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마실빛이 낳은 새길 (2020.6.25.)

― 대전 〈버찌책방〉


  제 등짐은 어릴 적부터 컸습니다. 1982년부터 1987년까지 다닌 국민학교에는 책칸이나 짐칸이 따로 없으니 누구나 모든 교과서하고 공책을 날마다 이고 지고 다녔어요. 그때에는 교과서·공책뿐 아니라 숙제도 많고 폐품도 으레 학교에 바쳐야 했습니다. 그무렵 어린이는 어린이라기보다 ‘어린 짐꾼’이었습니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배울 갈래가 잔뜩 늘었고 참고서에다가 문제집에다가 사전까지 늘 짊어집니다. 등짐 하나로는 모자라 둘을 챙겨야 하던 판입니다. 학교를 마친 뒤에는 신문을 돌리느라 이 몸이 쉴 겨를이 없습니다. 손잡이가 휘청할 만큼 신문을 자전거 앞뒤에 싣고서 달렸고, 일을 마친 다음에는 헌책집을 다니면서 다시금 종이짐을 한가득 꾸리며 살았습니다. “뭐 하는 분이세요?” 하고 묻는 분이 많아서 빙긋 웃으면 “멧골 다녀오셨어요?”나 “여행 다니세요?” 하고 더 묻습니다. 다시 빙그레 웃으며 “사전을 씁니다. 우리말사전, 또는 한국말사전, 또는 배달말사전을 쓰지요. 제 등짐이나 끌짐에는 모두 책을 담았습니다.” 하고 대꾸합니다.


  따로 여행을 다니지 않기에 ‘여행에서 얻는 느낌’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다만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던 때에는 ‘이 깜깜한 나라에 앞날이 있을까’ 하고 물었고, 신문을 돌리던 즈음에는 ‘이 메마른 땅에 꽃이 필까’ 하고 물었으며, 아이를 낳아 살림을 꾸리는 오늘은 ‘이 매캐한 마을에 숲을 심자’ 하고 되새깁니다.


  사전이라는 책을 씁니다만, 제가 쓰는 글로 엮는 사전은 “아이하고 뛰놀고 날아다니고 노래하고 춤추고 웃고 떠들면서 소꿉잔치 벌이는 동안 스스로 길어올리거나 짓거나 찾아내는 사랑이라고 하는 빛살을 이야기로 여미는 꾸러미”가 되기를 바랍니다. 책마실을 다니는 길에는 늘 이 대목만 생각합니다.


  대전 기스락에 깃든 〈버찌책방〉은 냇물 하나 건너면 〈책방 채움〉을 만날 만큼 서로 가깝습니다. 더구나 두 책집이 문을 연 때도 비슷하답니다. 살구도 오얏도 복숭아도 딸기도 오디도 아닌 버찌가 맺는 책집인데요, ‘버찌’란 열매를 마주할 적에는 《버찌가 익을 무렵》을 쓴 옛어른이 떠오릅니다. 배고픈 멧골아이가 학교 한켠에 자라는 벚나무에 맺는 버찌로 배를 채우려다가 교장샘한테 들켜 꾸중 듣는 모습을 보고는, 아이들을 불러서 벚나무에 타고 올라 “얘들아, 너희 마음껏 나무를 타고서 이 열매를 누리렴. 이 열매는 새랑 너희 몫이란다.” 하고 노래한 옛어른. 〈버찌책방〉은 책으로 싱그러운 들내음을 나누는 들꽃다운 자리일 테지요.


《머나먼 여행》(에런 베커, 웅진주니어, 2014)

《혁명노트》(김규항, 알마, 2020)

《여자에게 여행이 필요할 때》(조예은, 카시오페아, 2016)

《말도 안 돼!》(미셸 마켈 글·낸시 카펜터 그림/허은미 옮김, 산하, 2017)

《출근길에 썼습니다》(돌고래, 버찌책방, 2020)


― 대전 〈버찌책방〉

대전 유성구 지족로349번길 48-7

http://instagram.com/cherrybooks_2019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책숲마실


냇물소리가 가만가만 (2020.6.25.)

