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우리말

얄궂은 말씨 1908 : 한옥 풍경 거 차경(借景)


한옥에서는 풍경도 빌려 쓰는 거라네요. 차경(借景)

→ 흙집에서는 빛도 빌려쓴다네요. 빈빛

→ 옛집에서는 터도 빌린다네요. 빌림터

《붉은빛이 여전합니까》(손택수, 창비, 2020) 24쪽


우리가 예부터 살던 집은 ‘살림집’이요 ‘겨레집’이기도 하지만, 그저 ‘집’입니다. 요즈음은 따로 ‘옛집’이나 ‘흙집·풀집’으로 갈라서 나타냅니다. 둘레는 ‘둘레’요, 여러 모습은 ‘모습’인데, ‘빛’이나 ‘터’로도 나타내지요. 일본말 ‘しゃっけい’를 한자로 적으니 ‘차경(借景)’입니다. 일본말로 우리 옛집을 나타내거나 이야기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말로 ‘가져가다·끌어오다·넣다’나 ‘둘러대다·돌라대다·들이다’나 ‘받다·받아들이다·받아주다’나 ‘빌리다·빌려쓰다’나 ‘빚·빚길·빚살림·빚내다·빚지다’나 ‘얻다·얻어들이다·얻어쓰다’나 ‘옮겨쓰다·옮기다’나 ‘퍼가다·퍼나르다’라 하면 됩니다. ㅍㄹㄴ


한옥(韓屋) : 우리나라 고유의 형식으로 지은 집을 양식 건물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 조선집·한식집

풍경(風景) : 1. 산이나 들, 강, 바다 따위의 자연이나 지역의 모습 = 경치 2. 어떤 정경이나 상황 3. [미술] 자연의 경치를 그린 그림 = 풍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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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

얄궂은 말씨 1910 : 소식 접 나는 강한 호기심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 처음 얘기를 들었을 때 무척 궁금했다

→ 처음 이야기를 듣던 날 몹시 궁금했다

《우주시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켈레 제라디/이지민 옮김, 혜윰터, 2022) 146쪽


임자말은 글 사이에 안 넣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듣지 않는다면 말하기도 글쓰기도 조금씩 어긋납니다. 귀담아들으려고 할 적에 말빛이 살아나고, 귀닫고 나면 말결이 죽어요. 그런데 스스로 궁금해야 비로소 이야기를 챙겨 듣습니다. 어쩌다가 들을 수 있지 않아요. 문득 듣는 일도 아닙니다. 마음을 기울이면서 다가서려고 할 적에 비로소 말씨를 북돋우는 길을 알아듣거나 새겨듣습니다. ㅍㄹㄴ


소식(消息) : 1.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의 사정을 알리는 말이나 글. ‘알림’으로 순화 ≒ 성문(聲問)·식모(息耗)·풍신(風信) 2. 천지의 시운(時運)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순환하는 일

접하다(接-) : 1. 소식이나 명령 따위를 듣거나 받다 2. 귀신을 받아들여 신통력을 가지다 3. 이어서 닿다 4. 가까이 대하다 5. 직선 또는 곡선이 다른 곡선과 한 점에서 만나다

강하다(强-) : 1. 물리적인 힘이 세다 2. 수준이나 정도가 높다 3. 무엇에 견디는 힘이 크거나 어떤 것에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호기심(好奇心) : 새롭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거나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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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

얄궂은 말씨 1911 : 아래 거대 암벽 있


새파란 하늘 아래, 거대한 붉은 암벽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 새파란 하늘에, 크고 붉은 바위가 끝도 없이 늘어선다

