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13 개는 왜 ‘개’일까

책벌레수다 : 이름을 읽는 마음



  그저 모든 하루를 새롭게 배운다는 마음으로 차분할 수 있는가. 언제나 배우는 줄 느끼면 따로 종이(졸업장)를 따려고 악착같이 굴지 않는다. 모든 하루가 배움날인 줄 모르기에 배움터(학교)에 붙들려서 목돈을 배움삯으로 치른다. 언제나 배우는 줄 느끼면 모든 돈을 살림살이에 들이면서 느긋이 이웃하고 나눈다. 목돈을 벌었어도 꽉 움켜쥐면서 부풀리기(자산증식)에 힘쓰는 이가 수두룩한데, 하루하루 배우는 기쁜 길이 아니라, 근심걱정으로 꽉꽉 들어찬 나머지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터라, 자꾸자꾸 셈값(은행계좌)을 들여다보고 만다.


개벚나무, 개옻나무 …… 많기도 했는데, ‘개’를 붙인 것이 미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개’라고 붙였는지 모르겠어요. 나무들도 안 좋아할 것 같아요.” 미로의 말을 듣고 이야기꾼이 웃었다. 《이야기꾼 미로》 155쪽


  스스로 눈망울을 빛내면 스스로 알아본다. 스스로 눈이 흐리니 스스로 못 알아본다. 눈비가 그치고서 구름이 걷힌 하늘을 ‘개다’라 한다. 즐겁게 입은 옷을 말끔히 빨고서 해바람에 보송보송 말린 뒤에 정갈하게 다루어 놓으면 ‘개다’라 한다. 밤새 몸을 포근히 쉬어 새롭게 기운을 되찾고 일어난 뒤에 이부자리를 깔끔히 치우면 ‘개다’라 한다. 물과 가루를 알맞게 섞고서 손수 새롭게 밥차림이나 그릇을 빚으려고 하는 일을 ‘개다’라 한다. ‘개다’라는 낱말에서 밑동이 ‘개’이고, 사람 곁에서 오래도록 살림동무로 지낸 이웃을 가리키는 이름인 ‘개’일 뿐 아니라, 빗물이 들숲메를 거쳐서 바다로 들어서는 길목을 ‘개’라 한다. 이리하여 ‘개살구’나 ‘개오동’이나 ‘개나리’를 비롯한 곳에 붙는 ‘개-’라는 이름은 맑고 밝고 푸르고 곱고 홀가분하고 호젓하고 즐겁고 놀라운 숨빛을 가리키려고 붙이는 얼개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통증을 고칠 힘이 있다. 수년간 나는 스스로의 증상을 극복해 낸 많은 환자들과 함께했다. 《통증 탈출》 233쪽


  느끼려 하지 않으면 읽지 못 한다. 읽으려 하지 않으면 알지 못 한다. 알려 하지 않으면 느끼지 않는다. 모든 삶은 한결같이 어울리면서 흐른다. 물결이 칠 적에는 내려갔다가 올라간다. 먼저 올라가지 않는다. 바닥에서 하늘로 나아가는 춤짓인 바다이다. 바람도 매한가지이다. 먼저 솟구치지 않는다. 가만히 밑으로 스윽 곤두박을 하다가 휙 춤짓으로 온곳을 바라보며 나아간다. 멧자락을 오르려면 멧자락이 아닌 밑자락에서 살아야 한다. 밑자락에서 살기에 기꺼이 봉우리를 바라보며 올라간 뒤에, 밑자락에 있는 보금자리로 돌아간다. 돌고도는 삶이란 언제나 사랑이다. 온곳에 감도는 푸른사랑이자 파란사랑이다.


‘아이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곳에 미래는 오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아이들과 아이들을 키우는 이들에게 행복한 사회일까?’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한도의 생활 8》 225∼226쪽


  개가 왜 ‘개’인 줄 알아차리면, 참이 왜 ‘참’인 줄 알아본다. ‘참·차다’는 ‘차갑다·겨울’과 나란하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기에 ‘차다’요, 이러한 결을 바로 겹겹 두르는 겨울이라는 철이다. 겨울에 이르러야 비로소 ‘차다·참’이다. 그러면 스스로 돌아볼 노릇이다. 왜 겨울이어야 ‘참’일까? 왜 겨울에 이르지 않으면 ‘차다’를 못 느끼고 못 배울까? 겨울이란, 봄여름가을로 이은 세 가지 철을 모두 마무르고서 쉬는 때이다. 쉬면서 꿈을 그리는 철인 겨울이다. 몸짓을 멈춰세우고서 고즈넉이 마음빛을 채우는 철인 겨울이다. 겨우내 꿈을 그리면서 마음을 빛으로 채우기에 새롭게 봄맞이를 할 수 있다. ‘참’이란 참하면서 참되고 착한 길인데, 차근차근 차곡차곤 찬찬히 천천히 철들면서 씨앗이 오롯이 차는 때를 나타낸다고 할 만하다. 모든 씨앗은 겨우내 속으로 차야 봄에 싹틔우고 뿌리내린다. 차가운 겨울빛을 온몸으로 맞아들이는 무와 배추와 마늘과 보리가 새봄에 알차게 거듭난다.


‘하지만 나밖에 없다. 이 대국에서 돌을 던지는 것도, 다시 일으켜세우는 것도, 여기 있는 나밖에 할 수 없다구!’ 《고스트 바둑왕 22》 106쪽


  모든 낱말은 다 다른 이름이다. ‘개’와 ‘개다’뿐 아니라, ‘참’과 ‘차다’와 ‘참다’도 우리가 지내는 삶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사람으로서 서로 마주하며 부르는 말소리인 ‘이름’만 이름이지 않다. ‘나’나 ‘너’라는 낱말도 이름이고, ‘하늘’과 ‘땅’이라는 낱말도 이름이다. 우리가 소리로 얹어서 주고받는 모든 말이 다 다르게 이름이다. 수수하고 숱한 모든 말씨를 가만히 헤아리기에 스스로 배우면서 스스로 빛난다. 수수하고 숱한 모든 말씨를 하나씩 읽으려고 하지 않으면 배움길하고 멀 뿐 아니라, 하나도 알아차리지 못 할 테니 그만 고리거나 고약하거나 괴롭게 굴레를 쓰고 만다. 누가 해줄 수 없다. 누가 돕지 않는다. 스스로 하기에 스스로 일으킨다. 숨을 쉴 사람은 나요, 숨을 뱉을 사람도 나이다. 나무는 나무 스스로 숨을 쉬고 뱉는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사람으로서 다르게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바람 한 줄기를 숨꽃 하나로 받아들이고 내놓는다. 물 한 방울을 물꽃 한 톨로 맞아들이고 내놓는다.


