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우리말

얄궂은 말씨 1583 : 유혹하는 혐오의 책동에


우리를 유혹하는 혐오의 책동에 무릎 꿇지 않으려면

→ 우리가 서로 미워하지 않으려면

→ 우리가 함부로 까대지 않으려면

→ 우리가 이웃을 깎아치지 않으려면

《왜 우리는 차별과 혐오에 지배당하는가?》(이라영과 여섯 사람, 철수와영희, 2024) 98쪽


이 글월은 “혐오의 책동”을 임자말로 삼은 옮김말씨입니다. “혐오가 책동하여 우리를 유혹하고 무릎을 꿇리려 한다”는 얼거리인데, ‘우리’를 임자말로 돌려야 알맞습니다. ‘밉질·미움’은 숨결이 있지 않기에 우리를 홀리거나 꼬드기거나 꾀지 않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누구를 미워하거나 밀칠 뿐입니다. 우리 마음을 차분히 다스려야 비로소 서로 미워하지 않아요. 우리 마음에 사랑씨앗을 심어야 함부로 까대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을 언제나 푸르게 돌보아야 이웃을 깎아치지 않습니다. ㅅㄴㄹ


유혹(誘惑) : 1. 꾀어서 정신을 혼미하게 하거나 좋지 아니한 길로 이끎 2. 성적인 목적을 갖고 이성(異性)을 꾐

혐오(嫌惡) : 싫어하고 미워함

책동(策動) : 1. 좋지 아니한 일을 몰래 꾸미어 시행함 2. 남을 부추기어 일정한 방향으로 행동하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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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

얄궂은 말씨 1584 : 함께 나눌 이야기 초점 두고 있


오늘 함께 나눌 이야기도 여기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 오늘 나눌 말도 여기를 다룹니다

→ 오늘 이야기도 여기에 맞춥니다

《왜 우리는 차별과 혐오에 지배당하는가?》(이라영과 여섯 사람, 철수와영희, 2024) 180쪽


이야기는 여럿이 합니다. 함께 나누는 말이기에 이야기입니다. “함께 나눌 이야기”라 하면 겹겹말입니다. “나눌 말”이나 “함께 나눌 말”이나 “이야기”로 손봅니다. 일본말씨하고 옮김말씨가 섞인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입니다. ‘보다’나 ‘바라보다’라고만 하면 되는데, 오늘 나눌 말이 ‘다룰’ 밑감이라고 할 수 있어요. ‘맞추다’로 손보아도 어울립니다. ㅅㄴㄹ


초점(焦點) 1. 사람들의 관심이나 주의가 집중되는 사물의 중심 부분 2. [영상] 사진을 찍을 때 대상의 영상이 가장 똑똑하게 나타나게 되는 점 3. [물리] 렌즈나 구면 거울 따위에서 입사 평행 광선이 한곳으로 모이는 점. 또는 어떤 점을 통과하여 모두 평행 광선으로 될 때의 점 4. [수학] 타원, 쌍곡선, 포물선 따위의 위치 및 모양을 정하는 요소가 되는 점. 이들 곡선 위의 점으로부터 초점에 이르는 거리와 준선(準線)에 이르는 거리의 비는 일정하다 5. [의학] 수정체가 원근에 따라 곡률(曲率)을 조절하여 대상을 가장 똑똑하게 볼 수 있도록 맞추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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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차별과 혐오에 지배당하는가? 철수와 영희를 위한 사회 읽기 시리즈 13
이라영 외 지음, 인권연대 기획 / 철수와영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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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푸른책 / 숲노래 청소년책 2025.1.11.

푸른책시렁 180


《왜 우리는 차별과 혐오에 지배당하는가?》

 이라영과 여섯 사람

 철수와영희

 2024.11.13.



  왜 미워하는지는 아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음에 안 들거든요. 나하고 다르게 나아가니 마음에 안 들어 미워하게 마련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르다고 말은 하지만, 막상 나하고 다른 사람을 마주하면서 나와 달리 들려주는 말을 들을 적에 피가 거꾸로 솟는다고 합니다.


  온누리에 왼쪽하고 오른쪽이 있습니다만, ‘왼’은 ‘외로운’ 길이나 ‘외곬’이 아닙니다. ‘오른’은 ‘옳은’ 길이나 ‘옹근’ 길이 아닙니다. 그저 왼과 오른입니다. 왼길을 가기에 오른길을 나무랄 까닭이 없고, 오른길에 서기에 왼길을 꾸짖을 일이 없어요. 서로 저마다 선 길에서 ‘옳’고 ‘아름다우’면서 ‘사랑’을 펼 노릇입니다.


