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23 작은책집 차리는 길은 없다

책벌레수다 : ‘작은·큰’이 아닌 ‘책’을 씨앗으로



  어느새 ‘작은책숲(작은도서관)’과 ‘작은책집(작은책방)’ 같은 이름이 널리 퍼진다만, ‘작은-’은 스스로 작은이웃을 헤아리며 어깨동무하고, 작은펴냄터(1인출판사)에서 작게 여미는 알찬 작은씨 같은 작은책을 눈여겨보겠다는 마음이 아니라면 함부로 안 써야 할 이름이라고 느낀다. 크기가 작기에 작은책집이지 않다. 키나 몸이 작기에 ‘작은사람’이지 않다. 크기나 겉모습만 따지면서 ‘작은-’이나 ‘큰-’을 붙이느라 자꾸 속빛을 안 보거나 못 보면서 휩쓸리기 일쑤이다.


  온누리 들숲메를 이루는 모든 나무는 풀씨보다 작은씨이게 마련이다. 풀씨보다 작아도 어느새 우람하게 자라나는 나무인데, 겉보기로 ‘작은몸’이라 하더라도 그저 ‘씨앗’이듯 그저 ‘책집’과 ‘책숲’이고, 그저 ‘책’이다.


  숱한 ‘작은책숲·작은책집’을 들여다보면, 이름은 ‘작은-’이되 정작 ‘큰펴냄터’에서 잔뜩 찍어내어 널리 파는 ‘이름책(베스트셀러·스테디셀러)’가 수북하게 꽂히더라. 언뜻 본다면, 큰펴냄터에서 선보이면서 알림길(홍보)에 목돈을 쏟아붓는 책이 더 잘 팔린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누리책집(인터넷서점)·큰책집 팔림새하고 마을책집 팔림새는 다르다. 또한 마을책집에서 “‘누리책집·큰책집’하고 똑같거나 비슷한 얼거리로 책을 들이거나 갖추거나 팔려고 한다”면, 이미 처음부터 그들(큰곳)하고 붙을 수 없다. 커다랗게 차리는 책집이 아니라, 마을에서 조촐히 차려서 이웃을 마주하려는 책집이라면, “큰숲을 이루는 작은씨”처럼 “마음을 넉넉하고 아름답게 지피는 씨앗으로 삼을 작은책”을 건사할 일이라고 본다.


  마을책집을 찾아오는 이웃이나 손님이 ‘이름책’을 사겠다고 여쭈면, 그때에 비로소 들여놓되, 처음부터 이름책을 들이지 않을 수 있는 곳이기에 마을책집이요, 마을책숲이면서, ‘작은-’이라는 말을 붙일 만하다.


  “작은책집 꾸리는 길”이라는 말은 꽤 덧없거나 부질없다. 모든 마을책집은 다 다른 마을에서 다 다른 지기가 다 다른 이웃을 마주하려는 터전이니까. “나(책지기를 바라는 나)는 누구인가?” 하고 돌아보면서, “나는 누구를 이웃으로 만나려는가?” 하고 묻고, “나는 낯선 마을이웃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함께 이곳을 새롭게 가꾸고 일구는 사랑씨앗을 심으려 하는가?” 하고 헤아리면 된다.


  숲을 이루는 씨앗마냥, 마을도 푸른숲으로 나아가고 살림집도 푸른터로 피어나는 길을 속삭이는 작은책을 품어서 나누는 터전이라면 ‘작은책집’이라는 이름이 어울린다.


  책집을 처음 차리려는 분은 “책집살림 잘 꾸리기”를 배우려 할 까닭이 없다. “책집을 꾸리는 살림을 배우는 마음”을 바라볼 노릇이지 싶다. 마을책집을 처음 차리려는 분이 으레 ‘기존 독립서점 책지기’님한테 말씀을 여쭙곤 한다만, ‘이웃 마을책집’은 그저 책이웃으로 드나들 노릇이요, ‘오랜 마을책집’ 지기한테서 “여태 어떤 마음으로 책을 만지고 다루면서 일하셨나요?” 같은 말을 여쭙고서 가만히 들으면 한결 다르리라고 본다.


  이를테면, 인천 〈아벨서점〉이나 구미 〈삼일문고〉 책지기님 같은 분은 누구한테나 “책집이라는 곳을 마을에서 꾸리는 마음”을 기꺼이 들려줄 만한 그릇과 눈빛이 밝다. 이분들은 여태 살림길을 오롯이 책으로 넉넉히 지어 왔다. 서울 〈글벗서점〉이나 〈숨어있는 책〉 책지기님도 이제껏 숱한 ‘병아리 책지기’한테 오래도록 도움말을 들려주었다. 큰책집이냐 작은책집이냐 하고 가르지 말고, 한결같이 ‘책집’ 하나를 보면 된다. 새책이나 헌책이 아닌 ‘책’이다. 책을 다루는 집인 책집이다. 살림하는 사람으로서 사랑을 일구며 살아가려는 터전이라서 ‘집’이요, 이러한 집 가운데 책으로 살림길을 배우고 사랑길을 나누며 어깨동무하는 하루를 새삼스레 짓고 싶기에 ‘책집’이다.


  “새로 나온 책”이라는 겉이름을 내려놓을 수 있을 적에 ‘책’을 바라볼 수 있다. 애벌로 읽고서 잊어버리거나 치워놓을 ‘소비재’가 아니라, 두벌 석벌 열벌 쉰벌 온별을 오래오래 이으면서 곁에 놓을 ‘읽고 익혀서 잇는 이야기밭’일 적에 비로소 ‘책’이다. 책이란, 참답게 채우는 그릇이다. 책이란, 손수짓고 손수빚는 동안 몸소 챙기는 꾸러미이다.


  겉이름에 휘둘리면 ‘책’이 아닌 ‘척·체’로 기울고 만다. 바다에서 낚는 그물이건, 나물을 손질하며 담는 그릇이건 ‘채’라고 한다. ‘책’은 모든 다 다른 사람이 다 다른 때와 곳을 살아내며 스스로 배우고 익힌 바를 채로 건져올려서 참하게 채우고 스스로 챙기는 이야기그릇일 테니, 우리가 열거나 드나드는 책집이라는 곳은 참하고 착하게 나누고 노래하는 숨빛과 빛씨를 가꾸는 쉼터요 놀이터요 일터요 살림터요 숲터일 테지.


