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물일기 -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존경해
진고로호 지음 / 어크로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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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2022.12.4.

인문책시렁 253


《미물일기》

 진고로호

 어크로스

 2022.7.11.



  《미물일기》(진고로호, 어크로스, 2022)를 읽었습니다. ‘미물(微物)’은 “1. 작고 변변치 않은 물건 2. 인간에 비하여 보잘것없는 것이라는 뜻으로, ‘동물’을 이르는 말 3. 변변치 못한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을 뜻하는 한자말입니다. 이 한자말을 써도 나쁘지 않을 테지만 ‘작은하루’나 ‘작은이웃’처럼 책이름을 붙이면 한결 부드러이 이야기를 펼 만했으리라 느낍니다. 글쓴이 둘레에 있는 작은숨결을 노래하는 꾸러미이니 ‘작은삶’이나 ‘작은노래’나 ‘작은얘기’처럼 이름을 붙여도 어울려요.


  글감은 먼발치에서 안 찾아도 됩니다. 글감은 대단하거나 훌륭하거나 엄청나야 하지 않습니다. 삶자리 어디에나 흐르는 글감을 알아보거나 기꺼이 품으면 됩니다. 작은이웃을 눈여겨볼 수 있기에 뭇이웃을 아우를 수 있어요. 작은하루를 돌아볼 수 있기에 온삶을 어우를 만합니다.


  하늘을 가르는 새는 크지도 작지도 않습니다. 모두 새입니다. 아무리 커다란 새라 하더라도 하늘 높이 뜬 모습은 깨알 크기로 보입니다.


  땅바닥을 기는 개미는 작지도 크지도 않습니다. 모두 개미입니다. 아무리 작은 개미라 하더라도 땅바닥에 엎드려서 하루 내내 들여다보노라면 개미살림을 차근차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지렁이나 파리더러 ‘작다’고 말할는지 모르나, 무엇이 작다는 뜻일까요? 사람은 코끼리나 고래더러 ‘크다’고 말하기 일쑤인데, 무엇이 크다는 뜻인가요? 크기란 무엇이고, 몸집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웃을 마주할 적에 몸집부터 보는지요? 동무를 사귈 적에 겉모습부터 살피는가요?


  흙을 만진 적이 없는 사람은 씨앗을 알 길이 없습니다. 씨앗을 손바닥에 얹고서 따스히 감도는 숨빛을 느낀 적이 없는 사람은 흙을 알 길이 없습니다. 작은이웃도 큰이웃도 우리가 마음을 기울여 바라보고 만나고 생각하기에 비로소 이웃입니다. 눈을 감거나 등을 돌리면 이웃이 아니고, 동무로 사귀지 못 해요.


  이 푸른별에는 사람만 안 삽니다. 이 푸른별에 사람만 살아남는다면 사람부터 다 죽습니다. 오늘 무엇을 보는지 스스로 물어봐요. 오늘 어디에 선 다리인지 스스로 되새겨요. 오늘 누구랑 말을 섞으면서 마음을 나누는지 스스로 곱씹어요. 겨울은 찬바람이 불어 겨울답고, 여름은 나무를 스치는 푸른바람이 불어 여름답습니다.


ㅅㄴㄹ


죽어가는 지렁이를 안타깝게만 여겼지 지렁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자웅동체, 눈과 코는 없고 입만 있으며,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정도였다. (22쪽)


파리는 해충으로 알려져 있지만 내가 살면서 가장 많이 본 곤충이기도 하다. (58쪽)


작은 생명에 대한 배려를 보여주는 사람의 인격이 훌륭하다는 보장은 없다. 인간은 평면적이지 않다. 자신의 반려동물은 소중히 여기면서도 다른 생명에게는 시니컬할 수도 있고, 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않은 사람이지만 인간을 혐오할 수도 있다. (97쪽)


물고기를 함부로 대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서 살았다. 뒤늦게 이런 생각이 든다. 어릴 적, 횟감 물고기와 눈이 마주쳤을 때 들었던 목소리가 진실은 아니었을까. (120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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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살아요
무레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더블북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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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2022.11.24.

