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캥거루야 이제 뭘 할까? 꼬마 그림책방 12
에마 치체스터 클락 글 그림, 이상희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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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49



스스로 놀이를 지을 줄 아는 아이들

― 파란 캥거루야, 이제 뭘 할까?

 에마 치체스터 클라크 글·그림

 이상희 옮김

 아이세움 펴냄, 2004.9.20.



  소꿉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이 아이들이 많이 어릴 적에는 “인형 이름이 뭐야?”라든지 “인형은 이름이 뭐예요?”라든지 “이 인형한테는 무슨 이름을 붙여 주지?” 같은 말을 물었습니다. 아이들이 제법 자라고 나서는 아이들 스스로 인형한테 이름을 붙여 줍니다.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저마다 저희 마음에 드는 이름을 짓습니다.


  아이들이 인형이나 장난감이나 꽃이나 돌한테 붙이는 이름은 날마다 바뀌기도 하고, 하루에도 수없이 바뀌기도 합니다. 어느 때에는 퍽 오랫동안 한 가지 이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아이라면 모름지기 인형이나 장난감뿐 아니라, 돌이나 옷장이나 옷이나 나무토막하고도 말을 섞거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파란 캥거루는 릴리 거예요. 누구 것도 아닌 릴리 캥거루랍니다. 뭘 하고 놀면 좋을지 모를 때 릴리는 물어 봐요. “파란 캥거루야, 이제 뭘 할까?” (3쪽)



  에마 치체스터 클라크 님이 빚은 《파란 캥거루야, 이제 뭘 할까?》(아이세움,2004)를 읽습니다. 나도 읽고 아이들도 읽습니다. 나는 혼자서 이 그림책을 읽고, 큰아이는 작은아이를 곁에 두고는 그림책을 읽어 줍니다.


  그림책 《파란 캥거루야, 이제 뭘 할까?》는 혼자 놀아야 하는 이야기가 어떻게 놀아야 하는가를 스스로 생각하는 하루를 보여줍니다. 한집에서 함께 사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이모도 모두 바쁠 수 있습니다. 아이하고 함께 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참말 함께 못 놀 수 있어요.


  이때에 아이는 어떻게 할까요? 으앙 하고 울면서 달라붙으면 될까요? ‘안 돼!’ 하고 빽 소리를 지르면서 떼를 써야 할까요? 아니면, 아무 말 없이 고분고분 따라야 할까요?



“다 그렸다!” 그런 다음 릴리는 또 물어 봐요. “파란 캥거루야, 이제 뭘 할까?” 캥거루는 아무 말도 안 해요. (7쪽)



  아이는 누구나 놀이를 스스로 지을 줄 압니다. 누가 시켜야 하는 놀이가 아닙니다. 스스로 하고 싶기에 하는 놀이입니다. 놀잇감이나 장난감을 주어야 하는 놀이가 아닙니다. 아무것이 없다고 할 만한 자리에서도 얼마든지 하는 놀이입니다. 맨손이나 맨몸으로도 기쁘게 노는 아이예요.


  어버이나 어른은, 아이가 스스로 기쁘게 놀 줄 아는 마음을 기를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해야지 싶습니다. 아이는 스스로 기쁘게 놀고, 어른은 스스로 기쁘게 일할 줄 알아야지요. 아이는 마당이든 마루이든 방이든 어디에서든 신나게 놀 줄 알 뿐 아니라, 놀잇감을 찬찬히 치울 줄 알아야지요. 어른은 즐겁게 노래하면서 밥을 차린 뒤, 다시 즐겁게 노래하면서 설거지랑 청소를 할 줄 알아야지요.




“나 혼자 해야겠네.” 릴리는 손수레에다 비에 젖은 동물 친구들을 다 실은 다음, 집으로 달려가요. (17∼19쪽)



  그림책 《파란 캥거루야, 이제 뭘 할까?》를 보면, 비가 쏟아지는 저녁에 아이가 씩씩하게 혼자 마당으로 나가서 인형을 집으로 들이는 모습이 나옵니다. 아이는 캄캄한 밤에 빗소리를 들으며 아차 하고 생각하지요. 놀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적에 인형을 몽땅 마당에 두었거든요. 이튿날 다시 놀기로 하면서 그대로 두었어요. 그러니까, 스스로 안 치운 셈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잠든 어른을 깨워서 비에 안 맞도록 해 달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함께 집으로 들이자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씩씩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스스로 하면 될까요?



파란 캥거루는 속으로 중얼거려요. ‘릴리가 아기 곰을 깜빡 잊었어. 이제 뭘 할까?’ (25쪽)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는 스스로 하기로 생각합니다. 비옷을 갖춰 입고 바지런히 인형을 나릅니다. 그런데 아기 곰 인형 하나를 빠뜨립니다. 아이는 미처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이하고 늘 함께 다니는 ‘파란 캥거루 인형’은 이를 알아챕니다.


