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주세요
야마시타 하루오 지음, 해뜨네 옮김, 무라카미 쓰토무 그림 / 푸른길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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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43



마음으로 사귀고 싶어서 쓰는 편지

― 편지를 주세요

 야마시타 하루오 글

 무라카미 츠토무 그림

 해뜨네 옮김

 푸른길 펴냄, 2009.4.13.



  아이들하고 편지를 씁니다. 나는 나대로 편지를 쓰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편지를 씁니다. 우리가 편지를 쓰는 까닭은 우리 마음을 보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편지를 썼으니 꼭 답장이 오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답장이 오면 기쁘지요. 그러나, 답장이 아니어도 우리 편지가 훨훨 날아서 이웃님이나 동무님한테 닿으면, 서로 마음이 하나로 이어진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답장은 ‘종이로 적은 글월’만이 아니라 ‘우리가 띄운 글월에 깃든 마음’을 읽는 일이기도 하다고 느낍니다.


  그나저나 우리 집 큰아이는 지난해부터 이곳저곳에 편지를 부치는데 아직 답장을 못 받습니다. ‘마음 답장’은 수없이 받지만 ‘종이에 적힌 답장’을 못 받습니다. 두 분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큰아버지도, 이모도 이모부도, 외삼촌도, 여러 이웃님도 좀처럼 우리 집 ‘편지순이’가 띄운 편지에 ‘종이에 적힌 답장’을 보내 주지 않습니다. 그래도 편지순이는 틈틈이 씩씩하게 새로운 편지를 종이에 그려서 우체국으로 나들이를 갑니다.



우리 집 무화과나무에는 빨간 우편함이 걸려 있습니다. 아빠와 내가 만든, 멋진 우편함입니다. (3쪽)




  그림책 《편지를 주세요》(푸른길,2009)를 읽습니다. 어느 무화과나무집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담아낸 그림책입니다. 무화과나무가 크게 우거진 집에서 사는 아이는 아버지랑 함께 뚝딱뚝딱 만든 빨간 우편함을 날마다 들여다본다고 해요. 편지가 오든 안 오든 설레는 가슴으로 열어 볼 테지요.


  편지가 온 날은 얼마나 기쁠까요? 편지가 안 온 날은 몹시 서운할 테지요. 그래도 아이는 씩씩합니다. 언제나 새롭게 편지를 쓰니까요. 그런데 말이지요, 어느 날 우편함에서 낯선 동무를 만나요.



‘뭐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편함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초록 개구리 한 마리가 숨어들었지 뭐예요. (5쪽)




  그림책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집 아이’가 만난 낯선 동무는 개구리입니다. 무화과잎처럼 맑게 푸른 몸빛인 개구리입니다.


  개구리는 ‘우편함’을 ‘새로운 보금자리’로 삼았다고 합니다. 아이는 아버지하고 만든 우편함에 개구리가 깃들었으나 성을 내거나 골을 내지 않습니다.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곳은 우편함’이라는 곳이라고 알려줍니다. 우편함이라는 곳을 처음으로 듣고 배운 개구리는 그러려니 하다가 아이한테 문득 묻습니다. 개구리도 편지라고 하는 것을 받고 싶답니다.


  그림책 이야기입니다만, 아이는 개구리하고 말을 섞습니다. 개구리도 아이하고 말을 나누어요. 둘은 서로 마음으로 사귀는 동무가 되었으니까요. 아이는 개구리가 들려주는 말을 알아차리고, 개구리도 아이가 들려주는 말을 알아들어요.



“그럼 어떻게 하면 나도 편지를 받을 수 있지?” 개구리는 팔짱을 끼고 물었습니다. “네가 먼저 편지를 쓰면 되지. ‘편지를 보내 주세요’ 하고 말이야.” (11쪽)



  어느 날 아이는 개구리가 우편함에서 사라진 모습을 봅니다. 더는 개구리를 못 만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편함에서 사라진 개구리는 무화과잎을 수북하게 남겼다고 해요. 개구리가 남긴 무화과잎은 무엇일까요? 편지를 받고 싶어서 우편함에 남긴 ‘개구리 편지’입니다.



