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소풍 - 아무 때나 가볍게 온(on) 시리즈 4
김서울 지음 / 마티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6.6.9.

읽었습니다 345



  저는 책집에는 가되, ‘도서관·박물관’에는 안 갑니다. 두 곳에 간들 볼거리나 누릴거리가 없다고 느낍니다. 책으로 여미는 숲이 되어야 할 곳은 새로 쏟아진다는 책을 받으려고 아름책을 꾸준히 버려야 하는 얼개입니다. 살림살이를 건사하여 숲이 되어야 할 곳은 더 돋보이거나 커다랗거나 대단하거나 놀랍다는 우두머리나 벼슬아치가 거머쥐던 몇 가지에서 그치기 일쑤입니다. 이따금 ‘생활사박물관’처럼 이름을 붙이는 자리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어제살림’과 ‘어제살림’과 ‘모레살림’을 잇는 길이 그곳에 있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 “살아가는 사람”이란 “살림하는 사람”입니다. “살림하는 사람”이란 “바로 오늘 이곳에 있는 사람”입니다. 다 다르게 하루를 맞이해서 저마다 짓는 바탕을 담아내야 할 ‘도서관·박물관’이지만, 두 곳은 일본이 붙인 이름과 얼거리를 아직도 못 떨치거나 못 느끼면서 그냥그냥 이어요.


  《박물관 소풍》을 읽고서 얌전히 제자리에 놓았습니다. 우리는 ‘국립·시립·도립·군립’이 아닌 ‘우리’ 책숲과 살림숲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살림숲에 ‘놀러갈’ 수 있기를 바란다면, ‘놀러가기’란 이름을 쓸 노릇입니다. 시골내기도 가볍게 드나들 만하기를 바란다면, ‘나들이·마실’이란 이름을 쓸 노릇입니다. 아니면 ‘기웃기웃’이나 ‘서성서성’이나 ‘구경’이나 ‘들여다보기’나 ‘찾아가기’를 하면 되겠지요. 그곳에서 그분들이 쓰는 말씨는 예나 이제나 하나도 안 바뀌었습니다. 예전에는 한자를 드러내어 일본한자말로 적었으면, 요새는 무늬만 한글에 영어를 뒤섞을 뿐이에요. 겉만 살짝 바꾼들 알맹이가 바뀌지 않아요. 앞치마와 밥그릇과 부엌칼을 놓지 못 하는 곳이라면 살림숲과 멉니다. 포대기나 처네를 못 놓는다면, 천기저귀와 종이기저귀를 나란히 놓지 못 하는 곳이라면, 머리끈이나 머리띠나 작은종이 하나를 살피는 손길이 없는 곳이라면, ‘박물관’일 수는 있어도 ‘살림숲’하고는 멀기에, 살림하는 이웃과 나들이를 할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ㅍㄹㄴ


《박물관 소풍》(김서울, 마티, 2023.7.20.)


박물관을 언제, 왜 가야 하는지 원칙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지금과 비슷한 형태의 박물관이 설립된 초기에는 ‘관람객’이라는 범위에 보이지 않는 틀이 있었다. 만인에게 공개되어 있었으나 아무나 가던 곳이 아니었고, 전시 및 관람 목적의 방점이 ‘교육’에 찍혀 있었다 … 요즘 박물관은 많이 변했다. 동네 언저리에 들어서기도 하고, 유물 안내문의 어조가 좀더 편안하게 바뀌기도 했다. 관람객이 박물관을 즐기는 방법은 훨씬 극적으로 바뀌었다. 굿즈를 구매하기 위해, 좋아하는 사람이 멋지다고 인증한 유물을 직접 … 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석에 반하여 수전 손택 더 텍스트
수전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윌북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6.6.6.

까칠읽기 121


《해석에 반하여》

 수전 손택

 홍한별 옮김

 윌북

 2025.12.31.



  1966해에 나온 《해석에 반하여》를 2026해에 새로 냈다고 한다. 1966해에 나온 책이라면 1950∼60해무렵을 가로지르던 나날에 바라본 바를 풀어낸 글일 테지. 그때 “미국에서 나고자란 사람”은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배웠을까 하고 돌아본다. 나는 미국이라는 땅을 밟은 일이 없되, 둘레에는 미국을 다녀온 사람이 많다. 이웃 가운데 미국으로 건너가서 지내는 분도 꽤 있다. ‘사잇땅(기회의 땅)’이라고도 일컫는 미국이고, 옆나라 일본은 그곳을 ‘쌀나라(米國)’라는 한자로 가리킨다. 하늬(유럽)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텃사람을 내몰고 죽여서 ‘홀로서기(독립)’를 했다고 여기는 나라요, 검은사람을 종으로 부려서 솜밭(목화농장)에 묶어두고 괴롭힌 나라이다. 검은사람을 ‘밭일꾼(농노)’으로 부리느냐 ‘뚝딱일꾼(공장노동자)’으로 부리느냐를 놓고 저희끼리 피터지개 싸운 나라이기도 하다.


  그나라에는 들길(민주)하고 멀지만 ‘들길’이라는 이름을 내거는 무리가 있고, 함께(공화)하고 멀지만 ‘함께’라는 이름을 내거는 무리가 있다. 파랑이와 빨강이가 악착같이 다투면서 총칼을 무시무시하게 만들어내기도 하는 나라이다. 어느 무리이건 총칼을 무척 좋아한다. 이러한 나라에서 1966해에 나온 《해석에 반하여》는 무슨 풀이를 거스른다는 목소리일까. 목소리로는 모든 옳거나 좋거나 바르다고 여기는 말은 다 외칠 수 있되, 막상 그곳에 그냥그냥 눌러앉아서 모든 길미를 누리는 사람들은 무엇을 풀이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가.


  그무렵 우리나라는 미국이 거저로 내준 ‘흰가루 셋’으로 벼슬꾼과 돈꾼이 엄청나게 길미를 챙겨서 온나라를 휘어잡았다. 총칼을 앞세운 우두머리는 으레 ‘경제개발·경제성장’ 같은 허울스런 말을 일삼았는데, 그들끼리 길미를 돌라먹으면서 사람들한테는 ‘떡고물’도 아닌 검부러기를 조금 흩뿌렸을 뿐이다. 요즈음(2026해)에는 그루(주식)라는 검부러기를 조금 흩뿌리면서 사람들을 홀려서 멍청이로 길들인다.


  우리나라에서 가시내가 고개를 들고서 배움터를 느긋이 다닐 수 있던 때는 1980해무렵이다. 1970해무렵까지는 숱한 가시내가 어린배움터에 발을 디디기도 힘들었다. 으레 서울이나 서울곁 뚝딱터(공장)에 잡아먹히면서 값싼 일삯으로 부려먹히는 굴레였고, ‘식모·차장’ 같은 자리에서 말 그대초 찬밥 노릇이었다.


