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노래꽃

시를 씁니다 ― 58. 이름없는



  “이름없는 풀”은 없습니다. “이름모를 풀”도 없습니다. 우리 곁에 있는 풀과 나무와 벌레와 새한테 다 다르게 이름이 있습니다. 시골에서 살림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스스로 마주하면서 느끼고 생각한 마음을 담아서 붙인 이름이 있어요. 오랜 옛날부터 들숲메바다를 품고서 살림을 지은 사람들이 몸소 바라보고 느끼고 살핀 마음으로 붙인 이름이 있습니다. 한자말로 하자면 ‘무명화·무명초’는 없어요. 우리가 스스로 이름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기에 “아직 이름을 모르는 풀꽃나무”라고 해야 맞습니다. “아직 이름을 묻지 않았기에 이름을 알 길이 없는 풀꽃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곁에 있는 숱한 사람들한테 저마다 이름이 있어요. “이름없는 사람”이나 “이름모를 사람”은 없어요. 언제나 우리가 스스로 물어볼 노릇입니다. 늘 우리가 몸소 다가설 일입니다. 지켜보거나 들여다보면서 눈길과 눈길이 만나요. 두 눈길이 닿으면서 숨결이 이어요. 숨결이 잇는 사이에 따사롭고 너그럽게 바람이 일어요. 한 발 가까이 다가갑니다. 풀꽃 곁에 쪼그려앉습니다. 나무줄기를 어루만지다가 뺨을 댑니다. 팔을 뻗어서 팔등에 나비를 앉힙니다. 걷다가 멈춰서 풀벌레가 베푸는 노랫가락에 귀를 기울입니다. 서로 가까이 있기에 숨소리를 읽습니다. 서로 멀리 있어도 숨꽃을 헤아립니다. 내가 너한테 이르고, 네가 나한테 이릅니다. 마음을 얹은 소리인 말로 이르고, 사뿐사뿐 즐겁게 내딛는 발걸음으로 오늘 이곳에 이릅니다. 둘이 나란히 이르니 비로소 ‘이름’이 깨어나고 태어나고 피어나고 솟아납니다.



이름없는


“이름이 뭐니?” 하고 물으면

“글쎄, 네가 생각해 봐.”

“이름을 알려줘.” 하고 되물으면

“네가 생각하는 대로 불러.”


“이름없는 꽃이 어디 있니?” 하면

“그러니까 네가 지어 주렴.”

“내가 아무렇게나 지어도 돼?” 하니

“아니, 사랑으로 지어 줘.”


“널 가리키는 이름 있잖아?” 하니

“난 네가 지을 이름이 궁금해.”

“난 이름 잘 못 짓는데.” 하니까

“그냥 마음으로 보고 느껴 봐.”


“그냥 알려주면 안 되니?” 하는 말에

“그저 네 눈빛으로 품으면,

  네가 늘 즐겁게 만나고 싶으면,

  그 생각대로 이름이 피어나.”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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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시를 씁니다 ― 57. 모르는책



  누구나 읽고 쓰는 오늘날입니다. 글을 읽기도 하지만, 마음을 읽기도 합니다. 책을 펴거나 쓰기도 하고,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짓기도 합니다. 서로 눈빛을 읽기도 하고, 가만히 하늘과 바다와 들숲을 읽기도 하지요. 책은 꾸준히 새로 태어나되 막상 책을 곁에 두는 사람은 줄어든다고 하지만, 여러모로 보면 ‘종이꾸러미’도 책이요, 이야기꾸러미와 살림꾸러미와 씨앗꾸러미도 책입니다. 씨앗 한 톨로도 오롯이 책이요, 이슬과 빗물 한 방울도 새삼스레 책이에요. 다른 누가 “이슬이란 무엇인가?” 하고 찾아나서면서 밝힌 꾸러미를 읽을 수 있고, 우리 스스로 “이슬은 언제 어떻게 맺어서 어느 목숨붙이한테 이바지하면서 철마다 새로운가?” 하고 지켜보면서 알아낼 수 있습니다. 날씨알림을 듣고서 날씨를 어림할 수 있고, 우리 스스로 바람결과 구름결과 별빛을 헤아리면서 날씨를 읽고 새겨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숲이 고스란히 책숲(도서관)이라고 느껴요. 들녘이 언제나 들숲(생활박물관)이로구나 싶어요. 바다가 언제나 바다숲(해양박물관)일 테지요. 어느 날 문득 ‘모르는책’이라는 낱말을 손바닥에 얹어 보았습니다. 굳이 한 낱말로 ‘모르는책·눈익은책·익숙한책’처럼 엮으면서 ‘배우는책·때우는책’에 ‘익히는책·첫걸음책’처럼 글결을 맞추어 봅니다. 모르기에 읽고서 배웁니다. 이제 조금 알아보기에 아직 모르는 길을 찾아나섭니다. 모르는 줄 알기에 다시 읽고, 가만히 눈을 틔우면서 새록새록 눈길을 열고 싶어서 끝없이 읽고 돌아봅니다.