― 대전 〈책방 채움〉


  나라에 크고작은 책집이 만 곳이 훌쩍 넘던 때가 있습니다. 학교 앞에서 문방구이면서 책집이던 곳도 많았습니다만, ‘문방구이자 책집’이라기보다는 ‘문방구 곁에 책을 몇 자락 놓으’면서 늘 책을 새롭게 마주하도록 마음을 쓴 살림이지 싶습니다. 예전 ‘학교 앞 문방구 책집’은 책을 얼마 못 두기에 ‘잘 팔릴 책’을 으레 놓기도 하지만 ‘잘 읽힐 책’을 곧잘 놓곤 했습니다. 널리 알려진 책을 놓는 학교 앞 책집이 있으나, 널리 읽히면 좋겠다고 여긴 책을 문방구지기가 가려내어 갖춘달까요.


  제가 어릴 적부터 으레 다닌 책집은 큰책집이 아닌 마을책집이거나 ‘문방구책집’입니다. 어머니가 “네가 보고서 부록 좋은 (여성)잡지를 골라 와” 하고 심부름을 맡기면 한 손에 종이돈이랑 쇠돈을 움켜쥐고 바람처럼 달려서 휭휭 돌아올 만큼 가까운 곳을 드나들었습니다.


  참고서하고 교과서가 빠진 마을책집에는 여성잡지나 갖은 이레책·달책도 빠집니다. 그렇다고 달책을 아예 안 놓는 마을책집이 아니에요. 책집지기 스스로 가리고 추리고 솎고 뽑아서 갖추는 몇 가지 달책이 있습니다. 2000년대 첫무렵까지 그토록 많던 책집은 도매상에서 밀어넣는 잡지나 책이 수북했다면, 오늘날 책집은 책집지기가 눈썰미를 키워서 가려내어 마을이웃하고 함께 읽으면서 생각을 나누고픈 책이 아기자기합니다.


  대전마실을 하려고 순천으로 가서 기차를 탑니다. 서대전에서 내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고, 한참을 달려 〈책방 채움〉을 만납니다. ‘비움’이 있기에 ‘채움’이 있을 테지요. ‘채움’을 지나 ‘만남’에 닿고, 이윽고 ‘누림’이며 ‘나눔’으로 뻗으리라 생각해요. 손바닥쉼터가 곁에 있고, 냇물이 옆에 있습니다. 가까운 동산은 나무가 꽤 우거집니다. 타박타박 걷는 발소리가 조용히 스미는 책집에는 이 고장이 싱그럽게 피어나기를 바라는 그림책이며 동화책이며 이야기책이 곱게 자리를 잡습니다. 이곳에서 산 책을 냇물소리를 들으며 나무그늘에서 읽으면 좋겠네요. 또는 냇가에서 놀다가 책집으로 마실을 올 만합니다. 또는 나무그늘에서 낮잠을 늘어지게 누리고서 책집 나들이를 해도 재미있을 만합니다.


  옆동산에서 바람이 불어옵니다. 이 책집에서 살짝 바람이 피어나 옆동산으로 갑니다. 냇물 따라 싱그러운 빛이 흐릅니다. 이 책집에서 슬쩍 자라난 이야기가 냇물에 가만히 안겨서 나란히 흐릅니다.


《플로라 플로라, 꽃 사이를 거닐다》(시부사와 다쓰히코/정수윤 옮김, 늦여름, 2019)

《수학에 빠진 아이》(미겔 탕코/김세실 옮김, 나는별, 2020)

《우아한 계절》(나탈리 베로 글·미카엘 카이유 그림/이세진 옮김, 보림, 2020)


― 대전 〈책방 채움〉

대전 유성구 반석동로40번길 92-14, 102호

https://blog.naver.com/supershin33

https://www.instagram.com/bookstore_chaeum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책숲마실

나무 한 그루 같은 동화를 (2019.1.11.)