  아름다운 사람을 나이로 가르거나 따지지 않는다. 사랑스러운 빛을 크기나 값으로 재지 않는다. 함께 읽고 나누면서 책집이며 책숲에 건사할 책이라면, 우리 스스로 ‘무엇’을 눈여겨보고 살피면서 손에 얹으며 함께 웃고 울고 이야기할 만한지 생각할 일이지 싶다.


  작은책집이라면 “문학상을 받은 책”이나 “팔림새가 대단한 책”이 아닌, “글그림에 얹은 이야기”하고 “글그림으로 추스른 삶”하고 “글그림으로 노래하는 사랑”을 어떻게 꾸린 책인가 하고 바라보는 이음터이지 싶다. 마을책집이라면 “글쓴이·펴냄터 이름값”을 다 지우고서 “서울 바라보기”를 하지 않는 책을 가리고 솎고 고르고 건사해서 마을이웃하고 나누는 터전이리라.


ㅍㄹ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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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나는 지난날의 원고뭉치를 꺼내어 펴놓고 이것저것 뒤적여보고 있었다. 언제 햇빛을 보게 될는지조차 알 길 없는 원고들. 그중에는 잉크빛이 부옇게 바랜 것도 적지않았다. 남에게 있어서는 한갓 휴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이것들이 그러나 내게는 다시없이 소중한 것이었다. 어둡고 메마른 세월(1943년)과 함께 자꾸만 위축해 들어가는 내 생활의 명맥을 그런대로 이어주는 한가닥 삶의 보람은 역시 벽장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이 원고뭉치가 아닐 수 없었다. 《黃順元全集 4 너와 나만의 時間·내일》178쪽


방학이 끝나고 보면 / 둘 셋 친구 자리가 / 늘 비어 있습니다 / 말도 없이 / 어딘가로 떠나버린 친구들 // 빈 걸상 올리며 내리며 / 청소를 할 때 / 편지 한 장 없는 그 친구를 / 떠올려봅니다 (방학이 끝나고) 《탄광마을 아이들》 59쪽


이미, 몇 차례나 전술되었듯이, 그는 숱한 ‘읽기’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많은 읽기와 접하는 일이 이기철 자의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타의에 의해서라는 사실을 발견한다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장정일) 《문화비평 2호》 210쪽


우리가 한국사람으로서 정말 긍지를 느낄 수 있게 하는 내용도 사실 복잡한 것은 아니다. 민족이나 민족주의라는 말에 주눅이 들어 이 말을 애써 피해야만 하는 독일사람에 비해 오히려 단순하다고 볼 수 있다. 작은 나라지만 자기를 지키는 높은 문화를 보유하고, 민주적인 절차가 서고, 통일된 평화스러운 나라로서 인류의 보편적인 문화 창달에 기여할 수 있는 민족이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모습이 교육에 나타날 때 오늘날 냉소주의와 허무주의가 뒤범벅이 된 교육이민이라는 말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으로 믿는다. 《경계인의 사색》 290쪽


“혹시 내가, 이대로 영원히 바다 위에서. 으앙∼. 오는 게 아니었어!” “못 말려. 아직 30분도 안 됐는데.” 《도라에몽 6》 108쪽



《黃順元全集 4 너와 나만의 時間·내일》(황순원, 문학과지성사, 1982.8.10.)

《탄광마을 아이들》(임길택, 실천문학사, 1990.5.5.)

《문화비평 2호》(이기철 엮음, 형설출판사, 1989.6.10.)

《경계인의 사색》(송두율, 한겨레신문사, 2002.10.14.)

《도라에몽 6》(후지코 F.후지오/박종윤 옮김, 대원씨아이, 1995.10.31.)

#藤子F不二雄 #ドラえもん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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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22 알아보는 눈을

책벌레수다 : 값은 몰라도 속을 읽으면



  모든 책은 삶을 배우는 길잡이라고 느낀다. 얼핏 ‘좋은책·나쁜책’으로 가르면서 ‘미운책·싫은책’은 아예 거들떠보지 않는 분이 많은데, ‘좋은책’만 챙기는 사람은 언제나 눈이 좁더라. ‘나쁜책’이라고 손가락질받는 책도 나란히 품으면서 살피는 사람은 으레 눈이 넓더라. 미운책이나 싫은책을 안 따지면서 ‘배울책’을 읽는 사람은 언제나 스스로 눈을 틔우더라.


  나는 누구한테서 책이나 책읽기를 배운 바가 없다. 그저 책집마실을 하며 스스로 익힌 책빛이다. 책집에서 만난 책어른과 책이웃과 책동무하고 끝없이 책수다를 하면서 곰곰이 짚으면서 하나씩 알아갈 뿐이다. 아이랑 책집마실을 하는 동안 “아이가 활짝 웃으며 손에 쥘 책”이란 무엇일는지 헤아리면서 다시 익힐 뿐이다.


  책스승은 따로 없다. 모든 사람이 다르게 책스승이다. 아이들이 책스승이고, 이웃이 책스승이다. 책집지기가 책스승이고, 책을 펴내는 모든 일꾼이 책스승이다. 어떤 책을 쓰거나 옮기거나 내든, 누구나 다르게 책스승이다.


  모든 사람은 스스로 배운다. 스스로 안 배우는 사람이라면 허수아비이다. 스스로 배우는 사람은 “시키는 대로 따라가는 심부름”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나서 일으키는 일”을 한다. 누가 무엇을 맡길 적에 ‘심부름’으로 여기는 사람은 싫어하는 티를 내면서 억지로 맺고, ‘일’로 삼는 사람은 그저 새롭게 배우려는 매무새로 즐겁게 맺는다.


  그러니까 일을 하면 된다. 심부름을 맡을 적에는 “남이 나한테 맡겼다” 같은 틀을 내려놓고서 “내가 스스로 나선다”는 마음으로 돌릴 노릇이다. 맡겼기 때문에 따라가는 길이 아닌, 나서서 맡는 길로 돌아서기에 비로소 바람을 일으키고 물결이 일어난다.


  말할 수 없는 일이란 있을까? 말할 수 없다면 일이 아니라고 느낀다. 모든 일은 누구나 다르게 말하게 마련이다. 말할 수 없다고 여긴다면, 눈치를 보거나 생각을 않거나 이야기를 끊거나 종살이로 치닫는 셈이겠지. 둘레를 보면, ‘말’을 하면 나한테 길미가 안 된다고 여기니 말을 삼가더라. ‘말’을 하면 둘레에서 우리를 이쪽이나 저쪽으로 갈라놓으려고 하니까 싫어서 말을 끊더라. ‘말’을 하면 “네 주제에 무슨 소리?” 하면서 비웃거나 내치니까 창피하거나 수줍어서 말을 안 하고.


