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김구연 (2023.7.21.)

― 인천 〈아벨서점〉



  인천도 서울도 온나라 고을마다 담그림(벽화)이 볼썽사납습니다. 이 나라는 담그림을 아름답게 빚거나 담아내지 못 합니다. 옛날 임금집 둘레에 ‘꽃담’을 쌓던 꽃스러운 손길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꽃담은 오백 해를 흘러도 꽃담입니다. 그러나 온나라 담그림은 백 해는커녕 열 해조차 못 버틸 뿐 아니라, 처음부터 마을빛을 깔보거나 골목빛을 얕보면서 마구마구 돈으로 처바르는 붓질입니다.


  골목사람이 담벼락에 작대기 하나를 줄에 받쳐서 옷걸이에 빨래를 꿰어 볕바라기로 말리려고 내놓는 손길이 담그림입니다. 골목사람이 귀퉁이나 빈터에 꽃그릇 하나 놓고서 숲이나 멧골에서 퍼온 흙을 담아서 씨앗 한 톨 묻고서 기르는 남새가 푸르게 밝히는 숨결이 담그림입니다. 해가 하루를 나아가면서 드리우는 빛줄기랑 그림자가 담그림입니다.


  뿌리를 알 길조차 없는, 더구나 누리판(인터넷)에서 떠도는 ‘이쁘장하다’거나 ‘멋지다’는 그림이나 무늬를 얼렁뚱땅 옮겨서 그린대서 담그림일 수 없어요. 그러나 숱한 ‘문화예술가’에다가 ‘공무원’이 손을 잡고서 ‘골목하고 마을을 볼썽사납게 망가뜨리는 벽화사업’을 자꾸자꾸 벌입니다.


  ‘배다리 아트스테이 1930’에서 뻗어나가는 딱한 담그림을 보다가, 얼마 앞서 이슬로 떠난 김구연 님을 떠올립니다. 송월동 골목집에서 달개비 파란꽃을 그윽히 사랑하며 지켜본 김구연 님은 들꽃빛을 담은 글자락을 남겼어요. 손에 힘이 다하여 더는 종이를 넘길 수 없는 날까지 꾸준히 책읽기를 품으면서 넋을 가꾸었어요.


  책을 읽어야 마을이나 골목을 알지 않습니다. 숱한 책을 두루 읽으면서 마음을 일구어야 인천을 속속들이 헤아리면서 담그림을 펼 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배다리 책골목이라는 데에 깃들어 ‘문화예술’을 펴려 한다면, 사나흘에 하루쯤 책집마실을 하면서 책을 장만하고, 여러 책집지기님 삶자락에 오래오래 밴 책빛을 듣고 살펴보면서 ‘벼가 익듯’ 고개를 숙이면서 배울 노릇입니다.


  푸른씨(청소년)는 어른씨가 무엇을 보여주거나 얘기하거나 밝히려 하는지 궁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지켜봅니다. 푸른씨는 어른씨가 대단한 것을 보여주거나 얘기하거나 밝히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별처럼 빛나는 씨앗을 보여주거나 얘기하거나 밝히기를 바라고 기다립니다. 우리 나이가 이미 푸른씨 나이를 훌쩍 넘었더라도, 우리 마음은 누구나 푸르게 일렁입니다. 한해살이 풀꽃도 여러해살이 풀꽃도 해마다 해바람비를 새롭게 맞아들이면서 싱그럽습니다. 우리도 언제나 새롭게 책빛이며 골목빛이며 삶빛이며 사랑빛을 익힐 적에 비로소 사람빛을 펴리라 봅니다.


ㅅㄴㄹ


《文化 속의 數學》(김용운, 현암사, 1976.10.9.)

《獄中記·高原의 사랑》(루이제 린저/김문숙·홍경호 옮김, 범우사, 1975.9.25.첫/1982.8.10.3벌)

《그런 의미에서》(임후성, 문학과지성사, 1997.7.15.)

《학교는 오늘도 안녕하다》(배상환, 나남, 1988.3.5.첫/1989.1.5.5벌)

《두고 온 시》(고은, 창작과비평사, 2002.1.15.)

《한글세대를 위한 불교》(E.콘즈/한형조 옮김, 세계사, 1990.3.20.첫/1990.6.30.3벌)

《까치가 감나무에게 들려 준 동화들》(이동렬 글·이영원 그림, 늘푸른, 1991.11.30.첫/1992.11.20.2벌)

《실록연작시 지리산》(이기형, 아침, 1988.12.15.)

《베트남戰爭》(리영희, 두레, 1985.5.5.)

《일송정 푸른솔은》(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엮음, 삼민사, 1988.8.15.)

《자유인이 되기 위하여 3》(지두 크리슈나무르티/안정효 옮김, 청하, 1982.11.20.첫/1991.1.25.2판)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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