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가는 길 - 앤소니 드 멜로 신부의 마지막 명상들
앤소니 드 멜로 지음, 이현주 옮김 / 삼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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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왜 태어나서 살아가는가
 [책읽기 삶읽기 102] 앤소니 드 멜로, 《사랑으로 가는 길》(삼인,2012)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할 때에 가장 즐겁습니다. 가장 하고 싶은 놀이를 할 때에 가장 신납니다. 셋째로 즐겁거나 둘째로 신날 만한 일놀이 아닌 첫째로 즐겁거나 신날 만한 일놀이를 할 때에 비로소 홀가분합니다.


  밥을 먹고 싶을 때에는 밥을 먹어야 합니다. 잠을 자고 싶을 때에는 잠을 자야 합니다. 나들이를 하고 싶을 때에는 나들이를 해야 합니다.


  언제나 마음이 곱게 흐르도록 살아야 아름답습니다. 늘 몸이 바라는 길을 살필 때에 어여쁩니다. 따순 봄을 맞이해서 온갖 들풀이 꽃송이를 피우듯, 가장 피어나고 싶은 한때에 꽃이 핍니다. 사람들 꿈이나 사랑 또한 가장 빛나게 펼쳐지며 드리우고 싶을 때에 빛나야 아름답다 할 만해요.


.. 당신이 자연을 감상하고 친절한 벗들과 사귀고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맛보는 행복 … 당신이 지금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당신한테 있는 것을 보지 않고 당신한테 없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 당신을 행복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하는 것은 세상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도 아니고 당신 머리에 담긴 생각입니다 … 행복을 얻기 위하여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행복하기 위하여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고요? 당신은 지금 여기서 충분히 행복하니까요 ..  (12, 17, 18, 35쪽)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놀던 아이가 저녁나절 드디어 잠듭니다. 한창 뛰어놀기에 빠진 아이는 시골집 마당 한켠에 쌓은 모래더미를 좋은 놀이터로 삼습니다.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이 모래더미에 파묻힙니다. 한낮 해가 기울 무렵 아버지가 뒤꼍 땅뙈기를 괭이로 일구니, 이 곁에서 저도 호미로 땅파기를 하다가는 호미는 옆으로 던져 놓고 흙바닥에 주저앉아 이제 흙놀이를 합니다. 밭을 마련하려고 일군 자리에 들어가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어 뒹굽니다.


  흙투성이 몸으로 집으로 들어가면 마루며 부엌이며 방이며 다시 쓸고 닦고 해야 하니 속으로 한숨이 나오지만, 이렇게 밭일을 할 때에 곁에서 흙을 만지작거리며 햇살을 나란히 쬐니 고맙고 기쁩니다. 마침 옆지기가 저녁 먹자며 부르는데, 뒤꼍 땅뙈기 가장자리 나무에서 꽃이 피었다며 무슨 꽃이냐고 묻습니다.


  아이와 함께 바라봅니다. 어, 우리 집 뒤꼍에 매화나무가 있었네?

  우리 마을 다른 집 매화나무는 흐드러지게 꽃이 피는데, 우리 집 매화나무는 이제 두어 송이 겨우 꽃이 핍니다. 마을 다른 집 매화나무는 눈처럼 새하얀데 우리 집 매화나무는 옅게 발그스름합니다. 속으로 생각합니다. 음, 우리 집 매화나무 꽃송이가 훨씬 예쁜걸. 게다가 이제부터 우리 집 뒤꼍에서 매화꽃을 보며 밭을 갈 수 있구나.


..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존재이기를 요구하는 것은 그를 즐겁게 할 임무에 당신을 묶어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의 자유를 스스로 잃어버리는 거지요 … 사랑을 경험하려면 당신 주변의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독특함과 아름다움에 민감해야 합니다 … 우리가 자연을 거역하여 개발을 시도할 때마다 그렇게 해서 상처를 입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연은 곧 인간이니까요 …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을 소유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그것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당신 안에 있으니까요 ..  (42, 51, 79, 112쪽)


  저녁을 먹습니다. 둘째를 씻깁니다. 둘째 몸을 말리고 옷을 새로 입힙니다. 마당에서 또 모래놀이를 하는 첫째를 부릅니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 부르거나 말거나 쳐다보지 않습니다. 둘째를 씻기고 남은 물은 식습니다. 저 물로 얼른 아이들 옷가지를 빨래하고 치워야 나도 좀 쉴 텐데 하고 생각하다가, 이러다 첫째를 오늘 또 못 씻기나 하고 생각합니다. 둘째를 안고 마당으로 나옵니다. 첫째는 어느새 집으로 들어왔는데, 아버지가 밖으로 나오니 저도 따라 나옵니다.


  아버지는 둘째를 안고 마을을 한 바퀴 휘 돕니다. 첫째는 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옵니다. 어디, 얼마나 잘 따라오는가 보자,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재게 놀립니다. 아이가 신이 벗겨집니다. 모르는 척 걷습니다. 울면서 아버지를 부르다가 이내 달음박질을 하며 따라붙습니다. 논둑으로 올라섭니다. 길로 내려옵니다. 다시 마을 한 바퀴를 도는데 또 신이 벗겨집니다. 벗겨진 신을 보다가 아버지를 보다가 또 우는 아이를 다시금 모르는 척합니다.


  이제 우리 집 뒤꼍 밭뙈기 자리에 접어듭니다. 아, 내가 무슨 아버지랍시고 이렇게 아이를 울리면서 졸졸 따라오게 하나 생각합니다. 그저 더 놀고 싶을 뿐이라, 씻자는 말을 귓결로 흘릴 뿐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 씻자 씻자 불러도 안 오면 둘째를 안고 이렇게 마을을 한 바퀴 돌자고 불러, 휘 돈 다음 씻자고 하면 아이가 잘 따르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더 놀게 하고, 더 뛰게 한 다음, 이제 꽤 지쳤겠다 싶을 무렵 신나게 씻으면, 어느 결에 스르르 잠들 테지요.


