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 - 쉽고 재미있게 익히는
배상복.오경순 지음 / 21세기북스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모른다
 [책읽기 삶읽기 103] 배상복·오경순,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21세기북스,2012)

 


  배상복 님과 오경순 님이 함께 쓴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21세기북스,2012)를 읽습니다. 책이름처럼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잘 모릅니다. 한국땅 학교에서 한국말을 옳게 가르치는 틀이 없기도 하지만, 한국땅에서 나고 자라는 사람들부터 스스로 한국말을 옳게 배우며 옳게 쓰려고 마음을 기울이지 않기도 합니다.


  책을 찬찬히 읽다가, 오늘날 이 나라 초·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를 떠올립니다. ‘국어(國語)’라는 한자말은 일제강점기부터 널리 쓰였다 하지만, 이 한자말을 바로잡거나 고치려는 공공기관이나 교사는 그리 안 많습니다. ‘國語’라는 낱말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일본말’을 가리키던 낱말이요, 일본 제국주의자가 이 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며 ‘일본말’을 ‘國語’라는 과목으로 가르쳤습니다. 한국말은 ‘조선말’이나 ‘조선어’라는 이름으로 가르쳤어요. 더 깊이 헤아려도 이와 같아요. 한겨레는 예부터 ‘한겨레 말’을 썼을 뿐입니다. 다만, 한겨레 스스로 한겨레 말을 가리키는 이름은 따로 없었어요. 굳이 이런 이름이 있어야 할 까닭을 느끼지 않았으니까요. 조선 때에 한겨레 글이 태어나기는 했으나, ‘한겨레 글’인 ‘훈민정음’은 여느 사람(백성)이 쓰는 글이 아니라 권력자와 지식인이 쓰는 글이었습니다. 이 나라가 식민지가 되고서야 비로소 학교라는 데가 생기며 여러 과목을 가르쳤고, 이때에 이 나라 이름은 ‘조선’이었기에, 학과목은 ‘조선말’이나 ‘조선어’였어요. ‘국어’라는 말은 안 썼어요.


  그나저나, 국어라는 낱말이 이러하건 저러하건, 이 말을 쓰건 말건, 한국사람이 오늘날 쓰는 한국말이 어떠한가를 학교에서 찬찬히 가르치지 않기도 하지만, 스스로 찬찬히 익히려 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 같은 책을 따로 사서 읽지 않으면, 한국사람으로서 한국사람답게 한국말을 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 언어라는 것은 태생한 배경과 문화가 있게 마련이다. 과거 전화가 귀해 이장 집으로 달려가 전화를 받고 우체국 먼 길을 가서 전화를 하던 때를 생각하면 “들어가세요.”라는 표현이 충분히 상상이 간다. 언어라는 것이 반드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의미를 전달할 때만 사용되는 것도 아니다. 세월이 흘러 어원은 잘 모르지만 그러려니 하면서 써 온 표현도 적지 않다 … 외국어나 외래어는 우리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경우에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더구나 엉터리 영어라면 우리 말을 쓰는 게 낫다 ..  (19, 141쪽)


  요즈음 한국사람은 ‘한국말’과 ‘외국말’을 제대로 가누지 못합니다. 한국말과 외국말 사이에 있는 ‘들온말(외래말)’도 제대로 살피지 못합니다. ‘외래어(外來語)’처럼 한자로 적으니 못 알아들을 수 있는데, 한자 뜻풀이 그대로 “밖에서 들어온 말”이기에 한국말로는 ‘들온말’입니다. “들어와서 쓰는 말”이라는 뜻으로 ‘들온말’입니다.


  들온말은 아직 한국말이 되지 않았으나, 한국사람이 여러모로 쓰는 낱말을 가리킵니다. 들온말을 쓰는 까닭은, 이제부터 한국말을 새롭게 빚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들온말을 여러모로 쓰면서 이 들온말을 한국말로 알맞고 슬기롭게 가다듬거나 갈고닦아 풀어낼 낱말을 빚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한국사람은 들온말을 한국말로 갈고닦지 않습니다. 들온말을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게다가, 들온말 아닌 바깥말(외국어, 다른 나라에서 쓰는 말)을 마치 한국말처럼 삼으며 버젓이 써요.


