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번 산 고양이 비룡소의 그림동화 83
사노 요코 글 그림, 김난주 옮김 / 비룡소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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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54



사랑을 찾을 때까지 새롭게 태어난다

― 100만 번 산 고양이

 사노 요코 글·그림

 김난주 옮김

 비룡소 펴냄, 2002.10.14. 8500원



  고양이 한 마리가 태어납니다. 우리 집 광에서도 고양이가 태어나고, 너른 들에서도 고양이가 태어나며, 깊은 숲에서도 고양이가 태어납니다. 골목에서도 고양이가 태어나고, 여느 살림집에서도 귀염둥이 짐승이 되는 고양이가 태어나며, 바닷가에서도 고양이가 태어납니다.


  사람들 손을 타면서 한집에서 사는 고양이는 ‘귀염둥이 짐승(애완동물)’입니다. 한집에서 살기에 귀염을 받습니다. 한집에서 함께 살지 않고 들이나 길에서 사는 고양이는 들짐승이나 길짐승입니다. 이러한 들짐승이나 길짐승인 고양이라면 ‘들고양이’나 ‘길고양이’라고 해야 할 테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들고양이나 길고양이를 으레 ‘도둑고양이’로 여깁니다. 사람이 먹을 것을 몰래 훔쳐 간다고 여겨요.



백만 번이나 죽지 않은 고양이가 있습니다. 백만 번이나 죽고 백만 번이나 살았지요. (2쪽)



  사노 요코 님이 빚은 그림책 《100만 번 산 고양이》를 아이와 함께 읽습니다. 이 그림책에 나오는 고양이는 ‘들고양이’이고 싶으나, 자꾸자꾸 ‘사람과 함께 지내는 집’에서 태어납니다. 전쟁을 좋아하는 임금님 곁에서 태어나면서, ‘아, 전쟁도 사람도 싫어!’ 하는 마음이 싹트고, 술만 마시면서 고기를 낚는 고기잡이 곁에서 태어나면서 ‘아, 술도 사람도 싫어!’ 하는 마음이 싹틉니다. 마술사 곁에서 태어난 뒤 몸이 반 토막으로 잘려 죽기까지 ‘아, 눈속임도 사람도 싫어!’ 하는 마음이 싹트고, 철없는 아이 곁에서 태어나서 장난감처럼 부려지다가 죽으며 ‘아, 사람은 지긋지긋하게 싫어!’ 하는 마음이 싹터요.


  그런데 고양이 한 마리는 자꾸 태어납니다. 또 태어납니다. 게다가 사람 곁에서 거듭거듭 태어납니다. 도둑하고도 함께 살고, 할머니하고도 함께 삽니다. 이밖에 백만 번에 이르도록 사람 곁에서 다시 태어나니, 그야말로 사람 꼴은 쳐다보기도 싫습니다.



어느 날 고양이는 여자 아이 등에서 포대기 끈에 목이 졸려 죽고 말았습니다. 머리가 덜렁거리는 고양이를 안고 여자 아이는 온종일 울었습니다. 그리고 고양이를 뜰 나무 밑에다 묻었습니다. (14쪽)




  사람은 몇 번쯤 다시 태어날까요? 그림책에서는 고양이 한 마리가 백만 번이나 다시 태어나서 새로운 삶을 누리는 이야기가 흐르는데, 사람은 몇 번쯤 다시 태어날까요? 고양이는 다시 태어나면서 ‘예전에 누리던 삶’을 하나도 안 잊습니다. 그러니까 백만 가지 삶을 머릿속에 품으면서 사는 고양이입니다.


  아마 사람도 ‘그림책에 나오는 고양이’처럼 수도 없이 다시 태어나리라 느껴요. 다만, 사람은 ‘그림책에 나오는 고양이’와 다르게 ‘예전에 살던 모습’을 까맣게 잊어버리지 싶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우리도 백만 번이나 천만 번, 때로는 억만 번씩 다시 태어나서 살는지 모르지만, 막상 새로 태어날 적에는 옛일은 모조리 잊으리라 느껴요.


  그러면, 왜 자꾸 다시 태어날까요? 예전 삶에서 이루지 못한 뜻이 있기 때문일 테지요. 그러면, 왜 예전 삶에서 이루지 못한 뜻이 있을까요? 저마다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짓고 싶은 삶을 지으면 될 텐데, 이래저래 바쁘거나 힘든 나머지 정작 꿈으로는 나아가지 못한 삶이었기 때문일 테지요.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 곁으로 다가가, “난 백만 번이나 죽어 봤다고!” 하고 말했습니다. 하얀 고양이는 “그러니.” 하고만 대꾸할 뿐이었습니다. (20쪽)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할 수 없어서 못 하는 일’이라기보다는 ‘할 마음이 없어서 못 하는 일’이 있다고 느낍니다. ‘할 수 없다’기보다는 아무래도 ‘하려는 마음을 스스로 일으키지 못한다’고 해야지 싶습니다.


  삶이 즐거웁도록 ‘신나는 일’을 찾을 노릇입니다.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삶이 신나지 않아요. 돈을 벌어야 한다면 ‘삶이 넉넉하’도록 벌어야지, 그저 많이 벌기만 해서는 재미가 없습니다.