  우리나라는 한자말로 ‘민주·자유’를 으레 내세우지만, ‘민주·자유’는 반드시 ‘대화·타협’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여기지만, 정작 왼오른 모두 서로 얘기(대화)를 안 할 뿐 아니라, 한뜻(타협)으로 길을 찾으려고 안 합니다. 누가 먼저 귀를 닫거나 눈을 돌리거나 등을 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왼오른이 둘 다 똑같거든요.


  《왜 우리는 차별과 혐오에 지배당하는가?》는 왜 서로 따돌리거나 미워하는가 하는 줄거리를 다루려나 싶어서 읽는데, 어쩐지 ‘왼쪽이 아닌 오른쪽’은 다 잘못하고 손가락질을 받아야 한다고 내모는 얼거리라고 느낍니다. 오른쪽이 무슨 말을 하는지 차근차근 귀담아듣지 않는 얼거리입니다. 오른쪽이 하는 말을 ‘오른쪽이 한 말 그대로’ 살피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매무새는 오른쪽도 똑같아요. 우리나라 왼오른은 서로 누가 똥이 더 묻었나 하고 다투는 꼴입니다.


  서로 만나려고조차 안 하니 이야기는 아예 없습니다. 만나지도 않고 이야기도 안 하니까,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마음을 안 쓸 뿐 아니라, 지난날 ‘조선일보 짜깁기’처럼 토막토막 앞뒤를 자른 말이 마치 참(진실보도)이라도 되는 듯 덥석 받아물어서 서로 헐뜯거나 할퀴기까지 합니다.


  왜 따돌리겠어요? 안 만나고 말을 안 섞으니까 서로 모르거든요. 서로 모를 뿐 아니라, 왼오른으로 다르다고 여겨서 아주 고개를 돌리면서 금을 긋고 맙니다.


  이제는 만나서 얘기할 일입니다. 서로 어떻게 다른지 깊고 넓게 이야기를 펴면서, 서로 다르게 나아가는 길로 어떻게 아름답고 즐겁게 사랑을 꽃피우는 나라와 마을과 보금자리를 일굴 수 있는지 찾아나설 노릇입니다. 이런 일과 만남길과 살림살이와 어깨동무하고는 등진 채, “늘 네가 뜬금없는 소리만 내뱉잖아?” 하면서 갈라치려고 한다면, 밉질과 따돌림질은 더 크게 활활 타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왜 우리는 차별과 혐오에 지배당하는가?》라는 책에서 잘못 짚거나 그저 할퀴는구나 싶은 대목이 꽤 보입니다. 이런 여러 곳을 짚어 보겠습니다.



ㄱ. 매우 과격한 표현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돌았다, 미쳤다, 찢었다, 죽인다, 지린다, 쩐다, 싼다 등 청소년들이 쓸 법한 말들이 버젓이 방송 자막으로 나옵니다. (21쪽)


: 곰곰이 보면 다 ‘우리말’이지만, 어느 곳에 어떻게 써야 알맞은지 제대로 다루거나 가르치는 어른이 안 보입니다. “청소년이 쓸 법한 말”이란 없습니다. “먼저 어른이란 사람이 흔히 쓰는 말”이기에 푸름이가 물들어서 나란히 쓸 뿐입니다. 우리가 어른으로서 말을 어떻게 다루는지 뉘우쳐야 하고, 우리말을 왜 우리말답게 안 쓰는지 되새길 노릇입니다.


ㄴ. 결과적으로 과거에 누렸던 남성들의 자유가 상당히 억압을 받게 돼요. 그럼에도 극성스러운 여성주의자들 눈치를 보느라 말을 못 하는 남성들, 나아가 여성들도 많다, 이런 서사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43쪽)


: 예나 이제나 힘꾼(권력자)이 멋대로 사람들을 휘어잡고 휘두르고 괴롭힙니다. ‘힘돌이(남성권력자)’란 임금·벼슬아치·나리입니다. ‘힘순이(여성권력자)’도 매한가지입니다. 예나 이제나 억눌리는 사람은 흙지기(농사꾼)에 일꾼(노동자)입니다. 흙을 만지고 살림하던 여느 사람은 순이돌이 모두 억눌렸습니다. 먼저 우리 발자취를 제대로 읽어야 한다고 봅니다. “과거에 누렸던 남성들의 자유”가 아닌 “멋대로 놀던 권력자”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순이돌이로 가를 일이 아닌, ‘힘’을 누가 부리면서 짓밟고 억눌렀는지 뿌리를 캘 일입니다.


