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이 2 - 거리의 천사
최호철 그림, 박태옥 글, 고래가그랬어 편집부 / 돌베개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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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느질하며 배우는 어머니 삶
 [만화책 즐겨읽기 122] 최호철, 《태일이 (2)》

 


 둘째 아이 기저귀싸개 풀린 실을 꿰맵니다. 지난달에 하나는 꿰매었고 다른 하나는 미처 다 꿰매지 못한 채 책상에 올려놓았는데, 어느새 한 달이 훌쩍 지나갑니다. 이웃집에서 얻어 첫째 아이가 먼저 쓰고 둘째 아이가 물려받아 쓰는 기저귀싸개도 실이 많이 풀려 꿰매야 합니다. 이런저런 집일이 많다며 미적미적 미루며 실올 풀린 채 쓰다가 그만 꽤 많이 풀어집니다.

 

 밤나절에 꿰매고 새벽에 더 꿰맵니다. 아침에 마무리를 짓고 다른 기저귀싸개도 꿰매야 합니다. 한창 바느질을 하다가 생각합니다. 나는 내 어머니가 내 어린 날 양말이나 옷을 얼마나 꿰매어 주었는가를 하나하나 떠올리지 못합니다. 집식구 옷가지를 틈틈이 꿰매셨는데, 네 식구 양말이나 속옷이나 겉옷을 꿰매느라 얼마나 잠을 줄이셨는지 제대로 헤아리지 못합니다.

 

 내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하고, 내 아버지를 낳은 어머니하고, 내 옆지기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하고, 내 옆지기 아버지를 낳은 어머니들은, 또 이분들을 낳은 어머니들은, 먼먼 지난날 하루를 어떻게 보내었을까 궁금합니다. 하루 내내 어떤 일을 하며 삶을 누렸을까 궁금합니다.

 

 아마 이른새벽에 일어나 늦은밤까지 손가락 하나 쉴 겨를 없지 않았으랴 생각합니다. 등허리 한 번 두들길 틈이 없는 하루이지만, 삶을 사랑하는 노래를 고이 건사하며 살림을 일구지 않았으랴 생각합니다.

 


- “작은집에서 주는 일이나 열심히 해요. 애들 공부시키고 좀더 기반 잡을 때까지 딴생각 말아요!” “이 여편네가 재수 없게! 하청 일 백날 해 봐야 기반은커녕 골병 들고 쪽박 차기 십상이야! 기회 있을 때 잡아야지!” “그리고 태일아! 큰집에 들렀다가 네가 다닐 학교 좀 알아봤다. 큰집 조카가 다니는 국민학교에 얹혀 있는 청옥고등공민학교라고, 너처럼 배운 게 늦은 아이들이 다니는 데란다. 공부 계속할 거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한창 일손이 모자란 판에. 이제 막 재미 붙이는 아이한테!” (17∼19쪽)


 문학을 하는 이들은 역사소설을 씁니다. 방송국 일꾼은 역사연속극을 찍습니다. 역사소설이나 역사연속극에는 으레 이름난 사내나 힘있는 사내가 한복판을 차지합니다. 이를테면, 임금이나 신하나 지식인이나 싸울아비나 예술쟁이가 나옵니다. 궁궐에서 밥하는 여자가 역사연속극에 나오기도 했지만, 여느 시골마을 여느 살림집 밥하고 빨래하며 아이 돌보던 어머니들 이야기가 역사연속극에 한 차례라도 한복판에 나온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느 멧골자락 여느 멧골집 밥하고 빨래하며 아이 키우던 어머니들 이야기를 어느 누구라도 역사소설에서 다룬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내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 삶이 궁금하고, 내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 삶이 궁금합니다. 어떠한 책에도 글에도 영화에도 기록에도 남지 않은 여느 어머니들 삶이 궁금합니다.

 

 문득 돌아보면 누구나 스스로 궁금히 여기거나 꿈꾸는 모습대로 살아가지 않나 싶습니다. 궁금히 여기는 모습과 똑같이 살아가지는 않을 테고, 꿈꾸는 모습과 똑같이 살아내지는 못할 수 있을 터이나, 스스로 몸으로 살면서 시나브로 알아차리거나 깨닫지 않으랴 싶어요.

 

 아이들 옷가지나 기저귀싸개를 바느질하면서 어머니들 삶을 곰곰이 돌이킵니다. 옆지기가 양말을 뜰 때에 어떤 삶과 꿈일까를 가만히 되새깁니다. 이 모습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리 집 아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가슴에 살포시 안을까 헤아립니다.

 


- “그깟 공부가 대수야? 어차피 중간에 끝낼 거.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사는 법이야. 빨리 기술 익혀서 돈 버는 게 최고야.” “야, 놀라운데. 자네 빠른 솜씨도 솜씨지만 태일이가 자넬 쏙 빼닮은 것 같아. 허허, 수고했어.” “아니, 더 자지 않고 벌써 일어났어?” “며칠 만에 학교 갈 생각 하니 잠이 안 와요.” “며칠 동안 제대로 못 잤는데.” “오랜만에 반장이 학교 가는데 늦지는 말아야죠. 진도도 쫓아가야 하고, 아버지 일도 마쳤으니.” “어디 가냐?” “학교에.” “일 잘한다고 또 일이 들어왔다. 딴생각 하지 말고 일 시작하자!” “여보!” “저, 오늘은 학교에 다녀오면, 안 될.”“뭐 해? 빨리 짐 내리고 정리해야지!” (64∼65쪽)


 내 바느질은 꽤 서툴다고 느낍니다. 어릴 적에도 서툴었고 오늘도 서툽니다. 그렇지만 내 바느질은 서툴기는 하면서 내 어머니가 하던 바느질을 시늉으로는 따라합니다. 실을 자를 때, 바늘코에 꿸 때, 바느질을 마치고 마감할 때, 내 손놀림에서 문득문득 어머니 얼굴을 떠올립니다. 아하, 그래, 내가 우리 아이들만 하던 때, 또는 우리 아이들보다 조금 크던 때, 내 어머니는 나를 옆에 앉히고 이렇게 바느질을 하셨지.

 

 서툰 바느질이기 때문은 아니지만, 바느질을 하노라면 으레 바늘에 찔립니다. 몇 해쯤 앞서는 바느질을 하다 손가락이 바늘에 찔리면 뜨끔 하면서 빨간 핏망울이 번졌어요. 엊저녁 바느질을 하며 몇 차례 손가락이 바늘에 쿡 찔리는데, 찔리고 나서 뜨끔 하지 않는데다가 아무런 핏망울이 비치지 않습니다. 손가락 마디마디 꾸덕살이 얼마나 단단히 박혔는데 이쯤 바늘 박힌다고 피가 돌겠느냐 싶다가, 내 어머니도 이러하지 않았겠느냐고, 내 옆지기 어머니도 이와 같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합니다. 골무를 손가락에 끼는 까닭은 바늘에 찔리기 때문이 아니라, 가느다란 바늘을 잡고 두꺼운 천을 꿸 때에 힘을 덜 쓰고 일을 빨리 끝내려 하기 때문이구나 하고 느낍니다.

 

 재봉틀 밟는 사람들을 가만히 그려 봅니다. 내 어릴 적 우리 집에도 재봉틀이 있었는데, 빌린 재봉틀인지 산 재봉틀인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재봉틀을 밟는다면 밤늦도록 할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재봉틀까지 둘 만큼 옷을 손질하고 이불을 꿰어야 한다는 뜻이니까요. 딸린 식구들 옷을 지어야 한다는 소리일 테니까요. 재봉틀 밟으며 잠이나 제대로 이룰까요.

 

 그러고 보면, 재봉틀 아닌 베틀은 먼먼 옛날 어머니들 등허리를 얼마나 고되게 했을까요. 베틀을 밟던 먼먼 옛날 어머니들은 하루가 얼마나 길었을까요.

