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24 흰머리 노랑머리

책벌레수다 : 조지 오웰 님이 글을 쓴 곳



  나는 어릴적부터 머리숱이 안 많다. 어쩐지 잔털도 거의 안 나고 머리카락이 매우 더디 자란다. 싸움터(군대)에서 봄여름에 풀죽임물(고엽제)을 맨손으로 신나게 뿌리던 어느 날 온몸에 두드러기가 올랐고, 거의 한 해를 두드러기에 시달린 뒤부터 종아리에 잔털이 조금 돋았다. 싸움터에서는 내 몸에 돋은 두드러기를 그냥(마취제 없이) 날마다 도려내 주기만 했다. 맨살을 날마다 칼로 숱하게 도려내야 할 적마다 피울음이 났지만 꿋꿋이 견뎠다. 아무튼 그때 종아리에 잔털이 조금 나기는 했되, 쉰 살이 넘도록 흰머리 하나 돋지 않더라. 그래도 쉰 해를 넘겨서야 처음으로 흰머리가 하나 돋을 적에 “와, 재미있다.” 싶어서 반갑네.


  사람마다 다 다른 삶과 몸과 길이라서, 머리카락이건 몸이건 마음이건 눈길이건 그야말로 다르게 마련이다. 이 다른 빛을 눈여겨보는 이웃이 있다면 즐겁다. 눈여겨보지 않거나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이 수두룩하다면 꽤 고단하게 마련이지만, 이러한 삶도 또 그저 우리 삶이다. 즐거워도 삶이며 고단해도 삶이다. 모든 하루를 늘 느긋이 맞아들여서 짓는 하루를 누리면 된다.


  누구를 이기려 할 까닭이 없다. 누구보다 나아야 할 일이 없다. 내내 까만머리여야 하지 않고, 열 살이나 스무 살부터 흰머리여도 된다. 파란눈이건 푸른눈이건 대수롭지 않다. 서울말을 쓰건 강원말을 쓰건 전라말을 쓰건 부산말을 쓰건 인천말을 쓰건 대단하지 않다. 그저 이 살림살이를 즐겁게 이고 지고 들고 나르면서 살아가면 느긋하다.


  나라가 바뀌기를 바랄 까닭이 없다. 나를 가꾸면 넉넉하다. 나라꼴을 탓한들 안 즐겁다. 언제나 우리 스스로 나를 가꾸는 하루를 살아가면 된다. 내가 가꾸는 씨앗이 천천히 깃들어서 온누리와 온나라를 푸르게 덮을 뿐이다. 내가 나를 가꾸는 씨앗을 안 심으니 나라꼴은 언제 들여다보아도 얄궂을 만하다. 너도 나도 한결같이 말씨랑 글씨랑 마음씨랑 생각씨랑 노래씨랑 살림씨랑 꿈씨를 심는 날을 맞이하면서 지낸다.


  조지 오웰 님이 글을 쓴 길을 돌아본다. 이녁은 ‘쓰고 싶은 글’이 있기에 ‘글로 옮기는 말’이란 무엇인지 먼저 배우려 했다. ‘말로 싣는 마음이요, 마음으로 담는 삶’이라는 대목부터 읽고서, ‘삶과 마음과 말’로 ‘이웃할 사람’과 함께 일하고 같이 이야기하고 나란히 먹고자는 길을 오래 걸었지. 이렇게 걸어간 나날을 차분히 글로 옮겼고.


  여태껏 조지 오웰 님을 글로 읽는 사람은 많되, 막상 “조지 오웰이 말글과 마음과 삶과 살림과 사람과 사이와 사랑과 숲을 배우려고 온몸으로 뛰어든 하루”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드물다고 느낀다. “말로 담는 삶”부터 배우지 않고서야 어떻게 글을 쓰겠는가. “말로 그리는 마음을 이루는 삶”부터 하루하루 짓고 그리고 가꾸면서 나누지 않고서야 무슨 글을 펴겠는가.


  언제나 글에 앞서 말을 가다듬으면 된다. 말을 가다듬고자 마음을 갈닦으면 된다. 마음을 갈닦으려고 삶을 일구면 된다. 삶을 일구려고 살림을 그리면서 지으면 된다. 살림을 그리면서 지으려고 늘 생각이라는 빛씨를 심는 걸음걸이를 이으면 된다. 그저 쉽고 수수하기에 숲을 품는 나날이자 길이다.


  빗대는 말로 하자면 ‘걸음걸이’일 텐데, 몸소 걷는 사람이 집과 마을과 둘레와 별을 본다. 몸소 걷는 사람이 손수 보금자리를 가꾸면서 살림살이를 일군다. 몸소 걷는 사람이 이웃과 어깨동무하는 마음을 살핀다. 몸소 걷고 어깨동무하는 나날이기에, 이 별에서 이루는 삶을 어느새 사르르 풀고 녹여서 글로 그려낸다. 몸소 이 하루를 사랑하려고 하니, 늘 아이곁을 돌보는 어진 어른으로 다가설 수 있다.


  이따금 영어로 조지 오웰 님 책을 들추면, 참 쉽게 ‘말하는 대로’ 쓴 글이라고 느낀다. 이와 달리, 조지 오웰 님 글을 한글로 옮긴 거의 모든 책은 ‘중국한자말·일본한자말·일본말씨·옮김말씨’로 가득하다. 처음 글을 지은 분은 온삶과 온땀과 온사랑으로 편 이야기인데, 막상 한글로 옮길 적에는 ‘번역가’ 자리에 앉아서 글만 짚고 바꾸게 마련이다.


  한글판으로 나온 숱한 책은 글님이 흘린 눈물과 땀방울을 못 느끼는구나 싶다. 그렇다고 굳이 밑바닥으로 ‘내려가야’ 할 까닭이 없다. 내려가지 말자. 또한, 올라가지도 말자. 높낮이를 두지 말자. 어디에서나 이곳을 바라보는 오늘을 살아내자. 밑도 구름도 없이 오직 삶이라는 자리에서 스스로 가다듬고 풀어내는 말글이라면 넉넉하다. 글쓰기이든 옮기기이든 말하기이든 삶짓기이든 살림하기이든 늘 마찬가지이다.


  흰머리는 흰빛 머리카락이다. 검은머리는 검은빛 머리카락이다. 숱이 많으면 머리카락을 땋으면서 놀면 된다. 숱이 적으면 머리를 감을 적마다 이내 마르니까 자주 머리를 감으면서 더 시원하게 놀면 된다. 숱많은 또래는 내가 날마다 머리를 감을 뿐 아니라, 한여름에는 서너 벌씩 머리를 감는 모습을 부러워하더라. 숱많은 머리로는 날마다 머리를 못 감는다더라. 머리를 감으면 말리기까지 큰일이요 고되다고 하네.


