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11 오늘은 뭘 배울까

책벌레수다 : 야금야금 잎을 갉는 애벌레



  언제나 때에 맞게 만나고 헤어진다. 우리를 스치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좋은이·나쁜이’가 아닌 “그저 그때에 만나서 어울리면서 함께 배우는 사이”라고 느낀다. 날마다 숱한 사람이 태어나고 사라지는데, 우리는 이 숱한 사람 사이에서 ‘나·너’라는 길을 마주하는 마음을 가만히 느끼고 받아들여서 하루를 짓는구나 싶다. 어쩜 저런 짓을 일삼느냐 싶은 사람이 있을 텐데, ‘저런 짓’을 느끼고 겪고 배워야 하기에 ‘저런 사람’을 스치거나 만난다. 저런 사람은 나쁘지 않다. “그러면 넌 저런 때에 어떤 사람으로 어떤 모습으로 서겠니?” 하고 묻고 들려주며 보여주는 길잡이라고 느낀다. 저런 짓을 일삼는 저런 사람을 나무라거나 탓하기도 할 수 있되, 우리 스스로 ‘저곳’에 설 적에 어떤 마음으로 어떤 삶을 지을는지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 서로 만나거나 스치거나 마주치는 셈이다.


우리의 생활이 편리해질수록 어디선가는 반드시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생활이 편리해져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건강이 나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의료비 지출이 늘고 건강기구를 사는 등 결국 돈도 시간도 오히려 소모하게 되는 악순환에 빠지고 마는 거죠. 《궁극의 미니멀라이프》 48쪽


  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아이를 안고 업고 돌보며 늘 쪽종이를 펼쳐서 쪽글을 쓰며 지냈다. 남눈치를 볼 까닭이 없거든. 그림이든 글이든 무엇이든 매한가지라고 느낀다. 아이가 어버이를 지켜보면서 “우리 엄마아빠는 이렇게 사는구나?” 하고 느끼면 되기에, 언제 어디에서나 ‘남눈치’가 아니라 ‘아이 눈망울’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살면 느긋하다. 한 손으로는 아이를 안은 채 다른 손으로는 붓을 쥐고서 글을 끄적이면 얼핏 힘들다고 여길는지 모르는데, 힘들 까닭이 없이 두 손으로 두 일을 마주하는 하루라서 즐겁게 마련이다. 어버이로서 이렇게 두 손으로 두 일을 하면, 아이는 문득 “나도 붓 좀 줘. 나도 쓸게.” 하고 바란다. 이때에 종이랑 붓을 선선히 내주고서 다른 종이랑 붓을 꺼내면, 아이는 차분하면서 조용히 글놀이나 그림놀이로 스며든다. 아이더러 “열린터(공공장소)에서는 조용히 있어야 해. 전철이나 기차에서는 안 뛰어.” 하고 나무라거나 다그치지 않아도 된다. 아이하고 누리거나 놀거나 즐길 살림거리를 챙겨서 다니면 된다.


독재자의 개선문은 먼지로 허물어져 버렸다네. 그 돌들로 아이들은 소꿉놀이용 작은 오두막을 지었네. 《그대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27쪽


  애벌레는 날마다 잎을 갉는다. 갉고 갉고 또 갉고 다시 갉고 새로 갉는다. 애벌레는 잎갉이로 온삶을 보내는 듯하지만, 눈코귀 없이 입 하나만으로 잎갉이를 하면서 허물벗기를 한다. 또 하고 자꾸 하고 새로 한다. 책벌레는 애벌레마냥 그저 읽고 다시 읽고 새로 읽는 동안 천천히 허물벗기를 하며 배우는 길이다. 언제 날개돋이를 할는지 몰라도, 참말로 날개돋이를 해낼는지 몰라도, 새삼스레 다시 일어나는 새벽에 잎을 갉으면서 풀똥을 누고, 또 잎을 갉아먹고서 풀똥을 눈다.


“이길 만하니까 이긴다. 그렇게 되기 위해 마구잡이로 사람을 베는 세월이 필요한 거야. 그 경지까지 이르면, 싸우기 전에 이미 이긴 거라면, 어라? 그때는, 싸우는 것 자체가 필요할까?” 《배가본드 21》 99쪽


  아기는 어버이 품에 안겨서 젖을 문다. 아기는 젖을 먹고서 똥을 누고, 또 젖을 먹고서 똥을 눈다. 내도록 업히고 안기며 젖먹이로 지내다가 문득 웃고, 트림을 하고, 눈을 깜빡이고, 귀를 쫑긋하고,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잼잼을 한다. 도리도리 고갯짓을 하고, 이제 목을 가눌 줄 알면 어느새 다다다닥 달리듯 기어다닌다. 아기가 하루아침에 서거나 달리지 않듯, 아기가 하루아침에 말을 떼지 않듯, 책벌레는 애벌레를 닮고 아기를 닮은 터라, 늘 읽고 또 읽고 또또 읽고 또또또 읽는다. 지치지 않고서 읽는다. 아니, 지치도록 읽는데, 지쳐서 나가떨어져도 또다시 읽는다. 무엇을 배우려는 책읽기인지 몰라도 마냥 읽는다. 이러다가 고단해서 폭 곯아떨어지면 꿈길에서 헤매다가 마침내 고치를 틀 날을 맞이한다. 애벌레가 고치를 튼다면, 책벌레는 글을 쓴다. 애벌레가 고치를 틀어 꿈을 헤매다가 날개를 단 몸으로 피어나면서 밖으로 나오듯, 책벌레는 어느새 글벌레로 거듭나더니 책 한 자락을 내놓고서 활짝 어깨를 편다.


