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냉이 평화그림책 10
권정생 시,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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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607



강낭알을 꿈꾸는 수수하고 조용한 평화

― 강냉이

 권정생 글

 김환영 그림

 사계절 펴냄, 2015.11.20. 11000원



  큰아이가 지난가을에 물었습니다. “옥수수 먹고 싶어.” 나는 큰아이한테 말합니다. “그럼 씨앗 심어.” 큰아이는 웃으며 대꾸합니다. “와, 씨앗 심자! 심자!” 강냉이를 거의 다 거두는 늦여름에 이르러 우리 집 옆밭에 강냉이 씨앗을 다섯 톨 심고, 우리 집 뒤꼍에도 석 톨을 심습니다. 이제 곧 가을이 되고 겨울이 다가올 줄 알지만, 아이하고 함께 씨앗심기를 누리려고, 아이가 바라는 강냉이 씨앗을 심었습니다.


  늦여름에 심은 강냉이 씨앗은 첫겨울에 이르러 비로소 알이 뱁니다. 다만, 봄에 심어서 늦여름 즈음 거두는 강냉이하고 달리 알이 빽빽이 들어차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큰아이는 제 손으로 씨앗을 훑어서 물에 불린 뒤에 흙에 심는 일을 했습니다. 조그마한 강냉이 씨앗 한 톨에서 떡잎이 나오고 줄기가 오르며 꽃이 피다가 열매가 차츰 굵어지는 모습을 늘 마당 한쪽 옆밭에서 지켜보았어요.



집 모퉁이 토담 밑에 (3쪽)



  권정생 님이 조곤조곤 쓴 글(시)에 맞추어 김환영 님이 그림을 그린 《강냉이》(사계절,2015)를 새롭게 읽습니다. 글(시)하고 그림이 새삼스레 어우러지는 이야기로 가만히 읽습니다. 권정생 님은 이녁이 나고 자라며 들은 경상도 안동말로 강냉이 이야기를 썼고, 김환영 님은 아스라하다면 아스라한 한국전쟁 언저리에 시골에서 강냉이 씨앗을 심고 오붓하게 노래하던 수수한 시골사람 이야기를 그림으로 빚습니다.




생야는 구덩이 파고 난 강낭알 뗏구고 어맨 흙 덮고 (7쪽)



  집 모퉁이 흙담 밑에 씨앗을 심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어매)는 빙그레 웃습니다. 어머니 혼자 밭일을 한다면 수월하면서도 빠르게 끝마칠 텐데, 어머니는 혼자 밭일을 하지 않아요. 어린 아이들한테 밭일을 맡겨요. 그렇다고 고되다거나 힘든 일을 맡기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이 할 만큼 일감을 주고는 빙그레 웃으면서 지켜봅니다. 잘 하면 잘 하는 대로 북돋우고, 잘 못 하면 잘 못 하는 대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몸소 보여줍니다. 아이들은 어머니랑 함께 흙내음을 맡으면서 흙빛으로 웃으면서 구슬땀을 흘려요.


  이렇게 마당 한쪽 밭 한 뙈기를 일구어 강냉이를 심은 뒤 아이들은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고 노래하면서 놉니다. 저희가 씨앗을 심은 옆밭 곁에서 마음껏 노래하면서 놀아요. 얼른얼른 자라라고 노래하고, 부쩍부쩍 크라면서 웃고 놀지요.


  참말 모든 시골자락 논밭에서 자라는 곡식이나 열매는 아이들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자랍니다. 참말 모든 시골마을 논이며 밭에서 자라는 곡식이나 열매는 아이들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커요.




“요건 내 강낭” 손가락으로 꼭 점찍어 놓고 (13쪽)



  그림책 《강냉이》를 들여다봅니다. 그림책에 흐르는 모습만 놓고 본다면, 1980년대 이야기인지 1960년대 이야기인지, 또는 1940년대나 1920년대 이야기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대를 굳이 살피지 않아도 됩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시골에서는 언제 어디에서나 수수하면서 조용한 살림이거든요. 딱히 어느 연대를 헤아려야 하는 시골살림이 아닙니다. 씨앗을 심고, 흙을 북돋우고, 밭을 보살피며, 곡식이랑 열매를 거두는 살림은 예나 이제나 같아요. 즐겁게 심고 기쁘게 돌보며 흐뭇하게 거두는 살림은 참말 오늘이나 앞으로나 같아요.


  그런데, 그림책 《강냉이》는 한국전쟁 언저리 모습입니다. 이리하여, ‘강낭알’을 심은 아이들은 저희 보금자리에 머물지 못합니다. 어디론가 떠나야 합니다. 애써 심은 강낭알을 거두지 못한 채 떠나야 해요. 전쟁 불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전쟁 손아귀에서 뛰쳐나와야 합니다. 조용히 흙을 일구며 살던 시골사람은 낫이랑 호미랑 괭이만 손에 쥐면서 수수하게 살림을 지었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총칼 탱크 전투기에 밀려서 보금자리를 잃거나 잊어야 합니다.




