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전라도닷컴> 2019년 8월호에 실었습니다.


..


숲에서 짓는 글살림

35. 가시버시


  제가 여덟아홉 살 무렵이던 어린 날은 1980년대 첫무렵입니다. 이즈음 할아버지 할머니 가운데 ‘남녀칠세부동석’ 같은 말을 읊던 분이 있었어요. 또래끼리 가시내이든 사내이든 섞여서 놀면 몹시 못마땅하다면서 서로 갈라야 한다고 나무라곤 했습니다.


  가만 보니 할머니는 으레 할머니끼리만 어울리고,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끼리만 어울리더군요. 이런 흐름은 배움터에서 고스란히 드러나, 여느 때에는 가시내랑 사내를 안 가리고 잘 놀다가도 ‘가시내 쪽’하고 ‘사내 자리’로 가르기 일쑤였어요.


  ‘여자 쪽’에서는 더러 ‘남녀’란 말이 안 내킨다고, ‘여남’이라 말해야 한다는 소리가 불거졌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 보니 고개를 끄덕일 만해요. 여느 어른은 으레 ‘아들딸’이라고만 말합니다만, ‘딸아들’이라 말해도 되는데 말이지요.


딸아들 : x

아들딸 : 아들과 딸을 아울러 이르는 말

여남 : x

남녀(男女) : 남자와 여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


  이쯤에서 국립국어원 낱말책을 뒤적이겠습니다. 나라에서 내놓는 낱말책을 보면 ‘아들딸’만 올림말입니다. ‘딸아들’이란 낱말은 없어요. 한자로 ‘여남’은 없고 ‘남녀’만 올림말로 있어요. 이 대목이 옳지 않다고 여겨서 따진 적 있는데, 아직 국립국어원에서 아무 대꾸를 하지 않습니다.


  어릴 적에 둘레 어른들한테 ‘남녀’를 가리키는 우리말은 없느냐고 곧잘 여쭈었습니다. 이때에 마땅하다 싶게 대꾸해 준 분이 없어요. 이러다가 열한 살 즈음이지 싶은데, 그때 길잡이(교사) 한 분이 이모저모 한참 알아보시고는, ‘남녀’를 가리키는 우리말은 못 찾았지만 ‘가시버시’라는 낱말은 있다고, 남녀는 아니고 부부를 가리키는 낱말이라고 알려준 적 있습니다.


가시버시 : ‘부부’를 낮잡아 이르는 말

부부(夫婦) : 남편과 아내를 아울러 이르는 말 ≒ 내외·부처·안팎·이인·항배


  국립국어원 낱말책을 다시 살핍니다. ‘가시버시’는 낮춤말로 여깁니다. 이 대목을 그러려니 하고 지나칠 수 있습니다만, ‘부부’ 뜻풀이를 보며 고개를 갸웃할밖에 없습니다. ‘안팎’이란 낱말은 ‘내외’란 한자말을 그대로 풀어낸 낱말일 텐데, 일본을 거쳐 들어왔다고 여길 만합니다. 일본에서는 두 곁사람 가운데 사내 쪽은 ‘주인’으로, 가시내 쪽은 ‘내자’라는 한자말로 가리키곤 합니다. ‘바깥사람·안사람(아내)’은 모두 일본말씨에 물들어 퍼졌다고 할 만해요.


  새삼스레 따질 노릇이라고 여겨요. 예전에 이 땅에서 한자를 쓴 이는 매우 드뭅니다. 이들은 모두 힘바치(권력자)나 글바치(지식인)인데 0.01퍼센트가 안 되었어요. 99.99퍼센트에 이르는 이들은 손수 흙을 일구고 옷밥집이란 살림을 스스로 지어서 누린 수수한 시골사람이에요. 예부터 거의 모든 사람들은 수수한 우리말인 사투리를 썼어요.


  간추려 본다면, ‘가시버시’는 오래된 우리말입니다. 아주 오랫동안 쓰던 낱말이요, 힘바치하고 글바치가 중국말을 섬기면서 마치 낮춤말이라도 되는 듯 깎아내리거나 짓밟느라 밀려난 낱말입니다.