  그렇지만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은 ‘마음’을 담고 나타내는 소리인걸. 마음은 저마다 ‘삶’이라는 길을 보내거나 지낸 자취이다. 삶을 잇고 누리고 펴기에 마음에 담아서 말로 옮길 뿐이다. 말을 할 수 없다면 아직 삶이라는 자리에서 몸으로 겪거나 치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몸으로 겪거나 치렀는데 말을 할 수 없다면 눈치를 보는 굴레이다.


  ‘말’로 드러내기에 뒤틀리지 않는다. ‘말하기’가 아니라 ‘꾸미기’나 ‘치레하기’를 헤아리느라 그만 뒤틀린다. 그저 보거나 느끼고 겪은 대로 말을 할 적에 언제나 스스로 새롭게 배운다. 흔히 “지식은 머리에 쌓고, 교양은 삶으로 드러난다”처럼 잘못 말을 하던데, ‘지식 = 부스러기’라서 머리에 먼지로 쌓여서 생각을 막는다. ‘교양 = 겉치레’라서 교양이 몸에 밸수록 되레 꾸미거나 치레하고 만다.


  우리는 ‘지식·교양’이 아닌 ‘알다(앎)’를 느낄 길을 갈 노릇이다. ‘알’려면 새끼새가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듯 ‘앓’아야지. 일부러 어려운 책을 읽으면서 끙끙 앓는들 알지 않는다. 가장 쉽다고 여기는 그림책과 어린이책부터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알깨기를 하면서 알아차린다. 이렇게 쉬운데 무슨 뜻일까 하고 되짚고 되새겨야 천천히 알아본다.


  ‘쉬운책’을 읽기 때문에 생각을 못 하지 않는다. ‘쉬운책’을 곁에 안 두는 탓에 생각을 잃는다. 어린이하고 나란히 서서 이야기할 ‘쉬운책’부터 품기에 생각이 반짝반짝 살아나고 깨어난다. 어린이 곁에 서지 않으려 하니 ‘어려운책’은 손에 쥐지만, 막상 생각하고는 한참 멀다. ‘어려운책’을 쥐어야 많이 배운다고 잘못 여기느라, 그만 말을 어렵게 꼬거나 뒤트는 굴레에 사로잡힌다.


  오늘날 숱한 책은 ‘낱말과 글자락만 억지로 어렵게 꾸민 얼개’로 가득하다. 그렇기에 ‘인문교양책’을 많이 읽는 분이 오히려 인문도 교양도 모르는 채 더 등지기 일쑤이다. 어느 책에 누가 “읽는다는 것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일이다” 같은 글을 적었는데, 아주 틀렸다. ‘읽다’라는 우리말도 ‘이해·해석’이라는 일본한자말도 어떤 속뜻인지 안 살피기에 이런 글을 그냥그냥 쓰고 말 뿐 아니라, 우리도 이런 글을 그냥그냥 훑고서 지나간다.


  그러니까, 생각을 해야 한다. ‘읽다’는 ‘일다 + 익다’인 얼개이다. 바람과 물결을 일으키고 몸으로 스며서 저절로 우러나올 때까지 익힐 적에 비로소 ‘읽다’이다. 눈으로 슥 지나칠 적에는 ‘훑다’이다. 일으켜서 익히려면, 풀어내야(해석) 하고 헤아려야(이해) 한다. 둘 다 할 노릇이다. 풀고 헤아리기에 어느덧 마음을 일으켜서 생각으로 반짝여서 눈에 익는다. 이때에 이르러야 ‘읽다’이다. 곧 ‘읽다 = 풀다(해석) + 헤아리다(이해)’일 테니, 풀기만 하거나 헤아리기만 하면 읽어내지 못 한다.


  책값은 책을 밝히거나 말하지 못 한다. 세간값은 세간을 밝히거나 말하지 않는다. 비싸기에 좋은 책이나 세간일 수 없다. 싸기에 나쁜 책이나 세간이지 않다. 값은 몰라도 된다. 아니, 값을 볼 일이 없다. 어떤 값이든 속을 보면 된다. 값이 어떻더라도 알맹이를 살피면 된다. 배우려는 길을 스스로 읽으면 되고, 익히려는 길을 스스로 일구면 된다. 한꺼번에 알아차리기에 나쁘지 않지만, 하나씩 알아차리기에 즐겁다. 한 발짝씩 걸으면서 알아간다. 하나하나 빚고 짓고 다듬으면서 알아낸다. 하나둘 열고 틔우고 피우면서 환하게 깨닫는다.


ㅍㄹ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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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하는 일은 항상 기성 라면의 구조에 올라서서 세부를 조금씩 개량한 것뿐이야. 하지만 라면만이 아니야. 새로운 무엇인가는 구조마저 의심하고 파괴하지 않고서는 태어나지 않아!” 《라면 요리왕 8》 135쪽


“그 자식 잔소리를 안 듣고 있었다고?” “듣기는 했지만 귀동냥을 하고 있었죠. 하지만 저보다 오라버니를 찍어 누르려는 게 용서가 안 됩니다!” “왜 네가 화를 내는데?” “고맙게 해 주시는 분을 바보 취급하는데, 화내지 않는 게 이상하잖아요!” 《아카네 이야기 4》 189쪽


시장 논리에 의해 기획되고 저렴하게 만들어진 책을 당장의 싼값에 구입한 독자들은 이내 실망을 하고 맙니다. 실망스러운 책은 읽어 봐야 소용없는 무용성의 종이 뭉치가 될 뿐입니다. 장식장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서정가제가 없어지면 우리가 읽고 싶은 책이 사라집니다》 100쪽


당시 한국광복군 창립식에 참여했던 이들은 1938년 11월에 결성된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이었는데, 34명 중 11명이 여성이었습니다. 《나는 여성이고, 독립운동가입니다》 213쪽


“그렇잖아. 난 아빠 말고도 매직걸 좋아하고, 요즘은 달리기랑 학교도 좋고, 그림 그리기도 좋아. 그런데 아빠가 좋아하는 게 나뿐이라니 쓸쓸하잖아? 그치만 밥 만드는 걸 좋아해서 다행이야!” 100쪽



《라면 요리왕 8》(쿠베 로쿠로 글·카와이 탄 그림/정하연 옮김, 대원씨아이, 2003.5.15.)

#ラ-メン發見傳 #久部綠郞 #河合單

《아카네 이야기 4》(스에나가 유키·모우에 타카마사/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2024.1.25.)