→ 하늘은 새파랗다. 크고 붉은 벼랑이 끝도 없다

《마지막 레벨 업》(윤영주, 창비, 2021) 7쪽


하늘에는 위아래가 없습니다. 하늘은 그저 하늘입니다. “하늘이 높다”거나 “하늘이 낮다”처럼 말하더라도 위아래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땅은 하늘보다 낮지 않습니다. 하늘은 땅보다 높지 않습니다. 위아래가 아닌 자리만 가리킬 뿐이라서 “새파란 하늘 아래 암벽”은 잘못 쓴 말씨입니다. “새파란 하늘에 바위”처럼 적어야 알맞아요. “하늘은 새파랗다. 바위가 ……”처럼 손볼 수 있고요. 한자말은 ‘암벽’일 테지만, 우리말은 ‘바위’나 ‘벼랑’입니다. “늘어서 있었다”는 군더더기인 옮김말씨예요. ‘늘어서다’나 ‘있다’ 가운데 하나를 고를 노릇입니다. ㅍㄹㄴ


거대(巨大) : 엄청나게 큼

암벽(巖壁) : 깎아지른 듯 높이 솟은 벽 모양의 바위 ≒ 바위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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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시를 씁니다 ― 53. 더듬다



  둘레를 보면 ‘더듬는’ 몸짓을 썩 반기지 않습니다. 공놀이를 하는데 자꾸 더듬는다든지, 길을 가는데 헤매면서 이리 더듬 저리 더듬한다든지, 말을 하다가 이내 더듬더듬하면, 제대로가 아니라고 여겨요. ‘제대로가 아니다’란 ‘삐뚤빼뚤(비정상)’인 셈입니다. 우리는 공을 던지거나 받을 적에 잘 받을 수 있으나 놓칠 수 있어요. 우리는 할 말을 잃고서 멍하니 있기도 합니다. 틀림없이 길찾기가 알려주는 대로 갔는데 엉뚱한 데가 나올 수 있어요. 빈틈이 없이 해내니 대단하겠지요. 그러나 빈틈이 있으면서 좀 허술하거나 엉성하거나 모자란 탓에, 더 다스리고 애쓰고 힘내고 일어서고 배우고 가다듬고 익히고 기운을 내기도 합니다. ‘빈틈없이’ 태어난 나머지 무엇을 새롭게 하려는 생각을 못 하기도 한다면, ‘빈틈있이’ 태어난 뒤로 무엇이든 처음부터 스스로 지어야 하는구나 하고 느껴서 씩씩하게 부딪히고 넘어지고 일어서고 다시 맞서는 길을 가기도 합니다. 저는 어릴적에 엄청난 말더듬이였습니다. 말더듬이 어린이는 놀림이나 따돌림이나 지청구를 숱하게 받으며 자랐습니다. 이 말더듬질을 고쳐서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리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제대로가 아닌 몸을 제대로’ 바꾸려고 했는데, 이제는 굳이 이러지 않습니다. ‘제대로’라는 잣대는 따로 없어요. 몇몇 사람 눈길로 따질 수 없고요. 무엇보다도 맨몸이 되어 풀밭에 납작 엎드려 풀벌레를 지켜보면, 또 벌나비를 바라보면, 모두 ‘더듬이’를 살살 흔들며 더듬더듬 바람물결을 살피고 빛물결을 실컷 누리더군요.



더듬다


혀가 짧아 더듬을 수 있어

더 천천히 말해 봐

느릿느릿 말해도 돼

글로 적어 읽자꾸나


어두우니 더듬더듬할 만해

바닥에 손을 짚어 봐

차근차근 헤아리면 나와

촛불 켜면 잘 보일 태지


아직 낯설기에 더듬겠지

나도 예전부터 더듬었어

말도 더듬고 길도 더듬지

뭐, 아직도 으레 더듬어


그런데, 너는 알아?

나비랑 벌레한테 더듬이 있어

나비도 벌레도 더듬이 흔들며

마음으로 얘기하고 별빛 들어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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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 숲노래 마음노래