 

 


- “와, 뭘로 이렇게 불을 지폈어?” “미안해, 형! 아버지가.”“아버지! 왜 교과서를 땔감으로 다 태웠어요? 네? 아버지!” “춥다! 문 닫아라.” (95쪽)


 최호철 님 만화책 《태일이》(돌베개,2007) 둘째 권을 읽습니다. 만화잡지 《고래가 그랬어》에 실린 작품으로 다 읽었기에 낱권책으로 나왔을 때에 따로 찾아보지 않았으나, 우리 집 아이들이 나중에 무럭무럭 자라 스스로 글과 그림을 함께 읽으며 ‘젊은 전태일 삶’을 헤아리고 싶다 할 때에 《전태일 평전》과 나란히 내밀려면 이 낱권책을 찬찬히 먼저 살펴야겠다고 느껴 새로 읽습니다.

 

 만화책 《태일이》는 《전태일 평전》이나 전태일 님 수기 이야기하고 사뭇 다릅니다. 사뭇 다르다 하는 소리는 줄거리가 다르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여느 자리 여느 사람은 전태일 님 평전이나 수기만 읽으면서 ‘그림을 그리기’ 어렵거든요. 어떠한 마을에서 어떠한 살림을 꾸리고 어느 만큼 고단하게 밥을 굶고 힘겨이 일거리 붙잡으며 지냈는가를 헤아리기 어려워요. 1960년대 허름한 달동네 집살이를, 잠 한두 시간 달게 누리지 못하며 일해도 너무 벅찬 살림을, 불 땔 나무조차 없이 매서운 한겨울 추위를 견디어야 하던 나날을, 스스로 살아내지 않고서 어느 만큼 느끼거나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글을 읽으며 이러한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리지 못하면, 그림이나 만화를 읽는대서 이러한 이야기를 마음속으로 참다이 그리지 못해요. 글을 읽을 때부터 이 삶자락을 내 마음속으로 그릴 수 있어야 하고, 내 몸으로 이 삶결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해요.

 

 


- 누가 봐도 비참한 생활이었지만 이른봄 차가운 밤공기를 견디며 모처럼 어머니와 태일은 서로 이불을 덮어 주기도 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며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었다. (166쪽)


 《태일이》 둘째 권은 ‘젊은’ 전태일에 앞서 ‘푸른’ 전태일입니다. 한창 푸른 잎사귀를 돋으며 꿈을 꾸려 하는 전태일을 보여줍니다. 싱그러운 몸과 마음으로 싱그러운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싶은 전태일 삶이 《태일이》 둘째 권에 찬찬히 담깁니다.


- ‘그때 내가 집에 들어오지 않고 아직도 서울에서 방황하고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정말 모두가 고맙다. 어떻게든 끝까지 공부해서 지금도 거리에서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5원의 동전을 받기 위해 양심까지 다 내주어야 하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33쪽)


 푸른 전태일은 배우고 싶습니다. 어떤 돈이나 이름이나 힘 때문에 배울 뜻이 아닙니다. 더없이 푸른 잎사귀인 만큼 더없이 따사로운 햇살을 먹고픈 마음 그대로 배우고 싶습니다. 푸른 잎들이 햇볕을 바라보며 한껏 푸른 빛을 뽐내듯, 푸른 전태일 또한 머리와 가슴과 꿈과 사랑을 북돋우는 온누리를 배우고 싶어요.

 

 배우면서 일하고 싶어요. 배우면서 살고 싶어요. 배우면서 사랑하고 싶어요.

 

 이런 지식 저런 정보가 아닌, 삶을 배우고 싶어요. 이런 학문 저런 교과서가 아닌, 사랑을 배우고 싶어요.

 

 좋은 동무들이랑 좋은 나날을 배우고 싶어요. 좋은 교사하고 좋은 마을살이를 배우고 싶어요. 좋은 어른들과 함께 좋은 두레와 품앗이를 배우고 싶어요.

 

 만화책 《태일이》 둘째 권을 읽는 나도 새롭게 배웁니다. 두 아이 아버지로 살아가는 나도 날마다 새롭게 배우고픈 꿈을 키웁니다. 내 새 삶을 배우고, 내 어버이들 옛 삶을 배우며, 우리 아이들한테 앞으로 다가올 삶을 배우고 싶어요. (4345.2.25.흙.ㅎㄲㅅㄱ)


― 태일이 2 (최호철 글·그림,돌베개,2007.11.5./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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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두 얼굴의 역사 인류의 작은 역사 1
실비 보시에 글, 장석훈 옮김, 메 앙젤리 그림, 한정숙 감수 / 푸른숲주니어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아이들은 사랑을 배우며 자라야지요
 [푸른책과 함께 살기 90] 실비 보시에, 《전쟁과 평화, 두 얼굴의 역사》(푸른숲,2007)

 


- 책이름 : 전쟁과 평화, 두 얼굴의 역사
- 글 : 실비 보시에
- 그림 : 메 앙젤리
- 옮긴이 : 장석훈
- 펴낸곳 : 푸른숲 (2007.3.26.)
- 책값 : 1만 원

 


 실비 보시에 님이 푸름이한테 읽힐 뜻으로 쓴 《전쟁과 평화, 두 얼굴의 역사》(푸른숲,2007)를 읽다 보면, 싸움터 군인이란 어떤 사람인가를 놓고 아주 또렷하게 잘 간추렸습니다. “어떤 군인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직업 군인이라면 그것이 직업이기 때문에, 어떤 군인은 군복이 멋있어서, 어떤 군인은 전쟁에 참가하는 게 정의롭다고 사람들이 얘기해서, 어떤 군인은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군인은 국법에 의해 전쟁에 끌려왔기 때문에(72쪽).”라 하면서, 어리석게 믿는 사람이나 슬프게 휩쓸리는 사람 모두 싸움터에서 서로서로 죽고 죽이는 짓을 하고야 만다고 밝힙니다.

 

 책을 읽으며, 프랑스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알맞고 좋은 이야기를 찬찬히 들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어린이한테나 푸름이한테나 이처럼 이야기할 줄 아는 어른이 몹시 드물거든요.

 

 군인이란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만, 군인이란 무엇보다 ‘사람 죽이는 짓을 하는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법으로 사내들을 군대로 내모는 일이란 하나도 올바르지 않아요. 법으로 무언가를 세우려 한다면, 아름다운 삶을 세워야 합니다. 아름답게 꿈꾸고 아름답게 사랑할 수 있는 길을 튼튼히 세울 때에 비로소 법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어떤 나라에서는 군대에 들어가 총을 들고 사람을 죽여야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군대에 스스로 들어가지 않고서야 도무지 살아남을 길이 없게끔 꽉 막히거나 닫힌 나라가 있어요. 정치를 거머쥐거나 경제를 움켜쥔 이들이 사람들 삶을 옥죄거든요. 언론이 제구실을 못하고 교육이 참길을 이끌지 않거든요.


.. 모두가 평화를 원한다고 하면서 왜 사람들은 평화롭게 살 수 없을까요 …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 전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전쟁이 목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평화를 얻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키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  (12쪽)


 사람들 스스로 평화를 바랄 때에는 평화로이 살아갑니다. 사람들 스스로 평화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평화로이 살아가지 못합니다. 마음 한구석에 ‘평화를 바란다며 무기를 갖추지 않으면 두렵잖아?’ 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평화가 깨집니다. 마음 한켠에 ‘평화를 바라지만 군대가 없으면 어떡하지?’ 하고 근심하기 때문에 평화가 흔들립니다.

 

 전쟁과 평화는 서로 두 얼굴이 아닙니다. 전쟁은 평화를 갉아먹으면서 무섭게 퍼집니다. 평화는 전쟁을 타이르며 보드랍게 녹입니다. 전쟁은 죽음을 먹으면서 사람을 괴롭힙니다. 평화는 삶을 사랑하면서 사람을 살립니다.

