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모기·무당벌레 책읽기

 


  마당에 친 천막에서 아이들이 논다. 문득 아버지를 부른다. “아버지 나비 들어왔어요!” 그래? 그러면 너희가 나비 나가도록 해 주면 되지. 아이들은 나비를 바깥으로 내보내지 못한다. 조그맣게 예쁜 나비가 천막으로 들어왔다. 옳거니. 부전나비로구나. 노란 빛깔이 환해서 천막으로 들어왔니? 넓적한 책을 들어 살살 모는데 안 된다. 두 손으로 잡을까 두 손가락으로 집을까 하다가 살며시 손등을 내밀어 본다. 아, 나비가 내 손등에 앉는다. 그래 그래, 잘 했어. 이렇게 밖으로 나가면 돼.


  내 손등에 앉은 나비가 얌전히 있다. 천막에서 나와 마당에 선다. 나비가 한동안 쉰다. 천막에서 마구 날갯짓하느라 힘들었지. 조금 쉬다가 가렴. 손을 든 채 있다가 큰아이더러 사진기 가져다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큰아이가 느릿느릿 방으로 들어가 사진기를 가져온다. 그러나 큰아이가 다시 마당으로 내려설 무렵, 나비는 팔랑 하며 날아간다.


  아침에 똥을 누는데 왼 발등이 간지럽다. 뭔가 하며 내려다보니 모기 한 마리 앉아서 피를 빤다. 요놈 너한테 간이 얼마나 크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참말 간이 부었구나. 왼손을 뻗어 휘휘 젓는다. 피를 빨던 모기가 깜짝 놀라며 허둥지둥 내뺀다. 바로 옆에 있는 파리채 들어 찰싹 내리칠까 하다가 그만둔다. 꼬리 빼는 모습이 가엾다. 너 오늘은 살렸지만 다음에 또 붙으면 그때에는 그냥 손바닥으로 철썩 내리치면서 납짝꿍 될 줄 알아.


  이불 한 채 빨아서 마당에 넌다. 한 시간쯤 지나 이불을 뒤집는다. 반쯤 뒤집을 즈음 왼손등에 넉점무당벌레 한 마리 앉는다. 응. 등판에 무늬가 넉 점? 넉 점 무늬만 있는 무당벌레도 있었나? 아무렴. 내가 모르는 무당벌레가 한둘이겠니. 너희도 너희대로 모두 다른 목숨이고 삶일 텐데. 이불을 뒤집다가 말고는 물끄러미 무당벌레를 바라본다. 넌 어디에서 날아오다가 내 손등에서 쉬니. 또 앞으로 얼마나 더 멀리 날아가려 하니. 우리 집 둘레에는 맛난 풀 많으니, 너도 여기에서 날개도 쉬고 밥도 먹다가 네 갈 길을 찾아서 가렴. 4346.6.2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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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책 22] 선물하는 마음

 


  선뜻 마음을 기울이고
  문득 사랑을 담아
  선물 한 꾸러미.

 


  선물할 때에 즐겁다면 선물받을 때에도 즐겁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누군가한테 선물하듯, 누군가도 나한테 선물해요. 내가 누군가한테 선물하면서 마음이 들뜨고 설레며 기쁘다면, 나한테 선물하는 누군가도 마음이 들뜨고 설레며 기쁘겠지요. 그래서 즐겁게 선물합니다. 즐겁게 선물받습니다. 다 좋아요. 나한테 아름다운 사랑 선물해 주셔요. 나도 내 온 사랑 가득 담아 언제나 무엇이든 선물할게요. 4346.6.2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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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쓰면 우리 말이 깨끗하다
 (145) 한 치의 1 : 한 치의 흔들림

 

게다가 더 걱정인 것은 스님의 의지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는 점이다
〈오마이뉴스〉 2005.2.2. 정운현 님 글

 

  “걱정인 것은”은 “걱정이라면”으로 다듬고, “없다는 점(點)이다”는 “없다는 대목이다”로 다듬습니다. “스님의 의지(意志)가”는 “스님 의지가”나 “스님 뜻이”로 손봅니다. “스님이”로 단출하게 손볼 수 있는데, 따로 ‘의지’나 ‘뜻’ 같은 낱말을 안 넣고 “스님이 한 치도 흔들림이 없다”처럼 적을 때에도 스님이 보여주는 뜻이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 한 치 흔들림도 없다
→ 한 치도 흔들림이 없다
→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다
→ 조금도 흔들림이 없다
→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

