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돼지 난 책읽기가 좋아
아놀드 로벨 글, 그림, 엄혜숙 옮김 / 비룡소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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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35



진흙탕이 없는 도시에 간 돼지는

― 꼬마 돼지

 아놀드 로벨 글·그림

 엄혜숙 옮김

 비룡소 펴냄, 1997.5.20.



  아놀드 로벨 님이 빚은 조그마한 그림책 《꼬마 돼지》(비룡소,1997)를 읽습니다. 꼬마 돼지는 시골집에서 늘 사랑받으면서 지냅니다. 그런데 시골집에서 꼬마 돼지를 아끼는 두 사람 가운데 농부는 돼지가 진흙탕에서 놀도록 해 주고, 농부 아내는 돼지가 놀던 진흙탕이 지저분하다면서 없앱니다.


  꼬마 돼지는 언제나 즐겁게 놀던 진흙탕이 사라지니 ‘살맛’이 사라집니다. 이 시골집을 떠나겠노라 다짐합니다. 진흙탕이 있는 곳으로 가겠노라 생각합니다.



.. 농부와 농부 아내는 꼬마 돼지를 사랑했어요. “우리는 네가 세상에서 제일 가는 돼지라고 생각한단다.” 하고 두 사람은 말하곤 했지요 ..  (9쪽)



  돼지한테서 진흙탕을 빼앗는 일은 삶을 몽땅 빼앗는 일하고 같다고 할 만합니다. 돼지로서는 진흙탕 없는 보금자리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즐거움을 빼앗긴 채 지내야 한다면, 돼지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림책 《꼬마 돼지》에서 농부 아내는 왜 돼지한테 물어 보지 않았을까요. 꼬마 돼지가 날마다 진흙탕에서 노는 줄 안다면 진흙탕을 섣불리 없애지 않았을 텐데, 꼬마 돼지가 ‘사는 보람’을 어떻게 누리는가를 왜 헤아리려 하지 않았을까요.


  가만히 생각하면, 돼지한테서 진흙탕을 빼앗는 일이란, 나무한테서 흙땅을 빼앗는 일하고 같다고 할 만합니다. 돼지는 시멘트바닥에서 살 수 없고, 나무는 시멘트바닥에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도시 한복판이라면 진흙도 뻘흙도 찰흙도 없습니다. 도시 한복판은 자동차가 달리기에 좋은 길바닥이요, 구두를 신고 또박또박 걸어다니는 길바닥입니다. 그래서 돼지는 도시에서 살 수 없습니다. 진흙탕이 있는 시골에서만 삽니다.



.. 농부 아내는 돼지우리로 왔어요. “맙소사! 여기가 가장 지저분하구나.” 농부 아내는 소리를 질렀어요. 그래서 농부 아내는 돼지우리를 치우고, 꼬마 돼지를 깨끗이 목욕시켰어요 ..  (16∼17쪽)



  진흙탕은 지저분한 곳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림책에서 농부 아내는 진흙탕은 ‘지저분한 곳’이라 여겼고, 꼬마 돼지는 이 말을 고스란히 따릅니다. 집을 떠난 꼬마 돼지는 ‘지저분한 바람이 부는 도시’를 보고는 ‘저 지저분한 곳’에 틀림없이 진흙탕이 있으리라 여깁니다.


  도시에는 진흙탕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꼬마 돼지는 도시에서 어떤 일을 겪을까요? 꼬마 돼지가 도시에서 진흙탕이라고 여겨서 뛰어든 곳은 어떤 곳일까요?


  어느 모로 보자면, 그림책 《꼬마 돼지》는 살짝 에둘러서 도시 문명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시는 돼지가 살기에 알맞지 않은 곳입니다. 도시는 돼지뿐 아니라, 소도 닭도 살기에 알맞지 않은 곳입니다. 도시는 토끼나 노루나 사슴이 살 수 없는 곳이요, 도시는 범이나 늑대나 여우나 사자가 살 수 없는 곳입니다. 도시는 코끼리도 기린도 살 수 없는 곳이며, 두더지나 고슴도치도 살 수 없는 곳입니다. 더군다나 도시는 나무 한 그루가 느긋하게 뿌리를 내리거나 가지를 뻗을 수 없는 곳입니다. 풀 한 포기도 섣불리 씨앗을 드리울 수 없는 데가 도시입니다.



.. 길 맨 끝에는 커다란 도시가 있었어요. “여기는 공기조차 지저분하구나. 보드랍고 기분 좋은 진흙탕이 가까운 데 분명히 있을 거야.” 하고 꼬마 돼지는 말했어요 ..  (34쪽)



  도시에서는 사람들만 삽니다. 사람들만 왁자지껄하게 몰려서 사는 도시에서 사람들은 적잖이 외롭다거나 쓸쓸하다고 여깁니다. 다른 모든 짐승과 풀과 나무가 살 수 없도록 꾸민 도시에서, 오히려 귀염둥이 짐승을 집에 두려고 합니다. 개하고 고양이는 그저 개하고 고양이이지만, 도시에서는 집개와 집고양이가 됩니다.


