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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없는 사진말

25. 즐거움이 묻어나다



  즐거움이 묻어나기에 사진이라고 본다. 즐거움이 고이 흐르기에 사진이라고 본다. 이 즐거움은 노래가 되기도 한다. 이 즐거움은 춤사위나 웃음이 되기도 한다. 이 즐거움은 사랑이 될 때가 있고, 이야기가 될 때가 있다.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을 찍어도 예쁜 사진을 얻는다. 우리 스스로 예쁜 눈길이 되어 예쁜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우리가 찍는 사진은 늘 예쁘다.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을 찍어도 사랑스러운 사진을 얻는다. 우리 스스로 사랑스러운 눈길이 되어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우리가 찍는 사진은 늘 사랑스럽다.


  사진 한 장이 어둡다면? 사진 한 장이 아프다면? 사진 한 장이 괴롭다면? 이때에는 우리 스스로 이러한 기운으로 살아가면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어두운 마음이자 어두운 눈길로 사진기를 쥐면 어두운 사진이 나온다. 아픈 마음이자 아픈 눈길로 사진기를 쥐면 아픈 사진이 나온다.


  예쁨이나 사랑이 더 좋지 않다. 어두움이나 아픔이 더 나쁘지 않다. 예쁨이나 어두움은 우리가 겪는 숱한 살림 가운데 하나이다. 때로는 예쁜 결을 고스란히 살리는 사진을 찍을 뿐이다. 때로는 아픈 이웃을 내 아픔으로 고이 받아들여서 사진을 찍을 뿐이다.


  누구는 예쁜 이웃을 바라보면서도 스스로 어둡거나 아픈 마음이기에 그만 ‘예쁜 이웃한테 감도는 예쁜 기운’이 아니라, ‘사진기를 쥔 이녁 마음에 흐르는 어둡거나 아픈 기운’을 사진으로 찍는다. 누구는 아픈 이웃을 바라보면서도 스스로 이를 잘 모르거나 등돌린 마음인 터라 ‘아픈 이웃이 어떻게 무엇이 아픈가’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겉훑기 사진을 찍고 만다.


  우리 모습이 사진에 묻어난다. 우리 삶이 사진에 드러난다. 우리 생각이 사진으로 태어난다. 우리가 나누는 말이 사진에서 이야기로 거듭난다. 우리 눈길이 낱낱이 사진이라고 하는 숨결로 거듭난다. 사진기를 쥐기 앞서 우리 마음부터 바라본다. 사진을 찍기 앞서 우리 눈길부터 가다듬는다. 2017.5.29.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사진넋/사진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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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없는 사진말

24. 사진에 안 찍힐 권리



  사진을 찍을 자유가 있다. 사진기만 있으면 누구나 무엇이든 사진으로 찍을 수 있다. 대단히 자유롭다. 글을 쓸 자유가 있다. 연필만 있으면 누구나 무엇이든 글로 옮길 수 있다. 더없이 자유롭다. 그림을 그릴 적에도 노래를 부를 적에도 춤을 출 적에도 모두 자유이다.


  사진에 안 찍힐 권리가 있다. 둘레에서 마구 사진기 단추를 눌러대지 못하도록 막을 권리가 있다. ‘초상권 침해’라는 어려운 이름까지 안 쓰더라도 ‘난 사진 안 찍히겠어요. 나를 사진으로 찍지 마셔요.’ 하고 말할 권리가 있다. 글에 안 적힐 권리가 있다. 누가 나를 글감으로 삼아서 쓰려고 한다면, ‘나는 누가 나를 글로 쓰면 싫어요. 내 이야기를 쓰지 마셔요.’ 하고 말할 권리가 있다.


  아무리 사진을 찍고 싶다 한들 ‘우리를 마주한 사람’이 찍히고 싶지 않다면 곧바로 사진기를 거두어야 한다. 이는 ‘사진 찍을 자유’를 누릴 사람이 지킬 다짐이다. 의무라기보다 다짐이요 마음이다. 사진을 찍을 자유란,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이 이웃에 있는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마주하면서 서로 어깨동무하려는 마음을 나누려는 자유이다. 아무 사람이나 함부로 찍는 일은 자유가 아니다. 이는 폭력이다.


  ‘네 얼굴이 못생겼네’라는 말은 주먹질이다. 폭력이다. ‘네 다리가 예쁘네’라는 말도 주먹질이다. 폭력이다. 어린이한테든 어른한테든 모두 주먹질이다. 젊은이한테든 늙은이한테든 언제나 주먹질이다.