 

  “한 치의 오차도 없다” 같은 말을 흔히 듣습니다. “한 치의 무엇무엇”이라고 하는 말투입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흔히 쓰기에 무어라고 꼬집거나 바로잡으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이 쓴다고 한다면, 첫째, 많이 쓰니 그냥 둘 때가 낫다, 둘째, 많이 쓰는 만큼 말썽거리라 할 만하니 서둘러 고치거나 바로잡아야 한다, 이렇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생각하더라도 말과 글을 옳고 바르게 쓰려는 마음이라면 됩니다. 사람들이 으레 쓰니까 그냥 쓸 수 있어요. 사람들이 으레 쓰더라도 널리 알려서 바로잡도록 힘쓸 수 있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으레 쓰기에 그대로 따른다 하더라도 ‘올바르게 쓰는 말투는 이러하답니다’ 하고 배우거나 익히거나 살핀 다음 그대로 따라야 아름답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거나 아무것도 안 살피면서 무턱대고 엉터리 말투를 함부로 쓰는 일은 아름답지 않아요.


  우리 말글을 바로쓰자고 할 때에는 옳고 그름을 나누자는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 말글을 바로쓰는 일이란, 우리 말글을 아름답게 쓰는 일입니다. 말과 글을 아름답게 쓰면서 시나브로 생각과 넋을 아름답게 돌봅니다. 생각과 넋을 아름답게 돌보다 보면, 어느새 삶과 사랑 또한 아름답게 보듬을 수 있어요. 곧, 아름다운 삶과 사랑을 헤아리면서 생각과 넋을 아름답게 돌보고, 말과 글 또한 아름답게 추스르는 셈입니다. 4338.2.4.쇠/4346.6.2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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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게다가 더 걱정이라면 스님이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대목이다
ㄴ. 게다가 스님이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아 더 걱정스럽다

 

..


 '-의' 없애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571) 한 치의 2 : 한 치의 양보

 

그야말로 일진일퇴, 한 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우라사와 나오키/서현아 옮김-야와라 (24)》(학산문화사,2000) 113쪽

 

  ‘일진일퇴(一進一退)’는 ‘(서로) 물러서지 않고’나 ‘밀고 당기며’라든지 ‘물고 물리며’ 같은 말로 다듬으면 한결 쉽고 부드러워요. 뜻을 알기에도 좋고요.

 

 일진일퇴, 한 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 물고 물리며, 한 치도 양보하지 않습니다
→ 밀고 당기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 물러서지 않고, 한 치도 밀리지 않습니다
 …

 

  토씨 ‘-의­’를 덜고 ‘-도’를 붙입니다. 이러면서 뒷말을 ‘양보하지’처럼 적어 주면 됩니다. 한편, “조금도 물러서지 않습니다”나 “터럭만큼도 밀리지 않습니다”로 적어 볼 수 있습니다. 토씨 ‘-의’만 덜고 “한 치 양보도 없습니다”처럼 적어도 잘 어울립니다. 4339.4.11.불/4346.6.2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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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밀고 당기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83) 한 치의 3 : 한 치의 땅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라는 명령으로 한국군도 고지 쟁탈전에서 셀 수 없이 많이 죽어 갔습니다
《이임하-10대와 통하는 한국 전쟁 이야기》(철수와영희,2013) 70쪽

 

  어떤 일을 시킬 때에 한자말로 ‘명령(命令)’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한자말은 군대나 회사나 조직 같은 데에서 으레 씁니다. 집에서는 일을 시키거나 심부름을 시킨다고 말하지요. 시키니까 ‘시킨다’고 해요.


