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창고로 가는 길 - 박물관 기행 산문
신현림 글, 사진 / 마음산책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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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숲노래 책읽기 2022.6.7.

인문책시렁 224


《시간창고로 가는 길》

 신현림

 마음산책

 2001.3.10.



  《시간창고로 가는 길》(신현림, 마음산책, 2001)을 퍽 예전에 읽었습니다. 스무 해가 훌쩍 지난 요즈막에 다시 읽다가 살림숲(박물관)이란 무엇일까 하고 돌아봅니다. 어릴 적부터 ‘박물관’이란 이름이 어려웠고, 무슨 뜻인지 종잡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박물관이란 이름을 붙인 곳에 놓은 살림’은 우리하고 동떨어진 머나먼 곳 모습이라고 느꼈어요.


  살림숲에 있는 온갖 살림을 보면, ‘살림살이를 손수 지은 사람’ 이야기란 없이, ‘살림살이를 짓도록 시켜서 얻어먹기만 한 사람’ 이야기만 가득합니다. 우리는 거꾸로 보는 셈입니다. 아니, 살림을 빛내는 참길하고 먼 우두머리 뒷자취만 더듬는 셈입니다. ‘전쟁사’라는 발자취를 보면, 언제나 우두머리 이름만 나올 뿐, 싸움판에서 총칼을 휘두르다가 맞아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 사람들 이름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을지문덕에, 광개토대왕에, 이순신에, 이성계에, 이런 우두머리나 저런 우두머리에 가린 들꽃 같은 사람들은 어떤 살림을 지은 나날이었을까요?


  보는 눈길에 따라 모든 곳이 바뀝니다. 저는 일본스러운 한자말 ‘박물관’을 바라볼 마음이 없습니다. 아이를 사랑으로 낳아 돌보는 수수한 순이돌이 눈길로 ‘살림숲’을 바라보려고 생각합니다. 신현림 님은 ‘시간창고’란 눈길로 바라보더군요. 그래요, 오늘날 우리네 ‘박물관’은 ‘살림숲’이 아닌 ‘시간창고’란 이름이 어울립니다. 창고잖아요?


ㅅㄴㄹ


우리나라 조선시대 관리들은 모두 시를 쓸 줄 알았다. 모든 이의 가슴엔 시인이 산다. 그러나 현대인은 책도 안 읽고, 제 가슴속의 시인을 잊고 사니, 삶에서 시적 정취가 사라지는 건 당연하다. (37쪽)


섹스 장면 하나 없다고 실망하는 이도 보았다. 그러나 폭력이나 섹스 장면 하나 없이 두 시간 가까이 화면 앞에 붙들어놓는 영화는 얼마나 근사한가. (41쪽)


전라도 땅은, 그나마 개발이 덜된 느낌 때문인지, 그 옛날 백제의 냄새까지 맡아진다. 물론 내 코가 개코처럼 예민한 탓도 있으나, 아무리 문명이 발달해도 원시의 모습을 간직한 대지가 남아 있어서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126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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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잉크
토니 모리슨 지음, 이다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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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2022.5.30.

인문책시렁 223


《보이지 않는 잉크》

 토니 모리슨

 이다희 옮김

 바다출판사

 2021.1.29.



  《보이지 않는 잉크》(토니 모리슨/이다희 옮김, 바다출판사, 2021)를 읽었습니다. “The Source of Selfregard”를 옮긴 책인데 왜 책이름을 바꾸었는지는 모를 노릇입니다. 글님이 “스스로 믿는 뿌리”가 무엇인가 하고 밝히는 이야기인데, 글님이 들려주려는 발자국하고 목소리를 굳이 ‘글님 목소리’가 아닌 ‘덧씌운 딴말’로 적어야 할까 아리송해요.


  그리기에 ‘그림’이요, 그려서 보는 그림입니다. 그리는 ‘글’이고, 그려서 읽는 ‘글’입니다. 그림하고 글은 삶을 담습니다. 눈으로 보거나 읽도록 삶을 담는 ‘그릇’ 노릇을 합니다. ‘그리다’는, 보고 싶은 사람을 마음에 두는 결을 나타내기도 하고, 스스로 느끼고 보고 알아가는 모두를 둘레에서도 헤아리도록 담아내는 결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리하여 글이란, 이 삶을 저 사람이 알아보도록 담아낸 이야기를 담아낸 꾸러미·그릇이에요. 이 삶을 저 사람이 알아보도록 이야기로 담아내자면, 글님은 ‘삶을 느끼고 보고 알아’야 하고, 느끼고 보고 알아낸 삶을 늘 되새길 노릇입니다. 이러면서 ‘스스로 느끼고 보고 알아간 대로 새롭게 삶을 빚어서 풀어내’기에 글·그림이란 얼개로 태어납니다.