― 충남 천안 〈갈매나무〉

충남 천안시 동남구 대흥로 280

041.555.8502.



  충남에서 샘님(교사)으로 일하는 분들이 불러 주었습니다. 한겨울에 배움자리를 마련하셨고, 저한테 ‘사전을 지으며 말을 갈무리하는 살림’을 들려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뜻있게 배움자리를 마련해서 스스로 배우고 다스리는 샘님을 만날 적마다 저로서는 한결 새롭게 헤아리는 눈썰미를 배웁니다. 저는 한국말이라고 하는 숨결이 어떤 마음빛으로 얽힌 수수께끼인가 하는 대목을 풀어서 이야기하는데, 이 이야기를 듣는 샘님이 앞으로 뭇 어린이·푸름이를 만나서 한결 즐겁고 수수하게 말꽃을 피울 수 있다면 참으로 보람있겠다고 여깁니다.


  이야기꽃을 펴는 자리에 가기 앞서 천안에 들릅니다. 고흥에서 배움자리로 가는 길목이거든요. 천안에 있는 오랜 헌책집인 〈뿌리서점〉에 들르려고 했는데 마침 제 발길이 닿을 즈음에는 바깥일을 보러 나가셨는지 잠겼습니다. 이곳에서 가까이 〈갈매나무〉가 있습니다. 헌책집 이름으로 나무 한 그루를 심은 책집지기님은 어떤 분이려나 궁금하게 여기면서 천천히 들어섭니다.


  수북하게 쌓은 책이, 빼곡하게 놓은 책이, 갖은 발자취를 품은 책이, 이쪽에서도 부르고 저쪽에서도 부릅니다. 뒤적이고 넘기면서 그저 놀랍니다. 천안시장이나 천안 공무원이나 글꾼은 이 헌책집을 알는지 궁금합니다. 알기만 할는지, 단골로 찾아와서 오랜 책자취에 서린 삶빛을 배우는지 궁금합니다. 《最新 文學新語辭典》(池中世, 신광출판사, 1950)는 한국전쟁을 앞두고 나왔는데, 1953년 9월 26일에 벌써 10벌을 찍었다는군요. 그런데 ‘문학신어사전’에 나오는 낱말은 죄다 일본 한자말이거나 영어나 프랑스말입니다. 《the National English Readers(내쇼낼 英語讀本) 註解書 6》(편집부 엮음, 보문당, 1951)는 영어 교과서를 풀이하는 책입니다. 참고서랄까요. 《石川生理衛生敎科書》(石川日出鶴丸, 富山房, 1932)는 일본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였다는데, 아마 한국 학교에서도 이 교과서를 썼을는지 모릅니다. 이 교과서로 배운 분이 곳곳에 밑줄을 긋고 한글로 풀이를 단 자국을 엿봅니다. 《鑑賞 啄木歌集》(石川啄木 글·安藤靜雄 엮음, 金鈴社, 1941)는 겉종이가 떨어졌지만 용케 따로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만지기만 해도 바스라지는 이 조그마한 노래책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 손을 거치면서 ‘이시카와 다쿠보쿠’ 사랑씨앗을 곳곳에 심어 주었을까요.


