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홍승은 지음 / 동녘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5.5.25.

까칠읽기 70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홍승은

 동녘

 2017.4.17.



내가 거북하거나 성가시거나 싫으니, 남도 거북하거나 성가시거나 싫기를 바랄 수 있다. 내가 즐겁고 아름답거나 사랑이기에, 누구나 즐겁고 아름다우면서 사랑이기를 바랄 만하다.


바로 내가 나부터 어떻게 보고 느끼느냐에 따라서, 내가 둘레를 바라보는 눈이 바뀐다. 남이 나를 바꾸지 못 하고, 내가 남을 바꾸지 않는다. 누구나 스스로 바꾸고 가다듬고 추스른다.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를 읽으면서 생각해 보았다. 왜 굳이 ‘남’을 들추어야 할까? 남을 따지거나 말하기보다는 ‘나’는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하면서 이 삶을 어떻게 사랑으로 짓는지 풀어놓으면 넉넉하지 않을까?


순 사내들이란 제멋대로라고 여기면 그냥 끝이다. 거꾸로 보아도 같다. 순 가시내들이란 멋대로라고 여기면 그저 끝장이다. 남이 쌓은 담벼락도 틀림없이 있을 텐데, 내가 쌓은 담벼락도 나란히 있다. 둘이 서로 쌓은 담벼락이 두 겹이기에 서로 안 만나기 일쑤이다.


자꾸 이야기할 일이다. 다시 이야기할 노릇이다. 또 이야기를 걸고, 새로 이야기를 들으면서, 함께 걸어갈 길을 찾으면 된다. 온나라 책수다를 보면, 거의 순이밭이다. 돌이는 책수다에 거의 안 오거나 아예 안 오기 일쑤이다. 그 많은 사내는 어디에 있을까? 이 나라는 순이돌이가 나란히 있는데, 왜 배움자리만큼은 사내가 안 끼려고 할까? 순이는 한갓지고 일이 없어서 배움자리나 책수다에 가지 않는다. 순이는 참으로 스스로 새로 배우고 다시 익히려는 마음이기에 자꾸자꾸 배움자리나 책수다에 찾아간다.


적잖은 사내는 배움자리나 책수다에 한걸음을 떼고는 다시 안 찾아오기 일쑤이다. 한걸음 들었으면 되었거니 여기는데, 터무니없는 소리이다. 한걸음 듣고서 ‘다 알았’다면 이 나라가 아름답게 거듭나야 하지 않을까? 한걸음 듣고서 ‘다 알았’다고 여기는 마음이라면, 밥을 한 그릇 먹었으니 이제 배고플 일이 없을 테니, 앞으로는 아주 안 먹어도 되는지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 ‘다 알았’다는 사내는 왜 아직도 집안일을 그렇게 못 하거나 안 할까? ‘다 알았’다는 아저씨는 왜 아직도 아이를 돌보는 일을 그렇게 못 하거나 안 할 뿐 아니라 꼬랑지를 빼는가? ‘다 알았’다는 아저씨는 왜 길바닥에 가래와 꽁초를 그렇게 많이 내뱉을까?


갑갑하고 답답해서 죽을 노릇이기에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같은 책을 썼다고 느낀다. 그러나, 내가 갑갑하기에 너더러 갑갑하라고 한다면, 이런 말이 오히려 ‘말주먹’으로 번지기 쉽다. 내가 여태 이렇게 답답했으니 너도 이제부터 답답해야 한다고 몰아세우면, 언제나 다툼으로 번지고 싸움으로 도진다. 끝없는 앙갚음으로 쳇바퀴에 갇힌다. 앙갚음이라는 사슬은 남(너)이 먼저 끊어야 하지 않는다. 남(너)은 아마 죽었다 깨어나다 안 끊고 안 바꾸리라.


박근혜도 김건희도 ‘년’이 아닌 ‘순이’에 ‘가시내’이다. 박정희도 윤석열도 ‘놈’이 아닌 ‘돌이’에 ‘사내’이다. 그들한테 섣불리 ‘년놈’ 같은 말을 붙이지 않을 줄 아는 마음으로 일어설 적에 이 나라를 갈아엎은 다음에, 아름답게 돌볼 수 있다. 그들이 일삼거나 저지른 ‘잘못’을 짚고 따지되, ‘사람’을 할퀴거나 갉지 않을 줄 아는 마음으로 서야, 비로소 아이들한테 이 나라를 아름답게 일구면서 물려줄 만하다. 그들이 참으로 못나거나 나쁘더라도 그들을 ‘년놈’으로 할퀴거나 깎아내리려고 하면, 이 말씨는 늘 우리한테 고스란히 돌아온다. 끝없는 싸움수렁으로 뒹군다.


홍승은 씨는 ‘어느 시인’과 ‘활동가 진보 진영’ 사람들이 겉속이 다른 모습을 보이는 삶을 온몸으로 겪어 보았다고 밝힌다. ‘그 시인’ 하나만 그와 같지 않다. 틀림없이 아니다. 사람들이 우러르거나 섬기거나 모시는 숱한 ‘시인과 소설가와 기자와 평론가와 교수’ 무리는 매한가지이다. 그러면 생각해 봐야지. 겉속이 다른 ‘시인’과 ‘진보’를 어떻게 해야 갈아엎을까? 갈아엎은 자리에는 무엇을 심어야 할까?