  토니 모리슨 님은 ‘미국 검순이(흑인 여성)’ 삶을 글로 풀어내는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잉크》를 읽으며 ‘미국 흰순이’는 어떤 삶이라 할 만하려나 하고 돌아봅니다. ‘미국 검돌이’하고 ‘미국 흰돌이’는 저마다 어떤 삶이라 할 만하려나 생각해 봅니다. ‘미국사람’이라는 길인지, ‘검은이·흰이’로 가르는 길인지, ‘오롯이 사람’이라는 길인지 더 헤아려 봅니다. 어제를 지나 모레로 나아가는 오늘, 미국이며 이 나라이며 푸른별 온나라는 서로 어떻게 다르면서 나란한 길을 걸어갈 적에 아름다이 맺을 만할까 하고 돌아봅니다.


  여덟 살 아이는 ‘나라(정부)’가 아닌 마당(놀이터)을 바라보기를 빕니다. 열여덟 살 아이도 나라가 아닌 삶터를 바라보기를 빕니다. 먼발치에서 꿈을 좇거나 찾지 말고, 스스로 선 곳에서 꿈을 새롭게 짓고 가꾸기를 빌어요. 뒤틀린 나라·터전을 바꾸려면 ‘안 뒤틀린, 그러니까 아름누리’란 무엇인가 하고 먼저 그리면 됩니다. 글님이란 ‘안 뒤틀린 나라’가 아닌 ‘아름누리·아름마을·아름집·아름이·아름놀이’를 스스로 먼저 새롭게 그리고 살펴서 스스로 누리는 오늘을 차곡차곡 가꾸어 이야기로 엮는 일꾼이라고 봅니다.


ㅅㄴㄹ


작가가 하는 일은 기억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기억한다는 것은 창조한다는 것이다. (96쪽)


이런 흑인 존재에 대한 고찰은 우리 국민문학을 어떤 방식으로든 이해하는 데 핵심이며 문학적 상상력의 변두리로 밀려나서는 안 된다. (156쪽)


흑인 작가에게 흑인이라는 수식어는 사실의 진술이기보다 탐색의 대상이다. 다시 말해 멜라닌과 작품의 주제를 제외하고 나를 흑인 작가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272쪽)


세계주의가 언어 차이를 무시하거나 부추기거나 송두리째 삼켜 그 차이를 넘어설수록 언어를 보호, 혹은 강탈하려는 노력은 더 불타오릅니다. 나의 언어, 나의 꿈에 나오는 언어가 곧 나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383쪽)


여덟 살 이상이라면, 이미 국가 간의 우정이 얼마나 편의주의적이고 상업적이며, 심지어 변덕스러운지 보았을 것입니다. (401쪽)


#TheSourceofSelfregard #ToniMorrison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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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가 작은 일생
우미하라 준코 지음, 서혜영 옮김 / 니케북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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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2022.5.22.

인문책시렁 221


《오늘 하루가 작은 일생》

 우미하라 준코

 서혜영 옮김

 니케북스

 2018.5.25.



  《오늘 하루가 작은 일생》(우미하라 준코/서혜영 옮김, 니케북스, 2018)을 읽으면 날마다 다르게 찾아와서 누리는 하루를 어떤 마음으로 살피며 품을 만한가 하는 줄거리가 흐릅니다. “오늘 하루가 작게 삶”이라고 한다면, “모든 하루가 조금씩 다르다”는 뜻입니다. 마땅하지요. 똑같은 날은 없습니다. 2021년 1월 1일하고 2022년 1월 1일도 다른걸요.


  스무 해를 살았으면 스무 해 동안 늘 다른 하루를 누렸습니다. 마흔 해를 살았다면 마흔 해 동안 언제나 다른 하루를 즐겼어요. 때로는 눈물을 누리고, 때로는 웃음을 즐깁니다. 노상 새롭게 맞아들이는 하루를 바라보면서 생각을 가누고 마음을 추슬러요.


  멋지게 살아도 나쁘지 않겠습니다만, 오늘을 오늘대로 살면 저절로 멋진 삶이라고 느낍니다. 아름답게 살아가고 싶다면, 오늘을 언제나 오늘 이곳에서 스스로 지으면 돼요.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다면, 바로 오늘 스스로 노래하고 춤추고 꿈꾸면서 홀가분히 날갯짓을 하면 될 테고요.


