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뜨개인형을 읽기



  곁님이 밤을 새워서 뜬 뒤 아이들한테 선물한 ‘얼룩말 손가락 뜨개인형’을 나도 손가락에 꽂아서 놀아 봅니다. 아이들이 낮잠을 자는 사이에 한 번 놀면서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밤을 새운 한 사람 손길이 깃든 이 뜨개인형은 아이들이 늘 만지면서 놀 만하고, 어른도 곧잘 함께 놀 만합니다. 이 뜨개인형을 손수 떴기에 더 애틋할 수 있고, 이 뜨개인형을 플라스틱 실이 아니라 면으로 된 실로 짰기에 더 살가울 수 있습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먼 옛날부터 어버이는 아이한테 ‘오래도록 손수 품을 들인 놀잇감’을 선물했습니다. 하루아침에 뚝딱하고 지은 놀잇감도 선물했을 테지만, 으레 이레라든지 열흘이라든지 달포라는 긴 나날을 들여서 한 가지를 마련했어요. 다시 말하자면 더 많은 놀잇감이 있어야 더 잘 놀 수 있지 않습니다. 사랑을 담은 손길로 찬찬히 바라보면서 지은 놀잇감일 적에 두고두고 놀 뿐 아니라,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된 뒤에’ 다시 새로운 아이한테 물려줄 수 있어요. 고작 뜨개인형 하나라 할 수 있지만, 이 뜨개인형을 고이 아끼고 돌보면서 논다면 오래오래 물려주고 물려받다가 나중에 새로운 아이가 새롭게 뜰 수 있을 테지요. 우리 곁에 둘 만한 책도 이와 같을 테지요. 고이 물려주고 물려받으면서 새로운 노래를 일굴 만한 이야기를 다루도록 북돋우는 책 한 권이 있으면 넉넉하겠지요. 2016.5.8.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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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 책



  책을 안 읽고도 책을 쓸 수 있을까? 어쩌면 어떤 사람은 책을 한 권조차 안 읽었지만 아름답거나 놀랍거나 훌륭하거나 멋진 책을 쓸 수 있으리라. 아무 책을 안 읽었기에 어설프거나 어리숙한 책을 쓸 수도 있을 테고. 그런데, 책을 많이 읽었기에 더 훌륭하거나 더 아름다운 책을 쓰지는 않는다. 책을 적게 읽었거나 못 읽었기에 더 어리석거나 더 바보스러운 책을 쓰지도 않는다.


  그러고 보면, 책을 읽었느냐 안 읽었느냐는 그리 대수롭지 않다. 책을 쓰려고 한다면 ‘지을 책’에 담을 이야기가 마음속에 있느냐 없느냐 하는 대목이 대수롭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이야기를 써서 책을 짓느냐도 대수로울 테지만, 스스로 삶을 짓고 살림을 가꾸면서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가 있느냐 하는 대목이 그야말로 대수롭지 싶다.


  책을 지으려 하는 사람은 이야기를 지으려 하는 사람이리라 본다. 이야기를 지으려 하는 사람은 삶이나 살림이나 사랑을 지으려 하는 사람이리라 본다. 그러니, 교과서나 참고서나 문제집을 놓고 ‘책’이라 하지 않는 까닭을 알 만하다. 교과서나 참고서나 문제집이라고 하는 ‘종이꾸러미’에는 이야기를 지으려고 하는 삶이나 살림이나 사랑이 깃들지 않으니까. 2016.4.29.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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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에 앉아서 읽는 책



  아침에는 마을 할배가 경운기에 땅갈개를 싣는 일을 거들었다. 땅갈개가 망가졌는데 이튿날 이웃마을에 농기계를 고쳐 주는 사람들이 온다고 해서 오늘 미리 실으신단다. 할배도 할매도 이제 나이가 많아서 좀처럼 힘을 쓰기 어렵다면서 나를 부르셨고, 나는 힘껏 일을 거들었다. 일을 거들고 보니 젊은이가 힘을 쓰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마을 할배는 “애들은 많은데 다 도시로 나갔고 ……” 하신다.


  낮에는 큰아이하고 밭을 일군다. 아이들하고 곁님이 좋아하는 옥수수를 이레씩 틈을 두면서 마당하고 밭 가장자리에 차곡차곡 심는다. 해바라기씨를 심을 자리를 골라 놓고는, 씨앗은 이튿날이나 그 다음 날에 심기로 한다. 엊그제 갈아서 씨앗을 심은 자리에는 새로 물을 한 번 주고는, 열흘 즈음 앞서 심은 콩에서 돋는 싹을 한참 들여다본다.


  뜨거운 볕이 살짝 기울 무렵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워서 면소재지에 간다. 일요일 늦은 낮, 면소재지 초등학교 운동장은 조용하다. 두 아이는 집에서도 내내 놀았지만 학교 놀이터에서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논다. 놀이를 할 적에는 그야말로 쉴 겨를이 없이 내처 논다. 나는 이제서야 비로소 책을 손에 쥔다. 두 아이가 놀이터에서 이리 달리고 저리 뛰는 동안 바지런히 책을 넘긴다. 해가 기울 즈음 집으로 돌아가서 저녁을 차리랴 집 안팎을 치우랴 아이들을 재우랴 하다 보면 그야말로 하루 가운데 책을 손에 쥘 틈은 매우 적다고 할 만하다.


