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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토끼, 커피, 눈풀꽃
베티나 비르키에르 지음, 안나 마르그레테 키에르고르 그림, 김영선 옮김 / JEI재능교육(재능출판) / 2019년 11월
평점 :
어느새 '치매'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고, 언젠가는 나에게도 다가올 질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서 치매 보험도 들고, 나를 간병할 누군가를 위해 간병 보험도 들었다. 물론 보험이 전부는 아니다. 치매에 걸리지 않고 생을 마감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시도해보고 있다.
병이라는 것이 내가 대비한다고 해서 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조금씩 생활을 바꿔가고 있다. 도서관에서 연이어 치매에 관한 그림책을 읽는다. 누구나 가족 중에 치매 진단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한번 쯤은 고민해보면 좋겠다.
오늘 읽은 그림책은 [잃어버린 토끼, 커피, 눈풀꽃]이다. 제목이 독특하다 생각했다. 눈풀꽃은 어떤 꽃인지 잘 모르겠다. 표지를 본다.
이 그림책에는 '새싹'이라는 별명을 가진 아이와 카이 할아버지, 게르다 할머니가 나온다. 새싹이는 할아버지 집에 자주 놀러 가는데, 그 집에는 햇빛이 잘 드는 온실이 있고, 카이할아버지는 123가지나 되는 꽃을 키우고 있다. 그 꽃의 학명을 다 외우고 있을 만큼 할아버지의 기억력은 좋다.
온실에서 할아버지와 새싹이가 마주 보고 있는 장면은 따뜻하다.
할아버지는 커피향을 좋아하고, 할머니는 십자말풀이를 좋아한다. 할머니가 십자말풀이를 하다가 '이른 봄에 피는데 눈이 내려앉은 것처럼 생긴' 눈풀꽃(갈란투스 니발리스)이라는 단어를 적는다. 세 사람이 모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여유있는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다정스럽다.
또 할아버지와 새싹이는 퍼줄 맞추기도 좋아한다. 눈 속에 있는 토끼 퍼즐 1,000조각 짜리를 맞추며, 어린 시절 키웠던 새싹이라는 토끼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처음 부분을 읽어가는 동안, 이 그림책의 제목에서 나온 눈풀꽃, 커피, 토끼를 모두 찾았다. 그러나 제목에서는 이것들을 잃어버린다. 뒷 내용이 살짝 짐작이 간다. 어느 날 할아버지는 십자말 풀이를 하다 학명은 커녕 꽃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할아버지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눈치 챈 사람은 나 뿐이었어요. 마치 할아버지에게서 낱말들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어요.
시간이 갈수록 할아버지에게서는 더 많은 낱말들이 떨어지고, 실수도 잦아지고, 창밖만 오도카니 바라보는데도, 할머니는 그저 할아버지가 따분한가 보다 생각한다. 할아버지의 온실의 꽃들이 모두 시들시들해지고나서야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상태를 눈치챈다. 한밤중에 토끼를 찾아 나왔다가 무엇을 하러 나왔는지 잊어버린 채 앉아있던 할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날 이후 할머니와 새싹이는 할아버지의 행동을 보완해주기 시작한다.
앞서 읽었던 그림책에서도, 치매환자가 된 할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고 기억을 일깨워주었는데, 이 그림책에서도 그런 장면이 나온다. 그러니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결혼 사진이다.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토끼를 선물한다. 그 토끼의 이름은 새싹이다.
이 그림책 속 할아버지는 치매에 걸려 낱말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해야 할 일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좋았던 기억과 경험을 이용하여 대화하고 교감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치매 환자들은 최근 기억인 '단기 기억'은 잊어버리지만, 오래 전 기억인 '장기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그래서 그 기억 중에서도 좋았던 기억, 긍정적인 기억을 되살려서 기억력을 향상시키고, 정서적 안정을 찾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어린이는 노인들과 자연스러운 관계를 만드는 일이 어른들보다 더 쉽다고 한다. 그래서 자녀들보다는 손자 손녀와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오는 것 같다.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사진, 편지, 그림 엽서, 공책, 일기 등을 이용하면 좋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것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함께 기억을 떠올리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찾아보아야 한다.
만약 나라면, 내 주변 사람들이 나와의 관계를 떠올릴 수 있는 자료로 블로그나 인터넷 속에 남아있는 흔적들을 이용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과거의 기억과 함께 남아 있는 물건들을 이용하는 것도 필요하다.
"치매 환자는 증세가 나빠질수록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점점 더 잃게 되므로, 이에 대비해 주변 사람들은 의사소통 기술을 더욱 많이 기르고 발전시켜야 합니다."라고 그림책 뒤에서 설명하고 있다. 치매를 앓는 사람의 개인적인 물품도 좋지만, 과거의 물건이나 공식적인 기록 자료 등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이제는 남의 일 같지 않은 치매 환자들의 이야기라, 그림책의 내용이 꽤 와 닿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