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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모노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평점 :
내가 좀 심뽀가 좀 고약해서인지, 여러 사람 입에 오르내린 화제작 등은 잘 안읽는다. 어쩌면 이 책도 그런 이유로 읽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만, 소설집이라서 다른 계간지 등을 통해 읽은 소설도 있었다.
이번에 독서동아리 선생님들과 읽을 책을 고르다가, 7~8월 여름 동안은 이런저런 이유로 집중하기 어려운 시기기도 하고 해서 조금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면 좋겠다는 생각에 추천을 했다. 내가 읽기 전에 대학생인 딸에게 먼저 읽어보라고 줬더니, 나름 재미있게 읽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혼모노...라는 소설집의 제목이자 동명의 소설은 나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았다. 일본문화에 대해 개방적인 나지만, 소설집의 제목이 일본어를 차용한 것이 마음에 안들었다. 일본 잡지도 늘 읽고, 일본 소설도 그림책도 좋아하지만, 한국 소설에 일본오 제목이란것은 이상하게 맘에 안들었다.
하지만, 이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진짜인가 가짜인가, 진짜는 진짜인가, 진짜 가짜인가, 진짜와 가짜는 어떻게 구분하나....등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소설이 혼모노였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집에서, 《길티클럽: 호랑이 만지기》,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 《잉태기》가 마음에 와닿았다.
"나는 예술에 도취된 사람들이 불편했다."(p.17)
왜냐하면, 자칭 시네필이었던 전 애인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타인에게 자신의 예술적 취향을 강요하던 사람. 취미가 없는 것을 기이하게 여기던 사람. 심미안이 없다며 면박을 주던 사람. 모럴이 없다며, 지루하다고 했던 그 사람과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모럴'의 뜻을 검색해본다.
모럴: 인생이나 사회에 대한 정신적 태도,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의 구분에 관한 태도.
'나'는 어느날 혼자 보게 된 영화 '인간불신'에 압도되어 김곤 감독의 팬이 된다. 잘 나가던 김곤 감독에게 '그 일'이 일어나면서 국내 대중들로부터 외면을 받는다. 인격자라도 된 듯 돌을 던지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그가 안쓰러웠고, 이해가 되었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다가도, 어느날은 자신에 대한 불신이 커지기도 한다.
길티클럽의 사람들을 만나기로 한건, 어쩌면 이 사람들은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돌팔매질 앞에서도 여전히 그를 우상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기에 묘한 동질감과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들과 다른 자신을 발견한다.
"애를 낳아보니 알겠더라고요. 그게 실수가 될 수 없다는 걸요. 끔찍한 일이에요. 그건,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몇번이고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감독님께 물어보고 싶었어요. 한번도 입장을 표명한 적이 없잖아요. 미안하지 않냐고 물어보고 싶었어요. 그게 없던 일이 될 순 없겠지만. 사람은 변할 수도 있으니까요."(p.48)
폭탄을 건드린 미지 선생님의 이야기에, '나'는 누군가가 항변해주기를 바란다. 무슨 말이라도 당당하게 해주었으면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아무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 폭탄을 막아야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나'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 여자'에게 말한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더 가혹한 거 아닌가요? 입증된 것도 없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제대로 된 증거도 없는 사건을 어떻게 사실이라 단정 짓는지, 무고한 사람을 왜 죄인으로 모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그게 더 가혹한 일 아니냐.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는 믿어야죠. 우리는 그래야 되는거 아녜요?"(p.49)
믿음.
어쩌면 이 장면들을 보면서 우리 사회에 과연 '어떤 믿음'이란 게 있을까 고민하였다. 근거와 논리가 있는 믿음이 아닌 무조건적이고, 광기 어린 믿음을 강요하는 사회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쪽이 아니면 저쪽이 되어야 하는 현실. 그런 믿음 앞에 근거, 논리, 이런 건 사치였다.
정치적 현실을 떠올리긴 했지만, '나'의 경우처럼 '독자인 나' 역시 그런 믿음으로 여전히 모임을 계속 하고 있는 대상이 있다. 바로 요 며칠 전에도 '근거 없는' 가짜 뉴스로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의 '믿음'은 여전히 그를 두둔하고 있었다. 사실은, 어떤 사건의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그에게 가해지는 '여론의 처벌'이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나'가 '그 여자'에게 말했듯이.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지난 이년간 저는 하루하루를 참담한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많은 분들께 심려를 끼쳤다는 것 잘 압니다. 무엇보다 저를 믿고 작업했던 스태프들, 그리고 제 작품을 사랑해 주신 관객분들께 죄송합니다. 책임을 통감합니다. 송구스러우나 영현군에게도 진심으로 사죄하려 합니다. 죄송합니다."(p.56)
김곤의 진정성 있는 사죄가 이루어졌던 GV에서 오히려 '나'는 그동안 내가 믿어왔던 것들이 모두 가짜가 되는 경험을 한다. 생각할수록 허무해지고 괴로워지는 그 날이었다.
이 소설의 제목이 왜 《길티클럽: 호랑이 만지기》일까 하던 즈음, 호랑이 만지기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치앙마이 패키지 여행에 타이거 킹덤 체험을 한다. '나'는 그곳에서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악취"(P.62)를 느낀다.