  내가 미국에서 나고자라면서 1966해에 《Against Interpretation》를 영어로 읽었다면 무엇을 느꼈을까 하고 어림해 본다. 그무렵 미국은 우리나라하고 사뭇 달랐지만, 그때나 이제나 미국에서 가난한 사람은 그저 가난하고, 글을 모르는 사람은 그저 글을 모른다. “SF영화에는 사회 비판이란 것이 없다. 암시적인 형태로조차 들어가지 않는다(322쪽)” 같은 대목을 읽다가 이제 이 책은 덮기로 한다. 말이 되지 않는 말이 너무 길다. 미국사람이라면 ‘옮김말씨(번역체)’가 없는 ‘그냥 말’로 이 책을 읽을 텐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말’이 아닌 ‘옮김말씨(번역체)’를 ‘다시 우리말로 풀어서 헤아려’야 한다.


  삶터(사회)를 그대로 보여주는 글과 그림도 ‘목소리’이다. 목소리란 “마음을 나누려는 소리인 말”이기도 할 뿐 아니라, “민낯(현실)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기에 저절로 ‘말(표현) + 타박(비판)’이게 마련이다. 익살(코미디·유머·개그)에 ‘사회비판’이 없다는 말을 대놓고 할 사람이 있을까? 들일을 하는 사람이 부르는 들노래(노동요)에 말과 마음과 삶이 녹아나지 않는다고 읊을 사람이 있을까?


  우리말 ‘풀다’를 제대로 읽는 사람을 거의 못 봤다. 아니, 책을 읽거나 보임꽃(영화)을 쳐다보거나 이야기꽃(강의)을 펴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풀다’를 제대로 읽는 사람이 아예 없고, 집일을 하거나 들일을 하거나, 들숲메바다를 품는 사람은 으레 누구나 다 안다고 느낀다.


  일본스런 한자말로 한다면 ‘해석·해설·해제·해명·해결·해소·해방·해독·해득·해체·해부……’를 줄줄이 읊을 텐데, 우리말로는 나란히 ‘풀다’라는 쉽고 수수한 낱말을 바탕으로 하나씩 갈래를 짓는다. ‘풀다 = 풀 + 다’이다. ‘풀다’를 알려면 ‘풀’을 알아야 한다. 풀을 모르는 채 ‘풀다’를 알 수 없다. ‘풀다·풀’을 읽어내어 차분히 알아간다면 이윽고 ‘품다·품’을 읽어내면서 알아본다. 이러면서 ‘푸르다·풀빛’과 ‘푸지다·푸근하다·푹·폭·포근·포동’ 같은 낱말이 모두 한타래로 잇는 줄 헤아린다.


  이야기를 풀든, 책과 줄거리를 풀이하든, 삶과 삶터를 풀어내든, 먼저 풀빛을 품는 보금자리와 살림살이일 노릇이다. 푸른숲과 등진 곳에서 붓끝만 놀릴 적에는 어떠한 길도 못 풀거나 안 푼다고 느낀다. 왜 이 별을 ‘푸른별’이라 하겠는가? 왜 이 별은 푸른별이면서 ‘파란별’일까? 모두 하나인 수수께끼부터 풀지 않고서야, 허울스러운 이름을 줄줄이 읊거나 늘어놓는들, 어느 길도 못 풀게 마련이다.


ㅍㄹㄴ


엄밀한 의미에서 의식의 내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66쪽)


말할 필요도 없지만 문학은 둘 다 하지 못한다. (105쪽)


사실상 애도할 이유가 없다. 죽은 것은 먼 친척이기 때문이다. (196쪽)


한때는 기이하고 어리석은(어린아이 같고 무법적이고 음탕한) 존재였던 ‘흑인’이 현재 미국 연극계에서 대표적인 선의 가면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게다가 흑인은 외형적으로 명확하기 때문에 신체적 특성이 모호한 ‘유대인’을 넘어서는 유용성이 있다 … 흑인은 언제나 ‘흑인’처럼 보일 것이다. 진정한 흑인으로 여겨지지 않는 한. 또한 고통과 핍박의 희생자라는 면에서 흑인은 미국의 다른 어떤 경쟁자보다 앞서 있다. 단 몇 년 사이에, 유대인을 전형적 인물로 삼던 구식 진보주의가 흑인을 영웅으로 삼는 새로운 전투적 태도에 도전받게 됐다. 그러나 이런 전투적 태도와 흑인 영웅을 부추기는 성향이 진보주의 사상을 조롱하더라도 그 감수성 가운데 한 가지는 계속 이어간다. 여전히 희생자들 가운데서 미덕의 이미지를 선택한다는 점이다. (222쪽)


SF영화에는 사회 비판이란 것이 없다. 암시적인 형태로조차 들어가지 않는다. (322쪽)


#AgainstInterpretation #SusanSontag


+


《해석에 반하여》(수전 손택/홍한별 옮김, 윌북, 2025)