 

 나는 군대에 끌려가서 스물두 달을 보내며 어느 하루도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나는 군대에서 사랑을 배우거나 들은 적이 없습니다. 나는 군대에서 스물두 달 내내 죽음과 죽임을 듣고 보며 지내야 했습니다.

 

 평화를 생각하는 총이나 칼은 없습니다. 평화를 부르는 총이나 칼이 아닙니다. 평화를 부수는 총이나 칼입니다. 평화를 짓밟는 총이나 칼이에요.

 

 군인으로 지내야 하던 스물두 달 동안 들판과 멧자락을 군화발로 짓이깁니다. 참호를 파고 교통호를 낸다며 애먼 멧자락을 파헤칩니다. 멧등성이를 빙 두르면서 지뢰를 묻고 쇠가시그물을 새로 칩니다. 방공호를 짓는다며 조용하며 맑은 숲을 망가뜨립니다. 군사훈련을 한다며 나무를 베고 들판을 더럽힙니다. 쓰레기를 아무 데나 묻습니다. 수백 사람에 이르는 군인은 군사훈련을 하는 동안 깨끗한 멧자락 어디에나 똥오줌을 내갈깁니다. 고된 행군을 하며 건빵이나 밥 봉지를 들길과 멧길에 함부로 버립니다.

 

 환경을 헤아리지 않는 군인입니다. 환경을 헤아릴 까닭이 없는 군인이랄 수 있습니다. 내 목숨이 간당간당하니까 다른 자리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고된 훈련으로 넋이 빠지니 착한 사랑하고는 동떨어집니다. 주먹다짐과 거친 말이 넘치니 참다운 꿈하고는 등집니다.

 

 사내들은 군대에 간대서 사람이 되지 않아요. 사내들은 군대에 끌려가면서 사람다운 빛과 슬기를 잃어요. 사내들은 군대에서 길들여지며 사랑이랑 평화하고 멀어져요.


.. 갈 길이 멀지만,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꿈을 접어서는 안 됩니다. 평화를 꿈꾸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평화가 실현될 날도 그만큼 앞당겨질 테니까요 … 간디는 영국인들의 부당한 지배에 폭력으로 맞서는 대신 자신의 목숨을 걸고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싸워 나갔습니다. 비폭력 투쟁은 폭력 투쟁보다 더 힘겨운 일입니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니까요 ..  (31, 117쪽)


 누구나 사랑을 배우며 살아야 아름다울 수 있다고 느껴요. 사랑을 배우지 못하며 살아간다면, 산 목숨이 아니라 죽은 목숨이 아닌가 싶어요. 사랑을 꿈꿀 때에 비로소 사람이요, 사랑을 꿈꾸지 못하다면 살가죽만 사람 모양이 아닌가 싶어요.

 

 사랑으로 살아가는 어른일 때에 사랑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이 되도록 도울 수 있어요. 사랑을 배우며 기뻐하는 어른일 때에 사랑을 배우며 기뻐하는 아이들이 되도록 이끌 수 있어요.

 

 평화란 사랑하는 삶입니다. 전쟁이란 사랑하지 않는 죽음입니다. 평화란 서로 믿고 좋아하는 꿈입니다. 전쟁이란 서로 등치거나 들볶는 미움입니다.

 

 평화를 아끼는 나날이기에 내 손으로 땀흘려 흙을 일굴 줄 압니다. 전쟁에 사로잡힌 나날이기에 내 손으로 땀흘리지 않고 내 몸으로 흙을 일구지 않습니다. 평화를 돌보는 사람이기에 이웃하고 어때동무를 하며 두레를 합니다. 전쟁에 휘둘리는 사람이기에 따돌림과 괴롭힘을 내세워 등수와 계급을 세웁니다.

 

 학문이 아닌 시험성적이 된 대학교는 평화가 아닌 전쟁입니다. 대학교를 바라보도록 이끄는 학교 틀거리는 평화하고 동떨어진 전쟁입니다. 학문 또한 새 전쟁무기와 더 큰 경제개발에 끄달린다면 전쟁하고 마찬가지입니다. 학문 또한 삶과 가깝지 못하고 돈과 권력하고 가깝고 만다면 전쟁하고 똑같습니다.

 

 총소리 울려퍼져도 전쟁이고, 총소리 없어도 전쟁입니다. 사랑스레 돌보며 어깨동무하는 삶이 아니라면 언제나 전쟁입니다. 사랑을 배우고 가르치며 나눌 수 없을 때에는 늘 전쟁입니다.


.. 전쟁을 일으킨 나라들은 자기 나라의 ‘평화’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그대로 믿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이 얻고자 하는 ‘평화’는 핑계일 뿐이고, 다른 속셈이 있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요 … 칼과 총은 서로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싸울 때 공정한 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자기 목숨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  (36, 80쪽)


 아이들을 입시경쟁으로 내모는 어버이는 전쟁을 일으키는 셈입니다. 아이들을 대학바라기에 가두는 어버이는 전쟁터 지휘자인 셈입니다. 입시학원을 열어 시험성적만 따지도록 이끄는 어른은 전쟁을 일으켜 돈을 버는 재벌기업하고 같은 셈입니다. 대입시험 이야기로 돈벌이를 일삼는 신문과 방송은 군수공장을 차린 재벌기업하고 같은 셈입니다. 입시공부 아니면 아무것도 못 가르치는 제도권학교 교사는 첨단무기 새로 만드는 과학자하고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삶을 바라보아야 해요. 삶을 사랑하는 눈길을 터야 해요. 삶을 사랑하는 눈길로 꿈을 키우는 마음을 북돋아야 해요.

 

 이런 지식 저런 지식은 덧없어요. 이런 졸업증 저런 자격증으로는 아이들이 즐거이 살아가지 못해요.

 

 아이나 어른이나 저마다 가장 좋아하는 일을 누려야 해요. 아이나 어른이나 스스로 가장 기뻐할 만한 놀이를 함께해야 해요.

 

 좋은 삶이거든요. 좋은 하루이거든요. 좋은 이야기 꽃피우는 좋은 벗이거든요.


.. 과연 무엇이 문명이고, 무엇이 야만인가요? 수천 수만의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는 유럽 정복자들이 문명의 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 전 세계 인구가 1년 동안 각각 128달러(약 12만 8천 원)를 군사비에 쓰는 셈입니다. 10억 명 이상이 하루에 1달러(약 1000원)도 못 되는 돈으로 살고 있는데 말입니다 … 도대체 이 많은 돈이 어디로 가는 걸까요?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군인들에게 워러급도 주어야 하고, 무기를 개발하고 유지하는 데에도 돈이 듭니다. 전투기, 폭격기, 전차, 무인 전투기와 같은 첨단 무기를 제작하거나 구입하는 데에도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어갑니다 ..  (55, 89쪽)


 자연은 누구한테나 너그러워요. 자연은 누구한테나 밥과 옷과 집을 내주어요. 자연은 몇몇이 홀로 차지하도록 내몰지 않아요. 자연은 스스로 사랑하는 삶을 아끼는 누구한테나 좋은 빛을 베풀어요.

 

 가난이 있는 까닭은 무엇이든 홀로 차지하려는 권력자와 지배자 때문이에요. 배고픔이나 굶주림이 떠도는 까닭은 사랑을 나눌 뜻이 없는 권력자와 지배자가 자꾸 전쟁을 일으키기 때문이에요.

 

 살아가는 즐거움을 모르니까 돈이나 이름이나 힘을 거머쥐면서 이웃을 아끼지 않아요. 살아가는 보람을 등지니까 평화 아닌 전쟁으로 기울어요. 살아가는 멋과 맛을 누리지 않으니까 사랑을 깨닫지 않아요.