  이야기가 피어나고 노래가 흐르는 삶일 때에 즐겁습니다. 가슴에 품은 꿈으로 한 발짝씩 다가설 적에 웃음이 터져나오는 삶이 됩니다. 가슴에 꿈을 품지 않으면 그야말로 웃을 일이 없고, 가슴에 꿈이 없으면 돈을 아무리 많이 거머쥐어도 ‘이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쓰며 삶을 누릴 때에 아름다운가’ 하는 생각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어느 날 하얀 고양이는 고양이 곁에서 조용히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고양이는 처음으로 울었습니다.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또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고양이는 백만 번이나 울었습니다. (28쪽)




  그림책 《100만 번 산 고양이》를 돌아봅니다. 백만 번째 삶을 누리던 고양이는 이제 사람 곁에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대단히 홀가분합니다. 그런데, 홀가분하기는 해도 재미있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재미없는 나머지 다른 들고양이한테 “난 백만 번이나 죽어 봤다고!” 하는 말을 외치면서 자랑을 합니다.


  백만 번이나 죽어 본 일은 자랑이 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죽어 본’ 일이 얼마나 자랑스러울까요? 우리가 자꾸 다시 태어난다면 ‘죽어 본 일’을 이야기하기보다 ‘살아 본 일’을 이야기해야지 싶어요. ‘살아서 누린 기쁨’을 이야기해야 할 테지요.


  백만 번이나 죽고 다시 산 아버지는 제 자랑을 귀여겨듣지 않는 하얀 고양이를 만나며 마음이 바뀝니다. 백만 번이고 천만 번이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하얀 고양이 앞에서 ‘백만 번 산 고양이’는 ‘옛날 옛적’이 아니라 ‘오늘 여기’를 처음으로 생각합니다. 그동안 바보스레 살았구나 하고 깨달을 뿐 아니라, 백만 번이나 죽고 산 뜻을 조용히 깨달아요.


  참말 왜 백만 번이나 죽고 살았을까요? 백만 번이나 죽고 다시 태어나는 동안 ‘무엇을 하고 싶은가’ 하는 대목은 생각하지 않고 ‘싫어!’ 하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만나기만 했지요. 백만 가지나 되는 삶을 보내고서야 비로소 ‘나다운 삶’을 마주할 수 있는 셈이에요.



그리고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습니다. (30쪽)



  사랑을 찾은 사람은 굳이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사랑을 찾은 사람은 새로운 별에서 태어날 수도 있으나, 홀가분한 바람이 되어 어디이든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어요. 아니, 사랑을 찾은 사람이라면, 이제 이 몸은 고요히 내려놓고서 너른 마음이 되어 온누리를 포근하게 감싸면서 어루만지는 바람이 되리라 느낍니다.


  사랑스러운 바람이 되어 나무와 풀을 키웁니다. 사랑스러운 바람이 되어 우리가 숨을 쉴 수 있게 해 줍니다. 사랑스러운 바람이 되어 하늘빛이 맑고 새파랗도록 가꾸어 줍니다. 사랑스러운 바람이 되어 이 지구가 어여쁜 푸른 별로 거듭나도록 북돋웁니다.


  삶은 사랑으로 꿈을 지을 적에 즐겁습니다. 삶은 바로 사랑으로 꿈을 짓기에 아름답습니다. 4348.8.12.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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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대장 존 비룡소의 그림동화 6
존 버닝햄 지음, 박상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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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53



한국 사회에서 학교는 ‘지옥’일 뿐인가?

― 지각대장 존

 존 버닝햄 글·그림

 박상희 옮김

 비룡소 펴냄, 1996.11.10. 8500원



  우리 집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지 않습니다. 그러니 ‘학교에 늦는다’는 일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 집은 시골마을에 있기에 ‘버스가 지나가는 때’에 맞추어서 마을 어귀에 나가지 않으면 ‘버스를 놓칩’니다. 시골버스는 두 시간에 한 번 지나가는데, 제때에 맞추지 않고 ‘늦’으면 버스를 탈 수 없어요. 읍내에서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적에도 제때를 살피지 않으면 집으로 못 옵니다. 아니면 택시를 불러서 몇 곱에 이르는 찻삯을 치러야 합니다.



한참을 가는데 하수구에서 악어 한 마리가 불쑥 나와 책가방을 덥석 물었습니다. 존은 책가방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지만 악어는 놓아 주지 않았습니다. (4∼5쪽)



  학교라는 곳은 배우는 곳입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학교에 있는 어른들한테서 배웁니다. 학교라는 곳은 가르치는 곳입니다. 학교가 일터인 어른들은 학교로 오는 아이들한테 이것저것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교과서를 바탕으로 어른한테서 이야기를 들으며 배웁니다. 어른들은 교과서를 책상에 펼쳐놓고 이야기를 들려주며 가르칩니다. 아이들이 배우거나 어른들이 가르치는 것은 모두 교과서에 나옵니다.