수다꽃, 내멋대로 61 힘들거나 가볍거나



  어릴적부터 늘 짐꾼으로 살았다. 요새는 안 그럴 텐데, 예전에는 아무리 어리더라도 누구나 짐꾼이었다. 아마 고장마다 다를 수 있을 테니, 나는 내가 나고자란 고장을 바탕으로 얘기를 해야 옳다고 본다. 나는 인천에서 1975년에 태어나서 남구·중구·동구에서 지내는 동안 으레 두 손 가득히 등에도 수북히 짐을 쥐고 얹고 짊었다. 인천에서는 순이돌이를 안 가렸다. 가시내도 머스마도 똑같이 고스란히 짐순이에 짐돌이로 살았다. 재미있다면 재미있을 텐데, 어린배움터(국민학교)를 다니던 1982∼87년 여섯 해를 돌아보면, 길잡이(교사)가 아이들을 몽둥이나 손찌검으로 호되게 다스릴 적에 순이돌이를 똑같이 두들겨팼다. 1986∼87년 무렵에는 ‘순이가 돌이보다 덜 맞는’ 얼거리로 바뀌었는데, 어릴적에는 잘 몰랐지만, 끝자락 이태는 우리나라에 들물결(민주화운동)이 넘실거렸고, 이 바람에 지난날 어린순이는 어린돌이보다 조금 덜 얻어맞으면서 하루를 보냈다.


  곧잘 예전 일이 또렷하게 떠오르는데, 1986∼87년에 ‘매맞는 어린돌이’는 으레 길잡이한테 “선생님, 왜 여자애들만 살살 때려요? 왜 여자애들은 남자애들 반밖에 안 때려요?” 하고 따진다. 그러면 길잡이라는 놈팡이는 “부럽냐? 그럼 너희도 여자로 태어나야지. 너희는 남자로 태어난 잘못으로 여자애들 몫까지 맞으면 돼!” 하면서 이기죽거렸다.


  지난날 ‘매맞는 어린이’ 이야기를 발자취(역사)로 적어 놓는 글바치(학자)가 있을까? 아마 다들 1986∼87년이라고 하면 들불을 이야기할 뿐, 또 전두환을 끌어내리던 너울을 다룰 뿐, 그때에 아이들이 얼마나 매맞고 시달리고 들볶이고 짓눌리면서 눈물바람으로 하루를 살았는지는 못 다루거나 안 짚는다고 느낀다.


  아침이면 아침이라서 때린다. 먼저 집에서 맞는다. 엄마나 아빠한테 맞고서 하루를 여는데, 언니오빠가 있으면 언니오빠가 성풀이로 동생을 때린다. 나는 집에서 막내였으니 언제나 ‘매벌이’ 구실이었다. 이웃집 막내도 나랑 마찬가지이다. 한또래이지만 언니오빠 자리에 있는 동무는 아침에 엄마아빠한테서 맞은 앙갚음을 동생한테 하고서 나온다. 그런데 동생이 없다면? 같은 배움터에서 힘없는 또래나 동생을 때리거나 괴롭힌다. 이리하여 나는 아침부터 집과 마을과 배움터에서 잇달아 맞는다. 이윽고 길잡이가 우리 앞에 서면 이 핑계에 저 탓을 뒤집어씌워서 1교시부터 6∼8교시까지 신나게 매바심을 한다. 겨우겨우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언니오빠나 한또래한테 걸려서 저녁매를 맞고, 집으로 돌아가면 또 집에서 엄마아빠에 언니오빠한테 다시금 매를 맞는 나날이다.


  나는 하도 얻어맞고 산 터라 그들이 어떻게 때리고 괴롭혔는지 낱낱이 되새기거나 적을 수 있다. 맞는 그 자리에서는 넋을 비운 채, 이른바 ‘유체이탈’을 하고서 얻어맞는다. 그래야 아픈 줄 못 느낀다. 그냥그냥 이렇게 살았는데, 용케 목숨을 잃지 않으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느끼면서, 이 목숨을 건사할 수 있어서 고맙다고 돌아본다. 이러면서 생각한다. ‘나는 왜 어릴적에 그토록 얻어맞은 나날을 안 잊을까?’


  가만히 보면 어떤 일이건 잊지 않는다. 모든 일은 우리 마음과 머리와 살갗과 뼈와 이와 머리카락과 눈코귀입에 고스란히 남는다. 우리 스스로 ‘잊었다’고 둘러댈 수 있지만, 우리 몸은 하나도 안 잊는다. 그래서 다시금 곱씹는다. ‘나는 참말로 왜 그 끔찍한 짓을 못 잊지?’