  어느 쪽이 낫거나 나쁘지 않다. 이쪽은 이렇게 겪고 보며 배우는 삶이다. 저쪽은 저렇게 치르고 느끼며 배우는 삶길이다. 그쪽은 그렇게 마주하고 헤아리며 배우는 삶노래이다. 우리는 다 다른 몸을 받아서 태어난 뜻이 있으니, 어버이한테서 받은 몸에 무슨 뜻이 흐르는지 읽으면서 살아가면 된다.


  나를 둘러싼 숱한 이웃은 “나랑 다르게 어떠한 뜻으로 저렇게 나랑 다른 몸을 받고서 태어나서 살아가는”지 지켜보면서 손잡으면 된다. 다르기에 만난다. 다르기에 어울린다. 다르니까 말을 섞는다. 다른 만큼 어떤 마음인지 알려고 다가선다. 다르니까 등돌리거나 손가락질하는 멍청한 짓이 아닌, 다르니까 함께 배우고 가꾸는 하루를 노래하는 길을 걷는다. 흰머리도 노랑머리도 까만머리도 빨간머리도 파란머리도 다 곱다.


ㅍㄹ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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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드라마가 아니었다. 갓 서른을 넘긴 나는 직업도 애인도 오피스텔도 없었다. 천하제일 백수인 내가 가진 거라곤 천천히 흐르는 시간, 그게 전부였다. 《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계속 쓰는 삶을 위해》 26쪽


나는 정말이지 오로지 아픈 게 싫다. 냄새나 울림 같은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2인조》 13쪽


어떻게 트위터는 페미들 본진으로 등극하게 된 것일까? … 트위터에서 우리는 보고 싶은 주제에 맞춰 팔로잉 목록을 구성하고, 나날이 새로운 소식들을 물어 오는 나와 비슷한 관심사의 트친들을 사귀고, 관심이 없는(어쩌면 없애버리고 싶은) 주제는 뮤트하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블록(차단)하고, 그 사람과 친구인 사람들까지 줄줄이 체인블록을 돌려서 추방한다. 《판을 까는 여자들》 36, 37쪽


더우기 놀라운 것은 그가 내게서 새로운 것을 배우려고 한다는 점이었다. 진정으로 무언가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늘 그 세계에 접하게 된다. 학문 탐구는 단지 책이나 학교를 통해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로부터 새들로부터 대지로부터 그리고 사람들과의 교류로부터 많은 발견을 하는 것이라는 걸 그는 몸소 실천하고 있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 9》 140쪽


‘무엇보다 이 자세가 힘들어. 움직이고 싶다. 자세 바꾸고 싶어. 하하하. 어린애처럼 떨고 있네. 좋았어. 치에가 움직였다. 나도 비켜 줘야지. 그나저나 지금 무슨 시간이지? 난 뭘 기다리는 거야? 좋아한다고 말한 당름에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생각을 안 해봤다.’ 《손바닥 창세기 4》 145쪽



《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계속 쓰는 삶을 위해》(이주윤, 드렁큰에디터, 2020.6.20

.)

《2인조》(이석원, 달, 2020.12.2.)

《판을 까는 여자들》(신민주·노서영·로라, 한겨레출판, 2022.2.25.)

《천재 유교수의 생활 9》(야마시타 카즈미/신현숙 옮김, 학산문화사, 1997.8.25.)

#山下和美 #天才柳??授の生活

《손바닥 창세기 4》(오가와 마이코/이은주 옮김, 대원씨아이, 2022.9.30.)

#てのひら創世記 #小川麻衣子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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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23 작은책집 차리는 길은 없다

책벌레수다 : ‘작은·큰’이 아닌 ‘책’을 씨앗으로



  어느새 ‘작은책숲(작은도서관)’과 ‘작은책집(작은책방)’ 같은 이름이 널리 퍼진다만, ‘작은-’은 스스로 작은이웃을 헤아리며 어깨동무하고, 작은펴냄터(1인출판사)에서 작게 여미는 알찬 작은씨 같은 작은책을 눈여겨보겠다는 마음이 아니라면 함부로 안 써야 할 이름이라고 느낀다. 크기가 작기에 작은책집이지 않다. 키나 몸이 작기에 ‘작은사람’이지 않다. 크기나 겉모습만 따지면서 ‘작은-’이나 ‘큰-’을 붙이느라 자꾸 속빛을 안 보거나 못 보면서 휩쓸리기 일쑤이다.


  온누리 들숲메를 이루는 모든 나무는 풀씨보다 작은씨이게 마련이다. 풀씨보다 작아도 어느새 우람하게 자라나는 나무인데, 겉보기로 ‘작은몸’이라 하더라도 그저 ‘씨앗’이듯 그저 ‘책집’과 ‘책숲’이고, 그저 ‘책’이다.


  숱한 ‘작은책숲·작은책집’을 들여다보면, 이름은 ‘작은-’이되 정작 ‘큰펴냄터’에서 잔뜩 찍어내어 널리 파는 ‘이름책(베스트셀러·스테디셀러)’가 수북하게 꽂히더라. 언뜻 본다면, 큰펴냄터에서 선보이면서 알림길(홍보)에 목돈을 쏟아붓는 책이 더 잘 팔린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누리책집(인터넷서점)·큰책집 팔림새하고 마을책집 팔림새는 다르다. 또한 마을책집에서 “‘누리책집·큰책집’하고 똑같거나 비슷한 얼거리로 책을 들이거나 갖추거나 팔려고 한다”면, 이미 처음부터 그들(큰곳)하고 붙을 수 없다. 커다랗게 차리는 책집이 아니라, 마을에서 조촐히 차려서 이웃을 마주하려는 책집이라면, “큰숲을 이루는 작은씨”처럼 “마음을 넉넉하고 아름답게 지피는 씨앗으로 삼을 작은책”을 건사할 일이라고 본다.


  마을책집을 찾아오는 이웃이나 손님이 ‘이름책’을 사겠다고 여쭈면, 그때에 비로소 들여놓되, 처음부터 이름책을 들이지 않을 수 있는 곳이기에 마을책집이요, 마을책숲이면서, ‘작은-’이라는 말을 붙일 만하다.