.. 깨어 있는 사람이 어떻게 나쁜 짓을 할 수 있겠어요?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하거나 악한 사람이 되는 것은 그가 뭐든지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병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동물은 너무 살이 쪄서 체중이 오버하는 일이 없고, 싸우거나 도망칠 일이 생기기 전에는 긴장하는 법이 없습니다. 제 몸에 안 좋은 음식에는 절대 입을 대지 않지요. 필요할 때만 움직이고 나머지 시간은 휴식으로 꽉 채웁니다. 바람, 햇빛, 비, 더위, 추위 같은 자연환경에 언제나 적당히 자신을 노출시키지요.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제 몸이 하는 말을 알아듣고 몸의 지혜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 사랑을 할 때 당신은 모든 사람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됩니다. 전에는 엄격하고 심드렁하게 보던 사람들을 너그럽고 친절하게 대하지요 ..  (47, 81, 117쪽)


  씻고 옷을 새로 입은 첫째는 어머니 곁에서 조금 칭얼거리고 놀더니 아버지 품에 안겨 무릎에 눕습니다. 아버지 무릎에 누운 지 몇 분 지나니 사르르 잠듭니다. 옆에서 둘째가 어머니랑 놀며 좋다고 악악 소리를 내도 깨지 않습니다.


  키 1미터를 넘긴 첫째를 무릎에 누워 재우자면 이제 무릎이 모자랍니다. 다리며 머리가 삐죽 나옵니다. 첫째를 무릎에 누워 재운 지 참 오래되었다고 떠오릅니다. 요즈음 첫째를 재울 때면 으레 잠자리에 나란히 누워 팔베개를 하며 노래를 부르거든요.


  날마다 키가 자라는 만큼 날마다 몸피도 커지고 몸무게가 늡니다. 둘째를 무릎에서 재우며 토닥일 때에 무릎이 저리고, 다 큰 첫째를 무릎에 재우자니 무릎이 퍽 저립니다.


  내 어버이는 내가 몇 살일 때까지 무릎에 누여 재우셨을까 궁금합니다. 열두어 살 때에도 시외버스를 타고 시골집에 찾아갈 때에 무릎에 재운 적 있기도 하다고 문득 떠오르는데, 온몸을 맡겨 내 어버이 무릎에서 잠든 마지막 나이는 언제였을까 궁금합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저희 어버이인 나와 옆지기가 저희를 이렇게 무릎에 눕히고 무릎이 뻑적지근하도록 재우던 일을 어느 만큼 떠올릴까 궁금합니다. 어쩌면 하나도 떠올리지 못할 수 있고, 하나도 못 떠올린다지만, 이 두 아이가 무럭무럭 커서 저희 짝꿍을 만나 저희 아이를 낳고 나서, 나와 옆지기가 했듯, 또 내 어버이와 옆지기 어버이가 했듯, 저희 아이들을 무릎에 누여 곱게 재우는 삶을 이으리라 느껴요. 얼마나 어버이 무릎에서 잠들었는지 제대로 떠올리지 못한다지만 몸이 알겠지요. 얼마나 오래 어버이 무릎에서 꿈나라로 접어들었는가 낱낱이 되새기지 못하더라도 마음이 느끼겠지요.


.. 틀을 움켜잡으면 당신은 그것에 갇힌 몸이 되지요. 그리하여 당신은 시들게 되고, 마침내 죽는 순간까지 자기를 본다는 게 무엇인지, 배운다는 게 무엇인지를 깨치지 못할 것입니다 … 한 아이를 누군가의 판박이로 만들 때 당신은 그 아이가 세상에 가지고 온 천연의 불꽃을 발로 밟아 끄고 있는 겁니다 … 당신은 신선하게 보이지 않는 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상대한테서 끊임없이 새로움을 발견하지 않고서는 그를 사랑할 수가 없는 거예요 … 우리는 시력 잃은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깁니다만, 그러나 그들의 다른 감각들이 제공하는 풍부한 정보에 대하여는 거의 아는 게 없습니다 ..  (94∼95, 102, 142, 145쪽)


  사랑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하나라고 느낍니다. 사랑하는 삶이 곧 사랑으로 가는 길이라고 느낍니다. 사랑을 말하거나 속삭인대서 사랑으로 가는 길은 아니라고 느껴요. 사랑을 이야기하는 책을 읽거나 노래를 듣더라도 사랑으로 가는 길은 아니라고 느껴요.


  오직 사랑하는 삶이 사랑으로 가는 길이로구나 싶어요. 아이들을 사랑하고, 옆지기를 사랑하며, 보금자리를 사랑합니다. 풀과 나무를 사랑하고, 밭과 논을 사랑하며, 햇살과 바람을 사랑합니다. 냇물을 사랑하고, 멧자락을 사랑하며, 바닷가 모래밭을 사랑합니다. 살붙이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동무를 사랑합니다.


  딱히 다른 사랑이 있을까 모르겠어요. 딱히 다른 사랑은 없으리라 느껴요. 책사랑이란 말 그대로 책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노래사랑이란 이름 그대로 노래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삶이기에 사랑으로 가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삶인 만큼, 몸과 마음을 예쁘게 가다듬어 사랑스레 걷습니다.


.. 당신은 아름답지도 밉지도 않으니까요. 당신은 그냥 당신입니다 …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일 일은 내일이 알아서 할 것입니다. 날마다 그날 하루의 수고로 충분합니다 ..  (124, 172쪽)


  앤소니 드 멜로 님이 빚은 《사랑으로 가는 길》(삼인,2012)이라는 이야기책을 읽습니다. 앤소니 드 멜로 님은 사람들한테 오직 한 가지 길을 즐거이 걸어가면 좋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삶을 사랑하며, 내가 꿈을 사랑할 때에 참 좋으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랑 말고는 온통 덧없다고 하는 《사랑으로 가는 길》을 읽습니다. 사랑하는 삶을 즐겁게 걷는 나날만큼 아름다운 이야기란 없다는 《사랑으로 가는 길》을 읽습니다.


  그래요. 나는 왜 태어났을까요. 우리 아이들은 왜 태어났을까요. 나는 이 땅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면 즐거울까요. 우리 아이들은 이 땅에서 어떤 꿈을 펼치며 살아갈 때에 즐거울까요. 사람이 하루하루 기쁘게 누리는 밑샘이란 무엇일까요. 사람이 날마다 기쁘게 맞아들이는 웃음은 어디에서 비롯할까요.


  몸을 살찌우는 밥은 어떤 매무새로 지어야 맛날까요. 마음을 살찌우는 이야기는 어떤 넋으로 빚어야 슬기로울까요.


