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속비우기



  바깥일을 보려고 움직일 적에는 뒷간을 찾아내어 들르기가 까다롭다. 밖에서 일할 적에는 뒷간을 아예 안 가려고 한다. 시골집에서 길을 나서기 앞서 새벽에 속을 말끔히 비우고 다시 비우고 새로 비우고 또 비운다. 집밖에서 하루를 보내고 이틀을 보내노라면 언제나 이른새벽부터 속을 새록새록 비우고 새삼스레 비우고 거듭 비운다. 빈속이기에 멀쩡히 움직인다. 속빈 몸을 건사해야 길에서 안 존다.


  밖일을 보는 동안에는 밥을 비롯해서 물조차 안 마신다. 물조차 몸에 넣으면 무겁고, 몸에 넣은 대로 신나게 비워야 할 뿐 아니라, 뭘 먹고마시면 졸립다. 말짱히 깬 몸으로 모든 일을 마치고서 길손집에 들 즈음에는 먹거나 마셔도 느긋하다. 여러 날 바깥일을 하든, 하루치기로 밖을 다녀오든, 집으로 돌아와서야 천천히 씻고 나서 찬찬히 밥을 차려서 먹는다. 이러며 네 사람이 둘러앉아 오래오래 이야기꽃을 피운다.


  긴긴 시외버스에서 제대로 잘 뜻이라면 세모김밥 한둘쯤 먹으면 된다. 이러면 이내 꿈나라로 간다. 자려고 가볍게 먹는달까. 가볍게 먹고서 긴긴 시외버스에서 포근히 쉰달까. 한나절(너덧 시간)을 달린 시외버스에서 내리면 길고긴 바깥길을 걷고 또 걷고 더 걷고 다시 걷는다. 해를 보며 걷는다. 여름이건 겨울이건 볕바른 쪽으로만 골라서 걷는다. 볕바른 길에 나무가 서면, 나무를 따라가며 함께 볕바라기를 즐기며 걷는다. 들꽃이나 골목나무가 가까우면 슬슬 돌면서 걷는다. 문득 새가 날거나 노래하면 멈춰서 지켜본다. 볕과 나무와 풀꽃과 새는 언제 어디에서나 마음을 북돋우고 몸을 깨우는 길동무이다.


  집밖일을 하려고 다닐 적에는 거의 안 앉거나 아예 안 앉는다. 집이라면 일손을 쉬며 낮잠에 들지만, 집밖에서는 낮잠을 못 누리기에 그냥 가만히 서서 끝까지 지낸다. 드디어 저녁이나 밤에 하루일을 마치면 바닥에 드러누워서 몸을 곧게 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느끼고 움직이면서 풀어낸다. 열칸(10층)이나 스무칸(20층)인 길손집에서 묵더라도 내 등줄기가 땅바닥에 닿아서 깊은 속줄기를 받아들인다고 여긴다. 이러면서 ‘감은눈’으로는 밤하늘 별빛줄기를 그리면서 배로 맞아들인다고 여긴다.


  이미 시외버스에서 엉덩이를 실컷 앉혔고, 시골로 돌아갈 시외버스에서 다시금 싫도록 앉을 테니, 일하는 동안 굳이 앉을 까닭이 없기도 하다. 그렇지만 둘레에서는 “왜 안 먹느냐?”부터 “왜 물도 안 마시느냐?”에 “왜 안 앉느냐?” 같은 말씀을 끝없이 묻거나 여쭌다. 밖에서 제대로 일하려고 안 먹고 안 마시고 안 앉을 뿐인걸.