  그러고 보면, 교과서만 들여다보면 될 노릇이라고도 할 만하기에 굳이 학교를 다녀야 하지 않습니다. 학교를 다니지 않고 교과서만 떼어도 ‘학력’은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삶을 배운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어른으로 있는 교사가 보여주는 몸짓’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배웁니다. 교과서는 혼자서 얼마든지 읽으면서 익힐 수 있어요. 교과서에 없는 삶과 사회와 사람과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바로 ‘어른으로서 뭔가 가르치려고 하는 교사’한테서 배웁니다.




“이 동네 하수구엔 악어 따위는 살지 않아! 넌 나중에 학교에 남아서 ‘악어가 나온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또, 다시는 장갑을 잃어버리지 않겠습니다.’를 300번 써야 한다. 알겠지?” (9쪽)



  존 버닝햄 님이 빚은 그림책 《지각대장 존》(비룡소,1996)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학교에 안 다니고 집에서 노는 우리 집 아이들로서는 이 그림책을 보면 ‘학교는 참 무섭구나!’ 하고 여길 만합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교사가 ‘괴물처럼 이빨이 뾰족뾰족하고 손가락이 흐늘흐늘 길다랗’거든요. 이런 무시무시한 몸으로 아이들을 윽박질러요. 아이들이 하는 말은 하나도 안 듣고, 그저 ‘어른 권위’만 무섭게 내뱉어요.


  《지각대장 존》에 나오는 아이는 언제나 스스로 겪은 대로 말합니다. 《지각대장 존》에 나오는 어른은 언제나 ‘아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습니다. 아무래도 교칙만 따지고 교과서만 살피겠지요. 교칙을 어기는 아이가 못마땅하고 교과서대로 움직이지 않는 아이가 미울 테지요.



존은 구석에 돌아서서 400번 외쳤습니다. “다시는 사자가 나온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바지를 찢지 않겠습니다.” (18쪽)



  그림책에 나오는 교사는 아이한테 자꾸 ‘벌’을 줍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괴물처럼 생긴 교사가 아이한테 내리는 벌은 ‘주먹다짐’이나 ‘손찌검’이 아닙니다만, ‘아이 괴롭히기’입니다. 이는 ‘아이 사랑’일 수 없습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교사는 아이가 ‘학교에 늦은’ 일을 놓고 차분히 앞뒤를 따지지 않습니다. ‘늦으면 무엇이 잘못인가’를 아이가 잘 알거나 깨닫도록 도우려고 하지 않고 그저 윽박지릅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뭔가 ‘규칙이나 교과서대로 따르지 않을 적’에 괜히 골부터 내거나 짜증부터 내거나 이맛살부터 찡그리는 어른들 모습이라고 할 만합니다. 아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몸짓이며, 아이 눈높이에서 함께 실마리를 찾으려는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는 몸짓입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는 무엇을 배울까요? 바로 이런 윽박지름을 배웁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는 참말 무엇을 배우나요? 언제나 이런 꾸짖음을 배웁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는 그야말로 무엇을 배우는가요? 어제나 오늘이나 이런 바보짓을 배웁니다.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 난 지금 커다란 털복숭이 고릴라한테 붙들려 천장에 매달렸다. 빨리 날 좀 내려 다오.” “이 동네 천장에 커다란 털복숭이 고릴라 따위는 살지 않아요, 선생님.” (30∼31쪽)



  그림책 《지각대장 존》을 그린 ‘존 버닝햄’ 님은 어릴 적에 ‘지각대장’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림책 ‘존’하고 그림책 작가 ‘존’은 같은 사람이리라 싶습니다. 아무튼, 아이는 어른이 늘 저한테 보여주던 대로 따라합니다. 딱히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여느 때에 어른이 저한테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이야기꽃을 피웠으면, 아이도 어른한테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여느 때에 어른이 저한테 웃음짓는 노래를 들려주었으면, 아이도 어른한테 웃음짓는 노래를 들려주어요.


  《지각대장 존》에 나오는 아이는 윽박지름하고 벌주기만 압니다. 사랑이나 이야기를 모릅니다. 아니, 사랑이나 이야기는 가슴속에 깊이 억눌린 채 못 깨어났다고 해야겠지요.


  오늘날 한국 사회를 돌아보면, 아주 많은 어린이와 푸름이가 입시지옥에 짓눌린 나머지 사랑도 이야기도 꿈도 꽃피우지 못하면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녀야 합니다. 대학교에 붙지 않고서야 가슴을 활짝 펴지 못합니다. 대학교에 붙더라도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붙어야 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교조차도 ‘몇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대학교에 붙어야 합니다.


  대학교 졸업장이 없는 아이라면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대학교 졸업장이 없이는 전문직 일자리를 아예 얻을 수 없다고 할 만합니다. 입시지옥으로 아이들은 늘 짓밟히고, 입시지옥을 헤쳐도 아이들은 자꾸 짓눌리며, 대학교를 마치거나 대학교를 안 다녔어도 아이들은 그예 짓이겨지는 삶에 휩쓸립니다.