  사랑 없이 지은 밥을 맛나게 먹을 수 있나요. 사랑 없이 지은 옷을 예쁘게 입을 수 있나요. 사랑 없이 지은 집에서 오붓하게 살아갈 수 있나요. 돈을 벌든, 이름을 얻든, 힘을 거머쥐든, 내 마음과 몸이 온통 사랑으로 빛나지 않는다면, 내 삶은 나 스스로 아름답다고 느낄 수 없어요. (4345.3.28.물.ㅎㄲㅅㄱ)


― 사랑으로 가는 길 (앤소니 드 멜로 씀,이현주 옮김,삼인 펴냄,2012.2.17./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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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가 커졌다
호원숙 지음 / 샘터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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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은 삶에서 태어납니다
 [책읽기 삶읽기 99] 호원숙, 《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가 커졌다》(샘터,2006)

 


 나는 두 아이한테 어버이입니다. 나는 두 어버이한테 아이입니다. 나는 두 아이가 튼튼하고 씩씩하게 자라나서 착하고 어여삐 살아가기를 꿈꿉니다. 내 어버이 또한 나한테 튼튼하고 씩씩하게 자라나서 착하고 어여삐 살아가기를 빌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이 손을 잡고 길을 걷습니다. 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걷습니다. 맑은 날은 햇살을 받으며 걷습니다. 바람 부는 날은 바람을 맞으며 걷습니다.

 

 자가용이 없는 우리 살림이기에 으레 걷습니다. 때로는 자전거를 함께 타고, 때로는 버스를 얻어 탑니다. 같은 빠르기로 걷습니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걷습니다. 같은 느낌과 생각까지는 아닐 테지만, 같은 하늘과 들판과 새들을 바라보며 걷습니다.


.. 해가 떠오르기 전 아침노을이 아름다울 때가 있다 … 나는 단풍나무 숲을 걷는다. 이파리 하나하나 말을 거는 듯 음악이 들리는 듯하다 ..  (10, 11쪽)


 해가 기울어 어두운 때, 아이를 데리고 마당이나 뒤꼍으로 나와 밤하늘을 올려다보곤 합니다. 밤에 별을 볼 수 있는 시골이 좋습니다. 밤에 별을 볼 수 없다면 얼마나 밋밋하고 따분한 터전이 될까요. 전기가 없으면 반짝거리지 못하는 데라면 얼마나 메마르고 허전한 터전이 될까요.

 

 아침과 낮과 저녁으로 바깥바람을 쐽니다. 때마다 바람이 다릅니다. 날에 따라 바람이 다르고, 철에 따라 바람이 다릅니다. 나는 나대로 바람을 맞아들입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바람을 맞아들일 테지요.

 

 어버이가 살아가는 터전이란 어버이부터 즐거이 누리는 사랑이면서, 아이들한테 곱게 물려주는 사랑입니다. 어버이부터 더 좋은 꿈을 북돋우는 사랑을 누릴 수 있고, 아이들한테 더 기쁜 사랑을 물려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버이부터 하루하루 가까스로 견디거나 힘겨이 버티기도 합니다. 사랑하고 동떨어진 채 지낼 수 있습니다. 이동안 아이들은 고되거나 슬픈 아픔을 나날이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어버이 스스로 좋은 삶을 누리지 않으면, 아이들 또한 좋은 삶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 시골 출신인 남편이 건네주는 자연의 선물이다. 서울 아이는 이런 건 모른다. 자연에서 놀지 않았기에 무얼 먹어야 할지 잘 모른다. 연두색의 꼼밥(소나부 꽃은 약간은 새큼하고 약간은 달큼하고 약간은 떫다 … 나는 좋은 부모 밑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고 젊어서 원 없이 사랑도 했고 좋은 직장에서 월급도 받아 보았고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아 내 젖으로 키웠고 좋은 학교에 보냈다 ..  (23, 66쪽)


 소설쓰는 박완서 님 딸로 태어나 살아온 호원숙 님이 내놓은 수필책 《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가 커졌다》(샘터,2006)를 읽습니다. 박완서는 박완서이고 호원숙은 호원숙일 텐데, 수필책 《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가 커졌다》는 어머니 박완서를 ‘큰 나무’로 삼고 맙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할 수 있을까요. 어찌할 길 없는 셈이라 할 만할까요.

 

 큰 나무 사이로 걸어간대서 내 키가 커질 일이 없습니다. 나무가 크다면 얼마나 크고, 나무가 작다면 얼마나 작을까요. 나무는 그저 나무입니다. 나무 사이를 걸어가는 나는 그저 나 하나입니다. 내가 나무 사이를 걸어갔기에 나무들마다 키가 한껏 자라날는지 모르고, 내가 나무 사이를 걸어간 탓에 나무들마다 키가 한 뼘씩 줄어들는지 모릅니다만, 나 스스로 키가 커지겠다고 꿈꾸지 않는다면, 큰 나무들 사이를 걷는대서 내 키가 커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작은 나무들 사이를 걸어가더라도 나는 얼마든지 키를 키울 수 있어요. 아무 나무 사이를 안 지나더라도 나는 나대로 내 키를 키울 만합니다.


.. 쓸 수 있다는 것, 써진다는 것 모두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재미있다고 이런 책을 단숨에 읽을 필요는 없으리라. 하루에 한 편이라도 읽으면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착해질 것 같다 … 그래도 아이들 어릴 때 쓴 일기 공책은 버리지 못한다. 그걸 버리는 건 그들의 몫이니까 … 어머니의 데뷔작 《나목》을 읽던 날을 잊지 못한다. 단숨에 읽어 버렸지만 읽고 난 후 여태껏의 우리 집의 분위기와 빛깔이 바뀌어 이제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  (48, 57, 167, 213쪽)


 소설쓰는 박완서 님은 소설쓰는 박완서 님대로 당신 삶을 사랑하면서 일구었습니다. 호원숙 님은 호원숙 님대로 당신 삶을 사랑하면서 일구면 됩니다. 굳이 큰 나무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작은 나무라고 낮출 까닭이 없습니다.

 

 박완서 님은 호원숙 님을 비롯한 여러 아이를 낳아 돌보는 삶을 일구었기에 소설을 쓰는 기운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소설쟁이 한길을 못 걸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호원숙 님한테 어머니 박완서 님이 큰 나무가 아니라, 박완서 님한테 호원숙 님이 큰 나무였을 수 있어요.


.. 아이는 그동안 무얼 공부했는지 이상의 수필 〈권태〉는 알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시험 전날 갑자기 무얼 어떻게 하겠는가. 미리 알려준 게 무슨 독과도 같았다. 나는 서재에서 낡은 이상 문학 전집을 꺼내 들고 아이 방으로 갔다. 그 애한테 세로로 조판된, 그것도 오래되어 잉크가 다 날아가 버린 책을 읽으라는 것은 무리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이상의 수필집을 읽어 준다. 어린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듯이 ..  (170쪽)


 수필이란 내 삶을 드러내며 내 꿈을 나누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삶이란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습니다. 내 삶이란 작지도 크지도 않습니다. 내 삶은 오로지 내 사랑대로 흐릅니다. 내 삶은 오직 내 사랑을 나 스스로 어떻게 보살피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수필책 《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가 커졌다》는 처음부터 ‘호원숙 수필’로 썼어야 아름답습니다. 어머니 그늘자리에서 쓰는 수필이 아니라, ‘내 삶자리’에서 쓰는 글이었어야 예쁘게 빛납니다.