  파란 캥거루 인형은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저 물끄러미 아이를 지켜봅니다. 아이는 인형을 다 들였다고 생각하면서 느긋하게 잠자리에 듭니다. 파란 캥거루 인형은 새근새근 잠든 아이를 깨우지 못합니다. 그리고, 파란 캥거루 인형이 ‘움직입’니다.


  그림책이기 때문에 인형이 움직인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인형은 참말 ‘모두 잠든 밤에 조용히 홀로 움직인다’고 할 만할까요. 아무튼, 파란 캥거루 인형은 아이를 생각하면서 몸을 움직이기로 했고, 마당에서 비를 쫄딱 맞으며 꼼짝을 못 하는 아기 곰 인형을 집으로 들여놓습니다. 이러고 나서 다시는 움직이지 못하는 몸으로 가만히 섭니다.


  《파란 캥거루야, 이제 뭘 할까?》에 흐르는 이야기를 헤아리다가 《위대한 돌사자 도서관을 지키다》(비룡소,2014)라는 그림책이 떠오릅니다. 도서관을 지켰다는 돌사자가 나오는 그림책에서도 돌사자가 움직였어요. 그러나 꼭 한 번 움직이고는 다시는 움직이지 못합니다. 파란 캥거루 인형이 나오는 그림책에서도 캥거루 인형은 꼭 한 번 움직이고는 더는 움직이지 못해요.


  살다 보면 어떤 것을 잃어버렸구나 하고 느꼈는데 어느 날 문득 아주 잘 보이는 자리에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것’이 나타나는 일이 있습니다. 감쪽같은 노릇이지만, 어쩌면 내가 잠든 사이에 우리 집 인형이 조용히 깨어나서 살그마니 움직여서 ‘내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것’을 찾아서 살그마니 옮겨 주었을는지 모릅니다. 나는 두 눈으로 이 모습을 지켜보지 못했으나, 마음으로 느낄 수 있어요. 우리 둘레에는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이웃이 되는 수많은 숨결이 있구나 하고 느껴요.


  아이들이 스스로 놀이를 지을 수 있는 까닭이라면, 아이들은 저희 둘레에 있는 수많은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숨결을 느끼거나 알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4348.7.17.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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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를 다시 빨아 버린 우리엄마 도깨비를 빨아 버린 우리 엄마
사토 와키코 글.그림, 엄기원 옮김 / 한림출판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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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47



빨래 한 점에 사랑스러운 손길을 담아

― 도깨비를 다시 빨아 버린 우리 엄마

 사토 와키코 글·그림

 엄기원 옮김

 한림출판사 펴냄, 2004.6.15.



  드센 비바람이 이틀 동안 몰아쳤습니다. 이틀 동안 빨래를 안 했습니다. 오늘 새벽부터 빗줄기가 가시고 바람이 잠들었기에, 이제 슬슬 빨래를 해야겠네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로 빨래를 하지는 않습니다. 마당이 마를 때까지 기다립니다. 마당이 다 마르지 않고 빗물이 고였을 적에는 빨래가 잘 안 마릅니다.


  아침을 먹고 읍내마실을 다녀온 뒤 빨래를 한 차례 합니다. 낮밥을 먹고 아이들이 실컷 뛰놀게 한 뒤에 땀이랑 때를 벅벅 문질러 씻기고는 빨래를 한 차례 더 합니다. 오늘은 빨래를 두 차례 하지만, 아직 빨랫감이 남습니다. 마저 다 할 수 있지만, 나머지는 이튿날로 미룹니다. 하루에 빨래를 세 차례 하면 어깨가 좀 뻑적지근하거든요.




“하늘이 흐리지만 빨래를 미룰 수는 없지.” 엄마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억센 팔로 빨래를 했습니다. (2쪽)



  사토 와키코 님이 빚은 그림책 《도깨비를 다시 빨아 버린 우리 엄마》(한림출판사,2004)를 아이들이 재미나게 읽습니다. 사토 와키코 님은 ‘빨래하는 어머니’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여러 권 그렸고, 이 가운데 《도깨비를 빨아 버린 우리 엄마》(1991)하고 《달님을 빨아 버린 우리 엄마》(2013)가 한국말로 나왔어요. 《도깨비를 다시 빨아 버린 우리 엄마》는 한국말로 나온 두 번째 ‘빨래 그림책’입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우리 엄마’는 늘 손빨래를 합니다. 마당 한쪽에 빨래바구니를 놓고는 빨래판으로 옷가지를 벅벅 비벼서 손빨래를 하지요. 한겨레 빨래살이하고는 살짝 다릅니다. 우리 겨레는 마당에서 빨래를 하지 않아요. 마을 빨래터에 옷가지를 이고 가서 빨랫돌에 옷을 척척 올리고는, 빨래방망이로 철썩철썩 두들기면서 빨았어요.