  한국 사회는 참으로 오랫동안 신분·계급 사회였고, 일제강점기를 거쳤으며, 군사독재를 지났다. 이동안 자유가 끔찍하도록 짓밟혔다. 이러다 보니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자유’를 잘못 받아들인 사람이 많다. ‘표현할 자유’는 지켜야 마땅하지만, ‘표현받지 않을 자유’를 살짝이라도 건드릴 적에는 어떤 ‘표현’도 자유라고 할 수 없이 그저 폭력이 될 뿐이다. ‘폭력 아닌 표현’을 하고 싶다면 자유란 무엇인지 새롭게 배워야 하고, 무엇보다 ‘사랑’을 배우고 나누며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2017.5.4.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사진넋/사진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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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없는 사진말

23. 멋부리다가



  사진이 사진다움을 잃는 까닭을 손꼽아 본다면 아무래도 ‘멋부리기’를 첫째로 들 만하다고 본다. 멋을 부리려 하기 때문에 사진이 사진다움을 잃는다. 멋을 부리려 하는 탓에 이름은 사진이되 속은 빈 겉치레로 끝나기 일쑤이다.


  거꾸로 말해 본다면, 사진이 사진다우려면 멋을 안 부리면 된다. 사진이 사진으로서 제구실을 하자면 멋을 살피지 않으면 된다. 멋내지 않을 때에 사진이 되고, 멋스럽지 않으려고 하면 오래오래 즐길 사진으로 남으리라 본다.


  속을 가꾸는 사람은 멋을 부리지 않는다. 속을 가꾸는 사람은 그저 속을 가꿀 뿐이다. 속을 가꾸는 아름다운 사람을 보고는 “참 멋있구나” 하고 느낄 만한데, 멋은 겉을 꾸미려 할 적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멋을 부리지 않기 때문에 멋있는 삶이 되고, 겉멋에 휘둘리지 않기 때문에 멋스러운 살림이 된다.


  글멋을 부리면 어떤 글이 나올까? 그림멋을 부리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보기 좋게 꾸민대서 멋이 되지 않는다.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한테서 저절로 스미거나 풍기거나 퍼지는 아름다움이기에 멋이다. 기쁘게 웃는 사람한테서 그저 수수하면서 정갈하게 흐르거나 피어나는 아름다움이기에 멋이다.


  그저 쓰면 글이 되고, 그저 찍으면 사진이 된다. 어떤 삶을 담으려 하는가를 생각하면서 저마다 스스로 마음에 씨앗을 심는 손길이 될 적에 연필로 글을 쓰고 사진기로 사진을 찍는다. 삶을 사랑하기에 삶을 사랑하는 글이나 사진이 태어난다. 손수 짓는 살림이기에 스스로 고운 글이나 사진을 낳는다.


  더 빼어난 장비가 없어도 사진을 찍는 까닭을 생각하면 된다. 더 오래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사진을 찍는 모습을 헤아리면 된다. 이름난 누구한테서 배우지 않아도 사진을 찍는 숨결을 살피면 된다.


  사진은 늘 오늘 여기에 그대로 있다. 늘 오늘 여기에 그대로 있는 사진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사랑할 수 있으면 된다. 멋부리지 않는 손길로, 멋내지 않는 마음으로, 멋스럽게 꾸미려고 하지 않는 넋으로, 그예 스스로 사진이 되면 언제나 사진이다. 2017.1.31.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사진비평/사진말/사진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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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없는 사진말

22. 누구나 찍는 사진



  누구나 찍는 사진이다. 작가이기에 찍는 사진이 아니다. 전문가이기에 찍는 사진이 아니다. 사진은 누구나 찍는다.


  누구나 찍을 수 있지 않다면, 사진은 사진이 되지 못한다. 누구나 찍을 수 있다는 대목이 사진을 사진답게 북돋운다.


  누구나 찍을 수 없다면, 몇몇 작가나 전문가만 찍을 수 있다면, 사진이란 무엇인가? 누구나 못 찍는 사진이라면, 작가나 전문가가 되지 않고서야 손도 못 대는 사진이라면, 졸업장이나 자격증이 있어야 비로소 사진말(사진비평)을 펼칠 수 있다면, 사진이란 누구한테 이바지를 할까?