갈아엎는 몸짓으로 끝이 아니다. 갈아엎은 땅에는 씨앗을 심을 노릇이고, 씨앗을 심었으면 돌볼 노릇이다. ‘갈아엎기(개혁·혁명·번혁)’만 진보이지 않다. ‘심기·씨앗·돌봄·지킴’만 보수이지 않다. 모든 사람은 ‘진보·보수’가 나란하기에 스스로 빛난다. 갈아엎은 데를 또 갈아엎으면 다 죽는다. 돌보기만 할 뿐 안 거두고 안 갈아엎으면 이때에도 다 죽는다. 그러니까, 둘 다 해야 사람이고, 남(너)을 미워하는 일만 하려고 든다면, 나부터 쓰러지고 죽을 테지.


ㅍㄹㄴ


스무 살은 무조건 대학생이거나 재수생이어야 하고, 여자는 머리가 일정 정도 이상 길어야 함은 물론, 예뻐지길 욕망할 거라는 견고한 편견들. 아무 생각 없이 뱉은 질문은 정말 생각이 없어서 폭력이 된다. (11쪽)


서점에는 남성 수도권·중산층·고학력·이성애자 저자가 ‘여의도 정치’를 비판하거나 경제적 불평등·철학을 다룬 책이 가득하다. (15쪽)


잘 차려진 밥상 앞에서 바로 맛을 평가하기 전에, 재료를 사오고 손질하고 씻고 썰고 재우고 볶고 양념하고 찌고 설거지하는 누군가의 지난한 노동이 우선 눈에 보인다. (86쪽)


동등하게 소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고분고분한 대상을 찾는 심리는, ‘내 뜻을 거스를 때 혼낼 수 있다’는 당위를 전제한다. (134쪽)


집회 현장에서 박근혜와 최순실을 ‘년’으로 욕하지 말라는 발언이 집회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거라는 식의 글을 당당히 올릴 수 있는 권력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275쪽)


활동하며 만난 사람들 중에는 일베나 새누리당 쪽 사람들보다 같은 진영의 사람에게 상처받은 이들이 많았다. 친구 D는 종종 “마이크·피켓·펜을 내려놓았을 때 사람들이 변하는 모습이 무섭다”며, “다른 무엇보다 그런 모습에서 인간에 대한 회의감이 든다”고 말했다. (278쪽)


한 시인을 만났다. 그는 세월호의 슬픔에 누구보다 가슴 절절한 시구를 뱉어내는 사람이었다. 시에서 느껴지는 진심에 감동해서 그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처음 마주한 그는 다짜고짜 ‘어린’ 내게 반말을 했고, 먹을 것 좀 사오라며 대뜸 카드를 내밀었다. 그 뒤로도 쭉 이어진 그의 무례한 말과 행동에 한 번 놀라고, 본 행사 때 진심 어린 표정으로 슬프게 시를 읽는 모습에 다시 한 번 놀랐다. (288쪽)


+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홍승은, 동녘, 2017)


수도권으로 가지 않고 지방에 남아 있겠다고

→ 서울곁으로 가지 않고 작은고장에 남겠다고

→ 서울밭으로 가지 않고 마을에 있겠다고

10쪽


엄마 혹은 누군가가 기쁘도록 말을 잘 들을 거라는 어린 나의 다짐을 보며 마음이 쓸쓸해졌다

→ 엄마나 누가 기쁘도록 말을 잘 듣겠다는 어린 다짐을 보며 쓸쓸했다

→ 엄마나 남이 기쁘도록 말을 잘 듣겠다는 어린 다짐을 보며 쓸쓸했다

30쪽


보통의 존재라고 못박기에 나와 너는 고유하다

→ 흔하다고 못박는데 나와 너는 반짝인다

→ 수수하다고 못박지만 나와 너는 빛난다

→ 그냥이라고 못박으나 나와 너는 다르다

33쪽


악력이 약하고 손바닥 살이 연해서요

→ 손힘이 여리고 손바닥살이 여려서요

→ 아귀힘이 없고 손바닥살이 여려서요

36쪽


그때부터 집중 포화가 이어졌다

→ 그때부터 쏟아붓는다

→ 그때부터 퍼붓는다

→ 그때부터 들이붓는다

51쪽


상대적으로 더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에 있다 보면 시선이 확장되기 마련이다

→ 더 눈치를 봐야 하는 자리에 있다 보면 눈길이 넓게 마련이다

→ 더욱 눈치를 봐야 하다 보면 눈길을 넓히게 마련이다

86쪽


상대가 여성일 경우 으레 가르치려고 드는 남성의 특성을 일컫는 맨스플레인은 그래서 중요하다

→ 그래서 가시내를 마주하면 으레 가르치려고 드는 꼰대질을 눈여겨본다

→ 그래서 순이와 마주하면 으레 가르치려고 드는 잘난척을 들여다본다

134쪽


어떤 존재가 사회적으로 배제된다는 것, 보이지 않는 것, 금기시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 어떤 사람이 이곳에서 막히고, 보이지 않고, 묶인다면 어떤 뜻일까

→ 어느 누가 이 삶에서 빠지고, 보이지 않고, 가로막히면 어떤 뜻일까

304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서의 뇌과학 - 당신의 뇌를 재설계하는 책 읽기의 힘 쓸모 많은 뇌과학 5
가와시마 류타 지음, 황미숙 옮김 / 현대지성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5.5.10.