ㄷ. 잘 알다시피 트럼프는 미국 민주주의를 퇴보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71쪽)

ㄹ. 심지어 보수 성향 언론인 폭스 뉴스도 트럼프를 비판했어요. (84쪽)


: ‘민주주의 퇴보’란 무엇인지 짚을 노릇입니다. ‘백신’을 모든 사람한테 밀어붙일 뿐 아니라, 어린이·푸름이한테 마구 맞히는 미국 민주당은 ‘어떤 민주주의’일까요? 바이든·오바마·클린턴은 오히려 푸른별 곳곳에 ‘전쟁’을 더욱 불지르고 퍼뜨렸으며, 이들은 ‘군수산업’을 훨씬 키웠습니다. 촘스키라는 분이 쓴 글을 읽어도 ‘미국 민주당에야말로 민주가 없는’ 줄 쉽게 알 만합니다. 트럼프를 미워하든 말든 대수롭지 않으나, 틀(프레임)을 트럼프한테 씌우면서 ‘미국 민주당 민낯’은 하나도 안 짚는다면, 바로 이런 말글부터 ‘미움말(혐오)·따돌림(차별)’입니다. 그리고 폭스뉴스는 트럼프까지 ‘비판’할 줄 알지만, 비판할 일이니까 비판합니다. 이와 달리 씨앤앤과 뉴욕타임즈는 트럼프를 ‘비난’만 하고, 미국 민주당이 저지르는 잘못에는 입을 다뭅니다. 누가 ‘미움말(혐오)·따돌림(차별)’을 퍼뜨릴까요?


ㅁ. 150미터 거리에서 정조준을 해 사람을 쏠 수 있는 무기가 전국에 널려 있는 사회가 좋은 민주주의 국가가 될 리가 없지요.


: 우리나라에는 미국처럼 총이 없어도 칼부림과 주먹질과 방망이질이 춤춥니다. 누구나 총을 살 수 있기에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하기 앞서, 총이건 칼이건 주먹이건, 싸우거나 죽이는 짓을 끝내고서, ‘나와 뜻이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이더라도 깎아내리거나 싸잡거나 헐뜯지 않을 줄 아는 마음으로 갈 일이라고 가르치고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총을 든 민주주의’란 없습니다만, ‘트럼프 따위는 총으로 쏴죽여도 돼’처럼 여기는 사람부터 ‘민주주의 퇴보’입니다.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는 놈’이 ‘나와 길이 다르니까 미워해야겠어’ 하고 마음을 먹는다면, 총만 없앤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군대와 전쟁무기는 마땅히 없애야 합니다만, ‘미워하는 마음’을 ‘사랑하고 품는 마음’으로 가꾸지 않은 채 총만 없다면, 다른 것(칼·주먹·몽둥이·붓)으로 미워하고 죽이게 마련입니다. 길이 다르다고 해서 푸른별을 아름답게 못 가꾸지 않습니다. 트럼프가 장사꾼이라고들 말하는데, 트럼프가 미국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여러 해 사이에는 싸움(전쟁)이 멈췄습니다. 부시나 레이건만 싸움짓을 벌이거나 키우지 않았습니다. 바이든·오바마·클린턴도 똑같이 싸움짓을 벌이거나 키웠고, 힐러리·해리스도 똑같이 싸움 쪽에 선 사람입니다.


ㅂ. 비장애인은 고급 승용차를 원하지만, 장애인은 지하철 이용도 어렵습니다. 비장애인들은 택시 호출하는 데 1분도 안 걸리는데, 장애인은 전용 콜택시 타려면 1시간을 기다려야 해요. 이런 격차를 줄이는 것이 인권입니다. (151쪽)


: 저는 ‘비장애인’일 텐데, 저는 ‘운전면허증’부터 안 따고 걸어다닙니다. 저는 으레 두바퀴(자전거)를 달리고, 가끔 버스를 탑니다. 그런데 시골에서는 버스타기부터 어렵습니다. 두어 시간에 겨우 하나 오는데, 이마저도 제대로 안 오고, 쉼날(일요일·공휴일)에는 아예 안 다닙니다. 시골에서는 카톡택시가 마땅히 아예 없습니다. 시골에서는 비장애인이건 장애인이건, 택시를 부르려면 적어도 한두 시간쯤 앞서 미리 전화를 걸어야 하고, 이렇게 미리 걸어도 못 타기 일쑤입니다. ‘인권’이란 무엇일까요? 인권 얼거리로만 본다면, 우리나라 시골이야말로 ‘인권공화국(?)’입니다. 우리나라 시골은 비장애인과 장애인 모두 대중교통을 누리지 못 하고, 경로우대가 없거든요. 웃픈 민낯입니다. 그렇지만, 다들 서울(도시)이라는 틀에 갇힌 채 바라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서울에서는 65살 무렵이면 버스나 전철을 그냥 타지만, 시골에서는 90살 할머니도 버스삯을 냅니다. 서울은 낮은버스(저상버스)가 많으나, 시골에는 낮은버스가 아예 없습니다. “비장애인은 고급 승용차를 원하지만”은 터무니없는 깎음말일 뿐 아니라, 오히려 밉말과 따돌림을 부추기는 엉터리말이라고도 느낍니다.