 

 차라리, ‘어머니 박완서를 떠올리거나 그리는 이야기’로만 가득 채웠으면 나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니면, ‘어머니 박완서하고는 사뭇 동떨어진 이야기’로 알알이 누볐으면 나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라면, 그저 큰 나무에 기대어 열매 얻어먹는 셈일 뿐입니다.

 

 살아가노라면, 큰 나무에 기댄대서 잘못일 수 없고, 열매 몇 알 얻어먹는 일이 나쁠 까닭이 없어요. 다만, 호원숙 님으로서는 호원숙 님 한 사람한테만 서린 고운 빛줄기가 있습니다. 이 빛줄기를 곱게 사랑하며 북돋우면 좋겠습니다. 집에서 살림하는 아줌마이면 어떻고, 숲길 걷기를 좋아하는 도시내기이면 어떤가요. 오늘 내 삶을 꾸밈없이 맞아들여 스스럼없이 아낄 때에 가장 빛나는 하루이고, 이 가장 빛나는 하루를 수수하게 글로 여밀 때에 수필이 태어나요.

 

 문학은 삶에서 태어납니다. 문학은 생각에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문학은 삶을 아끼는 생각으로 일굽니다. 문학은 삶을 사랑하는 생각으로 빚습니다. (4345.2.22.물.ㅎㄲㅅㄱ)


― 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가 커졌다 (호원숙 글,샘터 펴냄,2006.4.25./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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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나를 물들이다 - 법정 스님과 행복한 동행을 한 사람들
변택주 지음 / 불광출판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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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물들이는 어여쁜 삶
 [책읽기 삶읽기 96] 변택주, 《법정, 나를 물들이다》(불광출판사,2012)

 


 흙으로 돌아간 법정 스님을 되새기는 이야기책 《법정, 나를 물들이다》(불광출판사,2012)를 읽습니다. 이 책은 법정 스님이 ‘비우기(무소유)’를 말하지 않았다는 줄거리를 들려줍니다. 법정 스님은 ‘함께 살아가기’를 말했다는 줄거리를 찬찬히 보여줍니다.


.. “법정 스님이 신념을 가지고 말씀하셨어요. 문화, 사회, 역사를 봤을 때 종교 목적이 종단 구성일 수는 없다고.” ..  (21쪽/장익)
.. 1982년 전시회 때문에 귀국한 방혜자 선생. 고국에 돌아와서 흙도 밟아 보지 못하고 시멘트 바닥 위만 걷다가 돌아가게 되었다며 후배에게 하소연했다 ..  (53쪽/방혜자)


 곰곰이 헤아리면, ‘비우기’란 ‘함께 살아가’는 밑거름입니다. 내 가진 것을 비우거나 내려놓을 때에 내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를 바라볼 수 있을 테니까요. 내 가진 것을 비우거나 내려놓아야 비로소 내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하고 어깨동무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내 이름값을 움켜쥐면서 동무를 사귀지 못합니다. 내 돈을 거머쥐면서 이웃을 만나지 못합니다. 내 콧방귀를 높이면서 살붙이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칭얼대는 아이한테 젖을 물리는 어머니는 모든 아이들한테 어머니입니다. 이녁이 아이를 낳기 앞서 변호사였다든지 회계사였다든지 의사였다든지 대통령이었다든지 시장이었다든지 하는 이름값은 부질없습니다. 아이는 그저 어머니를 바라봅니다.

 

 어린이하고 손을 잡고 노는 아버지는 모든 아이들한테 아버지입니다. 이녁이 아이들과 복닥이기 앞서 공무원이었다든지 군인이었다든지 회사원이었다든지 흙일꾼이었다든지 하는 이름은 덧없습니다. 아이는 그예 아버지하고 놀 뿐입니다.

 

 어버이가 돈이 많대서 아이들이 기뻐할 까닭이 없습니다. 흙을 일구려고 호미를 쥔 사람이 국회의원이건 택시기사이건 흙이 달리 여길 까닭이 없습니다. 햇살은 청소 일꾼한테도 비추고, 큰회사 사장실에도 비춥니다. 바람은 바닷가 고기잡이한테도 불고, 초등학교 교무실 창문으로도 붑니다.

 

 스스로 돈과 이름과 힘을 비우거나 내려놓아야 비로소 눈을 밝힙니다. 눈을 밝힐 때에 마음을 밝히고, 마음을 밝힐 때에 사랑을 밝힙니다.


.. “서울 살았으면 얼마를 더 벌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건 가상이잖아요. 이루어지지 않은, 생각 속 손해는 손해가 아니에요. 서울 사는 시간을 줄여서 큰 병에 걸리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보면 시골 가길 얼마나 잘했어요.” ..  (127쪽/이계진)
.. 노일경 목사는 시골교회 목회를 할 때, 가는 곳마다 있는 서낭당을 보면서, ‘개신교에서는 서낭당을 왜 죄악이라며 깎아내리고 무시할까?’ 갸웃거렸다. 민간 무속문화인 서낭당은 누군가에게 기대고자 하는 마음일 뿐인데, 그 대상이 나무든 돌이든 짐승이든 사람이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공경하며 조심스런 마음을 갖는 건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자기들만이 유일하다고 얘기하며 종교를 빌미로 권력을 휘두르고 ..  (200쪽/노일경)


 누구한테서 무얼 배워야 훌륭하지 않습니다. 누구한테서 배우지 않을 때에는 못 배운다 말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이기에 잘 가르치지 않습니다. 누구라서 못 배우지 않습니다.

 

 훌륭하다는 스승이나 제자란 따로 없습니다. 모자라다는 스승이나 제자 또한 따로 없습니다. 언제나 같은 사람이면서, 늘 서로서로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프랑스로 배우러 떠나야 그림을 배우지 않습니다. 미국으로 배우러 떠나야 의학을 배우지 않습니다. 쿠바로 배우러 떠나야 생태나 공동체를 배우지 않아요. 티벳으로 배우러 떠나야 불교나 깨우침을 배우지 않아요.