까칠읽기 71


《독서의 뇌과학》

 가와시마 류타

 황미숙 옮김

 현대지성

 2024.11.6.



  오늘 우리는 ‘책’을 아무렇지 않게 쉽고 넉넉히 누릴 수 있다만, 온나라 숱한 책숲(도서관)이 이렇게 퍼진 지 기껏 열 해 남짓이다. 열 해 앞서만 해도 책숲이 제대로 없거나 빠듯하기 일쑤였고, 이 대목을 느낀 온나라 작은사람은 ‘작은책숲’을 마을 한켠에 열어서 온힘을 기울여 가꾸고 돌보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책’도 ‘책숲’도 제대로 누린 지 얼마 안 될 뿐 아니라, ‘책집’마저 제대로 누린 지 오래지 않다. 전두환은 1987년에 드디어 끌려내려오고, 박정희는 1979년에 드디어 숨지고, 이승만은 1960년에 드디어 떨쳐내고, 1953년에 한겨레싸움이 드디어 끝나고, 1945년에 드디어 일본이 물러가고, 1900년 언저리에 드디어 위아래틀(신분위계질서봉건국가)이 사라졌더라도, “누구나 누리는 책”이 된 지는 얼마 안 된다.


  “일하는 누구나” 책을 누린 지 얼마 안 되지만, “붓을 쥔 지식권력자”는 예부터 책을 누렸고 글을 거머쥐었다. 훈민정음은 1400년대에 태어났되 1900년에 이르기까지 아무나 배워서 쓸 수는 없었다. ‘한글’이란 이름은 1913년 무렵에야 주시경 님이 붙였고, 흙지기(농사꾼)로 살던 사람들(백성)은 글은커녕 붓이나 종이조차 만질 수 없던 나날이 길다. 이 얼거리를 읽지 않는다면, 오늘날 숱한 책이 왜 “어렵고 까다롭게 일본말씨와 중국말씨와 옮김말씨 범벅에서 안 벗어나는지” 몰라보게 마련이다. 우리는 아직 “일하는 누구나 즐기고 누릴 책”이라는 터전을 가꾼 적이 없다. “붓을 쥔 지식권력자”끼리 쏟아내던 책과 글이라는 틀부터 걷어내지 못 한 판이거든.


  《독서의 뇌과학》을 읽었다. 읽었으나 책집 책시렁에 얌전히 놓았다. 여러모로 애쓴 책인 줄 알겠지만, “일하는 누구나 책읽기”라는 길하고는 너무 멀다고 느꼈고, 한글로 옮긴 분은 ‘우리말씨’가 아닌 ‘일본말씨 + 옮김말씨’에 갇혔다. 새글을 쓰든, 이웃글을 옮기든,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서 읽어 줄 만한 글인지 살펴야 한다. 아이가 귀로 들으면서 바로바로 알아차릴 만하도록 글결을 안 가다듬는다면, 글쓰기도 옮기기도 아닌, “또다른 글담(문자권력)”일 뿐이다.


  왜 읽고 어떻게 읽어야 할까? 무엇을 읽고 어떻게 나누면서 이 삶을 스스로 지으면서 노래할까?


  책이 왜 책이며, 우리가 곁에 책을 두면서 스스로 어떻게 눈을 틔우고 마음을 열고 생각을 가꾸고 삶을 짓고 살림을 북돋우고 사랑을 나누는 하루를 누릴 만한가 하는 대목을 되새겨야지 싶다. 이제부터 책과 글을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헤아려야지 싶다.


  ‘사회평론’과 ‘노원문고’와 ‘윤철호’가 책담을 쌓고서 ‘대한출판문화협회’라는 이름을 내걸며 ‘서울국제도서전 사유화’를 꾀하는 2025년이다. 내가 쓴 책을 펴낸 곳을 비롯해서 적잖은 펴냄터는 이미 ‘서울국제도서전 불참’을 오래도록 해왔다. ‘그들끼리 쌓은 책담’으로 여태 어떻게 길미를 챙겼는지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국제도서전’을 해야 할까? 왜 굳이 나라밖에 우리 책을 팔거나 알려야 할까? 먼저 온나라 사람이 함께 나누고 사랑할 책부터 제대로 일구고 고루 알리면서 두루 읽는 길을 열어야 하지 않을까? ‘나라밖잔치’라는 허울을 걷어내고서 ‘누구나잔치’라는 길을 짜야 하지 않을까? 돈을 조금만 더 내도 자리(부스)를 열이건 스물이건 마구 내주는 돛떼기판이라면 책잔치일 수 없다. 모든 펴냄터와 글지기가 ‘한 칸이나 두 칸’만 자리를 얻어서 고루두루 어울리는 자리여야 비로소 책잔치이다. ‘문학동네’처럼 새끼를 잔뜩 친 펴냄터는 ‘문학동네 임프린트’만으로도 “서울국제도서전을 뒤덮을” 수 있다.