#あかね? #末永裕樹 #馬上鷹?

《도서정가제가 없어지면 우리가 읽고 싶은 책이 사라집니다》(백원근 글, 한국출판인회의, 2020.10.8.)

《나는 여성이고, 독립운동가입니다》(심옥주, 우리학교, 2019.2.16.)

《달콤 달콤 & 짜릿 짜릿 8》(아마가쿠레 기도/노미영 옮김, 삼양출판사, 2017.12.4.)

#甘?と?妻 #雨?ギド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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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21 나무를 읽는 손

책벌레수다 : 휘두르지 않고 쓰다듬기



  나무는 우람하게 자라더라도 굳이 큰소리도 작은소리도 내지 않으면서 가만히 둘레를 아우른다. 나무가 맺는 씨앗은 더없이 작지만, 이 작은씨가 머잖아 아름숲으로 피어나는 첫길이다. 나무는 뭇새가 잔뜩 날아앉아도, 애벌레가 잎을 잔뜩 갉아도 그저 모두 내어준다.


  우리는 아이라는 나날이던 때에 아무런 손길을 못 받고 자랐을 수 있는데, 오늘은 어른과 어버이라는 자리에 서서 새록새록 따스하게 손길을 펴는 나무로 설 만하지 싶다. 올해(2026해)로 쉰 살이 넘은 분이라면 “비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는 하루”를 신물나도록 겪었으리라. 마흔 살이 넘은 분도 툭하면 얻어터지면서 살아야 했을 테지. 서른 살이 넘은 분 언저리는 거의 안 맞는 나날을 보냈지 싶고, 스무 살이 넘는 분은 주먹다짐이 자취를 감추다시피 한 터전이라고 느낀다.


  “맞고 컸”으니까 “때리면서 키우”기 쉽다. 우리나라 싸움터(군대)가 꼭 이런 꼬라지였다. 윗내기는 새내기를 신나게 두들겨패고 괴롭히고 막말을 일삼는다. 새내기는 가운데(중간고참)에 이를 무렵에 “예전에 얻어맞고 시달리던 그대로” 새내기를 억누르고 괴롭히는 몫을 맡아야 한다. 이런 얼뜬짓이 안 끊이는 모습이 지겨우면서 괴로웠다. 석걸음(상병)을 지날 즈음부터 또래(입영동기)를 말렸다. “얘들아, 우리까지만 죽도록 맞고서 끝내자. 이 멍청한 짓을 물려줄 수 없어.” “무슨 소리야? 너도 그렇게 맞았으면서 어떻게 그냥 지나가? 야, 우리가 때리고서 나가야지.” “그럼, 우리한테 맞는 동생들도 걔네가 우리 자리에 오면 똑같이 때리잖아? 우리부터 끊어야 하지 않아?” “와, 여기 부처님이 다 계시네. 아니, 예수님인가? 야, 우리는 그냥 육군보병 똥개야. 똥개일 뿐이니까 똥개로 구르다가 가야지.” “뭐, 우리가 똥개는 맞지만, 내가 부처님이나 예수님처럼 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주먹을 안 들고 말로 하면서 바꿀 수 있지 않겠니?” “네, 네, 너 혼자 그러세요.”


  책벌레는 책을 쥘 적마다 나무가 베푸는 빛이 무엇인지 돌아본다. 우리가 쥐는 모든 책은 아름숲에서 오고, 아름숲은 아름드리나무가 베푼 종이로 묶는다. 나무한테서 받은 종이에 어떤 글을 앉혀서 어떤 줄거리를 다루든, 책을 손으로 만질 때마다 나무를 만나고 느끼고 얘기한다고 느낀다.


  책벌레는 누구보다도 나무를 곁에 두는 삶이다. 시골 아닌 서울에서 살더라도 책벌레는 나무가 베푼 사랑을 어마어마하게 누리는 나날이다. 나무 한 그루 심을 땅뙈기조차 없는 땅밑집(지하실)이나 하늘집(옥탑방)에서 살더라도, 그냥 잿더미(아파트)에서 살더라도, 책벌레는 누구보다도 푸른책(환경책)을 가까이할 노릇이면서, 푸른살림을 일구려고 온힘을 기울여야지 싶다. 온통 ‘나무몸’인 ‘종이꾸러미’를 이루는 책이니까.


  나무는 언제나 베푸는데, 나무 스스로 ‘베푼다’고 여기지는 않는다고 느낀다. 나무는 그저 작은씨를 틔우고 깨워서 천천히 줄기를 올려서 푸르게 노래하려는 길이라고 느낀다. 우리집에서 자라는 나무이든, 마을이나 길에서 스치는 나무이든, 서울이나 큰고장에서 슬프고 아프게 줄기치기와 가지치기에 시달리는 나무이든, 그윽히 바라보다가 살며시 쓰다듬고 폭 안기도 하고, 때로는 부드럽게 입맞춤을 한다. 나는 나부터 나무를 사랑하는 책벌레로 걷는 하루이고 싶다.


  나무살림을 지켜보는 사람은 “아낌없이 베푸는 나무”로 여기지만, 나무는 늘 스스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지을 뿐이라고 본다. 사람은 늘 나무한테서 받고 누리고 얻되, 나무는 “사람한테 베푼다”는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 푸르게 빛난다”는 마음이라고 본다. 어찌 이렇게 여기느냐 물을 만하겠지. 마주하는 모든 나무를 쓰다듬고 안고 뺨을 대면서 물어본다. “넌 어떤 숨결인 사랑이기에 이토록 사람한테 넉넉히 베풀 수 있니?” 나무는 으레 우리 마음에 울리는 고즈넉한 빛소리로 사근사근 들려준다. “네(사람)가 나(나무)를 바라보는 눈빛 그대로, 나(나무)는 너(사람)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춤추고 노래하는 하루야.”


  나무는 나무 스스로 빛난다. 나무 곁에 선 사람은 사람으로서 나란히 빛날 수 있다. 나무한테서 얻는 살림을 기쁘며 반갑게 다루고 갈무리하면서 새롭게 오늘을 지으면, 나무도 사람 곁에서 어느새 ‘받고 누리’는 사랑이 있는 길이지 싶다.