  우리는 모든 일을 배우면서 살아간다. 가벼운 일이나 힘든 일이란 없다. 그저 다 다르게 배우면서 스스로 북돋우고 살리는 길이다. 가벼운 일이어도 구태여 가볍다고 여기지 않고서 맡으며 하면 된다. 힘들다는 일이어도 굳이 힘들다고 여기지 않고서 맡으면 어느새 끝을 낸다. 가벼운 일을 가볍다고 여기기에 으레 말썽을 일으키거나 잘못하거나 틀어진다. 힘들다는 일을 지레 힘들다고 여기는 탓에 그만 짓눌리고 무게에 사로잡혀서 허우적거리거나 허둥허둥 헤맨다.


  가벼운 일이기에 아이들이나 이웃한테 넘길 수 있다. 가볍게 해보라는 뜻으로 일감을 나눌 만하다. 힘든 일이기에 슬며시 달아날 수 있다. 애써 내가 안 하더라도 기꺼이 맡거나 억지로라도 맡는 다른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가볍든 힘들든 그냥 하면 다 이루는 일이고, 정 못 하겠구나 싶으면 내려놓거나 달아날 노릇이다.


  일도 놀이도 말도 삶도 가볍거나 힘들지 않다. 언제나 다 다른 일과 놀이와 말과 삶일 뿐이다. 더 신나는 놀이를 해야 더 신나지 않다. 심심한 놀이를 하기에 심심하지 않다. 마음에 스스로 뿌린 씨앗 그대로 하는 일과 놀이와 말과 삶이다. 어떤 마음으로 다가서고 마주하고 품느냐에 따라서 늘 다르게 맞닥뜨리고 부딪히고 겪는다.


  얼추 마흔 살 언저리에 이를 때까지 “날마다 신나게 얻어맞고 얻어터지며 살았다”는 말을 거의 벙긋조차 하지 못 했고, 어쩌다 말을 해야 하면 눈물부터 핑 돌았다. 그런데 이제는 가끔 “늘 맞고 산 매벌이였어요” 하고 스스럼없이 말할 뿐 아니라,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할 수 있다. 나는 이런 나를 그저 지켜본다. 왜 잊지 않는지, 그리고 잊지 않으면서 무엇을 배우는지, 이리하여 온삶을 가로지르는 길이란 우리한테 어떤 빛줄기인지 새삼스레 돌아본다.


  나는 내가 우리말꽃(국어사전)이라는 꾸러미를 손수 쓰는 길을 걸을 줄 미처 몰랐지만, 아무래도 진작부터 알았다고 느낀다. 다만, 아주 오랜 예전 마음을 들춰 본다면, “밥벌이를 하는 우리말꽃은 하지 않겠어. 밥벌이로 하면 지치거든.” 같은 혼잣말이 나왔다. 밥벌이를 하며 고된 엄마아빠에 이웃사람을 늘 지켜본 터라, 아무리 뜻있거나 빛나는 일거리라 하더라도 밥벌이로 하면 아니될 노릇이라고 느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말꽃이라는 꾸러미를 손수 써야 할까?


  이 수수께끼를 품으면서 세 살이 지나고 다섯 살이 흐르고 일곱 살을 건너고 여덟아홉 살에 열 살에 이르면서 천천히 보인다. “그저 언제나 즐겁게 하면 될 뿐이구나!” 그래서 언제나 즐겁게 얻어맞았다. 그래서 언제나 몸벗기(유체이탈)를 바로바로 하면서 신나게 얻어맞았다. 그래서 그토록 얻어맞고 살갗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고 살점을 파내야 했어도, 내 몸에는 흉터가 하나조차 없다. 다만, 두바퀴를 달리다가 치여죽을 뻔한 숱한 일 탓에 흉터가 남았는데, 이제는 이 흉터조차 차츰차츰 사그라라든다. 아마 예순 살 무렵이면 ‘뺑소니에 치인 흉터’까지 감쪽같이 사라질 만하다.