어매캉 아배캉 난데 밤별 쳐다보며 고향 생각 하실 때만 (25쪽)



  총칼하고 탱크는 누가 만들었을까요? 총칼하고 탱크를 젊은이 손에 쥐어 주면서 서로 ‘죽일 놈’으로 여겨서 참말 죽이라고 시키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왜 낫이랑 호미랑 괭이를 지어서 흙을 가꾸지 않고, 온갖 전쟁무기를 만들어서 젊은이 손에 쥐어 주고는 서로 죽이고 죽는 끔찍한 전쟁을 일으켜야 할까요?


  정치권력이 다르니 전쟁을 해야 할까요? 나라가 달라졌으니 서로 싸워서 한쪽은 몽땅 죽어야 할까요? 정치권력이 다르고 나라가 달라도 똑같이 밥을 먹고 강냉이를 먹는 살림이지 않을까요?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흙내음을 맡으면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나날이 되지 않을까요?


  서로서로 사이좋게 모여서 강낭알을 심을 수 있기를 빌어요. 강낭알을 네 밭에도 심고 내 밭에서 심으면서 여름 바람이 차분해질 무렵 함께 오두막에 모여서 강냉이를 폭 삶아서 맛나게 잔치를 벌일 수 있기를 빌어요. 네 강냉이도 맛있고 내 강냉이도 맛있는 기쁜 살림을 나눌 수 있기를 빌어요. 오순도순 어우러지는 두레랑 품앗이가 이 땅에서 새롭게 살아날 수 있기를 빌어요. 아이들이 저마다 제 밭을 가꾸면서 사랑할 수 있기를 빌어요. 4349.1.12.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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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6-01-13 00:27   좋아요 0 | URL
이 그림책 저도 읽었어요. 사투리 입말이 정말 정겨워서 뒤에 실린 표준어로 고친 시가 얼마나 싱거운지 비교되더군요^^

숲노래 2016-01-13 05:31   좋아요 1 | URL
표준 서울말이 참... 싱겁지요 ^^;;;
고장마다 교과서도 다 고장말로 가르치면
한국 문화가 한결 재미나게 살아날 텐데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곤 합니다 ^^
 
질척질척 철퍼덕 진흙 할아버지 꼬꼬마 도서관 5
오시마 다에코 지음, 육은숙 옮김, 가와카미 다카코 그림 / 학은미디어(구 학원미디어)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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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606



아이들은 흙을 만지면서 놀고 싶다

― 질척질척 철퍼덕 진흙 할아버지

 오시마 다에코 글

 가와카미 다카코 그림

 육은숙 옮김

 학은미디어 펴냄, 2006.5.5. 8500원



  모래가 있는 바닷가에 가면 바닷물에 뛰어들어 놀 수도 있고, 모래밭에서 모래를 쌓으면서 놀 수도 있습니다. 볕이 따숩고 바람이 없는 날이라면 겨울에도 바닷가로 자전거를 달려서 모래밭놀이를 하러 갑니다. 다른 고장이라면 엄두를 못 낼 수 있지만, 전남 고흥이라는 고장에서는 한겨울에도 무척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곤 해서, 이런 날은 모래놀이나 흙놀이를 하기에 좋습니다.


  집에서 12킬로미터 떨어진 바닷가로 가서 모래놀이를 할 수 있고, 뒤꼍에서 흙놀이를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호미로 땅을 쪼고 꽃삽으로 다지며 손으로 무늬를 그리면서 저마다 재미난 흙집을 지으면서 놀아요.


  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흙을 일구며 살았고, 흙으로 집을 지었으며, 흙에서 난 것으로 실을 얻어서 옷을 지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이러한 피를 물려받아서 흙놀이를 좋아할는지 모릅니다. 몸으로 먼저 알기 때문에 흙을 맨손으로 만지면서 놀 적에 무척 기뻐하면서 하루 내내 재미나게 웃음을 지을는지 몰라요.



비가 내리는 숲 속은 안개가 낀 듯 흐릿해요. 나무가 도깨비처럼 보이고, 어쩐지 보통 때하고는 다른 기분이 들어요. “피피야, 어쩐지 무섭다. 그치?” (4쪽)




  오시마 다에코 님이 글을 쓰고, 가와카미 다카코 님이 그림을 그린 《질척질척 철퍼덕 진흙 할아버지》(학은미디어,2006)를 읽습니다. 어머니랑 아이랑 개 한 마리, 이렇게 셋이 깊은 숲에 있는 작은 집에서 산다고 하는데, 이 작은 ‘숲집’에 사는 아이는 날마다 숲마실을 다녀요. 나이로 치자면 예닐곱 살 즈음 되지 싶은 ‘그림책 아이’인데 개 한 마리를 이끌고 씩씩하게 숲마실을 누립니다.


  아이는 혼자 다닌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집에는 어머니가 있고, 언제나 함께 다니며 노는 개가 있어요. 그리고 숲에 깃들면 수많은 숲동무가 이곳저곳에서 나타나요. 그림책 《질척질척 철퍼덕 진흙 할아버지》에서는 ‘진흙 동무’가 짠 하고 나타나지요.