  “작은책집 꾸리는 길”이라는 말은 꽤 덧없거나 부질없다. 모든 마을책집은 다 다른 마을에서 다 다른 지기가 다 다른 이웃을 마주하려는 터전이니까. “나(책지기를 바라는 나)는 누구인가?” 하고 돌아보면서, “나는 누구를 이웃으로 만나려는가?” 하고 묻고, “나는 낯선 마을이웃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함께 이곳을 새롭게 가꾸고 일구는 사랑씨앗을 심으려 하는가?” 하고 헤아리면 된다.


  숲을 이루는 씨앗마냥, 마을도 푸른숲으로 나아가고 살림집도 푸른터로 피어나는 길을 속삭이는 작은책을 품어서 나누는 터전이라면 ‘작은책집’이라는 이름이 어울린다.


  책집을 처음 차리려는 분은 “책집살림 잘 꾸리기”를 배우려 할 까닭이 없다. “책집을 꾸리는 살림을 배우는 마음”을 바라볼 노릇이지 싶다. 마을책집을 처음 차리려는 분이 으레 ‘기존 독립서점 책지기’님한테 말씀을 여쭙곤 한다만, ‘이웃 마을책집’은 그저 책이웃으로 드나들 노릇이요, ‘오랜 마을책집’ 지기한테서 “여태 어떤 마음으로 책을 만지고 다루면서 일하셨나요?” 같은 말을 여쭙고서 가만히 들으면 한결 다르리라고 본다.


  이를테면, 인천 〈아벨서점〉이나 구미 〈삼일문고〉 책지기님 같은 분은 누구한테나 “책집이라는 곳을 마을에서 꾸리는 마음”을 기꺼이 들려줄 만한 그릇과 눈빛이 밝다. 이분들은 여태 살림길을 오롯이 책으로 넉넉히 지어 왔다. 서울 〈글벗서점〉이나 〈숨어있는 책〉 책지기님도 이제껏 숱한 ‘병아리 책지기’한테 오래도록 도움말을 들려주었다. 큰책집이냐 작은책집이냐 하고 가르지 말고, 한결같이 ‘책집’ 하나를 보면 된다. 새책이나 헌책이 아닌 ‘책’이다. 책을 다루는 집인 책집이다. 살림하는 사람으로서 사랑을 일구며 살아가려는 터전이라서 ‘집’이요, 이러한 집 가운데 책으로 살림길을 배우고 사랑길을 나누며 어깨동무하는 하루를 새삼스레 짓고 싶기에 ‘책집’이다.


  “새로 나온 책”이라는 겉이름을 내려놓을 수 있을 적에 ‘책’을 바라볼 수 있다. 애벌로 읽고서 잊어버리거나 치워놓을 ‘소비재’가 아니라, 두벌 석벌 열벌 쉰벌 온별을 오래오래 이으면서 곁에 놓을 ‘읽고 익혀서 잇는 이야기밭’일 적에 비로소 ‘책’이다. 책이란, 참답게 채우는 그릇이다. 책이란, 손수짓고 손수빚는 동안 몸소 챙기는 꾸러미이다.


  겉이름에 휘둘리면 ‘책’이 아닌 ‘척·체’로 기울고 만다. 바다에서 낚는 그물이건, 나물을 손질하며 담는 그릇이건 ‘채’라고 한다. ‘책’은 모든 다 다른 사람이 다 다른 때와 곳을 살아내며 스스로 배우고 익힌 바를 채로 건져올려서 참하게 채우고 스스로 챙기는 이야기그릇일 테니, 우리가 열거나 드나드는 책집이라는 곳은 참하고 착하게 나누고 노래하는 숨빛과 빛씨를 가꾸는 쉼터요 놀이터요 일터요 살림터요 숲터일 테지.


  아름다운 사람을 나이로 가르거나 따지지 않는다. 사랑스러운 빛을 크기나 값으로 재지 않는다. 함께 읽고 나누면서 책집이며 책숲에 건사할 책이라면, 우리 스스로 ‘무엇’을 눈여겨보고 살피면서 손에 얹으며 함께 웃고 울고 이야기할 만한지 생각할 일이지 싶다.


  작은책집이라면 “문학상을 받은 책”이나 “팔림새가 대단한 책”이 아닌, “글그림에 얹은 이야기”하고 “글그림으로 추스른 삶”하고 “글그림으로 노래하는 사랑”을 어떻게 꾸린 책인가 하고 바라보는 이음터이지 싶다. 마을책집이라면 “글쓴이·펴냄터 이름값”을 다 지우고서 “서울 바라보기”를 하지 않는 책을 가리고 솎고 고르고 건사해서 마을이웃하고 나누는 터전이리라.


ㅍㄹ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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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나는 지난날의 원고뭉치를 꺼내어 펴놓고 이것저것 뒤적여보고 있었다. 언제 햇빛을 보게 될는지조차 알 길 없는 원고들. 그중에는 잉크빛이 부옇게 바랜 것도 적지않았다. 남에게 있어서는 한갓 휴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이것들이 그러나 내게는 다시없이 소중한 것이었다. 어둡고 메마른 세월(1943년)과 함께 자꾸만 위축해 들어가는 내 생활의 명맥을 그런대로 이어주는 한가닥 삶의 보람은 역시 벽장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이 원고뭉치가 아닐 수 없었다. 《黃順元全集 4 너와 나만의 時間·내일》178쪽


방학이 끝나고 보면 / 둘 셋 친구 자리가 / 늘 비어 있습니다 / 말도 없이 / 어딘가로 떠나버린 친구들 // 빈 걸상 올리며 내리며 / 청소를 할 때 / 편지 한 장 없는 그 친구를 / 떠올려봅니다 (방학이 끝나고) 《탄광마을 아이들》 59쪽


이미, 몇 차례나 전술되었듯이, 그는 숱한 ‘읽기’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많은 읽기와 접하는 일이 이기철 자의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타의에 의해서라는 사실을 발견한다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장정일) 《문화비평 2호》 210쪽


우리가 한국사람으로서 정말 긍지를 느낄 수 있게 하는 내용도 사실 복잡한 것은 아니다. 민족이나 민족주의라는 말에 주눅이 들어 이 말을 애써 피해야만 하는 독일사람에 비해 오히려 단순하다고 볼 수 있다. 작은 나라지만 자기를 지키는 높은 문화를 보유하고, 민주적인 절차가 서고, 통일된 평화스러운 나라로서 인류의 보편적인 문화 창달에 기여할 수 있는 민족이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모습이 교육에 나타날 때 오늘날 냉소주의와 허무주의가 뒤범벅이 된 교육이민이라는 말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으로 믿는다. 《경계인의 사색》 290쪽


“혹시 내가, 이대로 영원히 바다 위에서. 으앙∼. 오는 게 아니었어!” “못 말려. 아직 30분도 안 됐는데.” 《도라에몽 6》 108쪽



《黃順元全集 4 너와 나만의 時間·내일》(황순원, 문학과지성사, 1982.8.10.)

