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그리는 마음 (2023.6.17.)

― 서울 〈악어책방〉



  1995년 11월에 논산으로 가는 칙폭길에 오르면서 설마 강원 양구 멧골짝에서 싸울아비(군인)로 지낼 줄 몰랐습니다. 1996년 2월에 맨눈으로 금강산을 바라보며 총을 쥐고 오들오들 떨 적에 옆에서 병장 씨가 “얌마, 저게 금강산 4대 봉우리다. 앞으로 실컷 봐라. 난 곧 사회로 돌아간다. 히히!” 하고 이기죽거릴 적에, 저도 삶터로 돌아갈 수 있을 줄 몰랐습니다. 1997년 12월에 ‘각티슈’에 흰종이를 바르고 겉에 ‘투표함’이라 적고는 ‘대통령선거 부재자투표’를 할 줄 몰랐습니다. 눈밭에 쌓인 도솔산을 드디어 떠나던 날 새뜸나름이(신문배달부)를 그만둘 줄 몰랐습니다. 새뜸나름이를 그만두고서 ‘보리 출판사’ 영업부 일꾼으로 뽑힐 줄 몰랐고, 2001년 1월 1일부터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자료조사부장’으로 일할 줄 몰랐고, 2003년 8월 25일에 쓴 글자락이 징검돌이 되어 ‘이오덕 어른 유고정리’를 맡을 줄 몰랐어요. 한 해 동안 충북 충주 무너미마을에서 서울로 이레마다 두바퀴(자전거)로 150킬로미터 길을 오갈 줄 모르기도 했고, 2007년 2월까지 읽고 건사한 책으로 ‘책마루숲(서재도서관)’을 열 줄 모르기도 했지만, 짝을 만나 아이를 둘 낳을 줄 모르기도 했고, 어머니 뱃속에서 먼저 떠난 핏덩이 둘을 나무 곁에 묻을 줄 모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23년에 서울 〈악어책방〉에서 서울 어린이랑 노래꽃수다(시창작교실)를 꾸릴 줄 까맣게 몰랐어요. 그러나 이 모든 발걸음은 스스로 삶을 짓는 하루였고, 새롭게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짓는 밑거름입니다. 이른바 ‘금강산 관광’은 엄두도 못 냈으나, 1996∼97년 이태에 걸쳐 날마다 금강산을 보았어요. 해병대 사람들이 ‘도솔산’을 그렇게 기리는지는, 나중에 서울 홍대 앞 〈온고당〉 책지기를 만나고서야 알았습니다.


  두 아이를 천기저귀로 똥오줌을 가리는 동안, 아기수레를 안 쓰고 안고 업으면서 돌보는 동안, 큰고장을 떠나 두멧시골 고흥에서 보금숲을 천천히 짓는 동안, ‘모든 말은 숲에서 비롯한’ 줄 느슨히 깨닫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숲사람이었고, 오늘도 숲빛을 머금은 숨결입니다. 비록 이제는 숲사람 아닌 서울사람(도시인·시민)이라 여기는 분이 아주 많습니다만, 해바람비를 머금어야 목숨을 잇는 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쓰는 모든 말에는 햇빛에 바람빛에 비빛이 서립니다. 숲빛으로 푸르게 일렁이는 말 한 마디가 생각씨앗 한 톨을 살찌우는 바탕입니다. 아무 말이나 하기에 ‘아무나’이지만, 마음을 고르고 생각을 가눌 적에는 ‘누구나’로 피어나요. 그리는 마음이 자라 ‘글’이 태어난걸요.


《소란이 새어들지 않는 곳》(고선영·김금주·박승보·배배·이상오·정세리·허현진, 글을낳는집, 2023.1.16.)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책숲마실


아픈 마을 (2023.9.15.)