  고흥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서울로, 이러고서 고흥으로 돌아가는 긴긴 바깥길에 몸마음을 추스른다. 별빛은 조용히 숨은 하늘이지만, 우리 곁에서 늘 반짝인다. 밤이면 해가 저 너머로 가지만, 이윽고 아침에 새롭게 찾아온다. 부릉부릉 멀리 달리는 시외버스이더라도 땅바닥에 바퀴를 대면서 달리는 줄 느낀다. 매캐한 서울이나 큰고장은 콩알보다 작고, 깨알보다 작으며, 아마 코딱지만 하다고 보아야 맞다. 서울이 아무리 크더라도 숲과 들과 메와 바다가 그야말로 드넓다. 푸른별 바깥을 이루는 온별누리는 가없이 넓고 깊다. 우리는 이러한 빛누리를 이 조그마한 씨앗 같은 몸에 맞아들여서 하루를 살아낸다. 해바람비라는 빛을 먹기에 누구나 튼튼하다. 풀꽃나무라는 빛을 등지면서 안 먹으려 하기에 누구나 아프다. 들숲메바다라는 빛을 보금자리와 마을로 삼기에 누구나 즐겁다. 별빛으로 맺는 씨앗인 줄 모르거나 고개돌리니 누구나 괴롭게 죽어간다. 2025.11.24.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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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남과 나



  우리 옛말에 ‘남집살이’가 있다. ‘우리집’이 아닌 ‘남집’에 깃들어서 입에 풀바르는 삶을 나타낸다. 그러나 남집살이를 하든 ‘우리집살이(나집살이)’를 하든 대수롭지 않다. 마음이 대수로운걸. 우리집에 있더라도 마음이 딴데 있으면 언제나 흔들린다. 남집에 있지만 마음이 한결같이 ‘나·너·우리’로 고스란하면 늘 즐겁다.


  우리집 아이도 이웃집 아이도 나란히 아이라는 빛이다. 우리집 아이는 우리가 보금자리에서 돌아보는 숨빛이고, 이웃집 아이는 우리집 아이가 앞으로 마주할 이웃인 숨빛이다. 우리는 우리집 아이랑 이웃집 아이를 나란히 바라볼 수 있는 길을 걸으면서 ‘사랑’이 무엇인지 차분히 배우는 ‘어깨동무’라는 오늘길을 걷는다고 느낀다. 비록 곧잘·자주·자꾸·또 바깥일을 하느라 집을 비우더라도, 언제 어디에서나 한마음·한빛·한넋·한꽃이라는 대목을 고이 품으면 넉넉하다.


  서로 나란히 사람이면서 사랑으로 나아가는 날갯짓인 줄 느끼고 받아들여서 눈을 새롭게 뜰 적에는 ‘나·너’이다. 서로 나란한 줄 등지고 등돌리고 고개돌리고 눈감을 적에는 ‘나·남’이다. 말끝 하나만 다르다. ‘남’은 이윽고 ‘놈’으로 바뀌지. ‘나·너’는 ‘님’으로 닿고. 그러니까 ‘나·너 = 우리 = 님’인 얼개이고, ‘나·남 = 밖 = 놈’인 얼거리이다.


  우리는 ‘남’을 쳐다보아야 할 까닭이 없다. 우리는 ‘나’부터 보면서 ‘너’를 알아볼 노릇이다. 이윽고 ‘우리’를 바라보고 받아안는, 바다 같으면서 바람을 담은 파란하늘과 파란별로 스스로 빛나기에 사람이자 사랑이다. 나하고 너를 바라보고 품을 적에는 푸른길인 숲사람이다. 나랑 너가 아닌, 나하고 남이라는 굴레로 금을 긋고 가르고 따지고 재고 싸우고 겨루고 다투느라 불씨가 번지고 불늪에 불바다에 불바람으로 치닫는 죽음짓이기 일쑤이다.


  누가 왜 말썽을 피우겠는가. 누가 어째서 핑계를 대겠는가. 누가 왜 자꾸 골치를 썩이거나 잘못을 일삼겠는가. ‘나·너 = 우리 = 님’이라는 길을 등돌리면서 잊고 잃으니 사납게 망탕으로 치닫는다. ‘나·남 = 밖 = 놈’이라는 굴레를 스스로 꿰차면서 담벼락을 쌓으니, 얼핏 길미나 돈자루를 쥐는 듯하더라도, 이들부터 스스로 망가지고 무너진다.