단비는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면서 데굴데굴 구르네요. 바로 그때예요. 진흙탕 속에서, “어이쿠, 위험해!” 하는 소리가 나더니 검은 덩어리가 불쑥 솟아올랐어요. 그리고 단비를 와락 감싸 안았어요. (8∼9쪽)



  비가 오는 날 비옷을 입고 숲마실을 나온 단비(그림책 아이)는 어쩐지 이날 따라 무섭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앞뒤를 안 가리고 막 숲을 가로지르면서 달리는데, 돌멩이에 걸려서 넘어지려 해요. 이때에 땅밑에서 커다란 진흙덩이가 솟아올라요. 땅밑에서 솟아오르는 커다란 진흙덩이가 단비를 포근히 안아 주기에 단비는 조금도 안 다칩니다.


  커다란 진흙덩이는 단비한테 말을 걸어요. 이 진흙덩이는 진흙 할아버지라고 합니다. 지렁이를 귀여운 동무로 삼는 멋진 ‘흙 할아버지’입니다. 흙 할아버지 곁에는 흙 아이가 있어요. 이 흙 아이들은 단비라고 하는 멋진 아이가 숲으로 찾아와 주어서 반갑습니다. 흙 할아버지도 흙 아이도 숲 아이인 단비하고 함께 놀기로 합니다.




“할아버지, 우리 함께 놀아요!” 단비는 진흙 할아버지를 잡아끌었어요. “그래, 그래. 비가 그칠 때까지만이다.” 그때 여기저기 진흙탕 속에서 진흙 꼬마들이 나타나 진흙 할아버지를 따라왔어요. (12쪽)



  숲이란 어떤 곳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풀하고 나무만 우거지면 숲이라고 할 만한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흔히 시골이라 일컫는 곳은 논밭이랑 집만 있는 자리가 아니라, 마을이 숲에 포근히 안긴 곳이라고 해야지 싶습니다. 오늘날에는 도시하고 멀리 떨어진 곳을 가리켜 시골이라 하지만, 예부터 시골이라고 하는 곳은 바로 숲으로 둘러싸여서 숲내음을 마시고 숲넋을 키울 만한 보금자리였지 싶어요.


  아이들은 숲에서 마음껏 여러 동무하고 이웃을 만나면서 놉니다. 어른들은 숲에서 나무를 하거나 나물을 합니다. 아이들은 숲에서 실컷 뛰놀거나 뒹굴면서 씩씩하고 의젓하게 자랍니다. 어른들은 숲에서 얻은 나무로 집을 짓거나 불을 피울 뿐 아니라, 숲에서 얻는 나물로 맛난 밥을 짓습니다.


  그리고, 숲이 있기에 늘 싱그러우면서 푸른 바람이 불어요. 맑으면서 따사로운 바람은 숲에서 태어납니다. 여기에다가 깨끗하고 시원한 물은 숲에서 샘솟지요. 냇물도 샘물도 숲에서 솟아요. 사람으로 태어나고 먹고 마시고 누리는 모든 숨결을 숲에서 얻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머나, 진흙 할아버지 무릎이 의자가 되었네. 따뜻하고 흔들흔들 재미나요. 해님 냄새도 나고요.” 드르렁드르렁, 진흙 할아버지 숨소리가 들려요. 피피도 진흙 꼬마들도 잠이 들었어요. 단비도 스르르 잠이 들었어요. (23쪽)



  숲에 깃들어 흙 할아버지하고 노는 아이는 할아버지 몸에서 해님 냄새를 맡습니다. 해님은 흙을 따사로이 감싸고, 해님 기운을 받은 흙은 풀이며 꽃이며 나무이며 튼튼하게 북돋웁니다. 흙이 있어서 씨앗을 심습니다. 흙이 있기에 꽃이 핍니다. 흙이 있기에 숲이 우거져요.


  그림책 아이는 온통 흙투성이가 되도록 놉니다. 흙 아이를 동무로 삼기도 했고, 흙 할아버지가 지은 흙집에 들어가서 소꿉놀이도 하거든요.


  우리 집 아이들도 아주 꽁꽁 얼어붙도록 추운 날이 아니라면 맨발에 맨손으로 흙밭에 온몸을 맡기면서 놀기를 좋아합니다. 손발에서 흙내음이 나는 놀이를 즐기고, 온몸에서 흙가루가 포시시 떨어지도록 흙을 가까이합니다.


  흙을 만지면서 흙을 압니다. 흙을 만지면서 흙을 생각합니다. 흙을 만지면서 흙을 노래합니다. 흙을 만지면서 삶을 새로 배우고 사랑을 새로 가꿉니다. 4349.1.11.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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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진짜 갖고 싶어 꼬마 그림책방 24
에마 치체스터 클락 지음, 노은정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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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그림책 읽기 605