그 다음 날, 우편함은 텅 비었습니다. 서운한 마음으로 우편함을 청소하던 나는 그 안에 잔뜩 쌓인 무화과 잎사귀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잎사귀 한 잎 한 잎마다 ‘편지를 보내 주세요’라고 정중하게 쓰였지 뭐예요! (20∼21쪽)





  가만히 돌아보니, 나도 ‘나뭇잎 편지’를 곧잘 썼습니다. 가을날 노란 은행잎을 주워서 펜이나 붓으로 살살 글씨를 그려서 편지를 썼어요. 전남 고흥 시골에서는 봄에 후박나무가 노랗게 물들면서 떨어집니다. 네 철 푸른 나무는 으레 봄에 가랑잎을 떨구어요. 한껏 무르익은 봄날에 노랗게 물든 잎사귀를 주워서 편지로 삼아서 이웃님한테 띄웁니다. 가을도 아닌 봄에 ‘노란 잎사귀’를 받는 이웃님은 깜짝 놀랍니다. 시골에서 띄울 수 있는 조그마한 선물인 ‘후박잎 편지’라고 할까요.


  편지를 쓰는 사람은 어떤 마음일까요? 아무래도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사이’로 지내고 싶은 뜻이리라 느낍니다. 바람결을 따라서 훨훨 날아가는 마음에 고운 이야기를 싣고 싶은 뜻이리라 느껴요.


  즐거운 노래를 편지에 씁니다. 기쁜 웃음을 편지에 담습니다. 아름다운 꿈을 편지에 적습니다. 사랑스러운 하루를 편지에 차곡차곡 눌러담습니다. 4348.6.29.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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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티와 거친 파도 비룡소의 그림동화 125
바버러 쿠니 글 그림, 이상희 옮김 / 비룡소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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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43



삶을 그릴 줄 알기에 누구나 ‘화가’

― 해티와 거친 파도

 바바라 쿠니 글·그림

 이상희 옮김

 비룡소 펴냄, 2004.7.9.



  날마다 그림을 그리면서 놉니다. 나한테는 ‘화가’라는 이름은 없으나 ‘어버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솜씨 좋은 그림을 아이한테 보여주거나, 멋들어진 그림을 아이한테 내밀지 않습니다. 아이하고 둘러앉아서 그림놀이를 합니다.


  두꺼운 종이에 그림을 그린 뒤 가위로 알맞게 오리면 ‘조각맞추기’를 할 수 있습니다. 가게에서 상품을 사서 조각맞추기 놀이를 할 수 있고, 집에서 손수 그림을 그려서 조각맞추기 놀이판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가만히 헤아리면, 어버이가 날마다 보여주는 모든 몸짓과 모습은 아이한테 그림이라고 할 만합니다. 밥차림도 청소도 빨래도 설거지도 그림과 같은 모습이요, 어버이가 날마다 읊는 말마디까지 모조리 그림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해티가 야무지게 대답했어요. “난 화가가 될 거예요.” 피피와 볼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음을 터뜨렸어요. “어휴, 저 바보! 너, 진짜 멍청하구나! 여자는 페인트칠 같은 건 안 해!” 해티도 페인트칠장이를 말하지 않았어요. 하늘에 뜬 달, 숲 속에 부는 바람, 바다에 이는 거친 물결을 그리는 화가를 말했답니다. (6쪽)



  바바라 쿠니(1917∼2000) 님이 빚은 그림책 《해티와 거친 파도》(비룡소,2004)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는 그림책을 그리는 바바라 쿠니 님이 이녁 삶을 담아서 《해티와 거친 파도》를 그렸다고 합니다. 이 그림책에는 ‘그림책 그리는 할머니’인 바바라 쿠니 님이 걸어온 길하고, 이녁 어머니가 걸어온 길을 함께 담았다고 합니다. ‘화가’라고 하는 직업을 사람들이 떠올리지 못하던 무렵, 또 여자는 ‘화가’로 지내기 어렵던 무렵, 바바라 쿠니 님하고 이녁 어머니는 화가로 한길을 걸었다고 해요.



