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쿨쿨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74
다시마 세이조 글 그림 / 보림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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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른 와.”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64] 다시마 세이조, 《쿨쿨쿨》(보림,2008)

 


  밤 열두 시 반에 쉬 마렵다며 깬 아이는 새벽 세 시에 쉬를 누려고 한 번 더 깹니다. 새벽오줌 누이고 나서 잠자리에 들도록 한 다음, 아이한테 “그래, 아버지도 이제 곧 누울 테니까 먼저 들어가서 누워.” 하고 말하며 다독입니다. 두 아이 아버지는 열두 시 반에 아이와 함께 일어나 글을 씁니다. 새벽 세 시에 아이를 다시 재우고서 적잖이 아쉽다고 느낍니다. 모처럼 고요하게 누리는 이 한때를 조금 더 누리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아이가 옆에 누워 함께 자자 말하니 달리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래, 곧 갈게.” 하고 말한 뒤 이십 분 남짓 글조각을 더 붙잡습니다.


  깊은 밤, 아이는 잠들락 말락 하다가 슥슥 기어나와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얼른 와.” 한 마디 합니다. 옆에 누워 잔다면서 왜 안 오느냐 짤막하게 한 소리 합니다. 더 미적미적 할 수 없구나 싶어 글쓰기를 끝냅니다. 졸린 아이가 스르르 잠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지만, 곁에서 깊이 잘 재우고 난 다음이 아니라면, 아이가 이렇게 재촉하는 마당에, 늑장을 부릴 수 없습니다.


  아이는 아버지 품에 안깁니다. 이내 아이 스스로 아버지 무릎에 눕습니다. 무릎에 누운 아이를 토닥입니다. 셈틀을 끕니다. 아이를 안고 옆방으로 건너갑니다. 아이를 먼저 반듯하게 누입니다. 나도 옆에 반듯하게 눕습니다. 등허리가 쪼옥 펴지며 개운하구나 싶습니다. 어제 하루 얼마나 고단하게 보냈는가 돌이킵니다. 엊저녁 아이를 처음 재우며 기쁘게 재우지 못해, 아이가 꿈나라에서 즐거이 날아다니지 못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새벽에 오줌을 누고 다시 잠들 때에는 부디, 엊저녁부터 새벽까지 제대로 날지 못했을 꿈나라에서 예쁘고 씩씩하게 날아다니기를 빕니다. 한손으로 아이 머리카락과 볼과 가슴을 토닥토닥 합니다. 아이는 작은 손으로 아버지 손을 만지작만지작 합니다. 네 식구 모두 달게 잡니다. 달게 자느라 새벽 다섯 시부터 노래하는 들새와 멧새 이야기를 듣지 못합니다. 새소리와 함께 동이 트는 아침을 맞이하지 못합니다.

 

 


  일곱 시를 조금 지나 눈을 번쩍 뜹니다. 창호지문 바깥이 훤합니다. 얼마나 잤나 시계를 봅니다. 늦잠까지는 아니라고 느낍니다. 뒷밭 고랑에 쉬를 하고 뒷밭 감자와 오이와 토마토한테 물을 줍니다. 손바닥만큼 조그마한 뒷밭 감자는 무럭무럭 줄기를 올립니다. 새 잎이 싱그럽습니다. 야들야들한 오이잎은 벌레가 꽤 갉아먹었습니다. 오이꽃 필 무렵까지 오이잎을 잘 건사해야겠습니다.


  이웃 할머니와 할아버지 들은 아침부터 마늘밭이며 논이며 일하러 다니느라 부산합니다. 웃마을 못에서 물꼬를 텄으니, 논에 물 대실 분은 얼른 나와 논에 물 대라며 마을방송 울려퍼집니다.


  달력으로 치면 일요일 아침, 시골마을에는 일요일이 따로 없습니다. 흙하고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절기와 명절이 있지, 주말이나 공휴일이나 기념일은 없으니까요. 햇볕은 따사롭고 바람은 싱그럽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푹푹 찌는 무더위라고들 말하는데, 우리 시골마을 시골집은 밤에 서늘합니다. 아침에도 선선합니다. 햇살은 맑아 이른아침부터 빨래를 널 만하지만, 아직 이슬이 걷히지 않았으니 아홉 시쯤 되어야 이불을 내놓을 만합니다. 한낮에도 그닥 후덥지근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는 봄밤에도 선풍기나 에어컨을 틀지 않으면 더워서 잠을 못 이룰까요. 도시에서는 봄밤에도 냉방기를 돌리느라 전기를 많이 써야 할까요. 정부와 기업에서는 우리 시골마을 한쪽에 ‘도시사람 쓸 전기를 만들 어마어마하게 큰 화력발전소’를 짓겠다고 나섭니다. 막상 시골에서는 전기 쓸 일이 아주 드문데, 전기 쓸 일 많은 도시에는 발전소를 짓지 않습니다. 도시사람 쓸 전기 때문에 시골에 발전소를 지으려 하면서, 시골사람이 시골땅 더러워지기에 ‘시골에 발전소 짓지 마셔요’ 하고 외치면, 지역이기주의라도 되는 양 몰아세웁니다. 정작 지역이기주의라 한다면, 전기를 펑펑 쓰느라 전기가 모자란 도시에 발전소를 지어야 하는데 도시에 안 지으니 도시사람이야말로 지역이기주의입니다. 도시에 지어야 할 발전소를 도시에는 ‘위해시설’이 들어서도록 하면 안 된다고 몽땅 시골에 몰아세우는 짓이 참말 지역이기주의입니다.


  그러나, 무슨무슨 이기주의입네 무어네를 떠나 생각할 일입니다. 우리는 왜 봄밤조차 후끈후끈 무덥게 보내야 하나요. 우리는 왜 전기를 이토록 펑펑 쓰는 도시에서 일거리를 얻으며 돈을 벌어야 하나요. 우리는 왜 살랑살랑 봄바람과 따슷따슷 봄햇살 누리는 좋은 숲자락을 어깨동무하지 못해야 하나요.

 


  집 둘레에서 아침노래 신나게 부르는 새들이 두 아이를 깨웁니다. 두 아이는 맑은 눈빛으로 잠을 깹니다. 두 아이는 저마다 예쁘게 웃으며 아침부터 놉니다. 햇살은 포근하고 바람은 보드랍습니다. 좋은 햇살 낮 동안 듬뿍 받으니 좋은 꿈누리에 살며시 접어들겠지요. 좋은 바람 낮 동안 실컷 받아들이니 좋은 꿈나라에서 훨훨 날아다니겠지요.


  다시마 세이조 님이 빚은 그림책 《쿨쿨쿨》(보림,2008)에 나오는 모든 목숨들이 햇살과 바람과 흙과 물을 골고루 누리며 서로 달콤하게 꿈나라에서 날개옷 입고 춤을 춥니다. (4345.5.20.해.ㅎㄲㅅㄱ)

 


― 쿨쿨쿨 (다시마 세이조 글·그림,보림 펴냄,2008.7.2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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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2-05-20 12:21   좋아요 0 | URL
다시마 세이조, 정말 좋은 그림책 작가여요. 사진으로 보니 좋네요.