  사진이 재미있다면, 대학교 사진학과를 안 나와도 사진을 즐겁게 배워서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이 아름답다면, 인맥이나 학맥이 없이도 얼마든지 ‘내 작품을 빚을’ 수 있고 ‘내 사진을 이웃하고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이 사랑스럽다면, 값지거나 값비싼 장비가 아닌 작은 손전화 하나로도 얼마든지 신나게 이야기꽃을 피우며 어깨동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누구나 찍는다. 누구나 찍기에 사진이다. 사진은 누구나 읽는다. 참말로 누구나 어떤 사진이든 이녁 마음이 가는 대로 찬찬히 읽고 누릴 수 있기에 사진이다. 이것을 꼭 이렇게 찍어야 하지 않는다. 저것을 꼭 저렇게 읽어야 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다 다른 눈길과 눈썰미와 눈높이로 이것을 이리저리 살피고 헤아리면서 즐겁게 찍을 수 있기에 사진은 늘 새롭게 태어난다. 사람마다 다 다른 삶과 사랑과 살림으로 저것을 요모조모 생각하고 바라보면서 기쁘게 읽을 수 있기에 사진은 언제나 새롭게 깨어난다.


  틀에 박히고 만다면 사진은 망가진다. 작가하고 전문가하고 비평가 사이에 얽매이고 만다면 사진은 무너진다. 등단이라는 자리를 거쳐야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지 않는다. 전시회를 열거나 책을 펴내야 사진가가 되지 않는다. 마음에 피어나는 이야기를 지피어 사진으로 옮기며 나눈다면 누구나 ‘사진님’이 된다. 2016.12.4.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사진말/사진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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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없는 사진말

21. 어느 날 사진을 못 찍는 손



  어느 날 사진을 못 찍는다. 적어도 한 장쯤 찍어서 이야기를 남기려고 마음을 품기는 했으나, 막상 사진을 찍어야 할 적에 못 찍고 지나간다. 게다가 사진을 한 장쯤 찍어서 남겨야겠다고 품은 생각조차 잊었다.


  사진을 찍기로 했는데 못 찍었구나 하는 생각은 이튿날 아침이 되어서야 떠올랐다. 어떤 사진이었느냐 하면, 알타리무김치를 담그고 나서 통에 옮기기 앞서 한 장을 찍으려 했다. 김치를 담는 흐름을 손수 찍기는 어렵지만, 잘 버무려 놓은 뒤에 한 장을 찍으면 재미있겠거니 여겼다.


  왜 사진을 못 찍었느냐 하면 힘이 많이 들고 바빴기 때문이다. 내가 ‘사진만 찍는’ 사람이라면 이른바 ‘사진 블로거’처럼 이렇게도 찍고 저렇게도 찍을 테지만, 살림을 하면서 틈틈이 사진을 찍기도 하는 어버이인 터라, 사진을 뒤로 젖힐 때가 잦다.


  사진을 더 많이 찍기에 더 훌륭하지 않다고 느낀다. 이와 똑같다. 사진을 몇 장 못 찍거나 때로는 한 장조차 못 찍기에 안 훌륭하지 않다고 느낀다. 사진만 전문으로 찍든, 그저 즐거이 사진을 찍든, 언제나 삶·살림·사랑·사람을 마음에 곱게 아로새긴 뒤에 사진기를 손에 쥘 수 있으면 누구나 훌륭하리라 느낀다.


  수많은 장비가 있기에 한결 멋스러이 ‘연출’을 해낼 수 있을 텐데, 아무런 장비가 없더라도 ‘마음으로 그리는’ 사진이 될 수 있으면 더없이 아름다우면서 훌륭하리라 느낀다. 멋스러이 연출을 해내는 사진은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따라할 수 있다. 이와 달리 마음으로 그리는 사진은 아무도 따라하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하면, 마음으로 그리는 삶과 살림과 사랑과 사람은 모든 사람이 다 다르면서 아름답기 때문이다. 스스로 마음으로 그리는 삶과 살림과 사랑과 사람을 사진으로 찍으려 한다면 ‘남한테서 배울’ 일이 없고 ‘남을 따라할’ 일이 없으며 ‘남을 베끼거나 흉내낼’ 일마저 없다. 사진문화란 먼 데에 있지 않고 늘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 마음을 나 스스로 내 손으로 그리면 모두 된다. 2016.7.17.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사진넋/사진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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