 가시버시 : 가시 + 버시


  낱말을 뜯어 볼게요. ‘가시 + 버시’이니 ‘가시버시’입니다. ‘가시’는 누가 보아도 ‘가시내’를 가리키는 이름인 줄 알 테지요? ‘가시 + 버시’ 얼개라서, 겉모습만 보고 문득 ‘뾰족하게 찔리는 가시’를 떠올릴 분이 있지 싶은데요, 그 결도 틀림없이 이 낱말에 깃듭니다만, 더 뿌리를 캐 보겠습니다.


 (가시 = 가시내) + (버시 = 벗) = 가시버시(갓이 + 벗이 = 갓 + 벗)


  ‘가시내·사내’에서 ‘내’는 ‘네’처럼 사람(집)을 가리키는 자리에 붙이는 말입니다. 밑말은 ‘가시’요, 이는 ‘갓’ 꼴로 씁니다. 사내를 가리키는 ‘버시’도 이와 같아서 ‘벗’ 꼴로 쓰기 마련입니다. ‘동무’하고 맞물리거나 비슷하지만 다른 ‘벗’이라는 낱말이 으레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가를 아스라이 예전 살림자리에서 되새기면 좋겠습니다. ‘동무’라는 낱말은 가시내랑 사내를 가리지 않고 쓰던 말이라면 ‘벗’이라는 낱말은 으레 사내끼리 사귀는 사이에서 쓰던 말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다음으로 ‘갓’은 두 갈래 쓰임새가 있는데, 첫째는 ‘메·봉우리’입니다. 이른바 ‘산(山)’을 가리키는 낱말이에요. ‘멧갓’이라고도 쓰는데, 봉우리가 어떤 모습인지 그려 보셔요. 아래쪽은 펑퍼짐하게 넓으나 위로 갈수록 좁아지면서 마침내 뾰족한 꼴입니다. 이러한 꼴을 따서 머리에 얹는 것을 두고도 ‘갓’이라 했고, 요새는 한자말 ‘모자(帽子)’를 쓰곤 합니다만, 해를 가리려고 머리에 쓰는 것을 ‘해가림갓’이라 할 만해요. 아무튼 ‘갓’ 하면 으레 조선이란 나라에서 나리(양반)가 쓰던 것만 떠올리는 분이 많으나, 머리에 쓰면 다 갓이라 했어요. ‘삿갓’이란 낱말은 아직 그대로 남았어요. 자, 이러다 보니 ‘갓·가시’가 얽혀, ‘가시 = 뾰족하다’로도 쓰임새가 이어갑니다.


 가시내는 멧갓


  그런데 생각해 보셔요. 오랜 텃말인 ‘가시버시’는 가시내를 앞에 놓은 이름입니다. 눈치를 채셨을까요? ‘버시가시’가 아니라 ‘가시버시’라 했어요. ‘가시집·가시어머니·가시아버지’ 같은 이름이 있는데요, ‘가시 = 뾰족함’이 자꾸 떠오른다면 ‘갓집·갓어머니(갓어미·갓어매)·갓아버지(갓아비·갓아배)’처럼 쓸 만합니다. 높다란 봉우리를 떠올리면서, ‘가시내(갓) = 봉우리’로 바라보는 마음으로 이 낱말 ‘가시버시’를 쓸 만하지요. 그래서, 이 낱말을 살짝 줄여 ‘갓벗’이라 해보아도 어울립니다.


  갓집이 있으니 ‘벗집’이 있고 ‘벗어머니(벗어미·벗어매)·벗아버지(벗아비·벗아배)’가 있습니다. 우리가 즈믄 해를 쓰던 낱말을 헤아리면 좋겠어요. 아니 오만 해나 십만 해를 쓰던 말씨를 되새기면 좋겠어요.


  그런데 있지요, 사내하고 가시내를 가리키던 이름을 파헤치노라면 ‘머스마·머시매’는 ‘머슴’하고 이어지는 고리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다 한뿌리인 말입니다. 일을 도맡아 하는 사내를 따로 ‘머슴’이라 했어요.


[숲노래 낱말책]

갓벗(가시버시) : 가시내하고 사내(머스마·머시매)를 아우르는 이름. 가시내하고 사내를 함께 가리키기도 하고, 둘이 짝을 맺어서 함께 살림을 짓거나 살아가는 사이일 적에 가리키기도 한다. 갓(가시)은 ‘가시내’를, 벗(버시)은 ‘사내’를 나타내는 이름이다.