  20원짜리 국민학교 공책 꾸러미를 보고 놀랍니다. 여태껏 안 쓴 이 오랜 국민학교 공책은 어느 곳에 얼마나 오래도록 고이 잠자다가 깨어났을까요. 100자락이 넘는 옛 공책을 가만히 쓰다듬습니다. 1960년대에 나온 전남일보 축쇄판 세 벌을 구경하고, 《증언, 쇼스타코비치 회고록》(솔로몬 볼코브 엮음/김도연 옮김, 종로서적, 1983)도 구경합니다. 살아서는 못 남긴 말을 죽은 다음에 터뜨렸다더군요. 《경북아동문학 2 흙이 목숨줄이기에》(경북아동문학연구회, 그루, 1987)를 살피고, 《침묵과 함께 예술과 함께》(김기창, 경미문화사, 1978)도 살피다가 《舊韓末外國人雇聘考 Ⅱ》(李鉉淙, ?, 昭和 55/1980)이랑 《開港場內 外國人 營業》(李鉉淙, 한국사학회, 1977)도 읽고, 《루소의 식물 사랑》(장 자크 루소/진형준 옮김, 살림, 2008)에 《물고기 소년의 용기》(프란시스 투어/최승자 옮김, 창작과비평사, 1985)도 챙겨서 읽습니다. 1980년대 첫무렵에 나온 조그마한 창비아동문고가 잔뜩 있습니다. 요새는 번쩍번쩍하게 꾸미어 큼직하게 나오는데요, 저는 1980년대 첫무렵에 이처럼 조그맣게 나온 수수한 판짜임이 마음에 듭니다. 《尋常小學 國語讀本 卷十二》(文部省, 1918)가 보이는데, 이 책까지 사려니 주머니가 가벼워 눈물을 삼키고 내려놓습니다.


  어린이책을 어린이 손아귀에 맞게 앙증맞도록 꾸미면 좋겠어요. 크기를 줄이고 값을 낮추고 그야말로 투박하게 엮으면 좋겠어요. 아이들한테 겉치레보다는 속사랑을 알려주도록 단출히 엮고, 삶에서 스스로 지으면서 길어올리는 씩씩한 하루를 헤아리도록 이끌면 좋겠어요.


  먼나라 이야기이지 않은 동화요 문학입니다. 마당에 심어서 돌보는 나무 한 그루 같은 동화이고, 뒤꼍에 새가 심어 어느덧 우람하게 오르는 나무 두 그루 같은 문학이에요. 숲에서 오는 책이듯, 숲에서 오는 이야기요 글이며 노래이지 싶습니다. 헌책집지기님이 갈매나무라면, 고흥에서 천안으로 책마실을 온 책나그네는 후박나무라 하면 어울리려나 하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잣나무도 되고, 떡갈나무도 되고, 오리나무도 되고, 느티나무도 되고, 향긋나무도 됩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책숲마실

살림밭 사랑밭 노래밭 (2020.6.8.)


― 부산 〈글밭〉

부산 연제구 안연로 12



  부산지방법원을 찾아왔습니다. 고흥에 있는 들풀모임 ‘청정고흥연대’ 분들이 부산항공청에 대고 ‘고흥만 경비행기시험장 취소 소송’을 했는데, 6월 18일 1심 판결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하기에 이 자리를 함께했습니다. 푸른시골에서 무인군사드론을 마구 띄우며 실험하는 이 나라인데요, 푸른흙살림하고 동떨어진 이런 일을 고흥군청이며 정부이며 왜 그만둘 생각을 안 하는지 안쓰럽습니다. 시골사람 목소리를 법원 앞에서 외치고서 저는 따로 부산에 남습니다. 54 시내버스를 타고 연산동에 자리한 헌책집 〈글밭〉을 찾아갑니다. ‘밭’이라는 이름은 책을 다루는 곳에 참 어울린다고 느껴요. 씨앗을 심어 남새를 얻는 흙밭처럼, 이야기라는 숨결을 심어 슬기롭고 사랑스러운 마음을 가꾸는 책밭일 터이니 〈글밭〉이라는 곳은 이러한 손길이 만나는 자리일 테지요.


  시내버스에서 내립니다. 큰길은 내키지 않아 마을길을 걷습니다. 해바라기를 하며 책터를 어림합니다. 해가 잘 드는 자리에 찻집하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 책집이 있습니다. 책집 옆에 찻집, 찻집 옆에 책집. 사이좋게 나아가는 두 곳일 테지요. 책집하고 책집 옆에 또 어떤 집이 나란히 있으면 좋을까요. 마을이기에 커다란 가게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동무하는 가게가 되고, 이웃하는 살림이 되면서, 함께 노래하는 길이면 아름답겠다고 생각해요.