“그 말뜻은 같은 병의 환자라고 해도 한 명 한 명에게 가장 적절한 치료법이 있다는 말씀이잖아요. 저희 아버지께 가장 적절한 치료법은 빨리 퇴원시키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아버지의 병의 뿌리는 아주 깊어요. 이번이 아버지의 맘속에 있는 아주 나쁜 병을 치료할 아주 좋은 기회예요.” 《Dr.코토 진료소 2》 158, 159쪽


  대단하거나 훌륭하다 싶은 책만 읽지 않는다. 대단하거나 훌륭하다 싶은 글만 쓰지 않는다. 그저 읽듯 그저 쓴다. 그저 살피듯 그저 익힌다. 둘레를 보면, 속이 없으니 겉을 꾸미려 들고, 겉을 꾸미려 드니까 쭉정이 같은 줄거리로도 글과 책을 쏟아내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책벌레는 쭉정이책도 집어든다. 쭉정이책은 왜 쭉정이로 가득한 책인지 알아보려고 읽는다. 겉치레책도 챙긴다. 겉치레책은 왜 겉치레로 겉만 휘감는지 찾아보려고 읽는다. 허울뿐인 책을 읽다 보면, 허울이란 무엇이고 하늘이란 무엇인지 새삼스레 느낀다. 속없이 허울로만 채운 책을 느끼거나 알았기에, 책벌레가 쓰려는 글은 ‘하늘빛’처럼 파랗게 물들면서 속으로 여문 이야기를 꾸려야겠다고 배운다. 이러다가 드물게 아름책을 만나면, 삶이라는 길을 이렇게 여미기에 반짝이는구나 하고 배우지. 이곳에서도 배우고 저곳에서도 배운다. 이 책으로도 배우고 저 책으로도 배운다. 모든 책으로 배운다. 모든 책은 새책이다. 모든 책은 배움책이다. 모든 책은 오랜슬기를 담으면서 새빛을 흩뿌리는 씨앗이다.


내가 쓴 글은 나의 역사다. 내가 쓴 것이 나의 역사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 글에는 그동안의 삶이 쓰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빈집과 공명》 76쪽


  영어 ‘디자인’을 우리말로는 여러 갈래로 옮긴다. ‘그리다’나 ‘꾸미다’나 ‘만지다’로 옮길 수 있는데, 겉으로만 만지면 ‘꾸미다’이고, 속으로 어루만지려고 하면 ‘그리다’를 거쳐서 ‘가꾸다’로 나아간다. 천천히 배우려고 하니 찬찬히 익히면서 온몸과 온마음에 담는다면, 서둘러 선보이거나 내세우려고 하니 그만 겉을 꾸미고 만져서 겉멋과 겉치레라는 허울로 기울고 만다. 책벌레는 겉도 속도 배운다. 우리 몸을 이루는 겉살인 ‘살갗’이 있기에 만지고 쥐고 잡고 다스리고 다룬다. 살갗이라는 ‘겉살’도 대수롭다. 다만 겉살만으로는 못 움직인다. 속살이 있어야 하고, 속살은 뼈와 뼈대가 든든하기에 움직인다. 겉속이 나란하면서 뼈가 굵을 노릇이요, 뼈와 살은 머리로 이끌고, 머리는 마음으로 북돋우고, 마음은 생각으로 짓고, 생각은 저마다 오롯이 빛나는 사랑이라는 숨결로 깨운다. 잎갉이를 하듯 책읽기를 하는 나날이란, 온마음과 온몸을 나란히 움직이는 온넋을 지피는 눈빛을 밝히는 길이지 싶다. 이리하여 또 읽고 자꾸자꾸 읽는다.


ㅍㄹㄴ


《궁극의 미니멀라이프》(아즈마 가나코/박승희 옮김, 즐거운상상, 2016.10.10.)

#アズマカナコ #電氣代500円 #贅澤な每日 (2013년)

《그대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타고르/이상영 옮김, 다보, 1990.11.5.)

#RabindranathTagore

《배가본드 21》(요시카와 에이지·이노우에 타카히코/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2005.11.25.)

#バガボンド #Vagabond #吉川英治 #井上雄彦

《Dr.코토 진료소 2》(타카토시 야마다/문희 옮김, 대원씨아이, 2001.6.19.)

#Drコト診療所 #山田貴敏

《빈집과 공명》(신유보, 결, 2024.10.21.)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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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10 서로 길잡이

책벌레수다 : 보임꽃 〈모아나〉를 읽기



  길만 잡는다고 해서 ‘길잡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길을 잡거나 알리는 몫이라면 ‘길알림’이다. ‘길찾기’처럼 길을 돕는 연장에서 그치면 ‘길알림’이다. ‘길잡이’는 꼭 길만 찾거나 알리지 않을 뿐 아니라, 길을 못 찾거나 함께 헤매거나 어디로 가야 할는지 못 알릴 수 있다. 길잡이라는 이름일 적에는 언제나 스스럼없이 먼저 나서서 이슬을 받는 몫이다. ‘길잡이 = 이슬받이·이슬떨이’인데, 제아무리 먼저 이슬을 받으면서 어두운 새벽길을 앞장선다고 하더라도 뜬금없거나 엉뚱한 샛길에 빠질 수 있다. 길잡이란 옹근 사람이지 않다. 길잡이는 어수룩하거나 모자란 사람이게 마련이다. 함께 헤매고 함께 살피고 함께 걸으면서 함께 배울 줄 알되, 걱정하거나 두려운 사람들 앞에서 빙그레 웃으며 먼저 가시밭에 발을 내딛기에 길잡이라고 한다.


“우리 지금은 이렇게 서로 얘기하고 있지만, 반도 다르고 해서, 이런 일이 없었다면 평생 서로 얘기할 일도 없었을 것 같아.” 《조난입니까? 2》 152쪽


  우리는 일본말씨를 받아들여서 ‘교사·선생’ 같은 이름을 쓰는데, ‘가르침이’나 ‘앞사람(먼저 태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만으로는 어린이와 푸름이를 이끌기 어렵다고 느낀다. 배움터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른이라면 ‘길잡이’일 노릇이라고 본다. 길잡이 스스로 늘 헤매게 마련이고, 참으로 아직 잘 모르기 일쑤이기에,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되묻고 스스로 돌아보면서 길풀이를 여미는 몫이면 된다. 이리하여 길잡이는 어느 쪽에도 안 서는 사람이다. 길은 하나가 아닌 터라, “이쪽 길잡이”나 “저쪽 길잡이”가 아닌, “어린이 길잡이”나 “푸름이 길잡이”이면 된다. 예부터 모든 어버이는 처음부터 “빈틈없으면서 다 깨달은 사람”이지 않다. 어버이는 아기를 밸 무렵부터 삶을 배우고, 아기를 낳을 즈음부터 살림을 익히고, 아기가 자라나는 동안 사랑을 나누고 누리는 하루를 짓는다. 어른과 어버이와 길잡이는 나란하다. 셋 모두 ‘빈틈있는’ 사람이요 자리에 삶길이다. 빈틈이 있기에 허술하거나 모자라고, 허술하기에 차분히 가다듬으며, 모자라기에 차근차근 북돋운다.