  부디 아이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어른이 늘기를 빕니다. 부디 아이들 가슴속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교사와 어버이가 늘기를 빕니다. 부디 아이들 사랑을 따스히 어루만지는 교육 정책과 사회 정책과 문화 정책이 바로서기를 빕니다. ‘입시 정책’이 아닌 ‘교육 정책’이 서기를 빕니다. 교과서를 가르치는 일이 나쁘지 않습니다만, ‘삶을 사랑으로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어른들부터 올바로 설 수 있기를 빕니다. 4348.8.6.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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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위니와 슈퍼 호박 비룡소의 그림동화 207
밸러리 토머스 글, 노은정 옮김, 코키 폴 그림 / 비룡소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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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52



즐겁게 심고 기쁘게 노래하는 밭일

― 마녀 위니와 슈퍼 호박

 코키 폴 그림

 밸러리 토머스 글

 노은정 옮김

 비룡소 펴냄, 2010.1.30. 10500원



  지난 칠월부터 호박꽃이 핍니다. 호박넝쿨은 날마다 힘차게 뻗으면서 무엇이든 감고 오르려 합니다. 호박꽃은 노랗고 커다란 꽃송이를 벌리면서 꽃가루받이를 해 줄 벌나비를 부릅니다. 칠월부터 꽃이 피고 지는 호박넝쿨이니 팔월이 저물 무렵부터 커다랗고 묵직한 열매를 볼 수 있을까 하고 어림합니다. 우리 집 마당하고 뒤꼍에서 우리 집 흙에 뿌리를 내리고, 햇볕과 바람과 빗물을 고이 먹으면서 자랄 호박은 얼마나 맛날까 하고 군침을 흘리는 꿈을 꿉니다.



마녀 위니는 채소를 뭉텅뭉텅 냠냠 즐겨 먹었어요. 꽃양배추와 양배추, 브로콜리와 순무를 좋아했지요. 완두콩과 강낭콩, 당근과 감자, 시금치도 가리지 않고 다 잘 먹었어요. (2쪽)




  코키 폴 님하고 밸러리 토머스 님이 함께 빚은 그림책 《마녀 위니와 슈퍼 호박》(비룡소,2010)을 아이들하고 재미나게 읽습니다. 마녀 위니는 이름 그대로 마녀인 위니이고, 위니는 엄청나게 커다란 호박을 얻습니다.


  남새를 아주 즐겨 먹는다는 위니는 언제나 저잣거리에 빗자루를 타고 찾아가서, 온갖 남새를 잔뜩 장만한다고 해요. 그런데 위니는 온갖 남새를 아주 많이 장만해서 들고 날아서 돌아오기 때문에 빗자루는 으레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하늘에서 주루루 흘린다고 합니다.


  빗자루도 힘들 테지요. 가냘픈 빗자루에 짐을 잔뜩 실으면 빗자루도 벅차서 슬그머니 짐을 떨어뜨릴는지 모릅니다.



“이런! 엉터리 빗자루 같으니!” 위니가 투덜거렸어요.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을 해냈지요. “내가 직접 채소를 길러 먹어야겠어.” 위니는 정원을 갈아엎어서 널찍한 텃밭을 만들었어요. (6쪽)



  마녀 위니는 빗자루더러 “엉터리!”라고 외칩니다. 이러다가 문득 한 가지를 생각해요. 굳이 멀리 마실을 다니면서 남새를 장만하지 말고, 손수 집에서 씨앗을 심어서 길러 먹으면 된다고 깨닫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언제 ‘내 먹을 밥’을 다른 데에서 사다가 먹었겠습니까. 지구별 어디에서나 누구나 ‘내 먹을 밥’은 참말 스스로 흙을 일구어서 얻었어요. 한국도 중국도 일본도, 미국도 영국도 프랑스도, 베트남도 호주도 아르헨티나도, 참말 어느 나라 어느 고장에서든, 사람들은 스스로 흙을 아끼고 가꾸면서 밥을 얻었습니다.


  즐겁게 괭이질을 해서 밭을 갑니다. 즐겁게 호미질을 하면서 풀을 뽑습니다. 뽑은 풀은 나물무침을 할 수 있고, 그냥 고랑에 두면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도록 할 수 있습니다. 밭에서 일을 하면서 풀내음하고 흙내음을 맡습니다. 밭에서 일을 하며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면 온갖 새가 찾아와서 나뭇가지에 앉고는 새로운 노래를 들려줍니다.




위니네 텃밭에 있는 것들은 모두 어마어마하고 기막히게 컸어요! 완두콩 넝쿨은 하늘까지 뻗어 올라갔고 양배추는 어미 소만큼 우람했어요. 토끼도 어미 소보다 훨씬 컸고요. (14쪽)



  마녀 위니는 밭을 갈고 씨앗까지 잘 심었는데, 씨앗이 알맞춤하게 스스로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합니다. 마녀인 만큼 마법을 써서 무럭무럭 쑥쑥 크라고 주문을 겁니다. 이렇게 하고는 가만히 씨앗을 지켜보는데 ‘곧장 싹이 트지’ 않으니 주문이 잘못되었나 하고는 잊어버려요.


