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잔소리 바보

불빛



  낮(14:40)에 서울을 떠나는 시외버스는 찬바람을 틀더니, 해넘은 저녁(18:50)에 이르자 바닥불을 넣는다. 길손은 거의 모두 할매할배이다. 이분들은 서울에 있는 딸아들이 서울에 있는 병원을 잡아주어서 다녀가는 길이다.


  요사이는 시외버스에서 불빛을 아예 안 켜준다. 한동안 버스일꾼한테 얘기했으나, 갈수록 말하기도 번거롭다. 이제는 스스로 큰불과 작은불을 챙긴다. 그런데 불빛도 불빛이되, 이보다는 미닫이를 못 여는 시외버스라는 대목이 아찔하다. 한나절 남짓 달리는 곳에서 바깥바람을 쐴 수 없는 얼거리이니까. 서울은 워낙 모든 곳이 붐비는 터라 해바람을 마주할 수 있는 시내버스보다는 땅밑을 내달리는 쇳덩이가 나을 만하지만, 하루가 어떻게 흐르는지 종잡을 수 없는 땅밑길을 날마다 한참 다니는 서울사람은 그만 철을 잊다가 잃기 쉽다.


  시외버스에서 책을 쥐는 이웃을 아주 드물게 본다. 올해(2026)에는 한가을 끝자락까지 꼭 한 사람 스쳤다. 서울버스·전철과 부산버스·전철에서 스친 ‘이웃책보’는 올해에 꼭 열 사람쯤 스쳤다. 볼거리에 구경거리에 놀거리가 넘쳐난다고 여기니, 굳이 종이책을 쥘 일이 없을 만하다. 구태여 무겁게 종이책을 들고 다닐 까닭이 없다고 여길 수 있다.


  종이책을 챙기지 않는 어버이 곁에서 자라는 어린이는 종이책뿐 아니라 종이랑 붓(연필)조차 안 챙긴다. 요즈음 어린배움터 어린이를 보면, 붓종이(필기구) 없이 맨몸으로 다니기 일쑤이다. 푸른배움터 푸름이도 꽤나 붓종이 없이 다닌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어김없이 손전화는 꽉 쥔다.


  손전화를 들여다보기에 잘못이 아니요, 나쁘지 않다. 어린이와 푸름이가 붓종이를 안 챙기고 종이책을 펼 줄 모르는 채 나이만 먹고서 스물이나 서른이나 마흔이라는 나이에 닿는다면, 이 아이들은 ‘배울 줄 모르는 몸’으로 굳는다. 배울 줄 모르는 몸으로 굳으면 ‘사람과 이웃하는 길’에다가 ‘풀꽃나무·들숲바다·해바람비와 이웃하는 삶’도 잊다가 잃는다. 얼핏 보면, 종이책과 붓종이만 안 쥐는 채 손전화만 붙잡는 모습이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서 앞날을 내다볼 적에는, 이 아이들이 앞으로 ‘안 배우는 요즘 꼰대’를 이어서 ‘안 배우는 새로운 꼰대’로 뿌리내릴 만하다.


  전남 고흥 같은 작은시골뿐 아니라, 서울·부산처럼 커다란 고장에서도 ‘금연’이라는 글씨가 붉게 크게 곳곳에 붙은 곳에서 담배를 꼬나무는 꼰대가 수두룩하다. 큰돌봄터(대형병원) 둘레에도 ‘금연’ 글씨가 열 남짓 붙는데, 이런 곳에서 ‘병원 환자’하고 그냥그냥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여서 너구리굴을 이룬다. 어린이쉼터와 마을쉼터에서 버젓이 담배를 태우는 늙은이와 젊은이가 넘친다. 담배를 태우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라, 어린이가 흔히 지나다니며 쉬는 곳에서는 담배를 삼갈 줄 알아야 하고, 버스나루나 거님길에서도 담배를 안 필 줄 알아야 ‘어른’ 아닌가? 아니, 어린이를 돌보고 헤아리는 마음을 기울여야 ‘사람’이지 않은가?