“더 이상은 무리야. 이제 끝이구나.” “괜찮아. 그 어떤 상황에서든 뭔가 방법은 있는 거니까, 시온.” 《조난입니까? 3》 87쪽


  보임꽃 〈모아나〉가 있다. 대단히 잘 나온 보임꽃이다. 모아나 할머니는 이미 다 알지만 굳이 다 물려주지 않는다. 모아나 할머니는 넌지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할머니 꿈’을 아이한테 밝힌다. 그리고 할머니 스스로 이룬 꿈을 너른바다에서 몸소 보여주면서 다시 길잡이 노릇을 하는데, 귀띔만 할 뿐 실마리를 다 알려주지 않는다. 모아나 어버이는 이미 바닷길을 잊고 잃었다. 모아나뿐 아니라 모아나 어버이나 섬사람 모두 바닷살림을 못 한다. 그렇지만 모아나는 목숨을 걸고서 바닷길을 열려고 나선다. 다만 바닷길로 나서는 첫고비부터 못 넘고서 끝없이 자빠지고 넘어지고 부딪히는데, 마침내 스스로 부딪혀서 온몸으로 배운 끝에 너른바다로 나아갈 수 있다. 모르기에 배우려고 하는 아이가 모아나요, 모르는데 모르는 줄 잊어버린 어른이 ‘모아나 엄마아빠’이며, 이미 알지만 ‘아이 스스로 몸으로 부딪히고 마음으로 익히기를 바라는 뜻’을 꿈씨앗으로 물려준 할머니이다. 옛날 옛적에 바닷길을 연 먼먼 어버이도 처음에는 자빠지고 부딪히면서 바닷길을 익혔기에, 모아나도 옛사람과 나란히 ‘자빠지고 부딪히는 온몸과 온마음’으로 처음부터 새로 익혀야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아나〉라고 하겠다.


보는 내내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모아나는 내가 기대하던 그 여자아이가 아니었다. 그 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섬을 구하겠다며 뛰쳐나온 주제에 배 하나 다룰 줄 모르는 게 말이나 되는가?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해》 98쪽


  사람은 누구나 처음 태어날 적에 아름답다. 아름다운데 참으로 조그마한 몸을 입고서 아기부터 다시 삶을 연다. 우리가 아름다운 빛이 아니라면 아기로 안 태어난다고 느낀다. 우리가 아름다운 빛살인 터라 언제나 처음으로 돌아가서 차근차근 새롭게 한다. 한겨레는 열둘쨋달인 첫겨울을 ‘섣달’이라고 이름을 따로 붙인다. 열두달 가운데 끝달한테만 이름이 따로 있다. 새해로 접어드는 한겨울은 첫쨋달 가운데 첫날에는 따로 ‘설날’이라는 이름이 있다. 그리고 가을걷이를 하고서 갈무리까지 마친 한복판에 ‘한가위’라는 이름이 있다. 한겨레는 한 해 가운데 꼭 두 날에만 이름을 따로 붙이는데, ‘섣달·설날’은 끝이자 처음인 얼개요, 즐겁게 맞물리면서 새롭게 잇는 길목을 나타낸다. 서기에(멈춰서기에) 선다(일어선다)는 뜻을 담고, ‘선’을 보인다고 하듯 새롭게 보이는 봄으로 나아간다는 수수께끼를 들려준다.


그럼 산소나 질소를 포함한 많은 원자들은 왜 혼자 고독을 즐기지 않고 다른 원자들과 만나 결합하여 분자나 고체를 만드는 걸까? 그건 바로 서로 연결되어 결합을 해야만 더 안정적인 상태로 바뀌기 때문이지. 《양자역학 쫌 아는 10대》 108쪽


  섣불리 안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느끼니, ‘값있’거나 ‘뜻있’다고 여기는 일만큼은 안 해야지 싶다. 값있거나 뜻있다고 여기면 그만 금(계급·등수)을 긋고 만다. 더 값있고 뜻있는 일부터 해야 마땅하다고 여기느라 그만 덜 값있거나 그리 뜻없다고 여기는 일은 꼬랑지로 밀리거나 아예 잊히거나 팽개치고 만다. 작은뜻(소수의견·소수자)을 아끼고 북돋우려면 ‘값·뜻·금’이 아닌 ‘빛·씨·말’을 바라볼 노릇이다. 이쪽에서 작은뜻이 값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면, 저쪽에서 큰뜻이야말로 값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싸운다. 죽도록 피튀기며 싸우지. 이쪽에서 작은목소리를 아끼자고 외치면, 저쪽에서 큰목소리를 왜 안 듣느냐며 다툰다. 물어뜯고 치고받고야 만다. 함께 나설 일이 아니라, 먼저 해야 한다고 금을 긋는 터라, 줄줄이 밀리는 일이 수두룩한데, 끝으로 밀리는 일이란 으레 ‘들숲메바다’를 푸르게 돌보는 길이기 일쑤이다. ‘어린이 목소리’를 나라지기가 받아들이는 일은 아주 못 본다. ‘푸름이 목소리’를 고을지기나 벼슬아치가 먼저 찾아가서 챙기는 일도 아주 못 본다.


얘들아, 많이 먹고 똥 누거라. 그래도 돼. 그게 너희 일이니까. 내일도 모레도 밥 줄게. 나는 소치기니까. 언제까지나 너희와 함께 여기 있을 거란다. 의미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희망의 목장》 32쪽


  우리는 서로 길잡이로 설 노릇이다. 아이어른이 함께 배우면서 함께 자라듯, 우리는 서로 가르치고 배우면서 어깨동무를 하면 된다. 이를테면 ‘차별금지법’이 아닌 ‘아름길’과 ‘사랑길’을 이야기하면 된다. “이렇게 하니까 따돌림짓이고, 이때에는 값을 톡톡히 치르시오!” 하고 윽박지르면 불싸움이 붙는다. 이와 달리 “이렇게 하기에 아름답고 사랑입니다. 이렇게 하면 서로 즐겁게 어울립니다.” 하고 들려주고 북돋우면 어느새 모든 ‘불씨’가 누그러들면서 ‘풀씨’로 바뀐다.