 

 나는 우리 집 아이들하고 좋은 보금자리를 일구면서 좋은 꿈을 꾸고 싶어요. 우리 집 아이들이 좋은 삶을 누리고 좋은 사랑을 먹으며 자라도록 마음을 쓰고 싶어요. 그래서 우리 집 아이들을 보육원이나 유아원이나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으며 함께 지내요. 아버지인 나부터 집에서 일하고 살림을 꾸려요. 아버지로서 집에 머문다면 바깥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아주 적거나 아예 없기까지 하달 수 있어요. 그렇지만, 집에서 아이들이랑 복닥이며 얻는 웃음과 기쁨과 보람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삶도 사랑도 사람도 돈으로는 사지 못하거든요. 비싼값 치르며 바깥밥 사먹는대서 기쁜 하루가 아니거든요. 자가용을 굴리지 못하는 살림이지만, 아이들이랑 나란히 걷고 뛰면서 즐거워요. 들길을 걷고 멧길을 걸어요. 들꽃을 보고 멧꽃을 봐요. 풀포기와 나무를 언제나 벗삼아요.

 

 집에서 아이들과 살아가기에 두 아이는 천기저귀를 쓸 수 있어요. 천기저귀는 아버지가 도맡아 손빨래를 해요. 환경이니 전쟁이니를 떠나, 아이들 몸을 헤아리며 즐거이 천기저귀를 써요. 아니, 천기저귀를 대고 천기저귀를 빨래하는 삶이 즐거워요. 아이들을 씻기고 아이들을 먹이며 아이들하고 얼크러지면서 날마다 새 마음이 될 수 있어요. 내 어린 나날을 돌이키고 아이들 앞날을 꿈꿀 수 있어요. 아이들을 품에 안으며 따사로이 재우고, 아이들을 품에 안으며 작은 가슴에서 샘솟는 좋은 씨앗을 느낄 수 있어요.

 

 전쟁을 막거나 그치도록 하자며 평화를 생각하거나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사랑을 꿈꾸거나 생각하면서 천천히 평화로운 나날을 누리거나 즐길 수 있구나 싶어요. 평화는 평화를 말하거나 외친대서 찾아오지 않으니까요. 평화는 평화로운 삶을 사랑하는 하루하루가 바로 평화일 테니까요. (4345.2.24.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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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의 숲 20 - 신장판
이시키 마코토 지음, 손희정 옮김 / 삼양출판사(만화)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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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가슴속 아름다운 별빛
 [만화책 즐겨읽기 120] 이시키 마코토, 《피아노의 숲 (20)》

 


 밤하늘 별빛이 밝습니다. 다만, 밤이 되어 온누리가 조용히 어두운 데에서만 밤별이 빛납니다. 밤이 되었어도 밤 같지 않게 훤한 전깃불빛이 번쩍거린다면 밤별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훤한 전깃불빛이 없더라도 찻길에 자동차들 줄줄이 늘어선다면 밤별은 깃들 자리가 없습니다.

 

 낮에는 땅에서 아이들 눈빛이 밝습니다. 아이들 눈은 맑은 꿈과 밝은 사랑을 두루 나누면서 빛납니다. 아이들과 살아가는 어른들은 어린 나날부터 고운 넋을 고스란히 건사한다면 아이들하고 나란히 빛나는 눈길로 온누리를 바라봅니다.

 

 온누리 어느 곳에나 빛이 있습니다.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습니다. 바다에도 있고 멧자락에도 있습니다. 빛은 아이와 어른을 골고루 살립니다. 빛은 풀과 나무와 꽃을 살립니다. 빛은 바람을 타고 마을을 두루 흐릅니다. 빛은 물결을 따라 골골샅샅 누빕니다. 빛은 고운 목숨이 되어 내 몸으로 스며듭니다. 빛은 예쁜 꿈이 되어 내 마음에서 새로 태어납니다.


- ‘자신의 피아노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결과적으로는 화가 됐어. 그때 평소처럼 노미스로 쳤다면 탈락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아버지는 그 말을 하고 싶으셨던 거다. 아마도.’ (10∼11쪽)
- “그런, 네가 사과할 필요 없어. 난 승부에 진 거니까. 비웃는다고 해서 딱히.” “승부란 생각 안 해.” “응, 카이는 그렇겠지.” (25쪽)

 


 날마다 먹는 밥은 쌀알입니다. 쌀알은 겨를 벗긴 볍씨입니다. 볍씨는 벼가 맺은 열매입니다. 벼는 수백 볍씨를 맺으며 제 씨앗을 퍼뜨리려 합니다. 다른 풀도 벼처럼 수백 씨앗을 맺어요. 사람은 이 가운데 벼나 밀을 즐겨먹으며 목숨을 이어요. 곰곰이 살피면 ‘풀씨’를 먹으며 살아간다 할 텐데, 겨를 벗긴 볍씨 가운데 노란 씨눈까지 깎아내어 먹는다면 막상 목숨을 먹는다 하기 어려워요. 밥을 먹을 때에는 노란 씨눈이 싱그러이 살아숨쉬는 쌀을 먹어야 해요.

 

 시금치나 배추를 먹을 때에는 잎사귀를 먹습니다. 무나 당근을 먹을 때에는 뿌리를 먹습니다. 감자랑 고구마는 밭흙을 캐내어 먹습니다. 나무에 달린 능금이랑 배랑 복숭아랑 포도를 따서 먹습니다. 풀을 먹느냐 고기를 먹느냐는 그닥 대수롭지 않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살아가는 터전에 따라 제 먹을거리를 찾습니다.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바닷가에서 쉽게 얻는 먹을거리로 목숨을 지킵니다. 들판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들판에서 쉽게 얻는 먹을거리로 목숨을 지켜요.

 

 그러면, 도시 아이들은? 도시 아이들은 무슨 먹을거리를 쉽게 얻나요? 과자? 케익? 햄버거? 피자? 라면? 세겹살? 돼지고기튀김? 닭튀김?

 

 아이들은 저마다 쉽게 얻는 먹을거리에 따라 숨결을 얻습니다. 바닷것을 얻어 목숨을 지키면 바다에서 살아숨쉬는 넋을 받아들이며 목숨을 북돋웁니다. 들것을 얻어 목숨을 지키면 들에서 살아숨쉬는 얼을 맞아들이며 목숨을 살찌워요. 그렇다면, 도시에서 살아가며 가게에서 과자랑 가공식품을 사다 먹는 아이들은 어떤 것에서 어떤 넋이나 얼을 받아먹는가요. 어떤 꿈을 키우고 어떤 사랑을 돌보는가요.

 


- “2차 때의 연주. 슈우헤이의 새로운 피아노였지. 최고로 멋진 연주였어.” “패배한 날 위로해 주는 거야? 동정받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아니야! 위로 같은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거라고!” (27∼28쪽)
- ‘우리에겐 평생을 걸고 자신의 음악을 추구할 수 있다는 행복이 있는데도, 물론 평생을 추구해도 음악이 진정 무엇인지 알게 되는 건, 짧은 인간의 생애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거둘 수 없는 성과겠지만.’ (87쪽)
- ‘아지노 선생님과 카이를 연결한 건 나였다고 분해 했지만, 그건 잘못된 거였어. 아지노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카이는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거야. 카이가 무대에 서지 않았다면 나는 여기까지 쫓아올 수도 없었을 테고, 이렇게 성장할 수도 없었을 거야.’ (120쪽)


 이시키 마코토 님 만화책 《피아노의 숲》 스무 권째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피아노의 숲》에 나오는 ‘카이’는 숲 아이입니다. 카이는 ‘숲 아이’답게 숲에서 자라난 넋을 피아노 가락으로 옮깁니다. 숲에서 스스로 사랑하고 믿으며 꿈꾸던 나날을 고스란히 들려주어요. 사람들이 카이 피아노 선율에 가슴이 저릿저릿 울린다면, 사람들은 ‘숲을 잃거나 잊은 꿈과 사랑’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숲에서 받아들이던 푸른 넋을 도시에서 지내며 오래도록 잊거나 뒤로 젖히느라 정작 사람들 가슴에 촉촉히 젖어들어야 하던 푸른 이야기를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아노의 숲》 스무 권째에서 카이는 동무 슈우헤이한테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얘기해요. “2차 때의 연주. 슈우헤이의 새로운 피아노였지. 최고로 멋진 연주였어.” 하고요. 슈우헤이는 이제껏 ‘피아노 교본’에 실린 대로만 피아노를 두들겼어요. 울타리에 갇힌 슈우헤이였고, 틀에 사로잡힌 슈우헤이였어요. 그런데 이제 슈우헤이는 이녁 나름대로 사랑하면서 이녁 스스로 꿈꾸던 노래가락을 비로소 조금 선보여요. 카이는 이 노랫가락을 놓치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들도 이 노랫가락을 즐겼어요. 슈우헤이도 피아노를 치면서 이 가락에 깊이 젖어들었어요(19권에서).

