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나라와 나와 너 (2023.4.22.)

― 서울 〈다시서점〉



  요새는 어린이집부터 아이들을 일찌감치 가르치려 들면서 ‘위인’을 알려주고, ‘존경할 인물 소개’까지 합니다. 그림숲(미술관)·박물관(살림숲)에 아이들을 데려가서 일찍부터 ‘입시공부’에 이바지할 밑동을 닦으려 하더군요. 어른이란 이름인 자리에서 아이들한테 으레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하고 묻는데, 저는 어릴 적에 으레 ‘어머니’라고 대꾸했습니다. 어린배움터(국민학교) 여섯 해를 ‘어머니를 높일 만하다’고 밝혔습니다. 푸른배움터(중고등학교)로 옮긴 뒤에는 ‘높이 여길 사람’으로 ‘헌책집지기’를 더 꼽았습니다. ‘그냥 책집’이 아닌 ‘헌책집’으로 콕 집었어요. ‘그냥 책집’은 ‘팔 책’을 손쉽게 시키고, ‘안 팔리는 책’은 손쉽게 물립니다. ‘헌책집’은 ‘팔 책’을 먼지더미를 헤치면서 캐내고서 하나하나 손질하고 말린 뒤에, ‘안 팔리는 책’을 내내 끌어안다가 눈물바람으로 외려 돈을 더 치러서 내놓아야 합니다. ‘그냥 책집’은 이미 둘레에 알려진 책을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맞춰 주면 됩니다만, ‘헌책집’은 둘레에 잊히거나 안 알려진 책을 새롭게 캐내고 알아내고 찾아내어 겨우 한 자락을 갖춥니다.


  누구나 스스로 삶을 지으면 저마다 하루가 별빛으로 나아갑니다. 안 높은(존경)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높고, 누구나 너울거리고, 누구나 하늘하고 바다(바닥) 사이를 가만히 춤추듯 오르내립니다. 낮이 있으니 밤이 있고, 해가 뜨니 별이 돋습니다. 어머니 곁에 아버지가 어질게 있으니 보금자리를 일구는 어버이로 거듭나고, 어른 두 사람이 온삶으로 보여주는 사랑을 아이들이 물려받아 새롭게 가꾸기에 온누리가 아름다울 수 있어요. 이 얼거리가 틀어지면 온누리는 그저 싸움판입니다.


  서울 하늬녘 〈다시서점〉을 찾아갑니다. 어느 모로는 ‘서쪽 끝’이라 여기지만, 푸른별에는 끝이 딱히 없이 모든 곳이 ‘가운’입니다. 가운데요, 가운터요, 가운숲이요, 가운자리요, 한복판이에요.


  나라지기(대통령)를 맡는 이가 책을 안 읽는다고들 합니다만, 여느 벼슬꾼(공무원)은 얼마나 읽을까요? 여느 길잡이(교사)는 얼마나 읽을까요? 겨우 읽는 책은 품이나 갈래가 얼마나 넓거나 깊을까요? 뻔한 책조차 안 읽는다지만, 뻔한 책만 똑같이 읽는 나라가 오히려 더 외곬이기 쉬워요. 나라가 무너져도 되면, 책집이 무너져도 되겠지요. 나라가 사라져도 되면, 숲이 사라져도 될 테고요. 나라가 죽어도 되면, 말글이 죽어도 되겠고요.


  ‘나’를 잊는 ‘나라’는 없어도 됩니다. ‘나’를 스스로 사랑할 때라야 ‘너’를 알아보며 서로 빛나요. 저마다 날개를 달면서 함께 너머로 가기를 바라요.


ㅅㄴㄹ


《영등포 시장한 요리》(고미랑, 플랜포히어, 2020.11.첫./2021.11.15.2벌)

《문화재 탐방》(김민혜, 1994.8.첫/2022.9.22.고침)

《어느 바보의 일생》(아쿠타가와 류노스케/박성민 옮김, 시와서, 2021.8.7.)

《강서뭉클 백과도감》(강서는뭉클뭉클, 강서구, 2023.)