이 책에 실린 비평과 리뷰는 내가 1962년에서 1965년 사이에 쓴 글들이다

→ 이 책에 쓴 글은 1962년에서 1965년 사이에 썼다

→ 1962년에서 1965년 사이에 쓴 글을 이 책에 싣는다

13쪽


페이퍼백으로 재출간되는 지금 시점에는 더욱 그렇게 보인다

→ 작은책으로 다시내는 오늘에는 더욱 그렇게 보인다

→ 손바닥책으로 새로찍는 이즈음 더욱 그렇게 보인다

→ 주머니책으로 더찍는 요즈음 더욱 그렇게 보인다

13쪽


모든 예술은 정교한 트롱프뢰유trompe l’oeil(실물처럼 정밀하게 묘사해서 착시 효과를 일으키는 그림)이며

→ 모든 그림은 잘 빚은 눈속임이며

→ 모든 꽃은 꼼꼼한 시늉그림이며

→ 모든 멋은 감쪽같은 흉내그림이며

→ 모든 아름꽃은 아주 능청이며

21쪽


내용 자체가 달라졌거나 내용이 이제는 덜 구상적이고 덜 사실적일 수도 있다

→ 줄거리가 달라지거나 이제는 덜 뚜렷하고 덜 고스란할 수도 있다

→ 속살이 달라지거나 이제는 환하지 않고 삶과 멀 수도 있다

22쪽


이런 식으로 텍스트를 변환하는 흥미로운 프로젝트는 어떤 상황에서 시작되었을까

→ 이렇게 글을 바꾸는 재미난 일은 언제부터 했을까

→ 언제부터 이처럼 재미나게 바꾸는 글을 썼을까

24쪽


우리 시대의 해석은 그것보다 더 복잡하다

→ 오늘날은 이보다 더 얼기설기 풀이한다

→ 우리는 이보다 더 여러 가지로 읽는다

→ 요새는 이보다 더 온갖길로 헤아린다

25쪽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려는 범속한 태도로 나타난다

→ 흔히 그대로 두려고 안 한다

→ 으레 내버려두려고 안 한다

27쪽


최소 세 부대의 비평가들에게 대대적으로 파헤쳐졌다

→ 적어도 석 자루쯤 되는 분들이 잔뜩 따졌다

→ 얼추 석 자루쯤 되는 분들이 실컷 파헤쳤다

27쪽


스타일이라는 개념은 구체적으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다

→ 멋이란, 곰곰이 보면 지나온 날을 뜻한다고들 말할 수 있다

→ 맵시란, 아무래도 살아온 길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41쪽


엄밀한 의미에서 의식의 내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 곰곰이 보면 넋은 말로 그릴 수 없다

→ 가만히 보면 마음은 말로 못 그린다

66쪽


우리는 왜 작가의 일기를 읽을까? 작품에 대해 알게 해주니까?

→ 우리는 왜 글쓴이 하루를 읽을까? 글을 잘 알 수 있으니까?

→ 우리는 왜 글님 하루글을 읽을까? 속내를 짚을 수 있으니까?

→ 우리는 왜 글바치 삶글을 읽을까? 줄거리를 알 수 있으니까?

73쪽


일기에 두 페르소나가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하루글에 두 사람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 삶적이에 두 마음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77쪽


현대에 성애적 애착은 본질적으로 허구라고 믿게 되면서 또 한편으로는

→ 이제 사랑놀이는 다들 허울이라고 믿으면서 또 한켠으로는

→ 이즈막에 몸섞기는 무릇 빈껍데기라고 믿으면서 한켠으로는

79쪽


토디의 번역이 부실하다는 것을 말해두어야 할 것 같다

→ 토디가 엉성히 옮겼다고 말해두겠다

→ 토디는 어설피 옮겼다고 말해두겠다

→ 토디는 제대로 못 옮겼다고 말해두겠다

95쪽


레리스가 《성년》에서 답한 질문은 지성적인 것이 아니다

→ 레리스가 《어른》에서 들려준 말은 그리 밝지 않다

→ 레리스는 《어른》에서 썩 똑똑히 얘기하지 못한다

103쪽


우리 시대의 진지한 사유는 대개 집을 잃은 듯한 느낌에 시달린다

→ 오늘날은 깊이 돌아볼수록 집을 잃은 듯 시달린다

→ 요새는 차분히 살필수록 집을 잃은 듯 시달린다

→ 이제는 가만가만 짚을수록 집을 잃은 듯 시달린다

109쪽


역사주의적 접근은 분명 가치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 차근차근 다가서야 제대로 깨어난다

→ 하나씩 짚어가야 뜻있게 눈뜬다

→ 길눈으로 보아야 뜻깊게 알아본다

140쪽


이 책의 방대함과 다급한 호흡은 철학적 딜레마 탓이다

→ 이 책은 엇갈린 눈 탓에 펑퍼짐하고 숨가쁘다

→ 이 책은 갈팡질팡 보느라 늘어지고 덤빈다

144쪽


이오네스코의 성취는 무엇일까

→ 이오네스코는 뭘 이뤘을까

→ 이오네스코는 뭘 했을까

174쪽


원래 이오네스코의 초기 창작 동력은 상투적 일상에서 시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 이오네스코는 처음에 수수한 삶에서 노래를 찾았다

→ 이오네스코는 워낙 작은삶에서 노래를 캐냈다

→ 이오네스코는 모름지기 모든 곳에서 노래를 보았다

→ 이오네스코는 언제 어디에서나 노래를 느꼈다

→ 이오네스코는 늘 노래를 만났다

175쪽


이오네스코가 클리셰를 발견했다는 것은 언어를 의사소통이나 자기표현의 도구로 보기를 거부하고, 대체 가능한 개인이 (일종의 무아지경 상태에서) 분비한 진기한 물질처럼 간주했다는 것이다

→ 이오네스코가 타령을 찾았다면 말을 마음나눔이나 마음그림으로 여기지 않고, 새로운 내가 (이른바 고요히) 내놓는 놀라운 빛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176쪽


여기에서 브레송 인류학의 세 가지 기본 공리를 얻을 수 있다

→ 이 글에서 브레송이 편 사람길 세 가지를 볼 수 있다

→ 이 글로 브레송이 꾀한 사람길 셋을 엿볼 수 있다

274쪽


갑자기 누군가가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 갑자기 누가 얄궂게 군다

→ 갑자기 누가 엉뚱히 군다

→ 갑자기 누가 막나간다

305쪽


희망적 사고가 무척 많이 담겨 있는데

→ 앞길을 밝게 여기는데

→ 앞날을 푸르게 보는데

→ 무척 밝게 여기는데

→ 매우 환하게 보는데

→ 꿈에 부푸는데

317쪽


카우프만의 책이 갖는 의의는 이 책이 오늘날 전반적인 태도의 또 다른 사례라는 데 있다

→ 카우프만 책은 오늘날 흔히 보는 책을 새삼스레 보여주기에 뜻깊다

→ 카우프만이 쓴 책은 오늘날 나도는 숱한 책을 다시금 보여준다

→ 카우프만이 쓴 책은 오늘날 떠도는 책과 다르지만 닮았다

362쪽


해프닝은 시간으로부터의 자유를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일시성을 추구한다

→ 오늘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갑작스레 사달을 일으킨다

→ 하루에 붙들리지 않으려고 확 깜짝짓을 일으킨다

→ 하루하루 마음껏 살려고 문득문득 이런저런 일을 한다

→ 삶을 마음껏 드러내려고 일부러 느닷없이 군다

→ 홀가분하다고 보여주려고 그냥 가볍게 군다

379쪽


컬트적 이름으로 불린다

→ 높이는 이름이다

→ 우러르는 이름이다

→ 치켜세운다

→ 떠받는다

→ 섬긴다

→ 엎드린다

391쪽


간단히 말해 ‘두 문화’라는 문제는 오늘날 문화적 상황에 대한 무지하고 낡은 이해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 다시 말해 ‘두길’이란 오늘살림을 모르고 낡은눈으로 보는 셈이다

→ 그러니까 ‘두빛’은 오늘살이를 모르는 채 낡게 본다는 뜻이다

→ 곧 ‘두살림’이라 하면 오늘삶터를 모르고서 낡게 짚은 셈이다

424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블랙아웃 - 나는 왜 민주당을 탈출했나
캔디스 오웬스 지음, 반지현 옮김 / 반지나무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6.5.21.

