자 걸었어요. 이때가 1994년 7월입니다.



  ㅂ


  대학교를 다닐 적에 구내서점과 대학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했습니다. 살림돈도 벌어야 했고, 스스로 배움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구내서점과 대학도서관에서 한 달쯤 일하면서 보자니, 대학교 구내서점과 도서관에서 읽을 만한 책이 더 없더군요. 고작 한 달 만에 읽을거리가 바닥났어요.


  그저 안쓰러웠습니다. 이렇게 책도 제대로 안 갖추고서 구내서점과 도서관이라는 이름만 허울로 붙이는구나 싶더군요. 그때에는 서울에서 신문배달을 하면서 자취를 했는데, 신문배달을 하는 자전거로 서울 곳곳에 있는 헌책집을 찾아다니면서, 우리나라 모든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국어국문학과 교재를 다 찾아내어 읽었습니다. 여섯 달 걸리더군요. 여섯 달쯤 이렇게 하니 우리나라 국문학 책을 더 읽을 만하지 않았습니다.


  어쩐지 우리나라는 배움밭(학문)이 매우 얕더군요. 그렇지만 이토록 얕은 배움밭을 제대로 바라보거나 깨닫는 분이 잘 안 보여요. 그래서 1994년 12월 29일에 스스로 〈우리말 한누리〉라는 이름인 ‘우리말 동아리’를 열었습니다.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가르치자고 생각했습니다. 배운 만큼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새로 배우면서 서로 가르치는 길을 찾기로 했습니다.


  이러면서 ‘1인 소식지’를 이해 이때부터 냈어요. 1994년 12월부터 혼자서 여미어 둘레에 그냥 나누어 주는 ‘1인 소식지’를 2024년 7월까지 1013호쯤 냈습니다.



  ㅅ


  바깥에서 보자면, 고졸입니다. 낱말책을 쓰는 길을 가기에 언제나 종이를 잔뜩 짊어집니다. 낱말을 모으는 꾸러미(수첩)를 챙기고, 말밑(어원)을 살피는 꾸러미를 챙기고, 우리말로 이야기를 엮어서 노래(시)를 쓰느라, ‘시 창작수첩’도 여럿 챙깁니다. 낱말책에 담는 낱말은 마음으로도 헤아려야 하기에, ‘마음으로 쓰는 하루글(일기)’을 적는 꾸러미도 챙깁니다.


  이 대목에서 갸웃할 분이 있을 텐데, 사전편찬자는 ‘글로 남은 밑동(기초자료)’만으로 낱말을 캐거나 찾거나 살피지 않습니다. 미나리는 왜 미나리일까요? 부추와 정구지와 솔이라는 이름으로 다르게 가리키는 나물은 왜 고장마다 다르게 가리킬까요? 구름은 왜 구름이고 비는 왜 비일까요? 바람이며 이슬은 무엇일까요?


  개구리와 사마귀와 여치는 어떤 숨빛을 품은 이웃일까요? 낱말책에 ‘아기’나 ‘기저귀’라는 낱말을 올림말로 삼아서 뜻을 붙일 적에 어떻게 해야 알맞을는지 생각해 보셔요.


  그리고 ‘생각·마음·넋·사랑’ 같은 낱말에 뜻풀이하고 보기글을 붙일 적에 어떻게 해야 어울릴는지 헤아려 보셔요. 무엇보다도 ‘헤아리다·살피다·가누다·여기다’ 같은 낱말이 어떻게 비슷하고 다른지 어떻게 갈라야 할까요? ‘닮다·비슷하다’라든지 ‘휘다·굽다’라든지 ‘곱다·아름답다’는 어떻게 다르게 쓰는지 어떻게 갈라서 풀이해야 걸맞을까요?



  ㅇ


  말더듬이 어린이는 열 살에 이를 때까지 날마다 놀림을 받고 얻어맞았습니다. 열 살 뒤에도 얻어맞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만, 말더듬이를 스스로 풀어내는 길을 하나씩 찾아내면서 천천히 삶을 가꾸어 왔습니다. 혀가 짧아도 둘레에서 제 말소리를 또박또박 알아듣도록 혀랑 이랑 입이랑 목이랑 턱이랑 뱃속이랑 허파를 어떻게 가누어야 하는지 하나하나 스스로 찾아내며 살았습니다.


  군대에 갈 수 없을 만큼 코머거리였던 터라, 코로 숨을 못 쉬는 나날을 서른아홉 살까지 보내야 했는데, 마흔 살을 앞두고서 숨쉬기를 드디어 깨달아서, 그 뒤로는 코로 즐겁게 숨을 쉽니다.


  저는 운전면허증조차 안 땁니다. 걸어다니거나 두바퀴(자전거)를 달립니다. 낱말책을 쓰는 사람이라서, 온누리 모든 말을 살피고 담아야 하니, 부릉부릉 몰 수 없어요. 되도록 걸으면서 그때그때 종이에 모든 말을 가다듬고 살펴서 적바림합니다. 그런데 두바퀴로 우리나라 골골샅샅을 다니면서 여태까지 적잖이 쇳덩이(자동차)한테 치였습니다. 신문배달을 하던 1998년에도 크게 뺑소니로 치여서 죽을고비를 넘겼고, 2006년까지 거의 해마다 쇳덩이가 뒤나 옆에서 갑자기 들이받아서 길바닥에 무릎과 손목과 어깨가 팔꿈치가 모질게 갈렸어요. 뼈가 보일 만큼 갈려서 한참 못 걷거나 손과 팔을 못 쓰기 일쑤였는데, 어찌저찌 이럭저럭 등짐도 잘 나르고 집안일도 제법 하면서 살아갑니다.