ㅅ. 하지만 장애인 앞에서 하면 안 돼요. 공공장소인 학교 복도에서도 안 됩니다. 혐오 표현은 혼자 이불 속에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해요. 장애인이 실수로 목발을 치고 가면, “장애인 새끼야.” 그러고 싶겠지만 ‘학교에서 이러면 안 돼.’ 하면서 꾹 참아라, 대신 집에 가서 샤워기 세게 틀어놓고 해라, 머리 말리면서 실컷 욕하고 나면 마음이 조금 진정이 될 겁니다. (161쪽)


: 막말(욕)은 비장애인한테든 장애인한테든 할 말이 아닙니다. 더구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할 말이 아니고, 물을 세게 틀어놓고서 쏟아부을 말조차 아닙니다. 어린이나 푸름이한테 이렇게 가르친다면 참으로 끔찍합니다. 모든 막말(욕)은 내가 남을 깎는 말이 아니라, 내가 나를 스스로 깎는 말입니다. 이웃을 이웃으로 여기거나 바라보지 않으면서 마구 뱉는 말은, 늘 ‘막말을 일삼는 나’를 깎고 할퀴고 죽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깎고 할퀴고 죽이느라 멍들고 멍청하게 뒹군 나’는 다시금 더 세게 막말을 일삼는 버릇으로 길들어요. 막말은 언제 어디에서나 한 마디도 할 까닭이 없습니다. 내뱉는다(배설·카타르시스)고 사라지는 막말이 아닙니다. 내뱉을수록 부피가 크고 덩치를 키워서 사납게 춤추는 막말입니다. 이 책을 쓴 분들이 곳곳을 다니며 ‘뒤에서 실컷 욕을 하고 마음을 가라앉히렴’ 하고 말한다면, 대단히 잘못이고 끔찍하고 어처구니없습니다. 뒤에서건 앞에서건 한결같이 바르게 말하고 정갈히 다스리고 곱게 가꾸어야, 앞에서도 뒤에서도 바르게 말하고 정갈히 다스리고 곱게 가꿉니다. 사람은 앞뒤가 다를 수 없습니다. 뒤에서는 손가락질을 하고 막말을 일삼는데, 앞에서는 아닌 척한다면, 아이들한테 거짓말과 눈속임과 겉치레를 뒤집어씌우고 길들이면서 바보로 내모는 셈입니다. 사랑이 없으니 막말을 하는데, 사랑이 무엇인지 제대로 짚고 가르치려고 하지 않으면서, ‘막말 내뱉기’만 시킨다면,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지요? 먼저 스스로 사랑할 노릇입니다. 내가 나를 스스로 사랑하지 않으니, 내가 나를 깎고 할퀴고 죽이는 막말을 한두 마디 하다가 나중에 굳어갑니다. 내가 스스로 나를 사랑하는 아이들이라면, 막말을 아예 한 마디조차 안 합니다.


ㅇ. 예컨대 우리는 바퀴벌레를 보면 혐오를 느낍니다. 바퀴벌레를 보고 혐오감을 느꼈다면 이때의 혐오는 우리를 비위생적인 상태, 건강을 해칠 수 있는 오염된 상태로부터 나 자신을 지켜줍니다. 우리가 바퀴벌레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혹은 행복감을 느낀다면, 바퀴벌레가 가득한 환경에서 별 무리 없이 생활할 수 있겠죠. 혹은 토사물이나 배설물에 대해서 생각해 볼까요? (183쪽)