  지난날 싸움터(군대)에서 겪은 일을 더 떠올려 본다. 그때(1995.11.6.) 싸움터에 끌려가서 마지막날(전역일 1995.12.31.)을 함께 맞이한 또래가 열이었던가. 마지막날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새벽에 눈이 오지게 내려서 쌓였다. 한 길(1m) 넘게 쌓인 눈이라 어떤 수레(트럭)도 다닐 수 없었다. 마지막말(전역신고)을 외치는 우리한테 중대장과 대대장은 “야,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데 하루 더 자고서 가지 그래? 걸어서 어떻게 먼 멧길을 내려가려고?” 하면서 웃는다. 우리는 한목소리로 “눈밭을 헤치며 내려가다가 벼랑에 떨어져 죽더라도 오늘 집으로 가겠습니다!”


  한나절 남짓 걸어서 내려가며 또래들하고 이야기한다. “최뱀, 너 대단하더라.” “뭐가?” “네가 꺾였을(상병6호봉) 때 우리를 다 모아서 동생들 때리지 말자고 했던 말 생각나?” “그럼, 생각나지.” “너 어떻게 애들 안 때리고 끝까지 버텼냐? 대단하다.” “난 너희가 더 대단해.” “에? 뭐가?” “아무리 얼뜬 놈들한테 신나게 얻어맞고 굴러야 했더라도, 어떻게 멀쩡하고 불쌍한 동생들을 그렇게 때릴 수 있냐? 우리가 뭘 잘못해서 맞은 적이 없잖아. 그놈(고참)들은 그냥 심심풀이로 때리고 괴롭혔잖아.” “그렇지.” “안 때리고도 함께할 수 있어. 이제는 주먹질은 지긋지긋하고, 사라져야 해.”


  강원도 양구군 동면 원당리에서 시골버스를 타고서 양구읍으로 나온다. 이제 다들 헤어질 때이다. 헤어지기 앞서 허름한 밥집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불술(소주)을 두 병씩 깠다. 눈물콧물을 흘리면서 “우리, 살아남았지? 그 눈밭을 헤치고서 드디어 그 불바다에서 살아나왔지?” 하는 말을 주고받았다. 나는 춘천으로 가서 기차를 탔다. 마지막으로 몸을 싣는 ‘티엠오’이다. 청량리역에서 내린 뒤 용산역 앞 〈뿌리서점〉부터 들른다. 책집지기 아저씨한테 큰절을 올리며 “저 이제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이제부터 뻔질나게 책을 보러 오겠습니다. 군대에서는 책을 한 줄도 읽을 수 없었으니, 읽어야 할 책이 어마어마합니다.” 서울에서 인천으로 전철을 타는데, 어쩐지 쓸쓸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이엠에프’라고 했다. 아이엠에프가 덮치면서 삽질(공사장 노가다) 일자리가 몽땅 사라졌다. ‘백두산부대 겉옷’을 입고 삽질을 나가면 일삯을 곱빼기로 준대서 잔뜩 별렸는데.


ㅍㄹㄴ


남성은 그들 내부의 여성과 융합할 때 창조적이 되고, 또 여성은 그들 안의 남성 속에 깃든 여성성과 닿을 때 창조적이 됩니다. 《지구, 우주의 한 마을》 22쪽


다른 사람의 문화를 파괴하는 것은 불멸성을 빼앗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사라예보의 올림픽 스타디움과 중앙도서관이 파괴되었다는 기사를 읽고 울었다. 신문에 실린 폐허가 된 도서관 사진이 무엇보다도 속상했다. 그 문화가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 251쪽


내가 혼자서 가만히 참고 있는 동안에, 유카리 일당뿐만 아니라 반 여학생 전체가 나를 무시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학교를 결석하지는 않았다. 누구 하나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도 선생님이 눈치 채지 못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했다. 《불균형》 20쪽


“그렇습니다. 당신도 바벨2세도 바벨 님의 피를 이어받은 자손입니다. 그러나 바벨2세 쪽이 보다 강한 바벨님의 피를 이어받은 것입니다.” … “내 최대의 힘을 쓸 수 없다는 건가. 그럼 이제 요마와 어떻게 싸우지?” “당신의 능력으로 싸우십시오. 당신이 수천 년 전에 그 능력으로 기적을 일으켰다면 인류는 당신을 신으로 모셨을 겁니다. 그건 요마도 마찬가지겠지만요.” 《바벨 2세 2》 43, 226쪽


즉 항상 즐거운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설사 자신은 기분이 나빠도 미소를 띄우고 활력과 자신감을 보여야 한다 … 단순생산직 종사자들과 마찬가지로 창조적 전문가들은 자기들 일의 최종 수혜자와 직접 접촉하는 일은 별로 없다. 191, 193쪽



《지구, 우주의 한 마을》(게리 스나이더/이상화 옮김, 창비, 2005.5.23.첫/2015.9.30.고침)

#APlaceinSpace #GarySnyder

《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템플 그랜딘/홍한별 옮김, 양철북, 2005.9.12.)

#ThinkinginPitures (1995년) #TempleGrandin

《불균형》(우오즈미 나오코/이경옥 옮김, 우리교육, 2004.10.22.)

#非バランス (1996년) #魚住直子

《바벨 2세 2》(요코야마 미쓰테루/이동섭 옮김, AK커뮤니케이션즈, 2007.1.30.)

#バビル2世 #橫山光輝

《國家의 일》(로버트 비 라이시/남경우 외 옮김, 까치, 1994.7.1.)

#RobertBReich #WorkofNation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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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20 서울국제도서전

책벌레수다 : ‘모두잔치’ 아닌 ‘돈잔치·이름잔치’라면



  오늘 우리가 누구나 배울 수 있는 터전을 누린 지 고작 온해(100년)도 안 된 줄 모르기 일쑤이다. 그런데 “누구나 배우는 터전”을 마련하라고 임금님한테 목소리를 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기 일쑤이다. 이른바 ‘누구나배움(국민교육)’을 외친 사람은 ‘페스탈로치’이다. 페스탈로치라는 아재는 ‘전쟁고아’를 몸소 거두어 ‘누구나배움터’를 열었고, 나라(독일 정부)에서 이 아이를 돌보고 가르쳐서 ‘생채기를 씻고 달래어 아름답고 즐겁게 살아갈 어른으로 북돋울 몫(의무)’이 있다고 외쳤다.


  그렇지만 페스탈로치가 죽는 날까지 임금님뿐 아니라 벼슬아치는 페스탈로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페스탈로치는 그저 이녁 온힘을 쏟아서 아이를 돌보고 가르치고 품었다. 뒷날 페스탈로치가 외친 ‘누구나배움’이 천천히 퍼지고 자리를 잡아서 ‘초중고 기본교육 제도’가 모든 나라에 뿌리내렸다. 그리고 이런 배움틀을 마련한 페스탈로치 같은 이름은 그야말로 우리나라에서 교육대학교에서나 조금 짚을 뿐 교대 바깥에서는 까맣게 모른다. 이와 달리 ‘루소’ 같은 사람 이름은 오래도록 ‘사상가’라는 이름을 누린다.