까칠읽기 128


《블랙아웃, 나는 왜 민주당을 탈출했나》

 캔디스 오웬스

 반지현 옮김

 반지나무

 2022.3.15.



  《블랙아웃》이 나온 지 여러 해가 흐른다. 갓 나온 즈음에 사읽을까 하다가 어쩐지 미루고 미룬 끝에 올해에 비로소 장만했고, 네 해라는 틈을 두고서 읽으니 여러 민낯과 속낯을 곰곰이 엿보는구나 싶다. 글쓴이가 밝히듯 “나는 왜 민주당에서 달아났나?”를 가로에 놓는다면, “검은살갗이자 가시내로서 어떤 삶을 보냈나?”를 세로에 놓는 줄거리이다. 그런데 지난 네 해 사이에 캔디스 오웬스라는 이름은 ‘미국 공화당’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왜 그럴까 하고 한참 갸웃했는데, 이미 이 책에 까닭이 다 나오더라.


  글쓴이(캔디스 오웬스)도 겉멋과 겉이름과 겉치레를 좋아하는 마음인 채 민주당에 선뜻 들어가서 ‘흑인 권리’를 외쳤다면, 나중에 공화당으로 옮겨서 ‘사람 권리’를 외쳤으나, 둘 사이에서 ‘뽐내고 싶은 나’라는 대목에서 늘 엇갈린 길이지 싶다. 《블랙 아웃》이 한글판으로 나올 무렵에 ‘오웬스 트위터’가 250만이었다면, 요즘(2026해)은 600만쯤 이르는 듯싶다. 사람들이 나를 더 많이 쳐다보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굴뚝같다고 할까. 이른바 “일을 하기”가 아니라 “일하는 나를 사람들이 알아보고 쳐다봐 주기”를 바라는 늪에 빠졌다고 느낀다.


  우리가 참말로 ‘옳은’ 사람이라면 “내가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참말로 옳은 사람일 적에는, “삶을 아름답게 일구고 나누면서 숲을 품는 보금자리를 가꾼”다. 잘 짚어 보자. “서울에서 자가용 여러 대를 굴리고, 아파트 몇 채를 거느리며, 삼성을 비롯한 주식을 꽤 장만하고, 코인도 제법 만지는 자리”에 있으면서 ‘기후위기’라는 목소리만 높인들, 참말로 이 별을 지키거나 돌볼 수 있을까? 풀밥(채식)만 한대서 날씨를 달래지 않는다. “서울로 실어올리는 풀과 남새와 열매”를 “시골에서 비닐집에 꽁꽁 가두어 죽음늪(농약·비닐·비료)으로 가둘 뿐 아니라, 비닐집에서 기름을 때면서 철없이 뽑아내”는데, 이런 풀밥이 참말로 풀밥일 수 있을까? 아직 여름도 아닌데 벌써 수박이 가게에 나오고, 한겨울에 가게에 딸기가 나오는 얼거리가 제대로일 수 없다.


  캔디스 오웬스가 어린날에는 끔찍한 일을 겪어야 했으나, 이름을 드날리고 목돈을 벌어들인 뒤에는 그만 갈피를 못 잡는구나 싶다. “구독자수에 사로잡혀서 목소리를 높이는 늪”이 아닌, 스스로 작게 푸르게 살림하는 사람으로 설 때라야 비로소 말 한 마디에 빛을 담으리라. 스스로 크게 자랑하며 목소리만 외칠 적에는 모든 말이 바래면서 허울을 붙잡을 수밖에 없다.


ㅍㄹㄴ


그들(민주당)은 심심할 때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부당한지 한탄하면서 자신들에게 투표하는 것만이 상황을 확실히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너무나 찬란하고도 귀에 박히도록 들어온 희망찬 약속을 반복 재생한다. 물론 이 되풀이되는 기만 전략이 성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주입하는 피해자 서사에 우리가 동의하면서 힘을 입게 된 데 있다. 41쪽


1940년대 인종 분리 정책이 존재하던 남부에서 ‘민주당의 KKK’가 저질렀던 테러는 흑인들에겐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49쪽


할머니가 내게 관심을 보이시자 나는 그동안 연습해 왔던 자신감을 표출했다. 최근에 구입한 명품가방을 보여드리고 새로운 직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 할머니는 늘 그랬듯이 본질을 꿰뚫어 보셨다. “캔디스.” 그녀가 입을 열어 말씀하셨다. “네가 뉴욕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 되는구나. 너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아.” 65쪽


저 나쁜 놈들이 한 짓거리를 봐. 난 절대 저렇게 행동하지 않아.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선한 사람이야. 69쪽


내가 올리는 단 한 개의 트위터 게시물만 따져 봐도 내 생각은 순식간에 평균 250만 명에게 전달된다. 이것은 내가 트위터 게시물 한 개만으로도 CNN의 모든 시청률을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77쪽


나는 강한 남성 없이는 그 어떤 사회도 살아남을 수 없다고 수차례 주장해 왔다. 90쪽


언론의 주도하에 흑인과 백인 사이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켰을 뿐 아니라, 흑인들은 피부색으로 인해 안전하게 살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백인들은 또 다른 조작된 사건으로 인해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게 되었다. 131쪽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이대로 살다간 굶어죽는 일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향 땅을 떠나 여러 나라를 향해 대이동을 하고 있다. 그들의 희망은 그저 생존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뿐이다. 수백만 명의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이미 파괴된 조국을 탈출하고 있는 가운데, 현 베네수엘라 대통령인 니콜라스 마두로는 해외의 인도주의적 원조를 외국 세력의 도발로 간주하고, 국민들이 떠나지 못하도록 브라질과 맞닿은 국경을 폐쇄하겠다고 발표했다. 151쪽


2018년 8월, 나는 필라델피아의 한 카페에서 동료인 찰리 커크와 함께 아침 식사 중이었다. 그때, 우리를 알아본 40여 명의 안티파 회원들이 카페 밖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들 중 몇몇은 식당에까지 난입하여 우리에게 꺼지라고 고함을 질러댔고, 우리를 안전하게 구출하기 위해 경찰들이 현장에 출동했다. 우리가 식당 밖으로 나왔을 때, 그들은 발작적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우리에게 달걀을 던지고 물을 뿌려댔다 … 민주당의 가치 이념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흑인 공화당원을 식당에서 쫓아내는 백인 갱단들이라니, 역사는 이렇게 반복된다. 302쪽