별똥별을 바라보며 내 꿈을 빌기

― 진짜 진짜 갖고 싶어

 에마 치체스터 클라크 글·그림

 노은정 옮김

 아이세움 펴냄, 2009.1.5. 8500원



  저녁을 먹고 나서 그림책을 함께 읽은 뒤 촛불을 켜고 책상맡에 둘러앉아서 함께 공부를 합니다. 아이들더러 잠옷으로 갈아입으라 이르고 나서 설거지를 마저 한 다음 이를 닦도록 하고는 손발을 씻깁니다. 작은아이는 아직 아버지가 이를 닦아 줍니다. 하루를 마무리하기 앞서 두 아이가 마지막으로 방에서 놀 즈음 나는 겉옷을 걸치고 혼자 조용히 마당으로 내려섭니다. 캄캄한 시골집 마당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거닐면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구비진 고샅길에 켜진 등불은 우리 집 마당에 우람하게 선 후박나무가 가려 줍니다. 후박나무한테 고맙다고 말하면서 별잔치를 누립니다. 처음 마당에 내려설 즈음에는 제법 많은 별이었다면, 1분이 지나고 2분이 흐르는 동안 더욱 많은 별이 돋습니다. 꽤 많은 별이 돋으며 별잔치를 더 신나게 누릴 즈음 두 아이는 왜 아버지가 방에 안 들어오나 궁금해서 방문을 열고 두리번거리다가 마당에서 별 구경을 하는 아버지를 찾아냅니다.


  큰아이랑 작은아이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별 보러 가나 봐!” 하고 외치면서 서둘러 마당으로 내려서려 합니다. “겉옷.” 하고 넌지시 말하면 “아, 겉옷 입어야지.” 하고 노래하면서 겉옷을 챙겨 걸칩니다. 두 아이가 겉옷을 걸치며 신을 꿰는 모습을 보고는 나는 대청마루로 다시 올라서서 두 아이 장갑을 꺼냅니다.




내가 진짜 눈물까지 흘리며 앙앙거리는 커다란 아기 인형을 구경하던 바로 그때였어요. 아주 별난 게 내 눈에 띄었어요. 조막만한 판다 인형이 진열장에서 팔짝팔짝 뛰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어요. (4쪽)



  두 아이하고 마당에 서서 아주 천천히 동그라미를 그리며 거닐다가 셋이 함께 별똥별을 봅니다. 나는 별똥별을 곧잘 보지만 셋이 함께 별똥별을 보기는 오늘이 거의 처음이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참말 때마침 셋이 같은 하늘을 올려다볼 즈음 별똥별이 하늘을 하얗게 꼬리를 늘어뜨리고 가르면서 지나갔어요. 큰아이는 이때에 “소원 빌어야지. 별똥별한테 소원 빌면 다 이루어진다고 했어!” 하고 외치느라 막상 큰아이는 제 꿈을 말하지 못 합니다. 얘야, 먼저 네 마음속에 늘 흐르는 꿈부터 읊은 뒤에 그런 말을 해야 했을 텐데.


  그림책 《진짜 진짜 갖고 싶어》(아이세움,2009)를 가만히 떠올립니다. 에마 치체스터 클라크 님이 빚은 사랑스러우면서 고운 그림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참말로 참말로 갖고 싶다고 하는 이야기가 흐르는 그림책인데, 이 그림책을 보면 큰아이는 우리 집하고 똑같이 ‘누나’이고, 작은아이도 우리 집하고 똑같이 ‘사내’예요. 누나랑 동생 사이라는 대목에서는 똑같은데, 그림책에 나오는 동생은 무척 어려요. 그림책에 나오는 동생은 뭐든 입에 집어넣으면서 우적우적 씹습니다. 터울이 좀 진 사이라고 할까요.



나는 판다 인형을 빤히 보았어요. 판다 인형도 나를 말똥말똥 보았어요. 내가 “진짜 판다 맞아?” 하고 물었어요. 그러자 “네가 진짜이듯 나도 진짜야. 내 이름은 팅크야. 진짜 보기 드문 판다 인형이지.” 했어요. (7쪽)




  하늘을 하얗게 가르다가 사라지는 별님한테 꿈을 빌기를 못 한 큰아이를 달래면서 속삭입니다. “아버지는 꿈을 말했지. 왜 그런지 아니?” “아니, 몰라.” “별똥별이 지나가는 겨를이 짧은 듯하지만 짧지 않아. 우리가 마음속에 품은 꿈을 읊기에 넉넉하도록 지나가지. 그런데, 별똥별한테 꿈을 읊으려면 우리가 늘 꿈을 마음속에 품으면서 살아야 해. 늘 꿈을 마음속에 품으면서 살기에 언제 어디에서라도 곧바로 내 꿈을 말할 수 있어.” “아, 그렇구나. 벼리도 꿈을 늘 품으면서 살래.”


  그림책 《진짜 진짜 갖고 싶어》에 나오는 큰아이는 어느 날 어머니하고 백화점에 갑니다. 두 사람은 동생이 곧 맞이할 생일잔치에 줄 선물을 고릅니다. 아마 동생은 두 돌쯤 되겠지요? 그런데 이때에 큰아이는 무척 귀엽고 사랑스러우면서 작은 인형을 봅니다. 게다가 그림책 큰아이는 인형이 저한테 거는 말을 알아들어요. 백화점 한쪽에서 이 아이는 인형하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자, 이제 이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뭐든지 입으로 척척 집어넣으면서 우적우적 씹는 동생한테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인형을 주어야 할까요? 이 인형만큼은 동생한테 주지 말고 제가 가질 수 있을까요?



