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살이 일기 25] 배롱나무 곁에서
― 나무이름을 생각한다

 


  전라남도 시골마을에서 살기 앞서까지 ‘배롱나무’라는 이름은 거의 못 들었습니다. 서울이나 다른 도시에서도 ‘배롱나무’라는 이름을 쓰는 분이 제법 있지만, 으레 ‘백일홍나무’나 ‘목백일홍’이라고 말합니다. 백 날 동안 꽃을 붉게 피운다고 해서 ‘백일홍’이요, 이 백일홍이라는 꽃이 나무에서 피어나기에 ‘목백일홍’이라 해요. 그런데, 시골마을 어르신들 어느 누구도 이런 말은 안 써요. 하나같이 ‘배롱나무’라고만 하고 ‘배롱꽃’이라 합니다. 때로는 ‘간지럼나무’라고 이야기해요.


  똑같은 나무를 놓고 사람들이 쓰는 이름이 다르다 보니 처음에는 알쏭달쏭했습니다. 저마다 다른 나무를 가리키는가 하고 여겼는데, 한 해 두 해 지나며 생각하고 살피니, 다 같은 나무를 다 다른 이름으로 가리킬 뿐이었습니다.


  대학교에서 학문을 하는 분들은 어떤 이름으로 이 나무와 꽃을 가리킬까요. 서울이나 도시에서 신문·잡지·책·방송을 만드는 분들은 어떤 이름을 붙이며 글을 쓸까요. 초·중·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분은 어떤 이름으로 아이들한테 가르칠까요.


  예전에는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따뜻한 마을에서만 자랐다고 하는 배롱나무라고 하지만, 요사이는 서울까지도 이 나무가 치고 올라간다 합니다. 예전에는 감나무가 충청도를 넘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요새는 서울이나 인천 골목집에서도 감나무를 곧잘 키워요. 서울에서도 고운 꽃나무 구경하니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으나, 곰곰이 살피면 날씨가 엄청나게 무너졌다는 뜻이에요. 그나저나, 서울에서까지 배롱나무가 자랄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배롱나무’라는 이름은, 또 ‘간지럼나무’라는 이름은, 남녘에서 북녘으로 얼마나 제대로 퍼지는가 모르겠습니다. 따순 남녘 마을에서만 자라던 고운 꽃나무 가리키는 예쁜 이름을 북녘 마을에서도 살뜰히 아낄 수 있기를 빕니다. 4346.9.17.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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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이야

 


  세 살 작은아이가 여섯 살 누나를 자꾸 괴롭힌다. 큰아이가 마루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려 하니, 다른 짓 하며 놀다가 어느새 마루로 뾰로롱 와서는 크레파스 상자를 가로챈다. 요놈 보게나. 너 누나가 좋으니 누나 곁에서 알짱거리면서 이렇게 놀지? 가만히 한참 지켜보다가 작은아이한테 말한다. “보라야, 네가 쓰는 그 크레파스, 보라 것 아니고 아버지 것이야. 너, 아버지 것을 가지고 그리면서 누나하고 같이 안 그리는구나. 그 크레파스 얼른 아버지한테 줘.” 작은아이는 이 말을 듣자마자 누나를 부른다. “누나야, 같이 그리자!”


  두 아이한테는 두 아이 몫 크레파스가 있지만, 작은아이가 이래저래 몰래 씹어먹으며 많이 사라졌다. 그래서 이번에 새 크레파스를 장만했는데, 또 이렇게 하는구나 싶어, 이번에는 아예 ‘아버지 것’으로 못박는다. 그리고, 아이들이 그림을 그릴 적에 으레 아버지도 함께 그림을 그리니까, 이 아이들로서는 ‘아버지 것 새로 산 크레파스’를 곁에서 함께 빌려서 함께 쓰는 셈이 된다.


  아이들이 안 싸우게 하는 법이란 없다고 느낀다. 그런데, 가끔 이렇게 ‘누구 것’ 아닌 ‘아버지 것’ 또는 ‘어머니 것’이라 하니까, 아이들 사이에 다툼질이 1초도 안 되어 마무리되곤 한다. 4346.9.1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아빠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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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9-16 11:42   좋아요 0 | URL
ㅎㅎ 세 살이면 그럴 나이지요~그래도 넘 귀여워요!
저희집 아이들도 아주 꼬맹이였을때 종종 씹어 먹었는데..흐흐..왜 그럴까요~?^^
'아버지 것' '어머니 것'이라 말씀하시며 아이들 다툼 정리하시니~지혜로우십니다!

숲노래 2013-09-16 14:01   좋아요 0 | URL
크레파스가 아이들 잡아당기는 무엇인가 있나 봐요...
이냥저냥 아이들과 살며
문득문득 배우거나 깨닫는 이야기가 참 많아요..
 

[아버지 그림놀이] 빙글빙글 날기 (2013.9.15.)