  온누리 모든 아이는 “잘못했어.”하고 “고마워.”에다가 “사랑해.”라는 석 마디를 늘 스스럼없이 피워낸다. 이와 달리 온누리 숱한 ‘어른 아닌 꼰대’는 “잘못했다.”도 “고맙다.”도 “사랑한다.”도 거의 입밖으로 안 내거나 못 내는 쳇바퀴에 스스로 사로잡힌다. 아이들이 ‘빛말’ 석 마디를 읊을 수 있는 까닭을 들여다볼 노릇이다. 아이는 스스로 빛인 줄 아는 마음과 몸으로 태어났기에 빛말을 쓴다. 그렇지만 어린이집과 배움터에 길들고 갇히고 시달리면서 빛말을 차츰 잊는다. 오늘날 이 나라뿐 아니라 숱한 나라에서는 빛말을 빛나는 눈망울로 터뜨리는 사람이 갈수록 줄어들 수 있다. 그러나 이제부터 빛말을 빛나는 눈길로 여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날 수 있다.


  어느 길을 바라고 바라보려는지 헤아려야지 싶다. 우리부터, 나부터, 스스로, 몸소, 어떻게 하루길을 열려는 마음인지 살펴야지 싶다. ‘너’가 아닌 ‘남’을 보니까 쉽게 망가진다. ‘나’를 보면서 ‘너’를 마주보니 손을 내밀고 어깨를 겯고 나란히 거닐면서 숲바람을 쐬고 들꽃내음을 속삭이는 오늘을 누린다. 남한테 기대니 길든다. 너한테 맡기니 너나없이 즐겁다. 남한테 바라니 싫고 시시하고 심드렁하다가 시샘에 불씨가 번진다. 너하고 얘기하니 새롭게 잇고 읽고 일구면서 천천히 함께 이루는 말씨부터 심는다. 2025.12.14.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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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빛 / 가난한 책읽기

이제서야 국가보안법 (+ 강제 십지 지문채취)



  나는 ‘조진웅’이란 이름을 2025년 12월에 처음 듣는다. 나는 ‘박나래’가 나온 풀그림을 아예 본 일이 없지만 이름은 얼핏 들었다. 나는 ‘조세호’라는 이름을 스치듯 누가 말할 적에 들은 일은 있되, 어떻게 생겼는지 뭘 하는지 하나도 모른다. 1995년 12월에 싸움터(군대)에 들어갔더니, 나더러 ‘룰라’를 알겠다면서, ‘룰라 노래+춤’을 선보이라고 하더라. 새내기(신병)는 언제나 노리개였으니 그러려니 했지만 ‘룰라’가 뭔지, 사람이름인지 과자이름인지, 아니 뭘 가리키는 이름인지 못 알아들어서 멍하니 섰더니, 나한테 “야, 우리를 즐겁게 ‘룰라’ 좀 부르고 춰 봐!” 하고 읊던 윗내기(선임병)가 갑자기 날아들더니 옆차기로 가슴을 후려갈겨서 데굴데굴 굴렀다. 옆차기를 선보인 윗내기는 “이 ××가 대학물 좀 먹었다고 우리가 우습게 보여? 다 알면서 노래도 안 부르네?” 하면서 주먹을 곁들여 한참 두들겨팼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은 ‘룰라’라는 이름이었으나, 그저 넋놓고 얻어맞으면서 견뎌야 할 뿐이다. 나는 책벌레였을 뿐이고, 보임틀(텔레비전)도 안 보는데, ‘룰라’이건 ‘콜라’이건 어찌 알겠나?


  몇 해 뒤에 나는 윗내기가 되고, 나는 새내기한테 아무것도 안 시키고, 그들(선임병·하사관·소대장·중대장)이 하듯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나도 안 했다. 이러던 어느 날 어느 새내기가 “최뱀(최 병장)은 어떻게 저희를 안 때릴 수 있습니까?” 하고 묻더니, “너무 고마워서 선물 하나 해야겠습니다!” 하면서 ‘에스이에스’가 부른 노래와 춤을 보여준 적 있다. 그러나 나는 ‘룰라’뿐 아니라 ‘에스이에스’가 뭔지, 사람이름인지 과자이름인지 알 턱이 없었다. 멍하니 듣고 보고서 새내기한테 물었다. “○○○ 이병, 그런데 에스이에스가 뭐지? 에스오에스하고 뭐가 달라?”