  우리는 어디를 보는 사람일까? 우리는 무엇을 읽는 사람일까? 우리는 속읽기를 잊은 채 겉훑기에 사로잡힌 늪이로구나 싶다.


  황석희·료·정희원·고은·신경숙·정지돈·이병한·박위뿐 아니라 숱한 겉치레 이름꾼이 드날리면서 책과 말과 글로 돈벌이를 일삼았다. 그들은 일찌감치 겉발린 말글책을 선보이면서 홀렸다. 우리는 속빛이 아닌 겉치레로 꾸민 숱한 책을 의젓하게 쳐내거나 솎아내지 못 한 채 살아간다. 이들 민낯은 이제 드러났지만, 민낯이 아직 안 드러난 숱한 글쟁이와 말쟁이가 있다.


  앞으로도 민낯이 드러날 이는 수두룩한데, 민낯이 드러날 때마다 놀라기보다는, ‘속(행간)’을 읽어야 한다는 오래말처럼 이제는 ‘얼굴값’이 아니라 ‘속’을 읽고 살피고 찾는 길로 우리 스스로 바꿀 때이지 싶다. 모든 책을 다 읽으려는 마음이되, 허울좋게 꾸미는 글꾼은 되도록 삼갈 줄 알아야지 싶다. 아니, 스스로 보금자리부터 몸소 가꾸는 하루라면 ‘겉글꾼’이 아니라 ‘속빛이웃’이 여민 책을 시나브로 가까이하겠지.


  지난 2025해 봄에 ‘서울국제도서전 사유화’를 둘러싼 고름을 건드린 여러 사람이 있다. 한 해가 흐르는 동안 지켜보는데, 이 고름덩이는 새해를 맞이해도 풀릴 낌새가 안 보인다. ‘모두잔치’여야 할 책마당을 ‘혼자 돈잔치’로 바꾸고 만 슬픈 민낯이지만, 이런 속내를 찬찬히 짚은 글바치(기자·작가·평론가)부터 한 줌조차 안 된다.


  다만 한 줌조차 안 되더라도, 한 줌 있는 작은씨앗은 ‘그들끼리 혼자 돈잔치’가 아닌 ‘누구나 즐겁게 책잔치’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목소리를 낸다. 생각해 볼까. ‘모두잔치’라면 ‘누구나잔치’요, 누구나 드나들 자리를 마련해서, 가난하건 가멸차건 스스럼없이 만나고 아우르는 놀이터와 노래터를 이룬다. 모두잔치가 아닌 ‘돈잔치’에 ‘이름잔치’에 ‘힘잔치’라면, 목돈을 낼 만한 사람과 펴냄터가 한복판에 서겠지.


  여태껏 흘러온 ‘서울국제도서전’은 이름을 드날린 펴냄터·글바치끼리 한복판에 서면서, 돈과 이름이 있는 이들끼리 한복판에서 돈맛·이름맛·힘맛을 펴면서, 온나라 모든 펴냄터·글꾼을 들러리로 세울 뿐 아니라 ‘머리(참가자 숫자)’만 늘리는 틀이었다. 잔치가 아닌 ‘자랑’일 뿐이지 싶다. 2026해에 맞이할 ‘모두책잔치’라면 ‘에이아이(AI)’로 장난질을 치는 이름꾼을 내세울 일이 아니다. ‘어린이’ 곁에서 ‘어질게 어른으로 서는’ 작은글꾼과 작은펴냄터 누구나 한복판에서 놀고 노래하는 한마당을 일굴 노릇이다.


  1954해에 ‘서울도서전’이 있었다고도 하지만, 제대로 책잔치를 꾀한 무렵은 1982해에 ‘한국출판판매회사’가 3.20.부터 한 달에 걸쳐서 ‘서울북페어’란 이름으로 너른마당을 편 때로 보아야지 싶다. ‘서울책잔치’를 꾀하던 1982해에 자그마치 한 달에 걸쳐서 했다고, 이듬해에도 이렇게 길고 넓게 책마당을 폈다고 들었다. 그야말로 누구나 모두 함께할 만하도록 자리를 열었고,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모든 책을 담고 품고 나누고 알리는 큰잔치를 이루었다고 들었다.


  곰곰이 보면 ‘국제도서전’ 같은 이름은 매우 일본스럽다. 우리는 굳이 일본스런 이름을 안 써도 된다. 이제는 ‘북페어’도 ‘도서전’도 아닌, 굴레 같은 허울은 떨쳐내고서 ‘책잔치’를 하면 된다. ‘모두책잔치’를 열 수 있으면 된다. ‘서울책잔치’처럼 수수하게 이름을 붙이는 길부터 살필 수 있다.


  사랑은 그저 ‘사랑’일 뿐이라서, 사랑에는 높낮이나 크기가 없다.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따로 없이 그저 사랑이다. 해마다 우리나라 온책과 온글과 온사람을 모으는 온잔치라면 ‘온잔치’라 할 수도 있고, ‘온서울잔치’나 ‘온책잔치’라 할 만하다. 오히려 가장 수수하게 ‘서울책잔치’라는 이름이 가장 환하고 아름답게 나아갈 길을 밝히는 ‘작은’ 이름일 수 있다고도 느낀다.


  으리으리하거나 우람하게 내세운다든지, 몇몇 이름꾼을 드높이려고 하는 틀을 버릴 수 있어야 잔치이다. 봄마다 들숲메에 온갖 들꽃이 너나없이 어울리면서 돋아나서 푸르게 일렁이듯 수수하고 작은 모든 펴냄터와 글꾼이 어울려야 한마당이다.


  ‘서울책잔치’는 크든 작든 모든 펴냄터와 글꾼한테 활짝 열어젖힌 잔치마당으로 가야 맞다. 잔치마당이라 하더라도 돈잔치나 이름잔치가 아닌, ‘얼굴(대표작가)’을 따로 내세우지 않고서 모든 곳이 다 다르게 빛날 만한 길과 틀을 세우면 된다.