  말이란 모두 마음이다. 마음에는 좋은 마음과 나쁜 마음이 없다. 그저 다 다른 모든 삶을 담는 마음이라는 그릇이자 그루이다. 사람은 저마다 ‘나’이다. 그래서 ‘나’인 사람은, 사람을 살리는 숨(바람)을 내주는 ‘나무’ 곁에서 함께 ‘그루’로 선다. 꽃길이건 가시밭길이건 언제나 ‘길’이다. 그래서 우리가 쓰는 말에는 좋은말과 나쁜말이 없이 오직 말만 있으니, 이 말이란 ‘삶말’이면서 ‘마음소리’이다.


  이오덕 어른이 걸은 길을 톺아보자면, 처음 태어나서 맞이한 시골집에, 얼음나라(일제강점기)에 다니던 배움터에, 얼음나라에서 길잡이(초등교사)가 되어 일본책(일본교과서)으로 일본말을 우리 아이들한테 가르쳐야 하던 일에, 1945년 8월이 지나가고 나서야 뒤늦게 창피한 줄 깨달은 일에, 그동안 창피하게 저지른 ‘길잡이(초등교사)’라는 얼룩을 지우고 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홀로 속앓이를 하는 일에, 마침내 실마리를 찾아서 멧골마을 아이들하고 글쓰기랑 그림그리기랑 놀이랑 노래랑 멧밭짓기랑 여러 하루를 나누는 길을 걸어가는 일에, 이러면서 글쓰기모임을 여는 일에, 권정생을 만나서 마음동무로 사귀는 일에, 박정희·전두환한테서 아이들이 안 시달리도록 품에 안은 일에, 이러다가 배움터에서 쫓겨나야 하던 일에, 처음으로 대학교에서 젊은이한테 글쓰기를 가르치다가 우리나라 민낯을 들여다본 일에, 여태 해오던 ‘교육비평·어린이문학비평’을 한동안 접고서 《우리글 바로쓰기》부터 처음으로 열어야겠다고 깨달은 일에, 조금 우리말과 우리글을 알아차렸다고 느낄 무렵 더는 일을 할 수 없는 아픈 몸으로 치달아 그만 2003년에 흙으로 돌아간 일에, 어느 일을 보더라도 온통 가시밭길이었다고 여길 만하다.


  그러나 온통 가시밭길이었기에 어른 한 사람이 설 터전이 생긴다. 가시밭길을 걷기에 “나 혼자 이 가시밭길을 걷지 않는구나. 다들 이 가시밭길에 서는구나.” 하고 알아본다. 하루아침에 가시밭길을 꽃길로 바꿀 수는 없지만, 씨앗을 심기로 한다. 《나무를 심는 사람》이라는 그림책이 있지만, 우리는 ‘나무부터 심을 수 없’다. 언제나 씨앗부터 심는다. ‘나무’ 또한 씨앗부터 돌보면서 키운 숨결이다. ‘나무심기’란 “남이 해놓은 것을 슬쩍 가져다가 한다”는 뜻이다. 나무심기를 해도 안 나쁘지만, 우리가 할 일이란, 남이 해놓은 나무를 가져다가 옮겨심는 일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모두 새롭게 씨앗부터 심을 일이어야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우리는 누구나 아이요 어른이다. 모든 사람은 다 아이답고 어른답다. 우리는 누구나 아이답게 아름답기에 하늘누리로 갈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어른답게 어질어 사랑스럽기에 이 삶을 슬기롭게 지을 수 있다. 떠난 어른은 저 높거나 먼 데에 없다. 떠난 어른은 늘 우리 마음자리에 있다. 왜냐하면, 우리도 누구나 다 다르게 어른이거든.