“이거 꼭 동생한테 줘야 해요?” 내가 물었지요. “엉뚱하기는! 동생 선물로 산 거잖아!” 엄마가 대답했어요. (10쪽)




  집에 두 아이가 있으면 아마 거의 모든 집에서 엇비슷할 텐데, 나이가 어리고 힘도 여린 동생을 더 살피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집에서나 가장 어리고 여린 사람을 더 살피고 아끼며 보살피니까요. 어리고 여린 사람한테 밥을 가장 먼저 챙겨 주고, 어리고 여린 사람한테 더욱 마음을 기울이기 마련이에요.


  곰곰이 헤아리면,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뿐 아니라 우리 집 아이도 다른 모든 집 아이도 ‘첫째’로 태어나건 둘째나 셋째로 태어나건 똑같이 사랑을 받습니다. 몇 째 아이로 태어나든 대수롭지 않아요. 모든 아이는 오롯이 사랑을 받아요.


  그렇지만 큰아이 자리에 들어선 아이들은 ‘나 혼자 오롯이 갖거나 받고 싶은 선물’이 있어요. 《진짜 진짜 갖고 싶어》에 나오는 큰아이로서도 동생을 생각하며 고른 선물이지만, 동생은 뭐든지 입에다 넣기만 하니까 이 인형만큼은 동생 침으로 범벅이 되도록 하지 않고 싶을 수 있어요. 이리하여 생각을 기울입니다. 참말로 갖고 싶은 것을 생각하면서 마음속으로 꿈을 품습니다. 하룻밤을 자고 나면 이튿날 동생한테 이 인형을 선물로 주어야 하는데, 그때까지 머리를 짜내야 합니다.


  아이는 좋은 생각을 하나 떠올리고, 거의 밤을 새다시피 새로운 선물을 하나 꾸립니다. 동생이 몹시 반가이 여기면서 좋아할 만한 선물을 꾸리느라 잠을 잘 겨를이 사라지지만, 아이는 귀엽고 사랑스러우며 작은 인형을 품에 안고 함께 놀겠다는 꿈을 키우면서 기운을 내요.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길을 찾으며, 스스로 꿈을 짓는다고 할까요.




“아직 늦지 않았어. 내 손으로 선물을 만들어야겠어. 그런데 뭘 만들지?”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요. “아기는 뭘 좋아할까? 뭘 좋아하지?” 그러다 좋은 생각이 반짝 떠올랐어요! (16쪽)



  셋이 함께 별똥별을 바라본 오늘 밤, 별똥별을 더 찾아내지는 못 합니다. 나는 두 아이 손을 잡고 마을 한 바퀴를 크게 천천히 돌며 밤하늘 별을 내내 올려다보았는데, 쏟아지는 별빛은 실컷 보아도 별똥별은 오늘 따라 더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은 별똥별 하나로 반갑게 여기고 다음 밤에 다시 밤마실을 다니면서 별똥별을 찾아야지 싶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앞서 책상맡에 켠 촛불을 다시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큰아이는 촛불을 보면서 “촛불에서 별똥별이 보여.” 하고 말합니다. 그래 그렇겠구나, 네가 별똥별을 다시 보고 싶다는 꿈을 마음에 담으니 별똥별이 보이겠네. 그런 네 생각처럼 기쁜 꿈을 다시 마음속에 담으면서 포근히 잠자리에 들자. 아침에 새롭게 일어나서 새롭게 노래할 놀이를 헤아려 보자. 우리가 함께 지으면서 참으로 기쁘게 웃고 노래할 멋지고 사랑스러운 꿈을 별똥별한테뿐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대고 빌어 보자. 4349.1.9.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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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카베야 후요우 글 그림, 이유리 옮김 / 산하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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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그림책 읽기 604



엄마가 나만 사랑하면 얼마나 좋을까

―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카베야 후요우 글·그림

 이유리 옮김

 산하 펴냄, 2003.7.14. 8000원



  내 어릴 적을 곰곰이 돌아보니, 나는 어릴 적에 꿈을 품으라고 하는 말을 거의 못 들었습니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마을에서나 모두 똑같은 말만 들었어요. 무슨 말인가 하면 “공부해. 공부하면 돼.”입니다. 둘레 어른들은 하나같이 ‘공부’부터 해서 ‘대학교’에 가라고 말했고, 대학교를 마친 뒤에 ‘돈을 잘 버는’ 회사에 들어가면 ‘네가 하고픈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어린 나는 ‘내가 하고픈 것’을 오늘 이곳에서 바로 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언제가 될는 지 모를 까마득한 앞날까지 공부를 하고 대학교를 마치고 회사에 들어가고 돈을 벌고 …… 그러고 나서 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른들은 ‘꿈’이 아닌 ‘공부’만 하라고 일렀어요.



유치원에 갈 때, 이런 걸 타고 가면 얼마나 좋을까? 봐, 휙휙! (4쪽)




  카베야 후요우 님이 빚은 그림책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산하,2003)를 읽으면서 생각을 기울입니다. 이 그림책은 아주 어린 동생을 둔 아직 어린 아이가 스스로 꿈을 꾸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로서는 ‘오늘 이곳’에서 ‘하나도 이루지 못하는’ 모습을 꿈으로 꾸고, 이 꿈대로 이루어지기를 애타게 바라요.