  저는 면허증도 안 따지만, 병원도 안 갑니다. 늘 집에서 조용히 드러누워서 몸앓이를 하면서 달랩니다.


  꽤 어리석은 삶을 보낸다고 여길 만합니다. 그런데 낱말책을 짓는 사람은 이 모든 삶을 두루 겪고 헤아리면서 ‘좋고 나쁨이 없는 삶’이라는 대목을 읽어야 하더군요. 뺑소니로 치여서 나쁘지 않습니다. 뺑소니로 치였을 뿐입니다. 팔다리가 갈려서 몇 달 동안 한 손과 한 다리를 못 썼지만, 이동안 왼손으로 빨래하고 밥을 짓고 배달자전거를 몰면서 일하는 길을 익혔습니다. 한 다리로만 살아야 하면서 외걸음이란 무엇인지 새록새록 배우기도 했습니다.



  ㅈ


  낱말책은, 낱말을 담은 꾸러미라고 했습니다. 낱말이란 ‘낱으로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전이란 ‘= 낱말책’이면서 ‘말책’입니다. 말을 담기에 말책인데요, 말이란 마음을 담은 소리예요. 마음을 소리로 그리니 ‘말’입니다. 우리가 읽는 ‘글’은 ‘말’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그린 무늬입니다.


  하나하나 짚으면, 글은 말이요, 말은 마음인데, 마음은 우리가 누리는 하루인 삶에서 비롯합니다. 삶이 있기에 마음이 있어요. 삶이 없으면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좋은 삶이나 나쁜 삶이 아닌, 그저 삶을 누려요.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마음을 새롭게 일구는 하루를 살아내면서, 이 마음을 말로 옮기고, 이 말을 글로 다시 담습니다.


  아무렇게나 말한다면, 우리 스스로 마음을 아무렇게나 팽개친다는 뜻입니다. 아무렇게나 글을 쓴다면, 우리 마음이 아무렇게나 마구잡이로 뒹굴라면서 내버린다는 뜻입니다.


  말 한 마디는 씨앗이기에, 어떤 말씨를 입에 담고 손에 얹느냐에 따라서, 우리 삶을 우리가 스스로 바꿉니다. 이 삶을 사랑으로 가꾸고 싶다면, 오직 사랑으로 빛나는 말을 혀에 얹고 글로 옮길 노릇입니다.


  깎음말이라 할 ‘욕’은 남을 못 깎아요. 욕은 늘 남이 아닌 나를 스스로 깎고 갉습니다. 욕을 자주 읊는 사람은 남을 못 괴롭혀요. 욕을 하는 스스로 괴롭힐 뿐입니다.


  겉으로 달콤하거나 좋아 보이거나 멋져 보이는 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겉치레나 허울에 가득한 삶으로 뒹구는 얼거리입니다.



  ㅊ


  말에 담는 마음을 읽는 길을 살피면서 스스로 사랑하는 넋으로 서려고 낱말책을 짓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은 낱말책을 이웃님이 장만해서 읽기를 바라지요.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마음과 마음을 잇는 길인 ‘이야기’로 바라보거나 받아들이기를 바라면서 낱말책을 펴냅니다.


  우리는 낱말을 더 많이 알아야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낱말책을 달달 외워야 글을 잘 쓰지 않습니다. 스스로 오늘 이 하루를 사랑할 줄 아는 마음으로 살아낼 적에 비로소 “내 살림은 내가 사랑이라는 숲빛으로 가꾸는구나” 하고 알아챌 만합니다.


  낱말 하나를 제대로 뜻풀이를 하고 말밑을 캐내기까지, 때로는 10분 만에 끝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열 해나 스무 해가 걸립니다. 그저 한 걸음씩 걸어갑니다. 낱말책을 제대로 쓰자면, 국립국어원이나 무슨무슨 대학교나 연구소 같은 데에 들어가면, 다달이 따박따박 나오는 일삯을 받으면서 걱정이 없을 만하다고 여길 수 있을 텐데, 막상 우리나라 국립국어원이나 무슨무슨 대학교나 연구소에서 여태껏 제대로 낱말책을 여민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길을 틔울 때라야 낱말을 제대로 바라보더군요. 일자리가 있어야만 낱말책을 알뜰살뜰 추스르지 않아요. 여러모로 외롭거나 고달픈 길일 수 있습니다만, 바깥에서 보는 눈으로 살아갈 마음은 없습니다. 남이 나를 추키거나 낮춘다고 해서 제가 높거나 낮지 않아요. 저는 제가 저를 사랑으로 바라볼 적에 스스로 사랑으로 밝은 넋일 뿐입니다.


  아무쪼록 말 한 마디에 온사랑을 담아서 봄바람과 가을꽃처럼 지피는 하루를 천천히 여미어 보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즐겁게 하루를 살면서 기쁘게 말 한 마디 풀어내 보시기를 바라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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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꽃삶 34 봄꽃과 보임꽃

― 오늘 쓸 말을 오늘 짓는



  우리나라에서 낱말책을 쓰고 엮는 일을 몇 사람쯤 할까요? 열 사람쯤 꼽을 수 있을까요? 낱말지기(사전편찬)를 오롯이 맡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우리는 늘 말을 할 뿐 아니라, 온갖 글을 읽거나 쓰는데, 막상 우리말과 우리글을 알맞게 다스리거나 다독이거나 달래는 일꾼은 너무 적어요.


