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2025.10.2. 지며리
배움불굿(입시지옥) 한복판이던 열일곱 살(고1) 1991년에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첫 낱말부터 하나씩 읽고 새기면서 ‘수능 및 본고사 언어영역’을 익히다가 ‘지며리’라는 낱말을 만났다. 우리말꽃이 우리말 아닌 일본말과 중국말과 영어로 뒤범벅이라서 골아팠는데, ㅈ이 끝나갈 즈음 만난 ‘지며리’를 내내 새기고 되새기고 곱새기며 견뎠다. “그래, 고등학교 세 해쯤 지며리 싸워 주지.” 하고 혼잣말을 새겼다.
1995년에 싸움터(군대)에 들어가고서 “그래, 이 불바다에서 지며리 참으며 살아남아 주지.” 하고 혼잣말을 했다. 얻어맞고 짓밟히고 추레질(성폭력)이 춤추어도, 싸움터에서 웃고 하늘바라기를 하면서 살아남아서 밖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 겪고 부대끼는 온갖 가싯길에서도 나를 버틴 한 마디는 ‘지며리’이다.
워낙 고삭부리로 태어났기에 지며리 걷는다. 이제 고삭부리라는 애벌레몸은 벗었되, 둘레에 있는 모든 고삭부리 이웃과 동무를 헤아리면서 느긋이 찬찬히 웃으며, 그러니까 지며리 어깨동무로 나아가자고 다진다. 나는 빨리 안 걷는다. 아니, 나는 내 걸음으로 나아간다. 나는 어서어서 안 달린다. 아니, 나는 내 다리를 차분히 느끼면서 두바퀴 발판을 굴린다.
나는 ‘굴레’라는 우리말을 쓴다. 어릴적 엄마시골에서 소가 쓴 굴레를 보았고, 소죽 끓이기를 도왔고, 소등에 올라타며 “미안해. 미안해. 너는 들일로도 힘든데 나까지 태워서 얼마나 힘들까.” 하고 울었다. 시골언니는 내가 다릿심도 모자라고 늘 앓아누우니 소등에 태우며 같이 놀았다.
어느 이웃님이 ‘맨박스’란 영어를 쓰기에 뭔 소리인가 했더니, 아마 우리말 ‘굴레’를 가리키겠지. 요새 누가 소나 굴레를 보겠는가. ‘박스’야 날마다 볼 테지만. 굴레는 소한테뿐 아니라 사람도 스스로 뒤집어쓰는데. 꾸러미(박스)는 기쁨보따리(선물상자)처럼 열 수 있다만, 굴레는 그야말로 가두며 옭매는 그물인데.
나는 “지며리 살림”을 그린다. 얼른 달리거나 껑충 뛸 마음조차 없다. 뭇이웃과 뭇풀과 뭇나무와 뭇새와 뭇나비와 나란히 노래하며 걷다가 날갯짓할 마음이다. 아마 새해 2026년에도 지며리 살림을 지을 이웃님하고 천천히 하루하루 걸을 테지. 이듬해 2027년에도, 앞으로 2030년이나 2050년이나 2100년에도 지며리 하루길을 가다듬을 테지.
놀라운 길이 아닌 차분히 돌보는 보금자리를 그린다. 누구나 마당에 나무를 심으면서 하루를 열고 닫기를 빈다. 같이가는 길을 그린다. 함께서는 골목을 바라본다. 나란나란 뭉게구름으로 피어올라서 빗방울을 촉촉히 뿌리는 살림을 내다본다. 해는 지며리 뜨고 진다. 비바람은 지며리 찾아든다. 별빛은 밤마다 지며리 드리우면서 가만히 밝힌다. 새는 지며리 사람 곁으로 다가와서 노래한다. 너는 지며리 나를 마주보고, 나는 지며리 너를 마주하면서 싱긋싱긋 웃는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