  잔치란 뭔가? 아기가 태어나서 자라는 나날을 기리는 돌잔치이든, 순이돌이가 새롭게 짝을 맺는 자리를 기리는 꽃잔치이든, 예순이나 일흔 나이를 기리는 예순잔치나 일흔잔치이든, 해마다 돌아오는 첫날을 기리는 첫날잔치이든, 잔치판에 ‘비싼 참가비’를 받는다고 한다면, 미친짓이라고 손가락질하지 않을까? 그러나 대한출판문화협회는 여태 서울국제도서전을 ‘작은펴냄터는 얼씬조차 하기 어렵도록 비싼 자리값’을 챙겨 왔다.


  책잔치다운 책잔치라면, 이곳에 ‘온나라 골골샅샅 펴냄터와 글지기’를 ‘몸만 와주셔도 고맙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모셔야 맞다. 작고 알차게 책을 펴내는 곳이 얼마나 많은가? 이들한테 비싼 자리값을 받으려 하지 말고, 이들한테 오히려 ‘모심삯’을 드리면서 ‘도움일꾼’을 붙여 주는 틀을 짜야 ‘출협답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윤철호 씨는 ‘서울국제도서전 사유화’를 노리면서 그냥그냥 돈벌기와 이름벌기와 힘벌기에 마음을 기울인다. 우리나라 책잔치라면, “큰펴냄터는 이바지삯(기부금)을 통크게 내도록 하면서 두 칸씩 주”고, “작은펴냄터는 모심삯을 출협에서 내놓아서 자리를 한 칸씩 내주”는 얼거리를 짜야 맞지 않을까? “큰펴냄터는 3억씩 이바지삯을 내고서 두 칸만 나오는 틀”로 이바지(재능기부)를 하고, “작은펴냄터는 모심삯을 받고서 조촐히 한 칸을 채우는 틀”로 어울려야, 비로소 우리 스스로 빛나는 즐겁고 아름다운 책잔치를 이룬다고 본다.


  또한 서울국제도서전 ‘자리’는 ‘제비뽑기’를 해야 한다. 돈과 뒷심에 따라서 좋거나 나쁜 자리를 아무렇게나 내주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작가강연’은 이름난 이들은 그만 부르고, 갈래마다 알뜰살뜰 한길을 고이 걸어가는 사람들로만 가려서 수수하고 조촐하게 꾸려야 맞다. ‘인기작가’이든 ‘무명작가’이든 딱 스무 사람만 받아서 조용하고 조촐하게 이야기밭을 펴는 작가강연을 곳곳에 마련해 놓아야, 사람들이 고루두루 책과 사람을 만나면서 제대로 배우고 익히는 길을 누릴 만하다. 이러한 대목은 터럭만큼도 안 살피는 이 나라 책마을이기에, 그들은 글담을 나날이 더 높이 쌓으려 한다. ‘뇌과학’이 나쁠 일은 없되, 누구한테 어떻게 이바지하려는 ‘골길’인지 생각해야지 싶다. ‘골’을 왜 어떻게 쓰는 길이 스스로 눈과 마음과 몸과 손발을 틔우는 슬기롭고 어진 빛인지 헤아릴 때라야 비로소 책 한 자락이 어떤 숨결인지 누구나 스스로 알아보겠지. 우리말 ‘골’은 한자로 ‘뇌’도 가리키되, ‘고을’을 줄인 낱말이기도 하고, ‘골짜기’를 줄인 낱말이기도 하고, ‘고요·곱다’와 ‘굴’을 이루는 밑동이기도 하다.


  ‘서울국제도서전 주식회사’라는 핑계를 대면서 ‘사유화’를 하지 말고, ‘재능기부’를 하기를 빈다. 돈이 있는 그대들은 돈으로 재능기부를 하되, 자리(부스)는 둘만 받기를 빈다. 굳이 6월에 판을 벌려야 하는가? 깨끗하게 치우시라(취소하시라). 2025년은 건너뛰고서 2026년부터 제대로 잔치판을 벌이시라. 온나라 펴냄터 3000곳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그리고 온나라 글지기(작가) 1000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제대로 책잔치를 꾸릴 만한 밑틀을 아예 새롭게 처음부터 짜고서, 그대들부터 재능기부를 하고서, 작은펴냄터와 작은글지기를 모시는 신나는 어울림마당을 새해 2026년부터 여는 ‘서울국제도서전 협동조합’을 꾸릴 수 있기를 빈다. 그대들이 가야 할 길은 주식회사가 아닌, 우리가 함께 머리를 맞대는 두레(협동조합)여야 맞다.