인문책시렁 256


《이걸로 살아요》

 무레 요코

 이지수 옮김

 더블북

 2022.4.20.



  《이걸로 살아요》(무레 요코/이지수 옮김, 더블북, 2022)를 읽다가 지우개를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글붓이나 그림붓을 쓴다면 지우개를 늘 곁에 두는데, ‘고무 지우개’는 거의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온통 ‘플라스틱 지우개’예요. 우리나라에는 ‘고무신’이 있습니다만, 이제는 이름만 고무신일 뿐 막상 ‘플라스틱신’이에요.


  사람들이 입는 옷은 실로 짭니다만, 모시·삼·솜·누에실·양털로 얻은 실이 아닌 ‘플라스틱’으로 짜는 옷이 넘쳐요. 값싸게 사고파는 지우개나 신이나 옷은 모조리 플라스틱입니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풀꽃나무한테서 얻은 밑감으로 지은 살림은 모두한테 이바지합니다. 이와 달리 플라스틱으로 뽑아내어 값싸게 사고팔거나 다루는 살림은 모두한테 쓰레기입니다.


  제가 글을 쓰는 살림살이는 나무입니다. 글붓도 종이도 나무이고, 글판(키보드)하고 다람이(마우스)도 나무예요. 나무 글판하고 나무 다람이를 찾아내기까지 만만하지 않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나무 글판이며 나무 다람이를 짓지 않더군요. 돈이 안 된다고 여기기 때문일 텐데, 가게에서 비닐자루를 쓰지 말라 하는 일 못지않게, 셈틀 껍데기·글판·다람이를 나무로 바꾸도록 나라에서 나서야지 싶어요. 손전화 뼈대도 나무로 짤 수 있어요. 길을 차지한 부릉이(자동차)도 속살림은 나무로 짤 만합니다.


  옷칸이며 잠자리를 나무로 짜면 모두한테 이바지합니다. 나무로 짠 살림은 손길을 탈수록 빛이 날 뿐 아니라 훨씬 오래 씁니다. 나무로 짠 살림이나 세간이 오래되어 닳거나 낡았다면 땔감으로 삼지요. 그러나 값싼 플라스틱은 모두 쓰레기일 뿐 아니라, 사람한테도 들숲바다한테도 나쁩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스스로 바꿀까요? 나라가 앞장서야 할 일이 틀림없이 있기는 하지만, 나라가 등지거나 팔짱을 끼더라도, 저마다 보금자리에서 하나씩 바꿀 노릇입니다. 풀꽃나무를 곁에 두면서 시골살이로 거듭나고, 손전화가 아닌 종이책을 펴고, 부릉부릉 몰기보다는 두 다리로 걷고, 아이들을 배움터에 몰아넣기보다는 보금자리에서 함께 살림하면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지을 노릇이에요.


  하나를 더 헤아린다면, 밥옷집뿐 아니라, 말글살이를 숲빛으로 여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트로 지우개가 필요하다”가 아닌 “지우개를 함께 쓴다”로 가다듬을 말입니다. ‘에코백’이 아닌 ‘천바구니’를 쓸 일입니다. “이걸로 살아요”가 아닌 “이렇게 살아요”나 “이처럼 살아요” 하고 말하는 눈빛으로 가꾸어 갈 수 있기를 바라요.


