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곡미풍 -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
위화 지음, 백도라지 옮김 / 푸른숲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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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책은 『허삼관 매혈기』를 읽었고, 그 다음은 기억에 없다. 


이 책을 읽은 다음, 다른 책을 더 읽어볼 마음은 가졌으나 읽지 않았던 것 같다.


​『산곡미풍』은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이 아니라 위화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만나는 책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과 부모, 고향, 병원에서 보낸 시간, 가족과 함께한 일상처럼 아주 개인적인 기억들이 이어진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오래된 기억을 읽고 있는데 자꾸 내 기억이 따라 나왔다. 나이가 든다는 건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경험을 계속 쌓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이미 지나온 시간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 것. 그때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전혀 다른 의미로 돌아오는 것.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의 풍경이나 그때 먹었던 음식, 함께했던 사람들, 아무 생각 없이 주고받았던 말 같은 것들 말이다. 당시에는 그것들이 이렇게 오래 남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살아오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일은 따로 있었는데, 막상 시간이 지나고 나니 아주 사소했던 순간들이 더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좋은 기억만 그런 것도 아니다. 힘들었던 일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 다시 생각하면 그때와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그래서 『산곡미풍』을 읽는 동안 위화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자꾸 내가 살아온 시간을 생각했다. ‘산곡미풍’, 골짜기에 부는 산들바람이라는 제목도 책을 다 읽고 나니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을 바꾸는 것이 언제나 거창한 사건만은 아닐 것이다. 어느 날 불어온 바람처럼 아주 사소한 기억 하나가 불쑥 찾아와 오래전의 나를 만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나는 일은 결국 지금의 나를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에게도 어느 날 문득 불어온 바람 하나에 되살아날 오래된 풍경들이 있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이 책에서 2024년 4월 10일자로 쓰여진 [청춘이 없다]를 다시 한번 읽어본다. 베이징에 와서 가장 매료된 점이 "난방기"였다고 한다. 추운 겨울날 얼어붙은 손을 불어가며 글을 쓰던 작가의 과거는 베이징에 와서 본 난방기가 꽤 인상깊었던 것이다. 


​초대소의 2인 1실을 사용하던 천홍과 친구네 집 빈방에서 지내던 위화가 야간 산책 때 울긋불긋 화려한 커튼을 다양하게 보았던 기억을 풀어낸다. 낮에는 꾀죄죄했지만 밤이 되면 불 켜진 창에 걸린 커튼이 화려하게 보였던 것이다. 위화와 천홍은 커튼에 비친 사람이 부러웠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집이 있었지만 그들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서로를 위로했는데 "우리는 집이 없어도 청춘이 있잖아."(p.241)라고...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지금 우리는 집이 생겼지만, 청춘이 없다."(p.241)라고.


나도 얼마 전까지는 내 집이 없었다. 지금도 물론 3분의 2 이상이 은행 지분인 집이지만, 자기 집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지 알고 있다. 옛 시절을 살았던 어르신들이, 화려한 야경을 내려다볼 때 "저 많은 불빛으로 반짝이는 집이 있는데, 저 안에 왜 내 집은 없을까"라고 읖조리리던 말들이 겹쳐 떠오르는 것이었다. 


어쩌면, 위화의 이 산문집은 그 시절을 조금이라도 겪었던 우리 또래에게 위로가 되는 글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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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을 오래 한 사람에게 생기는 일 - 그저 모여 책을 읽었을 뿐인데 세상을 얻었다
김이경 지음 / 유유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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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많이 읽는다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유유 출판사의 책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200쪽이 넘지만 얇고 가벼워 그리 어렵게 읽을 책은 아니다. 그런데도 며칠 동안 들고 다니며 읽었다. 매주 한 권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독서모임을 나 역시 12~13년째 이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읽는 내내 우리 모임과 그 안에서의 내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며 줄을 그은 부분들을 다시 모아 보니, 독서모임의 즐거움보다 책을 읽는 사람의 태도에 관한 문장이 많았다. 책을 읽고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보다, 그 앎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지가 더 마음에 남았던 것 같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독서모임도 잘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저자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자신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책도 다른 사람을 위해 읽어야 하고, 엉뚱해 보이는 이야기나 더디게 이어지는 토론도 함께 견뎌야 하는 것이 독서모임이라고.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자기 속도로 읽는 일과, 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읽는 일은 꽤 다르다.