  군대에서는 ‘고지(高地) 쟁탈전(爭奪戰)’ 같은 말도 씁니다. 그러나, ‘고지’란 ‘높은 곳’을 가리키고, ‘쟁탈전’은 ‘싸움’을 뜻해요. 높은 곳에 있는 땅을 서로 빼앗으려고 싸우는 일이 ‘고지 쟁탈전’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모습을 짤막하게 한국말로 가리키도록 마음을 기울일 수 있을까요. 쉽고 단출한 새 한국말을 빚을 수 있을까요. 맨 먼저 ‘고지 싸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땅따먹기’ 놀이를 합니다. 곧, ‘땅뺏기싸움’이라 할 수도 있어요.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라는 명령으로
→ 한 치라도 땅을 더 차지하라고 내몰아서
→ 땅을 한 치라도 더 차지하라고 시켰기에
→ 조금이라도 땅을 더 차지하라고 시켜서
 …

 

  생각을 하면서 말을 가다듬습니다. 생각을 기울이면서 말을 빛냅니다. 말차례만 살짝 바꾸어도 ‘한 치의 땅이라도’가 아닌 ‘땅을 한 치라도’가 되어 토씨 ‘-의’는 저절로 떨어집니다. ‘고지 쟁탈전’ 같은 대목도 ‘고지 싸움’이라고 한 군데 손볼 수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씩 가다듬고 추스르면서 말이 빛납니다. 언제나 차근차근 돌아보고 살펴서 하나하나 다듬고 보듬으면서 글이 거듭납니다. 4346.6.2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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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한 치라도 더 차지하라고 내몬 탓에, 한국군도 고지 싸움에서 셀 수 없이 많이 죽어 갔습니다

 

(최종규 . 2013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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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 걷기

 


  저녁에 아이들 자전거에 태우고 면소재지 우체국에 다녀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살짝 에돌며 이웃마을 논자락 사잇길을 달린다. 땀 흠뻑 쏟은 옷을 벗고 씻으려다가 아이들 불러서 먼저 씻기고는 빨래를 한다. 빨래를 바깥에 넌다. 아이들 저녁 해 먹인다. 저녁놀이를 하고 아이들 재울 즈음, 아이들 쉬 누이며 꽉 찬 오줌그릇 들고 마당으로 내려서다가 ‘아차, 아까 빨래 널고 안 걷었네.’ 하고 깨닫는다. 저녁마실 마친 뒤 한 빨래를 널었다가 안 걷었다. 여름이라 해가 길어 저녁마실 하고 돌아왔어도 아직 해가 걸려서 빨래를 널었는데, 한밤이 될 때까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래도 여름인데 뭐. 이듬날 아침에 다시 밖에 널면 따사로운 햇살이 보송보송 말려 주겠지. 4346.6.2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빨래하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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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와 통하는 한국 전쟁 이야기 - 왜 전쟁 반대와 평화가 중요할까요?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10
이임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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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과 함께 살기 105

 


전쟁을 부르는 군대
― 10대와 통하는 한국 전쟁 이야기
 이임하 글
 철수와영희 펴냄,2013.6.25./13000원

 


  군대는 사람을 죽이는 곳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도록 내몰려고 군대라는 데가 생겼습니다. 군대는 사람을 버젓이 죽여도 법으로 아무 잘못을 캐묻지 않습니다. 군대에서는 법에 따라 사람을 때리거나 다치게 하거나 죽여도 딱히 말썽거리가 생기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하사관이나 소대장이나 중대장이나 대대장 같은 이들이 여느 병사를 총으로 쏘아 죽였다 하더라도, 여느 병사가 ‘하극상’을 일으켰다고 말한다면 그저 ‘하극상’이 될 뿐입니다. 또한, 전방이나 최전방에서 여느 병사가 북쪽으로 넘어가려 했기에 총으로 쏘아 죽였다 하면, 총으로 쏘아 죽인 사람한테 훈장이 떨어집니다. 여느 병사가 군대에서 얻어맞아서 괴롭든, 따돌림을 받아서 괴롭든, 여러모로 괴로워서 군대를 벗어나려고 하면 ‘탈영’이라는 죄를 붙여, 적어도 무기징역이라 하는 군사재판을 붙입니다. 군대를 벗어나면서 총알 하나를 건사했다면, 또는 총알 하나 없더라도 소총을 들고 벗어났다면, 이때에는 언제라도 총으로 쏘아 죽여도 법에서는 따지지 못합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해방 뒤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군대에서 일어난 모든 ‘의문사’는 이렇게 ‘죽은 사람한테 덤터기 씌워’ ‘죽인 사람은 아무 허물도 죄값도 치르지 않은’ 채 빠져나왔다는 뜻입니다. 또, 이런 것도 있습니다. 군대에서 여느 병사 한 사람을 괴롭히며 두들겨패다가 그만 숨이 끊어지면, 전방이나 최전방에서는 ‘지뢰를 밟아서 주검 하나 없이 사라져 버렸다’고 둘러대기도 합니다. 때로는 ‘북쪽으로 넘어갔다’고 둘러댑니다. 그러면, ‘시체 부검’조차 할 수 없지요.