숲노래 2012-05-21 11:19   좋아요 0 | URL
참 재미나며 아름답게 그림을 그릴 줄 아는 분이라고 느껴요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 - 쉽고 재미있게 익히는
배상복.오경순 지음 / 21세기북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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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모른다
 [책읽기 삶읽기 103] 배상복·오경순,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21세기북스,2012)

 


  배상복 님과 오경순 님이 함께 쓴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21세기북스,2012)를 읽습니다. 책이름처럼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잘 모릅니다. 한국땅 학교에서 한국말을 옳게 가르치는 틀이 없기도 하지만, 한국땅에서 나고 자라는 사람들부터 스스로 한국말을 옳게 배우며 옳게 쓰려고 마음을 기울이지 않기도 합니다.


  책을 찬찬히 읽다가, 오늘날 이 나라 초·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를 떠올립니다. ‘국어(國語)’라는 한자말은 일제강점기부터 널리 쓰였다 하지만, 이 한자말을 바로잡거나 고치려는 공공기관이나 교사는 그리 안 많습니다. ‘國語’라는 낱말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일본말’을 가리키던 낱말이요, 일본 제국주의자가 이 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며 ‘일본말’을 ‘國語’라는 과목으로 가르쳤습니다. 한국말은 ‘조선말’이나 ‘조선어’라는 이름으로 가르쳤어요. 더 깊이 헤아려도 이와 같아요. 한겨레는 예부터 ‘한겨레 말’을 썼을 뿐입니다. 다만, 한겨레 스스로 한겨레 말을 가리키는 이름은 따로 없었어요. 굳이 이런 이름이 있어야 할 까닭을 느끼지 않았으니까요. 조선 때에 한겨레 글이 태어나기는 했으나, ‘한겨레 글’인 ‘훈민정음’은 여느 사람(백성)이 쓰는 글이 아니라 권력자와 지식인이 쓰는 글이었습니다. 이 나라가 식민지가 되고서야 비로소 학교라는 데가 생기며 여러 과목을 가르쳤고, 이때에 이 나라 이름은 ‘조선’이었기에, 학과목은 ‘조선말’이나 ‘조선어’였어요. ‘국어’라는 말은 안 썼어요.


  그나저나, 국어라는 낱말이 이러하건 저러하건, 이 말을 쓰건 말건, 한국사람이 오늘날 쓰는 한국말이 어떠한가를 학교에서 찬찬히 가르치지 않기도 하지만, 스스로 찬찬히 익히려 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 같은 책을 따로 사서 읽지 않으면, 한국사람으로서 한국사람답게 한국말을 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 언어라는 것은 태생한 배경과 문화가 있게 마련이다. 과거 전화가 귀해 이장 집으로 달려가 전화를 받고 우체국 먼 길을 가서 전화를 하던 때를 생각하면 “들어가세요.”라는 표현이 충분히 상상이 간다. 언어라는 것이 반드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의미를 전달할 때만 사용되는 것도 아니다. 세월이 흘러 어원은 잘 모르지만 그러려니 하면서 써 온 표현도 적지 않다 … 외국어나 외래어는 우리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경우에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더구나 엉터리 영어라면 우리 말을 쓰는 게 낫다 ..  (19, 141쪽)


  요즈음 한국사람은 ‘한국말’과 ‘외국말’을 제대로 가누지 못합니다. 한국말과 외국말 사이에 있는 ‘들온말(외래말)’도 제대로 살피지 못합니다. ‘외래어(外來語)’처럼 한자로 적으니 못 알아들을 수 있는데, 한자 뜻풀이 그대로 “밖에서 들어온 말”이기에 한국말로는 ‘들온말’입니다. “들어와서 쓰는 말”이라는 뜻으로 ‘들온말’입니다.


  들온말은 아직 한국말이 되지 않았으나, 한국사람이 여러모로 쓰는 낱말을 가리킵니다. 들온말을 쓰는 까닭은, 이제부터 한국말을 새롭게 빚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들온말을 여러모로 쓰면서 이 들온말을 한국말로 알맞고 슬기롭게 가다듬거나 갈고닦아 풀어낼 낱말을 빚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한국사람은 들온말을 한국말로 갈고닦지 않습니다. 들온말을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게다가, 들온말 아닌 바깥말(외국어, 다른 나라에서 쓰는 말)을 마치 한국말처럼 삼으며 버젓이 써요.


  ‘외국어(外國語)’ 또한 한자로 적으니 어떤 말인지 못 알아듣는다 할 수 있는데, 말뜻 그대로 “다른 나라에서 쓰는 말”, “이 나라 아닌, 이 나라 바깥에서 쓰는 말”이 ‘외국어’입니다.


  영어도 외국어요 일본어도 외국어입니다. 미국사람 쓰는 미국말이든 일본사람 쓰는 일본말이든, “한국 아닌, 한국 바깥에서 쓰는 말”입니다.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까닭은 한국 바깥에서 쓰는 영어를 잘 익혀야 한국 바깥으로 나가서 외국사람을 사귈 때에 좋기 때문이에요. 한국에서 한국사람끼리 주고받자면서 영어를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아요.


.. 참고로, 총각김치를 담글 때 쓰이는 어린 무를 ‘총각(總角)무’ 또는 ‘알무’ ‘알타리무’라 하는데, 1988년에 개정된 표준어 규정은 순수 우리 말인 ‘알무’ ‘알타리무’가 생명력을 잃었다고 해서 한자어 계열인 ‘총각무’로 쓰도록 했다. 따라서 ‘총각무’ ‘총각김치’가 표준어이고, ‘알무’ ‘알타리무’ ‘알타리김치’는 표준어가 아니다. 순 우리 말을 버리고 한자어를 표준어로 선정함으로써 비판이 있는 부분이다 … ‘간절기’는 정체불명의 말이다. 한자어권 어디에도 이런 단어는 없다. 일본식 표현을 오역한 것일 뿐이다 … 지난 2000년 국립국어원이 ‘간절기’를 신어 목록에 올렸지만 이는 한 해 동안 신문이나 잡지 등에 새로 등장한 용어를 모은 것일 뿐이다. 이 가운데는 유행어뿐 아니라 비속어도 포함돼 있다. 그 말이 어법상 옳은 것인지는 따지지 않는다 ..  (45, 120쪽)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라는 책에도 군데군데 나오지만, 국립국어원은 나라에서 세운 ‘한국말 지킴터’다운 노릇하고는 좀 동떨어집니다.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알맞고 슬기롭게 쓰도록 돕거나 이끄는 구실을 잘 못합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신문과 잡지에 나타난 말’을 그러모으는 일을 할 수도 있지만, 이에 앞서 ‘한국사람이 더 아끼고 사랑할 만한 좋은 말’부터 그러모으도록 힘써야 할 노릇입니다.