ㅍㄹㄴ


《독서의 뇌과학》(가와시마 류타/황미숙 옮김, 현대지성, 2024)


이런 기기가 중독을 가져온다는 사실 외에 구체적인 부작용에 대해선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 이런 살림거리에 길들기 쉬운데 다른 말썽거리는 알려지지 않았다

→ 이런 세간에 목매달기 쉬운데 여러 골칫거리는 알려지지 않았다

16


독서는 나이에 관계없이 모든 세대에 유익한 활동이다

→ 책은 누구한테나 이바지한다

→ 책을 읽으면 누구나 빛난다

→ 책은 너나없이 북돋운다

→ 우리는 책을 읽으며 배운다

19


묵독은 눈으로 문자를 보고 그 내용을 뇌의 기억을 저장고에 일시적으로 담으면서 의미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 눈읽기로 줄거리를 머리에 가볍게 담으면서 뜻을 헤아려 간다

→ 속읽기로 줄거리를 머리에 넌지시 담으면서 속내를 알아간다

87


필요할 때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교육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로 인한 결과를 총체적으로 고려해 보아야 한다

→ 그때그때 새길을 들여서 가르치되, 새길이 어떻게 퍼질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 그때마다 새롭게 다루고 가르치되, 새길이 어떻게 스밀지도 헤아려야 한다

227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하는 나의 문방구
구시다 마고이치 지음, 심정명 옮김 / 정은문고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5.5.5.

까칠읽기 69


《사랑하는 나의 문방구》

 구시다 마고이치

 심정명 옮김

 정은문고

 2017.1.17.



“文房具56話”를 옮긴 《사랑하는 나의 문방구》를 읽었다. 1956년에 나온 책이라 그런지 살짝 해묵은 이야기로구나 싶다. 우리로서는 1956년에 글붓살림 이야기를 책으로 내기 어려웠을 만하지 싶으면서도, 오히려 그무렵에야말로 글붓살림이 무엇인지 더 찬찬히 짚을 만했으리라고도 본다.


거꾸로 2025년 요즈음에야말로 글붓살림을 새롭게 바라보면서 “손으로 가꾸는 글살림”을 헤아리는 이야기를 엮을 수 있다. 보는 쪽도 짓는 쪽도 ‘손’을 써야 한다. 종이에 그리든 판(디지털화면)에 그리든, 언제나 손을 쓴다. 손전화나 셈틀도 손을 움직여서 가눈다. 여러모로 보면 모든 곳에서 손이 없이는 아무 일을 못 한다.


거의 잊힌 말씨인 ‘솜씨’라는 우리말은 워낙 ‘손씨’이다. ‘손 + 씨’이다. 손으로 짓기에 손을 거쳐서 씨앗을 심듯 살림을 짓고 빚고 가꾸고 일군다는 뜻이다. ‘솜씨 = 손씨’인 줄 알아차린다면, ‘발솜씨’처럼 터무니없는 말은 안 쓸 텐데, 아무튼, 손을 쓸 적에는 “두 손”을 쓴다. “한 손”으로도 천천히 짓고 움직이고 다룰 수 있되, 우리 몸은 “두 손”을 고르게 쓰는 결이다. 한 손을 다칠 적에는 다른 한 손만 놀릴 텐데, 한손놀림도 두손놀림이라는 얼거리를 헤아리게 마련이다.


왼손과 오른손을 하나인 몸으로 여겨서 다루기에 빚고 짓고 가꾸고 일구고 심고 돌보고 품고 안고 쓰다듬고 손질하고 고치고 나눈다. 글붓이란 무엇일까? 한 손으로 붓을 쥐더라도 다른 손으로 받친다. 한 손으로 다 그리는 듯해도, 다른 손이 단단히 받치거나 잡아 주어야 한다. 언제나 두 손을 한몸으로 움직인다.


《사랑하는 나의 문방구》를 읽다 보면, 일본사람인 글쓴이는 ‘일본 붓살림’을 놓고서 살짝 푸념하기도 하는데, 이웃나라 눈으로 보자면 너무 배부른 소리 같더라. ‘한국’이라는 나라는 흔한 연필과 볼펜과 종이조차 엉터리이다. 이 나라가 내놓는 지우개도 얼마나 엉터리인지 모른다. 이 나라에서 온붓(만년필)을 내놓을 수 있을까? 설마, 꿈조차 못 꾼다. 이 나라는 붓 한 자루에 종이 한 자락조차 제대로 여미지 못 하면서 갖은 총칼(전쟁무기)에 펑펑질(핵발전소)에 돈을 들이붓는다. 어느덧 ‘한국 연필·볼펜’은 ‘중국 연필·볼펜’보다 뒤떨어졌다. 딴소리 같으나, ‘돌봄이(의사)’는 좀 모자라거나 없어도 되지만, 붓 한 자루는 없으면 안 된다. 돌봄이를 가르치려고 어마어마하게 돈을 쏟아붓기보다는, 종이 한 자락을 제대로 지어서 누리는 길에 제대로 돈을 써야 하지 않을까?