때때로 바다는 퍼런빛을 띠면서 사납게 바뀌었고, 하늘은 검은빛이 되기도 했어요. 해티는 강아지를 품에 안으며 물었지요. “에비야, 지금 저 거친 물결이 뭐라고 말할까?” 물결이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이, 해티와 에비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어요. 바닷가를 거닐다 보면 금세 알 수 있었거든요. (23쪽)




  그러고 보니, 바바라 쿠니 님이 빚은 그림책으로 《미스 럼피우스》, 《강물이 흘러가도록》, 《달구지를 끌고》, 《바구니 달》, 《신기료 장수 아이들의 멋진 크리스마스》, 《챈티클리어와 여우》, 《꼬마 곡예사》, 《엘리너 루스벨트》, 《에밀리》 같은 작품이 있는데, 하나같이 시골살이를 노래하거나 ‘남자 사회에서 곱게 홀로서기를 하는 여자’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권력이나 명예가 아닌 아름다운 삶’을 꿈꾸는 사람들 발자국을 보여줍니다. 그림책 《해티와 거친 파도》에서 해티라는 아이가 품은 꿈처럼, ‘하늘에 뜬 달’이랑 ‘숲 속에 부는 바람’이랑 ‘바다에 이는 거친 물결’을 그림으로 빚어서 어린이하고 한결같은 놀이동무로 지내는 화가로 살았다고 할까요.


  예술을 해야 화가이지 않습니다. 전시회를 열거나 예술사에 이름을 올려야 화가이지 않습니다. 삶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노래와 같은 붓질로 종이에 얹어서 그림을 그릴 줄 안다면 화가입니다. 그림 한 점을 비싸게 내다 팔 수 있어야 화가이지 않습니다. 그림 한 점에 사랑을 오롯이 담아서 이웃하고 즐거이 어깨동무할 수 있는 삶을 펼칠 수 있으면 화가입니다.



어느 화요일 저녁이었어요. 음악이 오페라 하우스 가득히 물결치고 저 아래 무대에서 한 여인이 뜨겁게 노래를 불렀어요. 칸막이 좌석에 앉은 해티는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지요. 해티는 비로소 깨달았어요. 나도 온힘을 다해 그림을 그릴 때가 왔다고 말이지요. (35쪽)




  바바라 쿠니 님은 가슴이 뜨겁게 불타오르도록 그림을 그리겠다고 다짐합니다. 이 다짐대로 스스로 길을 닦습니다. 앞으로 걸어갈 길이 거친 물살을 헤쳐야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거친 물살은 거친 물살대로 맞이하면서 헤치면 됩니다. 때로는 거친 물살에 휩쓸릴 수 있습니다. 거친 물살을 맞다가 지칠 수 있습니다.


  씩씩하게 걷는 한길이 고단하거나 지치면 좀 쉴 수 있습니다. 쉬었다가 다시 기운을 내면 됩니다. 남이 시키는 길을 갈 까닭이 없이 스스로 생각하고 거듭 생각하면서 한길을 걷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뜻을 헤아리고 새로 헤아리면서 삶을 가다듬습니다.


  삶을 그릴 줄 알기에 누구나 ‘화가’입니다. 삶을 그릴 줄 모르기에 누구나 ‘화가’가 안 됩니다. 사랑을 그릴 줄 알면 어린이도 어른도 다 함께 ‘화가’입니다. 사랑을 그릴 줄 모르면 아무리 그림값을 비싸게 받더라도 ‘화가’로 살지 못합니다.



해티는 엄마 아빠한테 말했어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엄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어요. “무슨 얘기니?” 해티는 잠자코 냅킨을 접었어요. 그리고 냅킨꽂이에 그걸 도로 꽂았지요. 해티 눈이 반짝거렸어요. “화가가 되려고 해요.” 해티 말에 엄마가 웃음 지으며 말했어요. “외할아버지처럼 되고 싶구나.” 해티가 대답했지요. “네, 그렇지만 저는 제 그림을 그릴 생각이에요.” (39쪽)




  어린 해티는 가슴에 품은 꿈을 놓지 않습니다. 스스로 배우고 싶어서 대학교에 가기로 하고, 스스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화가’라는 이름을 가슴에 새로 새깁니다. 붓이랑 놀면서 이야기를 빚습니다. 달이랑 해랑 별을 바라보면서 꿈을 키우고, 숲과 들에서 뛰놀던 나날을 되새기면서 꿈을 가꾸며, 너른 바다가 들려주는 바람노래를 떠올리면서 꿈을 짓습니다.


