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읽는 책 36] 한 마디 말

 


  능금씨 심으면 능금나무 자라고
  부추씨 떨어지면 부추풀 돋으니
  씨앗 한 톨 온누리 어루만진다.

 


  어른들이 고운 말 즐겁게 쓰면, 아이들도 고운 말 사랑스레 쓴다고 느껴요. 어른들이 고운 말을 잊거나 즐겁게 주고받는 말빛을 잃으면, 아이들도 고운 말을 잊을 뿐 아니라 서로서로 즐겁게 말빛 주고받는 기쁨을 잊어요. 한 마디 말은 언제나 한 마디 말씨앗이에요. 두 마디 말은 늘 두 마디 말씨앗이고요. 능금씨 한 톨이 뿌리를 내려 우람한 능금나무 되고는 맛난 능금알 베풀듯, 곱게 나누는 말씨 한 마디는 아름다운 말나무 되어 온누리 따사롭게 보듬는 사랑스러운 말빛이 됩니다. 4346.7.13.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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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7-14 18:09   좋아요 0 | URL
장일순님의 <나락 한알속의 우주>라는 책이 생각나네요. 작은 나락 한알 속에서 우주를 보는 것, 씨앗 한톨 에서 온누리를 읽을 수 있는 것 말입니다.
 

골목꽃

 


  골목 한켠에 피어나는 꽃은 사람들 눈에 확 뜨이도록 커다란 송이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조그마한 씨앗은 조그마한 뿌리를 내리고 조그마한 줄기를 올린 뒤 조그마한 잎사귀를 벌려 조그마한 꽃송이 틔웁니다. 풀밭은 아주 조그마한 풀포기가 수없이 얽히고 설켜 이루어집니다. 커다란 풀 몇 있는대서 풀밭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이름조차 잊은 온갖 풀이 서로서로 어깨동무하면서 자라기에 풀밭이 되어요.


  그늘진 골목 한켠에 풀이 돋습니다. 햇볕 한 조각 살짝 비출까 말까 싶은 자리에 꽃이 맺습니다. 바람이 붑니다. 사람들이 지나다닙니다. 누군가는 담배꽁초를 버리고, 누군가는 쓰레기를 버립니다. 그렇지만, 골목꽃은 씩씩하게 피어납니다. 골목꽃은 맑은 빛깔 살그마니 내놓아 커다란 도시 한쪽에 조그맣게 그림을 그립니다. 풀과 벌레와 사람과 흙이 서로 손을 맞잡아 따사로운 보금자리 되는 그림을 조그맣게 그립니다. 4346.7.1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골목길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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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빛나는 책시렁

 


  나뭇잎이나 나뭇줄기는 쓰다듬거나 비빈다고 닳지 않는다. 살아서 바람을 마시는 목숨은 닳지 않는다. 사람도 쓰다듬거나 어루만진다고 해서 닳지 않는다. 산 목숨은 닳지 않고 단단해진다. 산 숨결은 닳는 일 없이 한결 곱게 빛난다. 고운 손길 뻗어 쓰다듬을 적에 사랑이 스민다. 맑은 눈빛 드리워 어루만질 때에 이야기가 샘솟는다.


  나무에서 태어난 책은 사람들이 만지고 만질 때마다 조금씩 닳는다. 나이를 먹는 책은 천천히 낡는다. 백 사람도 만 사람도 손으로 만져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천 해 지나고 이천 해 흐르는 사이 종이가 바스라지고 책등이 조금씩 터진다.


  그런데, 낡거나 닳는 책은 껍데기가 낡거나 닳더라도 빛을 잃지 않는다. 왜냐하면, 책은 껍데기나 종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책은 종이에 얹은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읽는 책이지, 종이를 읽거나 껍데기를 읽는 책이 아니다. 사람들은 책이라고 하는 그릇에 담은 이야기를 살피고 헤아리며 즐길 뿐, 껍데기에 붙인 이것저것을 살피거나 헤아리거나 즐기지 않는다. 겉장은 단단한 종이로 새로 붙여도 된다. 속종이는 아예 새로운 종이에 다시 박아서 묶을 수 있다. 그런데, 겉장을 새로 붙이든 속종이를 새로 찍어서 묶든, 속에 얹는 글(이야기)은 한결같다.