“머나먼 과거와 머나먼 미래를 잇기 위해서 네가 있다고? 우리 모두 마찬가지야.” 《고스트 바둑왕 23》 118쪽


  나는 여태 어떻게 걸어왔는지 늘 되새긴다. 열 살 무렵에는 지난 아홉 해를 어떻게 걸어왔는지 되새기며 열한 살을 바라보았다. 스무 살 무렵에는 지난 열아홉 해를 어찌저찌 걸었는지 곱씹으며 스물한 살을 내다보았다. 서른 살 무렵에는 지난 스물아홉 해를 어떤 마음으로 거닐었는지 헤아리며 서른한 살을 지켜보았다. 마흔 살 무렵에는 지난 서른아홉 해를 얼마나 노래하며 걸었는지 짚으며 마흔한 살을 살펴보았다. 쉰 살에도 매한가지요, 예순 살과 일흔 살에도 똑같다. 지난걸음을 하나씩 가누면서 새걸음을 곰곰이 그린다. 나는 나대로 걷는다. 너는 너로서 걷는다. 우리는 다른 걸음새로 만나기에 다른 눈짓을 나누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한다. 내가 걸었기에 놀랍지 않고, 네가 걸었으니 대단하지 않다. 이런 삶이 하나 있고, 저런 삶이 둘 있다. 하나와 둘이 만나서 셋을 이루면, 이 셋은 어느덧 씨앗 한 톨로 가만히 돌아가서 고요히 잠든다. 꿈이란 참 즐겁고 아름답다. 꿈으로 못 이룰 일이 없다. 먼저 꿈으로 하나하나 이루고서 삶으로 맞아들인다. 언제나 꿈씨를 한 톨 심어서 돌아보기에, 이윽고 삶길을 차근차근 내딛는다. 나는 내가 바다를 이루고 바람으로 춤사위를 펼 꿈을 생각한다. 너는 네가 너울로 일어나고 돌개바람으로 노래할 꿈을 생각하면 된다. 우리는 모두 다르게 배우면서 그리니까.


ㅍㄹㄴ


《이야기꾼 미로》(천세진, 교유서가, 2021.6.18.)

《통증 탈출》(알랜 고든·아론 지브/김선아 옮김, 샨티, 2025.12.15.)

#TheWayOut (나가는 길) #AlanGordon #AlonZiv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한도의 생활 8》(가시와기 하루코/하성호 옮김, 문학동네, 2025.6.9.)

#健康で文化的な最低限度の生活 #ケンカツ #柏木ハルコ 

《고스트 바둑왕 22》(호타 유미·오바타 타케시/김기숙 옮김, 서울문화사, 2003.8.30.)

《고스트 바둑왕 23》(호타 유미·오바타 타케시/김기숙 옮김, 서울문화사, 2003.10.20.)

#ヒカルの碁 #ほったゆみ #小畑健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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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12 밑뿌리를 캐면서

책벌레수다 : 말밑을 누구나 읽는다면



  낱말책을 손수짓는 짝꿍을 둔 우리집 곁님은 으레 나무랐다. 왜 낱말책을 쓴다면서 ‘말밑책(어원사전)’부터 안 하느냐고 타박했다. 비슷한말을 풀고 겹말을 풀고 새말을 풀면서 손질말을 풀면, 바야흐로 차분히 말밑도 풀 수 있다고 들려주었지만, 그냥 처음부터 말밑을 풀려고 하면 다 이루지 않느냐고 꾸중했다. 이 말을 내내 곱씹으며 살아간다. 나무가 서려면 밑동부터 있을 노릇이다. 나무가 줄기를 올리려면 뿌리부터 내릴 노릇이다. 뿌리를 안 내리면서 줄기나 가지를 먼저 뻗으면 그만 쓰러진다. 적잖은 나무는 뿌리를 적게 내린 채 줄기와 가지를 늘리느라 비바람에 쓰러진다. 그러니까 우리말을 제대로 짚거나 알거나 익히려면 말밑부터 차분히 짚고 배우는 길을 가야 맞다.


“전에 다니던 회사가 돈 줄 테니까 다시 돌아오라고 하더라고.” “뭐?” … “완전 제멋대로지 않아? 자기들이 쫓아냈으면서! 곤란해지니까 이제 와서 도와달라고? 그리고 돈 얘기를 꺼내기 전에 사과부터 하란 말이야! 몇 번이고 전화하지 마, 바보들아!” 《네? 사내 시스템을 전부 혼자 관리하는 저를 해고한다구요? 3》 83, 84쪽


  우리나라 배움터를 돌아보면, 말밑을 아예 못 가르친다. 어린배움터도 푸른배움터도 똑같다. 이 나라 배움터는 ‘글눈(문해력·리터러시)’은 내세우지만, 정작 ‘글눈’을 익히려면 낱말이 태어난 뿌리부터 차근차근 짚어야 하는데, 말밑 이야기는 건너뛰면서 온갖 한자말과 영어부터 잔뜩 머리에 욱여넣는 얼거리이다. 우리말은 제대로 모르는 채 한자말과 영어만 배운다면, 아이도 어른도 무슨 말을 하거나 어떤 글을 쓸까? 말을 말로 다룰 줄 모르는 채 스무 살까지 불굿(입시지옥)에 시달리다가 ‘서울에 잔뜩 있는 열린배움터’에 들어간들, 머리를 틔우거나 깨우는 익힘길을 스스로 못 열고 만다. 영어를 가르치는 나라에서 영어 말밑을 안 가르칠 까닭이 없다. 어느 나라에서든 그 나라말을 익히려면 그 나라말을 이루는 뿌리부터 짚고 들려준다. 우리는 어린이집과 어린배움터에서 차분히 ‘우리말밑’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어야 맞다. 푸른배움터에서는 ‘우리말밑’을 제대로 가다듬으면서 ‘새말짓기(사투리 쓰기)’를 이끌 수 있어야 한다.