  여러모로 보면 어린이를 미워하거나 싫어하느라 아무 곳에서나 술담배를 일삼고, 아무렇게나 거친말·막말·밉말을 쏟아붓는구나 싶다. 어린이를 헤아리거나 사랑하는 마음과 몸짓이라면, 담배 한 개비뿐 아니라 말 한 마디와 삶 한 자락을 모두 푸르게 가꾸는 하루를 살아내게 마련이다. 어린이를 살피거나 품는 어진 마음인 어른이라면, 풀꽃나무를 함부로 죽이거나 들숲바다를 마구 망가뜨리는 멍청한 삽질을 안 한다.


  낮이고 밤이며 읽고 쓰고 생각하고 돌아보며 곱씹는다. 서울부터 고흥까지 한나절 넘게 달린 시외버스를 내리면서 되새긴다. 미처 다 읽지 못한 책이라면 이튿날 읽으면 된다. 집에 닿아 등허리를 펴며 하루글을 쓰면 된다. 언제나 나부터 어질게 이 마음을 다스리자고 여긴다. 둘레에서 숱한 사람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되, 늘 나부터 참하며 착하게 읽고 쓰고 가꾸는 오늘을 살아가고 살림하고 사랑하자고 거듭 되뇐다. 2026.10.28.물.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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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읽는 나 + 읽는 바보

읽는 큐레이션 (좋은책이라는 독약)



  어제 인천 배다리책거리에서 조촐히 수다꽃 자리를 꾸렸다. 헌책집 할머니하고 헌책집 할아버지 두 분이 나란히 앉고, 나는 사이에서 추임새와 곁말을 넣었다. 세 사람은 ‘책집이 책집으로 빛나는 길’이란 무엇일까 하고 되새기며 이야기했다. 책집살림으로 쉰 해에 마흔 해를 살아낸 두 분은, 책집을 차리고 돌보고 지키면서 이어온 손길을 들려준다. 책벌레로 마흔 해 남짓 살아가는 나는, 책집을 찾고 살피고 이야기하면서 사랑하는 눈길을 보탠다.


  셋이서 함께한 ‘책집 생각’ 하나를 옮게 본다면, “좋은책을 가려보려는 뜻을 세우면, 으레 마음부터 좁힌다”고 말할 만하다. 백만이나 천만 사람한테 똑같은 책이나 영화를 건네지 않을 줄 알아야 한다. 백 사람이 만 가지 책을 만나고, 천 사람이 만 가지 책을 만나야 온누리가 아름답다. 좋은책이라서 읽히거나 나쁜책이라서 내치지 않을 줄 알 때에 온나라가 사랑스럽다. 어느 책을 마주하든 스스로 풀어내고 품어서 빛손길로 녹일 줄 알아야 온사람이 눈뜬다.


  그저 ‘온책(모든 책)’을 살펴서 고르게 나란히 둘 수 있어아지 싶다. 왼책도 오른책도 아닌 온책일 노릇이다. 왼책과 오른책도 읽되, 온책을 기쁘게 품으면 된다. 온책부터 읽고 나눌 적에 사람으로 선다. 모든 다 다른 나무가 어울려서 숲이고, 모든 다 다른 사람을 아우르며 마을이다. ‘통읽기(통독·완독)’이라는 그물이 아닌 ‘마음읽기(행간)’라는 숨결을 펼 노릇이다.