  나는 이 여러 가지 일을 군대에서 몸소 겪었어요. 최전방 철책에서 경계근무를 서는데, 갑자기 옆 부대 소초에서 ‘지뢰 밟아 두 사람이 죽었다’는 보고가 들어왔어요. 옆 부대는 우리 소초에서 500미터쯤 떨어진 데에 있는데, 지뢰 터진 소리는 못 들었어요. 그런데 지뢰 밟아서 두 사람이 죽었다 하더군요. 한여름 어느 날에는 4/5톤 짐차 엔진이 터져서 사람이 죽었다는 보고도 들었으나, 짐차 엔진 터진 소리도 못 들었고, 그런 부스러기도 못 봤어요. 그러나 ‘사람이 죽은’ 일은 틀림없습니다. ‘개미에 물려서 죽었다’는 사람도 있어요. 모두 어떻게 해서 누가 누구를 어떻게 ‘죽였’는지 모르는 채 벌어진 ‘의문사’들입니다. 내가 있던 부대 중대장도 이녁 마음에 안 드는 병사가 있으면 “이 개새끼들아, 너희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야. 총으로 너희 머리 갈기고, 이북으로 넘어갔다고 말한 다음 시체 갖다 버리면 그만이야.” 하고 소리지르곤 했습니다. 이렇게 소리지르며 얼차려를 주는데, 참말 K-1소총에 실탄 잰 탄창 끼워 장전을 하면 등줄기로 땀이 스르르 흐릅니다. 넋이 나가지요.


.. 교과서는 한국 전쟁의 원인, 과정, 결과를 사진을 곁들여 두 쪽에 걸쳐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읽고 ‘아이들은 전쟁과 평화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교육이 중요하다면서도 정작 교과서는 이와는 많이 동떨어져 있는 것 같네요 … 단순하게 사실을 추려서 달달 외우는 게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사실 뒤에 숨은 뜻을 밝혀내는 역사 교육과 사회 교육이라면 좋지 않을까요  ..  (9, 10쪽)

 

 


  군대가 있어 평화를 지키지 않습니다. 군대가 있기에 전쟁을 벌입니다. 군대가 있는 나라는 언제나 전쟁을 일삼습니다. 군대가 있기 때문에 평화 아닌 전쟁으로 기울어지고, 정치권력은 독재와 봉건과 제국주의로 치닫습니다.


  군대에서는 언제나 ‘사람이 사람을 잘 죽이는 재주’를 가르칩니다. 농사를 짓던 사람이건, 공장에서 기계를 만지던 사람이건, 집에서 아이를 돌보던 사람이건,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사람이건, 군대에 끌려가면 모조리 ‘사람을 더 빨리 더 많이 죽이는 재주’를 가르칩니다.


  어떤 사람은 총검술을 보며 멋있다고 말하는데, 총검술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가장 빠르게 더 많은 적군 목을 한 칼에 따서 죽이는 재주가 총검술입니다. 한 칼에 한 사람 목을 따서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생각을 집어넣습니다. ‘백병전’이라 해서, 주먹다짐으로 맞붙는 전쟁이 벌어졌을 때에는, ‘한 사람이 백 사람을 죽일 수 있어’야 비로소 살아남는다고 가르칩니다. 총검술을 가르치면서 동작 하나 어긋나거나 느리면 뒤에서 군화발로 뻥뻥 걷어차거나 얼차려를 시키는 까닭은 ‘너 이렇게 엉터리로 하면 네가 죽는다’는 생각을 집어넣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소총 소염기로 얼굴과 배와 옆구리와 허벅지를 쿡쿡 찌르면서 우리 마음에 ‘너 말이야, 사람을 아주 쉽게 많이 죽일 수 있어야 해’ 하는 생각을 길들이듯 집어넣지요.