  다 다른 사람은 다 다른 곳에서 다 다른 일을 맡습니다만, 어느 갈래 어느 일이건 말글을 안 쓸 수 없습니다. 모든 곳은 저마다 다르되 ‘우리말·우리글’을 써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 갈래 여러 말씨를 추스르는 일꾼을 나라(정부)에서도 고을(지자체)에서도 넉넉히 둘 뿐 아니라, 꾸준히 새롭게 배우는 기틀을 다질 노릇이지 싶습니다.


  저는 낱말지기라는 길을 꽤 오래 걸어갑니다. 앞으로도 이 길을 걸어갈 텐데, 이러다 보니 저한테 “이때에는 어떤 말을 지을 수 있어요?”라든지 “이런 영어나 일본 한자말은 어떻게 풀어야 어울릴까요?” 하고 묻는 이웃이 많습니다. 제가 어떤 영어나 일본 한자말을 굳이 안 고치거나 안 풀어내면서 그냥 쓰면 “어라? 낱말책을 엮는 분이 그러면 되나요? 다른 사람은 안 고치고 안 풀어도 낱말지기는 다 고치고 다 풀어야지요!” 하고 핀잔하거나 나무랍니다.


  여러모로 보면, 낱말지기는 늘 핀잔과 나무람과 꾸지람으로 자라는 일꾼입니다. 아직 이 말을 못 고쳤느냐는 핀잔을 듣습니다. 여태 새말을 못 지었느냐는 나무람을 듣습니다. 언제쯤 풀어내겠느냐고 꾸지람을 들어요. 이런 핀잔과 저런 나무람과 그런 꾸지람은 밑거름입니다. 고마이 북돋우는 말빛이요 말씨라고 느낍니다.


  낱말책을 엮고 쓰려면 새책과 헌책을 두루 읽고 헤아립니다. 오늘 널리 쓰는 말씨가 담긴 새책도 읽고, 예전에 널리 쓰던 말결을 담은 헌책도 읽습니다. 언제나 책집마실을 다니는데, 책집에서 책만 사기보다는 ‘책집이 살아가는 자취도 남기자’는 마음으로 찰칵찰칵 찍기도 하고, 이렇게 찍은 그림을 펼쳐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그냥그냥 ‘사진 전시회’를 연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마을책집 사진 전시회’를 연다고 밝히면 새삼스레 꾸지람말을 들어요. “아니, 여보셔요, 왜 ‘사진’과 ‘전시회’라는 한자말은 그냥 두나요? 그대는 새말을 지어서 쓰셔야지요?” 하고 콕 집어요.


 사진 전시회 → 사진잔치 / 사진마당


  한때는 ‘전시회’를 ‘잔치’나 ‘마당’으로 가다듬었습니다. ‘사진’이라는 한자말은 ‘빛그림’으로 풀어낸 예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빛그림잔치’나 ‘빛그림마당’쯤일 테지요. 이렇게도 쓸 만하지만, 어쩐지 아쉽고, 더 짚을 수 있으리라 여겨요.


 빛그림 곁에 빛꽃


  1980∼90년 즈음에 ‘빛그림’이라는 낱말을 지은 분이 있는데, 얼마 못 쓰고 잠들었어요. 이 낱말을 잘 여미었다고는 느끼지만, 석글씨라서 안 썼나 싶기도 하더군요. 그래서 곰곰이 돌아본 끝에 ‘빛꽃’처럼 두글씨로 줄일 만하다고 느꼈습니다.


  빛으로 담은 그림이기도 하겠으나, 빛으로 담은 꽃이라고 할 적에 한결 어울린다고 느낍니다. 여느때에는 수수하게 ‘찰칵’이라 하면 어울립니다. 그리고 ‘담다·찍다·옮기다·새기다·얹다·놓다·두다·그리다’로 나타낼 수 있어요.


 봄마당. 보임마당. 봄마루. 보임마루.


  펼쳐서 보이는 일이라면 ‘보임마당·보임마루’처럼 나타낼 만합니다. 이 말씨를 살짝 줄여서 ‘봄마당·봄마루’으로 나타낼 수 있고요. 겨울이 저물고서 찾아오는 봄이기에 봄마당이기도 하고, 봄이라는 철은 “새롭게 보는” 때이기도 한 터라, ‘전시회’라는 일본 한자말은 ‘봄마당’이며 ‘봄잔치’이며 ‘봄터’이며 ‘봄자리’로 살며시 담아도 어울릴 수 있어요.


 봄꽃


  그리고 더욱 확 줄여서 ‘봄꽃’이나 ‘보임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펼쳐서 보이기에 ‘보임꽃’입니다. 펼친 자리에서 너도 나도 함께 보니까 ‘봄꽃’입니다. 부드럽게 녹이면서 깨어나는 봄꽃처럼, 글도 그림도 빛꽃도 어느 자리에 펼칠 적에는 새롭게 찾아오는 철처럼 ‘봄꽃’으로 나타낼 만합니다.


  이리하여 요즈음은 “이제 새롭게 봄꽃을 폅니다. 나들이 오셔요.” 하고 여쭈어요. 서울 광진구 능동에 있는 보임터인 〈갤러리 사진적〉에서 2024년 7월 한 달 동안 ‘헌책집 봄꽃’을 펼칩니다. 7월은 한여름이지만, 이 여름에 새록새록 봄꽃을 누리는 나들이를 즐겨 보시기를 바라요.


― 숲노래 봄꽃

이름 : 책집에 갑니다

곳 : 서울 광진구 능동 〈갤러리 사진적〉 + 〈문화온도 씨도씨〉

때 : 2024.7.3.∼8.4.