흑인들이 트럼프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주류 언론들은 우리에게 그의 결점과 경솔한 성품에 대한 이야기만을 퍼부어댔다. 마치 본인들은 트럼프와는 달리 태생적으로 거룩하다는 듯이. 312쪽


#Blackout #CandaceOwens #How Black American Can Make Its Second Escape from the Democrat Plantation


+


《블랙아웃》(캔디스 오웬스/반지현 옮김, 반지나무, 2022)


패배의식을 가지고 하는 투쟁과 승리의식을 가지고 하는 투쟁, 어느 쪽이 우리에게 번영을 가져다줄까

→ 졌다고 여기며 싸울 때와 이긴다고 여기며 싸울 때, 어느 쪽이 빛날까

→ 꺾인 채 맞설 때와 거머잡고서 맞설 때, 어느 쪽이 눈부실까

→ 무릎꿇고 다툴 때와 반짝이며 다툴 때, 어느 쪽이 꽃길일까

36


이러한 이야깃거리가 우리 주류 언론들의 주요 어젠다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 꼭두에 선 우리 붓길이 이러한 이야기를 몇몇 밑감으로 삼기 때문이다

→ 앞장선 우리 붓판이 이러한 이야기를 크게 말밥으로 두기 때문이다

→ 앞에 선 우리 글붓이 이러한 이야기를 내세우기 때문이다

62


새로운 직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당신의 손녀딸이 이렇게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실 거라 내심 기대했다

→ 새로운 일터를 이야기하면서 할머니 아이가 이렇게 잘나간다고 자랑스러워하시리라 여겼다

→ 새 일터를 이야기하면서 할머니 아이가 이렇게 드날린다고 자랑스러워하시리라 보았다

65


할머니는 늘 그랬듯이 본질을 꿰뚫어 보셨다. “캔디스.” 그녀가 입을 열어 말씀하셨다

→ 할머니는 늘 그랬듯이 꿰뚫어본다. “캔디스.” 한말씀 하신다

→ 할머니는 늘 그랬듯이 꿰뚫어본다. “캔디스.” 할머니가 말씀한다

65쪽


포용적인 운동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충격을 받는다

→ 끌어안는 물결이라고 외치기에 놀란다

→ 얼싸안는 일이라고 밝히기에 끔찍하다

→ 열린길이라고 내세우기네 어처구니없다

→ 품는 바다라고 부르짖기에 어이없다

113쪽


이 연설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 이 말은 엄청나게 힘이 있다

→ 이 목소리는 엄청나다

→ 이 이야기는 엄청나다

316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갈등하는 눈동자 - 양장
이슬아 지음, 이훤 시.사진 / 먼곳프레스 / 202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6.5.6.

까칠읽기 126


《갈등하는 눈동자》

 이슬아 글

 이훤 빛꽃

 먼곳프레스

 2026.1.5.



  맨발로 이 땅에 서면, 발끝까지 햇볕을 머금으면서 새롭게 걸어갈 수 있다. 맨손으로 흙을 만지면, 손끝부터 머리끝까지 흙내음을 맞이하면서 새롭게 일할 수 있다. 맨몸으로 나무를 타면, 살갗부터 뼛속까지 나무노래를 들으면서 새롭게 놀 수 있다.


  꽃하고 이야기를 한다면 외롭지 않다. 새하고 노래를 부른다면 쓸쓸하지 않다. 바람하고 하루를 나눈다면 즐겁다. 햇볕을 쬐면서 해하고 생각을 주고받으면 반짝인다. 밤에는 소쩍새와 개구리가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아늑하다. 언제나 우리 곁에서 이야기와 말과 숨결을 헤아려 본다면,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나 스스로 빛나는구나 싶다.


  《갈등하는 눈동자》를 읽었다. ‘갈등·동자’ 같은 한자말은 흔하다고 여길 만하지만, 제뜻이나 속뜻이나 밑뜻을 감추는 꾸밈말이라고 느낀다. ‘눈’이라고만 하면 되고, ‘눈알’이나 ‘눈망울’이라 하면 된다. ‘눈빛’이나 ‘눈길’이나 ‘눈결’이라 할 때가 있겠지. 다 다른 마음을 ‘동자’로 뭉뚱그리지 않는다. 그저 숨길 뿐이다.


  우리는 치고받거나 툭탁거릴 수 있다. 얽히거나 밀고당길 수 있다. 다투거나 싸울 수 있고. 꼬이거나 넝쿨질 수 있다. 벌어지거나 미울 수 있지. 불꽃이 튀거나 들끓거나 동떨어지거나 갈라칠 수 있다. 사이가 나쁘다든지 부딪힐 수 있다. 다 다른 때와 곳과 사람에 따라서 다 다른 마음을 다 다른 말로 나타낸다면 두동질 일이 없다.


  요즈음 나래터(우체국)에 가면 미국으로 부치는 글월이 비싸니 미리 알아두라는 글이 붙는다.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가, 이달에 모처럼 미국으로 글월을 한 자락 띄우는데 썩 안 비싸더라. 이만 한 값으로 호들갑을 떨 일이 없을 텐데 싶더라. 다만, 누리글월을 적으면 돈이 안 들겠지. 손수 글씨를 적어서 나래터를 오가는 데 품이며 참이며 돈이며 드니까 얼핏 비싸다고 여길 수 있다. 그렇지만 마음을 나누고 싶기에 손으로 글을 적어서 띄운다. 마음을 읽으면서 새롭게 어울릴 길을 찾고 싶기에 굳이 종이책을 온돈을 치러서 마을책집에서 사서 읽고, 또 품과 짬을 들여서 느낌글까지 쓴다.


  이 삶이란 자리에서 싸울 일이란 없다. 다만, 돈을 더 벌고 싶으니 싸운다. 이름을 더 드날리고 싶으니 다툰다. 힘을 뽐내고 싶으니 겨룬다. 《갈등하는 눈동자》는 ‘더 더 더’를 슬며시 숨기면서 ‘덜 덜 덜’인 흉내를 내는 글이라고 느낀다. 왜 이렇게 감추거나 숨기지? 돈을 더 벌고 싶으면 더 벌면 된다. 이름을 더 드날리고 싶으면 드날리면 된다. 힘을 자랑하거나 뻐기고 싶으면 자랑하거나 뻐기면 된다. 나쁠 일이 아니다. 그냥 삶이다. 삶이라는 길을 가면서 배울 뿐이고, 배운 뒤에는 바꾸려고 가꾸면 될 하루이다.