  신문이나 잡지에는 누가 글을 쓰겠습니까. 한국말을 옳게 가누거나 가꾸는 사람이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쓰나요. 들온말과 바깥말을 찬찬히 가늠할 줄 아는 사람이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쓰나요.


  교과서도 제대로 서지 않은 한국이고, 학교도 제대로 서지 않은 한국이며, 신문·잡지 또한 제대로 서지 않은 한국입니다. 너무 슬프고 안타까운 나머지,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사람을 일깨우는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 같은 책을 써야 합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얼마나 모르면 이 같은 책을 애써 써야 할까요.


.. 결국 “5만 원이세요.” “10만 원이세요.”처럼 돈에다 “-세요.”를 붙이는 것은 손님이 아니라 돈을 존대하는 기형적 어투다. 고객을 존중하기는커녕 돈이나 사물을 높여 손님을 놀리는 듯한 표현이다 … ‘쿨비즈’는 일본에서 쓰이는 용어를 우리가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똑같은 운동에 똑같은 이름이 쓰였다. 일본에서 영어를 어떻게 조합해 쓰든 우리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런 엉터리 영어를 가져다 우리가 국가 정책 용어에 버젓이 쓴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말로 창의적인 이름을 붙이면 얼마나 좋을까 ..  (63, 143쪽)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라는 책은 중학생 즈음이면 읽을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이 책에 나타나는 낱말이나 말투는 퍽 어렵습니다. “창의적인 이름을 붙이면” 같은 글월이 보이는데, “슬기롭게 이름을 붙이면”처럼 다듬을 만합니다. “돈을 존대하는 기형적 어투다” 같은 글월은, “돈을 높이는 엉뚱한 말이다”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그 말이 어법상 옳은 것인지는” 같은 글월은 “그 말이 옳은지는”으로 다듬으면 되고, “한자어를 표준어로 선정함으로써 비판이 있는 부분이다”는 “한자말을 표준말로 삼아 비판받는 대목이다”로 다듬으면 즐겁습니다.


  67쪽을 읽으면, “‘교장 선생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 역시 주체와 관련된 것을 높이는 간접 높임이므로 ‘교장 선생님 말씀이 있으시겠습니다’고 해야 한다. 아예 말을 바꾸어 ‘교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겠습니다’로 해도 해도 된다.”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말에서 ‘간접 높임’을 쓰든 말든, “교장 선생님 말씀이 있다”라는 말이, 참말 말이 되는지부터 살펴야지 싶어요. 이 대목부터 제대로 따져야지 싶어요.


  먼저, 이렇게 함부로 쓰는 말은 잘못입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겠습니다”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한국말이니까요. 다음으로, 한국말은 임자말이나 토씨를 줄이거나 지우곤 합니다. 이런 한국말 빛깔을 헤아리며, “너, 할 말 있니?” 같은 말투를 돌아봅니다. “너, 할 말 있니?”에서 가지를 치면, “선생님, 하실 말씀 있어요?”가 되고, 이 흐름에 따라 교장 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준다 할 때에도 “교장 선생님(이 하실) 말씀이 있겠습니다”처럼 될 수 있어요. 이와 같은 흐름과 결과 무늬를 찬찬히 짚을 때에, 비로소 한국사람 스스로 잘 모르는 말을 잘 생각하도록 도우리라 믿습니다.


  109쪽을 읽으면, “그래도 ‘배워 주다’를 쓰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혹시 간첩이 아닌지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갑작스레 웬 ‘간첩’? 북녘에서는 ‘가르쳐 주다’를 ‘배워 주다’로 쓰기도 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누군가 쓴다면 ‘간첩’인지 살피라 하는 소리인데, 이와 같은 말투는 인권과 인격을 깎아내릴 뿐 아니라, 고장말을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되기도 합니다. 더구나, 북녘을 떠나 남녘으로 온 사람이 이웃으로 함께 살아가요. 중국에서 살다가 남녘으로 와서 살아가는 이웃이 매우 많아요. 이들은 ‘북녘 말투’를 이녁 고장말로 그대로 쓰면서 살아가는데, 이들을 ‘간첩’으로 몰아세우라는 뜻일까요? 북녘말은 북녘말대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껴안을 때에 남북이 하나되는 슬기로운 길을 찾는다고 생각합니다. ‘북녘사람은 이렇게 쓰는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 됩니다. 북녘사람 말투는 나쁘거나 못된 말투라도 되는 듯 적바림한 대목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한국사람은 틀림없이 한국말을 잘 모르지요. 그런데, 한국말을 잘 모르기도 하지만, ‘한겨레 이웃’이나 ‘한겨레 동무’나 ‘한겨레 살붙이’부터 잘 모르기도 한다고 느껴요. 한국사람은 영어를 배우고 일본말을 배우고 하지만, 정작 경상도말이나 전라도말을 얼마나 배우려 하나요. 서울말만 듣고 익힐 뿐, 막상 인천말이나 수원말이나 평택말이 저마다 어떻게 다른가를 얼마나 살피려 하나요. 북녘말을 헤아리기 앞서, 같은 울타리라는 남녘에서조차 이웃말을 돌아보지 못해요. 강원말에서도 춘천말과 원주말과 고성말과 양구말은 달라요. 경상도말에서도 마산말과 진주말과 거제말과 통영말은 모두 달라요. 통영에서도 마을마다 조금씩 달라요. 섬마다 또 살짝살짝 달라요. 우리 한국사람은 외국말은 외국말대로 배워야겠습니다만, 한국사람으로서 ‘한겨레 이웃말’부터 제대로 살피고, ‘한겨레 이웃삶’ 또한 사랑스레 돌아보며, ‘한겨레 동무마을’을 따사로이 어깨동무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4345.5.19.흙.ㅎㄲㅅㄱ)


―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 (배상복·오경순 글,이수영 그림,21세기북스 펴냄,2012.5.14./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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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밥상
서정홍 지음, 허구 그림 / 창비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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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삶을 시로 빛냅니다
[시를 사랑하는 시 10] 서정홍, 《우리 집 밥상》(창작과비평사,2003)


 

- 책이름 : 우리 집 밥상
- 글 : 서정홍
- 그림 : 허구
- 펴낸곳 : 창작과비평사 (2003.7.20.)
- 책값 : 8000원

 


  마음속에서 터져나오는 말이 있을 때에 시를 씁니다. 나는 고등학생 때에 처음으로 시를 썼습니다. 사람을 자꾸 바보로 만들듯 시험공부만 시키는 갑갑한 시멘트 교실에서 숨막혀 죽고 싶지 않아 처음으로 시를 썼습니다.