여기서부터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얼마나 기다려 줄 수 있을까. 내 기준에서 배울 것이 없다고 느껴지면, 그 사람과 그 자리를 너무 빨리 판단하는 것은 아닐까.


좌충우돌 종횡무진의 독서는 알았다는 기쁨보다 몰랐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어떤 것을 알았다고 생각했을 때 곧바로 전혀 다른 책을 접함으로써 내가 아는 게 없구나 깨닫는 것이다. 이것은 학자의 독서법이 아니라 교양인의 독서법이다. 앎을 축적하는 독서가 아니라 모름을 일깨우는 독서다. (P.59)



가장 오래 머문 문장이다. 나는 책을 읽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일을 꽤 좋아한다. 실용적인 책도 좋아하고, 인문·사회 분야의 책도 즐겨 읽는다. 그런데 겨우 하나를 더 알게 되었을 뿐인데 세상을 제법 이해한 것처럼 생각할 때도 있다. 책에서 얻은 지식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재단하거나, 내가 읽고 생각한 것이 더 옳다고 믿게 되기도 한다.


저자는 이런 지적 교만을 경계하기 위해 더 다양한 분야의 낯선 책을 읽었다고 한다. 지식을 늘리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잊지 않기 위해서다. 많이 읽었다는 사실이 배움의 증거가 될 수는 있어도, 겸손함이나 이해심까지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양에 관한 대목도 같은 맥락으로 읽혔다. 해박한 지식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이 아는 것에 책임을 지려는 의지도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읽은 책은 내 말과 행동에 얼마나 남아 있을까. 책 속의 좋은 문장에 공감하면서도 정작 사람을 대할 때는 그 문장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독서모임에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문제는 우리 모임에서도 이런저런 의견이 오가는 주제다. 어떤 책을 읽더라도 이야기가 남편이나 친정·시부모님, 그리고 가장 자주 자녀 이야기로 흘러가곤 한다. 아마 비슷한 연령대의 자녀를 키우고 있어서일 것이다.


누군가의 경험은 추상적이던 책의 내용을 구체적인 삶으로 데려온다. 그러나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려면 신뢰가 필요하다. 말하자마자 평가나 충고가 돌아오는 자리에서는 솔직해지기 어렵다. 그런데 최근 우리 모임에서도 이런 분위기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며 새삼 생각했다. 그렇구나. 함께 이야기하는 데는 ‘신뢰’가 정말 중요하구나.


개인의 내밀한 사정까지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들어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마음을 열 수 있다. 반대로 그 믿음이 흔들리면, 같은 이야기조차 개인적인 신변잡기를 듣느라 귀한 시간을 쓰고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신뢰가 있다고 해서 사적인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져도 괜찮은 것은 아니다. 서로의 삶을 이해하면서도 책으로 다시 돌아오는 균형이 필요하다. 함께 읽고 이야기하는 자리는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책을 덮고 나니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보다, 읽은 뒤 다른 사람의 말을 조금 더 잘 듣게 되었는지를 묻고 싶어졌다. 내 판단을 잠시 미룰 수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지, 아는 것을 삶에서 실천하려고 애쓰는지.


그리고 우리 모임 구성원들의 면면을 떠올렸다. 지금 생긴 작은 균열이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관계를 단단하게 다지는 계기가 될지, 결국 헤어짐의 이유가 될지는 아직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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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한국어 ㅣ 오늘의 젊은 작가 42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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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급 한국어』를 읽고 바로 『중급 한국어』를 펼쳤다.