  남이 아직 안 써 보았지 싶은 글을 쓰려고 억지를 쓰느라 일본말씨나 옮김말씨가 춤추고, 일본옮김말씨로 범벅을 할 뿐 아니라, 고약한(가부장) 옛 중국한자말이나 일본한자말을 덕지덕지 쓰고 만다. 그저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하루를 그냥그냥 즐겁게 노래하려는 마음을 글로 옮기려고 하면, 다섯 살 아이를 곁에 두면서 소근소근 속삭속삭 속살속살 참새처럼 노래하듯 글을 여미게 마련이다.


  모둠겨룸(종합격투기)을 좋아해서 구경해도 안 나쁘다. 다만 빠져들면 수렁에 잠기거나 늪에서 허우적댈 뿐이다. 뭐든 좋아하면 되지만, 좋아할수록 종처럼 졸졸 얽매이기 일쑤이다. 그러니까 ‘좋고싫고’를 따지면서 가르려고 하니까 망설인다. 한때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있되, 이제는 그만 좋아하고 그만 싫어할 때에, 비로소 글눈을 뜨고 글길을 연다.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라는 글이 망가지고 어지럽다. 좋거나 싫다는 느낌이 아닌, “사랑은 뭘까? 짝짓기는 사랑이 아닌 짝짓기일 텐데, 좋다고 달라붙어도 사랑이 아닐 텐데? 사랑이란 참으로 뭘까?” 하고 스스로 묻고 되뇌고 헤매노라면, 어느새 사랑길로 접어들면서 살림길을 일구는 내 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


  글을 쓰려면 사랑하면 된다. 글을 읽으려면 살림하면 된다. 사랑하는 마음이 바로 글씨(글씨앗)이다. 살림하는 손길이 바로 손씨(솜씨)이다. 부디 이제는 머뭇대지도 불타오르지도 시끌거리지도 않는 길인, 오롯이 스스로 사랑이라는 살림숲을 바라보면서 “서울을 떠나서 손수 빚고 짓고 가꾸는 길”을 걸어가기를 빈다. 서울내기로 살고 싶다면, 어디이든 다 걸어다니면 된다. 이따듬 두바퀴를 달리고 버스도 타고 싶다면 시골에서 살면 된다. 삶을 바꿔야 글을 가꾼다.


ㅍㄹㄴ


그렇게 싸워놓고도 서로의 평안을 진심으로 염원하는 두 선수를 본다. 상대가 무탈하길 가장 바라는 이들이 있다면 바로 적들일 것이다. 어떤 시공간에서는 폭력과 사랑이 충돌하지 않는다. 복수에 한없이 존경을 담을 수도 있음을 격투기판에서 배운다. 25쪽


손가락 몇 번 움직이면 삼십 분 뒤 오토바이와 함께 음식이 도착하는 시대에 《던전밥》을 읽는다. 식량자급률이 낮고 농업인을 귀히 여기지 않는 국가에 살며 거식과 폭식 사이를 자주 오가는 우리에게 이 작품은 어떤 감각을 돌려준다. 48쪽


+


《갈등하는 눈동자》(이슬아·이훤, 먼곳프레스, 2026)


쓰기를 연마해 온 나의 십수 년이 무색해질 만큼

→ 쓰기를 갈고닦은 열몇해가 남사스러울 만큼

→ 쓰고 벼리던 열몇해가 부끄러울 만큼

→ 글을 갈아온 열몇해가 간질댈 만큼

→ 글을 가다듬은 열몇해가 쑥스러울 만큼

9쪽


무대에 오를 때마다 미래에 관한 질문을 듣는다

→ 자리에 오를 때마다 앞날을 묻는 분이 있다

→ 마루에 오를 때마다 새날을 물어보신다

9쪽


에이아이가 모든 걸 바꿔놓을 격변기에 작가로서

→ 지음꽃이 모두 바꿔놓을 여물목에 글바치로서

→ 새꽃이 모두 바꿔놓을 너울목에 글쟁이로서

→ 꾸밈꽃이 모두 바꿀듯 일렁이는데 글꾼으로서

10쪽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그리워서, 어느 날 책으로 돌아오리라는 것을

→ 무엇보다 스스로 그리워서 어느 날 책으로 돌아오리라고

→ 무엇보다 내가 나를 그리며 어느 날 책으로 돌아온다고

13쪽


섞어가며 겨룰 수 있게끔 룰을 고안한 종합격투기MMA는 풍부한 텍스트를 지녔다

→ 섞어가며 겨룰 수 있게끔 틀을 짠 모둠싸움에는 이야기가 많다

→ 섞어가며 겨룰 수 있게끔 판을 짠 한겨룸에는 이야기가 푸짐하다

16쪽


이 나라에서 내가 배우는 것 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 나는 이 나라에서 이런 일도 배운다