  마음속에서 샘솟아 널리 나누고픈 말이 있을 때에 시를 씁니다. 나는 신문배달로 먹고살던 무렵, 신문배달 이야기를 시로 썼습니다. 곰곰이 돌이키니, 신문배달 안 해 보았다 하는 사람은 드문데, 정작 신문배달 삶자락을 시로든 수필로든 소설로든 희곡으로든 적바림하는 사람은 하나도 안 보였어요. 딱 한 번, 이원수 님 어린이문학 가운데 《해와 같이 달과 같이》라는 작품에서 신문배달 어린이 삶을 읽었어요. 이밖에는 신문배달 삶을 옳게 그리거나 제대로 담거나 살가이 빛내는 문학을 아직 찾아보지 못했어요.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있을 때에 시를 씁니다. 나는 둘째 아이가 우리와 한식구 될 즈음 새롭게 시를 씁니다. 두 아이와 살아가는 어버이는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고 좋아하고 즐기고 누리는가 하는 이야기를 나중에 아이들하고 천천히 주고받고 싶기에 시를 씁니다. 오늘은 오늘 내 삶을 즐기고, 앞으로는 앞으로 아이들과 새로운 삶을 누리고 싶어 시를 씁니다.


.. 우리 집 밥상 앞에 앉으면 / 흙 냄새 풀 냄새 땀 냄새 가득하고 / 고마우신 분들 얼굴이 눈앞에 떠오른다 ..  (우리 집 밥상)


  갑갑한 시멘트 교실에서 시를 쓸 적에는 갑갑한 시멘트 내음이 얼굴을 비빕니다. 얼굴은 까칠까칠 지저분해지고 긁힙니다. 깊은 새벽 조용한 골목을 싱싱 달리는 자전거가 신문을 휙휙 바람 일으키며 골목집 문간으로 던져 놓으며 시를 쓸 적에는 땀내음 바람내음 사뿐히 실립니다. 동이 틀 무렵 하루 일을 마치며 고단하게 드러눕는 움직임이 시로 태어납니다. 시골집에서 아이들과 얼크러지며 시를 쓰니, 언제나 들새 노랫소리 헤아리고 들풀 푸른내음 되씹습니다. 나는 아이들하고 이런 지식 저런 정보를 주고받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아이들하고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나는 아이들하고 웃으며 떠들 때에 즐겁습니다. 나는 아이들이랑 맛난 밥을 좋게 차려 나누고 싶습니다.


  살아가는 마음이 고스란히 시쓰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하나 시쓰는 마음입니다. 생각하는 결이 찬찬히 시쓰는 결로 태어납니다. 시라는 씨앗 한 알은 늘 내 가슴속에 있습니다.


.. 누가 꽃씨 심지 않아도 / 누가 물을 주거나 가꾸지 않아도 / 저절로 자라서 / 꽃밭이 되었다는 실매 마을 ..  (실매 마을)


  문학하는 분들이 시를 씁니다. 문학을 꿈꾸는 이들이 시를 씁니다. 문학을 좋아한다는 분들이 시를 씁니다.


  누구한테나 가슴속 ‘시 씨앗’이 있으니 시를 쓸 만합니다. 문학하는 이도 시를 쓰고, 문학 안 하는 이도 시를 씁니다. 지식인과 교수도 시를 씁니다. 아줌마와 할머니도 시를 씁니다. 마을 할머니들이 우리 아이들 바라보며 “오매 이쁜 것, 동네가 훤하네.” 하고 읊는 말 한 마디는 고스란히 시입니다. 마을 할아버지들이 들일을 하다 허리를 쉬며 논둑에 주저앉아 먼 하늘 바라보며 땀을 훔치다가 조용히 품는 생각이 모두 시입니다.


  도마질 소리는 시쓰는 소리입니다. 콩 터는 소리는 시쓰는 소리입니다. 마늘 뽑는 소리는 시쓰는 소리입니다. 풀 베는 소리는 시쓰는 소리입니다.


.. 전학 오던 날 / 담임 선생님이 나를 / 촌놈이라고 했다. / 동무들도 따라서 / 나를 촌놈이라고 했다. // 농촌 학교에서 / 도시 학교로 오면 다 촌놈인가 ..  (참고 또 참아도)


  까마귀 노래하는 소리를 들을 때에는 까마귀 노랫소리를 시로 옮깁니다. 까치 노래하는 소리를 들을 때에는 까치 노랫소리를 시로 담습니다. 종달새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면 종달새 노랫소리를 시로 싣겠지요. 꾀꼬리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며 꾀꼬리 노랫소리를 시로, 싯말로, 싯내음으로 찬찬히 읊겠지요.


  아이들과 복닥이며 아이들 재잘거리는 노랫소리를 듣는 어버이들은 누구나 아이들 재잘거리는 노랫소리를 시로 펼칩니다. 아줌마들 이야기꽃은 아줌마들 가슴에 깃든 ‘시 씨앗’을 예쁘게 북돋우는 아이들 재잘거리는 노랫소리하고 어우러지며 환하게 빛나곤 합니다. 아이들은 제 어버이한테서 받는 사랑이 아이들 가슴속 ‘시 씨앗’을 따사롭게 어루만지니, 아이들 나름대로 사랑스레 싯말과 싯노래를 터뜨립니다.


  아이들한테 글쓰기를 이끌며 보여준 이오덕 님은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라는 이름을 붙여 책 하나 내놓은 적 있습니다. 더도 덜도 아닌, 참말 어린이는 모두 가슴속 ‘시 씨앗’을 ‘좋은 사랑’으로 북돋아 내놓을 수 있기에 모두 시인입니다. 어린이가 모두 시인이 될 수 있으며 시인이듯, 어른 또한 모두 시인이 될 수 있으며 시인이에요.


  스스로 느끼면 돼요. 스스로 생각하면 돼요. 스스로 사랑하면 돼요. 스스로 살아가면 돼요.


.. 나는 어른이 되면 / 기계처럼 일만 하면서 / 살고 싶지 않다 ..  (어른이 되면)


  시쓰기는 기계다루기하고 다릅니다. 시쓰기는 돈벌기하고 다릅니다. 시쓰기는 텔레비전하고 다릅니다. 시쓰기는 도시하고 다릅니다. 시쓰기는 문학하고 다릅니다. 시쓰기는 졸업장하고 다릅니다.


  시는 기계처럼 쓸 수 없기에, 대학교에서 가르치지 못합니다. 시는 돈을 벌며 쓸 수 없기에, 문학강좌를 듣는대서 쓰지 못합니다. 시는 텔레비전 보는 매무새로는 쓸 수 없기에, 스스로 좋아하는 삶을 누릴 때에 쓸 수 있습니다. 시는 온통 사랑을 담는 글이기에, 도시에서 살아가며 쓰지 못합니다. 시는 오직 내 가슴속 꿈을 빛내는 말이기에, 졸업장이나 자격증이나 상장을 많이 거머쥔 사람일수록 시를 쓸 줄 모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어린이 마음을 건사하는 사람입니다.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어린이 마음을 보살피는 사람입니다. 하늘나라를 일구고 지구별을 보듬는 사람은 어린이 마음을 아끼는 사람입니다. 시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 어린이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 “일하는 사람도 / 편하게 좀 살다가 죽어야지. / 와, 일하다가 죽어야 하노?” / 어머니가 툭 던진 말씀 ..  (일요일 아침에)


  서정홍 님이 쓴 동시를 그러모은 《우리 집 밥상》(창작과비평사,2003)을 읽습니다. 노동자로 일하다가 시골에서 살아가는 살림살이로 바꾸었다는 시정홍 님이 시골살이 이야기를 담은 동시집 《우리 집 밥상》입니다. 참말, 《우리 집 밥상》에는 시골살이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이제껏 이 나라 시인이나 동시인치고 시골살이를 살뜰히 노래한 적은 아주 드물기에 몹시 반갑습니다. 이 나라에서 아이들한테 동시를 읽히려 하는 어른들은 으레 자연을 노래하곤 하면서 정작 동시쓰는 어른 스스로 시골에서 살아가지 않았는데, 서정홍 님은 시골에서 살아가며 시골마을 이야기를 동시로 풀어내니 참으로 반갑습니다.