  이를테면, 모든 펴냄터가 똑같은 크기인 칸(부스)을 받아서, 그저 제비뽑기로 자리를 마련하는 길을 갈 적에 서울책잔치답다고 본다. 칸을 돈으로 사고받는 틀에 굳이 얽매이면서 몇몇 얼굴을 내세우는 굴레에 그대로 갇히기에, 자꾸자꾸 돈자랑·이름자랑·힘자랑에 파묻힌다. 이제는 자랑질이 아닌 잔치판으로 갈 때이니, 책사랑이라는 하루를 살아가는 책이웃 누구나 서울책잔치가 아름답게 제자리를 찾는 길을 함께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ㅍㄹㄴ


산마르코 대성당 종탑에 올라 우아한 베네치아를 내려다보고, 볕이 잘 드는 광장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리도 섬에서 해수욕을 하고, 소금기 가득한 피자로 배를 채웠다. 무라노 섬으로 가 밤하늘의 은하수를 담은 유리알 펜던트를 샀다. 《사색하기 좋은 도시에서》 94쪽


“아뇨, 제 아이가 아니에요.” “아, 실례했습니다. 남자 분은 잘 들르지 않으셔서 아빠신 줄 알았어요.” “그랬으면 좋았을걸 말입니다.” “네?” “아, 아무것도 아녜요.” “어쨌든 축하할 일이죠. 아기가 태어났으니!” 《루나 하이츠 2》 198쪽


“그렇게 미도리 선배가 좋으면 어째서 똑바로 솔직하게 대하지 않는 거예요! 그렇게 애매하고, 적당적당 나오니까 나까지 괴로운 거라구요!” 《루나 하이츠 3》 206쪽


스스로 열린 마음을 갖고 있고 다른 문화에도 흥미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너무나 다른 가치와 규범에 맞닥뜨리게 되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른다. 《삶을 위한 수업》 135쪽


“빈 요트를 바다에서 찾는 거야?” “그런 셈이지.” “모두 사람이 타고 있잖아. 빈 요트 같은 건 없다고. 이 거짓말쟁이.” “정말 시끄럽네. 꼭 찾을 수 있을 거야. 인내심을 가지고.” 《도라에몽 플러스 6》 56쪽



《사색하기 좋은 도시에서》(안정희, 중앙북스, 2015.9.7.)

《루나 하이츠 2》(호시사토 모치루/이경주 옮김, 북박스, 2004.9.9.)

《루나 하이츠 3》(호시사토 모치루/이경주 옮김, 북박스, 2004.11.25.)

#星里もちる #ルナハイツ

《삶을 위한 수업》(마르쿠스 베른센 엮음/오연호 옮김, 오마이북, 2020.5.20.)

#MarkusBernsen #Secretstonurturingconfident

《도라에몽 플러스 6》(후지코 F. 후지오/김준균 옮김, 대원씨아이, 2005.4.30.)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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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19 그들한테 시키기

책벌레수다 : ‘곁’과 ‘나·너’와 ‘우리’



  우리가 쓰는 말에서 ‘그·그들’은 그저 “불러도 목소리가 닿지 않을 만큼 멀리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자리를 수수하게 나타냈다. 그런데 요 열 해 사이에 ‘그·그들’은 ‘놈·몹쓸놈·미운놈·부라퀴’를 가리키는 밉말(혐오표현)로 확 바뀌었다.


  ‘그·그들’이란, 아직 ‘이·이들’로 다가서지 않은 사이일 뿐이요, 남(그들)이 나한테 다가설 노릇이 아니라, 내가 너(그들)한테 다가설 노릇이다. 이러면서 서로(나랑 너)가 나란히 다가설 노릇이요, 둘(나랑 너)이 나란히 다가설 때에 비로소 ‘우리’라는 이름을 쓴다.


  우리나라는 유난히 ‘우리’라는 낱말을 널리 쓴다고 여긴다. 다만, 우리나라는 조금 유난해 보일는지 모르나, 모름지기 모든 곳·나라·겨레가 ‘우리’를 으레 쓴다. 그저 우리나라는 ‘하늘겨레’라는 뿌리가 있어서 ‘하늘’을 가리키는 숱한 낱말 가운데 하나인 ‘우리’를 익히 쓴다.


  요샛말(최근 표준어)로는 ‘하늘’이되, 고작 쉰 해나 일흔 해나 온 해 앞서만 해도 ‘하 + ㄴ + ㆍ + ㄹ’인 얼개이다. ‘하날’인 셈이고, 여러 고을과 뭇사람은 ‘한울’이라는 낱말을 즐겨쓴다. ‘하늘 = 한울’이요, ‘하·한’은 ‘크다·많다’를 나타내는데, ‘하·한’은 “셀 길이 없도록 그저 크고 많다”라는 속뜻이다. 그렇기에 ‘한길·한참·한껏·한가람·한새·한소·한창’ 같은 낱말이 있고, 받침을 바꾸어 ‘함·함께’로도 쓴다.


  곧 ‘하늘 = 가없이 크고 너른 울’이요, ‘울’은 ‘우리’를 줄인 낱말이라서 ‘하늘 = 큰우리·너른우리·하나우리·함께우리’인 얼개이다. 우리가 ‘우리’라는 낱말을 쓸 적에는, 나랑 네가 똑같고 나란히 언제나 ‘하늘’을 ‘아우르’듯 크고 넓고 깊다는 마음을 그린다.


  그렇다면 왜 기껏 열 해 사이에 ‘그·그들’ 쓰임새가 확 뒤바뀌면서 ‘극좌·극우’라는 이름을 함부로 쓸까? 우리 스스로 ‘우리’인 줄 잊어야, 나라(국가·정부·사회)가 우리를 ‘종(노예)’으로 부리기 수월하다. 나랑 너를 아우르는 하늘빛이라는 속뜻인 ‘우리’라는 낱말을 안 쓰면서 ‘나(나의·my·ego)’라는 틀에 가두어야, 나하고 너를 잇는 바람빛을 잊고 잃는다. 이래야 나라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따르지. 종살이(노예사회)로 억눌러서 사람을 길들이려고 하는 나라이기에, 사람들이 스스로 갈라치기를 하면서 끝없이 불타오르고 싸우고 죽이기를 바란다.


  사람들 스스로 ‘너나들이’라는 ‘우리’라는 숨빛을 잊어야, 지쳐서 죽을 때까지 싸우느라 ‘생각하기를 멈춘’다. 싸울 적에는 앞뒤를 안 가리니까 ‘생각’을 안 한다. 생각을 안 하니까, 나라가 시키는 대로 따라간다. 서로 ‘그놈들’이라고 손가락질하면서 ‘극좌’라느니 ‘극우’라느니 놀리고 비아냥대로 윽박지르고 주먹을 흔들면서 노려본다. 서로서로 ‘나(나의·my·ego)’만 옳다고 외친다.