『초급 한국어』의 목차가 정말 한국어 교재 같았다면, 『중급 한국어』는 글쓰기 강좌의 커리큘럼을 따라간다. 자서전, 글쓰기의 과정과 기술, 유년, 사랑, 대화, 환상, 일상, 죽음과 애도, 고통, 합평, 작품집 만들기. 그리고 첫 수업은 ‘자서전’이다.


“오토(auto), 바이오(bio), 그래피(graphy).

오토는 자기 자신, 바이오는 삶, 그래피는 쓰는 거죠.

말 그대로 풀어 보면 자기가 삶을 쓰는 것, 이것이 자서전의 본래 뜻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하지 않나요? 자기가, 삶을, 쓰는 것. 사실 이건 자서전만의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우리가 쓰는 모든 글은 실은 자기가, 삶을 쓰는 것이니까요.

(…) 어떤 글이든 우리가 쓰는 글들은 일종의 수정된 자서전이에요. 우리가 쓰는 모든 글은.” (p.12)


소설 속 문지혁은 미국에서 돌아와 은혜와 결혼했다. 미국에서 갑자기 한국어 강사가 되었듯, 한국에서는 글쓰기 강좌를 맡게 된다. 그런데 강좌 소개글을 쓰고 커리큘럼을 짜는 일부터 쉽지 않다. 글쓰기의 고통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아, 나는 작가들은 이런 건 금방 쓰는 줄 알았다.


당시 지혁은 등단도 하지 못했고 수상도 하지 못했다.

작가가 되고 싶지만 아직 작가는 아닌 사람. 그렇다고 단순히 작가 지망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오랫동안 진지하게 글을 써온 사람. 언젠가 등단할지도 모르는 예비 작가라고 해야 할까. 그래, 애매한 사람이었다.


이 소설에는 ‘애매하다’는 말이 몇 번 등장한다. 비뇨기과에서 난임인지 불임인지 확인하기 위해 음낭 초음파 검사를 받을 때도 그렇고, 두 권의 책을 냈지만 자신을 작가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할 때도 그렇고, 미국에서 돌아와 자신의 위치를 설명해야 할 때도 그렇다.


무엇이라고 딱 잘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상태.

그리고 그런 애매함은 불확실함을 더 크게 만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지혁의 글쓰기와 임신, 그리고 육아가 참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갖고 싶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는 사람.

작가가 되고 싶지만 작가가 되지 못하는 사람.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한다고 해서 반드시 결과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생명도 그렇고 글도 그렇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둘 다 무언가를 만들어 세상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다. 한쪽에서는 생명을 만들려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야기를 만들려고 한다. 어느 쪽이든 마음먹은 대로 만들어지지 않고, 기다려야 하고, 실패하기도 하고, 다시 시도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글을 쓰는 것과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생각보다 많이 닮아 있다.

내가 만들어 냈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

시작했다고 끝까지 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것.

그리고 세상에 내놓은 뒤에는 더 이상 온전히 내 것이 아닌 것.


『중급 한국어』는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동시에 삶을 이야기한다. 지혁은 글쓰기에 관한 여러 이론을 자기만의 언어와 이야기로 풀어 가르친다. 그중 특히 재미있었던 것이 ‘대화’에 관한 수업이다.


서사가 있는 글은 크게 서술, 묘사, 대화로 구성되는데, 대화는 인물의 성격과 서로 다른 입장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말은 때로 과장하고 숨긴다. 그래서 사람의 진짜 감정과 본심은 말보다 행동과 몸짓에서 더 잘 드러날 때가 있다. 좋은 대화는 그 사람이 하는 말만으로도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어야 하고, 서로 다른 입장과 갈등 역시 드러나야 한다. 반대로 정보 없이 기계적으로 주고받는 말은 ‘대화’라기보다 ‘회화’에 가깝다.