《탄광마을 아이들》(임길택, 실천문학사, 1990.5.5.)

《문화비평 2호》(이기철 엮음, 형설출판사, 1989.6.10.)

《경계인의 사색》(송두율, 한겨레신문사, 2002.10.14.)

《도라에몽 6》(후지코 F.후지오/박종윤 옮김, 대원씨아이, 1995.10.31.)

#藤子F不二雄 #ドラえもん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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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22 알아보는 눈을

책벌레수다 : 값은 몰라도 속을 읽으면



  모든 책은 삶을 배우는 길잡이라고 느낀다. 얼핏 ‘좋은책·나쁜책’으로 가르면서 ‘미운책·싫은책’은 아예 거들떠보지 않는 분이 많은데, ‘좋은책’만 챙기는 사람은 언제나 눈이 좁더라. ‘나쁜책’이라고 손가락질받는 책도 나란히 품으면서 살피는 사람은 으레 눈이 넓더라. 미운책이나 싫은책을 안 따지면서 ‘배울책’을 읽는 사람은 언제나 스스로 눈을 틔우더라.


  나는 누구한테서 책이나 책읽기를 배운 바가 없다. 그저 책집마실을 하며 스스로 익힌 책빛이다. 책집에서 만난 책어른과 책이웃과 책동무하고 끝없이 책수다를 하면서 곰곰이 짚으면서 하나씩 알아갈 뿐이다. 아이랑 책집마실을 하는 동안 “아이가 활짝 웃으며 손에 쥘 책”이란 무엇일는지 헤아리면서 다시 익힐 뿐이다.


  책스승은 따로 없다. 모든 사람이 다르게 책스승이다. 아이들이 책스승이고, 이웃이 책스승이다. 책집지기가 책스승이고, 책을 펴내는 모든 일꾼이 책스승이다. 어떤 책을 쓰거나 옮기거나 내든, 누구나 다르게 책스승이다.


  모든 사람은 스스로 배운다. 스스로 안 배우는 사람이라면 허수아비이다. 스스로 배우는 사람은 “시키는 대로 따라가는 심부름”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나서 일으키는 일”을 한다. 누가 무엇을 맡길 적에 ‘심부름’으로 여기는 사람은 싫어하는 티를 내면서 억지로 맺고, ‘일’로 삼는 사람은 그저 새롭게 배우려는 매무새로 즐겁게 맺는다.


  그러니까 일을 하면 된다. 심부름을 맡을 적에는 “남이 나한테 맡겼다” 같은 틀을 내려놓고서 “내가 스스로 나선다”는 마음으로 돌릴 노릇이다. 맡겼기 때문에 따라가는 길이 아닌, 나서서 맡는 길로 돌아서기에 비로소 바람을 일으키고 물결이 일어난다.


  말할 수 없는 일이란 있을까? 말할 수 없다면 일이 아니라고 느낀다. 모든 일은 누구나 다르게 말하게 마련이다. 말할 수 없다고 여긴다면, 눈치를 보거나 생각을 않거나 이야기를 끊거나 종살이로 치닫는 셈이겠지. 둘레를 보면, ‘말’을 하면 나한테 길미가 안 된다고 여기니 말을 삼가더라. ‘말’을 하면 둘레에서 우리를 이쪽이나 저쪽으로 갈라놓으려고 하니까 싫어서 말을 끊더라. ‘말’을 하면 “네 주제에 무슨 소리?” 하면서 비웃거나 내치니까 창피하거나 수줍어서 말을 안 하고.


  그렇지만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은 ‘마음’을 담고 나타내는 소리인걸. 마음은 저마다 ‘삶’이라는 길을 보내거나 지낸 자취이다. 삶을 잇고 누리고 펴기에 마음에 담아서 말로 옮길 뿐이다. 말을 할 수 없다면 아직 삶이라는 자리에서 몸으로 겪거나 치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몸으로 겪거나 치렀는데 말을 할 수 없다면 눈치를 보는 굴레이다.


  ‘말’로 드러내기에 뒤틀리지 않는다. ‘말하기’가 아니라 ‘꾸미기’나 ‘치레하기’를 헤아리느라 그만 뒤틀린다. 그저 보거나 느끼고 겪은 대로 말을 할 적에 언제나 스스로 새롭게 배운다. 흔히 “지식은 머리에 쌓고, 교양은 삶으로 드러난다”처럼 잘못 말을 하던데, ‘지식 = 부스러기’라서 머리에 먼지로 쌓여서 생각을 막는다. ‘교양 = 겉치레’라서 교양이 몸에 밸수록 되레 꾸미거나 치레하고 만다.


  우리는 ‘지식·교양’이 아닌 ‘알다(앎)’를 느낄 길을 갈 노릇이다. ‘알’려면 새끼새가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듯 ‘앓’아야지. 일부러 어려운 책을 읽으면서 끙끙 앓는들 알지 않는다. 가장 쉽다고 여기는 그림책과 어린이책부터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알깨기를 하면서 알아차린다. 이렇게 쉬운데 무슨 뜻일까 하고 되짚고 되새겨야 천천히 알아본다.


  ‘쉬운책’을 읽기 때문에 생각을 못 하지 않는다. ‘쉬운책’을 곁에 안 두는 탓에 생각을 잃는다. 어린이하고 나란히 서서 이야기할 ‘쉬운책’부터 품기에 생각이 반짝반짝 살아나고 깨어난다. 어린이 곁에 서지 않으려 하니 ‘어려운책’은 손에 쥐지만, 막상 생각하고는 한참 멀다. ‘어려운책’을 쥐어야 많이 배운다고 잘못 여기느라, 그만 말을 어렵게 꼬거나 뒤트는 굴레에 사로잡힌다.


  오늘날 숱한 책은 ‘낱말과 글자락만 억지로 어렵게 꾸민 얼개’로 가득하다. 그렇기에 ‘인문교양책’을 많이 읽는 분이 오히려 인문도 교양도 모르는 채 더 등지기 일쑤이다. 어느 책에 누가 “읽는다는 것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일이다” 같은 글을 적었는데, 아주 틀렸다. ‘읽다’라는 우리말도 ‘이해·해석’이라는 일본한자말도 어떤 속뜻인지 안 살피기에 이런 글을 그냥그냥 쓰고 말 뿐 아니라, 우리도 이런 글을 그냥그냥 훑고서 지나간다.