→ 난 이 나라에서 여러 가지를 배운다

→ 난 이 나라에서 늘 배운다

32쪽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나를 끌어당긴다

→ 나는 죽음 이야기에 끌린다

→ 난 죽는 이야기가 끌린다

→ 난 죽음 이야기가 재밌다

→ 난 죽는 이야기를 눈여겨본다

41쪽


그러나 연대는 어떠한가. 누군가의 가슴을 뜨겁게 하거나 멀찍이 떨어지게 할 이 단어의 진실은

→ 그러나 손은 어찌 잡는가. 가슴이 달아오르거나 멀찍이 떨어질 이 낱말 속내는

→ 그러나 두레는 어떠한가. 가슴이 불타오르거나 멀찍이 떨어질 이 낱말 속빛은

50쪽


이토록 높은 품질의 텍스트와 이미지가 무료란 점이 동료로서 분통이 터졌다

→ 이토록 훌륭한 글과 그림을 거저 봐도 된다니 글동무로서 부아가 터진다

→ 이토록 알찬 글과 그림을 그냥 볼 수 있다니 글또래로서 불길이 터진다

79쪽


주어를 바꿔가며 이야기를 각색하는 방법을 나는 어쩐지 배우고 있다

→ 나는 어쩐지 앞말을 바꿔가며 이야기를 고치는 길을 배운다

→ 나는 어쩐지 임자말에 따라 이야기를 손보는 길을 배운다

88쪽


우리를 갈등하게 할 항목들은 아주 많다

→ 우리가 갈라설 곳은 아주 많다

→ 우리가 부딪힐 데는 아주 많다

→ 우리가 뒤엉킬 칸은 아주 많다

96쪽


저의 스승은 말했어요. 측은지심을 잃으면 끝장이라고요

→ 스승은 말했어요. 눈물을 잃으면 끝장이라고요

→ 스승은 말씀해요. 가여워하지 않으면 끝장이라고요

→ 스승은 말씀해요. 슬퍼하지 않으면 끝장이라고요

118쪽


겪은 일을 가공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편집이 들어가기 마련이죠

→ 겪은 일을 깁다가 이래저래 손대게 마련이죠

→ 겪은 일을 건사하며 이곳저곳 만지게 마련이죠

135쪽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나의 부모는 왜 나와 다른 눈을 가졌는가

→ 늘 묻고 싶었다. 어버이는 왜 눈빛이 다른가

→ 다 묻고 싶었다. 엄마아빠는 왜 눈이 다른가

184쪽


모국어가 서툰 타국어로 점차 대체되는 동안 언어는 충분한 집이 될 수 없었다

→ 우리말을 서툰 이웃말로 조금씩 바꾸는 동안 말은 든든한 집이 될 수 없다

→ 엄마말을 서툰 바깥말로 차츰 갈아입히는 동안 말은 너른집이 될 수 없다

185쪽


질의응답 시간엔 내가 아는 사람 중 제일 청아한 눈동자를 지닌 이가 손을 들었다

→ 물음꽃에선 구슬같은 눈망울인 이웃이 손을 든다

→ 수다꽃에선 눈이 맑은 동무님이 손을 든다

251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배짱 좋은 여성들 - 용기와 극복에 관한 가슴 떨리는 이야기들
힐러리 로댐 클린턴.첼시 클린턴 지음, 최인하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6.4.9.

까칠읽기 124


《배짱 좋은 여성들》

 힐러리 로댐 클린턴·첼시 클린턴

 최인하 옮김

 교유서가

 2022.7.4.



《배짱 좋은 여성들》은 616쪽에 이른다. 얼핏 보면 “엄마와 딸”이 “훌륭한 가시내”를 놓고서 이야기를 한 듯한 얼거리이지만, 곰곰이 보면 “힐러리·민주당 지지자”만 모으면서 “온나라에 이름난 몇몇 사람”을 들러리처럼 끼워맞췄구나 싶다. “힐러리·민주당을 좋아하지 않는 쪽”이라고 해서 안 아름답거나 안 훌륭하지 않겠지. 어느 쪽에도 몸담지 않는 사람이기에 일부러 빼야 하지 않겠지. 이름나지 않기에 못 본 척해도 되지 않겠지. ‘배짱’이란 무엇인가? ‘뱃심’을 부리는 몸짓이기에 배짱이다. 어느 만큼 배웠으니 배를 내밀면서 자랑하려는 몸짓인 ‘배짱’이다.


우리는 예부터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여겼다. ‘배짱·힘·자랑’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쭉정이로 기울기 쉽다. 배짱이 아닌 ‘다부지’고 ‘당차’면서도 ‘다사롭’게 ‘다독일’ 줄 아는 아름님과 훌륭님을 품을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담벼락을 허물리라 본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가시내한테만 훌륭하”거나 “사내한테만 훌륭하”지 않다. 훌륭한 사람은 “그저 사람과 푸른별 모든 숨붙이한테 훌륭하다”고 해야 맞다. 아름다운 사람이라면 “가시내한테만 아름답”거나 “사내한테만 아름답”지 않다. 아름다운 사람은 “언제나 사람과 파란별 모든 풀꽃나무와 해바람비와 들숲메바다 곁에서 아름답다”고 해야 맞다.


《배짱 좋은 여성들》이 다루는 여러 가시내는 저마다 뜻깊게 살다가 몸을 내려놓거나 나이를 먹었다. 그런데 “엄마와 딸”이 나누는 말이 자꾸자꾸 걸린다.


마거릿의 사진을 보고 ‘최초의 종군 여기자’라는 놀라운 소개 문구를 읽는 순간 나는 마거릿에게 반해버렸다. 65쪽


두 사람은, 이를테면 “첫 덤프 운전사”라든지 “첫 벌목꾼”이라든지 “첫 원양어부”라든지 “첫 ……”에 들어갈 ‘작은일꾼’은 아예 들지 않는다. “첫 여성 정치인” 같은, “처음으로 돈과 이름과 힘을 거머쥔 누구”를 손꼽기 일쑤이다.


돈을 많이 벌어야 “배짱 좋은 가시내”라고 느끼지 않는다. 이름을 드날리거나 힘이 세야 “배짱 좋은 가시내”에 들 수 있지 않다. 밭을 일구는 가시내도 훌륭하고, 아기를 돌보는 가시내도 아름답다. 밭을 가꾸는 사내도 훌륭하고, 아기를 보살피는 사내도 아름답다.


탈레반은 말랄라의 아버지가 무척 용감한 탓에 학교를 폐쇄할 수 없고 말랄라가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표현하는 법을 배웠던 탓에 침묵시킬 수 없자, 말랄라의 통학버스에 올라타 말랄라를 죽이려고 했다. 146쪽


두 힐러리 씨는 ‘말랄라’는 살짝 짚되, 이란을 비롯한 ‘남성가부장 이슬람 종교지도자’가 벌이는 끔찍한 짓을 들여다보지는 않는다. 이미 힐러리와 클린턴이 미국에서 나라일을 맡던 무렵에도 이 대목으로 손가락질을 받았다. ‘말랄라’를 말하려면 ‘말랄라 한 사람’만이 아니라, “나라를 온통 엉망으로 짓밟고 죽이고 망가뜨리는 이란을 비롯한 뭇나라 우두머리·싸움꾼(독재자·군인)”을 모두 나무라야 맞다.


지난 몇 년간 샬럿과 나는 함께 독감 예방주사를 맞았고, 남편 마크는 에이든과 함께 맞았다. 소와과에 근무하는 훌륭한 의사와 간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매년 계속 접종을 받을 예정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279쪽


빌 게이츠와 힐러리가 ‘재단기부’로 ‘백신회사·제약업계·정재계’와 손잡은 일은 널리 알려졌다. “백신이 안전하다”는 밑글(연구자료)은 없다. 왜 없는가 하면, “백신을 안 맞고서 멀쩡한 사람과 멀쩡하지 않은 사람을 살핀 밑글”이 여태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백신부작용’을 쉬쉬할 뿐 아니라 감추기 일쑤이지만, 미국은 우리나라보다 더 크게 쉬쉬하거나 감춘다.


우리는 지난 돌림앓이(코로나 펜데믹)를 거치면서 ‘집단면역’이 얼마나 거짓말인지 똑똑히 보았다. ‘백신 3차·4차·5차’를 맞아도 버젓이 돌림앓이에 또 걸리고 자꾸 걸린 사람이 어마어마했고, 백신을 맞자마자 죽은 사람이 수두룩할 뿐 아니라, 백신을 맞은 뒤로 자꾸 다른 몸앓이로 힘겨운 사람이 엄청나다. 이와 달리, 백신을 아예 안 맞았으나 아예 돌림앓이에 안 걸린 사람도 대단히 많다. 이미 푸른별 모든 나라에서 훤하게 드러난 민낯이다.