  이를테면, 유치원에 가는 길에 ‘하늘걸상’을 타고 휙휙 날아가기를 꿈꿉니다. 집에서 키우는 개가 아주 커져서 이 개를 타고는 하늘을 날아서 돌아다니기를 꿈꿉니다. 유치원에서 아주 커다란 케잌을 샛밥으로 주기를 꿈꿉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지 말고 살아서 늘 함께 놀아 주기를 꿈꿉니다.



우리 집 강아지 치비가 아주 커져서 하늘을 날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치비 등에 타고, 단숨에 날아서 갈 텐데. (8∼9쪽)



  꿈이란 언제 어디에서나 아름답다고 느껴요. 꿈이기에 아름답기도 하고, 이 꿈을 떠올리는 동안 마음에 기쁨이 흐르기에 아름답기도 해요. 꿈을 작은 씨앗 한 톨로 마음에 심기도 하기에 아름다우며, 이 꿈을 이루려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씩씩하게 지으니 아름답지요.


  그래서 나는 내 어릴 적에 내 둘레 어른들이 나한테 ‘공부’를 하라는 말이 아니라 ‘꿈’을 품으라고 말해 주기를 바랐어요. 먼저 꿈이 있어야 공부를 하지, 공부부터 하면서 꿈을 품을 수는 없다고 여겼어요. 이루려는 꿈이 있어야, 이 꿈에 맞는 공부를 찾을 수 있다고 여겼어요. 꿈이 없는 채 공부만 하다가는 머리통만 너무 커져서 ‘꿈이 없는 몸짓’이 되리라 여겼어요.


  어느 모로 보면, 우리 사회에는 꿈이 없는 채 공부만 매달린 사람이 너무 많을는지 몰라요. 곰곰이 살펴보면, 우리 사회에는 꿈을 심지 못한 채 공부만 파고든 사람이 지나치게 많을는지 몰라요. 집이든 학교이든 마을이든 아이들이 꿈을 생각하지 못하는 채 공부만 해야 하는 얼거리가 되어 버렸는지 몰라요.




우리 집 목욕탕이 수영장만큼 크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아빠, 엄마, 나리, 치비와 함께 다 같이 목욕할 거야. (19쪽)



  오늘 나는 우리 집 두 아이하고 꿈을 지으려고 생각을 기울입니다. 아이가 가을에 강냉이를 먹고 싶다고 말하면 가을에도 씨앗을 심습니다. 아이가 흙놀이를 하고 싶다고 말하면 어디 흙을 퍼 올 만한 데를 헤아려서 수레를 끌고 아이더러 스스로 흙을 자루에 퍼 담아서 뒤꼍에 흙을 실어 날라서 흙놀이터를 마련하자고 합니다. 이러면서 나도 내 나름대로 새로운 꿈을 하나씩 지어 봅니다. 나 스스로 이루려는 꿈을 종이에 그림으로 그립니다. 내 마음속에서 꿈이 잘 자라기를 바라면서 ‘꿈을 그린 종이’, 그러니까 ‘꿈종이’를 아침저녁으로 고요하게 바라봅니다.



엄마가 나만 사랑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그러면 말이지, 나는 아주 착한 아이가 될 거야. 동생 나리도 예뻐해 줄 테야. (22쪽)



  그림책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는 어린 아이가 어머니 품에 살며시 안겨서 ‘어머니가 나만 사랑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살짝 비춥니다. 아이는 하늘도 날고 싶고, 넓은 집에서 살고 싶고, 할아버지하고 놀고 싶고, 케잌도 실컷 먹고 싶고, 이것저것 해 보거나 이루고 싶은 꿈이 많은데, 이 많은 꿈 가운데 어머니 사랑을 모두 차지하는 나날을 가장 이루고 싶습니다.


  자, 이 아이는 이 꿈을 이룰 수 있을까요? 아이 어머니는 아이한테 어떤 말로 이 꿈을 곱게 이루는 길을 밝혀 줄까요? 여러 아이를 낳아서 보살피는 어버이는 아이한테 어떤 말을 들려주면서 ‘너를 하늘처럼 땅처럼 사랑한단다’ 하는 뜻을 알려줄 만할까요?


  그림책을 덮고 생각한다면, 사랑이란 주고 또 주고 거듭 주고 자꾸 주고 꾸준히 주어도 줄지 않아요. 한 사람한테 주는 사랑이든 온 사람한테 주는 사랑이든 끝이 있을 수 없어요. 큰아이한테 물려주는 사랑이든 작은아이한테 물려주는 사랑이든 ‘둘을 반토막으로 갈라’서 물려주는 사랑이 아니라, 언제나 한 아이를 바라보며 한 아이한테 물려주는 사랑입니다. 다 함께 있어서 기쁜 삶이요, 서로 아끼며 마주할 수 있는 살림이기에 사랑이 새로 샘솟습니다. 아이들아, 너희 어버이는 너희를 너희 숨결 그대로 사랑한단다. 너희 마음 그대로, 너희 넋 그대로, 너희 눈빛 그대로 사랑한단다. 4349.1.8.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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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한 톨 - 수학 옛이야기
데미 글.그림, 이향순 옮김 / 북뱅크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시골에서 그림책 읽기 603



