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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그 예술
야나기 무네요시 지음, 이길진 옮김 / 신구문화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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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2021.10.28.

읽었습니다 21



  우리나라는 아직도 ‘조선왕조실록’ 자리에서 헤맵니다. 옛자취(역사)를 다룰 적에 기껏 ‘조선’이나 ‘고려’를 다루는 듯하지만, 막상 조선·고려 임금붙이랑 벼슬아치 테두리에서 못 벗어나요. 어른끼리 읽는 책이건, 어린이한테 들려주는 이야기책이건 똑같습니다. 이웃나라 야나기 무네요시 님은 ‘임금붙이·벼슬아치’ 자리가 아닌 ‘흙을 일구며 살림을 지은 수수한 사람들’ 자리에서 빛을 보고 이야기를 여미었습니다. 힘·돈·이름으로 ‘누르는 놈’들 이야기가 아닌, 힘·돈·이름에 ‘눌린 님’들 이야기를 다루었지요. 조선이며 일본이며 모든 나라 ‘밑자리 사람들 여느 살림살이’에서 아름길을 보았고, 이 아름길에 눈물하고 울음이 새롭게 노래가 되어 기쁨하고 웃음으로 피어난다고 풀어냈어요. 《야나기 무네요시》는 놀랍게 편 보임마당(전시회)이고 책입니다. 힘(기득권)을 움켜쥔 쪽에 있는 모든 글바치는 이이를 꺼리거나 깎아내립니다. 그렇잖아요? 힘꾼은 흙꾼이 아니니.


《야나기 무네요시》(국립현대미술관 엮고 펴냄, 2013.5.25.)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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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리하는 법 - 넘치는 책들로 골머리 앓는 당신을 위하여
조경국 지음 / 유유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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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2021.10.27.

읽었습니다 20



  책이 몇 없을 적에도 으레 쌓아 놓고 살았고, 책이 꽤 늘 적에도 곧잘 쌓아 놓고 살았으며, 책이 엄청나게 많은 요즈음도 그저 쌓아 놓고 삽니다. 다 읽은 책을 곁에 쌓아 놓는데, 이 책으로 할 일이 잔뜩 있는 터라 쉽게 갈무리를 못 하고서 쟁이는 셈입니다. 이럭저럭 한가득 갈무리하고 제자리에 두자고 옮겨도 자리맡 책더미는 거의 그대로 같습니다. 《책 정리하는 법》을 가만히 읽습니다. ‘책갈무리’를 놓고도 책이 태어날 만하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끈으로 책묶기’는 이 책에서 다루지 않은 듯해서, 또 ‘책쥠새’도 다루지 않았네 싶어서 살짝 갸웃합니다. 이러구러 제가 책갈무리를 하는 길은 늘 하나입니다. “나는 내가 읽고 싶은 대로 읽기에, 내가 갈무리하고 싶은 대로 갈무리합”니다. 책가름(십진분류법)은 진작 따를 생각이 없습니다. 모든 책숲(도서관)이며 책집이 다 다르게 책갈무리를 하면 넉넉하지 않을까요? 다 다른 사람은 다 다르게 읽고 다 다르게 새기면 즐거워요.


《책 정리하는 법》(조경국 글, 유유, 2018.6.4.)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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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2021.10.27.

읽었습니다 19



  《서울의 엄마들》을 읽으며 《서울의 아빠들》 같은 책이 나란히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빠는 다 어디 갔을까요? 어깨동무(성평등·페미니즘)를 이루자면, 순이 곁에 돌이가 꼭 있어야 하고, 순이뿐 아니라 돌이가 함께 깨어날 노릇인데, 어쩐지 돌이는 영 안 보여요. 나라 곳곳에서 이야기꽃(강의)이나 책수다(북토크)가 꽤 많은데, 이야기꽃이나 책수다를 챙기는 아빠는 왜 이렇게 드물까요? 더 나아가 “서울 아줌마”하고 “서울 아저씨”라는 눈길로 바라본다면 이 책이 확 달랐으리라 생각합니다. “서울 엄마”라는 이름답게 ‘서울살이 틀에 맞춘 길’만 보여준다고 느꼈습니다. 서울이 좋으니 서울에서 살겠지요. 숲으로는 마음이 안 차니 서울이라는 잿빛을 좋아하겠지요. 글을 쓰건 책을 내건 길잡이(교사·강사·교수)로 일하건, 부디 “아줌마 아저씨”나 “어버이”라는 눈썰미로 둘레를 바라보고 아이를 마주하는 이야기를 펴 보기를 빕니다. 꽤 아쉽던 책입니다.


《서울의 엄마들》(김다은과 열 사람, 다단근, 2021.2.1.)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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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2021.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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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살아갈 적에 즐거울까 하고 묻는다면 “스스로 즐거울 길을 그리고서 이대로 나아가면 되지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스스로 즐거울 길이란,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아픕니다. 스스로 즐거울 길이란, 때로는 좋고 때로는 나쁩니다. 너울치는 바다처럼 오르락내리락 잇달아요. 오르기만 하는 길을 바란다면 ‘즐거울 길’이 아니라고 느껴요. 오르다가 내리고, 내리다가 오르고, 고요히 있고, 이러다가 춤추는 길이기에 즐거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 따윈,》을 읽으면서 글그림님이 스스로 즐거울 길을 얼마나 마음에 새기셨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아직 ‘즐거울 길’을 새기지 않았으면 이제부터 새기면 돼요. 새기긴 새겼는데 내키지 않으면 새길을 새기면 되어요. 오늘까지 걸어온 길을 책으로 여민 만큼, 앞으로 걸어갈 길을 마음껏 펼치기를 바라요. 우리가 나아가는 길은 언제나 우리 손으로 그려서 짓거든요. 남이 살아 주지 않는, 기뻐해 주거나 아파해 주지 않는 삶입니다.


《결혼 따윈,》(다이스타 글·그림, 2019.)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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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잃은 거위를 곡하노라 범우문고 186
오상순 지음 / 범우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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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2021.10.26.

읽었습니다 17



  예전에 오상원 님이 쓴 글꽃을 꽤 읽었는데 이제는 읽지 않습니다. 이러다 문득 《짝 잃은 거위를 곡하노라》가 눈에 뜨여 집었습니다. 찬찬히 읽다가, 글님 삶자취를 돌아보다가, “아, 이제는 그야말로 옛글이네.” 싶습니다. 글님이 한창 글빛을 날리던 무렵에는 돋보이거나 사랑받았을 테지만, 가면 갈수록 ‘새로 읽기 어려운’ 글이겠네 싶어요. 그러나 뒷날 누가 이녁 글자락을 ‘요샛말에 맞추어 확 손질한다’면 새로 읽히겠지요. 지난날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살던 온갖 한자말은 오늘날하고 안 어울립니다. 아마 오늘날 숱한 글님이 내놓는 ‘옮김말씨 범벅인 글’도 스무 해쯤만 지나도 ‘해묵었네’ 하고 느낄 만하지 않을까요? 2020년대에 나오는 웬만한 책은 2040년만 되어도 안 읽히지 않을까요? 애써 한문이며 일본글이며 영어에 여러 바깥말을 살피면서 글살림을 가꾼다면 오상원 님을 비롯한 여러 책을 더 읽을 만하겠지만, 글쎄, 아이들한테 이렇게까지 글만 배우라 하고 싶진 않아요.


《짝 잃은 거위를 곡하노라》(오상순 글, 범우사, 1976.9.10./2003.7.5.)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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