  아마 1945년부터 나왔지 싶은 잡지일 텐데, 《主婦の生活》 1977년 9월호를 봅니다. 일본에서 오래도록 나오는 “주부의 생활”을 고스란히 따라하며 한국에서 “주부생활”이란 잡지가 나왔지요. 묵은 일본 잡지를 들추는데, 손수 짓는 밥살림·옷살림·집살림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잡지를 무릎에 얹고서 생각합니다. 밥이며 옷이며 집을 가꾸는 손길을 사내랑 가시내가 함께 배우고 가르치고 키우면서 북돋울 적에 멋지면서 알차리라 느껴요. 그러니까 “주부의 생활”이 아닌 “살림짓기”나 “살림꽃”이 될 노릇이요, “살림빛”이나 “살림지기”나 “살림벗”으로 나아간다면 무척 값지리라 생각합니다.


  안쪽 책꽂이에서 《韓國人의 手決》(정병완 엮음, 아세아문화사, 1987)을 봅니다. 글을 쓰는 살림은 예부터 손으로 가꾸었습니다. 이제는 셈틀이나 손전화로 글을 ‘치는’ 사람이 많지만, 참말로 오래오래 모든 글은 손글이었고 손글씨였어요. 저마다 다른 사람이 저마다 다른 글빛으로 생각을 나누고 갈무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모든 공사문서에 고유한 여러가지 모습의 변천과정을 갖는 수결이 필수요건으로 사용되어 왔었다. (3쪽)


  오늘 우리는 저마다 다른 눈빛으로 저마다 다른 살림을 지으면서 저마다 싱그러운 사랑꽃을 피우는 길을 가겠지요. 달력종이로 책을 싼 자취를 보고는 《그로잉 업》(보어즈 데이비드슨/강문영 옮김, 대일서관, 1983)을 집습니다. 이 책을 장만할 뜻은 없으나, 겉을 싼 달력종이가 애틋하기에 집어요. 1983년 책을 감싼 달력종이란 바로 그해 어느 달 달력이었겠지요. 책을 안 사고 ‘달력종이 책싸개’만 살까 하고 생각하다가 알맹이도 있어야 어느 해 달력종이인지를 어림하리라 여겨 통째로 고릅니다.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3》(박세길, 돌베개, 1992)을 봅니다. 오늘 이곳 〈글밭〉에는 ‘다현사’ 석 자락이 다 있습니다만, 석걸음 하나만 고릅니다.1988년에 첫걸음이 나오는데, 그때까지 교과서로 하나도 안 다룬 발자취를 비로소 다룬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공수부대의 광주 퇴각 이후 전두환 일파는 광주를 다방면에서 고립시키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우선 전두환 일파는 그들이 완전히 장악한 언론을 동원해, 일반 민중이 광주의 상황을 바로 이해하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함은 물론이고 나아가 광주시민과 민중들 사이의 심리적 분열을 조장했다. (60쪽)


  헌책집 〈글밭〉은 글로 일구는 밭을 책으로 만나도록 잇는 다리이지 싶습니다. 책을 읽기에 책밭을 누리고, 글을 쓰기에 글밭을 가꾸며, 아이를 돌보는 살림을 건사하며 살림밭을 어루만져요.

  텃밭도 남새밭도 꽃밭도 좋지요. 이 곁에 사랑밭이며 노래밭이며 웃음밭이며 이야기밭이 나란히 있으면 더없이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별밭이 되고 어진밭에 상냥밭에 참밭이 된다면 그지없이 아름다울 테고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책숲마실

이야기 자라는 마을 (2020.5.8.)