ㅍㄹㄴ


모르는책


너는 으레

‘모르는책’은 안 들추고

‘눈익은책’에 손을 뻗네

이렇게 책이 수북한데


나는 줄곧

‘익숙한책’은 지나치고

‘처음인책’을 들여다봐

이처럼 책이 더미인데


너는 자꾸

‘배우는책’은 치워 놓고

‘때우는책’을 옆에 둔다

온삶이 배움날인데


나는 새삼

‘익히는책’을 또 읽는다

‘첫걸음책’은 늘 설레니

다시금 보고서 살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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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씁니다 ― 56. 루



  아직 우리말 가운데 ‘루’로 첫머리를 여는 낱말은 없지 싶습니다. 우리말은 어쩐지 ㄹ로 첫머리를 그리 안 열려고 해요. 그러나 사이나 끝에 깃드는 ‘루’는 꽤 많습니다. “미루나무 한 그루”를, 그루잠을, “머루를 먹는 마루”를, 그늘나루에 버스나루에 기차나루를, 여러 루를 혀에 얹다가, ‘루루’처럼 내는 소리도 우리말로 삼을 만할 텐데 싶습니다. 굳이 서양말 ‘lu-lu’만 생각하기보다, 새나 풀벌레가 내는 소리로 떠올릴 수 있고, 휘파람을 불며 나오는 소리로 여길 수 있습니다. 고루 나누고 두루 펴는 길이란 무엇일까요. ‘루’를 돌려서 ‘로’로 오면, 서로서로 반갑습니다. 이대로도 새롭고 그대로 가도 나쁘지 않은데, 아무래도 마음을 그대로 바라보는 길이 한결 나으리라 느껴요. 하나하나 따진다면, 여는 소리가 있고, 받치는 소리가 있으며, 몸을 이루는 소리가 있다가, 마무르는 소리가 있어요. 우리 몸에 손이며 발이 따로 있고, 머리카락하고 온갖 털에 손발톱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 처음이거나 복판이라고 여길 수 없습니다. 여는 소리로는 드문 ‘루’라 하더라도, 갖가지 소리로 어우러지는 ‘루’이기에, 우리는 하루를 더욱 즐겁게 누리고, 오늘을 새로 가다듬는 마음을 슬기로이 가꿀 만하지 싶습니다. 한 마디에 두 마디를 엮으며 말이 태어나고, 두 마디에 석 마디를 맺으면서 생각이 자랍니다. 무럭무럭 크는 마음이 모루처럼 듬직하고 단단한 길을 이루어 갑니다.


ㅍㄹㄴ



한 그루를 심었더니

꽃피고 씨맺고 퍼져서

석 그루 서른 그루 퍼져

두루두루 푸른 고을


마루에선 뛰지 말라지만

고갯마루는 뛰어넘고

물결마루는 넘실 타고

하늘마루는 깡총 날아


미루기보다는 제꺽 하지

후루룩 먹어도 맛있어

도루묵 아니라 힘껏 하고

호로록 빨고서 방울 뿜어


오늘 하루는 어떤 날?

어제 하루는 무슨 빛?

앞골 들마루에 가면

새까만 머루 한창이야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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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씁니다 ― 55. 텃새와 철새