펼친 사진이 마음에 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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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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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꽃 / 숲노래 말넋


말꽃삶 32 사이좋게 새기는 새벽

― 배달말을 갈무리한 낱말책



  국립국어원 낱말책은 얼마 앞서까지 “분류(分類) : 1. 종류에 따라서 가름. ‘나눔’으로 순화”처럼 풀이했으나, 2024년에는 “분류(分類) : 1. 종류에 따라서 가름.”에서 자릅니다. 뒷걸음을 치는 뜻풀이입니다. 예전에는 우리말로 쉽게 고쳐쓰는 길을 이따금 밝히기도 했으나, 슬그머니 이 대목을 덜어내더군요.


  어른 가운데 한자말 ‘분류’를 굳이 찾아볼 사람은 아마 없을 만합니다. 뒷걸음 뜻풀이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을 만합니다. 그런데 국립국어원 낱말책은 다음 뜻풀이로 엿볼 수 있듯, 매우 엉성하고 엉터리이기까지 합니다.


가르다 : 1. 쪼개거나 나누어 따로따로 되게 하다 3. 옳고 그름을 따져서 구분하다

나누다 : 1. 하나를 둘 이상으로 가르다 2. 여러 가지가 섞인 것을 구분하여 분류하다 4. 몫을 분배하다 5. 음식 따위를 함께 먹거나 갈라 먹다

구분(區分) : 일정한 기준에 따라 전체를 몇 개로 갈라 나눔


  우리말 ‘가르다’를 ‘나누다’로 풀이하는데, ‘나누다’는 ‘가르다’로 풀이합니다. 게다가 ‘가르다·나누다’ 뜻풀이에 한자말 ‘구분’에 ‘분배·분류’를 넣고, 한자말 ‘구분 = 갈라 나눔’으로 풀이합니다. 겹말풀이에 돌림풀이요, 틀리고 어긋난 풀이입니다.


  여러 이웃나라에서 우리나라로 찾아옵니다. 우리나라 이야기를 눈여겨볼 뿐 아니라, 우리말을 익히는 이웃도 늘어납니다. 그러나 막상 우리말을 우리말답게 살피거나 헤아리거나 누리는 길잡이로 삼을 낱말책은 얼마나 있을까요?


  낱말책은 낱말을 더 많이 실어야 하지 않습니다. 새로 펴내는 낱말책이라 하더라도, 새로 태어나는 낱말을 미처 못 담습니다. 낱말책은 “더 많이 담기”가 아닌 “제대로 담기”로 나아가야 알맞고 알차며 아름답습니다.


  낱말책을 들추는 어른은 드물지만, 낱말책을 들추는 어린이와 푸름이는 많습니다. 어린이와 푸름이는 늘 낱말책을 들출 수밖에 없습니다. 종이 낱말책을 들추든, 누리그물에서 찾아보든, 말뜻과 말결과 말씨를 가장 자주 찾아보는 사람은 어린이와 푸름이라고 여길 만합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 어느 낱말책이건, 언제나 어린이 눈높이를 헤아리면서 뜻풀이를 가다듬고 보기글을 붙이고 쓰임새를 밝히면서 알려야 알맞습니다. 열 살 어린이가 읽으면서 못 알아들을 만한 뜻풀이라면, 낱말책이 틀렸거나 엉성하거나 모자라다는 뜻입니다.


  또한, 낱말책은 새말을 너무 많이 실으려고 애써야 하지 않습니다. 말글지기가 엮거나 지은 새말이 아닌, 사람들이 흔하게 쓰는 새말이 아닌, 모든 사람이 저마다 제 삶터와 마을과 보금자리에서 문득 생각을 빛내고 밝혀서 스스로 새말을 짓는 징검다리 노릇을 할 낱말책입니다.


산복(山腹) : 산에 가파르게 기울어져 있는 곳 = 산비탈


  한자말 ‘산복’이 따로 있는 줄 뒤늦게 알았습니다. 부산에 ‘산복도로’가 있는 줄 익히 알되, 부산에만 있는 길로 여겼는데, 마산에도 ‘산복도로’가 있더군요. ‘산복도로’라는 말은 인천·경기나 강원에서는 그리 안 쓴다고 느낍니다. 부산·경남에서 흔히 쓰는 듯합니다. “비탈에 낸 길”이란 뜻이고, 일본 한자말입니다. 그냥 일본말이라 해도 됩니다.


  인천에서는 ‘고개·고갯길’이나 ‘언덕·언덕길’이라 합니다. 고장마다 비슷하면서 다를 텐데, ‘고개·언덕’을 흔히 쓰고 ‘재·잿길’이나 ‘비알·비탈’하고 ‘비알길·비탈길’을 함께 씁니다. ‘새재·질마재·싸리재’ 같은 ‘재’가 일본말 ‘산복도로’를 일컫는다고 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 낱말책은 마을길이나 고갯길을 어느 만큼 제대로 짚으면서 알뜰히 풀어낼는지 돌아볼 노릇입니다. 여러 고장에 제법 뿌리내렸다고 여기는 이름이나 말씨라 하더라도, 참하고 상냥하게 다독여서 풀어내는 길을 들려줄 수 있는 낱말책이 있는지 되새길 일입니다.


 마음소리인 말


  우리는 마음을 소리에 얹어서 말로 나타냅니다. ‘마음소리 =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말’은 말밑이 같습니다. ‘마’가 밑동입니다. 이 ‘마’는 ‘마녘’을 가리키기도 하고, ‘많다’를 이루는 밑동이기도 합니다. 또한 ‘마’는 ‘무’하고 잇닿으면서 ‘말·물’은 말밑이 얽힙니다.