  그러니까, 생각을 해야 한다. ‘읽다’는 ‘일다 + 익다’인 얼개이다. 바람과 물결을 일으키고 몸으로 스며서 저절로 우러나올 때까지 익힐 적에 비로소 ‘읽다’이다. 눈으로 슥 지나칠 적에는 ‘훑다’이다. 일으켜서 익히려면, 풀어내야(해석) 하고 헤아려야(이해) 한다. 둘 다 할 노릇이다. 풀고 헤아리기에 어느덧 마음을 일으켜서 생각으로 반짝여서 눈에 익는다. 이때에 이르러야 ‘읽다’이다. 곧 ‘읽다 = 풀다(해석) + 헤아리다(이해)’일 테니, 풀기만 하거나 헤아리기만 하면 읽어내지 못 한다.


  책값은 책을 밝히거나 말하지 못 한다. 세간값은 세간을 밝히거나 말하지 않는다. 비싸기에 좋은 책이나 세간일 수 없다. 싸기에 나쁜 책이나 세간이지 않다. 값은 몰라도 된다. 아니, 값을 볼 일이 없다. 어떤 값이든 속을 보면 된다. 값이 어떻더라도 알맹이를 살피면 된다. 배우려는 길을 스스로 읽으면 되고, 익히려는 길을 스스로 일구면 된다. 한꺼번에 알아차리기에 나쁘지 않지만, 하나씩 알아차리기에 즐겁다. 한 발짝씩 걸으면서 알아간다. 하나하나 빚고 짓고 다듬으면서 알아낸다. 하나둘 열고 틔우고 피우면서 환하게 깨닫는다.


ㅍㄹㄴ


+


“자네가 하는 일은 항상 기성 라면의 구조에 올라서서 세부를 조금씩 개량한 것뿐이야. 하지만 라면만이 아니야. 새로운 무엇인가는 구조마저 의심하고 파괴하지 않고서는 태어나지 않아!” 《라면 요리왕 8》 135쪽


“그 자식 잔소리를 안 듣고 있었다고?” “듣기는 했지만 귀동냥을 하고 있었죠. 하지만 저보다 오라버니를 찍어 누르려는 게 용서가 안 됩니다!” “왜 네가 화를 내는데?” “고맙게 해 주시는 분을 바보 취급하는데, 화내지 않는 게 이상하잖아요!” 《아카네 이야기 4》 189쪽


시장 논리에 의해 기획되고 저렴하게 만들어진 책을 당장의 싼값에 구입한 독자들은 이내 실망을 하고 맙니다. 실망스러운 책은 읽어 봐야 소용없는 무용성의 종이 뭉치가 될 뿐입니다. 장식장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서정가제가 없어지면 우리가 읽고 싶은 책이 사라집니다》 100쪽


당시 한국광복군 창립식에 참여했던 이들은 1938년 11월에 결성된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이었는데, 34명 중 11명이 여성이었습니다. 《나는 여성이고, 독립운동가입니다》 213쪽


“그렇잖아. 난 아빠 말고도 매직걸 좋아하고, 요즘은 달리기랑 학교도 좋고, 그림 그리기도 좋아. 그런데 아빠가 좋아하는 게 나뿐이라니 쓸쓸하잖아? 그치만 밥 만드는 걸 좋아해서 다행이야!” 100쪽



《라면 요리왕 8》(쿠베 로쿠로 글·카와이 탄 그림/정하연 옮김, 대원씨아이, 2003.5.15.)

#ラ-メン發見傳 #久部綠郞 #河合單

《아카네 이야기 4》(스에나가 유키·모우에 타카마사/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2024.1.25.)

#あかね? #末永裕樹 #馬上鷹?

《도서정가제가 없어지면 우리가 읽고 싶은 책이 사라집니다》(백원근 글, 한국출판인회의, 2020.10.8.)

《나는 여성이고, 독립운동가입니다》(심옥주, 우리학교, 2019.2.16.)

《달콤 달콤 & 짜릿 짜릿 8》(아마가쿠레 기도/노미영 옮김, 삼양출판사, 2017.12.4.)

#甘?と?妻 #雨?ギド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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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21 나무를 읽는 손

책벌레수다 : 휘두르지 않고 쓰다듬기



  나무는 우람하게 자라더라도 굳이 큰소리도 작은소리도 내지 않으면서 가만히 둘레를 아우른다. 나무가 맺는 씨앗은 더없이 작지만, 이 작은씨가 머잖아 아름숲으로 피어나는 첫길이다. 나무는 뭇새가 잔뜩 날아앉아도, 애벌레가 잎을 잔뜩 갉아도 그저 모두 내어준다.


  우리는 아이라는 나날이던 때에 아무런 손길을 못 받고 자랐을 수 있는데, 오늘은 어른과 어버이라는 자리에 서서 새록새록 따스하게 손길을 펴는 나무로 설 만하지 싶다. 올해(2026해)로 쉰 살이 넘은 분이라면 “비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는 하루”를 신물나도록 겪었으리라. 마흔 살이 넘은 분도 툭하면 얻어터지면서 살아야 했을 테지. 서른 살이 넘은 분 언저리는 거의 안 맞는 나날을 보냈지 싶고, 스무 살이 넘는 분은 주먹다짐이 자취를 감추다시피 한 터전이라고 느낀다.


  “맞고 컸”으니까 “때리면서 키우”기 쉽다. 우리나라 싸움터(군대)가 꼭 이런 꼬라지였다. 윗내기는 새내기를 신나게 두들겨패고 괴롭히고 막말을 일삼는다. 새내기는 가운데(중간고참)에 이를 무렵에 “예전에 얻어맞고 시달리던 그대로” 새내기를 억누르고 괴롭히는 몫을 맡아야 한다. 이런 얼뜬짓이 안 끊이는 모습이 지겨우면서 괴로웠다. 석걸음(상병)을 지날 즈음부터 또래(입영동기)를 말렸다. “얘들아, 우리까지만 죽도록 맞고서 끝내자. 이 멍청한 짓을 물려줄 수 없어.” “무슨 소리야? 너도 그렇게 맞았으면서 어떻게 그냥 지나가? 야, 우리가 때리고서 나가야지.” “그럼, 우리한테 맞는 동생들도 걔네가 우리 자리에 오면 똑같이 때리잖아? 우리부터 끊어야 하지 않아?” “와, 여기 부처님이 다 계시네. 아니, 예수님인가? 야, 우리는 그냥 육군보병 똥개야. 똥개일 뿐이니까 똥개로 구르다가 가야지.” “뭐, 우리가 똥개는 맞지만, 내가 부처님이나 예수님처럼 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주먹을 안 들고 말로 하면서 바꿀 수 있지 않겠니?” “네, 네, 너 혼자 그러세요.”