― 인천 〈오월의 제이크〉



  예전에 인천 시외버스나루가 있던 곳은 여러 마을이 맞닿았습니다. 버스나루는 용현1동이라면, 바로 옆은 용현5동이고, 기찻길 옆 사이로 숭의1동에, 길 건너 노란집이 줄지은 데는 숭의2동에, 연탄공장하고 제일제당이 깃들고 제가 살던 집이 있던 데는 신흥동3가였어요. 여기에서 나루 쪽으로 조금 가면 연안동이고, 옥련동하고 학익1동은 걸어서 가깝고, 신광초등학교 앞으로는 선화동인데, 신흥초등학교 쪽으로 건너가면 신흥동2가요, 안쪽은 신흥동1가이고, 인천여상 쪽으로 뻗으면 신생동에 사동으로 잇고, 곧이어 답동과 답동성당이고, 율목동하고 신포동이 큰길로 만나고, 싸리재를 끼고서 유동하고 인현동1가에 인현동2가가 맞물리고, 신포시장 쪽은 내동입니다. 배다리는 경동하고 금곡동하고 창영동하고 송림1동하고 맞닿습니다. 박문여고 쪽으로 가면 송림2동에 송림3동으로 잇다가 송림4동과 송림6동에 도화2동이고, 야구장 쪽으로 금곡동에 창영동에 숭의1동에 송림3동에 도원동이 맞물리고, 이윽고 수봉산 쪽으로 도화2동이고, 이윽고 널따란 주안동으로 이어요.


  이제는 옛골목이 거의 송두리째 헐렸으나, 아직 숭의1동 오랜 동무네 감나무집은 고스란합니다. 이 곁에 마을책집 〈오월의 제이크〉가 깃들었어요. 우리나라 어느 고장이 왁자지껄 허물고 부수고 올려세우지 않았겠느냐만, 인천 중·동·남구가 맞물린 골목마을은 끝없이 물결치는 아픈 마을이에요.


  책집에 깃들어 《제이크 하늘을 날다》라는 그림책을 떠올립니다. 작은책집은 작게 둥지를 틀기에 작게 빛납니다. 큰책집은 크게 터를 잡으며 크게 반짝이겠지요. 다 다른 우리는 다 다르게 책을 만나고 읽고 새기면서 마음을 나눕니다. 천천히 즐겁게, 나무가 자라듯, 해마다 풀꽃이 돋아나듯 하루를 노래하면 됩니다.


  우리나라는 거의 모든 곳에 담벼락(카르텔)이 섭니다만, 어떤 담도 사랑을 가두지 못 해요. 사랑을 담는다면 담벼락이 아닌 보금자리일 테지요. 눈먼 담벼락을 스스럼없이 치울 줄 알면서, ‘담벼락 글밭(카르텔 문단)’을 살랑살랑 거스른다면, 아니, “하늘을 나는 제이크”처럼 홀가분히 바람을 마시고 들숲을 노래한다면, 온나라에 마을책집이 골목빛에 푸른빛으로 어우러지리라 생각합니다.


  다쳐서 아픈 데는 해바람비에 풀꽃나무를 품으면서 시나브로 낫습니다. 들을 밀고 숲을 밟고 바다를 등지니 온나라가 아파요. 이제는 잿집을 허물고 부릉길을 걷어내어, 누구나 맨발로 뛰놀고 쉴 숲마을을 열어야지 싶습니다. 푸른살림을 들려주는 책을 손에 쥐면서, 푸른말로 속삭이는 마음을 가꾸어야지 싶어요. 책꾸러미를 지고서, 어릴 적에 걷던 길을 따라 용현동부터 배다리까지 천천히 걷습니다.


《중급 한국어》(문지혁, 민음사, 2023.3.3.첫/2023.5.25.3벌)

《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사울 레이터/조동섭 옮김, 윌북, 2018.5.30.첫/2022.4.30.고침)

《우리말 동시 사전》(숲노래·최종규·사름벼리, 스토리닷, 2019.1.15.)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책숲마실


토막토막 (2023.8.18.)

― 인천 〈나비날다〉



  고흥에서 끝내지 못 한 마감글을 붙잡고 시외버스를 달려 서울에 닿고는, 이수나루 언저리 〈알라딘 중고샵〉에 가서 자리 하나를 맡았습니다. 겨우 마감글을 보내고서 숨을 돌렸고, 인천으로 달리는 칙폭길에 노래꽃을 천천히 씁니다. 오늘은 송현동 골목을 따라 걸어서 배다리로 닿습니다. 먼저 〈나비날다〉부터 찾아가는데, 젊은이가 꽤 많습니다. ‘이분들은 다 책손님인가? 오늘은 붐비네?’ 하고 여겼지만, 책손님이 아닌 ‘15분 연극’을 하러 온 멋님(배우)이로군요.