  그런데, 서정홍 님 동시집 《우리 집 밥상》에는 시골살이 이야기는 있지만, 시골살이 사랑은 그닥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시골살이를 바라보는 이야기는 있되, 시골살이를 스스로 즐기는 이야기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습니다. 시골살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으나, 시골살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잘 안 보입니다.


  동시집 《우리 집 밥상》을 여러 차례 읽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애써 나온 시골살이 이야기 동시집이지만, 왜 이렇게밖에 쓸 수 없을까 하고 생각에 젖습니다. 서정홍 님은 시골살이 이야기를 동시로 담았지만, 아마 이 동시집은 ‘시골 어린이’보다 ‘도시 어린이’한테 읽히고픈 마음이었겠지요. 아무래도 도시 어린이가 ‘도시에서 살아가며 알아들을 만한 눈높이’로 동시를 썼겠지요.


.. 남들 농약 다 치는데 / 우리만 안 치면 불안하다고 / 사과밭에 열두 번째 / 농약을 친 작은아버지. // 빨갛게 보기만 좋은 사과 농사 / 땅도 사람도 병드는 농사 / 작은아버지는 /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한다며 / 뿌연 농약을 치고 또 친다 ..  (사과 농사)


  도시 아이들은 찔레꽃과 딸기꽃을 가릴 줄 모릅니다. 도시 어른들은 느티꽃과 뽕꽃을 바라볼 줄 모릅니다. 도시 아이들은 냉이내음과 쑥내음을 모릅니다. 도시 어른들은 제비 노랫소리와 직박구리 노랫소리를 살필 줄 모릅니다.


  서정홍 님이 찔레꽃과 딸기꽃 이야기를 쓰더라도, 도시 아이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며 어리둥절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서정홍 님이 즐겁게 제비와 직박구리와 종달새와 꾀꼬리와 노랑할미새 이야기를 읊어도, 도시 어른들(이 동시집을 장만해서 아이들한테 읽힐 어버이와 교사)부터 도무지 못 알아듣고는 이 동시집을 도로 책방 책꽂이에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말해야지요. 시골살이가 어떠하다고 말해야지요. 도시에서 바라보는 시골이 아니라, 시골에서 살아가는 시골을 말해야지요.


  그러니까, 말해야지요. 시골살이가 어떤 사랑이라고 말해야지요. 도시에서 겉훑기로 짚는 시골이 아니라, 시골에서 사랑하는 시골을 말해야지요.


.. 도시 손님들은 / 농촌에 오기만 하면 / 돼지 삼겹살 구워 먹고 / 우리 엄마 애써 기른 암탉까지 잡아먹는다 ..  (손님들)


  시골을 사랑하기에 시골에 삶터를 마련해 살아가려는 서정홍 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골에서 살아가기로 했지만 아직 시골을 사랑하지는 못하는 서정홍 님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서정홍 님은 시골살이를 합니다. 도시살이 아닌 시골살이를 합니다. 시골이 좋은 까닭을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헤아리기에 도시 아닌 시골에서 땀을 흘리고 햇살을 누리며 물을 마십니다.


  도시사람이야 시골에 가서 세겹살 구워 먹고 싶겠지요. 그러면, 시골사람 서정홍 님은 시골에서 살아가며 무얼 하고 싶을까요. 도시사람이야 때깔 좋아 보인다는 굵직한 열매를 사서 먹는다 하겠지요. 그러면, 시골사람 서정홍 님은 어떤 밭에서 어떤 열매를 거두고 어떤 밥을 즐기며 어떤 사랑을 짓는가요.


.. “아버지, 누렁이 꼭 팔아야만 경운기 살 수 있어요?” / “경운기 사면 농사 짓기도 수월하고 / 누렁이 고생 안 해도 되니 파는 게 좋겠다. / 서운해도 내일 팔기로 했으니 그리 알아라.” ..  (누렁이)


  사랑하는 삶을 시로 빛냅니다. 사랑하는 삶을 시로 노래합니다. 사랑하는 삶을 시로 그립니다. 사랑하는 삶을 시로 엮습니다. 사랑하는 삶을 시로 밝힙니다. 사랑하는 시골에서 사랑하는 어여쁜 꿈을 시로 일굽니다. (4345.5.1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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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5-19 07:57   좋아요 0 | URL
서정홍님의 시 중에는 도시와 농촌 살이에 대한 것들이 많지요. 은근히 뼈 있는 내용들이어서, 읽으면서 그냥 아름답다고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뜨끔하게 해요.

숲노래 2012-05-19 08:03   좋아요 0 | URL
저도 예전에는 '뼈 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느꼈는데,
이제 시골살이를 하며 새롭게 읽다 보니,
'뼈 있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자꾸 '도시사람 눈치를 보며 뼈를 생각하도록' 하는 이야기 틀에
스스로 갇혔구나 싶더라고요.

스스로 한껏 즐기고 누리는 시골살이 이야기는
아직 좀처럼 못 쓰시는구나 싶어요......
 
새는 새는 나무 자고 우리시 그림책 7
전래동요, 정순희 그림 / 창비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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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쁜 삶 노래하는 하루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66] 정순희·전래동요, 《새는 새는 나무 자고》(창비,2006)

 


  내 국민학생 때를 떠올립니다. 국민학교라는 이름은 초등학교로 바뀌었지만, 내가 다닌 학교는 ‘국민학교’라는 이름이었기에 국민학교로 떠올립니다.


  나는 국민학교를 걸어서 다녔습니다. 그리 먼 길이 아니기도 했지만, 걸어서 다니고 싶었기에 걸어서 다녔습니다.