  총쏘기 훈련을 할 적에, 영점사격 석 발 쏘며 점수 제대로 안 나오면 언제나 얼차려를 받습니다. 한 시간 동안 죽을 똥 빼면서 얼차려를 받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석 발을 쏘게 하지요. 이때에도 점수 제대로 안 나오면 다시금 얼차려를 죽음과 같이 받아요. 사격훈련 한다면 새벽부터 밤까지 얼차려 받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잘 쏘든 못 쏘든 똑같습니다. 다 함께 똑같이 얼차려를 받아요. ‘군대 갔다 오면 살이 빠진다’고 하는 까닭도, 늘 얼차려를 받고 시달림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총은 총자루가 휘어졌기도 하고, 어느 총은 덜컥거리기도 합니다. 조교라든지 교관이라든지 고참이라든지 중대장은 말합니다. ‘싸움터에서 총 탓을 하다가는 네가 죽는다. 엉터리 총이라 하더라도 엉터리 총으로도 영점사격 똑바로 해야 한다’고. 틀린 말은 아니지요. 전쟁터에서 물불 가릴 수 없고, 옆사람 총을 들고 쏴야 할 수 있으니, 다 망가진 총으로도 백발백중을 해야 하겠지요. 그러면, 왜 이렇게 총쏘기를 가르치겠습니까. 바로 더 많은 사람을 더 빨리 죽이라는 뜻입니다.


.. 친일파들은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요? 해방이 되자 친일파들은 대중들의 열기에 놀라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 채 벌벌 떨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친일파들에게 희소식이 들려왔죠. 미군이 38도선 이남 지역에 들어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친일파를 포함한 지주, 자본가들은 재빨리 모여 한국민주당을 만들었어요. 한국민주당은 미군정에 앞장서 협력하면서 새로 세워질 나라의 지도자로 이승만을 지지했답니다 ..  (16쪽)

 

 


  나는 1995년 11월 16일에 논산훈련소로 끌려가서 106 무반동총 주특기를 배운 뒤, 기차로 열여덟 시간을 달려 강원도 춘천 102 보충대에 닿았고, 이곳에서 사흘 지내고 나서 소양호를 배를 타고 한 시간에 걸쳐 가로지른 다음, 4/5톤 짐차에 실려 꼬박 하루를 달리며 21사단 백두산부대 휴양소에 닿아, 이곳에서 사흘 동안 눈쓸기를 하고서야 비로소 강원도 양구 동면 원당리에 있는 21사단 11연대에 떨어졌습니다. 연대 한쪽 막사에서 하룻밤 지내며 또 눈쓸기를 했고, 이듬날 새벽에 다시 4/5톤 짐차에 실려 두 시간쯤 달려 멧골 깊숙하게 들어갑니다. 대암산, 월운리, 천지, 대우산, 도솔산, 이렇게 다섯 군데 비무장지대에서 여느 보병(땅개)으로 뒹굴었고, 1997년 12월 31일에 엄청나게 퍼붓는 눈길을 헤치며 가까스로 전역을 했습니다.


  군대에 있는 동안 사람들은 계급장에 따라 바보가 됩니다. 나이가 열 살이 위가 되든 아래가 되든, 계급장에 따라 ‘님’이 됩니다. 똑같은 계급장이라 하더라도 군대밥(짬밥)을 몇 그릇 더 먹었느냐에 따라 ‘님’이 달라집니다. 하루라도 일찍 군대밥 먹었으면 ‘님’이 되지요.


  여느 회사에서도 이와 같아요. 회사와 군대는 위계질서가 똑같습니다. 회사와 군대는 서로 똑같이 전쟁을 합니다. 내가 안 죽으려면 너를 죽여야 하듯 다툽니다. 내가 살겠다며 내 밥그릇을 챙깁니다. 함께 살아가는 길을 안 찾는 회사요 군대이지요. 중앙정부에서 꾀하는 경제개발을 생각해 봐요. 경제개발이란 다 함께 잘 살아 보자는 뜻이 아닙니다. 어느 한쪽을 파헤쳐서 돈을 더 많이 얻어내려는 뜻입니다. 지구별을 아름답게 돌보면서 꾀하는 경제개발 내놓는 중앙정부는 아직 어디에도 없습니다. 시골 농사꾼을 보살피면서 꾀하는 경제개발 이끄는 중앙정부는 지구별 어디에 있을까요.