  아무튼 ‘빨래하는 어머니’가 나오는 그림책을 보는 우리 집 아이들은, 이 그림책에서 ‘빨래하는 아버지’ 모습을 들여다봅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우리 엄마’는 빨래를 좋아해서 늘 소매를 걷어붙입니다. 아이들이 늘 얼굴을 맞대는 ‘우리 아버지’는 빨래를 좋아해서 웃통을 벗고 신나게 북북 비빕니다.



“우리 집에 있는 커다란 연을 날려서 구름 위에서 말리면 되겠군. 구름 위에는 햇볕이 있으니까 금세 말릴 수 있어.” (8쪽)





  그림책에 나오는 ‘빨래하는 어머니’는 날이 찌푸리지만 빨래를 미루지 않습니다. 멋지고 당찹니다. 아무렴, 저도 우리 집 두 아이가 갓난쟁이였을 적에는 비가 오건 눈이 오건 신나게 빨래를 했습니다. 한겨울에 눈이 와도 눈발이 그쳤다 싶으면 조금이라도 바깥바람을 쏘인 뒤 집으로 들였습니다.


  그나저나 날이 찌푸려서 빨래가 잘 안 마를 듯하니, ‘빨래하는 어머니’는 걱정스럽습니다. 요리조리 생각하다가 아하 하고 손뼉을 칩니다. 연줄에 빨래를 꿰어 높이높이 날려야겠다고 생각해요.


  빨래쟁이라 할 어머니는 어쩌면 연놀이를 하고 싶었을 수 있어요. 빨래를 널면서 연을 날리고 싶었다고 할 만해요. 연날리기란 얼마나 재미있는가요. 아이한테만 재미있는 연날리기가 아니라, 어른한테도 몹시 재미납니다.


  빨래쟁이 어머니는 연줄을 높이 드리워서 기쁘고 신납니다. 그런데 구름 너머에서 놀던 도깨비는 깜짝 놀라요. 아무도 구름 위로 오지 않을 텐데 연이 불쑥 고개를 내미니까요.


  천둥번개도깨비는 무슨 일인가 하고 두리번거리다가 이윽고 연줄인 줄 알아챕니다. 그리고, 연줄에 매달린 옷가지처럼 놀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올망졸망 귀여운 천둥번개도깨비는 구름놀이는 그만두고 땅으로 날아갑니다. 빨래쟁이 어머니한테 천둥번개도깨비를 모조리 빨아서 널어 달라고 얘기해요.



천둥번개도깨비들은 하늘에서 내려와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빨아 주세요.” “말려 주세요.” “아주 높이높이 올라가고 싶어요.” “펄럭펄럭 날게 해 주세요.” (19쪽)




  빨래를 좋아할 뿐 아니라 잘 하는 어머니는 도깨비도 척척 빨듯이 씻깁니다. 이러고 나서 수없이 많은 도깨비를 연줄에 꿰어 구름 너머로 훨훨 날립니다. 도깨비는 저희 스스로 하늘을 날 줄 알 텐데 일부러 연줄에 꿰이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 아이들도 빨래터에서 일부러 옷을 적시며 놉니다. 처음에는 옷을 적실 생각이 없으나, 물을 튀기고 던지다가 어느새 온몸을 적시고, 이윽고 빨래터 바닥에 엎드리거나 누워서 개구리가 되어요.


  옛날에는 냇가에서 어머니가 빨래를 하면, 아이들은 냇물놀이를 즐깁니다. 빨래를 마친 옷을 널 적에 아이들은 곁에서 거듭니다. 이불을 빨아서 너는 날이라면 아이들은 이불놀이를 하면서 마당을 가로지릅니다. 빨래를 비롯한 집안일은 힘을 많이 들여야 합니다. 그리 만만하거나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웃고 노래하면서 노는 모습을 지켜보며 새롭게 기운이 솟아요. 어버이가 아이들하고 딱히 놀아 주지 못해도, 아이들은 저희끼리 물놀이를 하고 이불놀이를 하며 마당놀이를 합니다.


  빨래하는 어버이는 빨래를 하는 동안 일놀이를 누립니다. 두 손으로 비비든 빨래방망이를 두들기든 일이면서 놀이입니다. 옷가지를 비틀어 물을 짜도, 빨랫줄에 척척 널어도, 언제나 일놀이입니다. 그래서 빨래를 하며 빨래노래를 부릅니다. 밥을 지으며 밥노래를 부르고, 풀을 뜯으며 풀노래를 불러요. 잘 놀아 기운이 빠져 낮잠을 자는 아이를 달래며 잠노래(자장노래)를 부릅니다. 들일을 하며 들노래를 부르고, 바느질을 하며 바느질노래를 불러요.