“바보 같은 놈. 니는 언제까지 니를 배신하지 않을 인간만 찾아다닐 셈이고?” … “유이 씨가 같이 있으면 엄마가 즐거워 보이니까. 유이 씨는 료헤이 군에겐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을지 몰라도.” 《자전거집 타카하시 군 7》 51, 120쪽


  나풀나풀 나는 ‘나비’이다. 나풀거리듯 날기에 나비이기도 하지만, 날 줄 알고, 날개돋이를 한대서 나비이기도 하다. ‘날개’하고 ‘활개’는 비슷하면서 다르되 나란한 낱말이다. 활짝 펴기에 활개요, 환하게 빛나는 활개이다. 내가 나를 스스로 알아보면서 새길을 낳는 나로 서는 나무와 같이 눈뜬다고 해서 ‘나’를 밑동으로 ‘날다·날개·나비’하고 ‘낳다·남다·나무’로 잇는다. 곧, ‘나’하고 ‘너’가 서로 다르면서 나란한 나비로 날아오르는 줄 알아본다면, 서로 하늘(하느님)인 줄 깨달을 만하다. 나부터 눈뜨기에 너랑 만나는 너머로 넘어가고, 서로 넘나들기에 ‘너나들이’라 하며, 이때에 ‘우리·울(나 + 너)’이라는 길을 열어서, 나하고 너는 ‘하늘·한울(하나인 우리·울)’을 이룬다. 나하고 너가 우리로 만나서 하늘을 이루기에 파랗게 빛나는 바람을 숨으로 들이마시고 내쉬는 사람이라는 빛살을 몸으로 입는다.


아무런 신체 기관도 갖지 않은 사후 생존자에게 쉽게 기대되는 행위는 상상이라는 내적 활동이다. 《사후 세계의 철학적 분석》 71쪽


  말밑을 누구나 읽는다면, 언제나 누구나 스스럼없이 눈뜨고 깨어나서 일어나는 하루를 맞을 테지. 말밑을 누구나 못 읽거나 모른다면, 둘레에서 누가 일으키거나 돕더라도 못 일어나고 못 깨어나고 못 눈뜬다. 아침에 따르릉 크게 울려야 일어난다면 이미 틀렸다. 아침에는 어떤 따르릉 소리도 없이 일어날 노릇이다. 굳이 아침에 소리를 듣고 싶다면, 새가 들려주는 노랫소리를 듣고서 일어나면 된다. 새벽에 이는 바람소리를 듣고서 깨어나면 된다. 아직 별이 총총한 때에 가만히 눈뜨면 된다. 말밑읽기란, 눈뜨는 별을 읽는 길이고, 듣는 노래를 알아채는 길이며, 마주하는 햇빛을 따라서 기쁘게 일하려고 일어나는 길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 가면은 이상과 같이 현실을 장난기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점박이 가면은 돌림병과 관련이 있지만 노장탈의 점은 파리똥이라고 한다. 《탈춤의 사상》 169쪽


  우리는 밤에 자고 낮에 일한다. 밤낮이 가만히 갈마든다. 아무리 즐겁거나 아름다운 일이라 하더라도 내내 안 쉬면서 하지는 않는다. 알맞게 하고서 쉬거나 마칠 일이다. 알맞게 했기에 밤에 느긋이 쉰다. 비록 못 끝내거나 미루어야 하더라도 걱정없다. 늘 하루치를 하면 된다. 한꺼번에 다 하거나 맡아내려 하기보다는, 그날그날 사뿐사뿐 일거리를 다스리기에 넉넉히 웃고 노래하는 사람으로 선다고 느낀다. 우리는 날마다 책을 100자락이건 1000자락이건 읽을 수 있다. 때로는 하룻밤에 이만큼 읽어도 된다. 이러다가 몇날 동안 한 쪽조차 안 읽어도 된다. 날마다 비슷비슷한 쪽을 읽는다고 해서 꾸준히 읽는다고 여기지 않는다. 글종이에 담은 책도 읽고, 바람소리에 흐르는 책도 읽고, 새와 풀벌레와 매미와 개구리가 베푸는 노랫가락에 흐르는 책도 읽고, 들풀과 나무와 꽃송이와 씨앗과 열매에 감도는 책도 읽으면 된다. 빨래하고 비질하고 치우고 밥하고 설거지하고 집안일에 아이돌보기라는 온갖 살림노래라는 책을 함께 읽으면 된다. 손으로 만지면서 일하는 모든 길이 책읽기이다. 빨래도 책읽기이고 밥짓기도 책읽기이다. 나물을 손질하고 양념을 마련하고 마당에 옷가지를 널다가 걷어서 정갈하게 개는 일도 책읽기이다. 아기한테 자장노래를 들려주고, 아이를 무릎에 앉혀서 그림책을 읽는 길도 스스로 피어나는 책살림이라 할 만하다.


‘이제껏 따라잡느라 급급해서, 따라잡은 다음 따윈 상상하지도 못했다. 내 앞에는 키사라에겐 없는 길이 놓여 있다. 키사라를 따라잡은 다음, 나는 그쪽으로 나아갈지도 모른다.’ 《투 온 아이스 2》 26쪽


  ‘일’이라는 낱말이 있다. ‘일하다’는 돈을 버는 길만 가리키지 않는다. 돈만 번다면 ‘돈벌이’라고 따로 쓴다. ‘일’이란, 돈을 벌든 말든 스스로 몸을 일으키고 마음을 일구면서 삶과 살림을 잇고 이야기하는 이곳에 있는 몸짓과 눈짓과 손짓과 숨짓을 고루 나타낸다. 우리는 일꾼으로 서면 된다. 일지기로 만나고 일동무로 어울리면 된다. ‘직장인·회사원·사업가·근로자·노동자’가 아니라, 그저 ‘일꾼’이면 된다. 바람과 바다가 일듯 일을 맡고 하면 된다. 눈뜨고 깨어나서 일어나는 하루이듯, 이렇게 일어서는 온빛으로 일을 나서면 된다. 일을 하기에 아름답게 사람이다. 일을 알고 나누기에 사랑스레 사람이다. 일할 줄 알기에 놀 줄 알고, 일놀이를 나란히 품기에 노래하는 노을빛으로 곱게 물든다.