  누가 가르치지 않는 오늘이고, 누가 도와주는 하루가 아닙니다. 스스로 찾고 스스로 짓습니다. 나를 도우려는 손길도 내가 도우려는 손길도 매한가지예요. 먼저 마음으로 흐르고 만날 적에 빛나면서 영그는 꽃송이 같은 오늘입니다.


  다만 이 책은 뒤로 갈수록 늘어지는구나 싶어요. ‘다른 삶’을 말하려고 너무 애쓰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애쓰고 땀내어 ‘다른 삶’을 말하면서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그저 오늘 글님 스스로 무엇을 하며 노래했는가 하고만 더 수수하게 적으면 나을 텐데 싶어요.


ㅅㄴㄹ


전쟁 중 피난지로 향하다가 히로시마에서 구조 활동에 참가했던 아버지는 방사능 피폭이 원인이 된 면역 결핍으로 중증 결핵에 걸렸다. 물론 이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안 사실이다. (24쪽)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신경 쓰느라 ‘어떻게 하면 잘 살까’ 하는 문제를 내팽개치는 경향이 있다. (38쪽)


밀가루나 메밀, 유제품을 못 먹는다고 하여 그 사람이 잘못된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못 먹는 것은 단순한 사실이며 그 사실에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요즘 젊은이들은 알고 있다 … ‘못 먹는 음식이 있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괴로운 면이 있다.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식품을 피하는 일만으로도 성가신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할 때 그 이유까지 설명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63쪽)


요리의 즐거움은 재료에 따라 불의 세기를 조절해 가며 변화를 주는 맛에 있다. (66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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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 - 가장 작고 사소한 도구지만 가장 넓은 세계를 만들어낸 페트로스키 선집
헨리 페트로스키 지음, 홍성림 옮김 / 서해문집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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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2022.4.29.

인문책시렁 218


《연필》

 헨리 페트로스키

 홍성림 옮김

 서해문집

 2020.7.17.



  《연필》(헨리 페트로스키/홍성림 옮김, 서해문집, 2020)을 읽었습니다. 글을 쓰는 붓, 그러니까 ‘글붓’을 다룬 이야기가 두툼합니다. 다만, 글붓을 쓰는 마음이나 삶이 아닌, 글붓장사를 다룹니다. 하늬녘(유럽)하고 미국에서 어떤 사람이 글붓장사를 널리 펴려고 애썼는가 하는 자취를 하나하나 짚으니, 이러한 발자취가 궁금한 사람한테는 제법 이바지하겠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글붓이 ‘나무하고 돌한테서 얻은 숨결’로 여미어 새롭게 이야기를 펴는 살림살이라고 하는 대목은 아예 안 짚다 보니, 저로서는 제법 따분했어요.


  누구나 집에서 글붓을 깎는 길이라도 한 꼭지를 다루었다면 눈여겨보았을 테지만, 지음터(공장)에서 더 많이 더 빨리 더 나은 글붓을 짓는 길을 찾으려고 얼마나 애써 왔는가 하는 흐름만 짚은 책이더군요. 참말로 ‘손수 글붓 짓기’를 살짝이라도 다루었다면 얼마나 알찼을까요.


  글쓴이는 책끝에 “정작 연필을 다룬 글”이 거의 없다고 적습니다만, 글쓴이가 못 찾아내었을 뿐이라고 느낍니다. 이름난 글쟁이가 남긴 글은 드물는지 몰라도, 수수한 사람들이 쓴 글이 제법 있을 테며, 일본에만 해도 꽤 되리라 생각합니다.


ㅅㄴㄹ


박물관들에서도 연필처럼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하는 단순한 대상에 대해서는 그저 무시하거나 잊었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17쪽)


1794년 콩테가 혁명적인 방법을 개발하기 전까지 18세기 동안 연필 제조 공정에서 이루어진 지지부진한 개선은 기껏해야 과학 이전의 원시적인 공작 행위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136쪽)


전쟁 때문에 연필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집에 편지를 쓸 때 연필을 사용했던 듯하다. (291쪽)


문필가들은 그렇게 많은 글을 연필로 쓰면서도 정작 연필에 관한 글은 거의 쓰지 않았다. (528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을 꾸리는 사람.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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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의 우주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3
김인숙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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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2022.4.17.

인문책시렁 217


《'79―'80 겨울에서 봄 사이 1》

 김인숙

 세계

 1987.9.15.