바탕(기초)은 바로 손을 쓰는 곳에서 비롯한다. 오늘날에도 호미와 낫은 대장간에서 손으로 짓는다. 손으로 빚는 살림은 오래오래 가면서 우리 곁에 있되, 손으로 안 빚는 살림은 얼마 안 가서 스러진다. 손빛을 담아서 손씨를 살리는 손살림이 흐르는 손글이라면 한결같이 반짝일 만하겠지.


ㅍㄹㄴ


하지만 연필로 쓴 글자는 매우 뚜렷이 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11쪽)


더욱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연필 깎는 시간 정도는 한숨 돌리고 싶다. (25쪽)


조바심 나는 마음을 누르면서 끈기 있게 하다 보면 끝내 풀리지 않는 적은 거의 없다. 그러느라고 5분씩 10분씩 시간을 써도 시간을 낭비했다거나 손해를 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74쪽)


지금은 누구나 그렇겠지만 붓으로 쓴 편지는 물론이고 봉투에 넣는 편지를 쓰는 일도 줄었을 뿐 아니라 개인적인 편지를 받는 일도 적어졌다. 매일 받는 우편물 중에서 봉투에 넣어 봉한 편지를 발견하면 정말 기쁘다. (104쪽)


수험생의 필통을 보면 여동생에게 빌려오기라도 했는지 꽃이나 병아리가 달려 있기도 하다. 촌스럽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니 어쨌든 입학시험쯤 되면 진지해지는 모양이다. (175쪽)


#文房具56話 #串田孫一


+


《사랑하는 나의 문방구》(구시다 마고이치/심정명 옮김, 정은문고, 2017)


지우개 하나가 동그랗게 작아져 있다

→ 지우개 하나가 동그랗게 작다

→ 지우개 하나가 동그랗게 줄었다

16


거리를 걸으면 압지를 나눠주던 시절이 있었다

→ 거리를 걸으면 누름종이를 나눠주기도 했다

49


시간을 낭비했다거나 손해를 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부질없다거나 아깝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 덧없다거나 잃었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74


문진을 남에게 받기도 하고 직접 만들기도 한 이유는 습자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 누름돌을 받기도 하고 손수 짓기도 했는데 글씨를 써야 하기 때문이다

→ 누름쇠를 받기도 하고 몸소 짜기도 했는데 붓글씨 때문이다

101


개인적인 편지를 받는 일도 적어졌다

→ 따로 글월을 받는 일도 드물다

→ 수수하게 글을 받는 일도 줄었다

104


필통, 필갑 그리고 시스

→ 붓집, 붓자루, 칼자루

→ 글붓집, 붓집, 칼집

174

sheath 칼집·칼자루 칼주머니·칼꽂이


나는 그런 도구를 결코 이색분자 취급하지 않는다

→ 나는 그런 살림을 다르게 다루지 않는다

→ 나는 그런 연장을 튄다고 여기지 않는다

181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관주의자를 위한 낙관주의 수업 -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낙관주의 만나기
델핀 뤼쟁뷜.오렐리 페넬 지음, 박태신 옮김 / 가지출판사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5.5.5.

까칠읽기 68


《비관주의자를 위한 낙관주의 수업》

 델핀 뤼쟁뷜·오렐리 페넬

 박태신 옮김

 가지출판사

 2018.11.5.



갈수록 온나라가 터럭만큼이라도 거리끼거나 못마땅하다고 여기면 “넌 나빠!”라든지 “넌 안 돼!” 하고 매섭게 자르거나 가르는 골이 깊어간다고 느낀다. 잘못이나 말썽은 타이르거나 다독이면서 바로잡거나 고칠 노릇이되, 우리 앞길에 가시밭이나 자갈밭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고 여기는 듯하다. 마치 “씨 없는 수박”을 바라는 셈이다.


그런데 “씨 없는 수박”을 얻으면, 이다음에는 어쩌지? 씨가 없는데 이다음 수박은 어떻게 심어서 거두는가? 씨가 없어도 ‘씨톨바꿈(유전자조작)’으로 ‘똑같은 수박 모습’을 얻으면 되는가?


옛말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몸을 살리는 밥이나 물이라면 ‘쓴물’이며 ‘쓴가루’이게 마련이다. 고양이가 몸엣것을 게우려고 일부러 괭이밥을 먹듯, 우리 몸을 맑고 정갈하면서 넉넉히 다스리려면 괭이밥처럼 쓰고 신 풀을 머금을 줄 알아야 한다.


《비관주의자를 위한 낙관주의 수업》은 나쁜책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Cultiver l'optimisme” 같은 책이름처럼 “밝게 바라보기”를 북돋우려는 줄거리라고 느낀다. 그런데 요즈음은 다들 아주 쉽게 놓치는데, ‘밝다·환하다’는 다르게 쓰는 낱말이다. ‘밝다’는 밤에 돋는 별을 바라보면서 쓰는 낱말이요, ‘환하다’는 새벽을 거쳐 아침에 이르는 해를 바라보면서 쓰는 낱말이다.