― 전북 전주 〈소소당〉

전북 전주시 덕진구 솔내7길 17-10

https://www.instagram.com/sosodang_bookcafe



  익산에서 처음으로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익산을 감싸는 들이나 숲을 마주하는 데가 아닌, 시내 길손집에서 맞이하는 새벽이라, 그리 새롭지는 않습니다. 어느 고장을 가든 길손집이 늘어선 곳은 술집 곁입니다. 술집 곁에 길손집이 있어도 나쁘지 않으나, 이제는 나라나 고장에서 마음을 기울여서 길손집 둘레에 조그맣게라도 나무숲을 마련하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고장 사람이라면 굳이 길손집에 안 묵을 테지만, 이 고장을 좋아하고 싶은 이웃이 길손집에 찾아온다는 생각을 하면 좋겠어요. 하루를 묵기 앞서 나무 곁에 서고, 하루를 열면서 나무를 가만히 쓰다듬으면서 해바라기를 할 만한 자리가 길손집 곁에 있다면, 이 고장을 좋아하고 싶은 이웃한테도 이바지하겠지만, 무엇보다 이 고장 사람들한테 이바지하겠지요.


  커다랗게 나무숲을 가꾸지 않아도 됩니다. 곳곳에 조그맣게 나무숲이 있으면 되어요. 한꺼번에 아주 많은 사람이 들이닥칠 나무숲이 아닌, 아이 손을 잡고서 사뿐히 마실하면서 바람을 쐬고 해님을 맞이할 나무숲이면 됩니다.


  기차를 타도 가까운 익산·전주 마실길은 자전거로 달려도 가깝습니다. 그러고 보니 익산·전주 두 고장이 찻길 말고 자전거길로 오가도록 해도 꽤 재미나겠구나 싶어요. 자전거길 옆으로 거님길을 두어도 참 좋을 테고요. 나무로 그늘을 드리우는 거님길로 익산하고 전주를 잇는다면, 아마 이 들길·나무길·숲길을 거닐려는 사람이 제법 많지 않을까요?


  기차나루에서 전주 시내버스를 타고 〈소소당〉을 찾아갑니다. 시끌시끌한 찻길에서 벗어날수록 조용합니다. 마침내 책집 앞에 서니 골목 안쪽이라 더 한갓집니다. 참말로 마을책집은 큰길 아닌 마을길에, 아니 골목길에 깃들 적에 아름답구나 싶어요. 마을사람이라면 언제라도 마실하고, 이웃고장에서는 틈틈이 나들이를 하는 책쉼터입니다.


  책집을 둘러싼 풀하고 나무를 보다가, 이 골목에 둥지를 튼 제비를 바라보다가, 책시렁도 가만가만 바라보면서 《분홍 모자》(앤드루 조이너/서남희 옮김, 이마주, 2018)를 고르고, 《나에게 작은 꿈이 있다면》(니나 레이든 글·멜리사 카스트리욘 그림/이상희 옮김, 소원나무, 2018)을 고릅니다. 《먼 아침의 책들》(스가 아쓰코/송태욱 옮김, 한뼘책방, 2019)하고 《체리토마토파이》(베로니크 드 뷔르/이세진 옮김, 청미, 2019)도 고르는데, 《체리토마토파이》까지 고르면서 책바구니를 하나 얻습니다.


  예부터 마을이란 아이가 자라는 배움터라고 했습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를 비롯해 마을이웃 누구나 스승이자 길라잡이에다가 들동무에 숲벗이 되는 배움터이기에 마을이라 했어요. 마을이란 집집이 모인 터라고만 할 수 없어요. 마을이란 다 다르게 살림하는 손빛을 나누면서 저마다 다르면서 새롭게 꿈을 키워 사랑으로 나아가는 보금자리이지 싶습니다.


  다같이 배우고, 다함께 사랑하는 마을이니, 이곳에서는 늘 새삼스레 이야기가 피어나겠지요. 아이가 자랄 만할 적에 마을이요, 이야기가 자라기에 마을인 셈일까요. 노래하는 아이가 뛰놀기에 마을이면서, 춤추는 아이가 어른 곁에서 사랑을 배우기에 마을이라고도 하겠지요.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