 

 학교에서는 재주를 가르치겠지요. 무슨무슨 기술이라 하는 이런 재주와 저런 재주를 가르치겠지요. 교과서를 읽으며 지식이나 정보를 얻겠지요. 교과서를 잘 익혀 시험점수 잘 낼 수 있겠지요.

 그러나, 무슨 재주가 있기에 훌륭하다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기술이 빼어나대서 훌륭하다 말하지 않아요. 시험점수 높으니 똑똑하거나 훌륭하다 말하지 않습니다.

 

 싱싱 내달릴 수 있기에 자동차를 잘 다루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계를 잘 만지작거리기에 기술자가 아닙니다. 예술작품을 빚기에 예술쟁이가 아니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마음이 있을 때에 쟁이가 되고 장이가 되며 꾼이 돼요.


.. 법정 스님에게 조선대 법대에 들어갔다고 말씀드리니, 스님은 “법학을 하는 데 왜 사회학이 중요하고, 정치학이 중요하고, 심리학이 중요한지 아느냐? 그 기반 위에 법이 있기 때문이다. 바탕을 닦지 않고, 법학만 한다면 그저 시험공부일 뿐인 죽은 공부다. 특히 철학책은 꼭 읽어야 한다. 사유와 성찰이란 커다란 물줄기에서 법학은 새 발에 난 피일 뿐이다. 무식한 놈이 되지 않으려면 폭넓게 사유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말씀했다 ..  (224쪽/문현철)
.. “제가 출가하는 봄에 불일암을 짓기 시작해서 계를 받는 날 낙성식을 했으니, 불일암과 제 출가 나이가 똑같아요. 그때 촛대처럼 가는 후박나무 묘목을 심었어요. 불일암에 갈 때마다 후박나무를 만지며 숨결도 느껴 보는데, 그 가냘팠던 나무가 아름드리로 자라서 큰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요.” ..  (287쪽/현장)


 《법정, 나를 물들이다》에 나오는 사람들은 법정 스님을 떠올리면서 한결같이 이야기합니다. 당신들이 그닥 거룩하거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다고, 당신들이 만나면서 알고 지낸 스님 한 분은 ‘우상’이나 ‘거룩한 님’으로 섬기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모두 같은 사람입니다. 모두 같은 사랑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만난다면 나와 누군가가 서로 좋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나를 만난다면 누군가와 내가 좋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지만, 웃물이든 아랫물이든 같은 물이에요. 골짝물도 냇물도 바닷물도 똑같이 물이에요. 빗물도 우물물도 샘물도 나란히 물입니다.

 

 흐르는 자리가 조금 다르겠지요. 선 자리가 살짝 다르겠지요. 모양과 빛깔과 내음이 저마다 다르겠지요.

 

 흐르는 자리가 달라 모두 예쁜 물이 됩니다. 선 자리가 달라 서로 고운 물이 됩니다. 모양과 빛깔과 내음이 이래저래 달라 한결같이 맑은 물이 됩니다.

 

 법정 스님은 여러 사람들을 물들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은 법정 스님을 물들였습니다. 서로 즐겁고 기쁘게 물들이면서 함께 살았습니다. 함께 살아가며 서로를 따스하고 너그러이 물들였습니다. (4345.1.19.나무.ㅎㄲㅅㄱ)


― 법정, 나를 물들이다 (변택주 씀,불광출판사 펴냄,2012.1.5./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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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헌화가 - 번역가 이종인의 책과 인생에 대한 따뜻한 기록
이종인 지음 / 즐거운상상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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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을 잘하는 길이 있다면
 [책읽기 삶읽기 95] 이종인, 《지하철 헌화가》(즐거운상상,2008)

 


 새로운 책이 태어납니다. 먼저 태어난 책이 즐거이 힘겨이 고마이 숨을 잇다가는 어느결에 조용히 숨을 거두면서 새책방 책꽂이에서 슬그머니 사라집니다. 새책방이라는 곳이 새로 나오는 책들을 모조리 건사하려고 크기를 키우는 일이 드뭅니다. 도서관이라는 데가 새로 나오는 책을 알뜰히 건사하겠다며 건물을 늘리는 일이 드뭅니다. 이 나라에서는 새로 나오는 책에 발맞추어 묵은 책들은 하나둘 자리를 내주며 어디론가 사라져야 합니다.

 

 내가 살아온 나날을 가만히 되짚습니다. 나는 우리 네 식구와 함께 살면서도 여러 차례 살림집을 옮겼습니다. 네 식구 살림집을 처음 옮기던 인천 골목동네에서는 더 시골스러운 골목집으로 옮겼고, 아예 시골로 옮긴 이듬해를 지나고 새해를 맞이한 다음에는, 더 깊다 하는 시골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이런 집옮기기를 살피자니, 시골스러운 살림도 시골스러운 살림이지만, 책을 건사하는 자리가 늘 더 넓어지고 커집니다.


.. 장모님은 내가 ‘믿을 만한 직장에 다니는 보통 남자’라는 점 하나만 보고서 딸을 나에게 줄 생각을 하셨다는 것이다 … 아내는 신혼 9개월 동안 도곡동의 영동아파트에서 단둘이 살던 시절을 제외하고는 고생의 연속이었다. 당시 건설회사를 다니던 나는 결혼 9개월 만에 사우디아라비아로 파견되어 3년 동안 헤어져 살아야 했다 … 내가 없는 동안 아내는 매운 시집살이를 했다. 그때 아내가 보낸 편지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생활을 견디게 해 준 큰 힘이었는데 ..  (32∼33쪽)


 앞으로 더 넓고 큰 데로 또 옮겨야 할 일은 없으리라 굳게 믿으며 오늘 네 식구 살아가는 보금자리를 아끼고 싶습니다. 새로 옮길 살림살이가 아니라, 튼튼히 뿌리내리면서 나중에 책자리를 새로 마련해서 늘리는 길을 꿈꾸고 싶습니다. 책에 따라 옮기는 삶이 아니라, 사람이 사랑스레 어우러지는 터에서 책이 나란히 어여삐 꿈날개를 펴도록 마음과 힘을 쏟고 싶어요.


.. 1994년 봄, 세 번째이자 마지막 직장인 한국 브리태니커를 그만두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와 아내에게 이제 번역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 가겠다고 말하자 두 사람은 아주 난감해 했다 … 결국 아내는 내가 전업 번역가 생활을 시작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아동복 가게를 내어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  (56∼57쪽)


 어머니나 아버지가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면, 아이는 저절로 곁에서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립니다. 다만, 책만 읽는다면, 그저 책에만 파고든다면, 온통 책에만 마음을 빼앗긴다면, 아이들은 어버이 책읽기 삶을 기쁘게 받아안지 못해요. 삶이 있고 책이 있어야 해요. 삶으로 녹아드는 책읽기여야 해요. 삶을 알뜰히 꾸리면서 책을 즐기는 나날이어야 해요.