많은 부모들이 자폐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 MMR 예방접종을 거부해 오고 있지만, 이미 많은 연구를 통해 MMR 백신이 안전하고 자폐증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됐다. 오히려 내가 좋아하는 이 말처럼, ‘백신을 성장을 유발할 뿐이다’ 백신은 개인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고 ‘집단면역’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중요하다. 백신 접종 수준을 나타내는 집단면역은 질병이 퍼지는 것을 막는 데 필요하다. 또한 백신을 접종하기에는 너무 어린 아기들이나 면역력이 손상된 환자를 비롯해 백신을 접종할 수 없거나 아직 접종하지 못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에도 중요하다. 283쪽


‘입가리개(마스크)’하고 ‘바늘(백신주사)’ 쓰레기가 얼마나 많은지 들여다볼 수 있을까? 돌림앓이를 거치면서 파란바다에 널브러진 엄청난 쓰레기가 앞으로 어떤 말썽을 일으킬는지 헤아릴 수 있을까?


또한, ‘클로뎃 콜빈’을 ‘영웅’으로 그리려고 ‘로자 파크스’를 곁들인 대목도 아리송하다. 클로뎃 콜빈은 “거침없이 말하기” 때문에 “통제 불가능”이라 여기지 않았다. “아이와 곁님이 있는 백인 아저씨(40대)하고 몰래 짝을 맺어서 아기를 낳았”는데 이 일을 꽁꽁 숨기려 했기에, ‘1950년대 흑인민권운동’에서 클로뎃 콜빈을 더는 품기 어려웠을 뿐이다.


곰곰이 본다면, 흑인민권운동에서 클로뎃 콜빈을 뒤로 뺐기에 오히려 클로뎃 콜빈은 그무렵 사납던 KKK 같은 물결 사이에서 아기를 지키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까지 할 수 있다. 로자 파크스는 이미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무렵에도 민권운동에 앞장선 아줌마이고, 가난과 가시밭길이 늘 코앞에 있어도 꿋꿋하게 견디면서 클로뎃 콜빈까지 감싸는 몫을 했다.


그들은 이 문제와 관련해 내세울 공식적인 인물로 클로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결론 내린 터였다. 클로뎃은 저소득층 출신인데다가 너무 거침없이 말하고, 너무 어렸고 통제가 불가능했다. 게다가 클로뎃이 임신했다는 사실까지 듣고 나니 자신들이 갖고 있던 최악의 편견이 사실로 증명된 것만 같았다. 372쪽


《배짱 좋은 여성들》은 나쁜 책이지 않다. “힐러리·민주당 지지”에 확 기우는 바람에 제대로 줄거리를 못 여미었을 뿐이다. 또한 “힐러리·민주당 지지”를 드높일 뜻으로 ‘돈있고 이름있고 힘있는’ 가시내를 고르려고 했을 뿐이다. 이 책이 다루지 않은 가시내 이름을 조금 적어 보겠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은 ‘힐러리·클린턴 재단 지지자’가 아닐 수 있다.


이 책이 다룬 줄거리를 돌아본다면, “셀마 라게를뢰프·아스트리드 린드그렌·엘리저 파전·펄 벅·조르즈 상드·완다 가그·바바라 쿠니·마리 홀 에츠·케테 콜비츠·이시무레 미치코·프리다 칼로·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아룬다티 로이·마거릿 로우먼·레니 리펜슈탈·한나 아렌트·페트라 켈리·템플 그렌딘·줄리아 버터플라이 힐·리제 마이트너·에밀리 데이비슨·마거릿 스키니더·마더 존스·도로시아 랭·김연경·가네코 후미코·메리 애닝” 같은 사람들 이름이 빠진 까닭이 아리송하고 얄궂다. 이밖에도 왜 빠졌거나 안 다뤘는지 알쏭달쏭한 아름다운 사람이 잔뜩 있다. 두 힐러리 씨는 ‘미국과 여러 나라에서 이름난 운동선수’ 이름을 꽤 들던데, 그야말로 ‘작은자리’에서 애쓰고 힘쓰는 사람은 아예 안 다룬다. 이를테면, 시골에서 흙짓는 가시내라든지 ‘아이를 제도권학교에 안 보내면서 가르치는’ 가시내라든지, ‘마더 존스’를 비롯한 일꾼(노동자)이라든지, ‘페트라 켈리’를 비롯한 새길(녹색정치)을 편 사람들은 일부러 안 다룬 듯싶다.


#The Book of Gutsy Women (2019년) #HillaryRodhamClinton #ChelseaClinton


ㅍㄹㄴ


《배짱 좋은 여성들》(힐러리 로댐 클린턴·첼시 클린턴/최인하 옮김, 교유서가, 2022)


수도원에 매장된 유해를 조사하던 연구진이

→ 비나리집에 묻힌 잔뼈를 살핀 사람들이

→ 비손집에 묻힌 나머지뼈를 살핀 사람들이

6쪽


그렇게 많은 시를 지은 그 무명씨가 대개 여성이었을 것이라고 과감하게 추측한다

→ 그렇게 노래를 많이 지은 아무개가 거의 가시내였으리라고 여긴다

→ 그렇게 노래를 많이 지은 들꽃이 으레 순이였으리라고 본다

7쪽


내 어머니는 내 친구들의 어머니들처럼 전업주부였다

→ 우리 어머니는 동무들 어머니처럼 살림꾼이었다

→ 우리 어머니는 또래 어머니처럼 살림지기였다

19쪽


나는 나의 어머니를 사랑했고, 자녀들을 잘 돌보고

→ 나는 우리 어머니를 사랑했고, 아이를 잘 보고

→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고 아이를 돌보고

20쪽


이따금씩 편안한 바지를 입고

→ 이따금 가볍게 바지를 입고

→ 이따금 느긋이 바지를 입고

23쪽


안네는 이따금씩 부모와 언니에 대해 애증이 엇갈리는 감정들을 표현했다

→ 안네는 이따금 어버이와 언니를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그렸다

→ 안네는 이따금 엄마아빠와 언니한테 엇갈리는 마음을 옮겼다

→ 안네는 이따금 엄마아빠와 언니가 좋다가도 싫은 속내를 적었다

79쪽


레이철이 겨우 56년이 아니라 더 오래 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이 든다

→ 레이철이 겨우 56해가 아니라 더 오래 살면 어땠을까 싶어 몹시 아쉽다

→ 레이철이 겨우 56해가 아니라 더 오래 살면 달랐을 텐데 싶어 참 아쉽다

→ 레이철이 겨우 56해가 아니라 더 오래 살면 나았을 테니 무척 아쉽다

159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