《안부, 21명의 문학 작가가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김경현 엮음, 다시서점, 2021.11.9.)

《엄마방 아빠방》(김경현, 다시서점, 2016.3.30.)

《더러워진 옷에 웃으며 우아하게 대처하는 법》(신수철, 무모한 스튜디오, 2022.7.20.)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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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그림과 (2023.8.19.)

― 서울 〈악어책방〉



  숲노래 씨는 여러 가지를 알거나 모릅니다. 아는 길은 알되, 모르는 길은 모릅니다. 1982∼87년에 다닌 어린배움터(국민학교)가 얼마나 어린이를 짓밟고 때리고 괴롭히고 돈을 빼앗고 막말을 일삼는 죽음터였는지 낱낱이 압니다.


  숲노래 씨는 2008년하고 2011년에 낳은 두 아이를 배움터에 안 보냈습니다. 아니, 숲노래 씨랑 함께 살아가는 두 아이는 스스로 ‘집에서 배우겠다’고 밝혔고, 스스럼없이 아이들 뜻을 따라, 넷이서 시골살림을 가꾸는 하루를 누립니다. 그래서 숲노래 씨는 ‘집배움’을 조금 압니다. 그렇지만 2014∼2023년에 어린배움터(초등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요즈음 어린이가 무엇을 듣고 느끼고 받아들이는지 모릅니다.


  서울 〈악어책방〉에서 서울 어린이 여럿하고 ‘노래꽃수다(시창작수업)’를 여러 달째 하는데, 오늘 새삼스레 하나를 느낍니다. 이 아이들은 집이나 배움터에서 ‘그리고픈 그림’을 느긋하거나 마음껏 손을 놀려서 그릴 틈이 없군요. 예전 어린이는 만화책을 옆에 놓고서 흉내그림을 했습니다. 오늘날 어린이는 손전화를 켜서 흉내그림을 합니다. 아스라한 옛날 어린이는 하늘을 보고 풀꽃나무랑 들숲바다를 보면서 나뭇가지를 슥슥 흙바닥에 놀리면서 그림소꿉을 누렸습니다.


  어린이는 ‘학교에 다니려’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린이는 ‘사랑받’으려고 태어났으며, 느긋하게 하루를 통째로 뛰놀면서 노래하려고 태어났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이 나라 어린이는 하루 가운데 쪽틈조차 마음껏 뛰지도 놀지도 그림을 그리지도 말을 할 수 있지도 않습니다.


  집에서는 어버이가 시키는 대로 따라가야 하고, 배움터에서는 어른이 이끄는 대로 좇으면서 달달 외워야 하는 어린이입니다. 스스로 보고 느끼고 배우는 하루가 없다면, 이 어린이는 ‘다 다른 숨결을 입고서 자라나는 하루’가 맞을까요?


  다 다른 어린이가 막상 ‘다 같은 굴레’에 갇히는 틀에서 허덕이면서 ‘똑같이 외우고 따라해야’ 하면, 이 아이는 ‘어른’이 될 수 없습니다. 어른은 ‘남하고 똑같이 나이를 먹으며 늙어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른은 ‘나다운 빛을 어질게 밝히면서 철을 읽고 알아 나누는 상냥한 사람’입니다.


  서울 어린이가 스스로 붓을 쥐고서 글을 적어 보도록 얘기하다가, 이 아이들이 그냥 입으로 터뜨리는 속내를 옆에서 옮겨적다가, 이 아이들로서 ‘노래쓰기(시쓰기)’란, 그저 ‘빠듯한 두 시간’을 신나게 그림놀이를 즐기도록 하면서, ‘놀고픈 마음’을 읽는 길이로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ㅅㄴㄹ


《날마다 미친년》(김지영, 노란별빛책방, 2023.3.12.)

《여자, 사람, 자동차》(고선영·김지선·나리·소서·하영·해영, 새벽감성, 2021.12.10.)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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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연 (2023.7.21.)