하늘로 돌아가는 천둥번개도깨비들을 보고 엄마가 말했습니다. “빨래하러 또 오렴! 맑은 날도, 비가 오는 날도 언제든지 빨래할 수 있으니까!” (32쪽)



  삶은 일하고 놀이로 이루어집니다. 일만 하는 삶이 아니요, 놀이만 하는 삶이 아닙니다. 일하고 놀이를 함께 하면서 사랑이 싹트는 삶입니다. 일하고 놀이를 지으면서 사랑이 싹트기에 꿈으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빨래를 조물조물 주무르면서 온 식구 몸을 새삼스레 헤아립니다. 빨래가 햇볕하고 바람을 머금으면서 보송보송 마르는 동안 온 식구 마음을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씩씩하게 일하고 튼튼하게 놀기를 바랍니다. 기쁘게 일하고 즐겁게 놀기를 바랍니다. 서로 아끼면서 웃음으로 짓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따스한 기운하고 싱그러운 숨결이 옷가지에 깃들기를 바라요. 빨래하는 어버이는 빨래 한 점에 사랑스러운 손길을 담습니다. 4348.7.13.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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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의 아이들 두고두고 보고 싶은 그림책 7
김재홍 지음 / 길벗어린이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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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47



아이는 몇 살부터 혼자 집을 볼 수 있을까

― 동강의 아이들

 김재홍 글·그림

 길벗어린이 펴냄, 2000.6.30. 9500원



  아이들은 몇 살쯤 되면 혼자서 집을 볼 수 있을까요? 일곱 살 어린이가 혼자서 집을 볼 만할까요? 아홉 살이나 열 살쯤 되면 의젓하게 집을 볼 만할까요? 언니하고 동생이 있으면, 여러 아이는 몇 살쯤부터 어버이 없는 집을 씩씩하게 볼 만할까요?


  아이마다 다 다르리라 느낍니다만, 일고여덟 살 아이가 혼자서 집을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버이가 아이하고 함께 놀지 못하고 집에서 다른 일만 하더라도, 한집에 함께 있을 적에는 든든하다고 여깁니다. 곁에 있는 믿음직한 기운을 느끼기에, 아무 걱정도 근심도 없이 놀 수 있습니다.


  아이가 혼자 집을 볼 수 있는 나이란, 제 어버이가 먼 마실을 다녀오더라도 마음으로 늘 함께 있는 줄 알아차리는 때이지 싶어요. 함께 있는 숨결을 더욱 깊고 넓게 느낄 무렵, 아이들은 혼자서 집을 볼 뿐 아니라, 혼자서 도마질도 하고, 비질도 하고, 걸레질도 하고, 작은 옷가지는 혼자 빨래할 수 있습니다.




장날, 어머니는 깨도 팔고 콩도 팔러 장터에 갔어요. 돌아올 땐 순이 색연필하고 동이 운동화도 사 온댔어요. (2쪽)



  그림책 《동강의 아이들》(길벗어린이,2000)을 읽습니다. ‘숨은그림찾기’라는 얼거리가 살며시 깃든 그림책입니다. 강원도 영월 동강이라는 곳을 삶터로 삼은 아이들이 어떻게 노는가 하는 대목을 살짝 보여주는 그림책입니다.


  다만, 이 그림책은 아이 눈높이가 아니라 어른 눈높이로 그렸습니다. 시골아이가 무엇을 하고 노느냐 하는 대목으로 보여주는 그림책이 아니라, 아련한 옛 시골살이를 떠올리는 오늘날 어른이 ‘아름다운 시골 삶자락’을 요즈음 도시사람한테 알려주려고 빚은 그림책입니다. 아름다운 시골을 잘 지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빚은 그림책이고, 사랑스러운 보금자리에서 곱게 자라는 아이들을 따스히 돌보자는 마음으로 엮은 그림책입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들 모습을 보면 ‘무척 어리다’ 싶은 나이입니다. 혼자 집을 보기에는 아직 어리다 싶은 나이예요. 이만 한 나이인 아이라면, 집에 아버지가 안 계시고 어머니 혼자 계실 적에, 어디를 가든 어머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움직일 테지요. 아침 일찍 저잣거리로 가야 하면, 참말 아침 일찍 아이들을 데리고 움직입니다. 시골아이는 무척 일찍 일어나요. 동이 틀 무렵 아이들도 일어납니다.




“아기 곰아, 그럼 우리 엄마가 내 색연필도 사셨니?” 순이가 아기곰에게 물었어요. “아기 곰이 그러는데, 엄마가 우리 순이 색연필도 사셨대.” 이번에도 동이가 아기곰 대신 대답해 주었어요. (8쪽)



  그림책 《동강의 아이들》에 나오는 아이들은 맑은 냇물이 흐르는 곳에 커다랗게 박힌 바위를 보면서 큰새를 떠올리고, 아기 곰을 떠올리며, 공룡을 떠올립니다. 큰새야 집 둘레와 마을에서 흔히 볼 텐데, 아기 곰이라면 텔레비전에서 보았을까요? 아니면, 그림책에서 보았을까요? 공룡은 어디에서 보았을까요? 시골아이는 공룡이라는 것을 어디에서 보고 알았을까요?