  ‘우리’라는 이름을 잊기에 하늘과 바람을 잊는다. 땅과 바다를 잃는다. 들숲메를 나란히 잃는다. 이러면서 서울이라는 수렁에 스스로 갇힌다. ‘우리’를 바라볼 때에는 늘 “나는 누구일까? 내가 보는 너는 누구이지?” 같은 말을 끝없이 되물으면서 스스로 눈뜨는 길을 가려고 스스로 배운다. 잘 보면 누구나 쉽게 알 텐데, 사람들 스스로 서로 갈라치기를 하면서 ‘쌈박질(극좌·극우 편가르기 전쟁)’을 벌일 적에는 어느 누구도 안 읽고 안 쓰고 안 익히고 이야기조차 없다.


  “나만 옳으”니까 그저 목소리만 높인다. ‘높이는 목소리’조차 어디에서 나온 말인지 모른다. 나라가 뒤에서 글바치(지식인·엘리트)를 시켜서 살살 지피는 속임말을 그대로 따르면서 목소리만 높이느라, 마음도 생각도 삶도 살림도 사랑도 없이 쳇바퀴를 한다.


  예부터 배우는 사람은 “모든 책 읽기”를 했다. 왼놈이 쓴 책이라 안 읽는다든지, 오른놈이 쓴 책이라 불태운다든지, 가운놈이 쓴 책이라 팽개친다면, ‘배움길’이 아니라 ‘종살이(국가권력 복종‥제국주의와 군사독재 부역)’로 치닫는 셈이다.


  누구나 모든 책을 읽을 수 있다. “그 많은 책을 어떻게 다 읽어?” 하고 말할 까닭이 없다. 그저 읽으면 된다. 그저 차근차근 읽으려고 하면 어느새 “모든 책 읽기”라는 삶길을 걷는 줄 알아챈다. 배움터는 온갈래를 고루 배우는 터전이다. 왼갈래나 오른갈래만 가르친다면 배움터가 아니다. 온길을 짚으면서 온살림을 익힐 터전으로 삼을 배움터이다. 이리하여, “그들(그놈)만 읽고 배워야” 하지 않지. “우리부터 읽고 배워야” 한다. 아니, 나부터 읽고 배우면 되고, 너도 함께 읽고 배우면 된다. 우리는 서로서로 어깨동무하면서 함께 읽고 같이 배우고 즐겁게 살림짓기를 노래하면 된다. 무엇보다도 모든 책을 차근차근 읽어내어 모든 빛을 아우르는 ‘하늘숨’을 마시는 하루를 살아내어 살림하는 사랑에 눈뜨는 길을 걸을 노릇이다.


  그들한테 시킬 까닭이 없다. 그들이 밉말(혐오표현)을 쓴대서 그들을 손가락질한다면, ‘손가락질’도 똑같이 밉말이다. ‘그들’이 아닌 ‘옆’에서 누가 밉말을 하든 말든, 나랑 너랑 우리는 살림말과 숲말과 푸른말과 사랑말과 사람말을 헤아려서 펴면 된다. ‘그들’도 듣고, “말을 하는 나부터 넋이 늘 들을” 아름말을 즐겁게 펴면 된다. 먼발치 그들이나 놈팡이가 아닌, 나랑 네가 서로 다가서서 이루는 ‘곁’을 이룰 노릇이다.


  ‘나·너’는 보는 자리만 다르다. ‘우리’는 나란히 보는 자리를 이루었다는 뜻이다. ‘어울리’는 사이에 ‘아우르’는 틈을 열기에 ‘우리’이다. 함께 웃고 같이 울면서 나란히 이야기하는 오늘을 지낸대서 ‘우리’이다. 나는 너를 만나기에 웃고 운다. 너는 나를 마주하기에 울고 웃는다. ‘너나들이’라는 오래말이 왜 있는지 헤아려 보자. 너하고 나 사이에 바람길을 내어 하늘빛이 파랗게 스며들기에, 싹틔우고 눈뜨는 오늘 이곳에서 사랑이라는 씨앗이 깨어날 수 있다. 작은 씨앗 한 톨을 깨우는 길잡이말 한 마디가 바로 ‘우리’이다.


ㅍㄹㄴ


고향 친구와 술 한잔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사기를 쳐서 살거나 빌어먹더라도 도시가 낫다는 친구의 말에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아무리 농담이라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많으모 세상이 우찌 돌아가겠노. 그라고 앞으로 자라나는 아이들은 우찌 살겠노.” 《농부시인의 행복론》 37쪽


“고양이 세계 정복을 꾸미고 있는 게 아닐까?” “뭐? 엄마, 자고 있는 코유키를 보고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야?” 《줄무늬 고양이 코우메 23》 49쪽


“사미? 표정이 그게 뭐야?” “어디 있든 별로 상관없잖아요.” “상관있어! 걱정되니까.” “저어, 저희 집이요. 저희 집에 있었어요.” 《우리 집 꼬마 아가씨 3》 20쪽


서울에서 나고자란 또래 아이들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면 어땠을까요? 서울 하늘 역시 별을 볼 수 있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60쪽


‘언젠가 분명 너에게도 사투르노가 알려줄 거야. 이 세계는 넓고 언제나 바람이 불어서 아름답다는걸. 나 역시 그 아름다움의 일부라는 걸.’ … ‘좀더 빨리 말할걸 그랬어. 내 어깨에도 와주면 좋겠다고.’ 《마로니에 왕국의 7인의 기사 5》 71∼73, 143쪽



《농부시인의 행복론》(서정홍, 녹색평론사, 2010.6.22.)

《줄무늬 고양이 코우메 23》(호시노 나츠미/김진수 옮김, 대원씨아이, 2024.5.15.)

#キジトラ猫の小梅さん #ほしのなつみ #ねこぱんちコミックス

《우리 집 꼬마 아가씨 3》(산카쿠헤드/장지연 옮김, 학산문화사, 2026.5.25.)

#ぼくの魔なむすめ #サンカクヘッド

《세상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최원형, 샘터, 2016.12.5.)

《마로니에 왕국의 7인의 기사 5》(이와모토 나오/이해빈 옮김, 소미미디어, 2026.4.25.)

#岩本ナオ #マロニエ王國の七人の騎士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과 노래를 쓴다. 숲을 품은 시골에서 산다. 살림을 짓는 하루를 가꾼다. 《푸른말로 글빛노래 시 따라쓰기》, 《열두 달 소꿉노래》,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를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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