: 왜 바퀴벌레를 미워하지요? 바퀴벌레를 미워해도 되나요? 파리하고 모기를 미워해도 될까요? 터무니없습니다. 모든 목숨붙이는 이 별에서 함께 살아가는 뜻이 있고, 몫이 있습니다. 시골에도 바퀴벌레는 조금 살지만 대단히 조그맣고, 이내 지네라든지 고양이라든지 사마귀라든지 다른 맞잡이한테 잡아먹힙니다. 시골에는 왜 바퀴벌레가 못 살까요? 시골에는 바퀴벌레가 ‘없애야 할 쓰레기’가 대단히 적거나 없습니다. 서울에는 왜 바퀴벌레가 득시글할까요? 서울은 온통 쓰레기밭이거든요. 바퀴벌레하고 파리는 말끔이(청소부)입니다. 바퀴벌레하고 파리는 쓰레기를 먹어서 ‘흙’으로 바꾸어 줍니다. 바퀴벌레하고 파리가 쓰레기를 다 먹어치워서 흙으로 돌려놓기에 이 별이 아직 살 만합니다. 개미와 쥐며느리도 바퀴벌레하고 파리 곁에서 쓰레기와 주검을 몽땅 먹어치워서 흙으로 돌려놓습니다. 바퀴벌레가 맡은 몫이 무엇인지 하나도 안 짚고 안 생각하고 안 찾아보면서 그저 미워한다면, 이런 밉마음을 아이들한테 함부로 ‘내뱉는다’면, 이 나라에는 밉마음(혐오)하고 따돌림질(차별)이 오히려 더 춤추게 마련입니다. 바퀴벌레에 파리에 거미에 지렁이에, 그야말로 서울사람은 하나같이 다 미워하고 싫어하고 끔찍하게 여기면서 마구잡이로 죽이는데, 여느 삶자리에서 이렇게 ‘작은벌레 삶몫(생명권)을 짓밟는 마음’이 씨앗으로 퍼지고 싹트기에, 그만 나라 곳곳에 밉질과 따돌림질과 주먹질이 판치기도 합니다. 쓰레기가 사라진 곳에는 바퀴벌레가 더는 없습니다. 바퀴벌레는 쓰레기를 치우려고 쓰레기밭으로 찾아가서 자라는데, 왜 쓰레기를 안 치우고서 바퀴벌레만 미워하나요?


ㅈ. 한국은 굉장히 자본가 중심적인 사회죠? 재벌을 너무 좋아해요. 당연히 재벌을 비판하는 노동자, 노동조합은 혐오합니다. 그래서 분쟁이 생겼을 때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노동자를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서 갈라치게 하는 정치적 수사가 굉장히 잘 먹히죠. (186쪽)


: 처음부터 잘못 짚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본가·재벌’을 그리 안 좋아합니다. 그저 ‘돈’에 미쳤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돈에 미쳤”는데, “모든 사람이 우르르 돈바라기로 쏠려서 서울에 우글우글한 민낯”을 먼저 뉘우치고 돌아보고 되새기지 않으면서 ‘자본가·재벌’을 좋아하는 듯 말한다면, 이미 이야기가 어긋나고 맙니다. 숱한 사람들이 돈에 미쳤지만, 또 숱한 사람들은 ‘알맞게 일하고 알맞게 벌어서 알맞게 살림하면서, 우리 보금자리를 사랑으로 가꾸는 수수한 길’을 바랍니다. 알맞게 살아가려는 사람은 ‘자본가·재벌’을 아예 안 쳐다봅니다. 이러면서 ‘알맞은 돈’을 알맞게 벌어서 스스로 알맞게 쓸 뿐 아니라, 이웃하고 알맞게 나누는 길을 걸어갑니다. 오늘날 적잖은 일두레(노동조합)도 그만 “돈에 미친” 나머지 안타깝고 얄궂은 민낯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적잖은 일두레가 돈에 미친 얄궂은 민낯을 드러내었다고 해서, 일두레를 없애거나 미워해야 하지 않습니다. 일두레는 일두레대로 잘못과 민낯을 바로잡고서 뉘우칠 노릇입니다. ‘자본가·재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쪽이건 ‘알맞은 돈’으로 어깨동무하는 길을 그리고 말하고 나누고 살필 노릇입니다. 처음부터 ‘자본가·재벌’한테는 “저놈들은 미워해도 돼!” 하면서 밉놈으로 삼는다면, 바로 이곳부터 밉마음이 싹트고 번집니다. 그저 잘잘못만 바라보고서 가리고 다룰 노릇입니다. 참모습을 제대로 보는 사람들은 자본가가 잘못하든 노동조합이 잘못하든 그저 ‘잘못’만 보고 다스리려고 할 뿐, 자본가나 노동조합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자본가와 노동조합은 어깨동무를 하면서 알맞게 돈을 벌고서 나누는 길을 가야 할 이웃일 뿐입니다.


