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아 푸른 솔아 - 박영근 시선집
백무산.김선우 엮음 / 강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봄부터 피어날 꽃들한테 한 마디
[시를 노래하는 시 13] 박영근, 《솔아 푸른 솔아》

 


- 책이름 : 솔아 푸른 솔아
- 글 : 박영근
- 펴낸곳 : 강 (2009.5.9.)
- 책값 : 7000원

 


 추운 겨울날 피어나는 겨울꽃이 있습니다. 한창 무르익는 가을에 피어나는 가을꽃이 있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환하게 피어나는 여름꽃이 있습니다. 따스한 바람과 함께 따스한 빛깔과 내음 베푸는 봄꽃이 있습니다.

 

 꽃은 봄부터 피어납니다. 봄부터 피어나는 꽃은 겨울까지 핍니다. 추운 한겨울 동안 꽃은 조용히 시들거나 잠잡니다. 이듬해 봄에 다시금 피어날 꿈을 꾸면서 추위를 견딥니다. 아니, 추위를 받아들인다고 해야겠지요.


.. 일하고 먹고 살아가는 시간들 속에서 / 일하고 먹고 살아가는 일을 / 뉘우치는 시간들 속에서 / 때때로 스스로의 맨살을 물어뜯는 / 외로움 속에서 그러나 / 아주 겸손하게 작은 목소리로 / 부끄럽게 부르는 이름을 / 시라고 쓰고 싶다 ..  (서시)


 나는 인천에서 태어나 살아가며 동백꽃은 거의 구경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내가 구경하지 못했을 뿐 어느 골목집 마당 한켠에 곱게 꽃을 피우는 동백나무 한두 그루 있었으리라 봅니다. 전라남도 고흥이라든지 해남이라든지 강진이라든지 여수라면, 곳곳에 동백나무 흐드러지고 동백꽃 붉습니다. 경상남도 통영이나 진해에도 동백나무 동백꽃은 붉게 흐드러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천 골목동네를 두루 돌아다니며 능금나무 배나무 대추나무 매화나무 복숭아나무 탱자나무 호두나무 밤나무 감나무 수수꽃다리 들을 골고루 구경했습니다. 때로는 석류나무를 보고 살구나무를 봅니다. 때로는 포도나무를 보고 앵두나무를 봅니다. 한 집에 온갖 나무 골고루 심어 돌보지는 못합니다. 조그마한 마당에 몇 가지 나무를 곱게 키우고 우람하게 보살핍니다. 사람 손길 안 닿는 데에서 높디높게 자라난 오동나무를 바라보며 놀라기도 합니다.

 

 나무를 심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나무를 아끼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런데, 나무는 사람이 애써 심지 않아도 스스로 씨앗을 퍼뜨립니다. 미루나무이든 느티나무이든 멀리멀리 씨앗을 퍼뜨립니다. 이 가운데 어른나무로 튼튼히 뿌리내리는 씨앗은 몹시 드물지만, 이 골목 저 골목, 볕바르거나 그늘지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씩씩하게 살아가려 애씁니다.


.. 경님아, 밤기차 어둑한 창가에 기대어 / 서울 가던 날 / 손 한번 흔드시지 못하고 / 번지는 들판의 불빛들 속에서 어머니 / 손 한번 / 흔 드 시 지 못 하 고 ..  (서울 가는 길)


 어떤 분은 어린나무를 장만해서 심어 돌보았겠지요. 어떤 분은 씨앗을 알뜰히 건사해서 작은 새싹부터 보살폈겠지요. 나는 스무 해나 서른 해나 마흔 해 남짓 골목이웃하고 살아온 나무를 바라봅니다. 나는 스무 해나 서른 해나 마흔 해 동안 꽃을 피운 나무를 마주합니다. 나는 내 나이보다 오래도록 살아온 나무가 맺는 열매를 고마이 나누어 먹습니다.