  가지 하나 부러지더라도 나무는 나무이다. 잎사귀 모두 떨구어도 나무는 나무이다. 꽃이 새로 필 적에도 나무는 나무이다. 벼락을 맞아 부러지거나, 나무꾼이 도끼로 베어 그루터기만 남아도 나무는 나무이다.


  아이들이 과자 먹던 손가락으로 책에 기름을 묻히더라도 책은 책이다. 빗물이 떨어져 책종이가 일어나도 책은 책이다. 끈으로 질끈 묶인 채 몇 해 동안 책손 손길을 타지 못하며 누군가를 기다리더라도 책은 책이다. 많이 팔리는 책도 책이고, 책손 한 사람이 알뜰히 사랑해도 책이다.


  나무가 빛나는 책시렁을 바라본다. 나무에서 태어난 책은 나무를 잘라 마련한 책시렁에 놓이면서 빛난다. 어쩌면, 사람들 숨결도 늘 나무가 아닐까. 나무가 있어 집을 짓고, 불을 피우며, 연장을 마련한다. 나무가 있어 그늘이 있고 푸른 바람이 불며 둘레에 온갖 풀이 자란다. 나무가 있어 새들이 깃들어 노래한다. 나무가 있기에 숲이 우거지면서 냇물이 흐른다. 나무가 있어 구름이 피어나고 무지개가 뜨며 별들이 반짝반짝 빛난다. 4346.7.1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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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7만 원 서울 여관

 


  서울에서 볼일 보고 나서 서울에 있는 여관에 아이들과 묵으며 바로 씻기고 재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찾아가는 여관마다 ‘주말’이라 하면서 하루 묵는 삯 7만 원을 달라고 말한다. 올봄에 묵을 적에는 3만5천 원을 받기에, 이만 한 값이면 애써 택시를 타고 일산까지 가서 할머니 댁이나 이모 집에서 묵지 않아도 되겠다고 여겼는데, 여관삯이 꽤 많이 세다.


  갑자기 비가 들이붓는다. 작은아이는 잠들었다. 큰아이도 아주 고단하지만, 씩씩하게 아버지 손을 잡고 졸음과 힘겨움을 참는다. 퍼붓는 빗길을 큰아이 손을 잡고 작은아이를 품에 안는다. 작은아이 안은 팔에 천가방을 둘 꿰었다. 빗물 옴팡 뒤집어쓴 채 이 여관 저 여관 들어가서 값을 묻는데, 어느 집이나 똑같이 7만 원을 부를 뿐 아니라 “주말에는 가족을 안 받는다.”고 말한다. “어디 가든지 다 똑같을 거예요. 일부러 고생하지 마세요.” 하고 ‘자못 친절하게(?)’ 말씀하는 분도 있다. 그러고 보니, 여관골목 이곳을 드나드는 젊은이가 몹시 많다. 그래, 이들이 한두 시간 놀고 나가면서 주말에 이삼만 원 쓰도록 하면 여관골목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겠지. 시골에서 평일이나 주말을 모른 채 살던 우리 식구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판이 된다.


  마지막으로 알아본 여관 처마 밑에 쪼그려앉는다. 작은아이 안고 일산 부름택시로 전화를 건다. 마침 신촌 언저리에 택시 한 대 있단다. 잘 되었구나. 우리 택시 타고 일산 이모 집으로 가자. 퍼붓는 비를 다시 맞으며 택시 있는 곳으로 간다. 아이들은 택시에 타서 자리에 앉자 이내 곯아떨어진다. 비오는 저녁 서울서 일산 가는 택시삯은 19500원. 작은아이는 옷만 갈아입혀 눕힌다. 작은아이는 옷을 갈아입혀도 잠을 안 깬다. 큰아이는 몸을 씻기고 머리까지 감기고 잠옷으로 입히니 스스로 누워 곧바로 잠든다. 4346.7.1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과 헌책방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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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7-14 18:13   좋아요 0 | URL
빗길에 아이 둘 데리고 먼 나들이 잘 다녀오셨는지 안그래도 궁금했습니다.
힘드셨겠지만 보람있는 하루였으면 좋겠어요.