  내 동네 동무들 가운데 집부터 학교까지 걸어서 다닌 아이는 없습니다. 동무들은 학교에서 집을 오가며 늘 버스를 탔습니다. 나 혼자 길을 걸었습니다. 동무들이랑 동네에서 놀기로 한 날, 나는 달리기를 합니다. 학교부터 집이 있는 동네까지 쉬잖고 달립니다. 땀을 비죽비죽 내며 달리는데, 동무들은 버스를 기다린다며 정류장에 선 동안 내가 먼저 동네에 닿기도 하고, 동무들이 버스를 타는 모습을 보며 달린 때에도, 버스가 신호등에 걸리면 내가 앞지르기도 하는 만큼, 내가 동무들보다 동네에 늦게 닿는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걸어서 동네로 돌아와도 늦지 않는데, 나와 함께 이 길을 걸어서 돌아가자고 하던 동무가 없었어요. 모두들 그냥저냥 버스를 탑니다. 모두들 버스삯 120원(편도 버스삯은 60원)을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이무렵 라면 한 봉지가 100원이었고, 편지 한 통 우표값이 30원이었는데, 이런저런 돈값을 헤아리는 동무가 꽤 드물었습니다.

 

 


.. 자장자장 잘 자거라 ..  (10쪽)


  혼자 길을 걸으며 생각합니다. 혼자 하늘을 올려다보고, 혼자 동네를 바라보며, 혼자 땅을 내려다봅니다. 내가 국민학생 때에 걷던 길은 도시 한복판인 터라, 풀이나 나무가 거의 없습니다. 온통 아스팔트이고 온통 시멘트입니다. 빈터가 마땅히 없고, 흙땅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봄부터 겨울까지 길에서 느낄 날씨나 철이 없습니다. 햇살이나 바람으로 느끼는 하루가 아니라, 달력으로 느끼는 하루입니다.


  국민학교를 마친 지 스물다섯 해가 지났습니다. 이제 나는 시골마을에서 살아가고, 우리 아이들은 시골에서 자라나는 삶입니다. 내가 어릴 적 걷던 길은 철이나 날씨를 알 수 없던 길이지만, 이제 아이들과 함께 걷는 길은 철 따라 냄새와 빛깔과 무늬와 소리가 온통 다른 길입니다.


  새벽 세 시부터 일어나서 움직입니다. 첫째 아이가 새벽 세 시에 쉬 마렵다며 아버지를 불렀기에 일어납니다. 이윽고 둘째 아이는 기저귀에 오줌을 푸지게 눕니다. 새벽에 일어난 김에 아이 오줌을 누이고 기저귀를 갑니다. 눈이 번쩍 뜨여 잠이 다시 오지 않으니 셈틀을 켜고 글을 씁니다.


  지난날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내가 새벽 서너 시, 또는 두어 시부터 일어나 지낸 지 얼마나 되었나 헤아립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교에 들어갈 무렵 신문배달을 하며 밥벌이를 했으니, 이무렵부터 새벽 일찍 하루를 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고단하게 잠들며 쉴 두어 시가 나로서는 두 눈 번쩍 뜨고 말짱한 넋으로 일할 때입니다. 사람들이 부시시 잠을 깨기 앞서인 새벽 너덧 시 무렵이 내가 하루 일을 마치고 신문사지국으로 돌아가 몸을 씻고 아침신문을 읽다가 꾸벅꾸벅 졸 무렵입니다.

 

 


.. 새는 새는 나무 자고 ..  (14쪽)


  도시에서 신문배달 일을 하던 새벽 두어 시는 아주 조용합니다. 찻길을 오가는 자동차가 없으면, 도시는 그야말로 쥐죽은 듯 고요합니다. 그렇다고 별이 흐르는 소리나 달이 구르는 소리를 듣지는 못해요. 참말 몽땅 잠들었다 싶은 한밤이요 깊은 새벽이에요.


  네 식구 시골에서 살아가는 요즈음을 떠올립니다. 시골에서는 밤낮 소리가 그치지 않습니다. 낮에는 바람소리, 풀소리, 새소리, 벌레소리, 여기에 이웃 할매 할배 일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밤에는 별소리, 도랑물 흐르는 소리, 개구리소리, 여기에 새소리와 나뭇잎 소리를 듣습니다. 나뭇잎 소리가 무언가 궁금해 할 사람이 있을 텐데, 겨울을 난 잎사귀가 봄을 맞이해 톡톡 떨어져 가랑잎이 되어 마당에서 구르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새벽 다섯 시 앞뒤로 들새와 멧새 노래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오늘은 새벽 네 시 오십칠 분부터 들새와 멧새 소리를 듣습니다. 새벽 다섯 시 십 분 무렵에는 이웃 할배가 경운기 몰며 들일 하러 나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 우리 아기 어디 자나 / 엄마 품에 잠을 자지 ..  (32∼34쪽)


  지난날 신문배달 일을 하며 먹고살던 때, 나는 새벽 두어 시에 자전거를 몰며 신문을 돌릴 때에 노래를 불렀습니다. 달리는 자전거에서 울려퍼지는 노래는 고요한 도시 한복판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슥슥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는 자동차 바퀴소리에 파묻히기 일쑤입니다. 전봇대에 걸친 전깃줄에서 내는 웅웅 소리보다 크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살며 첫째 아이를 낳았을 무렵, 우리 식구는 날마다 전철 오가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창문을 꼭꼭 닫고 새로 덧창을 달아도 전철 소리는 무척 큽니다. 데시벨로 치면 100을 넘어갈 만한 소리가 온 집안을 울립니다. 전철 소리 때문에 말소리도 주고받기 힘드니, 도시에서 아이들과 지낼 때에는 저녁에 잠들며 아이들한테 고즈넉히 자장노래 불러 주기 힘들었습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네 식구 살림은, 저녁을 맞이하여 아이들을 꿈나라로 보낼 때에 목청껏 자장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마음대로 자장노래를 부릅니다. 자장노래를 마치고 나도 고단한 몸을 쉴라치면, 창호종이문을 거쳐 개구리소리와 새소리를 듣습니다. 벌레소리와 별소리와 달소리를 듣습니다. 바람소리와 풀소리를 들어요.


  온통 노래예요. 온통 사랑이에요. 온통 즐거운 이야기예요.

 

 


.. 뭇 생명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몸소 보여주던 어머니들께 드립니다 ..  (3쪽)


  그림책 《새는 새는 나무 자고》(창비,2006)를 읽습니다. 정순희 님이 전래동요에 맞추어 그림을 넣은 그림책을 읽습니다. 새는 새는 참말 나무에 둥지를 마련해 잠을 잡니다. 이 가운데 제비는 처마에 둥지를 마련해 잠을 잡니다. 들쥐도 다람쥐도 저희 보금자리에서 잠을 잡니다. 메뚜기도 사마귀도 저희 보금자리에서 잠을 잘 테지요. 개구리도 뱀도 저희 보금자리에서 잠을 잘 테고요.


  고요한 저녁나절, 먼먼 옛날부터 아이들과 어버이들은 풀과 바람과 해와 달과 물과 흙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습니다. 서로서로 고운 벗이 되어 한삶을 누렸습니다.


  빨래를 하며 노래를 부릅니다. 논밭을 갈고 김을 매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밥을 짓고 아기를 업으며 노래를 부릅니다. 따로 텔레비전이 없더라도 노래를 부릅니다. 애써 학교를 다니지 않더라도 노래를 부릅니다.