  누군가는 군대에서 보낸 일을 ‘추억’이라느니 ‘낭만’이라느니 말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추억도 있고 낭만도 있겠지요. 군대에서라고 추억이나 낭만을 말하지 말란 법은 없어요. 감옥에서도 추억과 낭만 찾을 수 있고, 먹을 것 없어 쫄쫄 굶는 가난한 집에서도 추억과 낭만 찾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군대는 전쟁을 일으키려고 만들었어요. 전쟁을 일으켜서 ‘이웃’ 아닌 ‘적군’을 죽이려고 만들었어요.


  전쟁이 터지면, 이쪽에서는 저쪽을 적군으로 삼고, 저쪽에서는 이쪽을 적군으로 삼습니다. 그러면 생각해 봐요. 이쪽에서 군인이 되는 사람은 누구요, 저쪽에서 군인이 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이쪽이든 저쪽이든 군인이 되는 사람은 모두 ‘여느 사람’, 곧 백성입니다. 서민입니다. 민중입니다. 먼먼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군인이 되는 사람은 언제나 ‘여느 사람’이에요. 예전에는 모두 다 ‘농사꾼’이 군대로 끌려왔겠지요. 1950년부터 벌어졌다고 하는 한국전쟁에서도 군인은 죄 농사꾼이었고, ‘우리 편 군인’이 쏜 총에 맞아 죽은 ‘적군’도, ‘적군’이 쏜 총에 맞아 죽은 ‘저쪽 군인’도 모두 농사꾼이었어요.


  농사꾼이 왜 총을 들어야 했을까요. 농사꾼이 왜 흙이 아닌 총을 만져야 했을까요. 농사꾼이 왜 사랑스러운 이웃을 돌보지 않고, 온통 적군만 생각하며 ‘사람 죽이는 짓’을 해야 했을까요. 1980년 5월 광주에서 ‘사람을 죽인’ 이들도 군인입니다. 군인은 ‘사람을 죽이’면서 ‘사람을 죽인다’고 느끼지 않도록 배웁니다. 군인은 ‘사람 아닌 적군’을 죽인다고 배웁니다. 군인은 사람을 죽여도 법으로 벌을 받지 않고 죄값을 따지지 못합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 죽이는 특권(?)’을 받는 군인 또한 ‘사람 대접 못 받는’ 셈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아끼는 삶을 못 배우고, 사람을 죽이고 괴롭히며 때리는 재주만 배우는데, 군인이 사람다운 넋을 건사할 수 없습니다.


.. 이 전쟁 이야기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쓰인 듯하지만, 사실은 미국의 입장만 도드라져 있지 않습니까? 그 속에는 해방 뒤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다양하고 격렬한 사람들의 이야기, 해방의 기쁨, 새 나라를 향한 열정, 군중의 물결 따위는 아예 나와 있지도 않잖아요 … 이 삐라들은 한강을 건너오는 모든 민간인을 적이라고 말하네요. 실제로 미군에게는 피난민에게 총을 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어요 … 미군은 민간인 거주지를 포함한 월미도 동쪽 전체를 집중 폭격했답니다. 민간인 희생을 줄이려는 어떠한 조치도 없이 월미도 전체를 무차별 폭격하고 눈으로 식별 가능한 높이에서 주민에게 기총 소사가 행해졌죠 ..  (34, 43, 54쪽)

 

 


  전쟁을 부르는 군대입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군대입니다. 평화를 짓밟는 군대입니다. 평화를 깔아뭉개는 군대입니다. 군대를 거느리느라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퍼붓습니다. 군대에서 쓰는 전쟁무기를 만들고, 전쟁무기를 보살피며, 전쟁무기를 새로 만드는 데에 돈을 끔찍하게 많이 쏟아붓습니다.