‘쌀 한 톨’에 깃든 힘

― 쌀 한 톨 (수학 옛이야기)

 데미 글·그림

 이향순 옮김

 북뱅크 펴냄, 2015.1.30. 13000원



  쌀 한 톨이 있습니다. 벼라고 하는 풀이 맺은 열매를 깎아서 쌀을 얻습니다. 벼 열매인 ‘벼알’, 그러니까 ‘나락’ 겉껍질인 겨를 살짝 깎으면 누런쌀이고, 겉껍질인 겨를 많이 깎으면 흰쌀입니다. 겉껍질을 살짝 깎으면 누런 빛이 감도는 쌀을 얻고, 겉껍질을 많이 깎으면 하얀 빛이 감도는 쌀을 얻어요. 갓 지어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쌀밥은 바로 벼라고 하는 풀이 우리한테 베푸는 고운 선물입니다.


  이 쌀을 알맞게 씻고 불려서 밥을 지을 적에 늘 아이들이 곁에 달라붙으면서 묻습니다. 날마다 먹으면서도 새삼스레 묻고, 늘 바라보면서도 새롭게 묻습니다. “이 쌀 뭐야?”


  이 쌀은 무엇일까요? 참말 이 쌀은 무엇일까요? 쌀이란 무엇이기에 우리한테 밥이 되고, 우리 목숨을 돌봐 주며, 이 땅에 논을 이루어 열매를 맺어 새로운 숨결을 베푸는 선물이 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밥 한 그릇을 먹으면서 배가 부릅니다. 배가 부르면 한결 신나게 뛰어놉니다. 어른도 밥 한 그릇을 먹으면서 배가 불러요. 배가 고플 무렵에는 일을 멈추고 밥상맡에 둘러앉아 느긋하게 밥술을 들지요. 밥을 먹는 동안에는 누구나 평화롭고 평등하며 포근합니다.



그곳 백성들은 벼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농사지은 쌀을 거의 모두 왕에게 바쳐야 했습니다. (6쪽)



  데미 님이 빚은 그림책 《쌀 한 톨》(북뱅크,2015)을 읽습니다. ‘수학 옛이야기’라고 하는 《쌀 한 톨》인데, 이 그림책은 인도에서 예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빚었다고 해요. 굶주리는 백성을 못 본 척하면서 궁궐 곳간에 쌀자루를 가득 모아 두기만 한 임금님을 넌지시 나무란 어느 가시내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어요.




쌀자루 하나에서 쌀이 떨어져 내리는 걸 동네에 사는 라니라는 소녀가 알아챘습니다. 라니는 재빨리 뛰어가 코끼리 곁을 따라 걸으면서 치마폭에 떨어지는 쌀알을 받았습니다. (13쪽)



  계급이 촘촘히 나뉜 인도 사회에서 가난한 시골마을 가시내는 어떻게 임금님을 넌지시 나무랄 수 있을까요? 게다가 고작 쌀 한 톨로 임금님을 구석에 몰아붙이면서 잘잘못을 일깨울 뿐 아니라, 쌀 한 톨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대목을 가르칠 수 있을까요?


  그림책 이야기를 살피면, 옛날 옛날 한 옛날에 어느 임금님이 궁궐 곳간에 쌀자루를 모으면서 ‘굶주림이 들 때를 살펴서 미리 쌀자루를 모으고, 나중에 굶주리는 사람이 없도록 하려는 뜻’이라고 밝혔다고 해요. 그런데 막상 나라에 굶주림이 돌자 임금님은 곳간을 안 열었다는군요. 나중에 더 큰 굶주림이 찾아들는지 모르는데 섣불리 곳간을 열 수 없다고 말했다는군요.


  임금님 말마따나 올해보다 이듬해에 더 깊고 고단한 굶주림이 찾아들는지 몰라요. 그렇지만 농사를 짓는 시골사람은 오늘 밥을 먹지 못해 굶주리다가는 그만 목숨을 잃겠지요. 올해에 굶주림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이 생긴다면, 이듬해에는 ‘일할 사람’이 줄어들 뿐 아니라, ‘일할 힘’도 빠지겠지요. 한 번 굶주리고 나면 이듬해에는 더 굶주리기 마련이고, 그 다음해에는 더욱 굶주릴 수밖에 없어요. 임금님으로서는 ‘나중을 생각하겠다’고 말하면 될는지 모르나, 오늘 굶주리는 사람들로서는 ‘죽음이 아닌 삶을 바라’기에 임금님더러 곳간을 열어 달라고 외치지만, 임금님은 이런 목소리를 귀여겨듣지 않아요.




“전하, 상이라니요. 저는 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꼭 그리 하고자 하신다면 저에게 쌀알 한 톨만 주시옵소서.” (16쪽)



  임금님은 밥을 굶은 일이 있을까요? 임금님은 굶주려서 며칠 동안 아무것도 못 먹고 드러누워야 하던 날이 있었을까요? 임금님은 농사가 잘 안 되어 곡식을 거의 거두지 못해 슬픈 삶을 스스로 겪은 적이 있을까요? 백성이 굶주릴 적에 임금님은 무엇을 먹으면서 지낼까요?