ㅊ. 요즘에는 “동네 바보 형” 이런 표현 안 쓰죠. 혐오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거에는 자주 썼어요. 쓰면서도 문제인 줄 몰랐습니다. ‘바보’라는 말이 비정상이라는 뜻이잖아요. 공동체 안에서 정상으로 놓는 기준과 맞지 않는 사람을 비하하는 말입니다. (197쪽)


: ‘바보’는 ‘비정상’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닙니다. ‘바보’는 ‘아직 철이 없는 사람’이나 ‘늦둥이’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지난날에는 사람들 누구나 누구를 가리키며 ‘바보’라고 불렀어도 잘못 굴러가거나 미워하거나 따돌리지 않았습니다. ‘바보’도 ‘바보 아닌 사람’도 마을(공동체)에서 언제 어디에서나 어울려 살았습니다. 그래서 ‘깍두기’라고 해서 ‘바보’인 아이를 스스럼없이 품고 안으면서 같이 놀았습니다. 다리를 저니까 ‘절름발이’라고 할 뿐입니다. ‘벙어리’나 ‘장님’은 따돌림말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저마다 다 다른 모습과 삶이기에, 다른 모습과 삶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이런 말을 누구나 스스럼없이 썼고, 두레와 마을에서 더 포근히 품으면서 함께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바보·절름발이·벙어리·장님’이라는 우리말을 한자말이나 영어로 바꾸기만 했을 뿐, 오히려 마을과 나라에서는 이웃을 더 따돌리고 내칩니다. 이름만 바꾼대서 안 바뀌기 때문입니다. 이름만 바꿀 적에는 오히려 속깊이 따돌리고 미워하는 얼거리가 굳어가기 때문입니다. ‘절름발이’를 영어로 ‘레임덕’이라 합니다만, 영어라서 그런지 몰라도 아무도 ‘따돌림말’이라고 안 여기더군요. ‘벙어리’는 ‘벙긋·봉긋·방긋·방그레·빙그레’하고 ‘봉오리·봉우리’로 잇는 수수한 말씨입니다. ‘장님’은 ‘자다·잔잔하다·잠기다·잠·잣·꿈’으로 잇는 수수한 말빛입니다. 더구나 ‘-님’을 붙인 낱말인데 어떻게 따돌림말일까요? ‘바보’는 ‘책바보’나 ‘영화바보’라는 데에도 흔히 붙이듯, 어느 하나만 바라보느라 다른 곳을 다 안 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바보’는 ‘밥보’하고도 맞물리는데, 어느 하나만 바라보느라 다른 곳을 안 보기에 아직 철이 덜 든 매무새라는 뜻입니다. 밥보란, 밥만 좋아하고 다른 일은 안 보는 몸짓이라는 뜻입니다. 밥만 먹고 일은 안 하려고 하니 밥보입니다. 아무렇게나 모든 우리말에 섣불리 ‘차별어·혐오표현’이라는 틀(프레임)을 씌우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틀(프레임)이야말로 따돌리고 미워하는 씨앗만 흩뿌립니다.


ㅋ. 최근에는 집게손가락만 보면 화를 내는 사람들도 등장했죠. 왜 그러는 걸까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웃어넘길 수도 있는 일에 정색하면서 분노를 표출하는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는 여기에 어떤 불안이 작동하고 있다고 봅니다. 세계적인 정치 상황을 보면 이해가 가요. (201쪽)


: 추레질·엉큼질·노닥질(성추행·성폭력)은 ‘크기·세기’로 따지지 않습니다. 가볍다고 여길 익살이나 우스개란 없습니다. ‘집게손가락’을 어느 사람들을 놀리거나 깔보거나 깎거나 할퀴는 자리에 함부로 쓰니까, 집게손가락만 보면 짜증을 내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추레질과 엉큼질과 노닥질로 마음이 다친 어느 사람한테 “왜 그러는 걸까요?” 하고 되묻는다고요? 참말로 너무합니다. 이렇게 서로 말을 안 섞고, ‘저쪽 사람이 왜 마음이 다쳐서 짜증을 내는지’ 쳐다보려 하지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이럴 때에 새삼스레 밉질과 밉말과 따돌림질과 따돌림말이 또 불거집니다. “어떤 불안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듣기 싫거나 놀리는 말을 모두 걷어내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순이돌이는 더 활활 타오르면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 아끼고 돌보는 말씨로 사랑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온통 불바다로 치닫습니다.


ㅅㄴㄹ


《왜 우리는 차별과 혐오에 지배당하는가?》(이라영과 여섯 사람, 철수와영희, 2024)


누군가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데에 합리적인 까닭은 없습니다

→ 누구를 따돌리고 미워하면서 올바른 까닭은 없습니다

→ 누구를 가르고 싫어하더라도 마땅한 까닭은 없습니다

5쪽


인격체가 아닌 멸시의 존재로 살았기에 투신하는 순간에도

→ 사람이 아닌 낮잡히며 살았기에 뛰어드는 즈음에도

→ 빛살이 아닌 깎이며 살았기에 뛰어내리는 그때에도

16쪽


서문에 “한 사회의 문해력은 다양한 관계들의 뒤섞임”과 밀접하다고 썼습니다

→ 머리말에 “우리 글눈길에는 여러 갈래가 뒤섞인”다고 썼습니다

→ 앞자락에 “나라 글눈에는 온갖 얘기가 뒤섞인”다고 썼습니다

17쪽


어떤 개념이 줄어든다는 건 사람들이 그걸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잖아요

→ 어떤 뜻이 줄어든다면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잖아요

→ 어떤 밑감이 줄어든다면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잖아요

22쪽


우리를 유혹하는 혐오의 책동에 무릎 꿇지 않으려면

→ 우리가 서로 미워하지 않으려면

→ 우리가 함부로 까대지 않으려면

→ 우리가 이웃을 깎아치지 않으려면

98쪽


수많은 민족지사들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북풍한설 속에서 풍찬노숙하면서 싸웠습니다