《조난입니까? 2》(사가라 리리·오카모토 켄타로/김현주 옮김, 소미미디어, 2019.1.17.)

《조난입니까? 3》(사가라 리리·오카모토 켄타로/김현주 옮김, 소미미디어, 2019.3.12.)

#ソウナンですか? #岡本健太郞 #さがら梨?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해》(홍혜은과 아홉 사람, 동녘, 2017.12.20.)

《양자역학 쫌 아는 10대》(고재현, 풀빛, 2023.5.10.)

《희망의 목장》(모리 에토 글·요시다 히사노리 그림/고향옥 옮김, 해와나무, 2016.2.24.)

#希望の牧場 #森繪都 #吉田尙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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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9 ‘헌책’을 왜 읽나?

책벌레수다 : ‘새책’만 사읽으니 갇힌다



  올가을에 거두는 낟알은 모두 지난해에 거두고서 갈무리한 다음에 봄에 심은 씨앗이다. ‘묵은씨’를 심기에 ‘새씨’를 얻는다. ‘헌씨·오래씨’가 언제나 ‘새씨·살림씨’로 잇는 밑바탕이자 첫길이다. 나는 열여덟(고2)에 헌책집이라는 곳에 비로소 눈떴다. 열여덟이 아닌 열 살이나 여덟 살에도 인천 배다리나 곳곳에 헌책집이 있는 줄 알았되, 그냥 어느 책집이든 “책집이 있으면 들어가서 묻고 살” 뿐이었다. 이러다가 열여덟 살에 “새책집에 없는 책은 헌책집을 찾아다니며 다리품을 팔”면 되는 줄 처음으로 느끼고 배웠다. 게다가 ‘판끊긴책’을 처음으로 손수 이레 남짓 품을 들여서 “인천에 있는 모든 헌책집”을 다 누빈 끝에 마지막집에서 찾아내고서 “그나저나 여기는 어떤 곳이기에 이 판끊긴책이 있을 수 있지?” 싶은 마음에 슬며시 돌아보았다. 이러며 깜짝 놀랐다. 새책집과 다르고 책숲(도서관)과 다른 책시렁이며 갖춤새에 놀랐다. 헌책집은 때곳(시공간)을 가볍게 넘나들면서, 아무리 먼나라 책이라도 들여놓고, 아무리 오래고 묵은 책이어도 “오늘 새롭게 읽을 만하다”면 스스럼없이 건사하는 데였더라.


“역시 인기 있는 만화가 아니면 편집자도 상대를 안 해주나?” “난 아니지만 좋아하는 것에 정직한 편집자도 있죠. 아카후쿠 씨가 그런 사람이 되면 되지 않을까요?” 《이거 그리고 죽어 7》 81쪽


  갓 태어나는 모든 새책은 여태까지 태어나서 읽은 숱한 헌책·오래책·옛책을 바탕으로 삼는다. 지나온 책이 있기에 새로 책을 내놓는다. 여태까지 온삶을 일구고 가꾼 이야기를 담은 헌책을 돌아보고 되읽고 새기기에, 바로 오늘부터 새글을 쓰고 새책을 내놓을 수 있다. 그러나 요즈음은 ‘알라딘 중고샵’이 나라 곳곳에 잔뜩 퍼진 탓에 ‘헌책·헌책집’을 잘못 여기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헌책이 팔리기에 새책이 안 팔릴 일이 없다. 헌책과 새책이 다르다. 더구나 “헌책으로 사읽으면 될 줄거리”라면 “구태여 새책으로 사읽을 까닭”이 없다. 헌책집 팔림새하고 새책집 팔림새는 아주 다를 뿐 아니라, 갖춤새도 손님도 책집지기도 다르다. 새책집에서는 새로 나오는 책‘만’ 살피지만, 헌책집은 새로 나오는 책‘을 비롯’해서 이제까지 나온 모든 책을 살피고, 이웃나라 책까지 두루 살핀다.


  2000년 무렵에 《하나님의 이야기》(릴케, 박영사, 1961)를 만난 적 있다. 2025년에 새 한글판이 나오기도 하되, 1961년부터 꾸준히 여러 곳에서 틈틈이 새로 한글판을 냈다. 나는 두어 가지 오랜 한글판을 헌책집에서 찾아보았는데, 1961년 한글판이 무척 맛깔스럽다고 느낀다. 2025년 한글판이 안 나쁘되, 다리품을 들여서 예전 한글판을 찾아볼 만하다고 느낀다. 마침 2026년에 자그마치 스물예닐곱 해 만에 “1961년판 릴케 하나님의 이야기”를 다시 만났다. 깨알같고 촘촘히 세로쓰기로 여민 조그마한 책이다. 이 작고 묵고 깨알같은 판짜임인 헌책을 장만하는 값이나 2025년 새책을 장만하는 값이나 비슷하다. 때로는 옛판이 훨씬 비싸다.


모기가 사라지면 지금은 멀쩡해 보일지 몰라도 그 피해는 퍼지고 퍼져 우리에게까지 돌아와요. 더군다나 불임 유전자는 자연 생태계로 흘러 들어가 다른 생물을 멸종시킬 수도 있어요. 《선생님, 유전자를 조작해도 되나요?》 79쪽


  우리는 왜 헌책집에 책마실을 가서 헌책을 애써 사읽을까? 새로 나오는 아름다운 책을 읽는 왼손이 있기에, 여태까지 나왔으나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아름다운 책을 찾아내려는 오른손이 있다. 왼손으로는 새책을 읽는다. 오른손으로는 헌책을 읽는다. 이른바 왼손은 새길(새책)이요, 오른손은 오래길(오래책·헌책)이다. 우리는 두 손을 나란히 모두어 ‘오늘길’을 열고 일구고 가꾸고 나눌 노릇이라고 본다. 왼길만 가다가는 날마다 집을 허물어야 한다. 하루만 살아도 모든 집은 ‘헌집’이잖은가? 헌집을 다 허물어야 새집을 짓지 않겠는가? 우리가 먹는 모든 밥이나 빵은 ‘묵은쌀·헌쌀·옛쌀’로 짓거나 굽는다. ‘햅쌀·햅밀’로 짓거나 굽는 빵은 고작 하루이틀뿐이다. 여름이며 가을에 먹는 쌀밥은, 이미 “지난해 가을에 거둔 묵은쌀”로 지어서 누린다. 더구나 ‘햅쌀’이라 하더라도 “올봄에 모내기를 하려면 지난해에 거두어서 봄까지 갈무리한 묵은씨앗”이요, 지난해에는 지지난해 묵은씨앗을 심었고, 지지난해에는 지지지난해 묵은씨앗을 심었다.