― 인천 〈아벨서점〉



  인천도 서울도 온나라 고을마다 담그림(벽화)이 볼썽사납습니다. 이 나라는 담그림을 아름답게 빚거나 담아내지 못 합니다. 옛날 임금집 둘레에 ‘꽃담’을 쌓던 꽃스러운 손길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꽃담은 오백 해를 흘러도 꽃담입니다. 그러나 온나라 담그림은 백 해는커녕 열 해조차 못 버틸 뿐 아니라, 처음부터 마을빛을 깔보거나 골목빛을 얕보면서 마구마구 돈으로 처바르는 붓질입니다.


  골목사람이 담벼락에 작대기 하나를 줄에 받쳐서 옷걸이에 빨래를 꿰어 볕바라기로 말리려고 내놓는 손길이 담그림입니다. 골목사람이 귀퉁이나 빈터에 꽃그릇 하나 놓고서 숲이나 멧골에서 퍼온 흙을 담아서 씨앗 한 톨 묻고서 기르는 남새가 푸르게 밝히는 숨결이 담그림입니다. 해가 하루를 나아가면서 드리우는 빛줄기랑 그림자가 담그림입니다.


  뿌리를 알 길조차 없는, 더구나 누리판(인터넷)에서 떠도는 ‘이쁘장하다’거나 ‘멋지다’는 그림이나 무늬를 얼렁뚱땅 옮겨서 그린대서 담그림일 수 없어요. 그러나 숱한 ‘문화예술가’에다가 ‘공무원’이 손을 잡고서 ‘골목하고 마을을 볼썽사납게 망가뜨리는 벽화사업’을 자꾸자꾸 벌입니다.


  ‘배다리 아트스테이 1930’에서 뻗어나가는 딱한 담그림을 보다가, 얼마 앞서 이슬로 떠난 김구연 님을 떠올립니다. 송월동 골목집에서 달개비 파란꽃을 그윽히 사랑하며 지켜본 김구연 님은 들꽃빛을 담은 글자락을 남겼어요. 손에 힘이 다하여 더는 종이를 넘길 수 없는 날까지 꾸준히 책읽기를 품으면서 넋을 가꾸었어요.


  책을 읽어야 마을이나 골목을 알지 않습니다. 숱한 책을 두루 읽으면서 마음을 일구어야 인천을 속속들이 헤아리면서 담그림을 펼 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배다리 책골목이라는 데에 깃들어 ‘문화예술’을 펴려 한다면, 사나흘에 하루쯤 책집마실을 하면서 책을 장만하고, 여러 책집지기님 삶자락에 오래오래 밴 책빛을 듣고 살펴보면서 ‘벼가 익듯’ 고개를 숙이면서 배울 노릇입니다.


  푸른씨(청소년)는 어른씨가 무엇을 보여주거나 얘기하거나 밝히려 하는지 궁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지켜봅니다. 푸른씨는 어른씨가 대단한 것을 보여주거나 얘기하거나 밝히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별처럼 빛나는 씨앗을 보여주거나 얘기하거나 밝히기를 바라고 기다립니다. 우리 나이가 이미 푸른씨 나이를 훌쩍 넘었더라도, 우리 마음은 누구나 푸르게 일렁입니다. 한해살이 풀꽃도 여러해살이 풀꽃도 해마다 해바람비를 새롭게 맞아들이면서 싱그럽습니다. 우리도 언제나 새롭게 책빛이며 골목빛이며 삶빛이며 사랑빛을 익힐 적에 비로소 사람빛을 펴리라 봅니다.


ㅅㄴㄹ


《文化 속의 數學》(김용운, 현암사, 1976.10.9.)

《獄中記·高原의 사랑》(루이제 린저/김문숙·홍경호 옮김, 범우사, 1975.9.25.첫/1982.8.10.3벌)

《그런 의미에서》(임후성, 문학과지성사, 1997.7.15.)

《학교는 오늘도 안녕하다》(배상환, 나남, 1988.3.5.첫/1989.1.5.5벌)

《두고 온 시》(고은, 창작과비평사, 2002.1.15.)