‘밝다’는 별처럼 반짝이는 결을 가리키고, ‘환하다’는 둘레가 모두 햇빛으로 가득한 결을 나타낸다. 이러한 길을 제대로 읽는다면, “밝게 바라보기”를 하려면 누구나 으레 ‘밤’을 맞이할 노릇이다. 제대로 깊고깊어 캄캄한 밤에 이를 적에라야 비로소 별을 그리고 찾는다. 밤이 없다면 별이 없다. 또한 낮에 해가 있으니 쉬어갈 밤을 맞이할 노릇이다.


구태여 좋거나 나쁘다고 가른다면 스스로 좀먹는다. 좀 힘들면 “그래, 이러면 힘이 들겠구나. 그런데 이렇게 힘든 일을 하는 이웃과 동무가 둘레에 많네.” 하고 배우면 된다. 좀 벅차면 “그래, 이 일을 이루려면 이렇게 땀흘리고 품들이면서 애써야 하는구나.” 하고 배우면 된다. 《비관주의자를 위한 낙관주의 수업》은 여러 ‘궂은일·나쁜일’을 어떻게 달리 바라보면 될는지 짚는 듯한데, ‘짚기’로 그치니 아쉽다. 짚으면 ‘배워’야 하지 않을까? 짚어서 배운 뒤에는 스스로 틈을 두어서 ‘익혀’야 하지 않을까?


마냥 좋게좋게 보며 넘어가면 하나도 못 배운다. 그저 좋기만 바라면서 조금이라도 걸리거나 부딪히면 몽땅 걷어내려고 할 적에도 못 배운다. 이를테면, 나하고 뜻이 터럭만큼이라도 다르면 ‘극좌·극우’라는 꼬리말을 붙이기 일쑤인데, 나하고 다르니까 다를 뿐이다. 다른 사람을 다른 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고 입으로는 외치지만, 정작 나하고 터락만큼이라도 길(정치성향)이 다르면 ‘극좌몰이·극우몰이’를 일삼는다면, 이런 갈라치기야말로 ‘좋은길’이 외려 못 된다.


다르게 보는 목소리를 받아들이려는 마음이기에 스스로 피어난다. 모든 씨앗은 볕바른 데에서만 싹트지 않는다. 그늘진 곳에 깃들어 태어나는 꽃은 도리어 빛깔이 짙고 냄새도 깊다. 그늘이나 밤을 꼭 ‘나쁘다’고만 여기지 않기를 빈다. 밤을 느긋이 꿀잠으로 누려야 낮을 비로소 반갑게 맞이하면서 하루를 짓게 마련이다.


ㅍㄹㄴ


문득 내 모습을 인식하고 충격을 받았다. 대부분의 다른 승객들처럼 나 역시 한숨짓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 상황을 곱씹으며 불평하고 있었다! 부정적인 생각을 스톱해야 했다. 그러자 동료와 함께 너그러운 낙관주의를 심도 있게 다루는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만을 늘어놓거나 부정적 생각들을 곱씹는 것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9쪽)


행복으로 향하는 길은 멀고도 험난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지향해야 할 길이다. 행복을 함께 공유하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 너그러운 낙관주의 행렬에 동참하자. 이 책을 통해 우리 저자들은 행복해지고자 결심한 당신의 길동무 겸 능력 있는 지지자가 되어줄 것이다. (13쪽)


#Cultiver l'optimisme

#DelphineLuginbuhl #AureliePennel


부정적인 생각을 스톱해야 했다

→ 궂은 마음을 멈춰야 했다

→ 나쁜 마음을 그쳐야 했다

9


행복을 함께 공유하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

→ 함께 즐거울 터전을 일구어 보자

→ 나란히 기쁠 삶을 지어 보자

→ 같이 웃는 나라를 이루어 보자

→ 서로 기쁠 삶터를 세워 보자

13


이럴 때는 부정적 감정을 느낄 필요성과 권리를 인정하도록 하자

→ 이럴 때는 나쁘게 느껴도 된다고 여기자

→ 이럴 때는 싫어해도 된다고 받아들이자

→ 이럴 때는 꺼려도 된다고 받아들이자

116


감사를 표현하면 긍정적인 경험을 잘 기억하게 되며, 그 경험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고,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더 잘 인식하게 된다

→ 고마워하면 마음이 한결 밝으며, 밝은 빛을 키울 수 있고, 이웃이 얼마나 반가운지 더 잘 느낀다

→ 고맙다고 말하면 마음이 트이며, 환한 마음을 가꿀 수 있고, 이웃을 반갑게 바라볼 수 있다

178


감사를 표현함으로써 표현한 쪽과 받은 쪽 둘 다 좋은 효과를 얻는다

→ 고마워하면 서로 즐겁다

→ 고맙다고 말하면 함께 즐겁다

178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나답게 살기로 했다
손힘찬 지음 / 스튜디오오드리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까칠읽기 . 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5.4.30.

까칠읽기 67


《나는 나답게 살기로 했다》

 손힘찬(오가타 마리토)

 스튜디오 오드리

 2021.2.8.



모든 책은 바탕이 ‘나살림(자기계발)’이다. 내가 나부터 살리려고 글을 읽고 쓴다. 내가 나를 살리는 길을 배우고 익힐 때라야 책을 읽고 쓴다. 굳이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글을 쓰거나 책을 낼 까닭이 없다. 군더더기랄까.