나는 이 부분에서 회화와 대화를 이렇게 구분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외국어 교재에서는 회화를 배운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네,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실제 세상에 나가면 사람들은 교재처럼 말하지 않는다. 내가 예상한 질문을 해주지도 않고, 내가 외운 문장에 맞춰 대답해 주지도 않는다. 우리는 회화를 배웠지만 현실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사람과 ‘대화’를 해야 한다. 그리고 작가는 이런 ‘진짜 대화’를 가장 깊이 경험할 수 있는 방법 하나를 알려준다.


“결혼을 하시면 됩니다.”


이쯤 되면 글쓰기 강좌인지 인생 강좌인지 모르겠다.


소설에는 코로나 시기의 상황도 등장한다. 은혜와 은채는 감염되고, 그들과 함께 있었던 지혁은 감염되지 않는다.


얼마 전에 읽었던 다른 작가의 소설에서는 작가가 ‘코로나’라는 단어를 작품에 차마 올릴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유례없는 대규모 감염 상황은 우리 사회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렇다면 그것 역시 이제 소설의 배경이자 소재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어쨌든 그런 시간을 지나면서 지혁은 삶이 자신이 원했던 방향으로, 계획했던 순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계속 경험한다.


아이를 원한다고 아이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글을 쓴다고 작가가 되는 것도 아니다. 계획을 세우고 준비한다고 해서 삶이 그 계획을 따라와 주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지혁은 어느 순간 지금까지 쓰려고 했던 ‘그럴듯한 소설’을 그만두기로 한다.

그리고 그냥 자기 이야기를 쓰기로 한다.


『중급 한국어』에서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던 지혁은 그렇게 비로소 자신이 써야 할 글이 무엇인지 알게 된 듯하다. 어쩌면 글쓰기는 삶을 멋지게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설명되지 않는 삶을 견디기 위해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쓰지 않았다면 그저 지나가 버렸을 시간들이 문장이 되고, 그 문장들이 모여 한 사람의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지혁은 이렇게 쓰기 시작한다.


“2012년 여름에 나는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p.233)


그런데 이 문장, 낯설지 않다. 그가 쓰기 시작한 이야기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초급 한국어』다. 『초급 한국어』를 읽고 『중급 한국어』를 읽었는데, 『중급 한국어』의 마지막에서 다시 『초급 한국어』의 처음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첫 페이지에 있던 문장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쓰는 모든 글은 일종의 수정된 자서전이다.


지혁에게 글쓰기 수업은 다른 사람에게 글 쓰는 법을 가르치는 시간이었지만, 어쩌면 동시에 자신의 삶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배우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떤 일은 실패했고, 어떤 것은 얻었다가 잃었으며, 어떤 순간은 무엇이라고 이름 붙여야 할지조차 애매했다. 그래도 그 시간을 살아냈고, 결국 그것을 썼다.


자기가, 삶을, 쓰는 것.


덧붙임. 무영이는 어디로 사라진걸까? 무영이가 전해 준 그림책을 도서관에서 찾아서 읽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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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급 한국어 ㅣ 오늘의 젊은 작가 30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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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한구석에 꽂혀 있던 문지혁의 『초급 한국어』를 다시 꺼내 들었다.
누군가 한국어 강사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이야기를 듣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저 사람이 한국어를 가르치겠다고?

조금 못된 생각이라는 것도 안다. 자격증을 준비한다는데 응원부터 해줄 일이지, 누가 누구를 가르칠 자격이 있느냐고 내가 판단할 일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꽤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성스럽고 숭고한 일’에 가깝게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은 단순히 조사와 어미, 높임말과 문법을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한국이라는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처음 보여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한국어를 정확하게 알아야 하고, 한국 문화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며, 그것을 아름답고 바르게 전달할 책임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기에 ‘적당한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이것은 '과거의 나'를 아름답게 포장한 결과이기도 하다. 내가 그 직업을 갖고 있을 땐 지금처럼 한국과 한국문화가 핫한 아이템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소명처럼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초급 한국어』가 떠올랐다. 때마침, 최근에 『실전 한국어』라는 신간도 나온 것을 보아서 구입한 터였다.  