《한글세대를 위한 불교》(E.콘즈/한형조 옮김, 세계사, 1990.3.20.첫/1990.6.30.3벌)

《까치가 감나무에게 들려 준 동화들》(이동렬 글·이영원 그림, 늘푸른, 1991.11.30.첫/1992.11.20.2벌)

《실록연작시 지리산》(이기형, 아침, 1988.12.15.)

《베트남戰爭》(리영희, 두레, 1985.5.5.)

《일송정 푸른솔은》(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엮음, 삼민사, 1988.8.15.)

《자유인이 되기 위하여 3》(지두 크리슈나무르티/안정효 옮김, 청하, 1982.11.20.첫/1991.1.25.2판)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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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하는 (2023.7.21.)

― 인천 〈나비날다〉



  어릴 적에는 구월동에 사는 동무나 피붙이를 찾아가는 길에 걸었고, 집으로 돌아가며 걸었습니다. 신흥동하고 구월동은 먼 듯하면서도, 정작 걷고 보면 어느새 집에 닿는 길이었어요. 이웃마을을 느끼고, 옆마을을 새롭게 바라보는 걷기였습니다.


  구월동 한켠을 걸으면서 돌아봅니다. 1995년에 떠나서 2007년에 돌아온 인천에서 날마다 한나절 남짓 골목골목 걸었습니다. 1982∼1993년 사이에 걷던 골목을 다시 바라보았고, 이 골목마을을 엉터리로 찍어서 퀴퀴한 구닥다리처럼 보이도록 깎아내리는 찰칵쟁이(사진가)를 더는 보아줄 수 없어서, 인천내기로서 스스로 이 골목마을 온모습을 온빛으로 천천히 담자고 생각했습니다. 글로든 그림으로든 빛꽃(사진)으로든 담으려면, 먼저 보고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라볼 틈이 없이 휙휙 달리거나 스치면 못 느끼고 안 받아들여요. 골목사람은 서두르지 않아요. 골목밭에 묻은 씨앗 한 톨이 나무 한 그루로 자라기까지 느긋이 기다립니다. 골목빛은 ‘바쁜 서울내기’한테는 하나도 안 보일밖에 없습니다.


  온나라 벼슬아치(대통령부터 9급 공무원까지)가 으레 안 걷습니다. 안 걸어다니면서 이웃을 보거나 느낄 수 있을까요? 안 걸으면서 쓰는 글은 우리 삶을 얼마나 담거나 보이거나 밝힐까요? 이곳에서 저곳 사이를 휙휙 가로지르는 이들이 벌이는 ‘문화·인문·예술’에는 아무런 삶도 사랑도 살림도 없게 마련입니다.


  어느덧 주안동 안쪽 깊이 걷습니다. 어느새 잿더미(아파트 단지)가 빼곡하게 나옵니다. 잿더미 옆길을 뙤약볕을 쬐며 걷다가 멈춥니다. 잿더미 곁에서는 걷고픈 마음이 사라집니다. 버스를 타고 배다리로 갑니다. 〈나비날다〉에 깃들어 숨을 돌립니다. 등짐을 내려놓고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곳, 우리가 사랑하는 님, 우리가 사랑하는 마을, 우리가 사랑하는 별, 우리가 사랑하는 글, 우리가 사랑하는 꽃이랑 숲이랑 나무랑 풀이랑 너랑 나는 무엇인가요?


  ‘사랑받다’라는 말이 있되, ‘사랑주다(사랑을 주다)’라는 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언제나 ‘사랑짓다’하고 ‘사랑하다’뿐이거든요. ‘사랑짓다’라 할 적에는, 스스로 모든 눈길과 마음길과 삶길과 하루길과 손길과 발길(발걸음)을 사랑으로 처음부터 새롭게 일으킨다는 뜻이고, ‘사랑하다’라 할 적에는 스스로 둘레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한테나 사랑으로 마주한다는 뜻이에요. “사랑을 주다” 같은 말은, 곰곰이 보면 말이 안 되어요. 사랑은 줄 수 없고 ‘짓고’ ‘할’ 뿐이니까요. 사랑을 짓기에 ‘나눌’ 수는 있고, 스스로 길어올리며 지은 사랑이기에 둘레에서는 이 사랑빛을 문득 ‘나누어 받을(사랑받을)’ 수 있어요.