  룰라도 에스이에스도 몰랐고, 싸움터를 마치고서 밖(사회)으로 돌아온 뒤에 ‘핑클’이 한참 뜬다고 했으나 또 무슨 소리인지, ‘에쵸티’라는 이름은 뭔지 그저 지끈지끈했다. 그렇지만 내가 아는 이름은 있으니 ‘국보법(국가보안법)’이다. 이 나라는 일본에 서슬퍼렇게 찍어누를 때를 지나서,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을 잇는 사슬나라를 잇는 동안 ‘국보법’으로 재갈을 물렸고 주리를 틀었고 몽둥이찜질을 이었으며, 멀쩡한 사람을 마구 죽이고 괴롭히고 짓밟았다.


  1997년 12월에 나라지기로 뽑힌 김대중 씨는 ‘국보법’을 없애겠노라 하다가, 김종필을 곁에 두면서 입씻이를 했다. 이러면서 주민등록증에 난데없이 ‘한자 섞어쓰기’를 밀어붙였고, ‘손그림 찍기(지문채취)’를 없앨 듯 떠들다가, 아주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2002년에 나라지기로 뽑힌 노무현 씨도 똑같다. 나라지기로 뽑히면 ‘국보법 없애기’를 하겠다고 외치더니만, 정작 나라지기 자리에 선 뒤에는 ‘자리지키기(권력유지)’를 하려면 국보법을 없애면 안 되겠더라고 말을 바꾸었다.


  2008년 뒤로는 국보법 얘기가 물밑에서도 자취를 감추었다. 이래저래 말밥은 있되, ‘국보법이 안 사라졌’어도 이 나라가 사람들한테 함부로 재갈을 물리거나 고삐를 채우는 일은 사라지는 듯했다. 오히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을 잇는 끄나풀’이 아닌 ‘김대중·노무현을 잇는 끄나풀’ 쪽에서 재갈을 물리고 고삐를 채우듯 사람들 입을 틀어막는 바보짓이 일어나기 일쑤였다. 이른바 ‘팬덤정치·무당정치’가 튀어나왔다. 이러던 2025년 12월 7일 즈음,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 발의’를 슬그머니 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왜 난데없이 2025년에? 여태 뭘 하다가 이제 와서?


  몹쓸 굴레는 걷어치워야 맞다. 그렇다면 국보법은 2024년에는 안 몹쓸 굴레였나? 2022년이나 2020년에는? 2019년이나 2018년에는? 2017년이나 2016년에는? 2015년이나 2014년에는?


  오늘날 ‘민주당’은 민주하고 멀고, ‘국민의힘’은 국민을 등지고, ‘진보당’은 진보하고 담쌓고, ‘녹색당’은 푸른빛이 안 보인다고 느낀다. ‘조국혁신당’은 서울대 담벼락으로 입만 산 무리라고 느낀다. 뭘 없애야 할까? 열여덟 살 푸름이는 주민등록증을 받을 적에 ‘열손가락 손그림 찍기(십지 지문 채취)’를 해야 하는 몹쓸굴레가 아직 버젓한데, 이놈도 저놈도 그놈도 요놈도 이 대목을 안 쳐다본다. 그들 눈에는 어린이와 푸름이가 아예 안 보이는구나 싶다. ‘열손가락 손그림 찍기’는 ‘사납이(범죄자)’한테만 하는 일인데, 일본은 한겨레(재일조선인)한테 이 짓을 꼬박꼬박 했다. ‘재일조선인 강제 지문날인 폐지’를 놓고서 참으로 오래 싸워야 했고 드디어 1991년에 일본에서 걷어치운 얼뜬짓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다룬 글은 참 드물고, 이 이야기를 아는 이웃도 참 적다. 더구나 일본조차 서른 해 앞서 내다버린 ‘강제 십지 지문채취’를 왜 우리는 2025년에도 멀쩡히(?) 해야 하는가?