ㅅㄴㄹ


연필을 쓰면 세트로 지우개가 필요하다. 여태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쭉 같은 제품을 썼는데, 그것이 플라스틱 지우개이고 이 역시 작아져서 새것을 살 시기가 되었기에 전통적인 고무 지우개를 동네 문방구에서 찾아봤더니 플라스틱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자 일본 제품은 한 개, 스페인 제품은 여러 개가 나왔다. (26쪽)


요즘은 에코백을 들고 다녀야 한다거나 포장을 간소화해야 한다는 의식이 사람들 사이에서 높아져서, 물건을 살 때 “그냥 주세요”라고 말하기 쉬워졌다. (46쪽)


분명 책은 책장에서 넘쳐났지만 딱히 그런 터무니없이 비싼 물건을 사지 않아도 지극히 평범한 책장으로 충분했다. 허세가 있는 엄마는 선생님 앞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겠지. (120쪽)


#むれようこ #群ようこ #これで暮らす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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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종이들 - 사소하고 사적인 종이 연대기
유현정 지음 / 책과이음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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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2022.11.20.

인문책시렁 252


《나의 종이들》

 유현정

 책과이음

 2022.5.25.



  《나의 종이들》(유현정, 책과이음, 2022)은 종이를 줄거리로 삼습니다. 저부터 스스로 언제나 종이꾸러미를 품고 살아가기에 눈여겨보았습니다. ‘종이꿰미’를 줄기로 삼되 ‘종이’보다는 ‘종이 곁에 있는 글쓴이 삶길’을 풀어내려고 하는구나 싶은데, 어쩐지 종이 이야기가 덜 나오거나 겹쳐서 아쉽습니다.


  글쓴이 아버지부터 종이를 다루는 일을 한다면, 아버지 손끝으로 태어난 숱한 종이 이야기가 있을 만합니다. 끝자락에 가서야 헌종이를 모으는 할머니하고 마주하는 아버지 이야기가 살짝 나오는데, 아버지하고 어머니가 종이를 건사하는 살림을 조금 더 지켜보거나 말을 듣고서 책을 쓰면 어떠했으랴 싶어요.


  신문종이는 참으로 쓸모가 많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 곁에서 늘 심부름을 하고 집안일을 거들면서 신문종이 쓰임새를 익혔습니다. 마을에서 누가 신문종이를 내놓으면 얼른 챙겨요. 집에서도 쓰지만, 배움터에서는 다달이 ‘폐지 수집’이라면서 신문종이 몇 킬로그램에 빈병 몇에 이것저것 바치도록 시킵니다. ‘폐지 수집’ 눈금을 채우지 못 하면 길잡이가 두들겨팰 뿐 아니라, 너른터(운동장)나 골마루에 한나절 손을 들고 서도록 내몰아요.


  신문종이는 걸레로도 씁니다. 헌천으로 삼는 걸레 못지않게 신문종이는 물을 잘 빨아들이고, 쉬 마릅니다. 신문종이로 물을 훔쳐서 빨랫줄에 널어 말리고 또 씁니다. 옷칸에 신문종이를 넣으면 좀이 안 먹으면서 옷에 처음부터 깃들던 화학약품 냄새가 빠질 뿐 아니라, 곰팡이가 안 배요. 다만, 해마다 갈아 주면 좋습니다. 푸줏간에서 고기를 살 적에 싸 주는 신문종이도 빨랫줄에 며칠 널어 햇볕을 쪼여 핏냄새를 뺀 다음 쓰지요.


  《나의 종이들》을 쓰신 분은 어버이 곁에서 이런 여러 살림을 그리 눈여겨보지 않은 듯싶습니다. 글쓴이는 어릴 적에 이런저런 종이에 ‘갖고 싶은 것 그리기’는 했으나, 이 숱한 종이를 어버이가 어떻게 쓰는가를 덜 보았구나 싶어요. 참말로 지난날에는 종이 한 자락이 드물고 비쌌어요. 그림종이(도화지) 하나조차 못 사는 가난한 동무가 많았습니다. 1982년에 하얀 그림종이 한 자락을 20원에 팔았는데, 그무렵 어린이 버스삯은 60원이었습니다. 그림종이는커녕 물감이 없고 글붓(연필) 한 자루 제대로 못 쓰는 동무도 많았습니다.