ㅅㄴㄹ


《후와후와 씨와 뜨개 모자》(히카쓰 도모미/고향옥 옮김, 길벗스쿨, 2018.10.31.)

《식물기》(호시노 도모유키/김석희 옮김, 그물코, 2023.5.30.)

《‘철도원 삼대’와 인천 걷기》(이설야와 일곱 사람, 다인아트, 2023.5.22.)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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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으로 (2022.9.29.)

― 서울 〈테레사 그림책방〉



  엊저녁부터 의정부 한켠에서 보냈습니다. 아침에 서울 수유나루로 건너왔고, 햇볕을 쬐며 걷습니다. 첫가을 해바라기를 하며 다니는 사람은 드물고, 그늘로 오가거나 입가리개를 합니다.


  봉우리나 고개는, 헐떡이면서 넘는 맛으로 천천히 다가서는 길이라고 느낍니다. 여름에는 이글거리는 해를 듬뿍 머금고, 겨울에는 포근히 감싸는 해를 한아름 품습니다. 봄에는 푸르게 돋는 해를 춤추며 맞이하고, 가을에는 상냥하게 어루만지는 해를 넉넉히 받아들입니다.


  어느새 〈테레사 그림책방〉 앞에 섭니다. 미리 알아보지 않고서 오기는 했으나, 책집지기님은 오늘 바깥일을 보시는 듯합니다. 스무 해쯤 앞서 서울 수유에는 책집이 꽤 있었습니다. 지난날에는 골목마을 한켠이나 어린배움터 곁에 으레 책집이 여럿 있었는데, 이제는 거의 사라지면서 새로 작은 마을책집으로 태어납니다.


  책집 앞으로 볕이 들지는 않으나 등짐을 내려놓고서 땀을 들입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쓰다가 만 노래꽃 ‘풀벌레’를 매듭짓습니다. 그림판에 옮겨적습니다. 책집 손잡이에 슬쩍 걸칩니다. ‘이제 어디로 갈까? 아이들 주전부리를 장만할까?


  등짐을 짊어집니다. 고흥으로 돌아가는 기나긴 버스길에 글을 쓸 생각입니다. 버스나루에 일찍 가서 눈을 살짝 붙이려고 합니다. 마음을 기울이고 느긋이 쉬면, 무엇이든 즐겁게 이룬다고 느껴요. 부릉부릉 매캐한 서울이어도 골목 귀퉁이에서 돋는 풀꽃을 바라보며 걷습니다. 풀벌레가 사르륵사르륵 나즈막이 들려주는 노래에 귀를 쫑긋합니다. 문득 파다닥 날갯짓하는 새를 말끄러미 봅니다.


  곰곰이 보면 긴 나날도 짧은 나날도 아닙니다. 모든 하루는 새롭게 반짝이며 즐거운 걸음걸이입니다. 포근히 쉬면 바람을 쐬고, 느긋이 가면 해를 머금습니다.


  요즈막(2022년) 서울 곳곳 골목길 바닥에 ‘여성안심귀갓길’ 같은 글씨가 큼직하게 있더군요. “안심할 사람”은 순이뿐 아니라 돌이도, 어린이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또 시골사람도 매한가지인데, “남성은 잠재적 범죄자”로 여기기에 ‘여성안심귀갓길’ 같은 글씨를 큼직하게 새긴다고 느껴요. 이렇게 갈라놓으면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어떤 어른으로 자랄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안심귀갓길’이면 넉넉할 텐데요.


  북아일랜드 사람들이 새롭게 담아낸 만화영화 〈My Father’s Dragon〉이 드디어 나왔습니다. 우리 집에 돌아가면 아이들하고 함께 보면서 수다꽃을 피우려 합니다. 오랜만에(?) 돌이가 만화영화 꽃님(주인공)으로 나왔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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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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