문지혁의 『초급 한국어』는 민음사의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 30번째 작품이다.
소설의 주인공 이름도 ‘문지혁’이다. 2012년 여름 미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대학 동아시아학과에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강사로 일하게 된다. 작가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한 자전적 소설이라 현실의 문지혁과 소설 속 문지혁의 경계도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난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다고요. 그걸 연결 짓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p.18)

이문장이 소설 초반에 등장하자 나는 기분이 나빠졌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 것과 한국어를 가르칠 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생 한국어를 사용하면서도 왜 ‘은/는’과 ‘이/가’를 다르게 쓰는지 외국인에게 설명하려면 막막해진다. 어떤 표현이 자연스럽고 어떤 표현이 어색한지는 알지만, 왜 그런지를 설명하지 못할 때도 많다.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과 언어를 이해하고 가르치는 능력은 같지 않다.

결국 소설 속 문지혁 역시 한국어 강사가 된 뒤 “한 번도 한국어를 가르친 적 없어서 처음부터 다 배우고 공부해야 했”(p.25)다고 말한다. 모국어라고 해서 저절로 교사가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 책의 목차는 정말 초급 한국어 교재 같다.
‘코리안 알파벳’에서 시작해 ‘안녕하세요?’, ‘저는 에런 홍이에요’, ‘어디에 있어요?’, ‘한국어를 공부해요’, ‘동생이 두 명 있어요’, ‘서점에서 친구를 만나요’, ‘서울 날씨가 참 좋지요?’ 같은 문장으로 이어진다.

한국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만나게 될 법한 문장들이다. 
그런데 문지혁은 이 단순한 문장들을 그냥 문법 수업으로 끝내지 않는다.
‘안녕하세요?’를 가르치다가 정말로 우리가 안녕한지를 묻고, 이름을 가르치다가 나는 누구인지를 생각하고, 시간을 가르치다가 삶에서 시간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우리는 왜 이토록 서로의 안녕에 집착하는 걸까. 어쩌면 그건 ‘안녕’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없는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p.39)

매일같이 하는 “안녕하세요?”라는 말도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낯설어진다.
간단한 인사 문장 하나도 상대어의 문장으로 번역을 하고 보면, 그것이 일대일로 변환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언어에는 사전적인 뜻보다 훨씬 많은 것이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람의 감정은 더더욱 그렇다.

소설 속 문지혁은 자신 안에 생긴 “뜨겁고 아리고 부끄럽고 억울한 감정”에 ‘죄책감’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는지를 고민한다.

“어떤 감정을 단어 하나로 표현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너무 무책임한 일이 아닐까?”(p.66)

우리는 무엇이든 이름 붙이면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슬픔, 사랑, 미움, 질투, 죄책감.
하지만 한 사람의 마음은 단어 하나보다 훨씬 복잡하다. 언어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게 해주는 도구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이해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도구일 수도 있다.

문지혁은 시간을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로 나누어 생각한다. 시계처럼 규칙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건을 전후로 삶이 완전히 달라져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시간도 있다. 그래서 시간을 묻는 질문도 두 가지여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몇 시예요?
그건 어떤 시간이었나요?

첫 번째 질문은 한국어 초급 교재에 나올 법하다. 
하지만 두 번째 질문은 우리의 삶에 관한 질문이다.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것은 ‘몇 시예요?’라고 질문하는 법을 가르치는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언어를 제대로 배운다는 것은 언젠가 그 언어로 누군가에게 “그건 당신에게 어떤 시간이었나요?”라고 물을 수 있게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대답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의 진짜 의미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문지혁에게 뉴욕에서의 시간은 어떤 시간이었을까.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문지혁은 한국어 강사를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한국어를 가르치던 시간도 끝이 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삶에 있던 문제들이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니다.

여자친구였던 은혜와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두 사람은 결국 어떤 관계로 남게 될까. 뇌졸중으로 쓰러진 엄마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토록 바라던 소설가로서의 삶은 또 어떻게 되었을까.