  온 하루가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그림으로 옮깁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새롭습니다. 이 새로움을 새삼스레 그림으로 엮습니다. 기쁨을 느끼지 못할 적에는 그림을 그리지 못합니다. 새로움을 알아차리지 못할 적에는 붓을 손에 쥐지 못합니다. 밥이 끓는 소리에도 기쁘게 웃으며 그림을 그립니다. 풀벌레가 노래하는 소리에도 새롭게 웃으며 그림을 그립니다.


  가슴을 활짝 펴고 바람을 마시기에 그림을 그리고 삶을 그립니다. 눈을 크게 뜨고 구름을 바라보기에 그림을 그리고 삶을 그립니다. 그림으로 그릴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 곁에서 곱게 흐릅니다. 내 곁을 돌아볼 수 있으면, 이러면서 손에 붓을 쥘 수 있으면, 우리는 누구나 화가로 살 수 있습니다. 4348.6.25.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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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독 온 겨레 어린이가 함께 보는 옛이야기 3
홍영우 글.그림 / 보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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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42



땅하고 마음에 고운 씨앗을 심는다

― 신기한 독

 홍영우 글·그림

 보리 펴냄, 2010.10.14.



  홍영우 님이 빚은 그림책 《신기한 독》(보리,2010)을 읽으며 옛날 생각에 잠깁니다. 무엇이든 집어넣으면 똑같은 것이 놀랍게 나오는 독이 있으면, 나는 이 독에 무엇을 넣을까 하고 꿈을 꾸어 보았습니다. 어릴 적에 동무들은 하나같이 ‘돈’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되는 돈을 넣을까요? 50원이나 100원입니다. 500원 한 닢도 제법 큰돈이던 때였으니 기껏해야 100원인데, 100원을 넣어서 빼고 또 빼내어 큰돈을 이루자면 참으로 오래 걸릴 테지요. 종이돈을 넣는다면 ‘똑같은 돈’이 날 테니까 마치 위조지폐처럼 쓸 수 없는 돈이 될 테고요.


  그러고 보면, 놀라운 독에는 ‘밥’을 넣으면 딱 어울리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먹을 만한 뭔가를 넣으면 똑같은 것이 나올 테니 굶을 걱정이 없겠지요. 맛난 떡이나 빵을 마련했다면, 떡장수나 빵장수를 할 수 있을 테고요.




옛날 어느 마을에 농사꾼 하나가 살았어. 하루는 농사꾼이 밭을 일구느라고 괭이질을 하고 있었지. (2쪽)



  옛이야기를 더 헤아려 봅니다. 놀라운 독이 있어서 굶는 걱정이 없다면, 독에 무엇이든 집어넣어서 언제 어디에서나 넉넉히 누릴 수 있다면, 참으로 ‘걱정없는’ 나날이 되리라 느낍니다. 다만, 이런 생각을 잇고 이으니, ‘할 일도 없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만히 누워서 독에 넣었다가 빼면 될 뿐이니, 이 땅에서 태어나서 ‘내가 나답게 할 일’은 참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워서 먹고 놀기만 하면 될 뿐입니다.


  이런 데까지 생각이 잇자, 놀라운 독은 놀라운 독이 되면서 어느 모로는 바보스러운 독일 수 있겠구나 싶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서 먹기만 하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하니, 이런 모습은 도무지 떠올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부자 영감은 부리나케 농사꾼을 찾아가서 대뜸 물었지. “여보게, 자네 이 독 어디서 파냈나?” “왜요? 우리 밭에서 파냈지요.” “그러면 그렇지. 이 독은 내 것이 틀림없네.” (11쪽)



  씨앗을 심는 사람은 씨앗을 얻습니다. 볍씨를 심는 사람은 볍씨를 얻어요. 콩씨를 심는 사람은 콩씨를 얻습니다. 다만, 씨앗을 심는 사람은 씨앗 한 톨을 고스란히 얻지 않습니다. 수백 곱으로 불어난 씨앗을 얻습니다. 그러니, 해마다 꾸준하게 씨앗을 심는 사람은 해마다 꾸준하게 한결 넉넉하게 씨앗을 얻습니다.