  모든 짐승을 모조리 몰아낸 도시에서 경제성장이나 문명사회를 이룹니다. 도시에는 정치와 교육과 예술이 있습니다. 도시에는 관공서와 학교와 공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도시에서는 무엇보다도 나락 한 톨이 나지 않고, 딸기 한 알이나 파 한 뿌리도 자라기 어렵습니다. 도시에는 돈이 있으나 풀도 나무도 없고, 새도 벌도 나비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도시에는 논이나 밭이나 들이나 숲이 없으니까요.



.. 농장으로 들어서는 바로 그때,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비가 쏟아지고 또 쏟아졌지요. 농부가 말했어요. “봐라! 저기 돼지우리에 진흙탕이 새로 생겼구나.” 그러자 농부 아내가 말했어요. “내가 약속하지. 다시는 진흙탕을 치우지 않으마.” ..  (59∼60쪽)



  돼지가 살 곳은 시골입니다. 진흙탕이 있는 시골이 돼지한테 살가운 보금자리입니다. 숲바람이 푸르게 불고, 온갖 새와 풀벌레가 노래하는 시골이 돼지한테 기쁜 삶터입니다.


  그러면, 사람한테는 어떤 곳이 보금자리나 삶터로 아름답다고 할 만할까 궁금합니다. 사람은 어느 곳에 보금자리를 두어야 즐겁게 삶을 노래할 만할까 궁금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삶자리를 어떻게 일구어야 사랑스레 어깨동무하는 하루를 지을 만할까 궁금합니다.


  따스한 마음이 피어나는 곳이 즐거운 보금자리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너른 사랑이 샘솟는 곳이 기쁜 삶터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서로 아끼면서 돌볼 수 있는 터전이 아름다운 삶자리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서로서로 아끼고 도우며 헤아리는 하루가 될 때에 삶이 즐겁습니다. 어디에서 살든 사람하고 다른 숱한 목숨이 곱게 어우러지는 숲이 된다면 우리는 모두 따스한 사랑을 가꾸는 넋이 되리라 봅니다.


  진흙탕이 없는 도시로 간 돼지는, 진흙탕이 있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즐거움을 찾아서, 기쁨과 노래와 웃음을 찾아서, 따스한 사랑을 찾아서 나는 내 보금자리로 갑니다. 4348.5.28.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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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모자 꼬마 눈사람 꼬꼬마 도서관 3
오시마 다에코 지음, 육은숙 옮김 / 학은미디어(구 학원미디어)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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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34



숲동무 눈사람하고 놀자

― 빨간 모자 꼬마 눈사람

 오시마 다에코 글

 가와카미 다카코 그림

 육은숙 옮김

 학은미디어 펴냄, 2006.5.5.



  드넓게 우거진 숲이 아름답습니다. 조그맣더라도 사뿐사뿐 거닐면서 그윽하며 짙푸른 풀내음을 맡을 수 있는 숲이 사랑스럽습니다. 숲에서 자라는 나무는 우리 몸을 살찌우는 푸른 바람을 베풉니다. 숲에서 돋는 작은 풀과 여린 꽃은 우리 마음을 북돋우는 맑은 숨결을 베풉니다.


  풀 한 포기는 나물이 되니 풀밥입니다. 풀잎과 나뭇잎이 내뿜는 바람은 큼큼 들이켜면서 싱그러운 숨결로 거듭나니 바람밥입니다. 숨을 쉬며 목숨을 잇는 사람인 만큼,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 보금자리는 숲에 깃들어야 아름다우리라 느낍니다. 시골도 도시도 모두 숲으로 둘러싸인 삶터일 때에 사랑스러우리라 생각합니다.



.. 눈은 점심때가 지나서야 그쳤어요. 단비와 피피는 좋아라 하고 집 뒤 숲으로 달려갔어요. 엄마가 걱정스런 얼굴로 소리치셨어요. “조금만 놀다 와야 한다!” ..  (5쪽)




  오시마 다에코 님이 글을 쓰고, 가와카미 다카코 님이 그림을 그린 《빨간 모자 꼬마 눈사람》(학은미디어,2006)을 읽습니다. 이 그림책은 한겨울에 눈이 소복히 내린 날, 아이가 혼자 숲으로 가서 눈놀이를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이는 대여섯 살이나 예닐곱 살 즈음이라고 할 만한데, 동무가 곁에 없어도 혼자 씩씩하게 놉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함께 따라가지 않아도 그야말로 홀로 야무지게 놉니다.


  그림책이라 하지만, 아이는 숲에 거침없이 들어갑니다. 못 갈 일이란 없겠지요. 숲에 무섭거나 두려운 것이 있을 까닭이 없으니까요. 숲은 그저 숲일 뿐, 사람한테 무섭거나 두려운 대목은 없습니다.


  영화라든지 책이라든지 방송에서는 ‘사람 없는 숲’에서 괴물이 나온다거나 도깨비가 튀어나온다거나 하고 말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숲에는 괴물이 없습니다. 도깨비가 있다 하더라도 사람을 괴롭히거나 못살게 굴지 않습니다. 숲에는 그저 숲동무가 있고 숲님이 있습니다.