  앞으로 우리 낱말책은 뜻풀이를 싹 손질해야지 싶습니다. 오랜 우리말을 낮추는 낡은 버릇을 치워내야겠고, 말이 흘러온 자취하고 뿌리하고 결을 제대로 살려서, 오늘날 새롭게 북돋아서 쓰는 길을 밝히기도 해야겠다고 느낍니다.


  ‘갓벗’이라 하면 단출하면서도 뜻이 확 드러납니다. 무엇보다 ‘남녀칠세부동석’ 같은 낡은 틀은 이제 치울 노릇이라고 생각해요. 갓님하고 벗님이 슬기롭게 어울리면서 살림을 사랑으로 짓는 길을 가르치고 배우고 나누고 노래할 노릇이지 싶습니다. 벗님하고 갓님이 서로 곁에 돌볼 줄 아는 님으로, 곁님으로서 보금자리를 살찌우는 새로운 숨결로 거듭나도록 말 한 마디에 싱그러이 손길을 보태면 좋겠습니다.


  어제는 ‘갓이’랑 ‘벗이’가 수수하게 만났다면, 오늘은 ‘갓님’하고 ‘벗님’이 어깨동무하는 웃음으로 마주합니다. 그리고 우리말 ‘가시버시’는 가시내(순이)를 앞에 놓고 사내(돌이)를 뒤에 놓습니다. 우리말은 예부터 가시내를 멧갓처럼 섬겼습니다. 우리 살림살이를 담은 쉬운 우리말을 쓰면 어깨동무(성평등)로 저절로 나아가게 마련입니다.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사전을 쓰는 사람.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을 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글은 <전라도닷컴> 2019년 6월호에 실은 글입니다.

이제 9월호 글을 한참 여미는데

문득 떠올라서 뒤늦게 걸쳐놓습니다.


..


숲에서 짓는 글살림

34. 타다



  몇 살 적 일인지 떠오르지 않지만 꽤 어릴 적이었습니다. 한창 부엌일로 바쁜 어머니가 저를 부릅니다. 두 손 가득 반죽이 묻은 어머니는 입으로 저한테 심부름을 시킵니다. “저기, 밀가루 좀 가져와.” 어머니 말대로 밀가루 담긴 자루를 찾습니다. 문득 어머니가 한 마디 보탭니다. “새것 타지 말고, 쓰던 것 옆에 있어.”


  우리는 입으로 말할 적에 임자말을 으레 건너뛰고, 꾸밈말도 잘 안 넣게 마련입니다. 글로만 적어 놓는다면 “새것 타지 말고 쓰던 것 옆에 있어”라 할 적에, 사이에 쉼표조차 안 넣으면 도무지 뭔 소리인가 알쏭달쏭할 만합니다. 그러나 입으로 말할 적에는 높낮이랑 밀고당기기를 하면서 소리를 내니, 이 말을 곧장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나저나 어머니가 저한테 심부름을 시킨다면서 살짝 곁들인 한 마디 ‘타다’는 아마 그때 그 자리에서 처음 들은 낱말 쓰임새였을 테지만, 마음에 깊이 남았습니다.


타다 1 ← 화재, 연소, 소각, 전소, 발화, 변하다, 변색

타다 2 ← 승차, 탑승, 등산

타다 3 ← 연주

타다 4 ← 선천, 태생, 선천적, 수령, 수취

타다 5 ← 조합, 혼합, 배합

타다 6 ← 부착, 영향, 당하다

타다 7 ← 분리, 개봉, 절개, 절단


  낱말책을 살피면 ‘타다’라는 우리말이 여러 갈래로 나옵니다. 우리는 그냥그냥 ‘타다’를 말하면서 살아갈 테지만, 막상 ‘타다’는 한 낱말이 아닙니다. 이런 ‘타다’가 있고 저런 ‘타다’가 있어요. 소리도 모습도 같으나 쓰임새나 뜻이나 결이 사뭇 갈리는 온갖 ‘타다’가 있습니다.


  “새것 타지 말고”라 이야기한 어머니는 ‘타다 7’, 그러니까 ‘새것을 뜯지 말라’는 뜻을 밝혔습니다. 한자말로 하자면 ‘개봉’쯤 되겠지요.