우리 문학인·예술가들은 생래적으로 고도의 민감성을 존재의 특성으로 합니다. 우리는 세속정치의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고고함을 추구하지만, 그러나 인간성의 기반을 훼손하는 불의와 폭력에는 온몸으로 저항하도록 설계된 유전자를 가진 존재입니다.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 170쪽


  책을 얻으려면 아름숲을 베어야 한다. 한두 해쯤 자란 손가락만큼 가늘고 작은 ‘새끼나무’로는 종이를 못 얻는다. 열 해나 스무 해쯤 자란 ‘어린나무’로도 종이를 못 얻는다. 오래오래 자란 ‘어른나무(헌나무·늙은나무)’여야 비로소 종이를 얻는다. 이미 우리는 ‘책’조차 ‘헌나무·헌종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모든 책은 아침에 쓴 이야기를 저녁에 뚝딱하고 펴내지 않는다. 웬만한 책은 대여섯 해나 열 해나 스무 해쯤 들인다. 서른 해나 마흔 해를 들인 끝에 태어나는 책이 있다. “책에 담기는 이야기”부터 얼마나 ‘오래얘기·헌얘기·옛얘기’인가?


스피릿이 사는 풍요로운 숲에는 다양한 생태가 펼쳐져 있다. 《스트라바간차 이채의 공주 1》 16쪽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새책”을 얼른 읽어치우고서 ‘알라딘 중고샵’에 넘긴다면, 이때에 책은 ‘책’이기보다는 ‘돈(상품)’이라고 여겨야 맞다. 책이라고 할 적에는, 새책과 헌책을 왼손과 오른손에 나란히 놓으면서 고루 어우르고 추스르는 빛을 이야기로 담아서 나누는 길을 짚는다고 할 만하다. 헌책집에 책마실을 안 가는 사람은 슬기(오래빛)가 얕거나 없기 일쑤이다. 새책집에 책마실을 안 가는 사람은 이슬(새빛)을 놓치거나 잊게 마련이다. 슬기랑 이슬을 고루두루 품는 하루를 살아내기에 ‘살림짓기’를 편다. 둘이 나란할 노릇이다. 둘을 어우를 일이다. 둘을 하나로 맺어야 빛난다.


“잘할 것처럼 생겨가지고 못하고, 못할 것처럼 생겨가지고 잘하고. 선생님은 진짜 요지경이야.” “어쩌면 할 수 있는 것과 못하는 걸 본인도 잘 모르는 건지도.” “어우∼ 성가셔.” 《바라카몬 9》 142쪽


  책집이라면, 새책과 헌책을 나란히 두어야 맞다고 본다. 책집에는, 새길과 오래길을 나란히 읽고 짚고 나누는 자리(책시렁)가 있어야 맞다고 느낀다. 책읽기를 즐기는 책손이라면, 왼손으로 일구는 새길을 새책으로 펴면서 오른손으로 돌보는 오래길(헌길·옛길)을 어질게 가다듬는 눈망울을 밝힐 노릇이지 싶다. 새책만 읽으니 갇힌다. 헌책만 읽으면 가둔다. 새책과 헌책을 함께 읽으니 가꾼다. 헌책과 새책을 넉넉히 읽으니 언제나 사랑으로 즐겁게 걸어간다. 왼손에 새책을 쥐고 오른손에 헌책을 잡으니, 새롭게 오래오래 흐를 오늘이라는 이야기를 읽고 잇고 일구고 이루면서 익히고 이르게 마련이라, 이제 이름(말)이 무엇인지 알아보며 지을 수 있다.


《이거 그리고 죽어 7》(토요다 미노루/이은주 옮김, 대원씨아이, 2026.2.28.)

#これ描いて死ね #とよ田みのる

《선생님, 유전자를 조작해도 되나요?》(이상수 글·이창우 그림, 철수와영희, 2025.10.3.)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작가선언 6·9 엮음, 실천문학사, 2009.12.7.)

《스트라바간차 이채의 공주 1》(토미 아키히토/장지연 옮김, 대원씨아이, 2017.11.30.)

《바라카몬 9》(요시노 사츠키/오경화 옮김, 대원씨아이, 2014.9.30.)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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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8 넋나간 짓

책벌레수다 : 넋찾는 길에 읽고쓰기



   우리 삶자락에 깃들 만하구나 싶은 낱말이라면 이제 붙여쓰기를 할 노릇이라고 본다. 국립국어원이나 국어학자가 새 낱말을 알려줄 때에만 붙여쓰기를 할 일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짓는 이 삶에서 스스로 느끼고 배우고 깨닫고 익히는 대로 새말을 지으면 된다. ‘새말’을 아무나 지으면 안 된다고 여기는 마음은 맞다. 참으로 ‘아무나’ 지으면 안 될 새말이다. 그래서 ‘누구나’ 지으면 될 새말이다. ‘새말 = 사투리’이다. 예부터 모든 곳 모든 사람이 저마다 스스로 새롭게 말을 지었다.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한테 이름을 붙이고, 손수 가꾸며 지내는 집에도 이름을 붙이고, 새와 풀과 나비를 바라보다가 이름을 붙인다. ‘이름 = 이르는 소리 = 말’이다. ‘이르다’란 저곳에서 이곳으로 잇는다는 뜻이다. ‘말·이름’을 붙일 적에는, 아직 우리한테 스미거나 녹아들지 않던 저곳에 있는 삶과 살림을, 이제는 이곳에 있는 우리한테 풀어내거나 품는 하루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리하여, 오늘은 문득 ‘읽고쓰다’라는 낱말을 붙여서 적어 본다. 오늘날 숱한 사람은 두 가지를 나란히 한다. 읽기만 하거나 쓰기만 한다고 여기기 어렵다. 읽기에 쓰고, 쓰기에 읽는다. ‘읽고쓰기’하고 ‘쓰고읽기’는 함께 흐른다.