.. 이번에는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는 작은 눈사람을 만들었어요. 눈은 새알 초콜릿, 입은 작은 나뭇가지! 피피가 빨간 꽃을 물고 왔어요. “눈사람 머리에 씌워 줘. 멍 멍!” ..  (11쪽)




  그림책 《빨간 모자 꼬마 눈사람》에 나오는 아이는 제 작은 손을 놀려서 조그마한 눈사람을 빚습니다. 아이 손을 거쳐서 새로운 몸을 얻은 ‘꼬마 눈사람’은 이윽고 기지개를 켜면서 깨어납니다. ‘숲아이’가 ‘눈아이’를 깨웠으니까요.


  눈사람을 빚은 숲아이는 놀라지 않습니다. 눈아이가 팔이랑 다리도 빚어 달라고 하니, 선선히 팔이랑 다리도 빚어서 붙여 줍니다. 숲아이는 눈아이하고 함께 놉니다. 눈밭에서 함께 썰매를 달리고, 눈으로 과자를 잔뜩 빚어 주어서 눈아이하고 샛밥을 먹습니다.



.. 꼬마 눈사람이 말했어요. “나한테 팔이랑 다리를 만들어 줘! 나도 달리고 싶어.” 단비는 눈으로 튼튼한 팔과 다리를 만들어 주었어요. “이제 됐니?” ..  (18쪽)



  아무리 어린 꼬마라 하더라도 밥을 빚을 수 있습니다. 여느 어른들처럼 불을 써서 밥을 끓이거나 빵을 굽지는 못하지만, 아이들은 ‘꿈으로 짓는’ 밥을 늘 마련합니다. 여느 눈으로는 ‘아이가 지은 밥’을 알아볼 수 없지만, 마음을 열고 바라보면 ‘아이가 멋지게 지은 밥’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여느 눈으로는 빈손만 보일 터이나, 마음을 열고 바라볼 적에는 두 손 가득 넘치는 ‘맛난 밥’을 알아보면서 냠냠짭짭 고맙게 나누어 먹습니다.


  아이들은 소꿉놀이를 하면서 배불러요. 마음이 부릅니다. 마음이 넉넉합니다. 기쁘게 놀면서 기쁨을 스스로 지어서 먹고, 웃으면서 노래하는 동안 웃음과 노래를 마음밥으로 잔뜩 먹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실컷 논 아이는 ‘놀이밥’이랑 ‘마음밥’을 넉넉히 먹었기에 별이 돋는 밤에 깊이 잠듭니다. 아침부터 저녁 사이에 제대로 놀지 못한 아이는 놀이밥도 마음밥도 제대로 못 먹은 탓에 자꾸 미적거리거나 칭얼거리면서 ‘놀고 싶다’고 투정을 부리기 마련입니다.




.. 그날 밤, 단비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창 밖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어요. 하늘 가득 별이 반짝거리고 있었어요. ‘지금 꼬마 눈사람은 뭐 하고 있을까? 내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함께 놀아야지.’ ..  (29쪽)



  그림책에 나오는 숲아이처럼, 이 땅 모든 아이들이 숲살이를 누려서, 집 둘레에 있는 아름드리 숲에서 숲놀이를 즐길 수 있으면 참으로 아름다웁겠다고 생각합니다. 겨울에는 눈밭에서 구르고, 여름에는 풀밭에서 구릅니다. 가을에는 풀열매랑 나무열매를 즐기고, 봄에는 풀꽃이랑 나무꽃을 즐깁니다.


  아이들은 한 해 내내 놀면서 자랍니다. 아이들은 하루 내내 놀면서 큽니다. 숲이 바로 배움터입니다. 들이 바로 배움자리입니다. 냇물과 바다가 바로 배움마당입니다. 하늘과 흙과 풀과 나무가 모두 배움벗입니다. 바람은 언제나 배움노래가 되어 곱게 흐릅니다. 하늘숨을 마시는 아이는 ‘하늘아이’가 되어 너르고 씩씩한 마음으로 자랍니다. 하늘숨을 마실 수 있는 어른이라면, 누구나 ‘하늘어른(하늘사람)’이 되어 너르면서 착한 마음을 가꿀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4348.5.23.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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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처럼 2015-05-24 00:35   좋아요 0 | URL
일이 있어 하루종일 함께 있지 못해 들어와 아이를 재우려니 놀자고 투정부리고 안자 억지로 재웠지요. 놀이밥과 마음밥을 제대로 못 먹어서 그랬군요. 도서관 터 문제는 잘 해결되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멀리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

숲노래 2015-05-24 05:29   좋아요 0 | URL
도서관은 아직 그대로 있습니다.
월요일에 고흥군수님한테 편지를 쓸 생각이에요.
아이들은 시간에 맞춰서 재우지 말고
실컷 놀아서 곯아떨어질 때에 재워야지 싶습니다~
 
프리다 문학동네 세계 인물 그림책 2
아나 후앙 그림, 조나 윈터 글, 박미나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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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33



사랑을 찾아 삶을 지으며 그림을 그리다

― 프리다

 조나 윈터 글

 아나 후안 그림

 박미나 옮김

 문학동네어린이 펴냄, 2002.12.24.