 

 다만, 슈우헤이가 되든 카이가 되든 심사위원이 되든 관객이 되든, 이 새로우며 좋은 노랫가락이 다음 경선까지 올라갈 만한 노랫가락이라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이렇게 피아노를 치지 않았거든요. 처음에는 온통 틀에 사로잡힌 피아노에 물들었거든요.

 


- “나는 소우스케의 방임주의엔 찬성이지만, 돌이키기 늦어질까 두려워.” “방임은 아닌데요. 지켜보는 겁니다. 잘 보고 있으면 알 수 있으니까.” “정말인가? 카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어?” “하하, 거기까지는 무리겠지만, 도움이 필요한 때인지는 거의 알죠.” (67쪽)
- “네 아버지가 아파트 입구를 점거하고 있어. 빨리 전화해서 어떻게든 해 봐. 너, 어른스럽게 결과를 받아들여. 시위하듯이 행방을 감추다니. 그렇게도 부모에게서 걱정받고 싶어? 난 너 같은 응석받이 울보가 너무 싫어.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마!” (108∼109쪽)


 쇼팽이든 슈베르트이든 베토벤이든 아주 대단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을 대단히 여길 까닭이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당신 노래를 좋아하며 즐긴 사람들일 뿐입니다. 스스로 제 노래결을 생각하고 제 노래꿈을 빚으며 제 노래사랑을 펼친 사람들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제 노래결을 생각할 때에 아름다운 노래가 태어나요. 제 노래꿈을 빚을 때에 나부터 둘레 사람 누구나 기쁘게 들을 노래가 샘솟아요. 제 노래사랑을 펼칠 때에 내 삶이 아름다이 빛나면서 참다이 뿌리내립니다.

 

 카이한테는 숲 피아노입니다. 슈우헤이한테는 도시 피아노일 테지요.

 

 숲 피아노라서 더 뛰어날 수 없습니다. 도시 피아노라서 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어디에서건 저마다 사랑하며 꿈꾸는 빛을 누릴 수 있으면 됩니다. 어느 때이건 스스로 아끼며 보살피는 빛을 나눌 수 있으면 돼요.


- “슈, 슈우헤이는 남의 재능은 알아차리면서, 왜 자신의 재능은 모르는 걸까. 왠지 화가 나.” (36∼37쪽)
- “나는 언제나 벼랑 끝에 서 있던 것뿐이야.” (113쪽)
- ‘이 곡은 내게 잘 어울리는 작품이야! 나는, 어떻게든 이 곡을 치고 싶어서 여기까지 올라온걸! …… 첫 주자로 치는 건 운이 없는 거라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아! 나는 이 곡을 누구보다도 빨리 치고 싶었어!’ (210, 212쪽)

 


 콩쿨 때문에 피아노를 친다면 덧없습니다. 대회 때문에 피아노를 연습한다면 슬픕니다. 연주회 때문에 피아노를 갈고닦는다면 안타깝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 피아노 연주를 듣는다지만, 내가 피아노를 칠 때에는 ‘남들이 들으라’는 뜻이 아니거든요.

 

 남들이 들어 주면 고맙습니다. 남들이 사랑해 주면 기쁩니다. 그러나, 남들이 들어 주거나 사랑해 주기 앞서, 내가 치면서 내가 듣는 피아노예요. 내가 사랑하면서 내가 즐기는 피아노예요.

 

 내가 쓴 글은 남한테 읽히려는 글에 앞서 나 스스로 되읽는 글입니다. 내가 쓰는 글은 남한테 보여주려는 글이 아니라 내 삶을 아름다이 빛내고픈 꿈을 싣는 글입니다.

 

 카이는 숲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좋은 어머니와 좋은 이웃을 사귀었고 좋은 자연을 누렸습니다. 슈우헤이한테는 좋은 터전이나 이웃이 많지 않았다 할 테지만, 카이라고 하는 좋은 동무가 있어요. 팡 웨이한테든 소피한테든 다들 매한가지입니다. 좋은 터전 좋은 이웃 좋은 살붙이 좋은 동무한테서 사랑을 받은 꿈과 이야기를 고스란히 피아노 가락으로 옮깁니다. 삶이 피아노가 되고, 피아노가 삶이 됩니다. (4345.2.23.나무.ㅎㄲㅅㄱ)


― 피아노의 숲 20 (이시키 마코토 글·그림,손희정 옮김,삼양출판사 펴냄,2012.2.10./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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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눈이 들려주는 학교 숲 이야기 - 겨울철 학교에서 만난 나무의 한살이와 생태 철수와영희 그림책 4
노정임 지음, 안경자 그림, 구자춘 감수 / 철수와영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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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 푸른 숨결은 나무가 되어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43] 안경자·노정임, 《겨울눈이 들려주는 학교 숲 이야기》(철수와영희,2012)

 


 학교는 겨울을 맞이해서 방학으로 접어듭니다. 겨울날 학교는 조용히 텅 빕니다. 운동장에 눈이 그득그득 쌓여도 뛰어노는 아이가 없습니다. 날이 환히 개어 눈부시더라도 흙을 박차는 아이가 없습니다. 참으로 조용한 겨울 학교인데, 이 조용한 겨울 학교를 빙 둘러싸며 자라는 나무는 새봄을 맞이하려고 부산합니다. 한편으로는 추위를 견디고, 한편으로는 새숨을 키웁니다. 한편으로는 겨울철 따스한 살결로 고이 잠을 자고, 한편으로는 머잖아 찾아올 따순 바람에 따라 맑고 밝은 꽃을 피우며 푸른 잎사귀 틔울 꿈을 꿉니다.


.. 나무는 여러 해를 살아. 그러려면 추운 겨울을 견뎌내야 하지. 겨울을 끄떡없이 보내는 나무들에게는 지혜로운 방법이 있어. 바로 ‘겨울눈’이야 ..  (8쪽)


 아이들은 시골에서나 도시에서나 나무를 쉽게 만납니다. 시골에서는 어디에나 자라는 나무이고, 도시에서도 길가나 학교 운동장 가장자리에 심는 나무입니다. 도시는 시골처럼 숲이나 멧자락이 없다 하더라도 나무만큼은 곳곳에서 자랍니다. 비록 시골처럼 파란 빛깔 하늘이랑 시원히 흐르는 바람이 없다 하더라도, 나무들은 저마다 뿌리내린 터에서 기운차게 살아갑니다. 예삐 바라보는 사람이 없어도, 고이 돌보는 사람이 없어도, 나무는 꿋꿋하며 씩씩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들로서는 둘레에 나무가 흔히 있더라도 쉬 가까이 하지 못합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어른들부터 둘레 나무랑 가까이 사귀지 않거든요.

 

 도시 어른들은 나무를 보러 자가용을 몰거나 기차나 버스를 타고 멀리멀리 시골로 갑니다. 도시 어른들은 동네 나무를 살펴보지 않습니다. 도시 어른들은 동네 나무를 아끼지 않습니다. 도시 아이들은 도시 어른들 매무새를 고스란히 물려받아요.