참새가 입원하면 먼저 지렁이를 찾고, 나비의 애벌레를 모으는 것도 우리가 할 일입니다. 지빠귀는 나방이 주식이에요. 이들이 입원하면 의료진 모두 곤충 채집하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갑니다. 물총새가 입원하면 다들 어부가 된 듯 뜰채를 들고 강으로 나서고, 눈토끼가 오면 농부로 변신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병원》 55쪽


  나는 아무래도 넋나간 듯 책을 읽고 글을 쓰는구나 싶다. ‘닥치는’ 대로 읽지는 않으나, 손에 닿는 모든 책을 읽으려고 한다. 한 사람이 읽어낼 만한 책은 그리 안 많다지만, 온갖 책을 안 가리면서 읽으려고 한다. 온갖 사람을 딱히 안 가리고 싶기에 책도 그저 모두 집어들어서 줄거리를 짚고 이야기를 느끼려고 한다. 요즈음 우리나라 그루(주식)가 껑충 뛴다고 말이 많은데, 난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그루에 돈을 놓을 뜻이 아주 없다. 나는 읽고쓰기에 돈과 품과 마음을 들이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요즈음이라면 씨앗돈이 있으면 얼른 그루에 돈을 놓아서 돈벼락을 맞을 수 있을 텐데, 돈벼락을 등진 채 책벌레에 글벌레로 살아가려고 하니, 참으로 넋나간 짓일 만하다.


트리혼은 《머리 없는 괴물》에 대해 독서 감상문을 쓸 생각이었다. 선생님이 만화책에 대한 독서 감상문을 써도 된다고 한 적은 없지만, 쓰면 안 된다고 한 적도 없었다. 《트리혼의 보물 나무》 29쪽


  일본 훗카이도 두멧골에서 ‘이웃돌봄터(동물병원)’를 꾸리는 집이 있다지. 이웃인 들짐승은 돌봐준들 값(치료비)을 치르지 않는다. 숲짐승이나 들짐승이 무슨 돈을 건사하겠는가. 돈나라(자본주의)로 친다면 넋나간 짓이다. 그렇지만 훗카이도 이웃돌봄터 사람들은 넋나간 짓을 웃고 노래하면서 즐겁게 온몸을 바쳐서 한다. 나는 어느 터(회사·직장·기관·연구소·학원·재단)에 몸두지 않으면서 낱말책을 쓴다. 어느 터에 몸두면 다달이 일삯이 나올 뿐 아니라, 심부름꾼을 두면서 수월하게 낱말책을 쓸 테지. 자잘한 모든 일을 남한테 맡기고서 뜻풀이만 해도 될 텐데, 심부름꾼이 여럿이면 뜻풀이마저 맡길 수 있다. 그런데 밑글을 모으고 살피고 추스르는 자잘한 일부터, 말밑을 캐고 찾고 알아내면서, 이 모든 줄거리를 이야기로 묶어서 글로 쓰는 데까지 오롯이 혼자 한다. 이러며 집일과 집살림을 고스란히 맡는다. 이러며 아이들하고 놀고 수다를 떤다. 이러며 두바퀴를 달려서 저잣마실을 하고, 곧잘 시골버스로 읍내로 가서 저잣마실을 하지.


“있지, 엄마. 뱃속에 있던 아기, 지금 멀리 간 거지?” “응, 이젠 안 돌아와.” “많은 엄마들 중에서 우리 엄마한테 온 거니까, 다시 올 거야.” “엄마, 아가 얼른 돌아오라고 내가 편지 썼다? 여기, 받으세요♡” 《투명한 요람 2》 73쪽


  둘레(사회)에서 바라보는 “넋나간 짓”이라면, 겉돈하고 담쌓은 삶이라 할 만하다. 느닷없이 돈벼락에 올라앉을 오늘날 이 나라하고 엇나간다면 넋나간 짓이다. 어느 터에든 슬그머니 올라타서 목돈을 만지거나 이름값을 높이려는 길을 손사래칠 적에도 넋나간 짓이다. 그렇지만 우리집 아이뿐 아니라 이웃집 아이를 보더라도 ‘어른으로서’ 살아가려 하는 마음에다가 ‘사람으로서’ 일하려는 마음이기에, 둘레가 아닌 ‘나너우리’를 바라보려고 한다. 나너우리로 맺고 품는 푸른별이라는 곳에서는 ‘어른으로서 + 사람으로서’라는 길을 잊는 모습이야말로 “넋나간 짓”이라고 느낀다. 나는 넋찾기를 하려고 읽고쓴다. 나는 뭇이웃 누구나 넋찾기를 스스럼없이 너끈히 하기를 바라며 읽고쓴다. 우리가 함께 누리고 나눌 아름책과 아름글을 헤아리면서 읽고쓴다.


“용신은 믿지 않으면서 그런 건 믿으시네요.” “다 그런 거야.” 용이 있었다고 해도 이미 옛날 일이에요.” 《드래곤 키워 주세요 1》 113쪽


  ‘집’이란, 지으면서 즐겁게 지내는 곳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러나 우리는 ‘집’이라는 낱말이 왜 ‘집’인 줄 까맣게 잊거나 안 쳐다보기 일쑤이다. ‘밥’이란, 바다와 바람한테서 오는 바탕을 받아들이는 길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런데 우리는 ‘밥’이라는 낱말이 왜 ‘밥’인 줄 아예 잊거나 안 바라보곤 한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수수한 낱말·이름을 깡그리 잊다가 잃는 굴레라고 할 만하다. 그야말로 ‘문해력·어휘력’ 같은 일본말씨가 춤출 뿐 아니라, 이런 일본말씨를 붙이는 글장사와 말장사가 판치는데, 정작 ‘글눈·말눈’을 저마다 스스로 익히면서 삶을 가꾸는 길하고 어울리는 읽고쓰기는 좀처럼 날개를 못 편다고 느낀다. 그루에 돈을 놓아서 벼락돈을 맞는 데에 넋이 팔린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남이 좋게 보아주기를 비느라, 막상 “내가 나를 바라보며 받아들이는 바람이 되고 바다로 서는 길”을 등지는 나라이기도 하다.