  조나 윈터 님이 글을 쓰고, 아나 후안 님이 그림을 그린 《프리다》(문학동네어린이,2002)를 읽습니다. ‘프리다 칼로’라고 하는 분이 그림을 어떻게 그리면서 스스로 삶을 가꾸었나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림책입니다.


  프리다 칼로 님은 멕시코에서 1907년에 태어나서 1954년에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어릴 적부터 여러 사고를 치르면서 몸이 아파야 했고, 함께 짝을 지은 사내가 보여준 몸짓 때문에 마음이 아파야 했다고 합니다. 수없이 수술을 하면서 몸을 깎는 아픔을 받아들여야 했고, 이녁을 둘러싼 사람들을 마주하는 슬픔과 기쁨을 오롯이 맞아들여야 했다고 합니다.


  곰곰이 살피면, 프리다 칼로 님은 ‘사랑을 찾는 삶’이었구나 싶습니다. 몸을 내려놓고 마음까지 내려놓으면서, 오직 사랑 하나를 바라보면서 삶을 짓지 않고서는, 하루조차 버틸 수 없는 나날이었으리라 싶습니다.



.. 프리다 집은 파란색이지요. 코요아칸이란 마을에 있어요 ..  (3쪽)





  누가 나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누가 나를 좋아하니까 내가 더 돋보이지 않고, 누가 나를 싫어하니까 내가 덜떨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언제나 나 그대로 있습니다.


  내가 아이들을 좋아한대서 아이들이 더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아이들을 싫어한대서 아이들이 덜떨어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아이답게 그대로 아름다웁고 사랑스러운 숨결입니다.


  좋아함과 싫어함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 언제나 마음앓이를 합니다. 누가 나를 좋아해 주기를 바라거나 내가 누군가를 싫어한다면, 언제나 마음이 다치거나 힘들거나 괴롭습니다.


  내가 너를 좋아할 까닭이 없고, 네가 나를 싫어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내가 나를 사랑하면서 만나면 됩니다. 내가 나를 스스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서로 아름답게 만나지 못합니다. 좋다거나 싫다고 하는 느낌에 끄달리지 않으면서 고요히 흐르는 사랑이 될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삶으로 거듭납니다.




.. 프리다는 그림 그리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어요. 그림을 그리면 하나도 슬프지 않았지요 ..  (9쪽)



  프리다 칼로 님은 스스로 그림을 배웠다고 합니다. 뛰어난 스승이나 놀라운 스승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학교나 강의나 수업이나 책으로 그림을 배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먼먼 옛날부터 멕시코라는 나라에서 흐른 이야기를 가슴으로 받아들여서 기쁘게 그림으로 그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프리다 칼로 님이 보여주는 그림은 ‘멕시코 이야기 그림’입니다. ‘멕시코 민화’라고도 할 만합니다. 프리다 칼로 님이 보여주는 그림은 ‘현대 회화’도 ‘초현실주의’도 아닙니다. 그저 ‘사람 이야기’입니다.


  그러고 보면, 한겨레가 예부터 그린 ‘민화’라고 하는 그림도 ‘사람 이야기’입니다. 여느 시골자락에서 시골살이를 일구면서 누린 그림입니다. 프리다 칼로 님이 빚은 그림도 멕스코 여느 시골자락에서 시골살이를 일구면서 손수 밥과 집과 옷을 지은 사람들이 빛낸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땅을 일구는 시골사람입니다. 바람을 마시고, 꽃과 나무를 아끼면서 땅을 가꾸는 시골사람입니다. 비와 눈을 노래하고, 벼락과 천둥을 바라보는 시골사람입니다. 정치나 경제를 하는 권력자가 아니라, 전쟁무기도 군대도 모르는 채, 제 땅을 제 손으로 일구면서 삶을 노래하고 웃음과 춤으로 두레를 엮은 수수한 시골사람입니다.




.. 사고가 난 뒤 프리다는 달라졌어요. 지팡이를 짚고 걸어야 했고, 늘 몸이 아팠어요 ..  (21쪽)



  우리는 누구나 천재이면서 천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나 오직 하나뿐인 목숨을 사랑으로 받아서 태어납니다. 하늘숨을 마시는 넋으로 이 땅에 태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든 다 될 수 있고,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정규 학교를 마치고 회사에 들어가서 돈을 벌어야 ‘먹고살’ 수 있다고 여기는데, 지난날에는 아무도 학교를 안 다녔으나, 모든 사람이 손수 땅을 부치면서 밥을 얻을 줄 알았고, 풀줄기에서 실을 뽑아서 옷을 지을 줄 알았으며, 나무를 베고 흙과 돌과 짚을 얻어서 집을 지을 줄 알았습니다. 아무런 ‘학교교육’이 없이, 지난날 모든 사람이 손수 밥과 집과 옷을 장만하며 살았어요. 게다가, 지난날에는 책 한 권이 없어도 ‘살면서 쓸 모든 말’을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았습니다. 오늘날에는 한국말사전이나 식물도감이나 곤충도감이나 나무도감 같은 책을 옆에 두어야 ‘풀이름’이나 ‘벌레이름’을 알 만하지만, 지난날에는 누구나 풀과 벌레와 물고기와 새와 숲짐승과 나무 이름을 모조리 알았어요.