  그러니까, 놀라운 독은 ‘독 하나’를 가리키는 옛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지만, 먼먼 옛날부터 지구별에서 살며 흙을 짓고 살던 수수한 사람들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땅뙈기를 잘 일구어서 씨앗을 심으면 석 달 뒤에 열매를 얻어요. 이 가운데 알찬 씨앗을 따로 갈무리한 뒤, 나머지는 밥으로 삼습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사람이라면 누구한테나 ‘흙’이 바로 ‘놀라운 독’입니다. 그리고 ‘재미난 독’하고 같으며 ‘아름다운 독’이나 ‘사랑스러운 독’이라고 할 만합니다. 《신기한 독》이라는 옛이야기는 먼 옛날부터 시골 어버이가 시골 아이한테 삶을 일깨우려고 들려준 슬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사꾼과 부자 영감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입만 벌리고 멍하니 원님만 바라보았어. 원님 말은 누구도 어길 수가 없으니 어떡해. 아무 말도 못하고 독을 빼앗긴 채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17쪽)



  옛이야기를 다시금 헤아려 봅니다. 씨앗은 흙에만 심지 않습니다. 씨앗은 마음에도 심습니다. 마음에는 사랑이나 꿈이라는 씨앗을 심어요. 마음에 심는 ‘사랑씨’는 새로운 사랑으로 자랍니다. 마음에 심는 ‘꿈씨’도 새로운 꿈으로 커요.


  사랑을 마음에 심기에 사랑이 새롭게 자랍니다. 꿈을 마음에 심으니 꿈이 새롭게 거듭나요. 그러니까, 우리 몸을 움직여 볍씨나 콩씨 같은 ‘밥이 될 씨앗’을 흙이라고 하는 ‘독’에 심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을 가다듬어 사랑이나 꿈 같은 ‘빛이 될 생각’을 마음밭이라고 하는 ‘독’에 심습니다.


  몸으로도 아름답게 자라고, 마음으로도 사랑스럽게 큽니다. 몸이랑 마음을 함께 가꾸면서 즐거운 삶을 이룹니다.




신기한 독은 깨져 그만 못 쓰게 되고 말았어. 대청에 아버지가 가득하니 이를 어째. (32쪽)



  흙이 망가지면 더는 흙을 못 일굽니다. 흙이 망가지면 밥을 못 얻습니다. 마음이 망가질 적에는 ‘살 뜻’이나 ‘살아갈 기운’이 사라집니다. 독이 깨지지 않도록 잘 건사하기도 해야 할 뿐 아니라, 흙이 더러워지거나 망가지지 않도록 잘 돌봐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더러워지거나 흔들리지 않도록 잘 건사해야 합니다.


  몸을 아끼고 마음을 아낍니다. 몸을 가꾸고 마음을 가꿉니다. 그러니까, 삶을 아끼고 가꿀 때에 하루하루 즐겁습니다. 삶을 아끼지 못하거나 가꾸지 못한다면, 하루하루 괴롭거나 고단합니다. 4348.6.23.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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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나라 여우 이야기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데지마 게이자부로 지음, 정숙경 옮김 / 보림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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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39



들짐승 여우가 모두 사라진 나라에서

― 북쪽 나라 여우 이야기

 데지마 게이자부로 글·그림

 정숙경 옮김

 보림 펴냄, 2006.1.5.



  데지마 게이자부로 님이 빚은 그림책 《북쪽 나라 여우 이야기》(보림,2006)를 가만히 읽습니다. 온통 새하얗게 눈밭이 된 곳에서 뛰노는 여우 한 마리가 나오는 그림책을 차분히 넘깁니다.