  그래도 밥을 짓는 동안 국물하고 밥물이 끓는 사이에 살짝살짝 몇 쪽씩 넘긴다. 밑반찬이 다 떨어진 날은 이마저도 못하지만, 밑반찬을 넉넉히 해 두어서 국만 끓이면 될 적에는 밥상을 차리는 틈에 열 쪽이나 스무 쪽쯤 읽을 만하다.


  저녁을 먹이고 밥상을 치운 뒤에 등을 톡톡 치면서 또 몇 쪽을 펼쳐 본다. 책이란 무엇일까. 집안일이나 집밖일을 하면서 바쁜 사람들한테 책이란 무엇일까. 평균독서량 같은 통계를 말하기도 하는데, 종이책을 읽는 일이란 그야말로 ‘일’이 아닌가 하고 느낀다. 틈을 내고 쪼개고 마련해서 새롭게 힘을 내야 비로소 할 수 있는 일, 또는 즐길 수 있는 일이라고 느낀다. 2016.4.10.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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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는 책읽기



  엊저녁에도 아침에도 여러모로 집 안팎을 치우고 건사하느라 바쁘다. 묵은 빨래를 잔뜩 쌓아서 하다가 오늘 다 못하겠구나 싶어 몇 벌은 다음으로 미룬다. 오늘은 오늘만큼 살림을 가꾸자고 여기면서 일손을 잡는데, 내가 그동안 살림을 제대로 꾸리지 못했다고 해서 ‘나를 안 사랑하는 짓’은 이제 그치자고 다짐한다. 왜냐하면 어제 못한 일은 어제 못한 일이고, 그제 못한 일은 그제 못한 일이다. 지난해나 그러께에 못한 일은 그야말로 지난해나 그러께에 못한 일이니, 지난해나 그러께에 내가 뭘 못했다고 해서 나를 자꾸 나무라거나 꾸짖지 말자는 생각이다. 오늘 할 일을 생각해서 오늘부터 차근차근 하고, 오늘 새롭게 한 가지를 한 뒤에, 이튿날에 또 새롭게 두 가지를 하면 되리라 생각한다.


  책상맡에 다짐말을 적어서 놓는다. 늘 이 다짐말을 되읽는다. “나를 사랑하라. 생각을 지어라. 꿈을 노래하라.” 책을 읽을 적에도 나를 사랑하면서 읽고, 빨래를 할 적에도 나를 사랑하면서 주무르고, 밭일을 할 적에도 나를 사랑하면서 호미를 쥐고, 아이들하고 놀 적에도 나를 사랑하면서 웃고, 나들이를 다닐 적에도 나를 사랑하면서 걷고, 언제 어디에서나 나를 즐거이 사랑하자고 다짐한다. 2016.3.23.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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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에 꽃병



  큰아이가 꽃봉오리를 하나 얻었다. 이 꽃봉오리를 들고 놀다가 꽃병에 꽂겠다고 말한다. 큰아이한테 꽃봉오리를 준 할아버지가 ‘꽃병에 꽂으’면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큰아이한테 물어보았다. “벼리야, 우리 집에서 어머니나 아버지가 꽃가지를 꺾어서 집에다가 꽃병에 꽂니?” “아니.” “그런데 왜 벼리는 우리 집에 ‘꺾은 꽃가지’를 꽃병에 꽂으려 하니?”


  아이하고 말을 섞으면서 가만히 돌아본다. 도시에서 살던 무렵을 떠올린다. 내 어릴 적을 되새긴다. 우리 집 마당이 없고, 우리 집 밭도 없고, 우리 집 땅뙈기도 없던 때에는 무엇을 심거나 가꾸는 일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그렇지만 도시에서는 내 땅이 없고 내 씨앗이나 나무가 없어도 밥을 다 먹었다. 도시에서는 꽃다발 선물이 퍽 흔하다.


  시골에서 살며 꽃다발 선물은 생각조차 한 일이 없고, 생각할 일마저 없다고 느낀다. 봄이나 여름이나 가을에 아이들하고 나들이를 다니다가 들꽃을 보면서 한두 송이를 꺾어 귓등에 꽂으며 꽃순이 꽃돌이가 되며 놀다가 꽃송이를 흙에 내려놓기는 한다. 그런데 이렇게 꽃놀이를 하면 꽃은 이내 시든다는 대목을 아이도 잘 안다.


  마루문을 열면 바로 마당이요, 마당에 여러 꽃나무가 있다. 꽃을 보고 싶으면 몇 걸음만 걸으면 된다. 꽃내음을 맡고 싶으면 싱그러이 살아서 싱싱하게 꽃숨을 베푸는 나무 곁에 서면 된다. 꽃꽂이나 꽃병 같은 문화도 여러모로 뜻있을 텐데, 이에 앞서 골목도 거리도 마을도 모두 꽃밭이거나 꽃길이거나 꽃숲이라면, 시골이나 도시 모두 크고작게 숲이 이루어지기를 빌어 본다. 2016.3.9.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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