  그러니, 예부터 우리는 누구나 ‘천재’였고, 오늘날에는 스스로 천재인 줄 잊으면서 학교교육만 받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내 삶을 그림으로 그리는 천재’로 살 수 있으나, 정작 오늘날 사람들이 하는 일이란 ‘학교에서 미술교육을 받은 틀에 따라서 남한테 보여주려는 예술작품 만들기’입니다.




.. 프리다는 다른 누구도 흉내내지 않았어요 ..  (27쪽)



  그림책 《프리다》를 천천히 읽습니다. ‘자유’를 뜻한다는 ‘프리다’를 어버이한테서 선물처럼 이름으로 받은 프리다 칼로 님은 이녁 그림에 ‘사람으로 살아가는 자유’를 담았구나 하고 느낍니다. 멕시코라고 하는 나라에서 태어나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랑과 자유’가 바로 프리다 칼로 님이 그림으로 보여주고 싶은 노래요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참말 “프리다는 다른 누구도 흉내내지 않았”습니다. 흉내를 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프리다 칼로 님은 오직 이녁 마음속을 바라보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 내 모습을 고스란히 바라보면 됩니다.


  프리다 칼로 님은 이녁 스스로 사랑한 ‘내 모습’이자 ‘멕시코사람 이야기’를 그림으로 빚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우리 스스로 사랑할 ‘내 모습’이자 ‘한국사람 이야기’를 그림으로 빚고 글로 쓰며 사진으로 찍으면 됩니다.


  사랑을 찾아 삶을 지으며 그림을 그립니다. 사랑을 찾아 살림을 꾸리며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사랑을 찾아 보금자리를 가꾸며 노래를 부릅니다. 4348.5.20.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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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나와 피아노 지식 다다익선 4
마르코 짐자 지음, 빈프리트 오프게누르트 그림, 배정희 옮김, 엄태국 / 비룡소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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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31



아이는 모두 노래를 사랑하는 숨결

― 티나와 피아노

 마르코 짐자 글

 빈프리트 오프게누르트 그림

 배정희 옮김

 비룡소 펴냄, 2006.6.24.



  아이는 모두 노래를 사랑합니다. 어른이 노래를 들려주면 아주 좋아하고, 아이 스스로 노래를 즐겁게 부릅니다. 어른이 가르치는 노래를 기쁘게 배우고, 아이 나름대로 새로운 가락을 짓고 노랫말을 붙여서 부릅니다.


  노래를 사랑하지 않는 아이는 없습니다. 아이는 자동차 구르는 소리도 노랫소리로 듣고, 구름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나뭇잎이 바람에 팔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까르르 웃습니다.


  아이는 두 발을 콩콩 바닥에 굴리면서 노랫가락을 짓습니다. 어른이라면 두 손에 채를 집어서 북을 치겠지만, 아이는 온몸을 악기로 삼아서 땅을 구르고 손뼉을 치며 눈부시게 춤을 춥니다.




.. 삼촌은 티나가 피아노를 배우려면 우선 피아노를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티나에게 아름다운 곡들을 피아노로 자주 연주해 주었지요 ..  (2쪽)



  마르코 짐자 님이 글을 쓰고, 빈프리트 오프게누르트 님이 그림을 그린 《티나와 피아노》(비룡소,2006)를 읽습니다. ‘티나’ 이야기는 《티나와 오케스트라》하고 《티나와 리코더》가 함께 나왔습니다. 티나라는 아이는 오케스트라 연주자이자 피아노를 치는 삼촌한테서 피아노를 배우고, 오케스트라 무대를 만나며, 리코더를 어떻게 아끼면서 즐기는가 하는 대목을 함께 배웁니다. 그림책을 쓰고 그린 두 사람은 아이들이 악기를 따사로이 아끼는 마음결로 ‘노래를 사랑하는 숨결’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단한 연주자가 배우거나 선보이는 노래가 아니고, 예술가로 자라야 할 아이들이 아니라, 삶을 밝히는 노래가 되면서, 아이들 가슴에 맑은 이야기가 흐르기를 바랍니다.




.. 집에 돌아온 티나는 첫 시간에 배운 것을 엄마에게 모두 보여주었어요. 이제 가락짓기 숙제를 해야 해요. 티나는 아주 천천히, 한 음 한 음씩 피아노를 치며 가락을 만들었어요. 다 만든 뒤에는 처음부터 다시 쳐 보았지요 ..  (7쪽)



  아이가 피아노를 배워야 한다면 ‘피아노 연주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노래를 사랑하는 마음결을 한결같이 건사하면서 곱게 다스리도록 북돋우려는 뜻에서 피아노를 가르칩니다. 아이가 어릴 적에 골프나 테니스나 바둑을 가르쳐서 ‘신동’이 되도록 할 까닭이 없어요. 아이는 1등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대회에 나가서 으뜸상을 거머쥐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언제나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켜면서 마음을 환하고 맑게 가꿀 수 있으면 됩니다.