  여우 한 마리는 너른 들을 달리고, 깊은 숲을 가로지릅니다. 여우 한 마리는 홀로 눈밭을 밟습니다. 여우 한 마리는 한겨울에 눈토끼를 보고는 잡아먹으려고 달립니다. 그런데 눈토끼 한 마리가 하얀 숲에서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여우는 토끼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쳐다봅니다. 감쪽같이 사라진 토끼를 찾아내지 못하는 여우는 문득 숲노래를 듣고, 숲바람을 쐽니다. 배고프다는 생각을 잊고, 토끼를 좇던 생각을 잊은 채, 하염없이 숲을 바라보면서 노래와 바람을 맞아들입니다.



여우는 배가 고픕니다. 긴 겨울털도 소용없이, 얼어붙을 듯 춥고 추운 밤입니다. (9쪽)



  사람들은 전시장을 찾고 박물관을 찾아갑니다. 사람들은 예술을 빚고 누리고 즐깁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숲을 그림으로 담거나 사진으로 찍거나 글로 옮깁니다. 사람들은 사랑스러운 바다와 하늘을 노래로 빚고 춤으로 나타냅니다.


  여우는 무엇을 할까요? 여우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하나요? 여우는 겨울숲을 그저 가만히 바라봅니다. 여우는 겨울숲에 어리는 이야기를 찬찬히 바라보면서 옛생각에 잠깁니다. 여우는 드넓은 숲하고 들이 바람결을 따라서 들려주는 노랫소리를 고즈넉하게 듣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사회에는 전시장이나 박물관은 늘어나도, 숲이나 들은 늘어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문명에서는 쇼핑센터와 지하상가와 높은 건물은 늘어나도, 빽빽하게 나무가 우거지지 못하고 우람하게 나무가 자라지 못합니다.


  《북쪽 나라 여우 이야기》는 겨울에 더욱 추운 북쪽 나라에서 사는 여우를 보여줍니다. 온통 눈밭인 곳에서, 사람이 하나도 없고, 작은 마을이 하나조차 없는 들녘에서 숲노래와 바람노래와 겨울노래를 듣는 여우를 보여줍니다.




언덕으로 쫓아 올라온 여우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멈춥니다. 어쩌면 이렇게 신비로운 세상이 다 있을까요! (19쪽)



  한국에서 여우는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여우가 살기에 알맞지 않으니, 여우는 모조리 사라졌습니다. 한국에서 늑대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늑대가 살기에 걸맞지 않으니, 늑대는 몽땅 사라졌습니다.


  한국에서 사라지는 들짐승이 매우 많습니다. 한국에서 사라지는 숲새도 무척 많습니다. 한국에서 사라지는 딱정벌레도 대단히 많을 텐데, 어떤 딱정벌레가 언제 사라지는지를 깨닫는 사람은 드물리라 느껴요. 그야말로 흔하디흔하던 흰민들레도 한국에서 아주 빠르게 사라져요.



차갑게, 차갑게 반짝이고, 바람마저 얼어붙는 듯합니다. 여우가 몸을 부르르 떱니다. 바로 그때, 엄마 여우와 아기 여우들 모습이 숲 가운데에 떠오릅니다. 여우는 상냥하던 엄마를 생각합니다. (25∼27쪽)




  들이나 숲에서 들짐승하고 숲새가 느긋하거나 넉넉하게 살기 어렵다면, 이 나라에서 사람은 얼마나 느긋하거나 넉넉하게 살 만할까요? 들에서 들짐승이 먹이를 찾기 어렵고, 숲에서 숲새가 먹이를 얻기 어렵다면, 이 나라에서 사람은 얼마나 즐겁거나 아름답게 살 만할까요?


  여우나 늑대 울음소리가 사라진 숲이나 들은 괴괴합니다. 온갖 새가 저마다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숲이나 들이 없는 곳은 메마르거나 차갑습니다. 들짐승 울음소리는 사라지고, 공사하는 소리가 우렁찹니다. 숲새가 들려주던 노랫소리는 잦아들고, 자동차가 고속도로를 달리는 소리가 매섭습니다.