소설은 이런 질문에 하나하나 친절한 답을 달아 주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에 그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모국어의 단어 하나를 영원히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그게 엄마일거라 생각한다. 

생각해 보면 삶의 질문도 좀처럼 친절한 답을 주지 않는다.
누군가와의 관계가 끝났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 삶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어떤 시간을 지나왔다고 해서 그 시간이 내 안에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가족의 병이나 죽음, 사랑의 끝, 이루지 못한 꿈 같은 것에는 정답이라고 부를 만한 대답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 소설의 끝에서 다시 ‘그건 어떤 시간이었나요?’라는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누구인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지나온 시간은 내게 무엇이었는지, 나는 잘 지내고 있는지.

어쩌면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이 『초급 한국어』인지도 모르겠다. 배우기는 쉬워도 제대로 대답하기는 어려운 말들. 우리는 평생 한국어를 사용하며 살아왔지만, 어쩌면 여전히 그 말들의 의미를 배우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이 책의 가장 초급다운 질문을 나에게도 한번 해본다.

안녕하세요?
당신은 정말, 안녕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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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열심히 산다 ㅣ 오늘의 젊은 작가 58
김화진 지음 / 민음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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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가 나타나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한다면 나는 무엇을 빌까.

돈, 건강, 젊음, 성공.  

당장 생각나는 것은 많지만 막상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쉽게 말하지 못할 것 같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을 이제는 너무 잘 아는 나이가 되었고, 하물며 상대가 악마라면야. 무언가를 얻는 대신 내가 내놓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할 것 같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소원을 빌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김화진의 『악마는 열심히 산다』에는 정말 악마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악마가 생각보다 무섭지 않다. 인간을 파멸시키겠다는 거대한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세상을 뒤집어 놓을 만큼 대단한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저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인간을 유혹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건드리며 제법 열심히 자기 일을 한다.


그래서 제목 그대로다.

악마는 열심히 산다.


작가의 북토크를 듣다가 재미있었던 것은 이 악마에게 작가 자신의 직장인 시절 마음이 어느 정도 들어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

엄청나게 승진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대단한 업적을 남기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일을 대충하는 것은 또 스스로 견디기 어렵다. 무언가를 해냈으면 누가 잘했다고 해주면 좋겠고,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기 전에 자신이 생각하는 기준 이하로 업무 성과가 떨어지는 것이 더 괴롭다.


듣고 있으니 너무나 익숙한 마음이다.

직장인이 다 그렇지 뭐.

대단한 야망이 있어서 매일 출근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일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기왕 하는 일이니 잘하고 싶고, 잘했다면 알아줬으면 좋겠다.


​

악마도 마찬가지다.

거대한 야망은 없어도 자기가 맡은 일은 한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성과도 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의 악마가 묘하게 인간적이다.


혼자 있고 싶다는 말


이 소설은 코로나 시기의 경험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처음에는 코로나라는 말을 소설에 쓰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가 실제로 겪은 일이지만 오히려 너무 현실적이어서 이야기로 만들기가 어려웠다고.


약속을 취소하고 또 취소하다가 정말 이것만큼은 취소할 수 없겠다 싶어 조심조심 나갔는데 하필 그날 감염되는 것처럼, 그 시기에는 우리가 준비하고 대비한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색하게 만드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현실에는 소설처럼 그럴듯한 개연성이 없다.

왜 하필 나에게, 왜 하필 오늘, 왜 하필 지금인가 싶은 일들이 그냥 생긴다.

그러다 작가는 현실을 꼭 현실과 똑같은 모습으로 그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찾아낸 존재가 ‘악마’였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악마 하나를 현실에 집어넣고 나니, 오히려 자신이 지나온 현실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 가영이 있다.