  마녀 위니가 다른 곳에 가느라 밭을 깜빡 잊는 사이에, 밭자락에서 온갖 남새가 주렁주렁 맺힙니다. 위니가 건 주문을 신나게 받아들인 씨앗은 어느새 위니네 집을 온통 뒤덮도록 줄기를 뻗고 넝쿨을 휘감으며 열매를 맺어요. 호박은 어마어마하게 커져서 위니네 집을 짓눌러서 뭉개려고 합니다.


  뒤늦게 이를 알아챈 위니는 마법을 돌려놓으려고 하는데, 커다란 호박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래도 지붕에서 겨우 밑으로 내렸습니다. 이웃을 불러 어마어마한 호박을 거저로 나누어 줍니다. 손수 길러서 기쁘게 얻은 열매를 이웃하고 나누는 보람을 누립니다.



“이 호박 껍질로 무얼 하지?” 위니는 곰곰이 생각했어요. “집을 만들면 좋겠지만, 나는 벌써 집이 있잖아? 음, 예전에 어떤 친구처럼 호박 마차를 만들어 볼까? 아니야, 나는 무도회에 갈 일도 없고, 게다가 호박 마차를 끌 말을 만드는 것도 귀찮아.” (20쪽)




  요 며칠 앞서 우리 집에서는 모과차를 담갔습니다. 우리 집 뒤꼍에서 잘 자라는 모과나무가 베푼 굵은 모과알을 고이 그러모아서 신나게 썰었습니다. 팔이 저리도록 모과알을 써는 동안 아이들은 옆에서 지켜봅니다. “아버지, 모과차 언제 먹을 수 있어? 먹고 싶다.” 하고 입맛을 다십니다. “언제 먹을 수 있을까? 모과차를 담가 놓는다고 해서 바로 먹지는 못해. 기다려야 하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글쎄, 기다리다 보면 알맞춤한 때가 오니까, 그냥 기다리면 돼.”


  그림책 《마녀 위니와 슈퍼 호박》을 다시 돌아봅니다. 커다란 호박을 이웃하고 나눈 위니한테 ‘껍데기만 남은 커다란 호박’이 남습니다. 호박 껍데기는 거름으로 삼아서 흙한테 돌려줄 수 있습니다만, 위니는 이 커다란 껍데기로 뭔가 재미난 일을 꾸미고 싶습니다.


  생각하고 거듭 생각합니다. 삶을 즐기는 길을 자꾸자꾸 생각합니다. 다른 이웃이 즐긴 삶을 떠올리다가, 남을 흉내내기보다는 위니로서는 위니답게 삶을 즐기는 길이 무엇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합니다. 그러고는 드디어 멋진 길을 찾습니다. 바로 ‘호박콥터’입니다. 위니네 텃밭 가꾸기는 이렇게 마무리를 짓고, 다시 저자마실을 다니려고 ‘호박 껍데기’를 ‘호박콥터’로 바꾸고는, 마실길에 남새를 툭툭 떨어뜨리는 일이 없이 우주까지 날아오르면서 삶을 즐깁니다.


  위니는 마녀이기 때문에 ‘마녀 주문’을 외워서 뚝딱뚝딱 이것저것 만든다고 여길 만합니다. 그러나, 주문을 외우려면 먼저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위니는 마녀이면서도 텃밭을 가꿀 적에는 손수 괭이질을 했고, 손수 씨앗을 심었으며, 손수 북을 돋았어요. 이렇게 하고 난 뒤에야 ‘잘 자라렴’ 하고는 주문을 외웠습니다.


  우리 삶도 이러합니다. 땅을 일구고 가꾸면서 씨앗한테 말을 걸어요. 나무를 돌보고 열매를 고맙게 얻으면서 나무한테 이야기를 해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바람한테 노래를 불러 줍니다. ‘마녀 주문’은 남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저마다 고운 마음을 담아서 기쁘게 외치는 노랫가락이라면 어떤 말이든 ‘멋진 주문’이 되어 우리 삶을 아름답게 밝혀 주리라 봅니다. 4348.8.2.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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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할 수 있어, 꼬마 기관차 비룡소의 그림동화 15
와티 파이퍼 지음, 도리스 하우먼 그림, 노은정 옮김 / 비룡소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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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50



노래하며 노는 기차를 꿈꾼다

― 넌 할 수 있어, 꼬마 기관차

 와티 파이퍼 글

 조지·도리스 하우먼 그림

 노은정 옮김

 비룡소 펴냄, 2006.1.2.



  아이들하고 전철을 탑니다. 고흥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인천으로 나들이를 왔습니다. 다섯 시간 남짓 시외버스를 달린 뒤, 전철을 갈아탑니다. 아이들은 도시로 나들이를 와서 모든 것이 낯설면서 새롭습니다. 시골집이나 마을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높다란 계단 길을 오르내립니다. 전철을 타려고 계단을 한참 밟고 내려갔다가 올라옵니다. 스르르 올라가는 계단에 올라서고, 우렁찬 소리로 드나드는 전철을 쳐다봅니다.