  아무래도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공룡을 보여주거나 말하기에 ‘공룡’이라고 하면 무섭거나 무시무시한 것이라고 여기지 싶습니다. 지난날에는 ‘도깨비’가 이 몫을 맡았을 테고, ‘귀신’이 이 몫을 물려받았다가, ‘공룡’하고 ‘괴물’이 이러한 몫을 새삼스레 한다고 느낍니다. 막상 코앞에 아무것도 없지만, 마치 뭔가 무서운 것이 있다고 여기지요.


  가만히 보면, 아이들은 냇가에서 큰새하고 아기 곰을 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든 눈앞에 떠올리면서 놀 수 있다는 뜻입니다. 공룡이라는 이름을 빌어 술래잡기나 숨기놀이를 하는 셈입니다. ‘경찰 도둑 놀이’가 있어서, 한 사람은 쫓기고 한 사람은 좇으며 놀기도 합니다. 좋고 나쁨이나 옳고 그름을 가리려고 하는 ‘경찰 도둑 놀이’가 아니라, ‘잡기놀이’일 뿐이지만, 이름을 이렇게 붙일 뿐입니다.



“봐라, 아무것도 없잖니?” 할아버지가 웃으며 말했어요. “아니, 근데 누가 여기다 빈 병을 버렸누? 쯧쯧.” 할아버지는 빈 병을 배에 싣고 노 저어 가 버렸어요. (25쪽)




  혼자 저잣거리에 가신 어머니를 기다리는 아이들은 냇가에서 물수제비를 뜨고, 바위를 타거나, 먼바라기를 합니다. 문득 우리 집 아이들을 떠올립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라면 냇가에서 무엇을 하며 놀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틀림없이 옷을 다 적시면서 신나게 물장구를 치고 헤엄도 치며 깔깔거리리라 생각해요. ‘혼자 집을 보면서 어머니를 기다릴 만한 나이인 아이’라고 한다면, 옴팡 젖은 옷은 벗어서 바위에 척 걸쳐서 말리겠지요. 깊은 멧골에 두 아이만 있다면, 젖은 옷을 벗어서 알몸이 된 채 다시 깔깔거리면서 놀 테고, 이렇게 놀다가 으슬으슬 추우면 바위에 얹어 햇볕에 다 마른 옷을 얼른 꿰겠지요.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가거나 밭자락을 살피거나 들이나 숲에서 푸성귀나 열매를 훑어서 먹을 테고요.


  그림책 《동강의 아이들》은 ‘동강’이라고 하는 무척 아름다운 시골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대목을 보여줍니다. 이 아름다운 시골을 도시에 있는 이웃이 함께 느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림책을 내놓았구나 싶습니다. 어른뿐 아니라 아이도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터전’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알아차릴 수 있기를 바랐구나 싶어요.


  그런데, 이 그림책은 아이들이 보기에는 좀 심심하겠구나 싶습니다. 어머니를 마냥 기다리다가 졸린 동생을 업어 주는 오빠가 듬직하면서 대견하고 사랑스럽습니다만, 두 아이가 시골에서 신나게 노는 삶을 제대로 드러내지는 못하거든요. 아이들은 놀이를 하면서 모든 걱정이나 근심을 잊거나 털어내는데, 아이가 아이다운 모습을 미처 담지 못했고, 더욱이 시골아이가 시골스럽게 씩씩하면서 의젓한 모습도 찬찬히 그리지 못했습니다.


  그림책 이름이 “동강 아이들”이라면 ‘동강에서 나고 자라며 노는 아이’한테 눈길을 맞출 노릇입니다. 그러나, 그림책에서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데에 눈길을 맞추려 했다면, 처음부터 “동강 숨은그림찾기”를 더 드러내도록 엮을 때에 뜻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림책이라고 해서 꼭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와야 하지 않습니다. 안노 미쓰마사라고 하는 그림책 작가는 ‘사람이 하나도 안 나오는’ 그림책 《숲 이야기》를 그리면서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재미를 한껏 보여줄 뿐 아니라, 숲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마운가 하는 대목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동강의 아이들》을 빚은 김재홍 님도 ‘숨은그림찾기’라는 대목에 더 눈길을 모아서 그림을 그리고 책을 엮으면 어떠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림책이라고 해서 꼭 ‘아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그림책은 ‘아이하고 어른이 함께 삶을 기쁘게 바라보도록 돕는 이야기가 흐르’면 됩니다. 《동강의 아이들》은 동강을 담아낸 그림만으로도 넉넉히 아름답습니다. 이 아름다운 그림을 한결 싱그러이 살리도록 ‘수수께끼 찾는 그림’을 더 그리면 훨씬 재미있었을 텐데 싶어 좀 아쉽습니다. 4348.7.11.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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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감자 풀빛 그림 아이 6
파멜라 엘렌 글 그림, 엄혜숙 옮김 / 풀빛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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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46



할머니와 아이는 함께 놀면서 사랑하지

― 할머니의 감자

 파멜라 엘렌 글·그림

 엄혜숙 옮김

 풀빛 펴냄, 2004.6.25.