  이렇게 노래를 즐기고 춤을 누리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아이는 튼튼하게 자라요. 튼튼하게 자라는 아이는 씩씩한 어른이 되고, 씩씩한 어른은 고운 사랑으로 짝을 찾고 곁님을 사귀면서 아이를 새롭게 낳아, 다시금 사랑으로 보금자리를 가꿉니다.




.. 티나는 두 번째 곡을 치기 시작했어요. 티나의 피아노 소리는 꽤 듣기 좋아졌어요. 그런데 갑자기 소리가 한층 더 풍부하게 울렸어요. 테오 삼촌이 피아노를 같이 치기 시작한 거예요. 삼촌은 티나가 무슨 곡을 치고 있는지 몰랐지만, 그 곡에 어울리는 가락을 지어내서 연주했어요 ..  (17쪽)



  노래가 있는 삶과 노래가 없는 삶을 헤아려 봅니다. 노래가 있는 삶에는 웃음이 있습니다. 노래가 없는 삶에는 웃음이 없습니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똑같이 되풀이되는 노래가 아니라, 일하는 사람 스스로 기쁘게 부르는 노래일 때에 웃음이 있고, 이야기가 자랍니다.


  예부터 지구별 어디에서나 누구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어요. 들에서 들일을 하며 들노래를 부릅니다. 들노래를 부르며 일하다가 허리를 펴면서 쉬고, 허리를 펴면서 쉴 적에 샛밥을 먹고는 덩실덩실 어깨춤을 춥니다.


  누가 가르쳐 준 춤이 아닙니다. 학교나 학원에 다녀서 익힌 노래가 아닙니다. 들녘에서 들을 가꾸면서 들바람을 쐬는 사이에 저절로 익힌 춤입니다. 들판에서 들을 품으면서 들내음을 맡는 동안 시나브로 배운 노래입니다.


  일노래(노동요, 전래민요)는 모두 들노래입니다. 들노래는 바람노래입니다. 바람노래는 하늘노래입니다. 하늘노래는 삶노래입니다. 삶노래는 사랑노래입니다. 일하며 부르는 일노래는 집에서도 집노래가 되고, 밥을 짓다가 바느질을 하다가 빨래를 하다가 아기한테 젖을 물리다가 물레를 잣다가 절구를 돌리다가 흥얼흥얼 노래가 흐릅니다. 아이들은 어버이 곁에서 노래를 들으면서 노래를 익혔고, 아이들은 저희끼리 고샅이나 골목에서 온갖 놀이를 하면서 새롭게 노래를 짓습니다.




.. “오늘 정말 잘했어.” “아이, 중간에 실수도 했는걸요!” “그럴 수도 있지.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열심히만 한다면, 너는 앞으로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될 거야.” ..  (24쪽)



  그림책 《티나와 피아노》를 새롭게 읽습니다. 아이들하고 나란히 읽습니다. 우리 집에 놓은 피아노를 떠올리면서 읽습니다. 두멧시골에 깃든 우리 집 아이들은 학원도 학교도 다니지 않습니다. 집에는 피아노 교본을 두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오직 저희 마음결과 손놀림에 따라 가락을 스스로 느껴서 손가락을 움직입니다. 어떤 틀에 맞추어서 빼어난 솜씨를 보여주려는 피아노가 아니라, 아이들 나름대로 즐겁게 건반을 두들기면서 스스로 찾아서 나누는 노래가 흐르는 피아노가 됩니다.


  아이는 모두 노래를 사랑하는 숨결입니다. 나는 오늘 이곳에 어른으로 있습니다. 나도 예전에 아이였을 적에 노래를 사랑하는 숨결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학교를 열두 해 다니면서 음악 수업을 받을 적에는 ‘노래바보’라면서 늘 놀림을 받으며 주눅이 들었는데, 오늘 이 시골집에서 아이들하고 날마다 노래를 부르면서 노니, 아이들은 “아버지 노래 잘 하는데?” 하면서 “노래 더 불러 주셔요!” 하고 종알종알 매달립니다.


  아이도 어른도 누구나 노래를 사랑하는 넋입니다. 노래바보란 없습니다. 누구나 일하거나 놀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밥을 지으면서 노래를 하고, 자전거를 달리면서 노래를 합니다. 길을 걸으면서 노래를 하고, 책을 읽다가도, 잠자리에 누우면서도, 늘 즐겁게 노래를 합니다. 그림책 《티나와 피아노》를 읽는 지구별 모든 아이와 어른이 가슴속에 ‘사랑 어린 바람가락’을 품으면서 환하게 웃을 수 있기를 빕니다. 4348.5.18.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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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입맛을 사로잡은 양념 고추 철수와영희 어린이 인문생태그림책 3
노정임 지음, 안경자 그림, 이정모 감수, 바람하늘지기 / 철수와영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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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30



하얀 고추꽃이 빨간 열매가 된다

우리 입맛을 사로잡은 양념, 고추

 바람하늘지기 기획

 노정임 글

 안경자 그림

 철수와영희 펴냄, 2015.5.15.