  노래하듯 흐르는 가없는 물처럼, 노래하듯 나타내고 나누는 가없는 말입니다. 냇물도 바닷물도 샘물도 늘 싱그럽고 맑게 솟아나고 흐르고 일렁이고, 마음에 담는 말도 늘 새롭고 밝게 솟아나고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낱말책을 열 살 어린이가 쉽게 읽고 깨우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듯이, 물처럼 노래하는 말로 퍼지고 깃들려면, 어려운 말이 아닌 살림살이를 사랑으로 가꾸는 숨결이 흐르는 숲빛말일 노릇입니다. 책상맡에서 엮는 말로는 먹물에 그칩니다. 머리를 써서 여미는 말로는 어깨동무하기 어렵습니다. 어린이가 “어진 사람”인 ‘어른’ 곁에서 살림빛을 숲빛으로 물든 사랑으로 물려받을 적에 비로소 말답습니다. 아이가 “사랑으로 씨앗을 품은 사람”인 ‘어버이’ 품에서 보금자리를 돌보는 손길로 익힐 적에 비로소 말답습니다.


  모든 말은 살림을 사랑으로 짓는 마음을 품은 숲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난 말이 아닙니다. 풀꽃나무와 들숲바다가 어우러진 오늘 이곳에서 해바람비를 머금는 사람이 마음에 사랑이라는 씨앗을 심을 적에 비로소 말 한 마디가 태어났습니다. 딱딱하거나 어려운 말은 모두 “사랑도 살림도 없는 부스러기(지식·정보)”이기 일쑤라서, 그저 외우지 않고서는 모릅니다. 외워야 쓸 수 있는 부스러기로는 생각을 못 밝히고 못 빛냅니다. 사랑을 짓는 어른과 사랑을 심는 어버이가 함께 숲빛으로 다독이고 달래어 일군 말이기에, 오래오래 입에서 입으로 이어받고 몸에서 몸으로 물려받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퍼지는 말로 숨빛을 품었습니다.


 사이좋게 새기는 새벽


  사람은 하늘하고 땅 사이에서 삶을 누립니다. 사람 곁에는 새가 있어서 노래를 베풀고, 보금자리를 가꾸는 슬기를 배웁니다. 사람은 사랑을 스스로 심고 가꾸는 씨앗으로 생각을 짓는 마음을 펴기에 그야말로 사람답습니다. 긴긴 꿈을 누리는 고요한 밤을 거치는 고치에서 깨어나야 날개돋이를 하는 애벌레입니다. 애벌레는 날개돋이를 거쳐서 나비로 거듭납니다. 사람은 작은 씨알로 숨을 얻고서 긴긴 날을 꿈으로 그린 끝에 환하게 태어나서 아기라는 몸을 입습니다.


  밤이 걷히면서 새벽이 밝듯, 고요히 앞꿈을 그리는 마음을 담은 말로 생각을 엽니다. 사람으로서 새랑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마음을 말소리로 얹어서 낱말책을 여민다면, 어른은 어른스럽고 아이는 눈을 밝히면서 이 낱말꾸러미로 기쁘게 말빛을 살펴볼 만합니다.


  후다닥 읽고서 외우려 한다면, 외우지도 못 하지만, 마음에 남지도 않습니다. 느긋느긋 읽으면서 나긋나긋 새길 적에, 비로소 온마음으로 스며들면서, 생각이 깨어나는 빛을 느낄 만합니다.


  차근차근 곱씹고 되새기면서, 즐겁게 손보고 더하고 다듬고 고치고 살피는 매무새로, 우리말을 이제 처음으로 익힌다고 여기면서 눈뜰 수 있기를 바랍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을 알찬 낱말책을 곁에 놓는다면, 하루하루 자라나고 말결을 느끼면서, 차곡차곡 북돋우는 말살림을 누릴 만하리라 봅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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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꽃/숲노래 우리말 2024.4.24.


말꽃삶 33 읽고 말하는 아이어른

― ‘식물도감 읽기’와 ‘풀꽃 읽기’



  날씨를 읽는 길은 여러 가지입니다. 오늘날로 본다면, ‘날씨알림’을 손전화를 켜서 살필 수 있고, 보임틀(텔레비전)에서 흐르거나 새뜸(신문)에 적힌 ‘날씨알림’을 듣거나 읽을 수 있습니다. 또는 옆사람이나 이웃사람한테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먼먼 옛날부터 누구나 어디서나 한 일이 있는데, 스스로 하늘과 땅과 바람과 해와 별을 살피고 느껴서 헤아리는 ‘날씨읽기’가 있습니다.


  아이를 낳아서 어질게 돌보는 길은 여럿입니다. 오늘날로 본다면, 아이 나이에 따라서 배움터를 보내는 길이 있습니다. ‘아이돌봄’을 다룬 책을 찾아서 읽거나, 다른 보임틀(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는 옆사람이나 이웃사람한테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먼먼 옛날부터 누구나 어디서나 한 일이 있으니, 스스로 아이랑 눈을 마주보면서 온하루를 함께 살아내고 같이 살림하면서 배우는 길이 있습니다.


 ㄱ 식물도감 읽기

 ㄴ 풀꽃 읽기


  풀과 꽃과 나무를 아는 길도 여럿으로 꼽을 만합니다. 먼저 “식물학자가 엮은 식물도감”을 읽을 수 있습니다. “식물학자가 가르치는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먼먼 옛날부터 누구나 어디서나 한 일이 있어요. 스스로 풀과 꽃과 나무를 눈여겨보고 들여다보고 살펴보고 지켜보고 바라보고 찾아보는 길입니다.


  모든 식물도감에는 ‘사투리’를 담습니다. 푸른별을 아우르는 ‘큰이름’이 라틴말로도 있을 테지만, 모든 나라마다 다 다른 말씨로 풀이름에 꽃이름에 나무이름을 스스로 지어서 가리킵니다.