  《'79―'80 겨울에서 봄 사이 1》(김인숙, 세계, 1987)를 2022년에 곰곰이 읽으면서 ‘1980년대 운동권’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말을 썼는지 돌아보았습니다. 1963년에 태어나 1980년대 첫무렵에 서울에서 대학생으로 있으면서 글(소설)을 써서 이름을 날린 분이 잇달아 선보인 《'79―'80》인 터라, 그즈음 ‘살짝 지식인’ 말씨를 어림해 보기에 좋습니다.


  글님은 “겨울에서 봄 사이”라는 이름을 덧달았는데, 1979년에서 1980년으로 넘어서는 즈음은 “겨울에서 봄”이라기보다는 “겨울에서 겨울”이었다고 느껴요. 우두머리 하나가 고꾸라진들 봄이 찾아오지 않거든요. 벼슬아치가 고스란히 있고, 다른 힘꾼·돈꾼·이름꾼이 숱하게 있는데 어떻게 봄일까요.


  1980년부터 2022년에 이르는 하루하루를 돌아보자면, 지난날 ‘살짝 지식인’이던 이들이 오늘날 ‘새 힘꾼·돈꾼·이름꾼’이 되어 우쭐거립니다. 예전에 ‘햇병아리 모델’이던 이들이 오늘날 ‘사장’ 자리를 차지하면서 거들먹거리고요.


  소설 《'79―'80》을 읽는 내내 ‘시대 상황’을 보여준다는 목소리는 가득하구나 하고 느끼되, ‘서울 대학생이 서울에서 조금 맛보는 시대 상황’일 뿐, ‘서울에서 밑자리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 살림새’하고는 한참 멀고, ‘서울 둘레에 있는 크고작은 도시 살림결’하고는 아주 멀고, ‘지난날 시골이며 오늘날 시골 숲빛’하고는 끝없이 멀다고 느낍니다.


  예나 이제나 글을 쓰는 이들은 으레 서울·큰고장에 머뭅니다. 늘 그곳에서 서울살이를 서울사람 눈으로 옮깁니다. 이 나라가 ‘서울공화국’이니 서울 이야기가 가장 잘 먹히고 팔리긴 하겠습니다만, 또 글꾼 가운데 ‘대학생 아닌 고졸이나 중졸이나 국졸이나 무학’인 분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드물기도 하겠습니다만, 너무 판박이입니다. 소설을 쓰는 분들은 《민중자서전》이나 《한국구비문학대계》는 아예 안 들여다보는 듯합니다.


  그리고 ‘서울 대학생 시대 상황’을 그려내는 데에 바빠서 ‘그래서 우리가 함께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할 적에 서로 아름다우면서 새롭게 나아갈 삶길인가?’ 하는 이야기는 건드릴 틈이 없어 보이더군요.


ㅅㄴㄹ


대통령을 나랏님이라고 서슴없이 부를 수 있는 할매, 이분을 위해서 내가 할 일이란 무엇일까, 그런 생각은 새삼스레 아픔이었다. (31쪽)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학술적 용어를 동원하여 일장연설을 한 바 있었다. 물론 이들에게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자랑할 의도는 추호도 없는 것이었고 오히려 이들과 같은 건달들, 사회에서 소외받고 있는 이들과 그 원인을 같이 공감하고자 하는 열띤 진심이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 녀석이 무슨 신기한 말을 하는가 하고 귀기울이던 이들은 윤익의 몇 마디 말이 진행되기도 전에 성냥개비로 귀를 후벼파고 하품을 하고 담배를 질근질근 씹어댔다. 그리고 윤익의 당혹감 앞에서 그들은 말했었다. 은자 다 했나? 오랫만에 꼰데 설교 듣자카이 눈 앞에서 별이 하나 둘 셋 막 떨어지네. (168쪽)


누군가의 강경한 선동이었고 그들은 총을 접수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와락와락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건 묘한 흥분이었고 격한 감격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자고로 꼰데들 때문에 일이 안 된다. (174쪽)


“감정적인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지금은 그런 식의 감정적인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라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 과학적인 판단을 해야 할 때입니다.” (199쪽)


회사CF 전속모델이 된 지 반 년 만에 그 애의 손을 처음 쥐어 주었었다. 그때 그 아이는 고개를 외로 꼰 채 마치 ‘기다렸어요, 사장님’ 하는 듯한 숨소리를 보내 왔었다. 햇병아리 모델 초년생의 당연한 순서였다. (241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을 꾸리는 사람.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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