 

 나무 한 그루에서 꽃을 피우기까지 적지 않은 해를 보냅니다. 나무 한 그루에서 열매를 얻기까지 꽤 긴 해를 보냅니다. 퍽 많은 사람들은 꽃을 피우지 못하고 키가 작은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인지 아닌지조차 알아보지 못하곤 합니다. 꽤 많은 사람들은 꽃과 잎을 모두 떨군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어떤 나무인가 알아차리지 못하곤 합니다. 아마, 아예 거들떠보지 않을 수 있겠지요. 다들 바쁘니까, 모두들 다른 데에 눈길을 두어야 하니까, 겨울나무 앙상한 가지와 함초롬한 작은 새눈을 들여다보지 못하겠지요.


.. 그곳엔 비 내리는 판문점의 닳고 닳은 비애도 /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고지에 오르는 / 지겨운 전쟁도 없지 ..  (천지를 생각하며)


 자동차 끝없이 오가는 찻길에서 자라는 은행나무나 방울나무는 해마다 가지가 잘립니다. 찻길 가장자리에서 배기가스 듬뿍 마시며 맑은 숨을 내뿜도록 들볶이는 나무는 얼마 살아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이들 가녀린 길가 나무들, 곧 ‘길나무’들은 사람보다 오래 삽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돈을 벌다가 도시에서 숨을 거두는 사람보다, 길나무 목숨이 훨씬 깁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돈을 벌다가 도시에서 죽는 사람은 으레 병원 문턱을 드나듭니다. 찻길에서 날마다 어마어마하게 배기가스를 들이마시고 햇볕 한 조각 제대로 받기 힘들며 전깃줄에 등불에 밤낮으로 시달리는 길나무이지만, 이들 길나무는 병원 문턱을 밟지 않습니다. 이들 길나무 가운데 병원에 드나들어야 할 녀석이 있다면 곧장 목이 잘릴 테니까요. 막바로 뿌리가 뽑히고 새 나무로 바뀔 테니까요. 도시에서는 나무이든 사람이든 목숨이든 흙이든 꽃이든 온통 돈으로만 재거나 따집니다.

 

 나무가 슬픕니다. 사람이 슬픕니다. 땅이 슬픕니다. 하늘이, 해가, 구름이, 바람이, 물이, 꽃이, 풀이, 모두모두 슬픕니다. 멧새가 다리쉼을 할 만큼 느긋한 나무를 찾기 어려운 도시입니다. 멧새 한 마리 한갓지게 둥지를 틀기 어렵다면, 착한 사람 하나 몸을 눕혀 쉴 보금자리 하나 마련하기 어려운 셈이리라 생각합니다. 들짐승 한 마리 곱게 깃들며 삶터를 얻기 어려운 도시입니다. 들짐승 한 마리 조그마한 굴조차 팔 수 없다면, 고운 사람 하나 다리를 쭉 뻗고 기지개를 펼 쉼터 하나 얻기 어려운 셈이리라 생각합니다.

 

 자동차 대는 자리는 그렇게 많은데요. 돈을 내고 자동차를 대든, 돈을 안 내고 자동차를 대든, 도시에서는 어디에나 자동차를 대는걸요. 자동차는 그렇게 많고, 자동차 다닐 길은 그렇게 넓으며, 자동차 둘 자리는 그렇게 넓은데, 어이하여 나무 한 그루 느긋하게 뿌리를 뻗을 땅뙈기란 없을까요. 사람 하나 보금자리 예쁘게 꾸며 나무와 풀과 꽃을 즐거이 누릴 땅뙈기란 없을까요. 물줄기 햇살 받으며 시원하게 흐를 땅뙈기란 없을까요.


.. 몇 번인가 이사를 할 때마다 / 그 비좁은 골목길은 리어카 한 대의 이사 보따리에도 땀을 흘렸다 ..  (그 방)


 눈이 내립니다. 겨울눈은 겨울을 살아내는 나무마다 소복하게 쌓입니다. 하얗게 쌓이던 눈은 햇살이 들면서 스르르 녹습니다. 스르르 녹은 물은 나뭇줄기를 타고 흙으로 흘러내립니다. 흙으로 흘러내린 물은 흙을 촉촉하게 적십니다.