  요즈음 많이 생긴 ‘동네책방(독립서점)’은 “좋은책 추천 큐레이션”에 지나치게 얽매이기 일쑤이다. 책꽂이와 책살림이 늘지 않는다면 ‘마을책집’이 아닌 ‘책집시늉’이다. 한두 가지 책에만 사로잡힌 나머지 온사람(모든 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품고 손잡는 길을 등지면서 잃고야 만다. 우리는 좋은길을 밀거나 믿지 않아야 한다. 함께 걸어가며 살림할 하루를 바라볼 노릇이다. 그러니까 “좋은책 추천하기”가 아닌, “읽은책 얘기하기”로 나아갈 노릇이다. “나는 이 책을 이렇게 읽었어. 너는 그 책을 어떻게 읽었니?” 하고 묻고 들려주고 들으면서 마음이 오갈 적에 비로소 마을책집(작은책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오래붓(원로작가)도 새붓(신인작가)도 집안일을 안 하고 싫어하고 기계와 ai와 학교와 학원에 떠맡기는구나 싶다. 글꾼이 아니어도 집안일과 아이돌봄을 안 좋아하느라 지겨워하고 꺼리더라. 정작 손수 해보거나 몸소 짓는 살림이 없는 채 글멋만 부리는 굴레를 ‘순문학 + 문학적 표현’이라 우러르는 셈이다. ‘글쓰기(창작)’가 아닌 ‘글시늉(치장·디자인)’이라고도 하겠지. 글쓰기란 늘 삶쓰기에 살림쓰기에 사람쓰기에 사랑쓰기이다. 책읽기는 늘 삶읽기에 살림읽기에 사람읽기에 사랑읽기이다.


  거꾸로 책빛을 흐트리고 팽개친다고까지 느낄 요즈음 동네책방(독립서점)이다. 그냥 모든 책을 읽고 쓰고 나누고 팔고 사면 된다. 글쓴이 이름이나 펴냄터 이름이 아닌 속살을 읽고 이어서 이야기를 하면 된다. “내가 읽고서 좋았”더라도 좋은책이지 않다. 그저 그때에 문득 느낀 책 하나일 뿐이다. 이미 읽은 책은 오른쪽에 놓고서, 앞으로 읽을 책은 왼쪽에 놓을 때라야 마을책집(작은책집)이다. 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온책을 헤아리면서 나누는 곳이어야 마을책집(작은책집)이다.


  아주 작아 보이는 집안일과 아이돌봄부터 기쁘게 웃고 춤추고 노래하는 하루를 살리다가, 해바람비와 풀꽃나무를 들여다보고 동무한 뒤에, 새벽에 새벽별을 바라보는 고요한 때에 작은집(보금자리)에서 작은붓을 쥔다면 비로소 글 한 자락이 깨어난다. 글은 별빛으로 쓴다. 글을 햇빛으로 읽는다. 글은 일하는 손으로 쓴다. 글은 살림하는 손으로 읽는다. 글은 사랑으로 쓰고 읽는다. 책은 사랑으로 짓고 펴고 나눈다. 별빛이 아닌 별빛흉내를 낸 글을 알아챌 수 있는가? 햇빛이 아닌 불빛(전깃불)을 켜서 흉내내는 글을 솎아낼 수 있는가? 살림을 안 하느라 죽음늪으로 사로잡히는 책에 안 속을 수 있는가?


  ‘큐레이션’이라는 죽음물(독약·농약)을 뿌리면 뿌릴수록 들숲메바다는 괴로워하다가 시들시들 죽어간다. 오롯이 사랑으로 읽고 잇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샘물 한 줄기가 솟아서 흐를 물꼬를 그린다. 2026.10.25.해.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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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읽는 나 + 읽는 바보

읽는 쥐



  쥐 한 마리가 집에 들어왔을까. 들어와서 요리조리 숨으며 헤맬까. 이제 구멍을 새로 찾아서 나갈까. 살아오며 숱한 쥐를 보았고 잡았고 내보냈고 쥐었고 살폈다. 앞으로도 쥐는 또 보고 다시 보고 새로 볼 테지. 우리집은 시골이니까.