  책벌레는 책을 쥘 적마다 나무가 베푸는 빛이 무엇인지 돌아본다. 우리가 쥐는 모든 책은 아름숲에서 오고, 아름숲은 아름드리나무가 베푼 종이로 묶는다. 나무한테서 받은 종이에 어떤 글을 앉혀서 어떤 줄거리를 다루든, 책을 손으로 만질 때마다 나무를 만나고 느끼고 얘기한다고 느낀다.


  책벌레는 누구보다도 나무를 곁에 두는 삶이다. 시골 아닌 서울에서 살더라도 책벌레는 나무가 베푼 사랑을 어마어마하게 누리는 나날이다. 나무 한 그루 심을 땅뙈기조차 없는 땅밑집(지하실)이나 하늘집(옥탑방)에서 살더라도, 그냥 잿더미(아파트)에서 살더라도, 책벌레는 누구보다도 푸른책(환경책)을 가까이할 노릇이면서, 푸른살림을 일구려고 온힘을 기울여야지 싶다. 온통 ‘나무몸’인 ‘종이꾸러미’를 이루는 책이니까.


  나무는 언제나 베푸는데, 나무 스스로 ‘베푼다’고 여기지는 않는다고 느낀다. 나무는 그저 작은씨를 틔우고 깨워서 천천히 줄기를 올려서 푸르게 노래하려는 길이라고 느낀다. 우리집에서 자라는 나무이든, 마을이나 길에서 스치는 나무이든, 서울이나 큰고장에서 슬프고 아프게 줄기치기와 가지치기에 시달리는 나무이든, 그윽히 바라보다가 살며시 쓰다듬고 폭 안기도 하고, 때로는 부드럽게 입맞춤을 한다. 나는 나부터 나무를 사랑하는 책벌레로 걷는 하루이고 싶다.


  나무살림을 지켜보는 사람은 “아낌없이 베푸는 나무”로 여기지만, 나무는 늘 스스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지을 뿐이라고 본다. 사람은 늘 나무한테서 받고 누리고 얻되, 나무는 “사람한테 베푼다”는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 푸르게 빛난다”는 마음이라고 본다. 어찌 이렇게 여기느냐 물을 만하겠지. 마주하는 모든 나무를 쓰다듬고 안고 뺨을 대면서 물어본다. “넌 어떤 숨결인 사랑이기에 이토록 사람한테 넉넉히 베풀 수 있니?” 나무는 으레 우리 마음에 울리는 고즈넉한 빛소리로 사근사근 들려준다. “네(사람)가 나(나무)를 바라보는 눈빛 그대로, 나(나무)는 너(사람)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춤추고 노래하는 하루야.”


  나무는 나무 스스로 빛난다. 나무 곁에 선 사람은 사람으로서 나란히 빛날 수 있다. 나무한테서 얻는 살림을 기쁘며 반갑게 다루고 갈무리하면서 새롭게 오늘을 지으면, 나무도 사람 곁에서 어느새 ‘받고 누리’는 사랑이 있는 길이지 싶다.


  지난날 싸움터(군대)에서 겪은 일을 더 떠올려 본다. 그때(1995.11.6.) 싸움터에 끌려가서 마지막날(전역일 1995.12.31.)을 함께 맞이한 또래가 열이었던가. 마지막날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새벽에 눈이 오지게 내려서 쌓였다. 한 길(1m) 넘게 쌓인 눈이라 어떤 수레(트럭)도 다닐 수 없었다. 마지막말(전역신고)을 외치는 우리한테 중대장과 대대장은 “야,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데 하루 더 자고서 가지 그래? 걸어서 어떻게 먼 멧길을 내려가려고?” 하면서 웃는다. 우리는 한목소리로 “눈밭을 헤치며 내려가다가 벼랑에 떨어져 죽더라도 오늘 집으로 가겠습니다!”


  한나절 남짓 걸어서 내려가며 또래들하고 이야기한다. “최뱀, 너 대단하더라.” “뭐가?” “네가 꺾였을(상병6호봉) 때 우리를 다 모아서 동생들 때리지 말자고 했던 말 생각나?” “그럼, 생각나지.” “너 어떻게 애들 안 때리고 끝까지 버텼냐? 대단하다.” “난 너희가 더 대단해.” “에? 뭐가?” “아무리 얼뜬 놈들한테 신나게 얻어맞고 굴러야 했더라도, 어떻게 멀쩡하고 불쌍한 동생들을 그렇게 때릴 수 있냐? 우리가 뭘 잘못해서 맞은 적이 없잖아. 그놈(고참)들은 그냥 심심풀이로 때리고 괴롭혔잖아.” “그렇지.” “안 때리고도 함께할 수 있어. 이제는 주먹질은 지긋지긋하고, 사라져야 해.”


  강원도 양구군 동면 원당리에서 시골버스를 타고서 양구읍으로 나온다. 이제 다들 헤어질 때이다. 헤어지기 앞서 허름한 밥집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불술(소주)을 두 병씩 깠다. 눈물콧물을 흘리면서 “우리, 살아남았지? 그 눈밭을 헤치고서 드디어 그 불바다에서 살아나왔지?” 하는 말을 주고받았다. 나는 춘천으로 가서 기차를 탔다. 마지막으로 몸을 싣는 ‘티엠오’이다. 청량리역에서 내린 뒤 용산역 앞 〈뿌리서점〉부터 들른다. 책집지기 아저씨한테 큰절을 올리며 “저 이제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이제부터 뻔질나게 책을 보러 오겠습니다. 군대에서는 책을 한 줄도 읽을 수 없었으니, 읽어야 할 책이 어마어마합니다.” 서울에서 인천으로 전철을 타는데, 어쩐지 쓸쓸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이엠에프’라고 했다. 아이엠에프가 덮치면서 삽질(공사장 노가다) 일자리가 몽땅 사라졌다. ‘백두산부대 겉옷’을 입고 삽질을 나가면 일삯을 곱빼기로 준대서 잔뜩 별렸는데.