 

 도시 아이들 또한 동네에서 흔히 마주할 나무를 가만히 들여다보지 않아요. 나무를 보려면 멀리 시골로 가야 하는 줄 생각합니다. 곁에서 자라는 어여쁜 나무를 어여쁜 손길로 보듬는 꿈을 키우지 못합니다. 동네 나무 한 그루에 내 사랑을 고이 나누어 서로서로 싱그러이 웃음꽃 피우는 길을 찾지 못해요.

 

 단풍나무는 도시에서도 붉게 물듭니다. 은행나무는 도시에서도 노랗게 물듭니다. 도시 한복판 단풍나무나 은행나무보다는 설악산이나 오대산이나 지리산이나 가야산 단풍나무랑 은행나무가 한결 보기 좋거나 곱다면, 설악산이나 가야산은 도시 한복판보다 물과 바람과 햇살이 맑고 흙이 기름지기 때문이에요.

 

 옳게 바라보고 제대로 헤아릴 노릇입니다. 도시에는 자동차가 너무 많아요. 도시에는 흙이 몽땅 시멘트랑 아스팔트한테 깔려서 앓아요. 도시에는 나무가 느긋하게 숨을 쉴 터가 모자라요. 도시에는 밤에도 불을 환하게 켜서 나무들이 새근새근 잠을 잘 수 없어요.

 

 나무한테 너무 괴로운 터전입니다. 나무한테 너무 모진 터전입니다. 나무한테 너무 힘든 터전입니다. 이러한 곳에서 나무가 단풍빛이나 은행빛을 더 곱게 물들일 수 없어요. 살기 괴로운 데에서 나무더러 단풍빛이 왜 해맑지 못하느냐고 나무랄 수 없어요.

 

 


.. 화려한 꽃을 보려고 심어 길러. 백 일 동안 핀다고 ‘백일홍나무’라고도 해. 따뜻한 남부 지방에서 많이 심어 길러 ..  (25쪽)


 나무가 괴롭게 살아가는 터에서는 아이들도 괴롭게 살아가고야 맙니다. 아이들이 괴롭게 살아가는 터라면 어른들이라 해서 즐거이 살아갈까 궁금합니다.

 

 나무가 힘겨워 헉헉거리거나 앓는다면 아이들 또한 힘겨워 헉헉거리거나 앓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무가 뿌리를 튼튼히 내리고 널찍하게 퍼뜨리기 힘든 도시에서는 아이들 또한 즐거이 뛰놀 빈터나 흙땅이 없는 셈입니다.

 

 곧, 나무한테 좋은 삶터는 아이들한테 좋은 삶터입니다. 아이들한테 좋은 삶터는 어른들한테도 좋아, 서로서로 환하게 웃으면서 어깨동무할 만한 삶터예요. 우리는 누구나 사랑을 나누면서 사랑을 씨앗으로 심고 사랑으로 열매를 맺을 때에 보람차며 기쁜 나날일 테니까요.

 

 


.. 잎이 넓은 나무 가운데에 대표적인 늘푸른나무야. 한겨울에 탐스러운 붉은 꽃을 피우지. 동백나무는 제주도나 여수 같은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만 스스로 자라 ..  (30쪽)


 안경자 님이 그리고 노정임 님이 글을 쓴 그림책 《겨울눈이 들려주는 학교 숲 이야기》(철수와영희,2012)를 읽습니다. 겨울을 맞이해 새눈을 다부지게 북돋우는 나무들 이야기를 다루는데, 학교 언저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나무들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감나무 대추나무 모과나무는 학교에서 쉽게 보기 어려울 텐데요. 호두나무를 학교에 심는 곳이 있을까요. 아파트나 동네에서도 찾아보는 나무를 담았다고 합니다만, 앵두나무 잣나무 보리수나무 탱자나무 포도나무를 심는 학교는 거의 없지 않으랴 싶어요. 곰곰이 돌이키면, 도시에서도 이 같은 나무를 쉽게 찾아볼 만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탱자나무를 좋아해서 마당에 기르기도 하겠지요. 누군가 배씨를 받아 마당 한쪽에 배나무를 기르기도 할 테지요.

 

 인천 골목동네에서 아이들과 나들이를 즐기던 지난날, 곳곳에서 호두나무 앵두나무 탱자나무 포도나무 밤나무를 만났습니다. 골목집은 그리 크거나 넓지 않아 온갖 나무를 두루 심는 집은 드물지만, 한두 나무를 오래오래 아끼며 돌보는 집은 쉬 만날 수 있었어요. 석류나무를 예닐 곱 그루나 돌보는 집을 보았고, 이웃 여러 골목집이 저마다 석류나무를 심은 동네를 보았어요. 도시에서도 감나무를 알뜰히 심고 알차게 돌보아 스무 해나 서른 해나 마흔 해를 함께 살아가는 어르신을 어렵잖이 만났어요. 굵직한 대추나무에 굵게 달린 대추알을 호젓한 골목길에서 흔히 마주치곤 했어요.

 

 그러고 보면, 《겨울눈이 들려주는 학교 숲 이야기》는 “학교 숲 이야기”라기보다는 “마을 숲 이야기”나 “동네 숲 이야기”라고 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학교에서는 느티나무나 벚나무나 버드나무나 소나무나 향나무를 흔히 심잖아요. 열매나무는 좀처럼 안 심어요. 좀 따분하다 싶지만, 열매나무를 심으면 아이들 손을 너무 타니 잘 안 심을는지 모르지요.

 

 그런데, 아이들 많은 학교일수록 열매나무를 심어, 아이들이 열매 한 알 어떻게 맺는가를 찬찬히 지켜보도록 이끌면 훨씬 즐거우며 뜻있으리라 생각해요. 겨울 새눈부터 봄 새잎을 거쳐 꽃이랑 열매 무르익는 모습을 날마다 들여다보도록 이끄는 일만큼 좋은 가르침은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열매를 맺으면 이 열매에서 씨를 갈무리해 아이들이 집이나 마을에서 씨앗을 심도록 하지요. 이듬해부터 아이들 스스로 새 열매나무를 천천히 보살피며 지켜보도록 하면 되지요.

 


.. (회양목은) 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는 늘푸른나무야. 촘촘히 심어 울타리를 만들기도 하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다듬어서 가꾸기도 해. 그늘이나 공해가 심한 곳에서도 잘 자라고, 산에서도 잘 자라 ..  (55쪽)


 아이들은 저마다 어여쁜 꽃입니다. 아이들은 누구나 추운 겨울을 즐거이 누리며 새봄을 맞이해 활짝 피어나는 어여쁜 꽃입니다. 식물원이나 비닐집에서 바람 한 점 맞지 않으며 크는 아이들이 아닙니다. 너른 흙땅에 맨 처음 씨앗으로서 뿌리를 내리고 새싹을 틔워 씩씩하게 줄기를 뻗는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푸른 숨을 쉽니다. 아이들은 푸른 숨을 마을 곳곳에 흩뿌립니다. 아이들은 푸른 숨결로 푸른 꿈이랑 사랑을 키웁니다.

 

 아이들 푸른 숨소리 귀기울여 들을 수 있도록 자동차가 줄어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아이들 푸른 바람이 시원히 불 수 있도록 찻길이 줄고 거님길이랑 흙길이 되살아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아이들 푸른 눈빛 반짝이도록 높직높직 아파트와 건물 줄어들고 너른 들판이랑 멧자락이 곳곳에 넘실거리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4345.2.23.나무.ㅎㄲㅅㄱ)


― 겨울눈이 들려주는 학교 숲 이야기 (바람하늘지기 기획,안경자 그림,노정임 글,철수와영희 펴냄,2012.2.19./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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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아 푸른 솔아 - 박영근 시선집
백무산.김선우 엮음 / 강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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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부터 피어날 꽃들한테 한 마디
[시를 노래하는 시 13] 박영근, 《솔아 푸른 솔아》

 


- 책이름 : 솔아 푸른 솔아
- 글 : 박영근
- 펴낸곳 : 강 (2009.5.9.)
- 책값 : 7000원

 


 추운 겨울날 피어나는 겨울꽃이 있습니다. 한창 무르익는 가을에 피어나는 가을꽃이 있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환하게 피어나는 여름꽃이 있습니다. 따스한 바람과 함께 따스한 빛깔과 내음 베푸는 봄꽃이 있습니다.