 

 맛나게 밥을 짓고 나서 배부른 몸을 쉬면서 책을 읽습니다. 신나게 옷을 빨래하고 널고 개고 옷장에 넣고 나서 기지개를 켜면서 책을 읽습니다. 아이들 먼저 재우고 나서 십 분쯤 눈에 힘을 주면서 책 몇 쪽 펼치며 같이 잠듭니다. 홀로 볼일 보러 도시로 살짝 다녀올 때에 버스길이나 기차길에서 책을 읽습니다.

 

 좋은 삶이기에 좋은 책을 살피며 좋은 이야기를 얻습니다. 좋은 이야기 얻은 좋은 책을 발판 삼아 내 하루를 좋은 나날이 되도록 더 좋은 힘을 냅니다.

 

 지식을 쌓으려고 책을 읽지 못합니다. 책을 읽는들 지식이 쌓이지 않습니다. 자격증을 따거나 시험에 붙거나 무엇무엇을 꾀하며 책을 읽는 사람이 많다지만, 막상 책을 읽어 자격증을 따거나 시험에 붙을 수 없어요. 책은 자격증도 시험문제도 돈도 자기계발도 아니거든요. 책은 오로지 책을 쓴 사람과 책을 읽는 사람들 삶을 빛내는 좋은 길동무이거든요.

 

 길동무로 느끼지 못한다면 책을 읽어 본들 삶이 나아지지 않아요. 길동무로 삼지 않는다면 책을 많이 파거나 다루거나 내거나 만지더라도 책으로 일구는 사랑씨앗이 무엇인지 알아채거나 느끼거나 받아들이지 못해요.

 

 책이 마음밥이 된다면, 내 마음을 따사로이 보듬으면서 내 삶을 더욱 힘차게 일구는 발판이 되기 때문이에요. 몸을 살찌우는 밥을 지나치게 먹거나 너무 덜 먹어서는 몸이 버티지 못하듯, 마음을 살찌우는 밥이라면 한켠으로 치우쳐서 먹으면 안 될 뿐 아니라, 마음밥을 먹으면 이렇게 먹은 대로 삶을 사랑스레 돌봐야지요. 마음을 살찌우는 밥이라면 어떠한 밥(책)을 찾아서 먹어야 할까요. 몸을 살찌우는 밥을 아무것이나 아무렇게나 장만해서 입에 쑤셔넣어도 되지 않겠지요. ‘자기계발’을 한다며 밥을 아무렇게나 먹어도 되나요. ‘자격증’이나 ‘시험문제’에 맞추어 아무 밥이나 함부로 먹어도 되나요.

 

 우리들은 누구나 돈이 아닌 삶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사랑할 수 있어야 해요. 돈이 아닌 삶을 아끼면서 마음을 살찌울 책을 손에 쥐어야 해요.


.. 이 책들을 읽을 때마다 우리 조상이 이 아름다운 글들을 전부 한글로 썼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을 억누르기가 어려웠다. 특히 문집총간에 들어 있는 수많은 명사들의 한문 문집을 보면서 이것들이 처음부터 한글로 씌어졌더라면 아니, 하다못해 번역이라도 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  (141쪽)


 번역하는 이종인 님이 내놓은 산문책 《지하철 헌화가》(즐거운상상,2008)를 읽습니다. 번역하는 이야기랑, 이종인 님이 살아온 나날을 찬찬히 들려주는 이야기를 싣는 산문책입니다. 이종인 님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요, 대단한 책을 옮긴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산문책 또한 대단하지 않아요.

 

 대단한 글을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단한 책 또한 없습니다. 저마다 아끼거나 사랑할 좋은 터전에서 좋은 삶을 누리면서 쓰는 글이고 엮는 책입니다. 나라밖에서 나온 이와 같은 ‘좋은 터전에서 좋은 삶을 누리면서 쓴 글’을 한글로 옮기는 일 또한 ‘더 좋은 일’이 아니라, 수수하면서 투박한 삶이에요.


.. 당시 서울 시내 헌책방이라면 어디든 다 가 보겠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 우연히 중대 앞을 지나다가 허름한 헌책방 하나를 발견했다. 오래 전이라 서점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으나 아주 착하게 생긴 아주머니 한 분이 가게를 보고 있었다. 몇 권의 책을 고르니 아주머니가 내 눈치를 보면서 가격을 말하곤 너무 비싸게 부르지 않았느냐고 물어 보는 것이었다. 분명 싼값이었는데 나는 더 깎아 달라고 했던 것 같다 ..  (142∼143쪽)


 나는 《지하철 헌화가》를 읽으며 다른 어느 글보다 헌책방 나들이를 즐긴 삶을 찬찬히 읽습니다. 찬찬히 읽다가 몇 군데에서 아차 싶도록 아픕니다. 이종인 님은 헌책방에서 곧잘 에누리를 하는 분이었군요. 헌책방에서 책방 일꾼이 부르는 책값을 함부로 깎지 말자는 이야기를 붙이기도 하지만, 막상 이종인 님은 당신도 모르게 책값 에누리를 하기도 했다고 스스럼없이 털어놓습니다.

 

 누구나 이와 비슷해요. 헌책방에서 에누리 안 하며 기쁘게 책값을 고스란히 치르는 사람이란 아주아주 드물어요. 거의 없다시피 해요. 헌책방은 책을 싸게 사는 곳이 아니라, ‘어느 한 사람 손을 거쳐 어느 한 사람 집에서 빠져나온 책’을 사고파는 곳이에요. ‘어느 한 사람 손을 거쳤으되 어느 한 사람 집에 더는 머물 수 없는 책’이 흘러나와 이 책들을 고이 모시거나 섬기거나 다루면서 사고파는 헌책방이에요.


.. 외국어 실력이 곧 번역 실력은 아니다. 번역을 시작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오해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번역 실력을 테스트 받는 것이 필요하다 ..  (59쪽)


 외국말을 잘한대서 번역을 잘할 수 없습니다. 거꾸로, 한국말을 잘한대서 국어교사나 국어학자 노릇을 잘한달 수 없어요. 더구나, 외국말 잘하고 한국말 잘하기에 번역이나 통역을 잘할 수 있을까요.