  아이들은 전철 타는 곳에서 이리저리 달립니다. 요즈음은 전철역에도 가림막이 있으니, 아이들이 뛰놀다가 밑으로 떨어질 걱정은 안 할 만합니다. 아이들한테 이곳은 뛰거나 달리면서 노는 곳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아이들은 뛰거나 달리고 싶습니다. 다섯 시간 남짓 꼼짝 못한 채 앉아만 있어야 했으니 얼마나 갑갑했을까요. 시골집에서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쉬잖고 뛰거나 달리며 놀던 아이들이, 꽤 오랫동안 시외버스를 타야 하는 일은 얼마나 고단했을까요.



칙칙폭폭 칙칙폭폭 땡땡! 꼬마 기차가 기찻길을 덜컹덜컹 달려가요. 꼬마 기차는 즐거워요. (2쪽)



  그림책 《넌 할 수 있어, 꼬마 기관차》(비룡소,2006)를 읽습니다. 나들이를 나오는 길이 이 그림책을 챙깁니다. 기차와 자동차를 좋아하는 작은아이가 아끼는 그림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그림책은 한국에서는 2006년에 나왔는데, 미국에서는 1930년에 처음 나왔다고 합니다. 무척 오래된 그림책입니다. 1930년이라고 하면 한국은 일제강점기였고, 이무렵에는 한국에 어린이가 볼 만한 그림책이 거의 없었다고 할 만합니다. 아이한테 그림책을 읽히려고 하는 어른도 드물었고, 그림책을 빚어서 아이한테 베풀려고 하는 어른도 드물었어요.


  아무튼, 그림책 《넌 할 수 있어, 꼬마 기관차》은 재미있습니다. ‘꼬마 기차’는 인형이랑 장난감이랑 과자랑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가득 실었다고 해요. 아이들이 있는 저 고개 너머로 가는 길이라고 해요. 그런데, 그만 꼬마 기차가 멎습니다. 짐을 너무 많이 실었을까요?


  기찻길 한쪽에 멀거니 선 기차에서 인형들이 내립니다. 다른 기찻길로 지나가는 기차를 부릅니다. 힘센 기차를 부르고, 멋진 기차를 부르며, 젊은 기차도 늙은 기차도 부르는데, 모두 으르렁거리거나 나무라면서 본 체 만 체입니다.




그때 어릿광대가 기차에서 펄쩍 뛰어내리며 말했어요. “반짝반짝 빛나는 새 기관차가 온다!” “우리 도와 달라고 하자.” 인형과 장난감 들도 모두 입을 모아 외쳤지요. “멋쟁이 새 기관차님, 우리 기관차가 고장 났어요.” (12쪽)



  인형하고 장난감 들은 몹시 서운합니다. 고개 너머로 못 가겠구나 싶어 걱정합니다. 이때에 마지막으로 ‘작고 파란 기관차’ 한 대가 지나가요. 모두들 작고 파란 기관차한네 ‘고장난 작은 기차’를 이끌어 달라고 바랍니다. 작고 파란 기관차는 제 힘이 여려서 도무지 못 할 듯하다고 말하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한 번 해 보기로 합니다. 씩씩하게 달려 보기로 합니다.




“우리가 못 가면 산 너머 착한 아이들이 안 됐잖아요. 갖고 놀 장난감도 없고, 맛있는 먹을거리도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크고 힘센 기관차는 버럭 소리를 질렀어요. (20쪽)



  우리 집 아이들은 올들어 두 번째로 전철을 타 봅니다. 한 해에 한두 번쯤 전철이나 기차를 구경하지요. 시외버스에서도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싶던 작은아이는 전철에서도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큰아이가 작은아이 나이였을 무렵에도 이렇게 버스나 전철에서 큰 목소리를 뽑으며 노래했어요.


  아이들이 노래할 적에 ‘어쩜 누가 이리 노래를 잘 하나?’ 하면서 빙그레 웃는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있고,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굴어!’ 하면서 빽 소리를 지르는 어르신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귀여워 하는 어른은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반갑고, 단잠을 이루고 싶은 어른은 대단한 가수가 버스나 전철에서 노래를 부르더라도 귀찮거나 성가시겠지요.


  그러고 보면, 시골에서 군내버스를 탈 적에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면, 버스에 탄 할매랑 할배도 ‘시골에 드문 아이, 게다가 군내버스를 타는 더더욱 드문 아이’를 만나서 노랫소리를 들으니 반기기도 하지만, 버스에서 달콤하게 자고 싶던 분들은 조용히 하라고 나무랍니다.




인형들은 활짝 웃으며 신나게 만세를 불렀지요. 칙칙폭폭 칙칙폭폭! 작고 파란 기관차는 힘겹게 앞으로 달려갔어요. “난 할 수 있어, 난 할 수 있어, 할 수 있을 거야.” (34쪽)



  노래하며 노는 기차를 꿈꿉니다. 웃으면서 노래하는 버스를 꿈꿉니다. 기차마실도 버스마실도 누구한테나 즐거운 삶이 될 수 있기를 꿈꿉니다. 지옥철이나 만원버스가 아닌, 서로서로 사랑스러운 이웃으로 어울리면서 기차랑 버스랑 전철을 누릴 수 있기를 꿈꿉니다.