  아기로 태어난 사람은 무럭무럭 자라서 아이가 됩니다. 아이는 어버이가 베푸는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씩씩하게 큽니다. 이동안 어버이 말고도 할머니랑 할아버지 손길을 함께 받습니다. 아이는 어버이만 돌보거나 아끼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는 시나브로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되면서 ‘새로운 아이’를 돌보거나 아끼는 ‘새로운 삶’을 누립니다.


  아이였을 적에 어버이가 물려준 사랑을 헤아리면서 ‘어른으로 자랍’니다. 어른으로 자란 아이는 제 아이를 낳으면서 어버이라는 이름을 새로 받는데, 이때에 ‘그동안 어버이한테서 받은 사랑’을 제 아이한테 물려주면서, ‘사랑을 받고 주고 잇는 삶’을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이러한 삶을 하루하루 이으면서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되면, ‘어른이 되어 새 아이를 낳은 제 아이’를 바라보는 눈길이나 ‘어른이 된 제 아이가 낳은 새 아이’를 마주하는 손길도 새롭게 거듭납니다.



잭은 할머니랑 술래잡기를 했어요. 하하 호호 바닥을 뒹굴며 놀기도 했어요. 이야기책도 읽었어요. 케이크도 먹었어요. (4∼5쪽)



  파멜라 엘렌 님이 빚은 그림책 《할머니의 감자》(풀빛,2004)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그림책에 나오는 할머니는 금요일에만 손자를 만납니다. 금요일에 아이 어머니가 바깥일을 해야 해서 아이를 할머니 댁에 맡긴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한 주에 한 차례 만나는 손자가 더없이 반갑습니다. 함께 씨름도 하고 술래잡기도 한다고 해요. 할머니는 시골에 살기에 감자 두 알을 꺼내어 칼로 예쁘게 깎아서 인형으로 삼기도 한답니다.




할머니는 감자로 만든 남자 인형과 여자 인형을 창틀에 살며시 올려놓았어요. “저것 봐라.” 할머니가 말했어요. “저것 봐요.” 잭이 말했어요. “둘이 만나서 좋은가 보다.” 할머니가 말했어요. “우리도 둘이 만나서 좋잖아요.” 잭이 말했어요. (9쪽)



  손자와 즐겁게 놀던 할머니인데, 어느 날부터 손자가 찾아오지 못합니다. 손자뿐 아니라 이녁 아이(아이 어머니)도 찾아오지 못했겠지요. 어른이 된 아이는 할머니하고 함께 놀지 않는데, ‘어른이 된 아이가 낳은’ 아이도 찾아오지 않고 함께 놀지도 않으니, 할머니는 몹시 서운할 뿐 아니라 쓸쓸합니다. 손자하고 함께 깎아서 갖고 놀던 ‘감자 인형’에는 이제 싹이 돋습니다. 감자 인형은 더는 감자 인형이 아니라 이곳저곳에서 싹이 돋은 ‘씨감자’가 됩니다.


  할머니는 어떻게 할까요? 할머니는 씩씩합니다. 찾아오지 못하는 손자를 마냥 기다리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싹이 난 씨감자를 거름더미에 묻습니다. ‘묵은 생각’을 흙에 묻으면서 땀을 흘립니다. 스스로 삶을 사랑하려는 몸짓이 됩니다.


  이윽고 손자가 다시 찾아옵니다. 묵은 생각을 털고 홀가분하던 할머니는 예전하고 다르게 기쁜 마음이 됩니다.



“할머니, 우리 감자 인형들은 어디 있어요?” 잭이 물었어요. “내가 퇴비 더미에 묻었단다. 그랬더니 엄청 자랐지 뭐냐.” “참말요?” 잭이 말했어요. (20쪽)



  손자는 ‘싹이 튼 감자’에 꽃이 피고 지고 알이 굵게 맺을 때까지 할머니한테 못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바로 오늘 이곳에 손자가 있습니다. 여러 달 동안 못 본 일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얼굴을 마주하니 반가우면서 기쁩니다.