 

 나는 생각합니다. 번역이든 통역이든 하려면 말만 잘해서는 안 돼요. 사람으로서 됨됨이가 착하고 아름다울 수 있어야 해요.

 

 대통령은 아무나 할 수 없어요. 일하는 솜씨가 틀림없이 있어야 하고, 웬만큼 똑똑하기도 해야 할 테지만, 이보다 훨씬 더 대수로운 대목은 대통령 되려 하는 사람이 참말 착하고 아름다운가예요. 착하고 아름답지 않다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되고, 공무원이 되어서도 안 되며, 교사가 되어서도 안 돼요.

 

 착하고 아름답지 않다면 어버이 노릇을 해서도 안 되며, 동무 구실조차 할 수 없으며, 장사꾼이 될 수도 없어요. 착하고 아름다울 때에 비로소 출판사 편집자 일을 합니다. 착하고 아름다울 때에 바야흐로 번역쟁이 일을 맡고, 만화쟁이가 되며, 노래쟁이 글쟁이 춤쟁이 사진쟁이 영화쟁이 같은 길을 걸어요. 무엇보다 온누리 지구별에서 더할 나위 없이 착하고 아름다운 넋이기에 흙을 만지며 흙에서 목숨을 거두는 일꾼으로 살아갈 수 있어요. (4345.1.8.해.ㅎㄲㅅㄱ)


― 지하철 헌화가 (이종인 글,즐거운상상 펴냄,2008.1.10./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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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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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아이 아줌마가 쓴 소설 읽기
 [책읽기 삶읽기 93] 김이설, 《환영》(자음과모음,2011)

 


 전라남도 고흥에서 처음 맞이하는 겨울은 따스합니다. 겨울이 이렇게 따스할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고맙습니다. 물이 꽁꽁 언다든지 눈이 펑펑 내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눈을 쓰느라 바쁘지 않아 고맙습니다. 올 사월까지 길가 눈을 쓰느라 손이 안 시린 날이 없었어요. 자가용 없이 걸어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시골버스 타는 우리한테는 찻길 눈쓸기를 할 까닭이 없지만, 택배 일꾼이 오가거나 웃집 사람들이 자동차 타고 오갈 때를 걱정하니까, 찻길 눈쓸기를 할밖에 없습니다.

 

 하루에 서너 차례 한두 시간 눈을 쓸면 코·귀·손·낯 얼마나 시린지. 그러나 이보다 눈쓸기를 하느라 집일할 겨를이 더 빠듯한 일이 고단합니다. 그나마 올 사월까지는 첫째 아이랑 옆지기 세 식구 살림이었기에 첫째 아이 빨래는 그닥 많지 않았어요. 다만, 이무렵 우리 멧골집 물이 언 나머지, 멧길 타고 올라가는 웃집에서 날마다 물을 길어다 쓰고 빨래랑 설거지도 웃집에서 했어요. 다섯 달 동안.

 

 지나고 보면 아득한 일이요, 지나고 생각하면 꿈 같은 일이며, 지나고 돌아보면 어쩜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나 싶습니다. 아마 어떻게든 살아내는 하루요, 힘들며 고단하다지만 어디부터 샘솟는지 모를 새 기운을 끌어내 견디는 나날인지 모릅니다.

 

 올여름까지 지낸 멧골집하고 견주면 따스한 겨울이지만, 고흥 시골마을 겨울도 겨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바람은 드세면서 차갑습니다. 아침에 똥을 눈 둘째 갓난쟁이 기저귀를 빨래하고 밤새 나온 오줌기저귀를 빨래해서 마당가 후박나무 빨래줄에 너는데, 손가락이 꽁꽁 업니다. 빨래줄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기저귀들은 금세 업니다. 아침이니까 이렇게 얼지만, 차츰 따뜻해지는 낮햇살을 받으면 스르르 녹으며 바로 마르겠지요. 어제도 그제도 그끄제도 이러했어요. 이른아침에는 빨래들이 죄다 얼어붙다가 낮하고 가까우면 스르르 녹으며 빨리 말라요. 낮에 빨래 한 차례 더 하면 해가 저 멧등성이에 가까울 무렵 다 마르고, 해가 떨어지기 앞서 빨래 한 차례 더 해서 어른들 두툼한 옷가지 물 안 떨어지게끔 말려서 방으로 들이면 잠자리에 들어 이듬날 일어날 무렵이면 보송보송 마릅니다.


.. 쌓인 눈을 잔뜩 퍼먹으면 이 갈증이 가라앉을까 … 거주하는 사람이 없어 버스 정류장 하나 없는 이곳까지 찾아오는 사람들이 궁금했다. 이런 풍경 속에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혹은 몇 시간 뒤엉켜 관계를 하는 데 돈을 쓰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 일당 사만 원짜리가 한 시간에 십만 원도 벌 수 있었다 … 좋은 일인가. 생전 처음 보는 사내 앞에서 옷을 벗고 받는 돈이었다 …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뜨듯한 국물을 먹는 사람들은 풍요로워 보였다 … 주인 내외는 나 같은 아줌마는 없었다며 일당백이라며 추켜세웠다. 사람 하나 더 쓰자고, 이대로는 일 못 하겠다고 뻗대지 않게 하려는 수였다 ..  (10, 16, 59, 81, 113, 168쪽)


 두 아이와 살아가는 나날이란, 두 아이와 살아가지 않고서야 모릅니다. 세 아이와 살아가는 나날이라면 세 아이와 살아가지 않고서야 모를 테지요. 네 아이와 살아간다든지 다섯 아이와 살아가는 나날도 그래요. 이처럼 살아내지 않고서야 알 턱이 없어요.

 

 어림은 해 보겠지요. 아이 하나와 살아가면서 두 아이 살림살이를 어림해 보겠지요. 두 아이와 살아가면서 세 아이랑 네 아이 살림살이를 어림해 볼 테지요.

 

 우리 집 첫째는 돌이 지나고부터 낮에 기저귀를 풀며 오줌 누이기를 시켰습니다. 두 달 즈음 이곳저곳 스스로 못 참고 오줌이나 똥을 누며 집일이 잔뜩 늘어났지만, 이렇게 뒷치레를 하면서 아이는 스스로 오줌가리기와 똥가리기를 익혔어요. 아이는 제 어머니 아버지하고 하루 내내 함께 붙어서 살아가고, 제 어버이를 지켜보고, 제 집식구를 바라보면서 제 삶과 버릇과 꿈을 가다듬습니다.