  그런데 우리는 멀쩡한 사람 손그림을 마구마구 받는다. 벼슬아치(국회의원·군의원·시의원) 따위는 뭘 하는가? 무엇부터 없애야겠는가? 그리고 국보법을 이제서야 없애겠노라 할 적에, 왜 뒤에 숨듯 몰래 하는가? 떳떳이 먼저 밝혀서 그동안 어느 대목이 어떻게 말썽이었는지 외쳐야 하지 않는가?


  ‘밀양성폭행사건’은 아직 안 끝난 생채기이다. ‘밀양성폭행사건 끄나풀’은 여태 뉘우친 바도, 값을 치른 바도 없기에, 앞으로도 그들은 톡톡히 값을 치르게 마련이다. 조진웅 씨는 지난일을 놓고서 어떻게 값을 치렀는지 모를 노릇이지만, 이녁 스스로 먼저 잘못과 말썽을 떳떳이 밝히거나 뉘우치면서 일을 했는지, 슬그머니 물타기처럼 감추고 가리고 숨기면서 허울만 높였는지 따져야 하지 않을까? ‘사회복귀’가 옳다면 ‘조두순’도 나란히 ‘사회복귀’를 해야겠지. ‘박근혜·이명박’도 사슬살이를 했으니 ‘사회복귀’를 나란히 봐줘야겠지. ‘쟤네’는 다 봐줄 수 없으면서 ‘이쪽(아군)’은 다 봐줘야 한다고 읊는다면, 그냥 창피한 노릇이다.


  ‘주민등록증 신규발급 청소년 십지 지문 채취 폐지’를 함께 말하지 못 하는 ‘국보법 폐지’라면 얼마나 텅텅 속빈 깡통인지 민낯이 훅 드러나는 2025년 12월이다. 그러고 보니, 12월은 ‘무안공항 대참사’가 일어난 달인데, 여태 어떤 특검도 국정조사도 없을 뿐 아니라, ‘무안공함 대참사 책임자 처벌’을 외치는 ‘민주인사·진보인사’나 ‘작가회의 선언’을 본 바도 들은 바도 없다. “현지 누나!”를 속삭인 ‘김남국’ 씨는 쇠고랑을 찰 수 있을까? 깜깜한 섣달 하루이다. 2025.12.8.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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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빨리읽기



  아이하고 살아가는 길이란 무엇일까 하고 돌아본다. 아이랑 눈맞추면서 이야기를 길어올리는 하루에, 아이 발걸음에 나란히 걷고 뛰고 달리는 오늘에, 아이 목소리에 귀기울이고서 느긋느긋 말하는 사랑이 어울리는 노래이지 싶다. 이러면서 늘 아이한테서 배우고 활짝 웃는 살림살이일 테고. 이러다가 이따금 아이를 푸른빛으로 가르치면서 흐뭇이 춤추는 살림자락이겠지.


  아침나절에 부산 마을책집 〈책과아이들〉에 깃들어서 그림책과 어린이책을 천천히 읽고 누리고 즐긴다. 가까이에 아이랑 나란히 앉은 어느 어머니가 그림책을 몹시 빨리 읽는다. 아이가 얼마나 알아들으려나? 글밥이 많은 그림책이라서 빨리읽기를 하시는 듯하지만, 아이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서 어머니 말씨를 따라가려고 하는 듯한데, 그렇더라도 말이 너무 빠르다.


  나는 어떠했는지 돌아본다. 나는 예전에 곁님한테서 꾸지람을 들었다. 왜 이렇게 말이 빠르냐고, 좀 천천히 뜸도 들이고, 마음을 그득 담아서 말하라 했지. 나는 어려서 말이 느리고 더듬댄다고 놀리는 소리는 숱하게 들었는데, 나는 말이 빠르다는 소리를 들은 바 없는데, 이런 나조차 아이곁에서는 말이 빠를 수 있는 줄 몰랐다. 곁님 꾸지람을 듣고서 말씨를 새삼스레 가다듬었다. 아이 말씨를 더 차분히 귀담아듣는 길을 헤아렸다.