→ 숱한 겨레길잡이가 머나먼 땅에서 찬바람에 한뎃잠으로 싸웠습니다

→ 여러 겨레지기가 먼나라에서 얼음바람에 이슬살이로 싸웠습니다

99쪽


오늘 함께 나눌 이야기도 여기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 오늘 나눌 말도 여기를 다룹니다

→ 오늘 이야기도 여기에 맞춥니다

180쪽


우리 일상도 견리망의가 촘촘하게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우리 삶도 밥줄이 촘촘하게 얽혔다고 봅니다

→ 우리 하루도 돈셈이 촘촘하게 다스린다고 느낍니다

→ 우리 나날도 길미가 촘촘하고 드세구나 싶습니다

180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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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숲마실 . 마을책집 이야기


길에서 나무 (2024.8.23.)

― 전북 전주 〈조림지〉



  전남 고흥에서 경남 진주로 ‘우리말로 노래밭(시쓰기 수업)’을 하러 가는 길에 전북 전주로 책집마실을 갑니다. 전남 고흥에서 경남 진주로 가자면 11시간쯤 걸립니다. 배움자리에 못 맞추기에 하룻밤 미리 나선 길을 전주에서 보내기로 합니다. 어느 책집부터 들르면 즐거울까 하고 어림하다가 〈조림지〉로 걸어가는데, 곳곳에서 삽질을 많이 합니다.


  우리나라는 ‘관광’을 아주 잘못 바라봐요. 길바닥이며 알림판을 새것으로 갈아야 번쩍거리면서 나은 줄 여기더군요. 그러나 ‘봄(관광)’이란, 이웃을 보고 이웃마을을 보며 이웃살림을 보려는 길입니다. 낡거나 나쁘거나 나은 모습은 따로 없어요. 손길을 받고서 고스란히 이은 살림살이가 모두 다르게 빛납니다.


  큰길가에 있는 〈조림지〉에 닿습니다. 거님길은 삽질판이라 시끄럽고 뿌옇지만, 책집으로 깃드니 조용하고 아늑합니다. 등짐을 내려놓고서 숨을 고릅니다. 다리를 쉬면서 노래를 한 자락 새로 씁니다. 책이 되어 주는 나무는 오래오래 해바람비를 품고서 푸근한 숨결입니다. 사람은, ‘나무로 빚은 종이’에 ‘사랑으로 일군 살림’을 이야기로 여미어서 얹습니다. 나무란, ‘나(사람)’하고 나란히 서는 곳에서 이웃하는 기운입니다. 종이란, 조촐히 조용히 모두 담을 수 있는 그릇입니다.


  종이로 조촐히 꾸린 이야기를 읽고 나누면서 생각을 잇는 꾸러미인 책입니다. 언제나 아늑하면서 햇살과 햇빛과 햇볕을 누리는 씨앗숲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글로 추슬러서 담는 그릇인 종이에 책입니다.


  전주를 살리는 길은 무엇일까요. 삽질을 멈추고서 종이를 함께 짓는 자리를 펴기를 바라요. 손수 지은 종이에 손수 지은 삶노래를 적어 보기를 바라요. ‘문학’이 아닌 ‘오늘이야기’를 사근사근 쓰면 넉넉합니다.


  권정생이라는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한창 젊을 적부터 갖은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고, 죽을 뻔했고, 살아났으나 오줌을 빼내려면 고무줄을 옆구리에 박아야 했기에, 젊은날부터 죽는날까지 마흔 해 남짓 ‘고무줄로 오줌을 빼며 살’던 분입니다. 오늘 우리는 곁일(알바·투잡)을 하느라 힘을 다 쓰는 나머지, 막상 살림지기로 보금자리를 가꾸려고 할 적에는 고단할 수 있으나, 오히려 고단한 몸을 느끼기 때문에 ‘여러 이웃을 더 헤아리는 눈과 손과 귀와 몸과 마음과 넋’을 맞아들이고 배우기도 합니다. 오늘을 이곳에서 살리고 사랑하는 글 한 줄을 새롭게 여밀 수 있어요. 찔레나무랑 딸기덩굴이랑 귤나무랑 초피나무에는 가시가 굵어요. 그렇지만 가시 굵은 푸나무는 꽃도 열매도 소담스럽고 향긋하면서 아름답습니다.