 

 꽃은 봄부터 피어납니다. 봄부터 피어나는 꽃은 겨울까지 핍니다. 추운 한겨울 동안 꽃은 조용히 시들거나 잠잡니다. 이듬해 봄에 다시금 피어날 꿈을 꾸면서 추위를 견딥니다. 아니, 추위를 받아들인다고 해야겠지요.


.. 일하고 먹고 살아가는 시간들 속에서 / 일하고 먹고 살아가는 일을 / 뉘우치는 시간들 속에서 / 때때로 스스로의 맨살을 물어뜯는 / 외로움 속에서 그러나 / 아주 겸손하게 작은 목소리로 / 부끄럽게 부르는 이름을 / 시라고 쓰고 싶다 ..  (서시)


 나는 인천에서 태어나 살아가며 동백꽃은 거의 구경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내가 구경하지 못했을 뿐 어느 골목집 마당 한켠에 곱게 꽃을 피우는 동백나무 한두 그루 있었으리라 봅니다. 전라남도 고흥이라든지 해남이라든지 강진이라든지 여수라면, 곳곳에 동백나무 흐드러지고 동백꽃 붉습니다. 경상남도 통영이나 진해에도 동백나무 동백꽃은 붉게 흐드러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천 골목동네를 두루 돌아다니며 능금나무 배나무 대추나무 매화나무 복숭아나무 탱자나무 호두나무 밤나무 감나무 수수꽃다리 들을 골고루 구경했습니다. 때로는 석류나무를 보고 살구나무를 봅니다. 때로는 포도나무를 보고 앵두나무를 봅니다. 한 집에 온갖 나무 골고루 심어 돌보지는 못합니다. 조그마한 마당에 몇 가지 나무를 곱게 키우고 우람하게 보살핍니다. 사람 손길 안 닿는 데에서 높디높게 자라난 오동나무를 바라보며 놀라기도 합니다.

 

 나무를 심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나무를 아끼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런데, 나무는 사람이 애써 심지 않아도 스스로 씨앗을 퍼뜨립니다. 미루나무이든 느티나무이든 멀리멀리 씨앗을 퍼뜨립니다. 이 가운데 어른나무로 튼튼히 뿌리내리는 씨앗은 몹시 드물지만, 이 골목 저 골목, 볕바르거나 그늘지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씩씩하게 살아가려 애씁니다.


.. 경님아, 밤기차 어둑한 창가에 기대어 / 서울 가던 날 / 손 한번 흔드시지 못하고 / 번지는 들판의 불빛들 속에서 어머니 / 손 한번 / 흔 드 시 지 못 하 고 ..  (서울 가는 길)


 어떤 분은 어린나무를 장만해서 심어 돌보았겠지요. 어떤 분은 씨앗을 알뜰히 건사해서 작은 새싹부터 보살폈겠지요. 나는 스무 해나 서른 해나 마흔 해 남짓 골목이웃하고 살아온 나무를 바라봅니다. 나는 스무 해나 서른 해나 마흔 해 동안 꽃을 피운 나무를 마주합니다. 나는 내 나이보다 오래도록 살아온 나무가 맺는 열매를 고마이 나누어 먹습니다.

 

 나무 한 그루에서 꽃을 피우기까지 적지 않은 해를 보냅니다. 나무 한 그루에서 열매를 얻기까지 꽤 긴 해를 보냅니다. 퍽 많은 사람들은 꽃을 피우지 못하고 키가 작은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인지 아닌지조차 알아보지 못하곤 합니다. 꽤 많은 사람들은 꽃과 잎을 모두 떨군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어떤 나무인가 알아차리지 못하곤 합니다. 아마, 아예 거들떠보지 않을 수 있겠지요. 다들 바쁘니까, 모두들 다른 데에 눈길을 두어야 하니까, 겨울나무 앙상한 가지와 함초롬한 작은 새눈을 들여다보지 못하겠지요.


.. 그곳엔 비 내리는 판문점의 닳고 닳은 비애도 /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고지에 오르는 / 지겨운 전쟁도 없지 ..  (천지를 생각하며)


 자동차 끝없이 오가는 찻길에서 자라는 은행나무나 방울나무는 해마다 가지가 잘립니다. 찻길 가장자리에서 배기가스 듬뿍 마시며 맑은 숨을 내뿜도록 들볶이는 나무는 얼마 살아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이들 가녀린 길가 나무들, 곧 ‘길나무’들은 사람보다 오래 삽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돈을 벌다가 도시에서 숨을 거두는 사람보다, 길나무 목숨이 훨씬 깁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돈을 벌다가 도시에서 죽는 사람은 으레 병원 문턱을 드나듭니다. 찻길에서 날마다 어마어마하게 배기가스를 들이마시고 햇볕 한 조각 제대로 받기 힘들며 전깃줄에 등불에 밤낮으로 시달리는 길나무이지만, 이들 길나무는 병원 문턱을 밟지 않습니다. 이들 길나무 가운데 병원에 드나들어야 할 녀석이 있다면 곧장 목이 잘릴 테니까요. 막바로 뿌리가 뽑히고 새 나무로 바뀔 테니까요. 도시에서는 나무이든 사람이든 목숨이든 흙이든 꽃이든 온통 돈으로만 재거나 따집니다.

 

 나무가 슬픕니다. 사람이 슬픕니다. 땅이 슬픕니다. 하늘이, 해가, 구름이, 바람이, 물이, 꽃이, 풀이, 모두모두 슬픕니다. 멧새가 다리쉼을 할 만큼 느긋한 나무를 찾기 어려운 도시입니다. 멧새 한 마리 한갓지게 둥지를 틀기 어렵다면, 착한 사람 하나 몸을 눕혀 쉴 보금자리 하나 마련하기 어려운 셈이리라 생각합니다. 들짐승 한 마리 곱게 깃들며 삶터를 얻기 어려운 도시입니다. 들짐승 한 마리 조그마한 굴조차 팔 수 없다면, 고운 사람 하나 다리를 쭉 뻗고 기지개를 펼 쉼터 하나 얻기 어려운 셈이리라 생각합니다.

 

 자동차 대는 자리는 그렇게 많은데요. 돈을 내고 자동차를 대든, 돈을 안 내고 자동차를 대든, 도시에서는 어디에나 자동차를 대는걸요. 자동차는 그렇게 많고, 자동차 다닐 길은 그렇게 넓으며, 자동차 둘 자리는 그렇게 넓은데, 어이하여 나무 한 그루 느긋하게 뿌리를 뻗을 땅뙈기란 없을까요. 사람 하나 보금자리 예쁘게 꾸며 나무와 풀과 꽃을 즐거이 누릴 땅뙈기란 없을까요. 물줄기 햇살 받으며 시원하게 흐를 땅뙈기란 없을까요.


.. 몇 번인가 이사를 할 때마다 / 그 비좁은 골목길은 리어카 한 대의 이사 보따리에도 땀을 흘렸다 ..  (그 방)


 눈이 내립니다. 겨울눈은 겨울을 살아내는 나무마다 소복하게 쌓입니다. 하얗게 쌓이던 눈은 햇살이 들면서 스르르 녹습니다. 스르르 녹은 물은 나뭇줄기를 타고 흙으로 흘러내립니다. 흙으로 흘러내린 물은 흙을 촉촉하게 적십니다.