  이제는 아이하고 말할 적에 더 느긋이, 때로는 거듭거듭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느긋거듭말씨’를 몸에 붙이며 산다. 느긋거듭말씨로 스스로 가꾸며 돌아보면, 느긋이 말을 하기에 마음을 새록새록 가다듬는다. 거듭해서 말하는 사이에 생각씨앗을 북돋운다. 빠른말씨는 으레 나너우리 모두한테 강파르다. 느긋말씨는 언제나 서로서로 아늑하다. 거듭말씨는 잔소리하고 다르기에 곰곰이 익히는 맡거름이다. 찬찬말씨는 잔바람과 잔물결처럼 가벼이 흐르는 노랫가락 같기에 한결 아늑히 누리는 하루로 잇는다.


  빨리읽기는 안 나쁘되, 안 즐겁게 마런이다. 줄거리를 빨리 알아채서 뭐가 나을까? ‘셈겨룸(시험문제)’을 멈추어야 ‘생각“이 샘물로 솟아나고 멧새하고 소근소근 속삭이는 가락을 받아들인다고 본다. ‘느릿읽기’ 아닌 ‘느긋읽기’이기에, “글에 담은 마음”과 “마음에 담은 삶”과 “삶에 담은 사랑”으로 피어난다고 본다. 마음과 삶과 사랑을 읽고서 느끼고 누리는 동안에 기쁘게 생각씨를 심으려는 책을 한 자락을 쥐면 넉넉하다고 본다.


  오늘 장만한 책을 오늘부터 읽는다. 차분히 되읽고 가만히 곱읽어서 언제나 눈뜨는 오늘 하루를 살아내려고 한다. 종이를 쥔 손을 놓고서 겨울바람을 쥔다. 붓을 잡은 손을 풀고서 겨울볕을 손바닥에 놓는다. 우리집으로 빨리 돌아가야 할 까닭이 없다. 시외버스가 달리는 길에 조용히 눈을 붙인다. 한참 달려도 한참 남으니, 느긋이 자고 일어나도 느긋이 읽고 쓸 만하다. 순천에서 시외버스를 내리고서 고흥으로 들어서는 시외버스를 갈아탄다. 또 읽고 쓴다. 부산서 순천 오는 길에 잘 잤더니 개운하다. 고흥읍에서 시외버스를 내리자마자 시골버스로 갈아탄다. 마지막으로 옆자락 황산마을에서 내린 뒤에 논두렁을 걷는다.


  해가 멧자락 너머로 갔다. 저기 큰아이가 배웅 오는 모습이 보인다. 누렇게 바뀌는 들숲하늘을 바라보며 마주걷는다. 조금씩 서로 가깝다. 일부러 더 천천히 걷는다. 마주걷는 큰아이를 기쁘게 바라본다. 우리는 짐을 나눠 들고서 집으로 걸어간다. 논두렁에도 겨울들에도 우리만 호젓이 걷는다. 물까치가 이슥한 하늘을 가르며 난다. “물까치는 이제서야 집으로 가네요.” 큰아이 말을 들으며 웃는다. 우리는 두런두런 말을 섞으면서 나란히 걷는다. 2025.12.6.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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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헌책 헌집 헌옷



  하루가 아닌 한 발짝만 들여도 이미 헌집이다. 아무리 값비싸다고 하더라도, 모든 집은 헌집이다. 그러나 우리는 “남이 짓거나 살던 헌집”을 얻어서 옮겨살 적에 ‘새집’에 간다고 말한다. 우리 발걸음이 닿고 우리 손길로 가꾸는 동안 ‘우리집’으로 바뀌기에, 모든 헌집을 새집으로 돌려놓을 뿐 아니라, 숨결을 새롭게 입히는 살림길이다.