  이제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다 다른 나라마다 풀이름을 누가 붙였을까요? 꽃이름과 나무이름을 누가 붙였을까요? 어느 나라 어느 겨레도, 풀꽃나무 이름은 ‘식물학자’ 아닌 ‘수수한 사람’이 스스로 붙였습니다.


  들살림을 하는 사람이 붙인 풀이름입니다. 숲사람을 하는 사람이 지은 나무이름입니다. 들숲살림을 하는 사람이 생각한 꽃이름입니다.


 ㄱ 작명소 아이이름

 ㄴ 어버이 아이이름


  아이이름을 짓는 길은 여럿입니다. 이른바 ‘작명소’에 맡길 수 있습니다. 빼어나거나 이름나거나 훌륭한 글어른을 찾아뵙고서 이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서 지을 만합니다. 우리 스스로 “아이하고 앞으로 사랑으로 지을 살림살이와 보금자리를 꿈으로 그리는 마음”으로 지을 만합니다.


  식물도감을 엮은 식물학자는 다른 식물도감을 읽고서 새롭게 식물도감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곁에 둘 만한 식물도감이라면, “식물학자 스스로 풀꽃나무를 바라보고 살펴서 깨달은 이야기”를 담게 마련입니다.


  더 생각해 봐요. 우리는 누구나 “식물학자가 바라본 풀꽃나무 이야기”를 굳이 읽어야 할 까닭이 없이, “우리 눈으로 풀꽃나무를 바라보고 나서, 우리 마음으로 풀꽃나무 한살림을 알아본 이야기”를 품을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 상담”을 받아야 “우리 아이 마음”을 제대로 알까요? 우리 스스로 우리 아이하고 이야기를 하고 함께 살아가는 보금자리에서 지켜보고 바라보고 살펴보는 동안, 스스럼없이 “우리 아이 마음”을 느끼고 읽을 수 있지 않나요?


 ㄱ 사전 뜻풀이 읽기

 ㄴ 내가 뜻풀이 붙이기


  낱말뜻을 헤아리는 길도 매한가지입니다. 다른 언어학자나 국어학자가 낱말 하나를 오래오래 들여다보고서 요모조모 살핀 끝에 붙인 뜻풀이를 낱말챡을 펴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어느 낱말 하나를 오래오래 헤아리고 두고두고 생각한 끝에 스스로 뜻풀이를 붙일 수 있습니다.


  풀과 꽃과 나무를 알고 싶다면, 식물도감을 펼 수도 있되, 이에 앞서 우리 스스로 풀과 꽃과 나무 곁에 서서 풀과 꽃과 나무를 들여다볼 노릇입니다.


  새를 알고 싶다면, 조류학자가 갈무리한 조류도감을 펴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새를 가만히 지켜보고 오래도록 살펴보면서 이웃으로 삼을 노릇입니다.


  텃밭을 짓고 싶으면, 땅을 마련해서 손수 호미질에 낫질에 가래질로 돌볼 노릇입니다. ‘텃밭도감’을 읽거나 ‘귀농학교’를 다녀야 텃밭을 지을 수 있지 않습니다.


  다만, 모든 배움길은 ‘고비’하고 ‘고개’를 넘으며 천천히 돌아갑니다. 품을 들이고 짬을 들이는 배움길입니다. 텃밭을 스스로 짓다가 엉뚱하거나 뜬금없는 짓을 벌이고 말아서, 그만 몽땅 죽이거나 빈손이 될 수 있습니다. 남한테 안 기대고서 혼자 나아가다가 막다른 길에서 넘어질 수 있습니다. 스스로 해보다가 으레 담벼락에 막혀서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식물학자도 국어학자도 조류학자도 모두 이런 빈손질과 눈물질을 거칩니다. 빈손질과 눈물질을 안 거치는 전문가란 아무도 없습니다. 수학자와 과학자도 끝없이 헛발질을 합니다. 틀린 길(공식·방정식)을 그야말로 오래도록 붙잡고서 씨름한 끝에 “아하! 내가 이렇게 틀렸구나!” 하고 깨닫는 전문가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내가 이렇게 틀린 줄 깨달을 때”에 “이제부터 슬기롭고 어질게 길을 밝히는 살림”에 눈을 뜹니다.


 ㄱ 아이 : 눈을 뜨려는 길

 ㄴ 어른 : 눈을 틔우려는 길


  아이는 어른 곁에서 눈을 뜨려는 사람입니다. 어른은 아이 곁에서 눈을 틔우는 사람입니다. 낳은 아이뿐 아니라, 온누리 모든 아이는 “우리 아이”입니다. 아이들도 어른을 이처럼 바라봅니다. 아이로서는 온누리 모든 어른이 “우리 어른”입니다.


  눈을 뜨려고 태어나서 하나씩 손수 해보고 맛보고 겪으면서 배우는 길인 아이입니다. 아이는 손수 해보는 동안 차츰 철이 듭니다. 어느 해에 이르러 무르익는 마음이 확 움트고 싹틀 적에 꽃봉오리가 터지지요. 꽃빛으로 환하게 눈뜬 아이는 어른이라는 ‘철빛’을 품고서 일어섭니다.


  어른도 손수 해보는 동안 천천히 철을 가다듬습니다.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쓰러지고 자빠지는 동안에 빙그레 웃으면서 다시 하고 또 하고 거듭 합니다. 먼저 이 길을 걸어 보면서 쓴맛과 단맛을 누리는 길잡이가 어른입니다. 이리하여 어른다운 어른이란, “손을 잡아끄는 사람”이 아니라, “여태 걸어온 길을 즐겁고 상냥하게 이야기로 들려주어서, 모든 아이가 저마다 즐겁게 스스로 새길을 나아가도록 북돋우면서 노래하는 사람”이라고 할 만합니다.