  좋은 삶이기에 좋은 노래를 부릅니다. 좋지만 고단한 삶이라 좋지만 고단한 노래를 부릅니다. 좋으면서 기쁜 삶이기에 좋으면서 기쁜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에는 이야기가 실립니다. 노래에 실리는 이야기는 하루하루 살아내는 모든 꿈이자 사랑입니다. 꿈은 맑은 빛깔이곤 합니다. 사랑은 지친 땀방울이곤 합니다. 꿈은 푸른 들판이곤 합니다. 사랑은 너른 바다이곤 합니다.


  들길을 거닐면 저절로 노래가 샘솟습니다. 텃밭에서 일하면 저절로 노래가 솟구칩니다. 아이들과 복닥이고 옆지기와 부대끼며 흥얼흥얼 노래합니다. 귀에 걸거치는 소리가 없기에 노래를 부릅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가 없으니 마음껏 노래합니다. 삶을 노래합니다. 사랑을 노래합니다. 꿈을 노래합니다. 아이들이랑 오순도순 놀며 노래합니다. 한 아이는 무릎에 누이다가 가슴에 얹어 재우고, 한 아이는 팔베개를 하며 재우며 노래합니다. 고단하지만 즐겁고 기쁜 하루를 노래합니다. 예쁜 아이처럼 예쁜 어버이 삶을 누리는 하루를 노래합니다. (4345.5.18.쇠.ㅎㄲㅅㄱ)

 


― 새는 새는 나무 자고 (정순희 그림,전래동요,창비 펴냄,2006.5.30./9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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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18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2-05-18 21:23   좋아요 0 | URL
언제나 좋은 마음이 될 수 있으면
어떠한 일이든 즐겁게 빛을 보리라 믿어요~
 
한씨네 삼남매 - 그리고 세상의 아이들 한치규 사진집 1
한승원 글, 한치규 사진 / 눈빛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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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빚고픈 사랑을 담는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95] 한치규, 《한씨네 삼남매, 그리고 세상의 아이들》(눈빛,2012)

 


  세 아이 삶자리를 사진으로 찬찬히 돌아본 사진책 《한씨네 삼남매, 그리고 세상의 아이들》(눈빛,2012)을 읽고 나서 사진쟁이 한치규 님 해적이를 살피다가 흠칫 놀랍니다. 한치규 님은 1979년부터 ‘보안사’에서 대령 신분으로 일했기 때문입니다. 직업군인일 뿐 아니라 여느 직업군인, 이를테면 하사관이나 소위·중위가 아니라 보안사 직업군인이라니, 적잖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사진은 어떤 신분이나 계급을 앞세우며 찍을 수 없습니다. 어떤 신분이나 계급은 외려 사진을 사진다이 찍는 길을 가로막거나 흐트린다고 느껴요. 이런 이름이 있거나 저런 겉모습이 있대서 사진이라 하거나 사진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사진은 오직 사진으로 바라보며 누리거나 느낄 뿐이에요. 대통령도 이녁 아이를 사진으로 찍고, 여느 흙일꾼도 이녁 아이를 사진으로 찍어요. 신문기자도 동네 아이를 사진으로 담고, 여느 공무원이나 교사도 동네 아이를 사진으로 담아요.


  사진책을 찬찬히 넘깁니다. 한치규 님이 박정희 군사정권 때에 보안사에서까지 직업군인으로 일한 까닭에 한치규 님네 세 아이 사진은 퍽 남다르다 할 만합니다. 한치규 님네 세 아이는 지난날을 어떻게 느꼈을는지 모르지만, 사진으로 드러나는 세 아이 살림살이는 그무렵 여느 아이들 살림살이하고 견주면 ‘매우 가멸찹’니다. 1960년대인데, 집에 텔레비전이 있고 전화기가 있어요. 1960년대인데, 막내아이 생일선물로 세발자전거를 새것으로 받아요. 아이들은 군인옷을 걸친 채 놀기도 합니다.

 

 

 


  사진책을 살짝 덮고 생각에 잠깁니다. 1970년대도 아니고 1960년대에 집안에 텔레비전과 전화기와 아이 세발자전거가 있습니다. 여느 집살림이 아닙니다. 그러고 보면, 한치규 님네 집에는 ‘사진기’까지 있어요. 이무렵 여느 살림집 살림살이로 사진기를 갖추기란 얼마나 어려웠을까요. 이때에 갖춘 사진기부터 퍽 대단하다 여길 만합니다.


  사진책을 다시 넘깁니다. 집안에 텔레비전이며 전화기가 있지만, 서울 내수동에 있었다는 살림집 벽종이나 장판이 참 수수합니다. 창호종이 바른 나무문입니다. 아이는 창호종이에 구멍을 큼지막하게 내고는 얼굴을 들이밀며 웃습니다. 마당 있는 기와집이지만, 마당이래 봤자 개수구 구멍을 막아 아이들 몇이 물놀이를 할 만큼 아주 조그맣습니다. 아이들 어머니가 아이를 씻기는 통은 여느 살림집에서 어머니들이 아이를 씻기는 통하고 같습니다. 따순 물을 받아 방에서 아이를 폭 담그며 씻깁니다. 나 또한 내 아이들을 이렇게 씻겼어요. 우리 아이들이 어머니젖을 먹고 자랐듯, 한치규 님네 아이들도 어머니젖을 먹고 자랍니다.


  주말이면 이곳저곳 신나게 나들이를 다녔다 하는데, 나라안 곳곳을 다니기는 했어도 나라밖으로 비행기 타고 나가지는 않았겠지요. 어느 모로 보면 먹고사는 걱정이 없는 집안이라 할 테지만, 어느 모로 보면 ‘좀 먹고살 만하다’ 싶어도 ‘먹고살기 팍팍한 달동네 이웃’보다 ‘아주 넉넉하게 살림을 꾸리는 나날’은 아니로구나 싶어요. 무엇보다, 한치규 님 사진에는 아이들과 즐거이 누리던 사랑이 살포시 묻어납니다. 사진기를 들고 아이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일 뿐, 직업군인이라든지 보안사 대령이라든지 하는 허울이 사진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손에 사진기를 쥔 채 아이들을 살가이 복닥이는 어버이일 뿐, 제법 먹고살 만한 살림이라거나 무언가 더 움켜쥔 사람이라는 껍데기가 사진에 스미지 않습니다.