  할머니와 손자는 이제 무엇을 할까요? 쇠스랑을 챙깁니다. 비를 맞으면서 감자를 캡니다. 한 알 두 알 석 알 넉 알 …… 감자를 다 캘 때까지 두 사람은 비를 쫄딱 맞는데, 하하하 웃고 노래하면서 밭일을 합니다. 할머니도 손자도 온통 젖고 흙투성이가 되면서 기쁘게 일손을 놀립니다.




할머니는 큰 쇠스랑으로, 잭은 작은 쇠스랑으로 땅을 파고 또 팠어요. 자꾸자꾸 팠어요. 할머니가 먼저 감자 한 알을 캤어요. 그 다음에 잭이 감자 두 알을 캤어요. (24쪽)



  할머니 사랑을 받고 기쁘게 뛰놀던 아이는 할머니를 곱게 아끼는 마음을 키웁니다. ‘우리 할머니’뿐 아니라 이웃 할머니를 곱게 아끼지요. 할아버지 사랑을 받고 신나게 뛰놀던 아이는 할아버지를 맑게 아끼는 마음을 키우겠지요.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뿐 아니라 이웃 할아버지도 맑게 아낄 테고요.


  사랑은 사랑을 낳고, 꿈은 꿈으로 이어집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거듭나고, 꿈은 꿈으로 다시 자랍니다. 어버이가 아이한테 물려주는 사랑은 언제나 새로운 사랑으로 깨어납니다.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사랑을 가슴에 품은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서 새로운 어른이 되고, 바야흐로 넓고 깊은 꿈을 펼치면서 사랑을 새롭게 이 땅에 펼칩니다.


  아이가 노래하고 할머니가 노래합니다. 할머니가 웃고 아이가 웃습니다. 아이가 춤추고 할머니가 춤춥니다. 할머니가 밥을 짓고 아이가 밥을 먹습니다. 삶을 이루는 바탕은 언제나 사랑이라고 느낍니다. 삶을 짓는 밑거름은 한결같이 사랑이라고 느껴요. 그림책 《할머니의 감자》에 나오는 할머니와 손자는 둘이 함께 캔 감자알로 ‘새 감자 인형’을 깎습니다. 앞으로 이 감자 인형에 또 싹이 트면, 그때에는 둘이 함께 ‘싹이 튼 씨감자’를 거름더미에 묻겠지요. 함께 일하고 함께 놀며, 함께 웃고 함께 노래하는 삶으로 나아가겠지요. 4348.7.9.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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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마우지
잔 오머로드 그림, 로비 H. 해리스 글, 햇살과나무꾼 옮김 / 사파리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45



‘죽은 이웃’을 마음으로 사랑하다

― 굿바이 마우지

 로비 H. 해리스 글

 잔 오머로드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언어세상 펴냄, 2002.3.18. 8000원



  기운이 다 빠져서 죽은 잠자리를 봅니다. 몸에서 넋이 빠진 잠자리는 새털마냥 가벼우면서, 잘못 만지면 가루처럼 바스라질 듯합니다. 뻣뻣하게 굳은 잠자리를 가만히 살펴보는데, 어느새 작은아이가 옆으로 다가와서 “어, 여기 잠자리 있네?” 하더니 “잠자리 안 움직여. 죽었나 봐?” 하고 말합니다. 작은아이는 거리낌없이 잠자리를 집습니다. 뻣뻣하게 굳은 잠자리를 제 눈앞에 대고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마우지 배를 살살 간질였어요. 하지만 마우지는 깨질 않았어요. (3쪽)



  잠자리는 몸을 떠나서 새로운 곳으로 갑니다. 나비나 애벌레도 목숨을 잃으면 넋이 몸을 떠나서 새로운 곳으로 갑니다. 새로운 곳이 어디일는지는 몸을 떠나야 알 수 있습니다. 새로운 곳으로 갔다가 이 지구별이 그리워서 다시 찾아올 수 있을 테지요. 아스라이 먼 옛날부터 사람이든 벌레이든 풀이든 새이든, 이 땅에서 즐겁게 살다가 몸을 떠난 뒤 이내 새로운 몸을 찾아서 다시 이 땅에서 삶을 짓는다고 할 테고요.


  로비 H. 해리스 님이 글을 쓰고, 잔 오머로드 님이 그림을 그린 《굿바이 마우지》(언어세상,2002)를 읽습니다. 시골집에서 으레 ‘죽은 이웃’을 보는 아이들은 《굿바이 마우지》에 나오는 ‘죽어서 몸이 뻣뻣하게 굳은 쥐’를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우리 집에서만 해도 헛간에 깃들어 함께 지내는 마을고양이가 으레 쥐를 잡아서 먹습니다. 언젠가 쥐를 잡아서 죽이고는 마당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기도 하고, 머리통만 남기고 먹은 뒤 마당 한쪽에 놓기도 합니다. 논둑에서 개구리를 잡아서 먹기도 하는 개구리는, 돌울타리에 앉아서 참새나 딱새를 잡고 싶어서 한참 동안 전깃줄이나 나뭇가지를 올려다보기도 합니다.