  갈수록 쥐를 볼 일이 없는 우리나라 어린이와 어른이다. 가지치기에 안 시달린 멀쩡한 나무 한 그루를 볼 길이 꽉 막히는 판이기도 하다. 돌담을 높이 쌓고서 싸우자는 불길이 더 크게 휘덮는 판이다. 제비와 박새는커녕 참새를 볼 틈이 없는 듯하다. 비둘기를 사랑하는 마음을 입밖으로 말하기 어려운 흐름이다.


  죽음물(농약)과 죽음거름(비료)은 흙을 죽이면서 돈만 더 농협에 바치는 굴레인데, 이 쇠사슬을 짚는 붓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쪽이건 저쪽이건 서로 삿대질을 하는 붓은 놀리더라. 막상 어깨동무하면서 함께사는 이 별에서 어떻게 살림을 지으면서 푸르게 어울릴 적에 나란히 아름다울는지 밝히는 붓은 자취를 감춘다. “밉말을 삼가자!(혐오표현 금지!)” 하고 외친들 밉말이 사라지지 않는다. 거꾸로 밉말이 더 불거진다. 왜 그러겠는가? “밉말을 삼가자!”는 목소리는 저쪽에만 대고서 하기 때문이다. 저쪽에서 밉말을 안 쓰기를 바라면 이쪽에서 먼저 밉말을 안 써야 맞다. 저쪽이 밉말을 한다고 여기면, 저쪽한테 떡 한 조각을 더 주면서 “더 말을 붙이고 더 얘기를 하고 더 만나”야 맞다.


  “밉말을 삼가자!” 같은 말은 늘 밉말씨앗을 심는다. 이와 달리 “살림말을 쓰자.” 하고 다소곳이 속삭일 적에는 늘 살림말씨를 심는다. 아주 마땅하고 쉽고 수수하다. 살림말이 무엇인지 들려주고 속삭이고 나눌 적에는, 어린이부터 이 살림말을 귀여겨듣고 눈여겨보면서 배운다. 살림말은 안 쓰면서 “이런 말은 밉말이야!” 하고 금을 그을 적에는 되레 밉말에 눈이 가고 귀가 쫑긋하고야 만다.


  배움책(교과서)을 제대로 엮는 일꾼이라면, 배움책에는 살림말씨를 담는다. 스스로 짓는 살림말씨를 듣고 말하고 배우고 익히노라면, 둘레에서 어떤 밉말이 갑자기 터지거나 쏟아져도 안 흔들린다. 차근차근 살림말씨로 스스로 가꾼 어린이는 어떤 어른이 막말이나 밉말이나 거친말을 함부로 쓰더라도 안 휩쓸린다. 이와 달리 “밉말을 삼가자!”는 말만 들어온 어린이는 으레 밉말이라는 물결에 쓸려간다.


  마을할배 한 분이 논밭일을 다 내려놓고서 ‘논’ 지 몇 달 만에 까무룩(치매)이 되고 말았다. 흙 묻은 손발과 몸일 적에는 거뜬하던 어른이 하루아침에 훅 간 셈이다. 흙을 놓으면서 넋을 놓은 셈이다. 다른 할매할배도 비슷하다. 아무리 등이 굽어도 천천히 밭뙈기에서 호미를 쥐고서 흙을 만지는 분은 천천히 일하고 천천히 쉬면서 천천히 하루를 가꾸고 돌본다. 그냥 ‘놓’고서 ‘놀’다 보면 그대로 빛마저 놓는 굴레이다.


  깊은 시골마을까지 “기호 몇 아무개”란 소리를 뽕짝에 실으며 퍼뜨리는 작은짐수레가 한참 맴돈다. 시끌수레가 떠난 자리에서 멧딸기를 훑는데 밀잠자리 한 마리가 발등에 앉는다. “넌 뭘 보고 뭘 듣니?”