  옷가게에 갓 놓여도 이미 헌옷이다. “손수 짓건 남이 짓건 그냥 헌옷”"이다. 모든 옷은 헌옷이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보며 마음에 맞아서 몸에 걸치는 때에 어느새 ‘새옷’으로 거듭난다. 누가 입다가 물려주거나 팔기에 헌옷이지 않다. 우리는 ‘우리옷’을 누린다. 손길과 살결이 닿고, 눈길을 모을 뿐 아니라, 손수 빨래하고 해바람에 말리고, 정갈히 개어 건사하기에 새록새록 피어나는 살림살이라 할 테지.


  책숲(도서관)이나 책마루(서재)에 오늘 들여도 헌책이다. “모든 책은 헌책”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스스로 읽고 배우고 생각하고 돌보고 나누고 깨달으며 철드는 나날에 길동무로 삼으니 ‘새책’이다. 손때를 거칠게 타느라 낡거나 닳는 부스러기(지식·정보)가 넘치는 책이 있으나, 손빛을 가만히 입기에 날갯짓으로 꿈과 사랑을 담고서 너울너울 춤사위인 책이 있다. 몸소 품을 들이고 손수 온넋을 기울여서 한 쪽씩 펼치는 책이 한 자락씩 늘어나니, 모든 책이 온책과 즈믄책과 푸른책과 아름책으로 훨훨 날아오른다.


  헌집·헌옷·헌책은 어떤 손과 눈과 발과 마음과 몸이 딯으며 낡고 부스러질까? 새집·새옷·새책은 어떤 손과 눈과 발과 마음과 몸을 만나면서 나부끼고 부드러울까? 언제나 같은 집과 옷과 책이되, 언제나 우리 숨결과 나란히 나아가는 살림꽃이라고 느낀다.


  숲말을 헤아리기에 숲집에 깃들어 숲밥을 먹고 숲글을 쓰고는 숲이웃하고 숲노래를 나눈다. 숲길을 걸으니 숲마음으로 눈뜨고 숲사랑을 그리면서 숲사람으로서 숲책을 짓고 읽는다. 넌 숲책을 사랑하니? 난 숲책을 사랑해. 넌 푸른책을 곁에 놓니? 난 푸른책을 곁에 놓지. 넌 바람을 담은 파란책을 바라니? 난 파란책을 바라면서 오늘도 쓰고 읽고 걷고 나르고 돌아보고 쉬고 잠들고 일어나서 집안일을 해.


  나무는 ‘헌나무’도 ‘새나무’도 아닌 그저 나무이다. 풀과 꽃도 그냥 풀과 꽃이다. ‘헌풀’과 ‘새풀’이 없고, ‘헌꽃’과 ‘새꽃’이 없다. 노래하며 나는 새가 ‘헌새’이지 않다. 더구나 ‘새새’이지 않다. 헌숲과 새숲이 없다. 헌마을과 새마을이 없다. 헌나라와 새나라가 없고, 헌사람과 새사람이 없다. 헌돈과 새돈이 없고, 헌별과 새별이 없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기에 누구나 스스로 사랑으로 싹튼다. 사근사근 속삭이는 말은 모두 달콤하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은 모두 반갑다. 겨울에도 해는 포근포근 고맙다. 여름에도 밤은 노래잔치로 즐겁다. 첫겨울 눈밭을 이루어도 시골과 골목에는 쑥부쟁이가 파란꽃을 곱다시 올린다. 한여름 뙤약볕이 내리쬐어도 들숲과 마을에는 나뭇잎과 풀잎이 짙푸르기만 하다.


  나는 사랑집에서 살며 사랑옷을 두른다. 사랑책을 곁에 두며 사랑노래를 여민다. 사랑숲에 사랑새가 찾아오고, 사랑나비와 사랑벌레는 이제 겨울잠으로 간다. 나는 너한테 사랑글을 띄우고, 사랑손을 내밀면서 사랑눈으로 마주보려고 한다. 우리는 사랑씨를 맺는 사랑동무요 사랑님이다. 2025.12.5.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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