  찔레꽃이 오월에 눈부시도록 새하얗게 피어납니다. 찔레꽃이 지면 찔레알이 맺는데, 찔레알은 새빨갛습니다. 삼월과 사월에는 딸기꽃과 앵두꽃이 하얗게 핍니다. 눈처럼 새하얀 딸기꽃과 앵두꽃이 찬찬히 지면, 새빨간 딸기알과 앵두알이 맺습니다. 그러고 보면, 능금꽃도 하얗습니다. 하얀 꽃이 지면 빨간 알이 맺습니다. 여기에, 고추꽃도 하얀 꽃송이가 지고 나서 빨간 열매를 맺습니다.


  꽃이 필 무렵에는 꽃내음이 향긋하고, 꽃이 질 무렵에는 풀내음이 짙푸르며, 꽃이 스러져서 열매로 거듭날 무렵에는 달큼한 숨결이 반갑습니다.




.. 우리나라 채소밭에서 가장 많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고추밭이에요. 무나 마늘 같은 채소는 수천 년 전부터 먹어 왔어요. 이에 견주면 고추를 기른 역사는 아주 짧아요. 400년쯤 전부터 먹었다고 알려져 있어요 ..  (11쪽)



  노정임 님이 글을 쓰고, 안경자 님이 그림을 그린 《우리 입맛을 사로잡은 양념, 고추》(철수와영희,2015)라는 그림책을 읽습니다. ‘철수와영희 어린이 인문생태그림책’ 가운데 셋째 권으로 나온 책으로, 첫째 권은 《우리가 꼭 지켜야 할 벼》(2012)이고, 둘째 권은 《콩 농사짓는 마을에 가 볼래요?》(2013)입니다. 벼와 콩에 이어 고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곰곰이 돌아보니, 한겨레가 가장 가까이하는 ‘먹을거리’라면 아무래도 첫째가 벼요, 둘째가 콩이며, 셋째가 고추입니다. 논을 지어 나락을 거두니, 이 나락으로 쌀을 깎고 밥을 짓습니다. 밭과 논둑에는 콩을 심어서 거둡니다. 콩으로 콩밥을 짓기도 하지만, 콩으로 된장과 간장을 담고, 두부를 쑵니다. 떡을 찔 적에도 콩을 쓰고, 엿을 골 적에도 넣습니다. 벼와 콩은 한겨레가 먼먼 옛날부터 곁에 두면서 아낀 ‘풀알(풀 열매)’입니다.


  벼와 콩 다음으로 들 만한 ‘곁지기’라면 아무래도 나물입니다. 여느 풀로 나물을 삼습니다. 여느 풀로 국을 끓입니다. 여느 풀은 짐승을 먹이는 밥이 되기도 합니다. 쑥이든 냉이이든 씀바귀이든 민들레이든 소리쟁이이든 갓이든, 모두 나물로 먹습니다. 그렇지만 고추가 나물을 제칩니다. 이 땅에 들어온 발자국은 짧지만, 다른 어느 나물보다 고추가 널리 사랑받습니다.





.. 후추나 천초와는 달리 고추는 우리나라 온대 기후에서도 잘 자라고 뜰이나 밭에서 길러 먹을 수 있는 작물이라서 널리 퍼질 수 있었던 거예요. 맛도 한몫했어요 … 붉은 고추를 따자마자 바로 강한 햇볕에 널면 노랗게 타 버려요. 그래서 그늘에 2∼3일 두고 한 숨 죽은 다음에 햇볕에 말리지요..  (20, 27쪽)



  한겨레가 고추를 심어서 거둔 지는 얼마 안 됩니다. 처음 들어온 햇수를 따지면 사백 해쯤 된다고 여길 만하지만, 막상 한겨레가 두루 고추를 심어서 거둔 햇수를 치면 백 해쯤 될까 하고 헤아릴 수 있습니다.


  고추는 아주 빠르게 퍼졌고, 밥상에서 빼놓기 어려운 양념이 됩니다. 양념으로 치면 된장이랑 간장이랑 소금이 먼저 손꼽힐 테지만, 여기에 고추장이 빠질 수 없어요.


  고추는 날로도 먹고, 가루로 빻아서도 먹으며, 장으로 담가서도 먹습니다. 고추를 써서 김치를 담고, 떡볶이를 빨갛게 물들이며, 온갖 곳에 살몃살몃 깃들어 맛을 더합니다.


  벼는 논에 심습니다. 논에 심는 벼는 해마다 똑같은 자리에 심습니다. 논힘을 살리려고 한 해쯤 논을 묵히기도 하지만, 땅이 없거나 적은 시골지기라면 논을 묵히지 못하고 그대로 짓습니다. 논이든 밭이든 한 가지 씨앗만 잔뜩 심어서 기르려 하면 땅힘이 줄어듭니다. 그래서 한두 해쯤 땅을 묵혀서 온갖 씨앗이 두루 퍼지고 온갖 풀이 골고루 자라서 땅힘이 돌아오도록 합니다.