  전쟁이 왜 터지는가를 생각해 보셔요. 서로 이웃나라로 쳐들어가서 ‘돈과 자원과 보배와 땅’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이웃나라로 쳐들어가서 돈이나 자원이나 보배나 땅을 빼앗으려고 할까요? 첫째, 정치권력자가 돈과 자원과 보배와 땅을 혼자 차지하면서 배불뚝이가 되려는 꿍꿍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저희 나라가 배고프기에 배고픈 사람들 먹여살리려고 전쟁을 일으킨다고 내세웁니다.


  생각해 봐요. 전쟁무기와 군대에 들이는 돈을 이웃나라한테 나누어 준다고 생각해 봐요. 전쟁 날 일 있겠습니까. 처음부터 서로서로 ‘군대와 전쟁무기’ 아닌 ‘나눔과 사랑’에 돈과 품과 땀을 들인다면, 지구별은 아름답고 평화롭습니다. 중앙권력자가 사람들을 바보로 길들이려고 군대를 거느리지요. 중앙권력자가 스스로 권력을 지키려고 군대를 더 단단히 갖추지요.


  평화를 바란다면 총칼 아닌 호미와 쟁기를 들 노릇입니다. 평화를 꿈꾼다면 탱크나 전투기나 잠수함이나 미사일 아닌 꽃과 풀과 나무와 숲을 보살필 노릇입니다. 권력이 생기고 군대가 나타나면서 주먹다짐과 따돌림이 생깁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짓을 ‘법으로도 억누르지 못하는’ 모습이 되니, 주먹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짓이 자꾸 불거집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사내녀석이 군대에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는 말을 합니다. 그야말로 어리석지요. 군대에 가서 ‘사람 죽이는 재주’를 배우는 사내녀석이 어떻게 사람이 되겠습니까. 다만, 집에서 어리광쟁이로 지내다가 군대에서 규율에 얽매여 쉬지 못하게 채찍질 받으니까 그제서야 ‘집에서 얼마나 느긋하고 즐겁게 보냈는가’를 돌아보면서 게으른 버릇을 고친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집에서 어버이가 이녁 아이 게으른 버릇을 바로세우지 못한 잘못을 깨닫지 않고 ‘군대에 보내면 끝’이라고 여기니, 얼마나 무섭습니까. 바보스러운 마음이란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사내녀석은 군대에 가서 주먹질과 ‘사람 죽이는 재주’에 길들여져서 쉽게 주먹다짐을 하고 가정폭력 일으키며 사회범죄를 일으키는 한편, 위계질서에 따라 척척 생체기계처럼 움직이고 맙니다.


  명령과 지시에 따라 복종을 하면 사람 아닌 생체기계예요. 사람은 창조와 상상으로 움직이는 목숨이에요. 사랑과 꿈으로 삶을 지을 때에 사람입니다. 창조도 상상도 빼앗기고, 사랑과 꿈도 잃는다면, ‘사람 죽이는 재주로 스스로 죽이는 노예’ 노릇밖에 못합니다.


.. 고지 쟁탈전은 북한군과 중국군의 죽음만을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라는 명령으로 한국군도 고지 쟁탈전에서 셀 수 없이 많이 죽어 갔습니다 … 고지 뺏기는 자기의 공적만을 생각한 장군들의 무모한 작전으로, 많은 병사들을 희생시켰답니다. 그런데도 이를 지휘한 장군들은 곧잘 국군의 용감함과 자신의 공적으로 고지 뺏기를 미화하곤 하죠 … 과거 일본의 한반도 지배권을 인정했던 미국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국의 즉시 독립을 원하지 않았죠. 이렇게 살펴보니 미국의 정의가 반드시 한국인에게 정의는 아닌 것 같네요. 오히려 미국은 자기들의 이익과 맞물려 있으면,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그것을 정의라고 주장합니다 ..  (70, 71, 190쪽)

 

 


  이임하 님이 일군 《10대와 통하는 한국 전쟁 이야기》(철수와영희,2013)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나라 푸름이한테 들려주는 ‘남녘과 북녘 사이에 일어났던 생채기’ 이야기입니다. 정치권력자와 학자는 ‘한국 전쟁’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이들한테나 ‘전쟁’이지 ‘전쟁 당사자’한테는 전쟁이 아닌 ‘생채기’입니다.