  밀잠자리는 한 마디를 들려주고서 슥 담을 넘어 멀리 날아간다. 뭇새가 노래하고 제비가 난다. 낮에도 노래하는 논개구리가 여럿 있다. 내가 볼 곳은 우리집이요 우리숲이요 우리빛이다. ‘나’라는 넋으로 ‘너’를 바라보려고 눈을 뜨기에, 서로 아우르는 하늘인 ‘우리’를 이룬다. 나랑 너랑 함께짓기를 노래하니 ‘우리’이다. ‘우리’는 ‘연대(連帶)·공동체(共同體)’ 같은 어려운 일본말씨하고 한참 멀다. ‘우리 = 하늘인 우리 + 하나인 우리’라는 밑뜻이다. 우리를 이루기에 웃고 운다. ‘우리 = 하늘’이라서 ‘우·위’를 나타낼 뿐이고 ‘우레’는 하늘(위)에서 우는 소리이다.


  쥐는 어디로 가면 될까. 그래, 쥐는 쥐굴에서 살아야지. 우리집은 모든 마을고양이가 마실하다가 목을 축이고 낮잠과 밤잠을 들고, 새끼도 낳아서 기르는 곳이야. 쥐야, 넌 무서운 줄 모르니? 모르니 기어들겠지만. 2026.5.22.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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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읽는 나 + 읽는 바보

읽는 서울



  서울에 닿으면 서울책집부터 찾는다. 인천에 닿으면 인천책집부터 찾아간다. 대구·광주·부산·대전·청주·전주·진주 모두 그곳책집부터 헤아린다. 책집이 없는 고장은 없을 테지만, ‘늪책(학습지·참고서)’으로 벌이를 하는 책집만 있는 곳이 꽤 많다. 늪책을 다루지 않으려고 하는 마을책집을 차리는 분이 꾸준히 있되, 서울과 제주와 몇몇 큰고장으로 쏠린다. 작은고장이나 시골에서 꿋꿋하게 마을책집을 차리는 손길은 아직 너무 적다.


  서울에 닿아서 책집 두 곳을 찾아보았다. 이제 종이를 얻어서 책더미 하나를 묶는다. 한결같이 종이책을 만지고 살피고 읽는다. 언제나 종이에 쓰고 담고 생각한다. 셈틀과 손전화도 쓰되, 책읽기와 글쓰기라는 길은 으레 종이를 바탕으로 삼는다. 먼먼 옛날부터 온누리 모든 사람이 풀포기 속심을 얻어서 실로 삼고 천으로 짜고 옷으로 지었듯, 책과 글을 여미는 속빛은 종이를 다루는 손길로 가꿀 일이라고 본다.


  시골에서는 종이책이 아니더라도 풀과 나무를 매만지면서 책이라는 이야기를 말없이 마음으로 누리고 나눌 수 있다. 모든 종이는 ‘나무’가 내어준 몸이다. 모든 종이는 아름드리숲을 이룬 아름나무한테서 고맙게 얻는다. 나무가 있기에 종이를 쓴다. 아름숲이 있기에 책을 묶는다. 나무가 없다면 글을 못 쓰는 얼개이다. 숲을 모른다면 책읽기를 모르거나 겉훑기만 하는 셈이다.


  서울이라면 길나무를 보다가 책집으로 간다. 우리나라 서울은 아직 ‘숲’이라 하기는 어려운 ‘쉼뜰’이라고 할 만하다. 사람이 함부로 안 건드리는 풀꽃나무잔치일 적에 비로소 숲이라 한다. 사람이 섣불리 가지나 줄기를 친다면 숲일 수 없고, 사람이 일부러 바닥돌을 놓는다든지 거님길을 낸다면, 이때에도 숲이 아니다. 숲이라고 하려면, 사람뿐 아니라 뭇숨결과 뭇짐승과 뭇새가 그저 해바람비를 나란히 품으면서 아늑한 터전일 노릇이다.