  이제 우리 아이들은 인천을 거쳐서 강원도 영월로 새롭게 시외버스를 타고 나들이를 가려 합니다. 버스에서 조용조용 나즈막한 목소리로 가볍게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즐겁게 놀자고 생각합니다. 4348.7.25.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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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큰할매 - 어린이를 위한 인권 이야기 철수와영희 그림책 7
김규정 글.그림 / 철수와영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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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시골집에 송전탑 박는 대한민국

― 밀양 큰할매

 김규정 글·그림

 철수와영희 펴냄, 2015.7.17. 12000원



  전깃불을 쓰니, 밤에도 퍽 늦게까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전기가 있기에, 집안에 온갖 전기제품을 들일 수 있습니다. 전기가 있으니 컴퓨터하고 인터넷을 쓰며, 전기를 누리면서 손전화기나 사진기를 다룹니다.


  전깃불을 안 쓰던 예전에는, 밤에 촛불이나 호롱불을 밝혔습니다. 때로는 일찍 자거나, 때로는 밤눈을 또랑또랑 뜨면서 일했어요. 전깃불로 골목이나 고샅을 밝혀야 길을 잘 알아보지 않습니다. 전깃불이 없으면 없는 대로 밤눈을 뜨면 됩니다.


  전기가 없던 예전에는 전화가 없어도 편지를 나누었습니다. 인터넷이 없어도 먼길을 마다 않고 두 다리로 걸어서 오갔습니다. 전기를 먹는 디지털사진기가 없었어도 필름으로 감는 수동사진기가 있었어요.




아침이면 큰할매는 논밭부터 살피러 간다. 왜 이렇게 일찍 나가냐고 하니까 할매가 말했다. “벼는 농부 발소리 듣고 크는 기라. 그마이 부지런해야 댄다.” (15쪽)



  시골에서는 전기가 끊어져도 딱히 근심할 일은 없습니다. 골짝물이 흐르고 샘물이 흐르기에, 동이에 물을 길어서 쓰면 됩니다. 도시에서는 전기가 끊어지면 아파트에서 지낼 수 없을 뿐 아니라, 물 한 방울을 못 씁니다. 전기가 없으면 컴퓨터나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은 모두 꺼지고, 전기가 없으면 지하철도 버스도 기차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전기가 없으면 극장도 방송국도 백화점도 야구장도 모두 먹통이 됩니다. 버스는 기름을 먹는다지만, 전기가 없으면 기름집에서 자동차에 기름을 넣어 줄 수 없어요.


  가만히 보면, 오늘날 우리 사회는 전기 없이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수천만에 이르는 사람이 전깃줄을 붙잡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손수 흙을 일구어서 밥이랑 옷이랑 집을 건사하는 살림이 아니라면, 참말 전기가 꼭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전기를 집집마다 손수 빚어서 쓰지 못하는 사회 얼거리입니다. 집이든 마을이든 공장이든 큰 건물이든, 저마다 스스로 전기를 빚어서 쓰도록 하면 좋을 텐데, 사회·경제 정책은 으레 우람한 발전소를 짓고 커다란 송전탑을 박습니다. 나라에서만 전기를 다스리려고 합니다.



이제 낮이면 큰할매는 포클레인 그늘에서 쉰다. 할매가 걱정돼 자식들이 모시러 간 날, 송전탑 때문에 사람도, 짐승도, 농작물도 못 견디는 고향을 물려줄 수는 없다면서 할매는 울었다. (25쪽)





  김규정 님이 빚은 그림책 《밀양 큰할매》(철수와영희,2015)를 읽습니다. ‘밀양 큰할매’는 밀양에 사는 큰할매입니다. 아이한테 큰할머니일 수 있고, 밀양 시골마을에서 어른으로 섬기는 큰할머니일 수 있습니다.


  큰할매는 오랜 옛날부터 흙을 일구며 살았습니다. 손으로 돌을 고르고 풀을 뽑고 나물을 뜯고 짐승을 건사하면서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시골에서 태어나서 자란 아이들은 할매(어매) 손길을 받고 학교를 잘 다닌 뒤에 도시로 떠나서 일자리를 얻습니다. 도시로 떠난 아이들은 무럭무럭 커서 짝을 지은 뒤 새 아이를 낳습니다. 그리고, 한 번 도시로 떠난 아이들은 다시 시골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도시에 그대로 남아서 사무직 노동자나 공장 노동자로 일합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도시로 떠나면 떠날수록, 도시에서는 집이 모자라고 전기와 상수도가 모자랍니다. 도시에서 살림을 꾸리는 아이들이 짝을 지어서 새롭게 아이를 낳으면, 도시에서는 사람이 자꾸 늘어나니까, 이 흐름에 맞추어 아파트를 더 높이 올리고 찻길을 더 닦으며 전기를 훨씬 많이 써야 할 뿐 아니라, 시골에서 곡식이랑 열매를 더 많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국은 식량자급율이 쌀을 빼면 10퍼센트조차 안 되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온갖 곡식이랑 열매를 사들입니다.