  내 아이가 죽고 내 옆지기가 죽으며 내 이웃과 동무가 모두 죽은 생채기입니다. 정치권력자끼리 꿍꿍셈 키워 남쪽과 북쪽을 갈랐어요. 정치권력자끼리 꿍꿍속 키워 사회 제도를 나누었어요.


  남녘과 북녘은 남남이 아닙니다. 그저 한겨레일 뿐입니다. 경상도와 전라도는 남남이 아닙니다. 서울과 경기도는 남남이 아닙니다.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는 남남일까요. 인천과 부천은 남남일까요. 서로 다른 삶 일구는 이웃이자 동무입니다. 서로 다른 삶터에서 다른 사랑 보듬는 이웃이요 동무입니다.


.. 세계를 서로 적대하는 두 세계로 나누어 바라보는 방식은 소련과 북한 또한 미국과 다르지 않았어요. 두 손바닥이 부딪쳐야 소리가 나듯 냉전의 세계관은 서로 마주보고 귀를 막은 채 자기만 옳다 소리치는 것과 같습니다. 곧 냉전의 세계관은 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상대가 있어야만 성립하는 세계관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소개된 삐라를 읽다 보면, 냉전이 한국 전쟁의 명분으로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죠 … 왜 전쟁 반대와 평화가 중요할까요 …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려면 상대를 힘으로 누르거나 굴복시키려 할 게 아니라, 먼저 상대를 인정하고 대화와 교류로 이해해야 합니다 ..  (184, 198, 199쪽)

 


  이야기책 《10대와 통하는 한국 전쟁 이야기》는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누가 옳거니 그르거니 따지지 않습니다. 남녘 정치권력자와 북녘 정치권력자와 미국 정치권력자가 서로 어떤 속셈으로 이 나라 사람들을 괴롭히고 들볶으며 닦달했는지를 차분하게 알려줍니다. 정치권력자 틈바구니에서 생체기계처럼 휘둘리거나 휩쓸린 채 죽고 죽이며 스스로 아프고 만 가녀린 사람들 이야기를 조용히 밝힙니다. 누가 전쟁을 불렀고, 누가 서로를 손가락질하도록 부추겼으며, 누가 이 나라를 이토록 망가뜨렸는가 하는 뿌리를 가만히 속삭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슬픈 전쟁이나 슬픈 노예나 슬픈 군대나 슬픈 ‘삐라 공작’이 아닌, 즐거운 평화와 아름다운 사랑과 따사로운 꿈을 키우자는 이야기를 천천히 펼칩니다.


  군대는 전쟁을 부릅니다. 군대는 죽음을 부릅니다. 군대는 미움과 주먹다짐과 따돌림을 부릅니다. 평화가 평화를 부릅니다. 사랑이 사랑을 부릅니다. 꿈이 꿈을 부릅니다. 이 나라 예쁜 아이들이 군대에 끌려가지 않기를 빕니다. 이 나라 예쁜 어른들이 하루빨리 군대를 훌훌 털어내어 평화로운 삶 일구기를 빕니다. 이 나라 예쁜 아이들이 전쟁 아닌 평화를 생각하고, 죽음 아닌 사랑을 헤아리며, 미움·주먹다짐·따돌림 아닌 웃음·노래·춤을 이야기할 수 있기를 빕니다. 4346.6.2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청소년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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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06-2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긴 글을 쓰시다니, 하실 말씀이 많으셨나 봐요.


"군대는 전쟁을 부릅니다. 군대는 죽음을 부릅니다. 군대는 미움과 주먹다짐과 따돌림을 부릅니다. 평화가 평화를 부릅니다."
- 세계인이 모두 이렇게 한 마음 한 뜻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군사력에 들어가는 비용이 전부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잘 보고 갑니다. ^^

숲노래 2013-06-21 14:50   좋아요 0 | URL
군대와 전쟁 이야기는 그닥 하고 싶지 않지만,
모르는 사람, 제대로 모르는 사람, 올바로 알려고 안 하는 사람, 잘못 아는 사람...
너무 많아서,
또 책이 아름답기 때문에
이래저래 그럭저럭 이야기를 붙였어요.

부디 '군대와 전쟁'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이 똑똑히 알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