모형으로 보일만큼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호랑이 등 뒤에서 호랑이를 쓰다듬는다. '나'는 내키지 않아 망설이는데 사육사가 무서워서 그러는 줄 알고 설명을 한다. "발톱이랑 송곳니를 다 빼서 괜찮대요"(P.63) 야생의 본능을 상실한 호랑이는 호랑이일까? 무기력하게 누워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호랑이, 불편한 듯 근육을 움찔대긴 하지만, 덤벼들지 않는 호랑이를 만지며, '나'는 "어쩐지 죄를 저지르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흥분되"는 것을 느낀다. 길티클럽과 호랑이 만지기는 둘다 '죄의식을 동반한 저릿한 쾌감'을 주는 것이었다.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서 여재화는 취조실을 설계하며 어려움에 봉착한다.
"공간을 설계할 때는 요령과 경험도 필요하나 그것만을 불가결이라 할 수는 없었다. 불가결은 상상력이었다. 무형의 공간에 선을 더하고 면을 채우고 종국에는 인간까지 집어넣는 일. 그곳에서 살아갈 인간을 위한 자문자답은 기본이거니와 미학과 독창성까지 살리는 일. 그것이 건축가가 갖추어야 할 불가결이었다. 한데 이 취조실은 채우면 채울수록 공허함만 커졌다."(P.180)
여재화는 자신의 순수했던 시절을 떠나보내고, 이제는 세속이나 명욕 같은 불순물만 남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동조의 반응 정도만 기대하며 푸념을 하던 여재화는 구보승의 대답을 듣고 당황한다. 구보승은 본인이 도면을 수정해보겠다는 것이다.
구보승은 창문을 모조리 지운 뒤 사견을 전한다. "제 생각에, 이 공간엔 창을 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피조사자가 유리를 깨고 밖으로 나갈 가능성도 있고 자칫 비명이 새어나갈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희망이 생기잖습니까. 죽고자 하는 사람도 빛 속에선 의지와 열망을 키웁니다. 살고 싶다는 마음을 품을 수도 있고 흔들렸던 신념이 굳건해질 수도 있죠."(P.181)
여재화는 빛이 사람의 마음을 두드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한줌도 안 될 인간다움이나마 지킬 수 있다면 지킬 수 있도록 창을 넣었다. 물론 취조실에서 조사를 받는 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내 생각엔) 그 공간을 설계하고 있는 여재화, 본인을 위한 의미가 컸다.
여재화는 삼층 설계를 구보승에게 맡긴다. 제자를 위하는 마음에서였다기보다, 제자의 공을 가로채기 위한 마음과,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한 속셈이었다. 구보승은 결과적으로 폭이 좁은 수직창을 배치하였는데, 희망이 인간을 잠식시키는 가장 위험한 고문이라는 걸 의도한 배치였다. 여재화는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인간'이라고 가르쳤고, 건축은 인간을 위한 공간이 되어야한다고 말했지만, 결과적으로 구보승이 만든 건 인간의 희망을 짓밟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가 원하는 취조실이라는 공간 건축을 수락하는 순간부터 여재화가 말하는 '인간을 위한 건축'이라는 개념은 허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애초에 목적 자체가 인간성을 말살하는 것인데, 그곳의 햇볕이 어떻게 인간의 희망을 붙들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을 위한 건축이 진짜 건축이라면, 여재화가 수주받은 그 건축은 가짜 건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여재화의 건축물이 아닌 구보승의 건축물로 이름 붙여졌더라도 말이다.
《잉태기》를 읽는다. 이 소설이 내게 어떤 울림을 줬다기보다 육아와 자녀교육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다시 한번 돌아보라고 권하고 싶은 소설이다.
"미안해하지도 겸연쩍어하지도 않고 내 돈을 거리낌 없이 쓰는 아이. 나는 이것을 사치라 생각지 않는다. 이욕도 아니지. 이 아이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누릴 뿐이다. 자연스럽고 기껍게."(P.244)
서진의 엄마는 이혼한 딸의 출산을 도와주기 위해 괌에 있는 병원을 정해준다. 삼십년 전만 해도 돈만 있으면 뉴욕으로 출산원정을 갈 수 있었는데, 시부가 매섭게 반대하고 한푼도 보태주지 않을거라 하는 바람에 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니 내 딸은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엄마는 서진이 시부, 그러니까 서진의 할아버지와 서진이 잘 지내는 것이 마땅찮다. 서진이라는 이름이 있는데도 복이라고 부르는 사람. 시모는 시부를 일생 부모 정 못 받고 살아온 사람이라며 서진의 엄마와 시부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아가, 난 말이다, 결핍이 집착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애정도 적절히 내어줄 줄 알아야해.. 아가, 넌 저 양반처럼 살지 마라. 저 양반은 안 닮았으면 좋겠어."(P.273)
이 소설에서 시모는 딱 저 정도 등장하지만, 시부와 며느리인 서진엄마를 가장 잘 파악했다고 생각한다. 본인의 결핍이 내 핏줄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게 될 것을 경고한 것이다. 둘 다 서진이를 위한 것이라 하지만, 자신의 출산조차 엄마와 할아버지의 의견에 이리 왔다 저리갔다 하는 서진을 보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 사이에서 외줄타기하듯 살아왔을 서진이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한편으로는 그러한 상황을 본인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며 살아온 영악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공항에서 두 어른이 싸울 때, 양수가 흘러 고통을 호소하는 서진이의 외침은 그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다.
나는, '나'여야 한다. 서진이에게 준 사랑을 두 사람은 진짜라 여겼겠지만, 결국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나 진짜였지, 서진이에게는 가짜였다. 공항에서의 싸움 씬 뒷 장면을 상상해본다. 아무래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