  《나의 종이들》 첫머리에는 갖가지 종이하고 얽힌 글쓴이 삶을 드러낼 듯이 적었으나, 막상 몇 가지 종이를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글에 너무 힘이 들어갑니다. 일부러 어려운 말(일본말씨 + 일본 한자말 + 옮김말씨)을 자꾸 끼워넣습니다. 오늘날에는 종이라는 살림이 매우 흔하고 값싸다지만, 지난날에는 흰종이를 섣불리 다치거나 건드리지 못 했습니다. 좀 비싸기는 해도 ‘비닐자루 주전부리’가 아닌 ‘종이꿰미 주전부리’를 장만한 날이면, 이 종이꿰미를 살살 펴서 뒷종이로 삼는다든지, 기름이 튀는 밥을 지을 적에 꼬박꼬박 썼고, 냄비받침으로도 쓰고, 바람이 새는 미닫이도 막다가, 아주 헐면 그제서야 헌종이로 내놓았습니다.


  저는 오른손잡이로 태어났어도 왼손쓰기를 오래도록 갈고닦았습니다. 오른손잡이로 태어났기에 왼손쓰기를 다 안 한다고 섣불리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집안일을 하는 사람은 왼손이건 오른손이건 다치게 마련이에요. 우리 어머니도 오른손이 다치면 왼손으로 도마질을 했어요. 살림을 하는 사람은 으레 ‘두손잡이’입니다. 뜻깊게 나온 ‘종이 이야기’ 책이기는 하지만, 이다음에 글을 더 쓰려 한다면, 눈을 낮추고 매무새를 나무 곁에 놓고서, 쉬운 우리말결로 추스르시기를 바랍니다.


ㅅㄴㄹ


종이는 나의 환상을 조금이나마 실현해 줬다. 갖고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종이 위에 그렸고, 그 바람은 읽은 부모님은 나에게 종종 그것들을 선물로 줬다. (24∼25쪽)


보통의 오른손잡이로 태어난 사람은 양손을 쓸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왼손잡이로 태어난 사람 중 일부가 오른손 쓰는 연습을 한다. 남들처럼 보이기 위해서다. (45쪽)


결국 어떤 글짓기 대회에서든 주최 측 입맛에 맞게 쓰는 일이 중요했다. (54쪽)


부모님께 신문지는 다양한 면에서 만족도가 높은 귀한 사물이었다. 어머니는 주방에서 신문지를 여러 용도로 활용했다. 시금치, 당근, 부추, 대파 등 흙이 묻어 있는 채소를 신문지에 싸서 말고, 씻지도 않은 채 냉장실에 넣어뒀다. (173쪽)


오랫동안 한 곳에서 사업장을 운영해 온 아버지에게 폐지 줍는 할머니는 이웃이었다. (198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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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
토니 클리프 지음, 조효래 옮김 / 책갈피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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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2022.11.14.

인문책시렁 248


《로자 룩셈부르그의 사상과 실천》

 파울 프뢸리히

 최민영 옮김

 석탑

 1984.9.15.



  《로자 룩셈부르그의 사상과 실천》(파울 프뢸리히/최민영 옮김, 석탑, 1984)을 곰곰이 읽습니다. 떠난 로자 룩셈부르그(1871∼1919) 님을 퍽 일찌감치 가까이에서 바라본 바대로 담아낸 드문 책이라고 할 만합니다. 오늘날에도 죽임질(테러)이 벌어지지만, 지난날에는 죽임질이 훨씬 흔했는데,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갈 길을 새롭게 밝히려고 목소리를 내고 움직인 이들은 자꾸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죽이는 이, 죽이려는 이, 죽임질 심부름을 하는 허수아비는 낄낄거립니다. 이들은 이슬로 사라지는 불꽃을 보면서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러나 이슬은 풀꽃나무하고 숲을 살리는 숨결입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해가 아침마다 뜨기에 푸른별은 푸르면서 파란하늘빛으로 싱그럽고 따뜻합니다.