  ‘외국어(外國語)’ 또한 한자로 적으니 어떤 말인지 못 알아듣는다 할 수 있는데, 말뜻 그대로 “다른 나라에서 쓰는 말”, “이 나라 아닌, 이 나라 바깥에서 쓰는 말”이 ‘외국어’입니다.


  영어도 외국어요 일본어도 외국어입니다. 미국사람 쓰는 미국말이든 일본사람 쓰는 일본말이든, “한국 아닌, 한국 바깥에서 쓰는 말”입니다.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까닭은 한국 바깥에서 쓰는 영어를 잘 익혀야 한국 바깥으로 나가서 외국사람을 사귈 때에 좋기 때문이에요. 한국에서 한국사람끼리 주고받자면서 영어를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아요.


.. 참고로, 총각김치를 담글 때 쓰이는 어린 무를 ‘총각(總角)무’ 또는 ‘알무’ ‘알타리무’라 하는데, 1988년에 개정된 표준어 규정은 순수 우리 말인 ‘알무’ ‘알타리무’가 생명력을 잃었다고 해서 한자어 계열인 ‘총각무’로 쓰도록 했다. 따라서 ‘총각무’ ‘총각김치’가 표준어이고, ‘알무’ ‘알타리무’ ‘알타리김치’는 표준어가 아니다. 순 우리 말을 버리고 한자어를 표준어로 선정함으로써 비판이 있는 부분이다 … ‘간절기’는 정체불명의 말이다. 한자어권 어디에도 이런 단어는 없다. 일본식 표현을 오역한 것일 뿐이다 … 지난 2000년 국립국어원이 ‘간절기’를 신어 목록에 올렸지만 이는 한 해 동안 신문이나 잡지 등에 새로 등장한 용어를 모은 것일 뿐이다. 이 가운데는 유행어뿐 아니라 비속어도 포함돼 있다. 그 말이 어법상 옳은 것인지는 따지지 않는다 ..  (45, 120쪽)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라는 책에도 군데군데 나오지만, 국립국어원은 나라에서 세운 ‘한국말 지킴터’다운 노릇하고는 좀 동떨어집니다.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알맞고 슬기롭게 쓰도록 돕거나 이끄는 구실을 잘 못합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신문과 잡지에 나타난 말’을 그러모으는 일을 할 수도 있지만, 이에 앞서 ‘한국사람이 더 아끼고 사랑할 만한 좋은 말’부터 그러모으도록 힘써야 할 노릇입니다.


  신문이나 잡지에는 누가 글을 쓰겠습니까. 한국말을 옳게 가누거나 가꾸는 사람이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쓰나요. 들온말과 바깥말을 찬찬히 가늠할 줄 아는 사람이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쓰나요.


  교과서도 제대로 서지 않은 한국이고, 학교도 제대로 서지 않은 한국이며, 신문·잡지 또한 제대로 서지 않은 한국입니다. 너무 슬프고 안타까운 나머지,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사람을 일깨우는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 같은 책을 써야 합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얼마나 모르면 이 같은 책을 애써 써야 할까요.


.. 결국 “5만 원이세요.” “10만 원이세요.”처럼 돈에다 “-세요.”를 붙이는 것은 손님이 아니라 돈을 존대하는 기형적 어투다. 고객을 존중하기는커녕 돈이나 사물을 높여 손님을 놀리는 듯한 표현이다 … ‘쿨비즈’는 일본에서 쓰이는 용어를 우리가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똑같은 운동에 똑같은 이름이 쓰였다. 일본에서 영어를 어떻게 조합해 쓰든 우리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런 엉터리 영어를 가져다 우리가 국가 정책 용어에 버젓이 쓴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말로 창의적인 이름을 붙이면 얼마나 좋을까 ..  (63, 143쪽)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라는 책은 중학생 즈음이면 읽을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이 책에 나타나는 낱말이나 말투는 퍽 어렵습니다. “창의적인 이름을 붙이면” 같은 글월이 보이는데, “슬기롭게 이름을 붙이면”처럼 다듬을 만합니다. “돈을 존대하는 기형적 어투다” 같은 글월은, “돈을 높이는 엉뚱한 말이다”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그 말이 어법상 옳은 것인지는” 같은 글월은 “그 말이 옳은지는”으로 다듬으면 되고, “한자어를 표준어로 선정함으로써 비판이 있는 부분이다”는 “한자말을 표준말로 삼아 비판받는 대목이다”로 다듬으면 즐겁습니다.