  부산도 인천도 서울도 으레 갈아타고 또 갈아탄다. 한달음에 갈 수 있는 길은 드물되, 꽤 멀어도 이래저래 달구지에 책짐을 싣고서 읽고 쓸 만하다. 지난날에는 누구나 안고 지고 업고 이면서 다녔다면, 이제는 무척 무거운 짐조차 수월히 짐받이나 바닥에 놓고서 느긋이 오갈 수 있다. 짐나래(택배)에 맡겨도 나쁘지 않되, 책짐이라면 되도록 스스로 품고 안고 이고 들면서 다닐 노릇이다. 손길이 닿으면서 속을 읽는 책이다. 손끝에 따라 새롭게 살피는 책이다. 눈끝으로도 훑되, 언제나 손과 발과 팔과 다리와 온몸을 고르게 쓰면서 맞아들이면서 반짝이는 책이다.


  예전에도 읽는 사람이 읽을 뿐이고, 쓰는 사람이 쓸 뿐이다. 요즘도 쓰는 사람이 쓰고, 읽는 사람이 쓸 뿐이다. 종이로 읽든 마음으로 읽든, 나누려고 하기에 읽는다. 마음에 쓰든 종이에 쓰든, 펴려고 하니까 쓴다.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면, 이제 나무를 안 읽는다는 소리이다. 사람들이 책을 덜 읽는다면, 어느새 숲을 잊거나 등진다는 뜻이다. 손수 나무를 심어서 돌볼 땅을 마당에서 누리는 집에서 살아갈 때라야 책을 푸르게 읽는다. 우리집과 이웃집 모두 숲정이에 안겨서 크고작은 새가 날아들어 노래할 때라야 글을 푸근하게 쓴다.


  한가람을 잇는 다리를 건너고 또 건너고 새로 건넌다. 어느 책은 쭉정이인데 몹시 잘 팔린다. 어느 책은 알찬데 이내 사라진다. 이미 읽눈도 쓰손(쓰는 손)도 길든걸. 늘 새롭게 배우면서 쓰려고 하면, 해를 거듭하며 모든 쭉정이는 곧 걷히면서 모든 알짜가 빛나겠지. 나무가 죽어가고 숲이 시늉인 서울에 눌러앉아서 책을 쥐거나 글을 붙들면, ‘읽눈·쓰손’ 모두 ‘읽눈시늉·쓰손흉내’로 갇히느라 겉치레·겉발림에 파묻혀서 해롱거리는구나 싶다.


  저녁일을 앞두고서 책집마실로 배운다. 세 군데 작은책집까지 들르고서 일할 곳으로 옮긴다. 밥이 바로 책이요, 마음에 얹는 이야기가 저마다 빛이다. 눈으로 머금고 손으로 받아들인다. 눈길로 누리고 손길로 익힌다. 발걸음으로 찾고 발바닥으로 익힌다. 시나브로 슬슬 해가 넘어가면 서울길도 붐비겠구나. 2026.9.29.불.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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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읽는 나 + 읽는 바보

스무 살 쉰 살



  오늘(2026.9.14.) 눈금(지지율)이 새로 나온다. 나라지기가 잘한다고 밝힌 사람은 33.6%에, 나라지기가 잘못한다고 밝힌 사람은 63.3%라고 한다. 전라도조차 잘한다고 밝힌 사람이 55.9%이니, 고작 한 해 만에 이렇게 일을 잘못하는 보기를 잘 드러내는 셈이라고 느낀다.


  쉰줄은 42.6%나 잘한다고 밝혔단다. 스무줄은 18.6%만 잘한다고 밝혔다지. 이레 앞서까지만 해도 ‘스물사내(이대남)’가 외쏠림처럼 잘못한다고 밝혔다면, 오늘은 ‘스물사내 19.6%’에 ‘스물가시내(이대녀) 17.6%’라고 한다. 이제 스무줄은 순이돌이 모두 잘못한다고 밝힌 사람으로 확 기울었는데, 스물사내보다 스물가시내가 더더욱 잘못한다고 밝힌다.


  아직도 나라지기가 잘한다고 밝히는 전라도와 쉰줄은 이 땅에서 어떻게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일까? “그저 믿습니다!”에 따라서 언제 어디에서나 추켜세우거나 모시려는 셈일까?