아침이 왔습니다. 바람은 가없이 맑고, 먼 산까지 또렷하게 보입니다. 저기 벌판에서 무언가 움직입니다. 여우가 뚫어지게 바라봅니다. 다른 여우입니다. (37∼38쪽)



  사라진 들짐승이 다시 나타나기는 어렵습니다. 휴전선이라는 쇠가시그물이 없다면, 한국에서 북녘에 있을 여우가 남녘으로도 자리를 옮길 수 있을 테지만, 북녘도 남녘도 이제는 그리 사랑스러운 숲이나 들은 못 된다고 느낍니다. 도시는 자꾸 커지고, 새로운 도시는 자꾸 생기지만, 호젓한 시골이나 짙푸른 숲은 좀처럼 늘어나지 못합니다. 조용하거나 정갈하던 숲에 온갖 송전탑이랑 고속도로가 자꾸 들어설 뿐입니다.


  앞으로 이 나라 아이들은 그림책이나 ‘외국 사진책’에서만, 또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서만 여우를 만나야 합니다. 여우가 들려주는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고, 여우하고 얽힌 이야기를 새로 지을 수 없으며, 여우가 깃들 만한 너른 숲을 마음껏 누비면서 숲노래를 듣기도 어렵습니다.


  들짐승 여우가 모두 사라진 나라에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을까요. 들짐승이 아주 빠르게 사라지거나 줄어드는 나라에는 어떤 사랑스러움이 있을까요. 그림책 《북쪽 나라 여우 이야기》가 ‘그림책 이야기’를 넘어서 ‘우리 삶’이 될 수 있는 날은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요. 4348.6.20.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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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변신쟁이 과학 그림동화 25
나가사와 마사코 글.그림, 권남희 옮김 / 비룡소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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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41



푸른 잎이 싱그럽고, 노란 잎이 곱다

― 나무는 변신쟁이

 나가사와 마사코 글·그림

 권남희 옮김

 비룡소 펴냄, 2011.4.29.



  마루문을 열고 마당에 내려서니, 다섯 살 작은아이가 아버지를 부릅니다. “어디 가?” “응? 우리 나무한테.” “그래?” 마당에 서서 후박나무와 동백나무와 초피나무를 바라봅니다. 두 팔을 치켜들면서 춤을 추듯이 뒤꼍으로 올라갑니다. 감나무와 무화과나무가 먼저 반기고, 모과나무와 매화나무가 곁에서 한들거립니다. 바람이 후 불면서 짙푸른 나뭇잎이 찰랑거립니다. 바람 따라 나뭇잎이 찰랑이는 소리는 마치 바닷물이 찰랑이는 소리와 같습니다.


  풀숲을 헤치면서 뒤꼍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작은아이가 세발자전거를 밀면서 올라옵니다. 작은아이는 세발자전거를 밀면서 풀숲을 헤칩니다. “나무가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니? 나무가 우리더러 시원한 바람을 쐬라고 얘기하네.” 여름이 무르익으면서 나무그늘은 더욱 시원하면서 싱그럽습니다. 여름이 깊어갈수록 나뭇잎은 더욱 짙푸르게 거듭날 테고, 우리는 나뭇잎이 베푸는 바람을 더 반가이 맞아들입니다.


어느 따뜻한 봄날이었어요. 작은 나무가 큰 나무를 올려다보며 말했어요. “할아버지는 나뭇잎이 조그마하네요.” “으응, 그렇지. 아직은 작단다.” (2쪽)



  일본에서 “푸른 잎이랑 노란 잎”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그림책이 2011년에 《나무는 변신쟁이》(비룡소)라는 이름을 달고 나왔습니다. 다른 많은 그림책은 왼쪽이나 오른쪽에서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넘기는 얼거리인데, 《나무는 변신쟁이》는 위로 들추면서 넘기는 얼거리입니다.




여름이 되었어요. 해님은 반짝반짝, 바람은 솨솨 쏴쏴. 큰 나무가 사락사락 흔들려요. (6쪽)



  그림책 《나무는 변신쟁이》를 보면, 두 그루 나무가 나옵니다. 한 그루는 커다랗고, 다른 한 그루는 조그맣습니다. 한 그루는 봄날에 아직 잎이 돋지 않고 앙상한 가지요, 다른 한 그루는 봄날에 짙푸른 잎이 가득한 나무입니다.