  67쪽을 읽으면, “‘교장 선생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 역시 주체와 관련된 것을 높이는 간접 높임이므로 ‘교장 선생님 말씀이 있으시겠습니다’고 해야 한다. 아예 말을 바꾸어 ‘교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겠습니다’로 해도 해도 된다.”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말에서 ‘간접 높임’을 쓰든 말든, “교장 선생님 말씀이 있다”라는 말이, 참말 말이 되는지부터 살펴야지 싶어요. 이 대목부터 제대로 따져야지 싶어요.


  먼저, 이렇게 함부로 쓰는 말은 잘못입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겠습니다”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한국말이니까요. 다음으로, 한국말은 임자말이나 토씨를 줄이거나 지우곤 합니다. 이런 한국말 빛깔을 헤아리며, “너, 할 말 있니?” 같은 말투를 돌아봅니다. “너, 할 말 있니?”에서 가지를 치면, “선생님, 하실 말씀 있어요?”가 되고, 이 흐름에 따라 교장 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준다 할 때에도 “교장 선생님(이 하실) 말씀이 있겠습니다”처럼 될 수 있어요. 이와 같은 흐름과 결과 무늬를 찬찬히 짚을 때에, 비로소 한국사람 스스로 잘 모르는 말을 잘 생각하도록 도우리라 믿습니다.


  109쪽을 읽으면, “그래도 ‘배워 주다’를 쓰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혹시 간첩이 아닌지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갑작스레 웬 ‘간첩’? 북녘에서는 ‘가르쳐 주다’를 ‘배워 주다’로 쓰기도 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누군가 쓴다면 ‘간첩’인지 살피라 하는 소리인데, 이와 같은 말투는 인권과 인격을 깎아내릴 뿐 아니라, 고장말을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되기도 합니다. 더구나, 북녘을 떠나 남녘으로 온 사람이 이웃으로 함께 살아가요. 중국에서 살다가 남녘으로 와서 살아가는 이웃이 매우 많아요. 이들은 ‘북녘 말투’를 이녁 고장말로 그대로 쓰면서 살아가는데, 이들을 ‘간첩’으로 몰아세우라는 뜻일까요? 북녘말은 북녘말대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껴안을 때에 남북이 하나되는 슬기로운 길을 찾는다고 생각합니다. ‘북녘사람은 이렇게 쓰는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 됩니다. 북녘사람 말투는 나쁘거나 못된 말투라도 되는 듯 적바림한 대목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한국사람은 틀림없이 한국말을 잘 모르지요. 그런데, 한국말을 잘 모르기도 하지만, ‘한겨레 이웃’이나 ‘한겨레 동무’나 ‘한겨레 살붙이’부터 잘 모르기도 한다고 느껴요. 한국사람은 영어를 배우고 일본말을 배우고 하지만, 정작 경상도말이나 전라도말을 얼마나 배우려 하나요. 서울말만 듣고 익힐 뿐, 막상 인천말이나 수원말이나 평택말이 저마다 어떻게 다른가를 얼마나 살피려 하나요. 북녘말을 헤아리기 앞서, 같은 울타리라는 남녘에서조차 이웃말을 돌아보지 못해요. 강원말에서도 춘천말과 원주말과 고성말과 양구말은 달라요. 경상도말에서도 마산말과 진주말과 거제말과 통영말은 모두 달라요. 통영에서도 마을마다 조금씩 달라요. 섬마다 또 살짝살짝 달라요. 우리 한국사람은 외국말은 외국말대로 배워야겠습니다만, 한국사람으로서 ‘한겨레 이웃말’부터 제대로 살피고, ‘한겨레 이웃삶’ 또한 사랑스레 돌아보며, ‘한겨레 동무마을’을 따사로이 어깨동무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4345.5.19.흙.ㅎㄲㅅㄱ)


―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 (배상복·오경순 글,이수영 그림,21세기북스 펴냄,2012.5.14./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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