  모든 싸움은 우두머리가 일으키고, 허수아비가 총알받이로 쓰러집니다. 모든 싸움은 사랑을 찍어누르려 하고, 언제나 사람을 위아래로 갈라서 서로 다투도록 부추깁니다.


  갈아엎는다는 ‘혁명’이지만, 물결친다는 ‘혁명’이고, 타오른다는 ‘혁명’이지만, 들풀이라는 ‘혁명’이기도 합니다. 어느 쪽으로 보든 ‘혁명’이라고 하는 길은, 서울빛으로는 해낼 수 없습니다. 쟁기질로 갈아엎으면 씨앗을 심거나 보금자리를 지을 노릇입니다. 우글우글 바글바글 물결치는 서울이 아닌, 들꽃으로 물결치는 터전에서 삶을 지을 노릇입니다. 미움이 타오르는 서울에서 아귀다툼을 벌일 노릇이 아닌, 열매가 익도록 떠오르는 해를 품는 터전을 품을 노릇이요, 누구나 스스로 들풀로 어깨동무하는 곳에 비로소 사랑이 깨어납니다.


  곰곰이 보면 숱한 혁명가는 서울(중앙정부)로 모였습니다. 참으로 갈아엎거나 물결치거나 타오르면서 들풀로 자리를 잡으려면, 외려 서울을 떠나 시골에서 살림을 지을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허수아비나 벼슬아치나 글바치나 감투꾼을 쓸어내는 가장 쉬우면서 빛나는 길은 ‘손수짓기(자급자족)’입니다. 씨앗 한 톨을 손바닥에 얹고서 멧새를 부르고 벌나비를 부르는 곳에 슬기로우면서 사랑스레 새길(혁명)을 연다고 느낍니다. 떠난 이슬을 기립니다.


ㅅㄴㄹ


폴란드의 모국어 사용은 학생들 사이에서마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고 러시아인 교사들은 이 금지령을 강제시행하기 위해 비루하게도 밀고자가 되었다. 이처럼 편협한 탄압책은 학생들의 저항정신을 일깨울 수밖에 업었다 … 로자 집안의 자유주의정신과 폴란드민족의식, 일찌기 싹튼 절대주의에 대한 타오르는 증오와 도전적인 독립정신은 어린 그녀를 학교의 이 저항운동으로 몰아넣었다. 실제로 그녀는 단순히 가장자리에 서 있던 것이 아니라 그 운동의 선두에 있었다. (26쪽)


불타는 듯한 증오로 그녀는 자연경제에 대한 자본의 투쟁을 그려낸다. 이러한 싸움을 거는 사람들(자본가들), 즉 권력에 대한 게걸스런 탐욕을 갖고 있으면서 자신들의 문명과 문화의 가치에 대해 자만하는 자칭 ‘문화의 전파자’들은 타민족들을 억누르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의존하고 있는 고래의 문화와 생산물을 파괴하고 기아와 대량학살을 자행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을 지구상에서 쓸어없애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잔인하게 위선적으로 해치우면서, 자본주의의 씨가 발아해서 번창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 잔인한 유혈의 과정을 인디아와 알제리를 예로 들면서 묘사한다. (191쪽)


혁명적인 러시아의 이후의 발전에 대한 로자의 예측은 들어맞지 않았다. 그녀는 적군(赤軍)이 계속 유지되고 위대한 10월혁명의 뒤에 ‘사회주의’라는 거짓된 상표가 붙은 관료국가자본주의가 나타날 것이라는 점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예측한 대로 소부르죠아 농민자산계급의 집단적 봉기가 반혁명을 초래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결국 민주주의의 완전한 파괴와 농민자산계급에 대한 제도적인 개혁조치가 있었을 뿐이다. (358쪽)


#RozaliaLuxenburg #PaulFrolich


※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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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 김만중의 생애와 문학
김병국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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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숲노래 인문책 2022.11.11.