“넌 그게 나아. 쓸데없는 건 보지 마. 하나만 보면 돼.” 106쪽


  ‘지기’란 어떤 사람일까? ‘지기’란 “집을 일구고 돌보며 지키는 일꾼”을 가리키는 이름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고을지기(지자체장)라든지 벼슬지기(국회의원·기초의원)를 맡는 무리를 보자. 이 나라에서 어떤 고을지기나 벼슬지기가 “집을 지키는 어진 일꾼”으로 서는 삶일는지 아리송하다. 집을 일구려면 집일을 맡을 노릇이다. 집을 돌보려면 집살림을 할 노릇이다. 집을 아끼고 사랑하려면 몸소 아이를 품으면서 가르치고 이끌며 함께 걸어야 할 노릇이다. 아이랑 손잡고 눈을 마주보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일 때라야, 비로소 ‘넉차린’ 몸짓이라고 느낀다. 아이랑 손을 안 잡고서 눈도 마주보지 않는 몸짓이라면 ‘넋나간’ 하루라고 느낀다. 아이곁에서 읽고쓰기를 하는 수수한 매무새일 적에만 ‘어른’이지 싶다.


ㅍㄹ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병원》(다케타쓰 미노루/안수경 옮김, 청어람미디어, 2007.2.20.)

《트리혼의 보물 나무》(플로렌스 패리 하이드 글·에드워드 고리 그림/이주희 옮김, 논장, 2009.9.5.)

#TreehornsTreasure #FlorenceParryHeide #EdwardStJohnGorey

《투명한 요람 2》(오키타 밧카/서현아 옮김, 문학동네, 2022.12.2.)

#透明なゆりかご #沖田×華

《드래곤 키워 주세요 1》(마키세 쇼운 글·히가시우라 유키 그림/김동욱 옮김, 재담, 2024.12.31.)

#ドラゴン養やしなってください #牧瀨初雲 #東裏友希

《안녕, 아름다운 날 8》(아카네다 유키/한나리 옮김, 대원씨아이, 2025.5.15.)

#さらば佳き日 #?田千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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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7 신주머니 떠넘기기

책벌레수다 : 힘없는 아이가 걷는 길



  왼손에도 오른손에도 짐을 움켜쥐면 손바닥을 조이는 무게에 그만 손을 놓고 싶을 때가 있다. “내가 뭐 하는 짓이지?” 하고 여기면 바로 손놓고 싶다. 이 마음을 돌려서 “나는 누가 뭐라 하든 두 손에 ‘짐’이 아니라 ‘살림’을 쥐었어.” 하고 혼잣말을 하면서 새삼스레 기운을 차리기도 한다. 어릴적을 돌아보면, 마음을 돌린 날보다 마음을 못 돌린 날이 흔했다. 한숨부터 절로 나오면서 끔찍하다고, 얼른 이 구렁에서 빠져나오고 싶다면서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나는 왜 이다지도 넘쳐나는 짐을 혼자 떠안아야 할까 싶어서 힘이 쪽 빠지기도 한다. 저 많은 사람들은 등짐도 어깨짐도 손짐도 없는데 왜 나만 유난히 이 온갖 짐더미를 들쳐메면서 어기적어기적 뒤뚱뒤꿍 느려터지게 가야 하나 싶기도 하다.


은정 씨는 비슷한 또래면서 갓 입사해서 할 줄 아는 것도 별반 없는 내가 그녀보다 높은 직급을 달고 더 많은 급여를 받는 것이나, 서무 업무를 하지 않고 남자들과 같은 영업을 하는 것에 박탈감을 느끼고 있었다. 《삼성을 살다》 96쪽


  틀림없이 너나 누가 나한테 “온갖 짐꾸러미”를 떠맡기기도 할 테지. 내 어깨에 등에 머리에 손에 차곡차곡 늘어나는 짐을 다시 바라본다. 끝없이 날라야 하는 바리바리 짐덩이일 테지만, 이름을 바꾸어 보기로 한다. “온갖 짐꾸러미”가 아니라, 단출히 ‘온짐’으로 줄여서 받아들여 본다. “‘온짐’이라고 하니 좀 들을 만한데?“ 하고 혼잣말을 한다. 이윽고 이름을 새로 바꾼다. ‘온살림’이라고 돌려서 헤아려 본다. “어? ‘온살림’이라 하니 한결 들을 만한데? 설마 이름만 바꾸어도 이렇게 다르나?” 그냥 잘 모르던 힘없는 어린이는 혼자서 생각에 잠긴다. 집에서고 마을에서도 배움터에서도 또래나 언니나 아저씨나 아줌마나 할아버지나 할머니 모두한테 시달리던 고삭부리 어린이는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름을 스스로 붙이면서 모두 다르구나. 이름을 어떻게 부르느냐로 모두 새롭구나. 여태 몰랐어. 아무도 알려준 적 없어.”


모든 것이 파괴된 후에 남아 있을 색깔이라고요. 《새로운 나여, 안녕》 34쪽


  그저 짐을 떠맡는다. 나는 어린배움터 여섯 해(1982∼87)를 살면서 말끔이(청소당번)를 달아난 일이 하루조차 없다. 아니, 고삭부리에 힘없는 아이는 늘 또래가 떠넘긴 말끔이를 거의 혼자 끝까지 해내야 했다. 모둠마다 나처럼 힘없는 아이가 여럿 있고, 따돌림받는 아이도 여럿 있다. 한 모둠에 예순 언저리이던 모둠마다 늦은낮에 말끔일(교실·복도·창문·교무실·계단·교장실·사육장·운동장·화장실·쓰레기터)을 모든 아이가 나눠서 맡아야 하는데, 예순 가운데 쉰다섯 쯤은 으레 달아난다. 늦은낮에 적어도 한두 시간을 치우고 쓸고닦는다. 그나마 쉰쯤 달아나고 열쯤 남으면 두 시간 즈음에 마치는데, 쉰다섯이 달아나서 다섯만 남으면 서너 시간 걸리기 일쑤이다. 길잡이는 여섯 해 내내 살피러(중간점검·최종점검) 온 적이 없다. 그냥 말끔일을 시키고서 숙직실에서 술을 마시며 해롱거리기만 했다.