“아빠도 슬프단다.” 아빠는 나를 꼬옥 안아 주었어요. “아빠, 나 …… 마우지를 다시 만져 볼래요.” “그래.” (9쪽)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워서 나들이를 다니다 보면 ‘죽은 이웃’을 많이 봅니다. 자동차에 밟혀서 죽은 개구리와 뱀은 참으로 흔합니다. 자동차에 치여서 죽는 참새나 까치나 제비도 있고, 사마귀나 메뚜기나 지렁이도 자동차에 깔려서 죽기 일쑤입니다. 이제 막 깨어나서 날갯짓을 익히면서 아스팔트에서 몸을 쉬는 나비가 그만 밟혀 죽기도 해요.


  자전거를 달릴 적에는 찻길을 가로지르는 개미조차 잘 알아볼 수 있습니다. 두 다리로 걸어다닐 적에도 찻길을 기어가는 온갖 벌레를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싱싱 달리는 자동차에서는 ‘마주 달리는 자동차’를 살피느라 길바닥에 어떤 ‘이웃’이 있는지 살필 겨를을 내기 어려우리라 느껴요.


  요즈음은 농약을 먹고 죽는 개구리가 있고, 농약 맞은 벌레를 먹다가 죽는 새가 있습니다. 논이나 밭이 농약바람으로 휩싸이면, 며칠 동안 벌이나 나비나 잠자리를 한 마리도 못 보기도 해요. 모두 농약바람을 맞아서 죽어요.



“마우지가 없으면, 이제 나 혼자 어떻게 해요?” “마우지를 마당에 묻어 주자. 그러면 늘 함께 있을 수 있어!” (12쪽)



  ‘죽은 이웃’을 만나는 아이들이 묻습니다. “얘네들 어떻게 돼?” “이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몰라.” “생각해 봐. 이 아이들은 몸만 여기에 내려놓고 새로운 곳으로 갔어. 앞으로 새로운 몸을 입고 아름답게 다시 태어날 테니, 다음에 만나자고 인사해 주면 돼.”


  밥상맡에서 늘 아이들한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먹는 밥이 고기이든 풀이든 모두 ‘목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고기밥은 고기가 되어 준 목숨인 셈이고, 풀밥은 풀로 돋은 목숨인 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돼지나 닭이나 소만 ‘목숨’이지 않아요. 풀이랑 꽃이랑 나무도 목숨이에요. 사람도 다른 짐승도, 모두 ‘다른 목숨’을 밥으로 받아들여야 제 목숨을 건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온누리 수많은 목숨을 받아들여서 내 몸을 새롭게 가꿉니다.



“상자에 다른 것도 넣어도 돼요?” “그럼, 되고말고!” 나는 마우지 상자에 토스트 한 조각이랑 당근 두 뿌리를 넣었어요. 또 포도 넉 알이랑 초코바도 넣었어요. (17쪽)



  내 목숨이 아름답고, 네 목숨이 아름답습니다. 네 목숨이 사랑스럽고, 내 목숨이 사랑스럽습니다. 서로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운 목숨이요 삶입니다. 그림책 《굿바이 마우지》는 ‘귀염둥이 짐승’으로 함께 살던 작은 쥐 한 마리가 목숨을 내려놓은 뒤, 아이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이한테 ‘죽음’을 어떻게 알려주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이가 ‘죽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고 ‘죽음’하고 ‘삶’이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찬찬히 헤아리도록 이끄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굿바이 마우지》에 나오는 말처럼 우리는 “늘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아도 늘 마음으로 함께 있습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더라도 언제나 마음으로 함께 있어요. 마음을 살피면서 삶을 북돋웁니다. 마음을 아끼면서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마음을 사랑하면서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기쁜 하루를 맞이합니다. 4348.7.6.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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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놀이 2015-07-07 19:12   좋아요 0 | URL
뻣뻣한 사체를 `죽은 이웃`이라 부를 때 이미 거기엔 `사랑하는 마음`이 깃든 것이겠지요~~^^ 아무리 작은 생물이라도 죽음 앞에서는 그 무게를 내려놓기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네들을 `죽은 이웃`이라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저 자신이 죽음 앞에 강건해질 것 같습니다. 그런게 마음으로 사랑하는 힘이 아닐런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숲노래 2015-07-07 23:09   좋아요 0 | URL
우리는 모두 사랑스러운 이웃이요 동무라고 느껴요.
예전에는 어렴풋하게 느꼈고
아이들하고 시골에서 지내는 요즈음은
날마다 늘 뼛속하고 살갗으로 깊이 느껴요.

고운 이웃님으로 찾아와서 이야기를 들려주신 풀꽃놀이 님 말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