  곳간을 열지 않아 사람들은 굶주리다가 죽습니다. 이러는 동안 궁궐에서는 잔치도 열리지요. 배고프지 않은 사람은 배고픈 줄 모르니까요. 이웃이 어느 만큼 배고프거나 고단한지 모르니까요.


  이럴 즈음 어느 시골마을 가시내가 ‘왕실 곳간에서 궁전으로 쌀자루를 싣고 가는 코끼리’를 봅니다. 쌀자루를 싣고 가던 코끼리는 ‘가는 길에 쌀알을 흘립’니다. 이름이 ‘라니’라는 가시내는 이 모습을 보다가 문득 한 가지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쌀 한 톨만 이녁 치맛자락에 담지요. 그러고는 궁궐로 찾아가서 임금님한테 쌀 한 톨을 바치기로 해요. 코끼리가 흘린 쌀 한 톨을 마음대로 가질 수 없기에 임금님한테 돌려주겠노라 말하면서요.


  자, 임금님은 ‘길에 떨어진 쌀 한 톨을 임금님한테 돌려주겠다’고 밝히는 어린 가시내한테 무엇을 할까요? 임금님은 어린 가시내가 갸륵하다고 여기면서 무언가 선물(상)을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갸륵한 가시내는 임금님이 주는 선물을 받을 수 없다고 손사래를 치고, 임금님은 거듭 무엇이든 받고 싶은 선물을 말해 보라고 해요. 이때에, 어린 가시내는 하루에 쌀 한 톨만 주시면 고맙겠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튿날에는 곱으로 두 톨을 주고, 그 다음날에는 다시 곱으로 넉 톨을 주되, 이렇게 서른 날만 주시기를 바란다고 말해요.


  임금님은 가만히 헤아립니다. 어린 가시내가 그야말로 ‘욕심이 없이 너무 착하기’만 하다고 여깁니다. 코끼리가 싣고 가던 쌀자루에서 흘러내린 쌀알을 치맛자락에 고스란히 담아서 조용히 지나갔으면 더 ‘넉넉히’ 쌀을 얻었을 텐데, 좀 바보스럽기까지 하다고 여깁니다.




9일째 되던 날 라니는 256톨에 이르는 쌀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 라니가 받은 쌀은 전부 511톨이었는데, 그건 겨우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양이었습니다. ‘이 소녀는 정직하지만 대단히 영리하지는 않구나. 쌀자루에서 흘러나오는 쌀을 치마폭에 담았더라면 이보다 더 많은 쌀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왕이 생각했습니다. (20쪽)



  쌀 한 톨을 받기로 한 날부터 서른 날이 지난 뒤에는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참말 임금님 말대로 라니라는 가시내는 바보스럽거나 어리석은 선물을 바랐을까요?


  첫 날에는 한 톨이고, 사흘째에는 넉 톨이며, 닷새째에는 열여섯 톨인 쌀알입니다.  여드레째에는 256이라는 숫자가 되고, 열나흘째에는 8192이라는 숫자가 되어요. 그런데 열여드레째에는 131,072라는 숫자가 되더니 스물이틀째에는 2,097,152라는 숫자가 되어요. 스물여드레째에는 134,217,728이라는 숫자가 되고, 마지막 서른째 날이 되니 자그마치 536,870,912이라는 숫자가 됩니다.


  임금님은 여러 사람들 앞에서 어린 가시내하고 다짐을 했기에 이 숫자만 한 쌀알을 모두 선물로 주었고, 서른째 날이 되니 임금님 곳간에 있던 쌀자루는 모두 어린 가시내한테 돌아갔습니다. 어린 가시내는 임금님을 아뢰면서 이 쌀자루는 모두 ‘굶주린 이웃’한테 나누어 줄 생각이라고 밝힙니다. 이때가 되어서야 임금님은 스스로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깨닫습니다. 굶주린 사람이 코앞에 있을 적에는 참말 ‘코앞에 있는 굶주린 사람한테 밥을 주어’야 하는 줄 깨닫지요. 쌀 한 톨이 한 달 사이에 ‘궁궐 곳간에 있는 쌀자루’를 모두 비우는 숫자가 되듯이, 굶주림이 이렇게 커진다는 대목을 비로소 알아차리지요.


  아이하고 그림책 《쌀 한 톨》을 함께 읽으면서 숫자놀이를 할 뿐 아니라, 숫자하고 얽히는 삶을 나란히 돌아봅니다. 겉으로 드러난 숫자만 읽는 눈길이 아니라 속으로 깃드는 삶을 곰곰이 읽을 줄 아는 눈길이 될 때에 비로소 참다운 살림이 되고 사랑이 되는 얼거리를 되새겨요. 곳간에 쟁이기만 해서는 아무런 도움도 ‘복지’도 될 수 없다는 대목을 생각하고, 작은 씨앗 한 톨을 심어서 새롭게 거두는 기쁨이 무엇인가를 헤아립니다. 4349.1.6.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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