  여름이 되니, 커다란 나무는 온통 짙푸른 잎이 물결을 칩니다. 바람 따라 푸른 잎이 나풀나풀 사락사락 춤을 춥니다. 커다란 나무가 여름에 드리우는 그늘은 대단히 시원합니다. 한낮에도 큰나무 그늘에 앉거나 서거나 누우면 몹시 시원하지요. 숲이나 골짜기에서 나무그늘에 깃들면, 시원하다 못해 으슬으슬 춥기까지 합니다.


  나무그늘이란 참으로 놀랍지요. 햇볕이 아무리 쨍쨍 내리쬐더라도 그늘 밑에서는 ‘딴 나라’입니다. 비가 거세게 몰아쳐도 큰나무 밑에 서면 이럭저럭 비를 그을 만합니다.




나뭇잎이 차츰 거세졌어요. “할아버지, 나뭇잎들이 팔랑팔랑 춤추며 떨어져요. 우와, 제가 노란 모자를 썼네요.” “오냐, 아주 잘 어울리는구나.” (13쪽)



  그림책에 나오는 나무 두 그루 가운데 하나는 가을에 “노란 잎”으로 거듭납니다. 다른 한 그루는 봄에도 가을에도, 또 여름에도 겨울에도 언제나 “푸른 잎”입니다. 그림책을 보는 아이들도 이쯤이면 한 그루가 어떤 나무인지 어림할 수 있습니다. 시골에서는 그리 흔하지 않지만, 도시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가을 노란 잎” 나무는 바로 은행나무예요.


  그러면, 다른 한 그루는 어떤 나무일까요? 다른 한 그루는 큰나무 곁에서 빙그레 웃으면서 수수께끼를 내듯이 속삭입니다. 아직 가르쳐 줄 수 없는 기쁜 일이 겨울에 작은나무한테 찾아옵니다. 큰나무는 이제 겨울잠을 잘 무렵이지만, 작은나무는 겨울을 맞이해서 한껏 눈부시게 거듭나려고 합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어요. 날씨가 차츰 더 추워졌어요. “오호, 꼬마야. 네 얼굴을 보아하니 무슨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구나?” “아직은 비밀이에요. 우후후.” (16쪽)



  그림책에 나오는 다른 한 그루는 동백나무입니다. 그래서 한겨울부터 꽃을 터뜨립니다. 하얗게 소복소복 내리는 눈을 가득 맞으면서도 새빨간 꽃을 곱게 터뜨려요. 우람하게 커다란 은행나무는 어리고 작은 동백나무가 한겨울에 빨간 꽃을 피운 모습을 기쁜 웃음으로 바라보면서 잠이 듭니다. 작은 동백나무는 한겨울에도 씩씩하고 튼튼하게 새하고 노래합니다. 겨울잠을 자지 않는 멧새를 부릅니다. 철 따라 따순 고장으로 떠나지 않고 마을이나 숲에 남는 텃새를 부릅니다. 새들더러 동백꽃 꿀을 먹으라고 부릅니다.


  “노란 잎”이 가을에 눈부신 은행나무는 노랗게 피어나는 노래를 들려줍니다. “푸른 잎”이 네 철 고스란히 어여쁜 동백나무는 한겨울에 빨갛게 피어나는 노래를 베풉니다. 두 나무는 사이좋게 숲을 이룹니다. 두 나무 둘레에서 수많은 목숨이 아름답게 삶을 짓습니다.


  온갖 나무가 어우러져서 숲과 들과 마을과 보금자리가 아름답습니다. 갖가지 나무가 함께 자라면서 숲에도 들에도 마을에도 보금자리에도 사랑스러운 노래가 흐릅니다. 나무가 있어서 푸른 바람이 붑니다. 나뭇잎이 노랗게 바뀌면서 노란 바람이 붑니다. 나무에서 빨간 꽃이 소담스레 피면서 빨간 바람이 붑니다. 그리고, 겨우내 흰눈을 소복소복 머리에 이면서 하얀 바람이 붑니다. 나무에서 비롯하는 바람을 먹으면서 다 같이 싱그럽게 깨어납니다. 4348.6.16.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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