ㅍㄹㄴ


《네? 사내 시스템을 전부 혼자 관리하는 저를 해고한다구요? 3》(카시로메 유키·이오·icchi/박용국 옮김, 씨엘비코믹스, 2025.12.31.)

#え社內システム全てワンオペしている私を解雇ですか #伊於 #下城米雪

《자전거집 타카하시 군 7》(마츠무시 아라레/오경화 옮김, 대원씨아이, 2025.12.31.)

#自轉車屋さんの高橋くん #松蟲あられ

《사후 세계의 철학적 분석》(T.페넬름/이순성 옮김, 서광사, 1991.11.20.)

#TerencePenelhum #SuvivalAndDisembodiedExistence

《탈춤의 사상》(채희완 엮음, 현암사, 1984.3.15.)

《투 온 아이스 2》(이츠모 엘크/오경화 옮김, 대원씨아이, 2025.8.31.)

#ツ-オンアイス #逸茂エルク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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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11 오늘은 뭘 배울까

책벌레수다 : 야금야금 잎을 갉는 애벌레



  언제나 때에 맞게 만나고 헤어진다. 우리를 스치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좋은이·나쁜이’가 아닌 “그저 그때에 만나서 어울리면서 함께 배우는 사이”라고 느낀다. 날마다 숱한 사람이 태어나고 사라지는데, 우리는 이 숱한 사람 사이에서 ‘나·너’라는 길을 마주하는 마음을 가만히 느끼고 받아들여서 하루를 짓는구나 싶다. 어쩜 저런 짓을 일삼느냐 싶은 사람이 있을 텐데, ‘저런 짓’을 느끼고 겪고 배워야 하기에 ‘저런 사람’을 스치거나 만난다. 저런 사람은 나쁘지 않다. “그러면 넌 저런 때에 어떤 사람으로 어떤 모습으로 서겠니?” 하고 묻고 들려주며 보여주는 길잡이라고 느낀다. 저런 짓을 일삼는 저런 사람을 나무라거나 탓하기도 할 수 있되, 우리 스스로 ‘저곳’에 설 적에 어떤 마음으로 어떤 삶을 지을는지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 서로 만나거나 스치거나 마주치는 셈이다.


우리의 생활이 편리해질수록 어디선가는 반드시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생활이 편리해져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건강이 나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의료비 지출이 늘고 건강기구를 사는 등 결국 돈도 시간도 오히려 소모하게 되는 악순환에 빠지고 마는 거죠. 《궁극의 미니멀라이프》 48쪽


  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아이를 안고 업고 돌보며 늘 쪽종이를 펼쳐서 쪽글을 쓰며 지냈다. 남눈치를 볼 까닭이 없거든. 그림이든 글이든 무엇이든 매한가지라고 느낀다. 아이가 어버이를 지켜보면서 “우리 엄마아빠는 이렇게 사는구나?” 하고 느끼면 되기에, 언제 어디에서나 ‘남눈치’가 아니라 ‘아이 눈망울’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살면 느긋하다. 한 손으로는 아이를 안은 채 다른 손으로는 붓을 쥐고서 글을 끄적이면 얼핏 힘들다고 여길는지 모르는데, 힘들 까닭이 없이 두 손으로 두 일을 마주하는 하루라서 즐겁게 마련이다. 어버이로서 이렇게 두 손으로 두 일을 하면, 아이는 문득 “나도 붓 좀 줘. 나도 쓸게.” 하고 바란다. 이때에 종이랑 붓을 선선히 내주고서 다른 종이랑 붓을 꺼내면, 아이는 차분하면서 조용히 글놀이나 그림놀이로 스며든다. 아이더러 “열린터(공공장소)에서는 조용히 있어야 해. 전철이나 기차에서는 안 뛰어.” 하고 나무라거나 다그치지 않아도 된다. 아이하고 누리거나 놀거나 즐길 살림거리를 챙겨서 다니면 된다.


독재자의 개선문은 먼지로 허물어져 버렸다네. 그 돌들로 아이들은 소꿉놀이용 작은 오두막을 지었네. 《그대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27쪽


  애벌레는 날마다 잎을 갉는다. 갉고 갉고 또 갉고 다시 갉고 새로 갉는다. 애벌레는 잎갉이로 온삶을 보내는 듯하지만, 눈코귀 없이 입 하나만으로 잎갉이를 하면서 허물벗기를 한다. 또 하고 자꾸 하고 새로 한다. 책벌레는 애벌레마냥 그저 읽고 다시 읽고 새로 읽는 동안 천천히 허물벗기를 하며 배우는 길이다. 언제 날개돋이를 할는지 몰라도, 참말로 날개돋이를 해낼는지 몰라도, 새삼스레 다시 일어나는 새벽에 잎을 갉으면서 풀똥을 누고, 또 잎을 갉아먹고서 풀똥을 눈다.


“이길 만하니까 이긴다. 그렇게 되기 위해 마구잡이로 사람을 베는 세월이 필요한 거야. 그 경지까지 이르면, 싸우기 전에 이미 이긴 거라면, 어라? 그때는, 싸우는 것 자체가 필요할까?” 《배가본드 21》 99쪽


  아기는 어버이 품에 안겨서 젖을 문다. 아기는 젖을 먹고서 똥을 누고, 또 젖을 먹고서 똥을 눈다. 내도록 업히고 안기며 젖먹이로 지내다가 문득 웃고, 트림을 하고, 눈을 깜빡이고, 귀를 쫑긋하고,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잼잼을 한다. 도리도리 고갯짓을 하고, 이제 목을 가눌 줄 알면 어느새 다다다닥 달리듯 기어다닌다. 아기가 하루아침에 서거나 달리지 않듯, 아기가 하루아침에 말을 떼지 않듯, 책벌레는 애벌레를 닮고 아기를 닮은 터라, 늘 읽고 또 읽고 또또 읽고 또또또 읽는다. 지치지 않고서 읽는다. 아니, 지치도록 읽는데, 지쳐서 나가떨어져도 또다시 읽는다. 무엇을 배우려는 책읽기인지 몰라도 마냥 읽는다. 이러다가 고단해서 폭 곯아떨어지면 꿈길에서 헤매다가 마침내 고치를 틀 날을 맞이한다. 애벌레가 고치를 튼다면, 책벌레는 글을 쓴다. 애벌레가 고치를 틀어 꿈을 헤매다가 날개를 단 몸으로 피어나면서 밖으로 나오듯, 책벌레는 어느새 글벌레로 거듭나더니 책 한 자락을 내놓고서 활짝 어깨를 편다.