  이렁저렁 힘들거나 가벼운 일을 되새겨 본다. 숱하게 얻어맞고 걷어차이며 뒹굴던 어린 나날 그대로, 어른이라는 몸을 입은 오늘도 똑같이 얻어맞거나 걷어차이거나 뒹군다고 여길 만하다. 나는 “이런 종이는 없는 어른 이웃”을 기다린다. ‘이런 종이’란 ‘졸업장·자격증·면허증’이다. 아이들한테는 아예 신분증부터 없다. 아이들한테 여권을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아이는 모름지기 “이런 종이”는 하나도 안 거느리는 맨손이다. 아이는 오직 가볍게 맨손으로 모든 놀이를 하고 모든 소꿉을 누리다가, 어른 곁으로 다가와서 “내가 뭘 좀 도울까?” 하고 상냥하게 스스럼없이 묻는다.


  “이런 종이”가 없는 사람은 늘 상냥하게 스스럼없이 다가와서 즐겁게 어깨동무를 하는 이웃으로 서더라. 그러나 “이런 종이”가 있는 사람은 하나같이 길미를 따지고 돈과 이름과 힘을 살피더라.


  내가 바라는 이웃이란, “저런 종이”가 있는 사람이다. “저런 종이”란 손수 붓(필기구)을 쥐고서 천천히 적는 빈종이를 가리킨다. 언제 어디에서나 주머니나 가방에 빈종이에 붓을 챙기는 “저런 종이”가 있다면, 이이는 바로 나한테 이웃이요 동무라고 느낀다.


  오늘날 우리나라 글밭(문학계·언론계·작가집단)을 보면, 하나같이 “이런 종이”를 앞세우더라. “저런 종이”를 챙기는 사람을 아주 드물게 겨우 만난다. “이런 종이”를 앞세우는 글바치는 으레 모든 글밭에서 돈과 힘과 이름을 거머쥐면서 ‘베스트셀러 만들기’를 함께한다. 그래서 나는 “저런 종이”를 손에 쥔 이웃하고 마주앉아서 천천히 손으로 노래 한 자락을 새로 쓴다. 나는 ‘베스트셀러 만들기’를 할 뜻도 안 할 뜻도 없다. 나는 그저 ‘삶을 담은 마음을 그리는 소리인 말을 새롭게 그리는 글에 사랑이라는 씨앗 한 톨을 푸른들빛과 파란하늘빛·파란바다빛으로 고르게 담아서 아이 곁에서 나누는 오늘을 노래하려는 일’만 바라본다.


  우리말꽃이라는 꾸러미를 쓰기에 모든 책을 읽고 모든 말을 듣고 모든 글을 쓴다. 여러모로 보면 미친짓이다. 참으로 미친놀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 삶이란 워낙 누구나 다 다르게 미친삶이지 않은가. 머리가 핑그르르 도는 미친길일 수 있고, 서로서로 미치는(닿는·다가서는·스미는) 길이기도 하다. ‘종이’에 두 가지가 있듯, ‘미치다’에 두 가지가 있다.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적어도 두 가지로 다 다르게 결과 길이 다르다. 이를테면 ‘눈’과 ‘배’와 ‘말’과 ‘피’와 ‘키’는 그냥 한글로 적어 놓으면 어떤 낱말인지 가릴 수 없다. 그러나 곰곰이 짚으면 이런 길과 저런 길로 다르되 언제나 하나로 맞물린다.


  가벼운 일이란 늘 힘든 일하고 맞닿는다. 힘든 일이란 노상 가벼운 일하고 맞물린다. 가벼운 일을 맡으니 더 힘들곤 하고, 힘든 일을 맡으니 더 가볍곤 하다. 그래서 우리는 일을 하면 된다. 좋은일도 나쁜일도 아닌, 가볌일도 힘듦일도 아닌, 오롯이 일을 하면 된다. 깨끗한 말이나 멋진 말이나 훌륭한 말이나 아름다워 보이는 말이 아닌, 그냥 말을 하면 된다. 그냥 말을 할 적에는 ‘장애인·비장애인’을 가르는 굴레가 말끔히 사라진다. 그냥 말을 하기에 ‘왼·오른’이나 ‘순이·돌이’를 나누는 담벼락이 깨끗이 녹는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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