인문책시렁 249


《서포 김만중의 생애와 문학》

 김병국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1.12.23.



  《서포 김만중의 생애와 문학》(김병국,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1)을 읽으며 ‘서울대 글바치’는 일부러 글을 어렵게 쓰려 한다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그러려니 이런 글결을 흘리면서 ‘김만중 삶자취’를 엿보려 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김만중 삶길을 일군 어머니’가 더없이 돋보이는구나 싶더군요.


  곁님한테 이 책에 흐르는 줄거리를 들려주었더니 ‘벼슬자리에 순이를 안 쓴 나라’가 멀쩡하게 돌아갈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나라는 ‘순이하고 돌이가 거의 똑같이 짝을 이루게 마련’이니, 벼슬순이를 두지 않을 적에는 ‘똑똑하고 일 잘 하는 사람’이 처음부터 토막나는 꼴이거든요.


  조선 500해는 내내 벼슬돌이만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숱한 순이는 조용히 집안에 머물렀어요. 이때에 순이가 집안일만 했다면 나라는 더 빨리 무너지고 더 엉망이었으리라 느껴요. 비록 벼슬길에 나설 수 없는 순이였으나 ‘벼슬길에 나서는 어린돌이’를 똑바로 가르치고 이끈 노릇을 했기에, 이럭저럭 나라가 멀쩡할 만했구나 싶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처음부터 순이돌이가 고르게 집안을 돌보고 마을을 가꾸고 나라를 살피는 어깨동무로 나아간다면, 모든 잘못이나 말썽은 사그라들 만합니다. 돌이만 높여서도 순이만 높여서도 안 될 노릇이에요. 어깨동무하는 길을 갈 노릇입니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크게 해야 할 일이 아닌, 서로 손을 맞잡고 슬기롭게 일을 풀어내는 길로 나아가야 아름집·아름마을·아름나라·아름별을 이룹니다.


  김만중 님이 남긴 《구운몽》이나 《사씨남정기》는 김만중 님 손을 거쳐서 태어났되 혼자 썼다고 하기 어려운, 어머니 손끝하고 눈빛을 듬뿍 머금으며 자라난 아이가 삶을 가만히 밝히려는 이야기꾸러미였다고 봅니다.


ㅅㄴㄹ


그녀(김만중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한 번만 가르쳐도 문득 깨달으니, 옹주(翁主)께서 늘 ‘아깝다, 그 여자가 된 것이!’” 하고 한탄했다 한다. 그녀는 나이 겨우 열네 살에 김만중의 아버지 익겸에게 시집왔다. (16쪽)


틈이 나면 문득 서책을 펴 보아 스스로를 달래고 나날이 읽기를 더욱 널리 하니 참판공은 아들 없는 근심을 거의 잊었다. 그래서 할아버지 윤신지는 말하기를, 손녀와 더불어 대화를 할 때면 매양 가슴속이 문득 확 트이는 것같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가 만일 남자라면 우리 집안에서 대제학이 나오지 않았겠느냐고 한탄했다 한다. (17쪽)


윤부인은 두 아들 때는 물론이고 그 다음 대의 손아(孫兒)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유년시절에 관한 한, 단지 자애로운 어머니나 할머니가 아니라 엄격히 글을 가르치는 교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18쪽)


집안이 가난하여 몸소 길쌈하고 수놓아 조석 밥을 대셨으되 태연하여 일찍이 근심 빛이 없으시던 어머니, 《소학(小學)》, 《사략(史略)》, 《당시(唐詩)》를 손수 가르쳐 주시던 어머니, 베틀에서 비단을 미련 없이 끊어내어 《좌씨전(左氏傳)》 한 질(帙)을 사 주시던 어머니. (21쪽)


김만중의 열두 살 때(1648) 기록을 보면 그는 이미 이즈음에 글짓는 재주가 어지간히 성취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처음으로 공식적인 학교 시험이랄 수 있는 상시(庠試)를 보게 한다. (49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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