“그 말뜻은 같은 병의 환자라고 해도 한 명 한 명에게 가장 적절한 치료법이 있다는 말씀이잖아요. 저희 아버지께 가장 적절한 치료법은 빨리 퇴원시키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아버지의 병의 뿌리는 아주 깊어요. 이번이 아버지의 맘속에 있는 아주 나쁜 병을 치료할 아주 좋은 기회예요.” 《Dr.코토 진료소 2》 158, 159쪽


  대단하거나 훌륭하다 싶은 책만 읽지 않는다. 대단하거나 훌륭하다 싶은 글만 쓰지 않는다. 그저 읽듯 그저 쓴다. 그저 살피듯 그저 익힌다. 둘레를 보면, 속이 없으니 겉을 꾸미려 들고, 겉을 꾸미려 드니까 쭉정이 같은 줄거리로도 글과 책을 쏟아내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책벌레는 쭉정이책도 집어든다. 쭉정이책은 왜 쭉정이로 가득한 책인지 알아보려고 읽는다. 겉치레책도 챙긴다. 겉치레책은 왜 겉치레로 겉만 휘감는지 찾아보려고 읽는다. 허울뿐인 책을 읽다 보면, 허울이란 무엇이고 하늘이란 무엇인지 새삼스레 느낀다. 속없이 허울로만 채운 책을 느끼거나 알았기에, 책벌레가 쓰려는 글은 ‘하늘빛’처럼 파랗게 물들면서 속으로 여문 이야기를 꾸려야겠다고 배운다. 이러다가 드물게 아름책을 만나면, 삶이라는 길을 이렇게 여미기에 반짝이는구나 하고 배우지. 이곳에서도 배우고 저곳에서도 배운다. 이 책으로도 배우고 저 책으로도 배운다. 모든 책으로 배운다. 모든 책은 새책이다. 모든 책은 배움책이다. 모든 책은 오랜슬기를 담으면서 새빛을 흩뿌리는 씨앗이다.


내가 쓴 글은 나의 역사다. 내가 쓴 것이 나의 역사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 글에는 그동안의 삶이 쓰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빈집과 공명》 76쪽


  영어 ‘디자인’을 우리말로는 여러 갈래로 옮긴다. ‘그리다’나 ‘꾸미다’나 ‘만지다’로 옮길 수 있는데, 겉으로만 만지면 ‘꾸미다’이고, 속으로 어루만지려고 하면 ‘그리다’를 거쳐서 ‘가꾸다’로 나아간다. 천천히 배우려고 하니 찬찬히 익히면서 온몸과 온마음에 담는다면, 서둘러 선보이거나 내세우려고 하니 그만 겉을 꾸미고 만져서 겉멋과 겉치레라는 허울로 기울고 만다. 책벌레는 겉도 속도 배운다. 우리 몸을 이루는 겉살인 ‘살갗’이 있기에 만지고 쥐고 잡고 다스리고 다룬다. 살갗이라는 ‘겉살’도 대수롭다. 다만 겉살만으로는 못 움직인다. 속살이 있어야 하고, 속살은 뼈와 뼈대가 든든하기에 움직인다. 겉속이 나란하면서 뼈가 굵을 노릇이요, 뼈와 살은 머리로 이끌고, 머리는 마음으로 북돋우고, 마음은 생각으로 짓고, 생각은 저마다 오롯이 빛나는 사랑이라는 숨결로 깨운다. 잎갉이를 하듯 책읽기를 하는 나날이란, 온마음과 온몸을 나란히 움직이는 온넋을 지피는 눈빛을 밝히는 길이지 싶다. 이리하여 또 읽고 자꾸자꾸 읽는다.


ㅍㄹㄴ


《궁극의 미니멀라이프》(아즈마 가나코/박승희 옮김, 즐거운상상, 2016.10.10.)

#アズマカナコ #電氣代500円 #贅澤な每日 (2013년)

《그대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타고르/이상영 옮김, 다보, 1990.11.5.)

#RabindranathTagore

《배가본드 21》(요시카와 에이지·이노우에 타카히코/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2005.11.25.)

#バガボンド #Vagabond #吉川英治 #井上雄彦

《Dr.코토 진료소 2》(타카토시 야마다/문희 옮김, 대원씨아이, 2001.6.19.)

#Drコト診療所 #山田貴敏

《빈집과 공명》(신유보, 결, 2024.10.21.)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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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10 서로 길잡이

책벌레수다 : 보임꽃 〈모아나〉를 읽기



  길만 잡는다고 해서 ‘길잡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길을 잡거나 알리는 몫이라면 ‘길알림’이다. ‘길찾기’처럼 길을 돕는 연장에서 그치면 ‘길알림’이다. ‘길잡이’는 꼭 길만 찾거나 알리지 않을 뿐 아니라, 길을 못 찾거나 함께 헤매거나 어디로 가야 할는지 못 알릴 수 있다. 길잡이라는 이름일 적에는 언제나 스스럼없이 먼저 나서서 이슬을 받는 몫이다. ‘길잡이 = 이슬받이·이슬떨이’인데, 제아무리 먼저 이슬을 받으면서 어두운 새벽길을 앞장선다고 하더라도 뜬금없거나 엉뚱한 샛길에 빠질 수 있다. 길잡이란 옹근 사람이지 않다. 길잡이는 어수룩하거나 모자란 사람이게 마련이다. 함께 헤매고 함께 살피고 함께 걸으면서 함께 배울 줄 알되, 걱정하거나 두려운 사람들 앞에서 빙그레 웃으며 먼저 가시밭에 발을 내딛기에 길잡이라고 한다.