ㅍㄹㄴ


남성은 그들 내부의 여성과 융합할 때 창조적이 되고, 또 여성은 그들 안의 남성 속에 깃든 여성성과 닿을 때 창조적이 됩니다. 《지구, 우주의 한 마을》 22쪽


다른 사람의 문화를 파괴하는 것은 불멸성을 빼앗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사라예보의 올림픽 스타디움과 중앙도서관이 파괴되었다는 기사를 읽고 울었다. 신문에 실린 폐허가 된 도서관 사진이 무엇보다도 속상했다. 그 문화가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 251쪽


내가 혼자서 가만히 참고 있는 동안에, 유카리 일당뿐만 아니라 반 여학생 전체가 나를 무시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학교를 결석하지는 않았다. 누구 하나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도 선생님이 눈치 채지 못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했다. 《불균형》 20쪽


“그렇습니다. 당신도 바벨2세도 바벨 님의 피를 이어받은 자손입니다. 그러나 바벨2세 쪽이 보다 강한 바벨님의 피를 이어받은 것입니다.” … “내 최대의 힘을 쓸 수 없다는 건가. 그럼 이제 요마와 어떻게 싸우지?” “당신의 능력으로 싸우십시오. 당신이 수천 년 전에 그 능력으로 기적을 일으켰다면 인류는 당신을 신으로 모셨을 겁니다. 그건 요마도 마찬가지겠지만요.” 《바벨 2세 2》 43, 226쪽


즉 항상 즐거운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설사 자신은 기분이 나빠도 미소를 띄우고 활력과 자신감을 보여야 한다 … 단순생산직 종사자들과 마찬가지로 창조적 전문가들은 자기들 일의 최종 수혜자와 직접 접촉하는 일은 별로 없다. 191, 193쪽



《지구, 우주의 한 마을》(게리 스나이더/이상화 옮김, 창비, 2005.5.23.첫/2015.9.30.고침)

#APlaceinSpace #GarySnyder

《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템플 그랜딘/홍한별 옮김, 양철북, 2005.9.12.)

#ThinkinginPitures (1995년) #TempleGrandin

《불균형》(우오즈미 나오코/이경옥 옮김, 우리교육, 2004.10.22.)

#非バランス (1996년) #魚住直子

《바벨 2세 2》(요코야마 미쓰테루/이동섭 옮김, AK커뮤니케이션즈, 2007.1.30.)

#バビル2世 #橫山光輝

《國家의 일》(로버트 비 라이시/남경우 외 옮김, 까치, 1994.7.1.)

#RobertBReich #WorkofNation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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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20 서울국제도서전

책벌레수다 : ‘모두잔치’ 아닌 ‘돈잔치·이름잔치’라면



  오늘 우리가 누구나 배울 수 있는 터전을 누린 지 고작 온해(100년)도 안 된 줄 모르기 일쑤이다. 그런데 “누구나 배우는 터전”을 마련하라고 임금님한테 목소리를 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기 일쑤이다. 이른바 ‘누구나배움(국민교육)’을 외친 사람은 ‘페스탈로치’이다. 페스탈로치라는 아재는 ‘전쟁고아’를 몸소 거두어 ‘누구나배움터’를 열었고, 나라(독일 정부)에서 이 아이를 돌보고 가르쳐서 ‘생채기를 씻고 달래어 아름답고 즐겁게 살아갈 어른으로 북돋울 몫(의무)’이 있다고 외쳤다.


  그렇지만 페스탈로치가 죽는 날까지 임금님뿐 아니라 벼슬아치는 페스탈로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페스탈로치는 그저 이녁 온힘을 쏟아서 아이를 돌보고 가르치고 품었다. 뒷날 페스탈로치가 외친 ‘누구나배움’이 천천히 퍼지고 자리를 잡아서 ‘초중고 기본교육 제도’가 모든 나라에 뿌리내렸다. 그리고 이런 배움틀을 마련한 페스탈로치 같은 이름은 그야말로 우리나라에서 교육대학교에서나 조금 짚을 뿐 교대 바깥에서는 까맣게 모른다. 이와 달리 ‘루소’ 같은 사람 이름은 오래도록 ‘사상가’라는 이름을 누린다.


  우리는 어디를 보는 사람일까? 우리는 무엇을 읽는 사람일까? 우리는 속읽기를 잊은 채 겉훑기에 사로잡힌 늪이로구나 싶다.


  황석희·료·정희원·고은·신경숙·정지돈·이병한·박위뿐 아니라 숱한 겉치레 이름꾼이 드날리면서 책과 말과 글로 돈벌이를 일삼았다. 그들은 일찌감치 겉발린 말글책을 선보이면서 홀렸다. 우리는 속빛이 아닌 겉치레로 꾸민 숱한 책을 의젓하게 쳐내거나 솎아내지 못 한 채 살아간다. 이들 민낯은 이제 드러났지만, 민낯이 아직 안 드러난 숱한 글쟁이와 말쟁이가 있다.


  앞으로도 민낯이 드러날 이는 수두룩한데, 민낯이 드러날 때마다 놀라기보다는, ‘속(행간)’을 읽어야 한다는 오래말처럼 이제는 ‘얼굴값’이 아니라 ‘속’을 읽고 살피고 찾는 길로 우리 스스로 바꿀 때이지 싶다. 모든 책을 다 읽으려는 마음이되, 허울좋게 꾸미는 글꾼은 되도록 삼갈 줄 알아야지 싶다. 아니, 스스로 보금자리부터 몸소 가꾸는 하루라면 ‘겉글꾼’이 아니라 ‘속빛이웃’이 여민 책을 시나브로 가까이하겠지.


  지난 2025해 봄에 ‘서울국제도서전 사유화’를 둘러싼 고름을 건드린 여러 사람이 있다. 한 해가 흐르는 동안 지켜보는데, 이 고름덩이는 새해를 맞이해도 풀릴 낌새가 안 보인다. ‘모두잔치’여야 할 책마당을 ‘혼자 돈잔치’로 바꾸고 만 슬픈 민낯이지만, 이런 속내를 찬찬히 짚은 글바치(기자·작가·평론가)부터 한 줌조차 안 된다.


  다만 한 줌조차 안 되더라도, 한 줌 있는 작은씨앗은 ‘그들끼리 혼자 돈잔치’가 아닌 ‘누구나 즐겁게 책잔치’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목소리를 낸다. 생각해 볼까. ‘모두잔치’라면 ‘누구나잔치’요, 누구나 드나들 자리를 마련해서, 가난하건 가멸차건 스스럼없이 만나고 아우르는 놀이터와 노래터를 이룬다. 모두잔치가 아닌 ‘돈잔치’에 ‘이름잔치’에 ‘힘잔치’라면, 목돈을 낼 만한 사람과 펴냄터가 한복판에 서겠지.