“네거티브 금지! 지금은 재미있는 만화를 그리기 위해서 눈앞의 나와 사랑하자.” 《그리게 된 이상 1》 100쪽


  “신주머니 떠넘기기”를 떠올려 본다. 숱한 또래는 말끔일을 떠넘길 뿐 아니라, 모처럼 끝까지 같이 남아서 말끔일을 마치면, “야! 네가 신주머니 맡아! 우린 간다!” 하며 낄낄거리고 달아난다. 신주머니 떠넘기기를 나나 또래 한둘이 으레 뒤집어쓴다. 나는 어릴적에 고삭부리로 여린 몸이어서 신주머니 떠넘기기 같은 짓도 곧잘 겪어야 했다. 맨 처음에는 너무 싫고 부끄럽고 스스로 못나구나 싶었지만, 어느 날 문득 옆으로 날아가며 노래하는 새를 보았다. 새는 지절지절 속삭이더군. “네(사람)가 나(새)를 보면 내(새)가 보일 테지만, 네가 나를 안 보고 짐을 보면 짐에 눌려버리겠지.” 이 말을 남기고서 휙 날아가네. 어리벙벙했다. “뭐지? 뭐야? 새가 나한테 말했나?” 하고 놀랐다. 걷다가 멈춰서 멍하니 한참 생각했다. 이러고서 다시 한 발을 내딛을 적에 마음을 바꾸기로 한다. “그렇구나. 나는 두 손 가득 또래들 신주머니를 안지 않았어. 나는 짐을 떠맡은 채 심부름에 시달리는 길이 아니야. 나는 그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야. 자, 기찻길을 디뎌 볼까. 이 기찻길에도 꽃이 피었네. 무슨 꽃일까. 나중에 우리 마을에서도 이 꽃을 보면 어머니한테 여쭈어야지.”


‘나도 그 말을 거짓말로 만들고 싶지 않아.’ 《그리게 된 이상 2》 78쪽


  이날부터 싱글벙글 웃으면서 더 천천히 걸으며 새바라기에 구름바라기에 꽃바라기를 했다. “여러 또래 신주머니를 왕창 안은 채” 콧노래도 부르며 거닌다. 다만, 또래 신주머니를 팽개치거나 바닥에 내려놓지 않는다. 새가 나한테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린다. 새는 나더러 새를 보고 하늘과 땅을 보고 마을을 보며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스스로 바라보라고 일렀을 뿐, 누구를 미워하거나 싫어할 까닭이 없다고 얘기했다. 짓궂은 또래가 우르르 달려들어 나를 두들겨패거나 괴롭히거나 돈을 빼앗더라도 그저 웃으면서 흘려보내고, 언제나 내가 스스로 바라볼 곳을 그려서 바라볼 노릇이라고 속삭였다. 새말(새가 들려준 말) 그대로 갖은 짐(또래 신주머니)을 잔뜩 안은 채 쪼그려앉아서 길바닥 들꽃을 바라보았다. “꽃아, 내가 손으로 널 쓰다듬고 싶지만, 두 손에는 이렇게 또래들 신주머니를 가득 안았어. 그래서 난 널 눈빛으로밖에 쓰다듬을 수 없어. 이다음에는 널 꼭 손으로 쓰다듬을게.” 하고 가볍게 말하면서 아주 천천히 한 발짝씩 나아갔다.


“난 못해. 나 자신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걸. 그래서 마디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아직은 막연한 미래라 생각해 봐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동네에서 소문난 텐구의 아이 7》 145쪽


  신주머니를 나한테 떠넘기고 앞서 달려가거나 달아난 또래는 “신주머니를 떠맡은 힘없는 녀석”이 한참 지나도 안 나타나니 속으로 덜컥 두려웠나 보더라. 한참 지난 어느 무렵에 또래들이 나한테 도로 우르르 달려온다 “뭐야! 이 ××! 아직도 여기 있잖아! 너 사라진 줄 알았잖아! 왜 이렇게 늦어!” 하며 다그친다. 이때 나는 그대로 웃으면서 “응, 새랑 구름이랑 꽃을 보며 가느라고. 너희 신주머니는 다 여기 있어. 난 새랑 구름이랑 꽃을 보며 천천히 걸을게. 너흰 먼저 가서 놀아.” 하고 말했다. 이런 일이 두어 벌 더 있은 뒤로 또래가 나한테 신주머니를 떠넘기는 짓을 더는 안 하더라. 나처럼 힘없는 다른 동무한테 신주머니를 떠넘기는 짓도 그쳤지. 신주머니를 떠맡은 동무가 있으면 조용히 다가가서 나누어 들었다. 가녀린 동무는 “야, 그러지 마. 내가 다 들게. 나 혼자 들 수 있어.” “아니야. 너도 배웠잖아? 종이 하나도 나누어 들면 낫다고. 우리가 같이 들면 돼.” “그러다 너도 걔들한테 맞아.” “맞으면 맞지 뭘. 때리려면 때리라고 해. 그리고 우리는 좀 천천히 걷자. 우리가 걔들 심부름꾼도 아닌데 왜 빨리 걸어? 꽃을 보며 천천히 걷자.”


  삶이란 뭘까 하고 늘 되새긴다. 어릴적에 겪은 바와 오늘날 살아가는 바를 으레 나란히 놓고서 곱씹는다. 누가 우리 두 손에 짐을 안기면 그저 빙긋빙긋 웃으면서 ‘내 걸음걸이’로 더 느긋이 걸으면 될 뿐이겠지. 누가 나를 때리면 “자, 더 때리셔요. 얼마든지 맞을게요.” 하고 활짝 웃으면 되겠지.


《삼성을 살다》(이은의, 사회평론, 2011.10.24.)

《새로운 나여, 안녕》(앨리스 워커/이옥진 옮김, 마음산책, 2005.4.25.)

#NowistheTimetoOpenYourHeart #AliceWalker

《그리게 된 이상 1》(타카하타 큐 글·카바 유지 그림/편집부 옮김, 조은세상, 2024.3.29.)

《그리게 된 이상 2》(타카하타 큐 글·카바 유지 그림/편집부 옮김, 조은세상, 2024.11.28.)

《동네에서 소문난 텐구의 아이 7》(이와모토 나오/김승현 옮김, 대원씨아이, 2011.4.15.)

#町でうわさの天狗の子 #岩本ナオ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우리집 텃노랑(토종노랑민들레)



바깥길을 나서려면 마을앞 시골버스는 '너무 늦게' 들어와서

옆마을로 논둑길을 따라 걸어가서 이른버스를 타야 한다.

그러나 기꺼이 걷는다.

동트는 시골 논자락을 바라볼 수 있으니.



그리고 즐겁게 태어난 동시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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