“우리 지금은 이렇게 서로 얘기하고 있지만, 반도 다르고 해서, 이런 일이 없었다면 평생 서로 얘기할 일도 없었을 것 같아.” 《조난입니까? 2》 152쪽


  우리는 일본말씨를 받아들여서 ‘교사·선생’ 같은 이름을 쓰는데, ‘가르침이’나 ‘앞사람(먼저 태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만으로는 어린이와 푸름이를 이끌기 어렵다고 느낀다. 배움터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른이라면 ‘길잡이’일 노릇이라고 본다. 길잡이 스스로 늘 헤매게 마련이고, 참으로 아직 잘 모르기 일쑤이기에,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되묻고 스스로 돌아보면서 길풀이를 여미는 몫이면 된다. 이리하여 길잡이는 어느 쪽에도 안 서는 사람이다. 길은 하나가 아닌 터라, “이쪽 길잡이”나 “저쪽 길잡이”가 아닌, “어린이 길잡이”나 “푸름이 길잡이”이면 된다. 예부터 모든 어버이는 처음부터 “빈틈없으면서 다 깨달은 사람”이지 않다. 어버이는 아기를 밸 무렵부터 삶을 배우고, 아기를 낳을 즈음부터 살림을 익히고, 아기가 자라나는 동안 사랑을 나누고 누리는 하루를 짓는다. 어른과 어버이와 길잡이는 나란하다. 셋 모두 ‘빈틈있는’ 사람이요 자리에 삶길이다. 빈틈이 있기에 허술하거나 모자라고, 허술하기에 차분히 가다듬으며, 모자라기에 차근차근 북돋운다.


“더 이상은 무리야. 이제 끝이구나.” “괜찮아. 그 어떤 상황에서든 뭔가 방법은 있는 거니까, 시온.” 《조난입니까? 3》 87쪽


  보임꽃 〈모아나〉가 있다. 대단히 잘 나온 보임꽃이다. 모아나 할머니는 이미 다 알지만 굳이 다 물려주지 않는다. 모아나 할머니는 넌지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할머니 꿈’을 아이한테 밝힌다. 그리고 할머니 스스로 이룬 꿈을 너른바다에서 몸소 보여주면서 다시 길잡이 노릇을 하는데, 귀띔만 할 뿐 실마리를 다 알려주지 않는다. 모아나 어버이는 이미 바닷길을 잊고 잃었다. 모아나뿐 아니라 모아나 어버이나 섬사람 모두 바닷살림을 못 한다. 그렇지만 모아나는 목숨을 걸고서 바닷길을 열려고 나선다. 다만 바닷길로 나서는 첫고비부터 못 넘고서 끝없이 자빠지고 넘어지고 부딪히는데, 마침내 스스로 부딪혀서 온몸으로 배운 끝에 너른바다로 나아갈 수 있다. 모르기에 배우려고 하는 아이가 모아나요, 모르는데 모르는 줄 잊어버린 어른이 ‘모아나 엄마아빠’이며, 이미 알지만 ‘아이 스스로 몸으로 부딪히고 마음으로 익히기를 바라는 뜻’을 꿈씨앗으로 물려준 할머니이다. 옛날 옛적에 바닷길을 연 먼먼 어버이도 처음에는 자빠지고 부딪히면서 바닷길을 익혔기에, 모아나도 옛사람과 나란히 ‘자빠지고 부딪히는 온몸과 온마음’으로 처음부터 새로 익혀야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아나〉라고 하겠다.


보는 내내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모아나는 내가 기대하던 그 여자아이가 아니었다. 그 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섬을 구하겠다며 뛰쳐나온 주제에 배 하나 다룰 줄 모르는 게 말이나 되는가?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해》 98쪽


  사람은 누구나 처음 태어날 적에 아름답다. 아름다운데 참으로 조그마한 몸을 입고서 아기부터 다시 삶을 연다. 우리가 아름다운 빛이 아니라면 아기로 안 태어난다고 느낀다. 우리가 아름다운 빛살인 터라 언제나 처음으로 돌아가서 차근차근 새롭게 한다. 한겨레는 열둘쨋달인 첫겨울을 ‘섣달’이라고 이름을 따로 붙인다. 열두달 가운데 끝달한테만 이름이 따로 있다. 새해로 접어드는 한겨울은 첫쨋달 가운데 첫날에는 따로 ‘설날’이라는 이름이 있다. 그리고 가을걷이를 하고서 갈무리까지 마친 한복판에 ‘한가위’라는 이름이 있다. 한겨레는 한 해 가운데 꼭 두 날에만 이름을 따로 붙이는데, ‘섣달·설날’은 끝이자 처음인 얼개요, 즐겁게 맞물리면서 새롭게 잇는 길목을 나타낸다. 서기에(멈춰서기에) 선다(일어선다)는 뜻을 담고, ‘선’을 보인다고 하듯 새롭게 보이는 봄으로 나아간다는 수수께끼를 들려준다.


그럼 산소나 질소를 포함한 많은 원자들은 왜 혼자 고독을 즐기지 않고 다른 원자들과 만나 결합하여 분자나 고체를 만드는 걸까? 그건 바로 서로 연결되어 결합을 해야만 더 안정적인 상태로 바뀌기 때문이지. 《양자역학 쫌 아는 10대》 108쪽


  섣불리 안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느끼니, ‘값있’거나 ‘뜻있’다고 여기는 일만큼은 안 해야지 싶다. 값있거나 뜻있다고 여기면 그만 금(계급·등수)을 긋고 만다. 더 값있고 뜻있는 일부터 해야 마땅하다고 여기느라 그만 덜 값있거나 그리 뜻없다고 여기는 일은 꼬랑지로 밀리거나 아예 잊히거나 팽개치고 만다. 작은뜻(소수의견·소수자)을 아끼고 북돋우려면 ‘값·뜻·금’이 아닌 ‘빛·씨·말’을 바라볼 노릇이다. 이쪽에서 작은뜻이 값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면, 저쪽에서 큰뜻이야말로 값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싸운다. 죽도록 피튀기며 싸우지. 이쪽에서 작은목소리를 아끼자고 외치면, 저쪽에서 큰목소리를 왜 안 듣느냐며 다툰다. 물어뜯고 치고받고야 만다. 함께 나설 일이 아니라, 먼저 해야 한다고 금을 긋는 터라, 줄줄이 밀리는 일이 수두룩한데, 끝으로 밀리는 일이란 으레 ‘들숲메바다’를 푸르게 돌보는 길이기 일쑤이다. ‘어린이 목소리’를 나라지기가 받아들이는 일은 아주 못 본다. ‘푸름이 목소리’를 고을지기나 벼슬아치가 먼저 찾아가서 챙기는 일도 아주 못 본다.