 

 이윽고 봄입니다. 언땅이 녹고 겨울눈이 껍질을 벗는 봄입니다. 뭇새들 홀가분하게 지저귀는 봄입니다. 흙 속에서 겨울잠을 자던 벌레들 알을 까고 볼볼 기어나옵니다. 볼볼 기어나오던 벌레들은 새들한테 먹이가 됩니다. 새들은 재재거리는 소리로 흙일꾼 새벽을 깨웁니다. 흙일꾼은 쟁기와 호미로 밭을 갈아엎습니다. 밭자락에는 새로운 씨앗이 깃들고, 새 씨앗을 품은 흙은 새 목숨을 보듬습니다. 새 목숨은 너른 사랑을 받으며 야무지게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립니다. 너른 사랑 받으며 흙 위로 고개를 내민 새싹은 따사로운 햇살을 먹으며 무럭무럭 자랍니다.


.. 닫힌 철문 앞에서 / 원직 복직을 외치는 그의 쉰 목소리를 / 희망이라도 불러도 좋은 것일까 ..  (희망에 대하여)


 봄빛이 환합니다. 봄빛은 누런 들판을 푸른 들판으로 천천히 바꾸면서 환한 기운 나눕니다. 봄내음이 그윽합니다. 봄내음은 온누리에 향긋한 내음을 퍼뜨리며 풀먹는 짐승이랑 사람을 살찌웁니다.

 

 봄에 피어나는 꽃은 노래꾼입니다. 봄에 피어나는 꽃은 춤꾼입니다. 봄에 피어나는 꽃은 사랑꾼입니다.

 

 노래를 실어나르는 봄꽃은 노랗게 물듭니다. 춤을 실어나르는 봄꽃은 발그스름하게 물듭니다. 사랑을 실어나르는 꽃은 하얗게 물듭니다.

 

 봄부터 할미꽃과 진달래뿐 아니라 수유와 살구와 수수꽃다리가, 또 원추리와 감자와 당근이, 또 숱한 들꽃과 풀꽃이 들판을 잔치판으로 이룹니다. 나는 내가 이름을 아는 꽃은 이름을 아는 대로 참 곱구나 하고 쓰다듬습니다. 나는 내가 이름을 모르는 꽃은 이름을 모르는 대로 참 예쁘구나 하고 어루만집니다. 패랭이꽃이든 해바라기꽃이든, 모두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가장 애틋한 느낌을 살려 붙인 이름이겠지요. 봄까치이든 민들레이든 마을과 고을마다 사람들 가슴속에서 피어나는 가장 맑은 넋을 살려 붙인 이름일 테지요.


.. 내 안에도 / 나도 몰래 / 나를 키우고 / 나를 살리는 것 있다는데 ..  (눈물)


 봄에는 봄꽃이 노래를 부르며 시가 하나둘 태어납니다. 봄에는 봄꽃이 춤을 추며 싯말이 하나들 퍼집니다. 봄에는 봄꽃이 사랑을 나누며 싯꿈과 싯무지개가 온누리를 빛냅니다.

 

 박영근 님 시집 《솔아 푸른 솔아》(강,2009)를 읽습니다. 푸른 솔을 노래하는 삶을 보낸 박영근 님 넋을 돌이키며 시집 여섯 권을 한 권으로 간추린 자그마한 시집을 읽습니다. 박영근 님이 쓴 시를 바탕으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라는 노래 한 가락 태어났다고 하는데, 나는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는 모릅니다. 그저 시를 읽습니다. “푸른 솔”을 노래한 넋은 어떤 결이었을까 하고 헤아리며 시를 읽습니다.

 

 스스로를 살리고 동무를 살리며 온누리를 살리고프던 꿈을 시 한 자락으로 읽습니다.


.. 전철도 끊긴 동암역 근처 / 눈 쌓인 골목 미루나무 가지 끝 // 빈 새둥지 속에 / 뜨거운 별빛 한줄기 떨어진다 // 오랜 기다림도 그친 곳에 / 눈은 내려 쌓이리 ..  (동암역 근처)


 1958년에 태어나 2006년에 숨을 거둔 박영근 님은 쉰 해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쉰 해를 넘기지 못한 삶이란, 딱 마흔여덟아홉에서 멈춘 삶이란, 쉰을 코앞에 두고 스러진 삶이란, 어떤 사랑이 담긴 이야기일까요. 쉰을 코앞에 두고 스러져야 했을 때에, 박영근 님은 당신 나이를 얼마나 헤아려 보았을까요.