  새는 언제나 그저 새입니다. 사람들이 서울을 커다랗게 때려짓더라도, 새는 예부터 살던 곳에서 둥지를 틀며 고즈넉이 살림을 꾸리려는 마음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새를 내쫓습니다. 들숲메를 와르르 허물면서 새터(새가 사는 터전)를 없애고, 나무를 죽이고, 뭇짐승과 풀벌레와 벌나비 모두 죽음벼랑으로 내몰아요. 이러는 동안 두 가지 새살림을 나타내는 두 가지 이름인 ‘텃새·철새’를 아주 나쁘거나 하찮게 깎아내리는 미움불씨를 퍼뜨리더군요. 한해살림을 마을이며 들숲메에서 누리는 새이기에 ‘텃새’입니다. ‘텃새’는 텃힘(텃세·-勢)을 안 부려요. 그저 텃빛을 읽고 이으면서 텃살림을 짓기에 텃새입니다. 네 가지 철이 다르게 맞물리는 길을 헤아리면서 철마다 새롭게 살아가기에 텃새예요. ‘철새’는 철없이 굴지 않습니다. 아무렇게나 벼슬자리를 노리면서 옮겨다니지 않습니다. 몇몇 사람이 벼슬·돈·이름을 노리면서 자리를 바꾼다지만, 철새는 온힘·온마음·온빛을 다하여 머나먼 바닷길을 씩씩하고 의젓하게 가로지르는 철눈을 틔웁니다. 더구나 철살림을 짓는 터전에서 새로 둥지를 틀고서 알을 낳아 어른새로 돌본 뒤에는, 새끼새랑 함께 다시 머나먼 바닷길을 다부지고 기운차게 가로지릅니다. 텃새는 한해살림을 읽고 잇는 빛이라면, 철새는 철흐름을 읽고 잇는 빛입니다. 우리는 텃새랑 철새한테서 두 갈래 숨빛·살림빛·사랑빛을 배울 노릇이어야지 싶습니다. 우리는 이제 텃살림과 철살림을 몽땅 잊을 뿐 아니라 망가뜨리면서 새를 얕보는 바보눈을 벗어야지요.



텃새와 철새


참새는 참나무에도 앉고

박새는 박꽃내음도 맡고

소쩍새는 솔숲에도 살고

제비는 저물녘이면 자고


여름이 다가와 오동꽃 밝고

겨울이 깊어 덩굴풀 시들고

봄이 찾아와 나물꽃 향긋이

가을이 가며 감알은 까치밥


마을 곁에 터를 잡는 새는

사람과 한해살림 나누지

바다 건너 철을 읽는 새는

사람과 철들면서 날개꽃


씨앗을 심고 싹틔우는 터에

씨앗이 자라 보금숲을 이뤄

씨앗을 날라 퍼트리는 곳에

새롭게 만나 어울리는 오늘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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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씁니다 ― 54. 돼지



  ‘고기돼지’가 아닌, 우리에 갇힌 돼지가 아닌, 들이며 숲을 가로지르면서 아름다이 노래하는 돼지를 만나거나 사귀면서 함께 하루를 짓는 분은 얼마나 있을까요? 그렇게 믿던 사람이 무시무시한 칼이나 도끼를 들고서 저한테 다가와 마구 휘두르니, 돼지는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내면서 슬프게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거꾸로 생각해 봐요. 누가 사람 목을 무서운 칼이나 도끼로 내리치려고 하면, 사람도 “사람 멱 따는 소리”를 내면서 슬프게 숨을 거둘 테지요. 우리는 “돼지 멱 따는 소리”가 아닌 “돼지가 풀숲에서 고르릉고르릉 기쁘게 노래하는 소리”를 나눌 수 있는 살림길로 달라져야지 싶습니다. 더 많이 먹으려고 더 모질게 좁고 어둡고 답답한 우리에 가두어서 착하고 상냥한 마음을 잃어버리고 마는 고기돼지라는 길은 끝내기로 해요. 느긋하며 아늑할 뿐 아니라 착하고 참하면서 곱게 숲을 같이 누리는 따사로운 길을 나아가야지 싶어요. 사람을 사람답게 보려면 나무를 나무답게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개미를 개미답게 마주할 줄 알아야 합니다. 돼지를 돼지답게 끌어안을 줄 알아야지 싶습니다. 돼지는 노래하고 싶습니다. 돼지는 멱을 따이고 싶지 않습니다. 돼지는 날아오르고 싶습니다. 돼지는 좁은 잿바닥(시멘트바닥)에 갇힌 채 흙도 풀도 나무도 꽃도 없는 곳에서 찌꺼기로 배를 채울 생각이 없습니다. 돼지는 풀잎을 사랑해요. 돼지는 풀벌레하고 동무하면서 놀고 싶어요.



돼지


반지르르한 털은 아침햇살

곧고 긴 등줄기는 여름바다

새털같은 몸은 날렵날렵

싹싹하며 올찬 걸음걸이


혀에 닿으면 바람맛 느껴

코에 스치면 흙맛 느껴

살에 대면 마음멋 느껴

품에 안으면 숨멋 느껴


낯선 길을 의젓이 이끌지

우는 동생 토닥토닥 달래

사나운 물살 헤엄쳐 건너

별빛으로 자고 이슬빛으로 일어나


거짓말 참말 환히 꿰뚫고

즐거운 웃음을 노래하면서

보금자리 정갈히 돌보는데

둥글둥글 모여 누워 꿈을 그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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