얘들아, 많이 먹고 똥 누거라. 그래도 돼. 그게 너희 일이니까. 내일도 모레도 밥 줄게. 나는 소치기니까. 언제까지나 너희와 함께 여기 있을 거란다. 의미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희망의 목장》 32쪽


  우리는 서로 길잡이로 설 노릇이다. 아이어른이 함께 배우면서 함께 자라듯, 우리는 서로 가르치고 배우면서 어깨동무를 하면 된다. 이를테면 ‘차별금지법’이 아닌 ‘아름길’과 ‘사랑길’을 이야기하면 된다. “이렇게 하니까 따돌림짓이고, 이때에는 값을 톡톡히 치르시오!” 하고 윽박지르면 불싸움이 붙는다. 이와 달리 “이렇게 하기에 아름답고 사랑입니다. 이렇게 하면 서로 즐겁게 어울립니다.” 하고 들려주고 북돋우면 어느새 모든 ‘불씨’가 누그러들면서 ‘풀씨’로 바뀐다.


《조난입니까? 2》(사가라 리리·오카모토 켄타로/김현주 옮김, 소미미디어, 2019.1.17.)

《조난입니까? 3》(사가라 리리·오카모토 켄타로/김현주 옮김, 소미미디어, 2019.3.12.)

#ソウナンですか? #岡本健太郞 #さがら梨?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해》(홍혜은과 아홉 사람, 동녘, 2017.12.20.)

《양자역학 쫌 아는 10대》(고재현, 풀빛, 2023.5.10.)

《희망의 목장》(모리 에토 글·요시다 히사노리 그림/고향옥 옮김, 해와나무, 2016.2.24.)

#希望の牧場 #森繪都 #吉田尙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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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9 ‘헌책’을 왜 읽나?

책벌레수다 : ‘새책’만 사읽으니 갇힌다



  올가을에 거두는 낟알은 모두 지난해에 거두고서 갈무리한 다음에 봄에 심은 씨앗이다. ‘묵은씨’를 심기에 ‘새씨’를 얻는다. ‘헌씨·오래씨’가 언제나 ‘새씨·살림씨’로 잇는 밑바탕이자 첫길이다. 나는 열여덟(고2)에 헌책집이라는 곳에 비로소 눈떴다. 열여덟이 아닌 열 살이나 여덟 살에도 인천 배다리나 곳곳에 헌책집이 있는 줄 알았되, 그냥 어느 책집이든 “책집이 있으면 들어가서 묻고 살” 뿐이었다. 이러다가 열여덟 살에 “새책집에 없는 책은 헌책집을 찾아다니며 다리품을 팔”면 되는 줄 처음으로 느끼고 배웠다. 게다가 ‘판끊긴책’을 처음으로 손수 이레 남짓 품을 들여서 “인천에 있는 모든 헌책집”을 다 누빈 끝에 마지막집에서 찾아내고서 “그나저나 여기는 어떤 곳이기에 이 판끊긴책이 있을 수 있지?” 싶은 마음에 슬며시 돌아보았다. 이러며 깜짝 놀랐다. 새책집과 다르고 책숲(도서관)과 다른 책시렁이며 갖춤새에 놀랐다. 헌책집은 때곳(시공간)을 가볍게 넘나들면서, 아무리 먼나라 책이라도 들여놓고, 아무리 오래고 묵은 책이어도 “오늘 새롭게 읽을 만하다”면 스스럼없이 건사하는 데였더라.


“역시 인기 있는 만화가 아니면 편집자도 상대를 안 해주나?” “난 아니지만 좋아하는 것에 정직한 편집자도 있죠. 아카후쿠 씨가 그런 사람이 되면 되지 않을까요?” 《이거 그리고 죽어 7》 81쪽


  갓 태어나는 모든 새책은 여태까지 태어나서 읽은 숱한 헌책·오래책·옛책을 바탕으로 삼는다. 지나온 책이 있기에 새로 책을 내놓는다. 여태까지 온삶을 일구고 가꾼 이야기를 담은 헌책을 돌아보고 되읽고 새기기에, 바로 오늘부터 새글을 쓰고 새책을 내놓을 수 있다. 그러나 요즈음은 ‘알라딘 중고샵’이 나라 곳곳에 잔뜩 퍼진 탓에 ‘헌책·헌책집’을 잘못 여기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헌책이 팔리기에 새책이 안 팔릴 일이 없다. 헌책과 새책이 다르다. 더구나 “헌책으로 사읽으면 될 줄거리”라면 “구태여 새책으로 사읽을 까닭”이 없다. 헌책집 팔림새하고 새책집 팔림새는 아주 다를 뿐 아니라, 갖춤새도 손님도 책집지기도 다르다. 새책집에서는 새로 나오는 책‘만’ 살피지만, 헌책집은 새로 나오는 책‘을 비롯’해서 이제까지 나온 모든 책을 살피고, 이웃나라 책까지 두루 살핀다.


  2000년 무렵에 《하나님의 이야기》(릴케, 박영사, 1961)를 만난 적 있다. 2025년에 새 한글판이 나오기도 하되, 1961년부터 꾸준히 여러 곳에서 틈틈이 새로 한글판을 냈다. 나는 두어 가지 오랜 한글판을 헌책집에서 찾아보았는데, 1961년 한글판이 무척 맛깔스럽다고 느낀다. 2025년 한글판이 안 나쁘되, 다리품을 들여서 예전 한글판을 찾아볼 만하다고 느낀다. 마침 2026년에 자그마치 스물예닐곱 해 만에 “1961년판 릴케 하나님의 이야기”를 다시 만났다. 깨알같고 촘촘히 세로쓰기로 여민 조그마한 책이다. 이 작고 묵고 깨알같은 판짜임인 헌책을 장만하는 값이나 2025년 새책을 장만하는 값이나 비슷하다. 때로는 옛판이 훨씬 비싸다.