큰할매를 만나고 오는 길에 아빠가 말했다. “송전탑을 따라가면 그 끝에 핵 발전소가 나온단다.” 핵 발전소는 이웃 나라 일본에서 사고가 났던 발전소란다. 다른 나라에서는 위험하다고 핵 발전소를 안 짓는다는데 우리나라는 더 짓는단다. 그래서 저 송전탑이 필요하단다. 서울로 더 많은 전기를 보내려고 말이다. (31쪽)




  나라에서는 밀양에 송전탑을 꼭 박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정부에서는 송전탑을 안전하게 짓겠다고 외칩니다. 밀양 시골사람이 쓸 전기가 아니라 큰도시에 넘치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써야 할 전기이기 때문에, 큰도시하고 많이 떨어진 외진 시골에 핵발전소를 짓고, 외진 시골을 가로지르는 송전탑을 박아야 한다고 합니다.


  서울이나 부산 한복판에 핵발전소나 화력발전소를 짓는 일은 없습니다. 너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발전소가 터질까 위험하다기보다, 발전소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것이 둘레에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송전탑을 박으면, 송전탑을 박는 돈뿐 아니라, 송전탑을 거치면서 버려지는 전기가 무척 많습니다. 얼핏 보기에 도시에 발전소를 안 짓고 시골에 짓는 일이 돈을 아끼는 일인 듯 여기지만, 도시에서 쓸 전기는 도시에 발전소를 지어야 옳을 뿐 아니라, 돈도 적게 듭니다. 큰 발전소하고 우람한 송전탑으로 전기를 얻는 사회와 경제는 이제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집집마다 전기를 손수 얻어서 쓰는 흐름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더욱이, 송전탑을 박는 시골은 외진 시골이요, 아름다운 멧골이기 일쑤입니다. 한국전력 일꾼은 지도를 펼쳐서 송전탑 박을 곳을 따지기에, 우람한 송전탑은 으레 논 한복판에 섭니다. 아름드리 숲과 멧등성이 한복판에 송전탑이 자꾸 들어서면서, 숲이 망가지고, 산사태가 일어나며, 숲짐승이 죽습니다. 이뿐 아니라 논밭과 농장과 짐승우리 둘레에 송전탑이 서면서 ‘도시사람이 먹는 곡식과 열매와 고기를 거두는 시골 농사’도 나빠지기 마련입니다. 큰 발전소하고 우람한 송전탑을 시골에 세운다고 해서 도시사람이 ‘안전’할 수 없어요. 농약범벅 곡식이 사람 몸에 좋을 수 없듯이, 송전탑 곁에서 자란 곡식이 사람 몸에 좋을 수 없습니다.



산에 있는 우리 큰할매가 새로운 그림을 그린다. 부끄럼 많은 옆집 할매, 경운기 운전 잘하는 뒷집 할배, 멋쟁이 이장 아저씨, 우리 할매 말벗 감나무 집 아줌마. 할매 그림에서는 모두가 웃고 있다. (32∼35쪽)




  그림책 《밀양 큰할매》는 시골마을 할머니 한 분을 넌지시 보여줍니다. 나라가 잘되기를 바라면서 아이들을 알뜰히 가르쳐서 훌륭한 일꾼이 되도록 키운 시골마을 할머니가 늘그막에 고향을 빼앗기면서 아파해야 하는 삶을 가만히 보여줍니다.


  핵발전소나 송전탑을 반대하는 일은 ‘지역 이기주의’일까요? 도시에서 쓸 전기를 도시가 아닌 시골에 핵발전소를 세우고 송전탑을 박으려고 하는 일은 ‘지역 이기주의’가 아닐까요?


  그러나, 누가 옳고 그르고를 따질 일이 아닙니다. 오직 ‘수요와 공급이라는 숫자’만 들여다보는 사회·경제 정책에 매달리는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전기를 쓰려면 아름다운 발전 정책을 세워서, 시골하고 도시가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즐거운 길을 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전투경찰을 앞세워서 발전소하고 송전탑을 후다닥 때려박으면 될 일이 아닙니다. 지역 발전소가 서고, 자립 발전기를 갖추어야 하며, 전기에 덜 기대거나 전기가 없어도 될 삶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시골 할매하고 할배를 못살게 구는 정책은 사라져야지요. 군부대를 들여야 한다면서, 고속도로와 골프장을 늘려야 한다면서, 핵발전소와 송전탑이 꼭 있어야 한다면서, 정갈하고 조용한 시골을 뒤흔드는 정책은 이제 사라져야 합니다.


  시골이 정갈하고 조용하게 살아야, 도시사람도 몸에 좋은 깨끗한 곡식하고 열매를 먹습니다. 시골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있어야, 도시사람도 즐겁게 여행을 다닐 수 있습니다. 핵발전소를 옆에 둔 바닷가에 놀러가고 싶은 도시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송전탑이 골짜기나 들 한복판에 우뚝 선 곳으로 여행을 다니고 싶은 도시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생각하는 정치와 경제와 행정이 곱게 설 수 있기를 빕니다. 밀양을 비롯한 시골마을 할매와 할배 가슴에 큰못을 박는 짓은 이제 사라지기를 빕니다. 4348.7.20.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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