가영은 원래도 혼자 있기를 선택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어쩔 수 없이 혼자가 되어야 했던 코로나 시기를 지나면서 작가는 자신이 입버릇처럼 했던 “혼자 있고 싶다”는 말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혼자 있는 시간이 내가 원했던 것보다 조금 길어지면 누군가가 그리워진다. 말 붙일 사람을 찾게 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과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어 사는 것은 다른 일이었던 거다.


요즘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다.

“혼자 놀고 싶어.”  

“나는 혼자라서 좋아.”  

“혼자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실제로 혼자 밥을 먹고, 혼자 공연을 보고, 혼자 여행을 하는 것도 꽤 좋아한다.

그런데 또 독서모임 사람들과 만나 책 이야기를 하고 떠드는 시간은 즐겁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좋다.

그러니 내가 정말 원했던 것은 ‘혼자’였을까.

생각해보면 사람이 싫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저 나를 귀찮게 하는 것들, 신경 써야 하는 것들, 끊임없이 반응하고 대답해야 하는 것들에서 조금 벗어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혼자이고 싶은 것과 외롭고 싶은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니까.

​

원하는 것은 꼭 필요할 때 오지 않는다


​간절히 기다렸던 것은 끝내 오지 않기도 하고, 한참을 돌아서 오기도 한다. 이제는 별로 필요하지 않은데 싶은 순간 뒤늦게 찾아오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가영에게 악마가 찾아온 것도 그런 순간이다.

악마는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하는데 정작 가영에게는 특별히 원하는 것이 없다.

그래서 가영이 내놓은 소원이 ‘그냥 잘 죽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악마는 그 말을 자기 식대로 해석한다.

지금 상태로 죽는 것은 잘 죽는 것이 아니니, 잘 죽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그리고 그동안 어차피 사용하지 않을 가영의 몸을 자기가 좀 쓰겠다고 한다.


그렇게 계약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그러니까 악마한테 소원을 빌 때는 말을 정확하게 해야 한다니까’ 하고 웃을 수도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조금 서늘하다.

가영은 정말 죽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냥 지금의 시간이 좀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너무 오래 혼자 있었고, 너무 오래 지쳐서 새로운 무언가를 욕망할 힘조차 없어졌을 때.

그럴 때 사람이 바라는 것은 대단한 행복이 아닐 수도 있다.

그냥 이 시간이 별일 없이 끝나는 것.

그 정도일 수도 있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게 되는 순간


나는 종현의 이야기도 오래 남았다.

어린 시절 악마를 만난 종현은 다른 사람의 열을 알아챌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한다.

아픈 친구를 양호실에 데려다주면서 처음으로 누군가와 단둘이 보내는 친밀한 시간을 경험했고, 그런 시간을 다시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후 종현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런데 종현은 그것을 자신의 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내가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악마에게 받은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대하는 마음. 나 이 정도면 사랑받을 수 있지 않을까?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받기에 충분하지 않나? 하고 빼기는 마음, 자신하는 마음, 그런 게 사라진 것 같아요. 포기만 남았어요. 능력이 아니면 나는 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니까요.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 줘도 그건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닐 거라고 생각하게 되죠. 그러면 사랑도 포기해 버려요. 누가 좋아져도요.”  p.42


이 문장을 읽고 나면 종현이 악마에게 빼앗긴 것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다.

능력이 아니다.

자신을 믿는 마음이다.


나 정도면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나도 누군가를 좋아해도 되지 않을까.  

나에게도 그 정도의 좋은 점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자신에게 기대를 걸어보는 마음.

그것이 사라졌다.


그래서 작가가 북토크에서 한 말도 기억에 남는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남이 주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은 자기 자신을 얼마나 믿지 못하게 되는가.

우리는 생각보다 자신의 능력이나 매력을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운이 좋아서.  

누가 도와줘서.  

상황이 좋아서.  

어쩌다 보니.


잘한 일을 두고도 이런 이유를 붙인다.

좋은 평가를 받아도 온전히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누군가 자신을 좋아해도 ‘나를 제대로 알게 되면 달라질걸’ 하고 의심한다.