‘자기개발’이든 ‘자기계발’이든 ‘자기관리’이든 말끝으로 장난을 칠 뿐이라고 느낀다. 내가 나를 안 돌보면 누가 나를 돌보나? 앓아누울 때조차 스스로 몸을 돌보면서 밥과 물을 끊고서 신나게 드러누워서 ‘나돌봄(나를 돌아보는 삶)’을 하기에 비로소 낫는다.


아이는 “남들이 걸으니까 따라서 걷지” 않는다. 아이는 “남은 남이고, 나는 즐겁고 씩씩하게 걷고 싶은 꿈”을 품기에 비로소 두 다리로 의젓하게 서서 척척 한 발짝 두 발짝 내딛는다.


다시 말하자면 ‘나살림(자기계발)’을 밝히거나 외치는 글과 책은 이제껏 “바로 내가 나부터 안 돌보고 안 살리는 팽개치기를 해왔다”고 드러내는 셈이다. 우리는 ‘나살림책(자기계발서)’를 아무리 읽는들 못 바꾸고 안 바뀐다. “내가 나를 안 보고 안 돌보고 안 가꾸는 삶을 이은 줄거리”가 드러날 뿐인 글이나 책을 읽고서 우리가 스스로 무엇을 어떻게 바꾸겠는가?


《나는 나답게 살기로 했다》를 보면 머리말에 “나의 트라우마를 해소하고 과거의 이야기를 정리했다”처럼 적는데, 어느 누구도 멍을 풀거나 옛이야기를 치우지 못 한다. 멍을 풀었다거나 옛이야기를 치웠다고 밝히는 사람이 있다면 다 뻥이다. 눈속임이랄까. 멍을 지우려고 한들 지울 수 없다. 스스로 오늘을 사랑으로 지어서 일굴 적에 멍이 저절로 사라질 뿐이면서, 새살이 돋는다. 스스로 오늘을 사랑이라는 살림으로 가꾸기에 ‘옛이야기’는 ‘오늘이야기’로 녹아들면서, 바로 이곳에서 웃는다.


나는 남을 못 돕는다. 내가 남을 돕는다고 할 적에도 거짓말이다. 남도 나를 못 돕는다. 남이 나를 돕는다고 할 적에도 가짓부렁이다. 왜 그런가?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살리고 가꾸고 돌볼 뿐이니까.


내가 네게 들려줄 말이란, “넌 네가 너를 들여다보면서, 네 삶을 네가 너답게 너로서 사랑하는 길을 받아들이고서, 차분히 삭이는 틈을 들이면, 네 일을 언제나 네가 스스로 풀고 품어서 맺어.”일 뿐이다. 내가 너한테서 들을 말도 이와 같다. 우리는 서로 “스스로 할 일”을 두런두런 말을 섞으면서 “스스로 배울” 뿐이고, 이제 혼자 고요히 있는 보금자리에서 “내가 나를 바라보기”를 하면서 가다듬는다.


사랑이란, 사람마다 다를 수 없다. 사랑은 온갖 곳에 아무렇게나 안 쓴다. 사람이라면, 저마다 사랑이다. “저마다 사랑인 사람”이라서 “다 다른 사랑”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저마다 사랑인 사람”이기에, 우리가 스스로 ‘사람’인 줄 알아볼 적에, 바로 스스로 “내가 나를 보는 이 눈빛이 사랑이구나” 하고 알아차리면서, “내가 나를 보듯, 네가 너를 보기에, 우리가 서로 볼 수 있네” 하고 느낀다.


손수 살림을 지으면서 삶을 이루는 사람이기에 스스럼없이 사랑을 스스로 배워서 익히고 품고 풀어낸다. 오직 이뿐이다. 아무리 말로 읊는들 사랑을 모른다. 아무리 나살림(자기계발)을 해본들 사랑하고 한참 등질 뿐이다.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 아이곁에 서서 밥을 차려서 아이랑 같이 밥을 먹고, 아이랑 같이 치우고, 아이랑 같이 이야기하면 된다. 어른곁에 서서 나란히 볕바라기를 하며 새노래와 개구리노래와 풀벌레노래를 귀담아들으며 아무 말이 없이 하루를 누리면 된다. 언제나 이뿐이다. 사랑은 ‘대화와 토론과 상담’으로는 ‘죽어도 못 깨닫’는다. 집에서 집안일을 하고 집살림을 맡아야 누구나 곧바로 알아보고 익히는 사랑이다.


ㅍㄹㄴ


최근 들어 가장 충격적인 발경는 내가 생각보다 수동적인 사람이라는 점이다 … 나는 이 책을 쓰기에 앞서 나의 트라우마를 해소하고 과거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4쪽)


특히 사랑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뭐라 말하기가 더욱 힘들다. 내가 본격적으로 코칭의 세계에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준 코치가 있다. 그와 상호 코칭하면서 사랑에 관해 여러 대화를 주고받았고 그 과정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됐다. 그는 사랑을 정의 내리기 어려운 이유가 사랑의 형태가 제각각이라 그렇다고 했다. (5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