ㅅㄴㄹ


《바도파다》(박가현, 신아출판사, 2023.12.1.)

《아주 커다란 잔에 맥주 마시기》(김은지, 아침달, 2024.6.28.첫/2024.7.15.2벌)

《골렘》(천기현, 조림지, 2024.봄.)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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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숲마실 . 마을책집 이야기


너를 부른다 (2024.12.21.)

― 부산 〈카프카의 밤〉



  집에 쌓은 책더미부터 풀자는 마음에 오늘은 느슨히 부산으로 건너갑니다. 부산에 내려서 책집마실부터 하지 않고서 ‘곳간’으로 갑니다. 조촐히 ‘살림씨앗’ 모임을 하고서, 보수동 〈학문서점〉하고 〈파도책방〉을 가볍게 들른 다음에, 연제동 〈카프카의 밤〉으로 갑니다. 어느덧 이응모임(이오덕 읽기 모임) 여덟걸음입니다. 처음 이응모임을 잡을 적에는 《내가 무슨 선생 노릇을 했다고》를 어렵잖이 장만할 수 있었는데, 올해 12월 첫머리부터 판이 끊기는군요.


  이오덕 어른은 이원수 님이 이끌어서 글빗(평론)을 합니다. 이원수 님이 보기로 우리나라는 글꽃(문학)도 모자라고 옮김(번역)도 어설프지만, 이 두 가지는 어떻게든 앞으로 늘 만하지만 좀처럼 글빗을 맡을 일꾼이 없는 판이라, 아무래도 가장 고되고 힘들 테지만 이오덕 어른더러 글빗길을 걸어 주기를 바랐습니다. 이 대목을 모르는 분이 많은데, 이오덕 어른이 권정생 님을 알아본 눈도 바로 ‘글빗길’을 걸었기에 싹텄습니다.


  글빗이란, 글을 빗질하는 손길입니다. 머리카락이 엉킬 적에는 가벼운 빗질도 따끔하고 머릿살도 아프지요. 그러나 빗질로 머리카락을 고르면 마음도 몸도 머리도 맑게 가눌 만합니다. 굳이 따끔하게 써야 하지 않으나, 글빗은 모름지기 ‘따끔글·까칠글’입니다. 살살 고르는 빗질이어도 아프다고 여겨 미워하는 글꾼이 수두룩하겠지요. 이러다 보니 추킴질(주례사서평)만 판치면서 글꽃이 곪아요.


  너를 부릅니다. 너머로 같이 날아가고 싶어서 너를 부릅니다. 서로 너를 부릅니다. 이 길은 혼자인 적이 없다고, 네 곁에 내가 있고, 우리 곁에 풀꽃나무에 해바람비에 벌나비가 있으니, 사뿐사뿐 거닐며 노래를 부릅니다.


  누가 곁을 떠나는 일을 받아들이기란 아무리 오랜 나날이 흘러도 사라질 수 없어요. 그런데 떠나는 분은 몸을 내려놓을 뿐, 넋은 늘 우리 둘레에 있게 마련이라고 바라본다면, 우리 삶은 늘 숱한 가없는 더없는 다시없는 사랑으로 둘러싸인 오늘이로구나 하고 보듬을 수 있습니다.


  만날 적에만 반가워서 손을 잡거나 흔들지 않습니다. 헤어질 적에도 다음길을 그리면서 반갑게 손을 잡거나 흔듭니다. 바람이 불어와서 우리 숨결로 스민 뒤에 어느덧 날숨으로 빠져나가서 멀리 갑니다. 샘물 한 모금은 우리 몸을 거쳐 다시 땅으로 깃들어 바다로 나아가더니 빗물로 새삼스레 찾아옵니다.


  오늘 이 하루를 고이 부릅니다. 밥을 잔뜩 먹어야 배부르지 않습니다. 부피만 키우면 펑 터집니다. 봉긋봉긋 겨울꿈을 누리는 겨울잎눈이 천천히 부풀어 갑니다.


ㅅㄴㄹ


《조응》(팀 잉골드/김현우 옮김, 가망서사, 2024.3.29.)

#Correspondences #TimIngold

《케테 콜비츠 평전》(유리 빈터베르크·소냐 빈터베르크/조이한·김정근 옮김, 풍월당, 2022.11.23.)

#KOLLWITZDieBiografie #KOLLWITZD #KatheKollwitz

#YuryWinterberg #SonyaWinterberg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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