 읽기에 잇고 익혀서 이곳에 있다


  읽는다고 해서 다 알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읽습니다. 읽으며 느끼고 받아들입니다. 읽은 여러 살림을 헤아리고 생각하면서 하루를 잇노라면, 어느새 손에 익고 눈에 익으며 마음에 익어요. 바야흐로 무르익어 열매를 이루고 씨앗을 맺을 즈음에는 이곳에서 새롭게 서는 길을 알아차리지요. 드디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날씨알림을 손전화로 챙기는 길이 나쁘지는 않되, 스스로 하늘읽기하고 등지게 마련입니다. 식물도감에 기대기에 나쁘지는 않되, 스스로 풀빛과 꽃빛과 나무빛을 놓치거나 잊게 마련입니다. 아이를 배움터(학교)에 보내는 길은 안 나쁘되, 아이하고 함께 보금자리를 사랑으로 짓는 살림을 그만 놓치거나 잊기 일쑤입니다.


  스스로 다 하자면 오래 걸리거나 버거울 수 있겠지요. 이때에는 어른답게 아이한테 일손을 넘기면 느긋해요. 혼자 붙잡는 사람은 어른이 아닌 꼰대입니다. 기꺼이 나누면서 스스럼없이 노래하는 사람이기에 어른입니다. 기쁘게 받아들여서 함께 펴고 짓는 살림길을 익히는 사람이기에 아이예요.


  우리 보금자리에 우리 품을 들이고 우리 짬을 내기를 바랍니다. 서로 아이어른으로 마주하는 하루를 차근차근 지어 봐요. 품을 들이기에 풀어내어 알아봅니다. 짬을 내기에 작은 곳부터 씨앗이 움트면서 눈을 뜹니다. 아이는 어른을 눈여겨보며 자라려는 숨결인 사람입니다. 어른은 아이를 들여다보며 크려는 숨빛인 사람입니다. 아이는 어른을 귀담아들으며 일어서려는 숨소리인 사람입니다. 어른은 아이를 귀여겨들으며 일을 하려는 숨길인 사람입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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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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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꽃 / 숲노래 말넋

말꽃삶 18 나의 내 내자



  우리말은 ‘나·너’입니다. ‘나·너’는 저마다 ‘ㅣ’가 붙어서 ‘내·너’로 씁니다. “나는 너를 봐”나 “내가 너를 봐”처럼 쓰고, “네 마음은 오늘 하늘빛이야”처럼 쓰지요. 그리고 ‘저·제’를 씁니다. “저로서는 어렵습니다”나 “제가 맡을게요”처럼 쓰지요.


 my 私の 나의


  어느새 참으로 많은 분들이 ‘나의(나 + 의)’ 같은 말씨를 뜬금없이 씁니다. 이 말씨는 오롯이 ‘私の’라는 일본말을 옮겼다고 할 만합니다. 일본사람은 영어 ‘my’를 ‘私の’로 옮기더군요.


  우리나라는 스스로 영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첫째로는 우리나라로 들어온 선교사가 영어를 알리고 가르쳤습니다. 이들 선교사는 ‘한영사전’까지 엮었지요. 이다음으로는 일본이 총칼로 쳐들어와서 억누르던 무렵 확 들어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우리 손으로 엮은 책으로 영어를 가르치지 않았어요. 선교사가 가져온 책으로 배웠거나, ‘일본사람이 영어를 배우려고 일본사람 스스로 엮은 책’을 받아들여서 배웠습니다.


  일본사람은 웬만한 데마다 ‘の’를 붙여서 풀이했고, 일본책으로 영어를 배운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말씨 ‘の’를 ‘-의’로 적었어요. 일제강점기에 ‘-의’ 말씨가 부쩍 퍼졌습니다. 일본이 물러난 뒤에 비로소 우리 손으로 영어 배움책(교재)하고 낱말책(사전)을 엮는데, 웬만한 책은 일본 배움책하고 낱말책을 고스란히 옮겼어요. 겉으로는 한글이되 속으로는 일본말씨가 ‘영어를 배우는 길’에 밀물처럼 쏟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 내는 영어 낱말책조차 아직 ‘my = 나의’로 풀이합니다. 우리말 ‘내’나 ‘제’로 못 적습니다.


  우리말로 ‘내·제’나 ‘우리’를 써야 할 곳에 ‘나의’를 적는 말씨가 몹시 번졌어요. “나의 가족”이나 “나의 마을”이나 “나의 바람”이나 “나의 살던 고향”이나 “나의 손”이나 “나의 엄마”나 “나의 여름”이나 “나의 작은 집”이나 “나의 투쟁”처럼 끝없이 퍼집니다.


  우리는 우리 말씨를 차근차근 되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 집”이나 “우리 마을”이나 “내 바람”이나 “내가 살던 마을” 같은 수수한 우리 말씨를 찾아낼 수 있을는지요. “내 손·우리 손”이나 “우리 엄마”나 “여름·올여름·내가 보낸 여름”이나 “이 작은 집·작은 집·우리 작은 집”이나 “나는 싸운다·싸우다·우리는 싸운다”처럼 우리답거나 나다운 말씨를 차근차근 돌아볼 수 있을는지요.


 내 나라 내 집 


  ‘나의’가 아닌 ‘내’로 적어야 알맞은데, ‘내’를 쓸 적에 외려 안 어울리는 곳이 있습니다. “내 나라 내 겨레” 같은 자리입니다. “내 집”이라 할 적에는 제대로 갈라야 하지요.