 

 세 살에 아직 낮기저귀를 못 떼고, 너덧 살에 아직 밤기저귀를 못 떼며, 대여섯 살까지 기저귀를 채운다면, 이 기저귀도 종이기저귀라면, 이 아이가 어떤 어버이하고 어떤 삶을 꾸리는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이 아이는 이 아이대로, 이 아이 어버이는 이 아이 어버이대로 얼마나 즐겁거나 신나거나 기쁘거나 좋거나 아름답다 할 만한 삶을 일구는가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우리 집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우리 집 두 아이를 바라보고, 이 두 아이와 같이 먹고 자며 일어나는 옆지기를 바라봅니다. 우리들은 무슨 꿈을 키우면서 무슨 이야기를 꽃피우는 사람일까요. 우리들은 이 작은 보금자리를 어떻게 돌보면서 우리들 마음결을 어찌저찌 보살필 수 있을까요.


.. 자기는 나쁜 사장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앙연히 줘야 할 돈인데 왜 제가 생색을 내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 남은 반찬만 갖다 버릴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식구도 갖다 버렸으면 싶었다 … 나는 내 안의 화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몰랐다 … 내가 들어오지 않았는데도 불을 끄고 잤단 말이지 … 엄마는 어디서 살아? 뭐 하고 살아? 자식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기는 해? 이런 걸 물어 보려면 어떡해야 하는지 나는 방법을 몰랐다 … 몇 년 만에 만난 모녀 사이인데, 할 말이 참 없었다. 하고 싶은 말들보다는 하지 말아야 할 말들만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  (26, 46, 97, 104, 143, 170쪽)


 김이설 님 소설 《환영》(자음과모음,2011)을 읽습니다. 두 아이와 옆지기하고 살아가는 김이설 님이 써낸 소설을 읽습니다. 김이설 님은 어떤 삶을 스스로 돌보고 두 아이와 일구며 옆지기랑 사랑하면서 소설을 쓸까요. 김이설 님 소설에는 김이설 님 삶이 어떻게 스며들어 빛날까요.

 

 《환영》을 펼쳐 차근차근 읽는 동안 ‘오늘 두 아이 아버지로 살아가는 내가 중학생 때부터 읽은 소설을 쓴 어른’은 누구였는가 생각합니다. 1970∼80년대에 나온 한국소설은, 1950∼60년대에 나온 한국소설은, 또 1930∼40년대에 나온 한국소설은 으레 ‘어떤 삶을 어디에서 어떻게 일구는 어른’이 썼는가 곱씹습니다.

 

 이 나라에서 아줌마가 소설을 쓴 지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이 나라에서 아줌마가 아줌마 눈길과 생각과 삶과 마음과 사랑과 믿음과 꿈으로 소설을 써서 내놓은 지는 얼마나 되었으려나요.

 

 1970년대에 소설을 쓰는 아줌마라면 어떤 삶을 일구었을까요. 1950년대에 소설을 쓰는 아줌마라면 어떤 꿈을 꾸었을까요. 1930년대에 소설을 쓰는 아줌마는 있었을까요.


.. 왜 만날 나만 돈을 내놨을까 … 떡이 되도록 취한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뻔했다 … 아버지는 자식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대상은 오로지 엄마였다 … 뭘 봐요. 돈 없다는 사람 처음 봅니까? ..  (106, 108, 163쪽)


 문학·문학성·문학정신이란 무엇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삶·삶빛·살림살이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백 사람이면 아흔아홉 사람이 아니라 백 사람 모두 도시에서 살아가려 하는 오늘날, 만 사람이면 겨우 한두 사람 시골에서 살까 말까 한 요즈음, 한국문학과 한국소설에서 담아내며 나눌 이야기라면 어떠한 삶 어떠한 꿈 어떠한 빛깔이 될까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우리 집 네 살 아이는 아침에 일어나기 무섭게 신나게 뛰고 달리며 노래하고 춤춥니다. 쉴 사이 없이 종알거리고 떠들며 꽁알꽁알합니다. 이 아이한테 어떤 밥을 먹여야 좋을까 생각합니다. 이 아이랑 밥을 먹고 나서 무슨 놀이를 즐길까 생각합니다. 이 아이를 놀게 하면서 어버이는 무슨 일을 붙잡으면 좋을까 생각합니다. 바깥은 바람이 찬데 집에서든 밖에서든 치마만 입겠다는 이 아이를 어찌 달래야 좋을까 생각합니다.


.. 예쁘고 좋은 걸 보면 아이부터 생각났다 … 하루가 너무 길었다. 아이의 살냄새가 그리웠다 … 희망이 있다는 사실이 희망이었다 …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첫 한 발짝 떼는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  (15, 22, 30, 187쪽)


 소설책 《환영》을 덮습니다. 꿈을 꾸는 꿈으로 살아가는 실마리에서 빛을 살그머니 붙잡으며 눈물꽃 피우는 사람 하루살이를 떠올립니다. 왕백숙집 아줌마가 이럭저럭 눈물겹게 모은 돈으로 ‘버스 정류장 하나 없’다 싶은 깊은 시골마을에 작은 보금자리랑 논밭을 마련해 보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꿈꿉니다. ‘하루에 버스 몇 대 겨우 지나가는’ 시골마을에 조그마한 살림집이랑 논밭을 장만해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꿈꿉니다. 더는 물가에 얽히지 않으면서 시원한 샘물을 마시며 꿈을 꾸는 꿈으로 살림을 돌볼 수 있는 앞날이 보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거듭 꿈을 꿉니다. 못난쟁이투성이 살붙이라 하지만 돈을 벌어 돈을 쓰고 돈으로 꾸리는 살림에서 벗어나 사랑을 벌어 사랑을 나누는 살림을 헤아릴 수 있으면, 이리하여 그림자 같은 나날이 아니요, 서로 반가운 이야기꽃 피우는 나날이라면, 더없이 좋을 텐데 하고 꿈꿉니다.

 

 글을 읽으며 “엄마한테 전화를 받다”라든지 “엄마한테 들었다” 같은 말투가 자주 보입니다. 이때에는 ‘-한테’가 아니라 ‘-한테서’ 토씨를 붙여, “엄마한테서 전화를 받다”와 “엄마한테서 들었다”처럼 적어야 올발라요. 제가 읽은 책은 5쇄인데 모두 ‘-한테’로만 나왔기에, 이 소설을 읽을 분들을 생각해서 군말 한 마디 붙입니다. (4344.12.26.달.ㅎㄲㅅㄱ)


― 환영 (김이설 글,자음과모음 펴냄,2011.6.17./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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