 

 이윽고 봄입니다. 언땅이 녹고 겨울눈이 껍질을 벗는 봄입니다. 뭇새들 홀가분하게 지저귀는 봄입니다. 흙 속에서 겨울잠을 자던 벌레들 알을 까고 볼볼 기어나옵니다. 볼볼 기어나오던 벌레들은 새들한테 먹이가 됩니다. 새들은 재재거리는 소리로 흙일꾼 새벽을 깨웁니다. 흙일꾼은 쟁기와 호미로 밭을 갈아엎습니다. 밭자락에는 새로운 씨앗이 깃들고, 새 씨앗을 품은 흙은 새 목숨을 보듬습니다. 새 목숨은 너른 사랑을 받으며 야무지게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립니다. 너른 사랑 받으며 흙 위로 고개를 내민 새싹은 따사로운 햇살을 먹으며 무럭무럭 자랍니다.


.. 닫힌 철문 앞에서 / 원직 복직을 외치는 그의 쉰 목소리를 / 희망이라도 불러도 좋은 것일까 ..  (희망에 대하여)


 봄빛이 환합니다. 봄빛은 누런 들판을 푸른 들판으로 천천히 바꾸면서 환한 기운 나눕니다. 봄내음이 그윽합니다. 봄내음은 온누리에 향긋한 내음을 퍼뜨리며 풀먹는 짐승이랑 사람을 살찌웁니다.

 

 봄에 피어나는 꽃은 노래꾼입니다. 봄에 피어나는 꽃은 춤꾼입니다. 봄에 피어나는 꽃은 사랑꾼입니다.

 

 노래를 실어나르는 봄꽃은 노랗게 물듭니다. 춤을 실어나르는 봄꽃은 발그스름하게 물듭니다. 사랑을 실어나르는 꽃은 하얗게 물듭니다.

 

 봄부터 할미꽃과 진달래뿐 아니라 수유와 살구와 수수꽃다리가, 또 원추리와 감자와 당근이, 또 숱한 들꽃과 풀꽃이 들판을 잔치판으로 이룹니다. 나는 내가 이름을 아는 꽃은 이름을 아는 대로 참 곱구나 하고 쓰다듬습니다. 나는 내가 이름을 모르는 꽃은 이름을 모르는 대로 참 예쁘구나 하고 어루만집니다. 패랭이꽃이든 해바라기꽃이든, 모두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가장 애틋한 느낌을 살려 붙인 이름이겠지요. 봄까치이든 민들레이든 마을과 고을마다 사람들 가슴속에서 피어나는 가장 맑은 넋을 살려 붙인 이름일 테지요.


.. 내 안에도 / 나도 몰래 / 나를 키우고 / 나를 살리는 것 있다는데 ..  (눈물)


 봄에는 봄꽃이 노래를 부르며 시가 하나둘 태어납니다. 봄에는 봄꽃이 춤을 추며 싯말이 하나들 퍼집니다. 봄에는 봄꽃이 사랑을 나누며 싯꿈과 싯무지개가 온누리를 빛냅니다.

 

 박영근 님 시집 《솔아 푸른 솔아》(강,2009)를 읽습니다. 푸른 솔을 노래하는 삶을 보낸 박영근 님 넋을 돌이키며 시집 여섯 권을 한 권으로 간추린 자그마한 시집을 읽습니다. 박영근 님이 쓴 시를 바탕으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라는 노래 한 가락 태어났다고 하는데, 나는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는 모릅니다. 그저 시를 읽습니다. “푸른 솔”을 노래한 넋은 어떤 결이었을까 하고 헤아리며 시를 읽습니다.

 

 스스로를 살리고 동무를 살리며 온누리를 살리고프던 꿈을 시 한 자락으로 읽습니다.


.. 전철도 끊긴 동암역 근처 / 눈 쌓인 골목 미루나무 가지 끝 // 빈 새둥지 속에 / 뜨거운 별빛 한줄기 떨어진다 // 오랜 기다림도 그친 곳에 / 눈은 내려 쌓이리 ..  (동암역 근처)


 1958년에 태어나 2006년에 숨을 거둔 박영근 님은 쉰 해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쉰 해를 넘기지 못한 삶이란, 딱 마흔여덟아홉에서 멈춘 삶이란, 쉰을 코앞에 두고 스러진 삶이란, 어떤 사랑이 담긴 이야기일까요. 쉰을 코앞에 두고 스러져야 했을 때에, 박영근 님은 당신 나이를 얼마나 헤아려 보았을까요.

 

 박영근 님을 낳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몇 살까지 삶을 누렸을까요. 당신 아버지와 어머니보다 일찍 흙으로 돌아간 삶이었을까요, 당신 아버지와 어머니보다 조금 더 길게 누리다가 흙으로 돌아간 삶이었을까요.


..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 홑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 점 없고, /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  (길)


 내 무릎에 안긴 채 잠든 아이를 바라봅니다. 우리 아이는 앞으로 몇 해쯤 더 아버지 무릎에 안긴 채 잠들 수 있을까 어림해 봅니다. 우리 아이는 열다섯 살이 되거나 스물다섯 살이 되어도 아버지 무릎에 안긴 채 잠들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이 둘 아버지인 나는 앞으로 몇 살까지 아이들을 무릎에 안으며 무릎과 발목이 뻣뻣하게 저려도 싱긋 웃으면서 아이 머리카락을 쓸어넘길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이를 바라보는 하루는 언제나 꽃밭입니다. 아이한테서 꽃내음을 맡고, 나한테서 꽃내음을 맡습니다. 아이한테서 꽃빛을 느끼고, 나한테서 꽃빛을 느낍니다. 서로서로 꽃과 같은 결과 무늬로 사랑을 주고받습니다. 포근하며 촉촉한 꽃잎처럼, 곱고 보드라운 꽃잎처럼, 향긋하고 어여쁜 꽃잎처럼, 환하고 맑은 꽃잎처럼, 하루하루 좋게 누리고 싶다고 꿈을 꿉니다.

 

 그리고, 박영근 님 시집에 나오는 〈꽃들〉을 읽습니다. “공장 담벼락을 타고 올라 / 녹슨 철조망에 / 모가지를 드리우고 망울을 터뜨리다 / 담장 넘어 비로소 피어나는 꽃들, / 흐르는 바람에 / 햇살 속에(꽃들)” 하고 노래하는 〈꽃들〉을 읽습니다.

 

 참말 박영근 님 시에는 꽃이 자주 나옵니다. “카티자, 세상에 꽃이라니, 도대체 무슨 꽃들이 / 저렇게 빨갛고 노란 것일까 / 기억 속의 꽃들이 한꺼번에 말을 잃고 / 병원 계단을 오른다(임시 묘지의 시)” 하고 외치면서도, 참말 꽃이 자주 나옵니다. 웬 꽃이냐며 혀를 차지만, 어인 꽃이냐고 울부짖지만, 그래도 꽃을 말합니다. 꽃을 바라보고 꽃을 느끼며 꽃을 어루만집니다.


.. 계절이 골목길 건너 백목련의 꽃망울과 은행나무 가지 위에서 바뀔 무렵이면 / 그 집엔 밀린 빨래들이 그 작은 마당과 / 녹슨 창틀과 흐린 처마와 담벽에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 햇살에 취해 바람에 흔들거릴 것이다 ..  (이사)


 밀린 빨래도 작은 마당 꽃망울 내음을 받아들입니다. 안 밀리고 그날그날 즐기는 빨래도 작은 마당 꽃망울 내음을 받아먹습니다.

 

 빨래는 꽃내음을 먹으며 더 보송보송하게 마릅니다. 꽃내음 깃든 옷을 입고 일터로 가는 사람들 넋은 꽃넋으로 거듭납니다. 꽃내음 깃든 옷을 입고 일하는 사람들 이마에서 꽃방울 같은 땀방울이 떨어집니다.

 

 이제 봄이고, 이제부터 봄꽃이 피어납니다. 흙으로 돌아간 박영근 님은 좋은 거름이 되어 봄꽃이 흐드러지도록 돕는 작은 흙알갱이로 살아가겠지요. (4345.2.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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