  토막판(단막극)을 하는 분들은 책집에서 판놀이를 벌여도 책을 들여다보는 일이 드물 수 있습니다. 책집에서 뭘 찍는 분들치고, 책집에 느긋이 깃드는 발걸음을 거의 못 보았습니다. 노래그림(뮤직비디오)을 찍는 분들은 책시렁을 이리저리 바꾼다거나 책도 이래저래 바꿔치기를 해놓기 일쑤이더군요.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거나 바람이 불거나 구름이 흐르거나 해가 나거나 별이 돋는 날씨를 고스란히 살려서 노래그림을 찍는다든지 글을 쓴다든지 일을 하는 사람도 없다시피 하는 오늘날이에요. 딱히 누구를 나무랄 일은 없습니다.


  이원수 님이 남긴 노래(동시) 가운데 ‘씨감자’를 읽으면 “토막토막 자른 자리 재를 묻혀 심는다”란 대목이 있어요. 토막판을 여는 젊은이는 씨감자를 알까요? 씨감자를 어떻게 묻는지 알까요?


  우리는 무엇이든 다 알아야 하지는 않습니다만, 누구나 무엇이든 다 알아보고 알아차리고 알아갈 수 있어요. 마음을 틔우고 눈을 뜨는 사람이라면, 온누리 모든 수수께끼를 스스로 풀게 마련입니다. 생각해 봐요. 그리 멀잖은 옛날에는 온누리 누구나 손수 집밥옷을 짓고 나누었어요. 따로 책이나 배움터가 없더라도, 지난날 수수한 사람들은 사랑으로 짝을 맺어 아이를 낳아 오롯이 사랑으로 품고 돌보면서 말까지 알뜰살뜰 물려주었습니다.


  배다리 〈나비날다〉에서 큰판을 벌이든 작은판을 꾀하든, ‘나비’가 왜 나비인지를 알아보는 분이 늘기를 바라요. ‘날다’가 왜 날다라는 투박한 우리말인지 알아차리는 이웃이 늘기를 바라요. 냥이는 왜 나비를 그렇게 반기고 같이 놀면서 바람빛을 파랗게 머금으면서 사뿐사뿐 거닐 수 있을까요? 열두띠에 ‘고양이띠’는 없되 ‘범띠’는 있습니다. 범무늬를 담은 ‘범나비’가 있어요. 한마음 한뜻으로 사귈 줄 알 적에 ‘벗’입니다. 물가에서 살랑살랑 춤추며 푸르게 물드는 버드나무가 차츰 사라지고 버들피리를 불 줄 아는 어린이도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책집에서는 책을 보고 읽고 느끼고 나누는 토막판을 토닥토닥 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귀로 보고 손으로 읽으면》(호리코시 요시하루/노수경 옮김, 김영사, 2023.8.4.)

《고양이를 찍다》(이와고 미츠아키/박제이 옮김, 야옹서가, 2019.8.26.)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벽 여섯 시부터 자전거를 달서
고흥읍으로 나온다.

오늘도 여수로
문해력수업을 간다.

즐겁게 이야기꽃을 펴자.
여수 어린씨랑 오늘은
'비'를 얘기할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제는 07:20
오늘은 06:20
고흥읍에서 여수 가는 시외버스를 탄다.
이때에 타려면
두바퀴를 몰아야 한다.

어제는 구름길
오늘은 빗길

두바퀴를 달리며
오늘날 '어른 아닌 꼰대'를
한참 돌아본다.

고흥은 유난히 버스나루에서
담배 꼬나무는 아재가 많다.
이들은 고흥읍 버스나루에
20군데 넘게 붙은 '금연'이란 글씨를
못 읽는다.

한글을 못 읽는 그대들은
그저 꼰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