  여태껏 흘러온 ‘서울국제도서전’은 이름을 드날린 펴냄터·글바치끼리 한복판에 서면서, 돈과 이름이 있는 이들끼리 한복판에서 돈맛·이름맛·힘맛을 펴면서, 온나라 모든 펴냄터·글꾼을 들러리로 세울 뿐 아니라 ‘머리(참가자 숫자)’만 늘리는 틀이었다. 잔치가 아닌 ‘자랑’일 뿐이지 싶다. 2026해에 맞이할 ‘모두책잔치’라면 ‘에이아이(AI)’로 장난질을 치는 이름꾼을 내세울 일이 아니다. ‘어린이’ 곁에서 ‘어질게 어른으로 서는’ 작은글꾼과 작은펴냄터 누구나 한복판에서 놀고 노래하는 한마당을 일굴 노릇이다.


  1954해에 ‘서울도서전’이 있었다고도 하지만, 제대로 책잔치를 꾀한 무렵은 1982해에 ‘한국출판판매회사’가 3.20.부터 한 달에 걸쳐서 ‘서울북페어’란 이름으로 너른마당을 편 때로 보아야지 싶다. ‘서울책잔치’를 꾀하던 1982해에 자그마치 한 달에 걸쳐서 했다고, 이듬해에도 이렇게 길고 넓게 책마당을 폈다고 들었다. 그야말로 누구나 모두 함께할 만하도록 자리를 열었고,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모든 책을 담고 품고 나누고 알리는 큰잔치를 이루었다고 들었다.


  곰곰이 보면 ‘국제도서전’ 같은 이름은 매우 일본스럽다. 우리는 굳이 일본스런 이름을 안 써도 된다. 이제는 ‘북페어’도 ‘도서전’도 아닌, 굴레 같은 허울은 떨쳐내고서 ‘책잔치’를 하면 된다. ‘모두책잔치’를 열 수 있으면 된다. ‘서울책잔치’처럼 수수하게 이름을 붙이는 길부터 살필 수 있다.


  사랑은 그저 ‘사랑’일 뿐이라서, 사랑에는 높낮이나 크기가 없다.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따로 없이 그저 사랑이다. 해마다 우리나라 온책과 온글과 온사람을 모으는 온잔치라면 ‘온잔치’라 할 수도 있고, ‘온서울잔치’나 ‘온책잔치’라 할 만하다. 오히려 가장 수수하게 ‘서울책잔치’라는 이름이 가장 환하고 아름답게 나아갈 길을 밝히는 ‘작은’ 이름일 수 있다고도 느낀다.


  으리으리하거나 우람하게 내세운다든지, 몇몇 이름꾼을 드높이려고 하는 틀을 버릴 수 있어야 잔치이다. 봄마다 들숲메에 온갖 들꽃이 너나없이 어울리면서 돋아나서 푸르게 일렁이듯 수수하고 작은 모든 펴냄터와 글꾼이 어울려야 한마당이다.


  ‘서울책잔치’는 크든 작든 모든 펴냄터와 글꾼한테 활짝 열어젖힌 잔치마당으로 가야 맞다. 잔치마당이라 하더라도 돈잔치나 이름잔치가 아닌, ‘얼굴(대표작가)’을 따로 내세우지 않고서 모든 곳이 다 다르게 빛날 만한 길과 틀을 세우면 된다.


  이를테면, 모든 펴냄터가 똑같은 크기인 칸(부스)을 받아서, 그저 제비뽑기로 자리를 마련하는 길을 갈 적에 서울책잔치답다고 본다. 칸을 돈으로 사고받는 틀에 굳이 얽매이면서 몇몇 얼굴을 내세우는 굴레에 그대로 갇히기에, 자꾸자꾸 돈자랑·이름자랑·힘자랑에 파묻힌다. 이제는 자랑질이 아닌 잔치판으로 갈 때이니, 책사랑이라는 하루를 살아가는 책이웃 누구나 서울책잔치가 아름답게 제자리를 찾는 길을 함께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ㅍㄹㄴ


산마르코 대성당 종탑에 올라 우아한 베네치아를 내려다보고, 볕이 잘 드는 광장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리도 섬에서 해수욕을 하고, 소금기 가득한 피자로 배를 채웠다. 무라노 섬으로 가 밤하늘의 은하수를 담은 유리알 펜던트를 샀다. 《사색하기 좋은 도시에서》 94쪽


“아뇨, 제 아이가 아니에요.” “아, 실례했습니다. 남자 분은 잘 들르지 않으셔서 아빠신 줄 알았어요.” “그랬으면 좋았을걸 말입니다.” “네?” “아, 아무것도 아녜요.” “어쨌든 축하할 일이죠. 아기가 태어났으니!” 《루나 하이츠 2》 198쪽


“그렇게 미도리 선배가 좋으면 어째서 똑바로 솔직하게 대하지 않는 거예요! 그렇게 애매하고, 적당적당 나오니까 나까지 괴로운 거라구요!” 《루나 하이츠 3》 206쪽


스스로 열린 마음을 갖고 있고 다른 문화에도 흥미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너무나 다른 가치와 규범에 맞닥뜨리게 되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른다. 《삶을 위한 수업》 135쪽


“빈 요트를 바다에서 찾는 거야?” “그런 셈이지.” “모두 사람이 타고 있잖아. 빈 요트 같은 건 없다고. 이 거짓말쟁이.” “정말 시끄럽네. 꼭 찾을 수 있을 거야. 인내심을 가지고.” 《도라에몽 플러스 6》 56쪽



《사색하기 좋은 도시에서》(안정희, 중앙북스, 2015.9.7.)

《루나 하이츠 2》(호시사토 모치루/이경주 옮김, 북박스, 2004.9.9.)

《루나 하이츠 3》(호시사토 모치루/이경주 옮김, 북박스, 2004.11.25.)

#星里もちる #ルナハイツ

《삶을 위한 수업》(마르쿠스 베른센 엮음/오연호 옮김, 오마이북, 2020.5.20.)

#MarkusBernsen #Secretstonurturingconfident

《도라에몽 플러스 6》(후지코 F. 후지오/김준균 옮김, 대원씨아이, 2005.4.30.)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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