  오늘 쉰줄인 사람들은 서른 해 앞서는 스무줄이었다. 서른 해 앞서인 1996해를 떠올려 보자. 얼마나 서슬퍼렇던 나날인가? 나는 1996해에 싸움터(군대)에 있었고, 강원도 양구군 멧골짜기에서 날마다 윗내기한테 얻어맞고 추레짓(성폭력)에 시달리면서 견디고 참고 버티었다. 마흔 해 앞서인 1986해는 1996해보다 훨씬 서슬퍼렇게 무시무시했다. 골목마다 주먹잡이가 버티어 돈을 빼앗고 때리는 판이었고, 지킴이(경찰)는 으레 주먹잡이와 한동아리였다. 쉰 해 앞서인 1976해는 어떠했을까? 나라지기가 잘못한 일을 혀끝에 올려도 갑자기 끌려가서 주검으로 바뀌던 무렵이다. 1966해나 1956해는, 1946해나 1936해는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다. 다만, 이와 같은 지난날에 스무줄이던 사람들은 이 나라를 어떻게 바라보며 스스로 살림을 지으려고 했는지 돌아봐야지.


  내가 이쪽에 손을 든다고 하더라도, 이쪽에서 저지르는 잘못을 나무라야 맞다. 내가 저쪽에 손을 든다고 하더라도, 저쪽에서 일삼는 말썽은 꾸중해야 맞다. 내가 나라지기한테 손을 들었든 안 들었던, 그이가 일을 잘하면 ‘잘한다!’ 하고 손뼉칠 노릇이다. 일을 잘못하면 ‘잘못하네!’ 하고 타박하면서 타이를 노릇이다.


  얼마 앞서까지 스물사내(이대남)는 ‘극우’에 물들었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넘쳤다. 나라지기를 나무란대서 스물사내한테 ‘극우 프레임 씌우기’를 일삼은 붓잡이가 수두룩하다. 자, 그러면 이제는 스물가시내한테도 똑같이 ‘극우 프레임 씌우기’를 할 셈인가? 아니면, 잘못한 일은 잘못인 줄 알아보면서 이 나라를 아름답게 가꾸는 일에 마음을 기울이겠는가?


  순이돌이는 싸워야 할 사이가 아니다. 순이돌이는 ‘어버이(어머니 + 아버지)’라는 오랜 낱말처럼 서로 어질게 돕고 어깨동무하면서 살림꽃을 피우며 사랑으로 마주할 사이로 살아갈 일이다. 우리말은 ‘어버이’와 ‘암수’와 ‘가시버시’와 ‘엄마아빠’처럼 언제나 가시내를 앞세워서 길을 짓고 사내가 뒤서면서 받치는 얼개이다. 국립국어원 낱말책에는 ‘아들딸’만 올림말로 싣지만, 우리말로는 ‘딸아들’이라 얘기해야 어울린다.


  쉰줄인 사람들은 스무줄인 사람들한테서 배울 노릇이다. 스무줄인 사람들은 쉰줄인 사람들한테 가르칠 노릇이다. 언제나 나어린 사람이 나이든 사람을 가르치게 마련이다. 나이든 사람은 나어린 사람이 들려주는 말에 귀기울이면서 스스럼없이 먼저 움직이고 일하고 살림하기에 어른스럽다고 한다. 오늘 우리가 스스로 ‘어른’으로 서야 집과 마을과 나라와 별(지구)이 나란히 아름답다. 우리는 모두 어른으로 살아내면서 아이라는 숨빛을 사랑으로 품을 노릇이다. 그대가 스무줄이건 쉰줄이건, 서른줄이건 일흔줄이건, 마흔줄이건 예순줄이건, 아흔줄이건 열줄이건, 온하루를 사랑으로 짓는 살림씨앗을 심기를 빈다. 2026.9.14.달.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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