 

 박영근 님을 낳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몇 살까지 삶을 누렸을까요. 당신 아버지와 어머니보다 일찍 흙으로 돌아간 삶이었을까요, 당신 아버지와 어머니보다 조금 더 길게 누리다가 흙으로 돌아간 삶이었을까요.


..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 홑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 점 없고, /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  (길)


 내 무릎에 안긴 채 잠든 아이를 바라봅니다. 우리 아이는 앞으로 몇 해쯤 더 아버지 무릎에 안긴 채 잠들 수 있을까 어림해 봅니다. 우리 아이는 열다섯 살이 되거나 스물다섯 살이 되어도 아버지 무릎에 안긴 채 잠들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이 둘 아버지인 나는 앞으로 몇 살까지 아이들을 무릎에 안으며 무릎과 발목이 뻣뻣하게 저려도 싱긋 웃으면서 아이 머리카락을 쓸어넘길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이를 바라보는 하루는 언제나 꽃밭입니다. 아이한테서 꽃내음을 맡고, 나한테서 꽃내음을 맡습니다. 아이한테서 꽃빛을 느끼고, 나한테서 꽃빛을 느낍니다. 서로서로 꽃과 같은 결과 무늬로 사랑을 주고받습니다. 포근하며 촉촉한 꽃잎처럼, 곱고 보드라운 꽃잎처럼, 향긋하고 어여쁜 꽃잎처럼, 환하고 맑은 꽃잎처럼, 하루하루 좋게 누리고 싶다고 꿈을 꿉니다.

 

 그리고, 박영근 님 시집에 나오는 〈꽃들〉을 읽습니다. “공장 담벼락을 타고 올라 / 녹슨 철조망에 / 모가지를 드리우고 망울을 터뜨리다 / 담장 넘어 비로소 피어나는 꽃들, / 흐르는 바람에 / 햇살 속에(꽃들)” 하고 노래하는 〈꽃들〉을 읽습니다.

 

 참말 박영근 님 시에는 꽃이 자주 나옵니다. “카티자, 세상에 꽃이라니, 도대체 무슨 꽃들이 / 저렇게 빨갛고 노란 것일까 / 기억 속의 꽃들이 한꺼번에 말을 잃고 / 병원 계단을 오른다(임시 묘지의 시)” 하고 외치면서도, 참말 꽃이 자주 나옵니다. 웬 꽃이냐며 혀를 차지만, 어인 꽃이냐고 울부짖지만, 그래도 꽃을 말합니다. 꽃을 바라보고 꽃을 느끼며 꽃을 어루만집니다.


.. 계절이 골목길 건너 백목련의 꽃망울과 은행나무 가지 위에서 바뀔 무렵이면 / 그 집엔 밀린 빨래들이 그 작은 마당과 / 녹슨 창틀과 흐린 처마와 담벽에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 햇살에 취해 바람에 흔들거릴 것이다 ..  (이사)


 밀린 빨래도 작은 마당 꽃망울 내음을 받아들입니다. 안 밀리고 그날그날 즐기는 빨래도 작은 마당 꽃망울 내음을 받아먹습니다.

 

 빨래는 꽃내음을 먹으며 더 보송보송하게 마릅니다. 꽃내음 깃든 옷을 입고 일터로 가는 사람들 넋은 꽃넋으로 거듭납니다. 꽃내음 깃든 옷을 입고 일하는 사람들 이마에서 꽃방울 같은 땀방울이 떨어집니다.

 

 이제 봄이고, 이제부터 봄꽃이 피어납니다. 흙으로 돌아간 박영근 님은 좋은 거름이 되어 봄꽃이 흐드러지도록 돕는 작은 흙알갱이로 살아가겠지요. (4345.2.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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