다시 만난 내 나라 문화와 내 부모의 언어는 그 존재만으로도 큰 위로이자

→ 다시 만난 우리나라 삶과 우리 어버이 말은 그대로 반갑고

→ 다시 만난 이 나라 살림과 우리 어버이 말은 그저 다독여 주고


  나라나 겨레나 어버이를 가리킬 적에는 ‘내’가 아닌 ‘우리’를 씁니다. “내 아버지”가 아닌 “우리 아버지·울 아버지”입니다. 또는 ‘우리’를 안 붙이고서 “아버지”라고만 단출히 씁니다. “우리나라”나 “우리 옛살림”이나 “우리 노래”로 써야 알맞을 텐데, “이 나라”처럼 ‘이’를 써도 어울립니다. 곧 “이 나라 이 겨레”라 할 수 있습니다. 집도 “이 집”이라 할 수 있고요.


  스스로 장만해서 살아가는 집이라는 뜻으로 “내 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이 집에 나 혼자 안 산다면 “우리 집”이라 해야 어울려요. 곁님하고 아이들하고 어버이가 함께 있으면 “내 집”이 아닌 “우리 집”입니다.


 내자 안해 아내


  국립국어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은 다음처럼 풀이합니다.


내자(內子) : 1. 남 앞에서 자기의 아내를 이르는 말 2. 옛날 중국에서, 경대부의 정실(正室)을 이르던 말

아내 : 혼인하여 남자의 짝이 된 여자 ≒ 규실·내권·처·처실

처(妻) : 혼인하여 남자의 짝이 된 여자 = 아내


  1920년에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朝鮮語辭典》은 다음처럼 풀이하지요.


內子 : 自己の妻の稱.

안해 : 妻

妻 : つま


  1940년에 문세영 님이 펴낸 《조선어사전》은 다음처럼 풀이하더군요.


내자(內子) : 자기의 안해

안해 : 1. 남편이 있는 여자. 아낙. 妻 2. 남편이 자기의 처를 일컫는 말.

처(妻) : 안해


  우리는 언제부터 ‘안해’라는 이름을 썼을까요? 일본은 일찌감치 ‘內子’라는 한자말을 썼습니다. ‘처(妻)’는 그저 한자말입니다. ‘아내·안해’는 “= 안사람”입니다. “안에 있는 사람”이요, “집에 머물며 집일을 하는 사람”이란 뜻을 담는 얼개입니다.


  우리 발자취를 보면, 임금이나 벼슬아치가 아닌, 흙을 가꾸어 살림을 하면서 아이를 사랑으로 낳은 여느 사람들은 집일을 가시버시가 함께 맡았습니다. 가시(여성)만 집일을 하지 않아요. 버시(남성)도 집일을 함께하지요.


  아기가 태어나면 세이레 동안 어머니가 어두운 바깥채에 가만히 누워서 몸을 추스르면서 아기를 돌보는데, 아기를 낳는 어머니는 집일을 마땅히 못 해요. 그러면 누가 아기 어머니를 먹이고 입힐까요? 바로 지아비이지요. 세이레 동안 누가 집일을 할까요? 바로 사내인 아버지입니다.


  모든 살림집에 할머니가 함께 살았다고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단출히 살아가는 조그마한 집을 헤아리면 쉽게 실마리를 얻을 만해요. 지난날 흙사람(농민)은 손수 밥옷집을 건사했습니다. 순이(여성)하고 돌이(남성)는 나란히 밥옷집 살림을 할 줄 알아야 했습니다. 한쪽은 바깥일을 하고 한쪽은 집일을 하는 얼개가 아닌, 함께 바깥일이며 집일을 하던 살림이었어요.


  일본말 ‘내자’를 아직까지도 쓰는 낡은 분이 이따금 있어요. 1992년에 나온 《全斗煥 육성증언》(조선일보사)을 보면 “그래서 공식 행사에서 내자가 잘 따라나서지 않으려고 해요(174쪽)” 같은 대목이 있더군요. 예전에 나라지기(대통령)를 맡은 적 있는 전두환 씨는 ‘내자’라 하더군요. 아마 이이뿐 아니라 나이든 적잖은 사내는 일본말 ‘내자’를 오래도록 그냥 썼으리라 봅니다.


 여보 짝 곁님


  조선 무렵에도 ‘안해’란 말을 썼다 하지만, 이 말을 오늘날 그대로 쓰기에는 걸맞지 않다고 느낍니다. ‘순이 = 안사람’이라는 틀이나 굴레는 옳지 않거든요. 가시버시를 이루는 짝을 가리키는 이름을 새롭게 헤아릴 노릇입니다.


  먼저 오래도록 쓴 ‘여보’가 있습니다. ‘이녁’도 있어요. 가볍게 부르는 이름인데, 수수하게 ‘짝·짝꿍’이 있으며, ‘사랑’으로 가리킬 만합니다. 또는 ‘사랑꽃’으로 가리킬 수 있는데, ‘짝·짝꿍’이나 ‘사랑·사랑꽃’은 순이만 가리키지 않습니다. 돌이도 이 이름으로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여기에 ‘곁님·곁씨’ 같은 이름을 새로 지어서 쓸 만해요. 곁에 있으면서 함께 집안을 돌보고 살림을 일구는 사이라는 뜻을 ‘곁님·곁씨’에 담는 얼개입니다.


  우리말은 순이돌이를 억지로 안 가릅니다. 우리말은 순이돌이를 아우릅니다. ‘나·너’도 ‘우리’도 순이돌이를 가르지 않아요. 일본말 ‘내자’뿐 아니라 ‘안사람·아내·안해’ 같은 슬픈 말도 고요히 내려놓고서 새길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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