 

 

 


  “1959년에 카메라를 처음 장만한 아버지는 일본의 카메라 상점에 우리 나라 김을 사서 보내시곤 했다. 그러면 상점 측에서는 그것을 환산한 액수만큼의 필름과 현상약품을 보내 왔다. 외환 사정이 어려웠던 시절, 일종의 물물교환 형식의 교류였으리라(7쪽/둘째 딸 한승원).” 하는 말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며 사진을 즐길 수 있던 사람은 흔하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한편, 이렇게 하며 사진을 즐겼다는 이야기를 적바림하기에, 우리 나라 사진 발자취 한쪽 모습을 환하게 밝히며 기쁘게 사진읽기를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 삼남매는 행복한 추억을 차곡차곡 쌓아 갔다. 주말이면 가족 모두 안 가 본 곳이 없을 정도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가족사진을 찍었다. 변하는 세상 모습도 찍었다. 아버지는 그 모든 것을 사진으로 남기셨다(8쪽/둘째 딸 한승원).” 하는 말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한치규 님은 당신이 거머쥔 어떤 이름(신분이나 계급)으로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한치규 님은 그저 아버지로서, 어버이로서, 어른으로서, 사람으로서 사진을 찍습니다. 한치규 님은 당신이 누리던 어떤 돈(이무렵 여느 사람들보다 퍽 넉넉한 살림)으로 사진을 빚지 않습니다. 한치규 님은 사랑으로, 믿음으로, 꿈으로, 이야기로 사진을 빚습니다. 사진마다 이야기 한 자락 가득 담습니다. 세 아이한테는 세 아이대로 지난 한때를 즐거이 그리는 사진이 되고, 세 아이하고 딱히 이어지지 않는 여느 사람한테는 ‘참 사랑스러운 삶을 담은 사진’이로구나 하고 느끼도록 이끕니다.


  아이들이 놉니다. 아이들이 다툽니다. 아이들이 잠듭니다. 아이들이 먹습니다. 아버지 한치규 님은 이런 모습 저런 웃음 그런 빛깔을 사진으로 알록달록 담습니다. 그지없이 싱그럽고 참으로 보배롭습니다. 다만, 사진책 《윤미네 집》(전몽각 사진,포토넷 펴냄,2010)처럼 주말 아닌 여느 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들하고 복닥이는 모습이 찬찬히 담기지는 않아요. 세 아이를 낳아 돌보던 어머니는 하루하루 어떠한 살림이요 삶이며 모습이었을까요. 하루 내내 세 아이가 어머니하고 복닥이던 모습은 어떠한 웃음이며 눈물이었을까요. 《한씨네 삼남매》이든 《윤미네 집》이든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은 ‘남자(아버지)’입니다. 집에서 살림을 꾸리는 여자(어머니)가 사진기를 손에 쥐는 일은 아주 드물거나 아예 없기 일쑤입니다. 부엌에서 도마질을 하다가, 씻는방에서 빨래를 하다가, 마루에서 걸레질을 하다가, 방에서 아이들 기저귀를 갈고 토닥토닥 재우다가, 살짝살짝 사진기를 손에 쥘 때에는 어떤 그림이 그려지는가 하는 이야기는 담기지 못합니다. 마당에 빨래를 너는 아침, 마당에서 빨래를 걷는 한낮, 걷은 빨래를 곧장 개지는 못하고 저녁이 되어 겨우 개면서 아이들한테 노래를 들려주며 하루를 마감하는 삶 들이 사진으로 소록소록 스미지는 못합니다.

 

 

 

 


  1960∼70년대에 사진기를 누릴 만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터이나, 그렇다고 아예 없지 않았습니다. 가난하게 사진기를 누리더라도 사랑을 담지 못한 사람이 있고, 가멸차게 사진기를 누리면서도 사랑을 담은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날 사진기는 아주 손쉽게 참 많은 사람들이 누립니다. 이제 ‘돈이 없어 사진기를 못 누린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자그마한 손전화로도 사진을 찍어요. 자그마한 손전화로도 아이들 어여쁜 빛깔을 사진으로 빚어요.


  곧, 한치규 님이 조금 더 넉넉한 살림이었기에 사진을 찍을 수 있지는 않았습니다. 한치규 님이 조금 더 가난한 살림이었다 하더라도 사진을 찍으며 예쁜 넋을 누렸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진으로 내 한삶 어떻게 즐기거나 누릴 때에 더 빛나는가를 일찍부터 깨달은 한치규 님이라고 봅니다. 사진으로 서로서로 어떠한 사랑을 어떠한 꿈결로 따사로이 이루는가를 오래도록 느낀 한치규 님이구나 싶어요.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나날을 사진으로 찍는 어버이는, 사진에 ‘아이들 웃음’을 담지 않습니다. 아이들 어버이는 사진에 ‘아이들과 살아가는 어버이 마음’을 담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웃음이 아니라, 아이들과 활짝 웃으며 살아가고픈 마음을 담습니다. 아이들과 떠들며 놀다가 사진을 찍는 어버이는, 사진에 ‘아이들 어떤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습니다. 아이들 어버이는 사진에 ‘아이들과 얼크러지며 이루고 싶은 어버이 사랑’을 담습니다.

 

 

 

 


  마음을 기울이기에, 골목길에서 동네 꼬마들을 이녁 아이하고 나란히 세워 사진으로 찍습니다. 사랑을 쏟기에, “한씨네 삼남매”에 이어 “세상의 아이들” 모습을 사진으로 빚습니다.


  좋은 꿈과 맑은 사랑과 따사로운 이야기를 엮은 사진을 떠올리며, 우리 집 두 아이와 살아가는 나날을 되새깁니다. 내가 빚고픈 사랑을 담는 사진입니다. 내가 누리고픈 삶을 싣는 사진입니다. 내가 즐기고픈 꿈을 갈무리하는 사진입니다.


  사진책 《한씨네 삼남매》를 여러 차례 더 읽습니다. 사진책에 실린 사진이 더없이 맑습니다. 사진책에 못 실린 사진이 퍽 많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들과 살아온 모든 나날을 자그마한 사진책에 몽땅 담을 수 없어, 알맹이만 간추렸을 테니까요. “한씨네 삼남매”와 “세상의 아이들”을 따로 낱권으로 묶어 두 권으로 냈으면 더 좋았겠다 싶습니다. 《한씨네 삼남매》에 실린 사진으로도 흐뭇하지만, 무언가 더 이야기가 있겠구나 싶어요. (4345.5.18.쇠.ㅎㄲㅅㄱ)

 


― 한씨네 삼남매, 그리고 세상의 아이들 (한치규 사진,눈빛 펴냄,2012.5.8./25000원)

 

 

 

 

..

 

이 밑은 "세상의 아이들" 사진입니다.

<한씨네 삼남매>는 두 갈래로 나눈 사진을 보여줍니다.

 

..

 

 

 

 

 

 

내 아이들 아끼는 마음은

이웃 아이들 헤아리는 마음으로 이어져

고운 사진으로 태어나는구나 싶어요

 

 

 

 

맨발로 달리기 하는 모습입니다

 

 

 

 

학부모인 어머니들도 맨발이나 양말바람으로 달리기를 하셨어요

 

모르는 분은 '시골 학교'로 생각하실는지 모르지만,

이 사진 두 장은 '인천 주안초등학교 1960년대 운동회' 사진입니다

 

 

 

 

이 사진 또한 시골마을로 여길 분이 있을는지 모르나,

'서울 태능'에서 신문배달 하는 아이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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