모기가 사라지면 지금은 멀쩡해 보일지 몰라도 그 피해는 퍼지고 퍼져 우리에게까지 돌아와요. 더군다나 불임 유전자는 자연 생태계로 흘러 들어가 다른 생물을 멸종시킬 수도 있어요. 《선생님, 유전자를 조작해도 되나요?》 79쪽


  우리는 왜 헌책집에 책마실을 가서 헌책을 애써 사읽을까? 새로 나오는 아름다운 책을 읽는 왼손이 있기에, 여태까지 나왔으나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아름다운 책을 찾아내려는 오른손이 있다. 왼손으로는 새책을 읽는다. 오른손으로는 헌책을 읽는다. 이른바 왼손은 새길(새책)이요, 오른손은 오래길(오래책·헌책)이다. 우리는 두 손을 나란히 모두어 ‘오늘길’을 열고 일구고 가꾸고 나눌 노릇이라고 본다. 왼길만 가다가는 날마다 집을 허물어야 한다. 하루만 살아도 모든 집은 ‘헌집’이잖은가? 헌집을 다 허물어야 새집을 짓지 않겠는가? 우리가 먹는 모든 밥이나 빵은 ‘묵은쌀·헌쌀·옛쌀’로 짓거나 굽는다. ‘햅쌀·햅밀’로 짓거나 굽는 빵은 고작 하루이틀뿐이다. 여름이며 가을에 먹는 쌀밥은, 이미 “지난해 가을에 거둔 묵은쌀”로 지어서 누린다. 더구나 ‘햅쌀’이라 하더라도 “올봄에 모내기를 하려면 지난해에 거두어서 봄까지 갈무리한 묵은씨앗”이요, 지난해에는 지지난해 묵은씨앗을 심었고, 지지난해에는 지지지난해 묵은씨앗을 심었다.


우리 문학인·예술가들은 생래적으로 고도의 민감성을 존재의 특성으로 합니다. 우리는 세속정치의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고고함을 추구하지만, 그러나 인간성의 기반을 훼손하는 불의와 폭력에는 온몸으로 저항하도록 설계된 유전자를 가진 존재입니다.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 170쪽


  책을 얻으려면 아름숲을 베어야 한다. 한두 해쯤 자란 손가락만큼 가늘고 작은 ‘새끼나무’로는 종이를 못 얻는다. 열 해나 스무 해쯤 자란 ‘어린나무’로도 종이를 못 얻는다. 오래오래 자란 ‘어른나무(헌나무·늙은나무)’여야 비로소 종이를 얻는다. 이미 우리는 ‘책’조차 ‘헌나무·헌종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모든 책은 아침에 쓴 이야기를 저녁에 뚝딱하고 펴내지 않는다. 웬만한 책은 대여섯 해나 열 해나 스무 해쯤 들인다. 서른 해나 마흔 해를 들인 끝에 태어나는 책이 있다. “책에 담기는 이야기”부터 얼마나 ‘오래얘기·헌얘기·옛얘기’인가?


스피릿이 사는 풍요로운 숲에는 다양한 생태가 펼쳐져 있다. 《스트라바간차 이채의 공주 1》 16쪽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새책”을 얼른 읽어치우고서 ‘알라딘 중고샵’에 넘긴다면, 이때에 책은 ‘책’이기보다는 ‘돈(상품)’이라고 여겨야 맞다. 책이라고 할 적에는, 새책과 헌책을 왼손과 오른손에 나란히 놓으면서 고루 어우르고 추스르는 빛을 이야기로 담아서 나누는 길을 짚는다고 할 만하다. 헌책집에 책마실을 안 가는 사람은 슬기(오래빛)가 얕거나 없기 일쑤이다. 새책집에 책마실을 안 가는 사람은 이슬(새빛)을 놓치거나 잊게 마련이다. 슬기랑 이슬을 고루두루 품는 하루를 살아내기에 ‘살림짓기’를 편다. 둘이 나란할 노릇이다. 둘을 어우를 일이다. 둘을 하나로 맺어야 빛난다.


“잘할 것처럼 생겨가지고 못하고, 못할 것처럼 생겨가지고 잘하고. 선생님은 진짜 요지경이야.” “어쩌면 할 수 있는 것과 못하는 걸 본인도 잘 모르는 건지도.” “어우∼ 성가셔.” 《바라카몬 9》 142쪽


  책집이라면, 새책과 헌책을 나란히 두어야 맞다고 본다. 책집에는, 새길과 오래길을 나란히 읽고 짚고 나누는 자리(책시렁)가 있어야 맞다고 느낀다. 책읽기를 즐기는 책손이라면, 왼손으로 일구는 새길을 새책으로 펴면서 오른손으로 돌보는 오래길(헌길·옛길)을 어질게 가다듬는 눈망울을 밝힐 노릇이지 싶다. 새책만 읽으니 갇힌다. 헌책만 읽으면 가둔다. 새책과 헌책을 함께 읽으니 가꾼다. 헌책과 새책을 넉넉히 읽으니 언제나 사랑으로 즐겁게 걸어간다. 왼손에 새책을 쥐고 오른손에 헌책을 잡으니, 새롭게 오래오래 흐를 오늘이라는 이야기를 읽고 잇고 일구고 이루면서 익히고 이르게 마련이라, 이제 이름(말)이 무엇인지 알아보며 지을 수 있다.


《이거 그리고 죽어 7》(토요다 미노루/이은주 옮김, 대원씨아이, 2026.2.28.)

#これ描いて死ね #とよ田みのる

《선생님, 유전자를 조작해도 되나요?》(이상수 글·이창우 그림, 철수와영희, 2025.10.3.)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작가선언 6·9 엮음, 실천문학사, 2009.12.7.)

《스트라바간차 이채의 공주 1》(토미 아키히토/장지연 옮김, 대원씨아이, 2017.11.30.)

《바라카몬 9》(요시노 사츠키/오경화 옮김, 대원씨아이, 2014.9.30.)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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