그러고 보면 악마가 굳이 대단한 일을 할 필요도 없다.

“그게 정말 네 능력일까?”

그 정도의 의심 하나만 심어놓아도 된다.

그다음부터는 인간이 알아서 자기를 의심하고, 깎아내리고, 포기할 테니까.

어쩌면 이게 가장 무서운 악마의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랑이 더 일을 잘한다

이 소설에서 내가 재미있었던 부분 중 하나는 악마가 사랑을 못마땅해하는 장면이다.


“악마는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이곳저곳 찌르고 다니느라 쉴 틈이 없는데 말이야. 정작 인간들을 못나게 슬프게 만들고, 죽고 싶게 만들고, 인간들을 붕 띄우거나 나락으로 처박는 건 자꾸만 사랑이다. 악마의 몫인 걸 자꾸 사랑이 해냈다.”  p.46


읽으면서 웃었다.

그러게.

악마는 인간 하나 망가뜨리겠다고 이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는데 사랑은 별 노력도 하지 않고 사람 하나를 들었다 놨다 한다.

사랑 때문에 행복해 죽겠다고 했다가, 또 사랑 때문에 죽을 것 같다고 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을 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선택을 한다.

자신을 망치기도 하고, 상대를 망치기도 하고, 멀쩡했던 관계까지 엉망으로 만들어놓기도 한다.

악마 입장에서는 정말 억울할 만하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사랑이 자꾸 먼저 해버리니까.

그렇다고 그걸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누군가에게는 구원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집착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다시 살아갈 이유가 되었다가 또 누군가에게는 가장 깊은 상처가 된다.

같은 ‘사랑’이라는 말을 쓰는데 그 모양은 모두 다르다.


종현과 가영의 관계도 그렇다.

딱 잘라 이것은 사랑이라고 설명해주지 않는다.

종현이 겨우 자기 마음을 알아차리고 나니 이번에는 가영의 마음을 모른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내 마음을 알았다고 상대의 마음까지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하나를 해결하면 또 하나가 생긴다.

삶은 참 친절하지 않다.


결국 다시 살아야 한다


가영과 악마의 계약은 깨진다.

‘잘 죽게 해달라’는 가영의 소원은 실패한다.

가영은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살아야 한다.

밖으로 나가고,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고, 뜻하지 않은 일들을 겪어야 한다.

작가는 이것을 ‘삶의 번거로움이 다시 가영에게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표현이 참 좋았다.


삶의 번거로움.


생각해보면 살아가는 일은 정말 번거롭다.

일해야 하고, 사람을 만나야 하고, 마음에 없는 말을 해야 할 때도 있고, 오해가 생기면 풀어야 한다.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좋아했다가 상처받고, 내가 벌이지도 않은 일을 수습해야 할 때도 있다.

가끔은 정말 지친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나 싶을 때도 있다.

그런데 또 이상하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도 그 번거로운 것들 속에 있다.


누군가를 만나고,  

다음 여행을 기다리고,  

재미있는 책을 발견하고,  

별것 아닌 일에 웃고,  

맛있는 것을 먹고,  

누군가를 좋아하고,  

또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


그러고 보면 삶을 귀찮게 만드는 것과 삶을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가영은 잘 죽고 싶었지만 결국 다시 살아야 했다.

잘 죽는 데는 실패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니 그것이 정말 실패인가 싶어진다.

가영에게 다시 ‘삶의 번거로움’이 돌아왔다는 것은 그만큼 앞으로 무슨 일이든 생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또 상처받을 수도 있고, 어쩌다 사랑하게 될 수도 있다.

살아 있으면 어쩔 수 없이 그런 일들이 계속 생긴다.

그리고 우리는 또 그것들을 하나씩 겪으면서 살아간다.


조금 귀찮고,  

가끔 지치고,  

때로는 다 그만두고 싶다가도.

또 다음 날이 오면 할 일을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꽤 열심히 산다.


악마만 열심히 사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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