  고추를 심은 밭에 이듬해에도 고추를 잇달아 심으면 고추가 곧잘 아픕니다. 고추가 그만큼 땅힘을 많이 가져가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고추를 심은 이듬해에는 감자라든지 배추라든지 다른 남새를 심어서 땅힘을 보듬기도 합니다. 비료와 농약만으로는 땅힘을 살리지 못합니다. 비료와 농약은 오히려 땅힘을 더 줄이거나 빼앗습니다.




.. 학교에 텃밭을 새로 만들어도 집 안의 베란다에 처음 작물을 심어도 밭에는 언제나 다른 동물과 식물들이 생겨나요. 밭도 생태계라는 걸 알 수 있지요 ..  (28쪽)



  그림책 《우리 입맛을 사로잡은 양념, 고추》를 보면, 고추를 어떻게 심어서 돌보는가 하는 이야기부터, 고추로 어떤 먹을거리를 얻는가 하는 이야기에다가, 고추하고 이웃인 여러 가지 남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겨레가 고추를 즐겨먹은 흐름을 짚고, 고추와 나란히 즐긴 여러 가지 양념 이야기를 곁들입니다.


  곰곰이 보면, 고추도 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고춧잎을 톡톡 끊어서 먹습니다. 날로도 먹고 무쳐서도 먹습니다. 아기 손톱보다 작은, 그야말로 앙증맞은 고추꽃이 하얗게 필 때면 고추꽃내음을 맡고, 고추꽃빛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고추꽃이 지면서 고추알(고추 열매)이 맺습니다. 고추알은 기름하게 자랍니다.


  밭을 건사하기 어려운 도시에서는 꽃그릇에 고추를 한 포기 심어서 기르면, 아이들이 곁에서 고추 한살이를 지켜볼 수 있습니다. 작은 씨앗 한 톨에서 씩씩하게 퍼지는 숨결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 고추는 어디서나 잘 자라서, 화분에 키우는 사람들도 많아요. 여름이나 가을에 골목길을 걸을 때 한번 눈여겨보세요. 어디선가 자라고 있는 고추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  (39쪽)



  고추나 감자나 고구마나 토마토나 배추는 모두 이웃나라에서 들어왔습니다. 지구별은 커다란 마을과 같아서, 이쪽 마을(나라)에서 자라던 남새가 저쪽 마을(나라)로 살며시 퍼집니다. 천천히 퍼지기도 하고, 배에 실려 어느 날 문득 퍼지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몹시 낯설어 할 만하고, 시나브로 새로운 삶이 되어 뿌리를 내립니다.


  요즈음은 고추밭에 비닐을 씌우는 사람이 많습니다. 비닐을 씌우지 않고서는 고추를 기르기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고추밭에 짚을 까는 사람이 있으나, 애써 짚을 깔려는 사람은 드뭅니다. 고추밭을 거느리면서 농약을 안 쓰는 사람이 드뭅니다. 고추를 처음 들여온 날부터 새마을운동이 퍼지기 앞서까지는 이 땅 어디에도 농약바람이 안 불었으나, 이제는 농약이 없이는 벼도 콩도 고추도 못 기르겠노라 하고 여깁니다.


  아무래도 벌레가 먹으니 농약을 쳐야 한다고 여길 텐데, 풀잎이나 풀알에 벌레가 먹는 까닭은 ‘풀벌레가 갉아먹을 잎이나 알’이 없기 때문입니다. 풀벌레가 갉아먹을 다른 잎이나 알이 있으면 굳이 고추알이든 다른 풀알이든 갉아먹지 않습니다. 밭자락에 몇 가지 씨앗만 심고서 다른 풀은 모조리 뽑거나 베거나 약으로 죽이니, 풀벌레로서는 사람이 키우려는 남새만 갉아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풀벌레는 왜 논밭에서 함께 자라려 할까요? 풀벌레는 풀잎을 먹으면서 꽃송이도 드나들어 꽃가루받이를 해 줍니다. 조그맣게 피는 꽃에는 조그마한 풀벌레가 오락가락하면서 꽃가루받이를 하지요. 벌과 나비만 꽃가루받이를 하지 않아요. 작은 풀벌레와 개미도 꽃가루받이를 합니다. 그리고, 나비가 되자면 애벌레가 풀잎을 오랫동안 갉아먹고 자라야 해요.


  도시에도 논과 밭이 있어서 아이와 어른 누구나 논밭을 마주할 수 있으면, 어디에서나 싱그러운 바람이 불리라 생각합니다. 건물만 쑥쑥 올라가고, 자동차 둘 자리를 넓히는 데에만 마음을 쓰는 도시인데, 조그마한 땅뙈기에 씨앗을 심을 수 있다면, 집안에라도 꽃그릇이나 텃밭상자를 마련해서 기를 수 있다면, 이리하여 도시에서도 콩이나 고추를 손수 기르면서 삶과 숲과 밥과 지구별을 헤아린다면, 이웃을 한결 넓게 사랑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습니다. 잘 익은 고추알을 즐기고 빨간 고추장을 누리면서 생각을 넓힙니다. 이 맛난 먹을거리와 양념이 우리 곁에 오기까지 얼마나 기쁘게 햇볕과 바람과 빗물을 머금으면서 흙숨을 받아들였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4348.5.16.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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