숲노래 2013-07-15 06:35   좋아요 0 | URL
아이들 시골집에서 씩씩하면서 거리낌없이 뛰놀 수 있도록
오늘 잘 돌아가야지요~~~~~

도시에서 이틀 이럭저럭 잘 보냈습니다

카스피 2013-07-14 22:26   좋아요 0 | URL
지방에 다닐적에 여인숙에 잔 기억도 나고 여관에서 잔 기억도 납니다.근데 서울에 아직도 여관이 있나 보군요.대부분 모텔로 바뀐것으로 알고 있는데............

숲노래 2013-07-15 06:35   좋아요 0 | URL
이름만 모텔로 바꾸지
다 여관이에요

appletreeje 2013-07-15 05:46   좋아요 0 | URL
아이쿠...고생이 많으셨네요...
이곳은 여전히 비가 많이 내리고 있습니다...

숲노래 2013-07-15 06:36   좋아요 0 | URL
네, 아침에 서울에 있는 출판사 들렀다가 기차 타고 돌아갈 텐데,
우리 식구 움직이는 길에는
비가 살짝 멈추기를 마음속으로 빈답니다 ^^;;
 

잘 자렴

 


  큰아이는 새벽 다섯 시부터 깨어 함께 짐을 꾸린다. 작은아이는 여섯 시 반부터 일어나서 뛰어논다. 이 아이들 데리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선다. 아침 일곱 시 오 분에 마을 어귀를 지나가는 첫 군내버스를 타려고 한다. 마을 할매 세 분과 할배 한 분이 버스를 기다린다.


  읍내에 닿아 시외버스로 갈아탄다. 시외버스로 순천 기차역까지 달린다. 순천 기차역에 퍽 일찍 닿았기에 미리 끊은 기차표를 물리고 일찍 가는 기차표로 바꾼다. 시외버스에서도 기차에서도 아이들은 개구지게 놀고 싶어 한다. 소리를 지르고 싶고, 뛰거나 달리고 싶다.


  아이들로서는 어디에서든 마음껏 소리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몸도 굴리고 싶다. 기쁘게 노래하면서 까르르 웃고 싶다. 그렇지만, 시외버스나 기차에서는 ‘다른 사람을 헤아려야’ 한다는 도덕이나 예절이 있다. 곰곰이 생각한다. 먼먼 지난날에는 시외버스도 기차도 없었다. 먼먼 옛날 아이들은 마실을 다니거나 나들이를 다니거나 개구지게 뛰고 구르고 놀고 노래하고 소리질렀으리라 생각한다. 집에서나 마을에서나 아이들은 아이다움을 누리며 살았다. 그래, 문명이나 문화라고 하는 어른 사회 울타리는 아이들을 옥죄고 얽매는구나. 아이들이 한결 씩씩하거나 튼튼하게 자라도록 북돋우지 않고, 자꾸 누르면서 가두는 틀이로구나.


  이른새벽부터 개구지게 놀며 소리지르고픈 아이들을 달래고 타이르고 나무라고 토닥인 끝에 큰아이를 무릎에 누여 재운다. 아버지 무릎에 눕자마자 큰아이가 잠든다. 이렇게 졸리고 힘들었으면서, 그렇게 참고 더 놀겠다며 소리지르고 그랬니. 작은아이는 이십 분쯤 더 종알종알 떠들며 걸상에서 일어서서 앞뒤를 구경하고 창문가에 올라서려 하더니, 어느새 고개를 폭 떨군 채 아버지 어깨에 기대어 잠든다.


  얘들아, 잘 자렴. 이곳에서건 저곳에서건 아름다운 너희 숨결 고이 건사하면서 뛰놀렴. 바깥마실 마치고 시골집으로 돌아가면, 언제나 누리는 너희들 노래와 웃음과 춤과 발장구와 날갯짓으로 신나게 뛰놀렴. 4346.7.13.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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