 


  크레용을 새로 장만한다. 작은아이가 크레파스를 꽤 많이 씹어먹는 바람에 쓸 만한 빛깔이 많이 사라졌다. 서울마실 하는 김에 빛깔 많은 크레파스를 사려고 조금 큰 문방구에 들렀는데, 가게 일꾼이 크레파스라 하며 건넨 것을 시골에 돌아와서 뜯으니 크레용이다. 어쩐지 값이 비싸다 했더니 왜 크레파스 아닌 크레용을 주었을까. 아무튼, 새 크레용을 마루에 펼치고 큰아이와 작은아이와 나란히 엎드려 그림을 그린다. 아버지는 오늘 빙글빙글 춤추며 날아가는 물방울을 그린다. 이 물방울 자국을 따라 나비랑 제비랑 꽃이랑 나무랑 빗물이랑 달이랑 별을 올망졸망 집어넣는다. 물방울이 날며 남긴 발자국을 점으로 찍느라 품이 많이 들었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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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 떠나기 앞서

 


  오늘 볼일을 보러 서울에 다녀와야 한다. 어제부터 하루 집 비울 일을 곰곰이 헤아린다. 옆지기가 집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먹이거나 씻길 수 있을까 돌아보면서, 시골집에 남는 세 식구 넉넉하게 먹을 만한 여러 가지를 챙긴다. 아침 일곱 시에 마을 어귀 지나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나가야 하니, 조금 뒤 여섯 시에 밥을 지을 생각이다. 새벽 여섯 시에 밥을 지을 수 있도록 쌀은 어제 씻어서 불렸다. 여섯 시에 밥을 지으면서 오늘 아침저녁으로 먹을 만큼 카레를 하나 끓이려 한다. 카레에 넣을 것은 엊저녁에 모두 손질해 놓았다. 썰어서 볶고 끓이면 된다. 옆지기 옷과 아이들 옷은 모두 빨아서 말려 개거나 덜 마른 옷은 옷걸이에 꿰어 방에서 말린다. 큰아이가 놀면서 어지럽힌 장난감이랑 책을 치워 놓는다. 내 책 잔뜩 쌓인 방도 이렁저렁 조금은 치운다. 하루 다녀오는 길이지만, 집을 비우는 동안, 또 다녀오고 나서 이래저래 할 일이 많겠지. 오늘 서울로 가는 사이에 ‘옻칠 재료’가 택배로 집에 온다. 다음주에 여러 날 집을 비울 적에 대청마루에 한 번 바를까 싶어서 1리터들이 한 통을 장만했다. 아침에 짐을 다 꾸리면 큰아이 글씨놀이 할 적에 들여다보도록 큰아이한테 편지 한 통 써야지. 4346.9.13.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아빠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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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9-13 07:25   좋아요 0 | URL
잘 다녀 오세요~*^^*

숲노래 2013-09-15 15:12   좋아요 0 | URL
이제 막 돌아왔어요.
온몸이 쑤시고
온몸이 땀투성이 되었습니다 ^^;;

후애(厚愛) 2013-09-13 10:25   좋아요 0 | URL
저도 시간이 나면 서울 나들이 해야하는데...ㅎㅎ
잘 다녀 오세요~*^^*

숲노래 2013-09-15 15:1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언제 한번 즐겁게 나들이 다녀오셔요~~
 

아이 셋

 


  큰아이와 작은아이, 여기에 ‘큰 큰아이’까지 세 아이를 보듬으며 살림을 꾸린다. 아이 하나일 적, 아이 둘일 적, 여기에 아이 어머니가 ‘큰 큰아이’와 같이 지내느라 아이 셋일 적, 하루하루 느끼는 무게가 사뭇 다르다. 한 달에 한 번, 아니 한 해에 한 번, 아이들을 잊고 혼자서 조용히 쉬고 싶단 생각을 하지만, 막상 아이들 모두 시골집에 두고 볼일 보러 큰도시로 다녀와야 할 적이면, 자꾸자꾸 집 생각이 나고 아이들 생각이 떠오른다.


  지난 석 달 두 아이를 보듬다가 지난주부터 세 아이를 보듬는 삶으로 돌아오고 나서, 며칠 몸앓이를 한다. 몸앓이는 아직 안 가셨다. 목과 코가 아프고 머리가 어지럽다. 그렇다고, 세 아이 보듬는 아버지가 집일을 젖히지 못한다. 밥을 하고 청소를 하며 빨래를 한다. 힘을 내어 큰아이 부른 뒤 글씨놀이 시키고 그림놀이 함께 한다. 아이들 자전거에 태워 우체국에 편지 부치러 다녀온다. 서재도서관에 가서 풀을 벤다. 아이들 옷 갈아입히고 씻기고 오줌그릇 치운다. 이불을 말리고 옷을 개며 걸레질을 한다.


  내 어머니는 나와 형 두 아이를 돌본 삶이라기보다, 나와 형에다가 내 아버지까지, 이렇게 ‘아이 셋’ 돌본 삶을 꾸리셨을까. 이 나라 이 땅 모든 어머님들은 으레 ‘큰 큰아이’를 함께 돌보느라 등허리가 뻑적지근할까. 저녁에 아이들 눕혀 자장노래 부르는데 코와 목이 너무 막혀 노래를 십오분쯤 가까스로 부르고는, 작은아이한테 “보라야, 네 아버지 목이 너무 아프고 힘들어 더 못 부르다, 미안해.” 하고 말한다. 4346.9.1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아빠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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