  어머니 심부름말을 듣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흥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때에 “박을 타는” 대목이 나와요. 어릴 적에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타다’라는 낱말을 썩 대수로이 여기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이러다가 아이들하고 모깃불을 태우면서, 또 아이들하고 시골버스를 타고 읍내로 저자마실을 다녀오면서, 아이들은 어떤 ‘타고난’ 아름다운 빛으로 우리 보금자리를 밝히는가 하고 생각하면서, 또 아이들이 가락틀(악기)을 ‘타’면서 저마다 싱그러이 노래를 베푸는가 하고 즐기면서, 또 아이들하고 매실물을 누리는 이 여름에, 게다가 “여름을 타”고 “가을을 타”고 “흐름을 타”는 우리 삶을 곱씹다가, 이 ‘타다’가 참 재미나구나 하고 깨달아요.


 타고 타고 타고


  불이 나기에 탑니다. 버스에도 비행기에도 탑니다. 때로는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꿈을 꿉니다. 제 등에 탄 아이들은 키가 커졌다면서 까르르 웃습니다. 찻물을 그릇에 타서 마시고, 우리 아이들은 저한테서 돈을 타서 씁니다.


  이것 참, 이 ‘타다’라는 낱말은 어느 자리 어느 살림에서 비롯했을까요. 오래되었으면서도 새롭게 쓰임새를 넓히는 이 낱말에는 어떤 힘이, 숨결이, 사랑이, 꿈이, 이야기가, 땀방울이, 눈빛이, 즐거움이, 보람이, 웃음하고 눈물이 서렸을까요.


 타는문 ← 승차문

 타고내리는문 ← 승하차문


  아직 국립국어원 낱말책에는 ‘타는문’ 같은 낱말이 안 실립니다. 우리가 눈여겨볼 수 있다면, 이제 어디를 가나 버스 앞쪽에 ‘타는문’이란 낱말이 적힌 모습을 알아챕니다. 참말로 버스마다 ‘타는문’이나 ‘내리는문’이라 적힌 지 오래되었어요. 이런 말씀씀이는 누가 시켜서 퍼지거나 자리잡지 않았습니다. 버스를 모는 일꾼들 손길에서, 버스를 타고내리는 사람들 마음길에서, 저절로 태어나서 시나브로 뿌리를 내리는 말씨입니다.


  ‘타는문’이란 낱말처럼 ‘타는곳’이란 낱말도 제법 가지를 뻗습니다. 기차나 시외버스를 타러 갈 적에 알림말로 으레 ‘타는곳’ 같은 말을 씁니다. 아직 ‘승강장’ 같은 한자말이나 ‘플랫폼’ 같은 영어로 알림말을 쓰는 데가 있기도 하지만, ‘타는곳’이란 말을 한결 널리 쓰는구나 하고 느껴요.


 타는곳 ← 승강장, 플랫폼


  ‘타는’을 두고 더 생각해 볼게요. 부릉이(자동차)를 타는 분들은 으레 “타는 맛이 있어야지.”처럼 말하곤 합니다. 똑같은 뜻으로 “승차감이 있어야지.” 하고도 말합니다.


 타는맛 ← 승차감


  말을 새로짓는 일이란 쉽습니다. 말을 하는 그대로 우리 삶을 드러내는구나 하고 느끼면서 즐겁게 주고받으면 되어요.


  이제는 버스마다 ‘타는문·내리는문’이라 글씨를 적어 넣습니다만, 처음에 이 글씨를 적어 넣을 적에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안 어울린다고 여긴 분이 제법 있는 줄 압니다. 쉬운 우리말을 쓰면 오히려 헷갈리거나 어렵다고 하는 목소리가 예전에 있었어요.


  그러나 이제는 ‘타는곳’ 같은 말까지 어느새 번집니다. 흐름을 타지요. 쉽게 말을 하고 글을 적으니 그야말로 쉽고 좋다고 느끼는 바람을 타지요. 어린이랑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같이 알아들을 만한 쉬운 말씨를 헤아리면서 쓰노라니, 참으로 즐겁고 어울리며 아름답네 하고 느끼는 기운을 탑니다.


 타는길 눈타기


  ‘타는맛’처럼 ‘타는멋’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타고다니면서 ‘타는길’을 찾을 수 있고, 톱질을 하거나 칼질을 할 적에 ‘타는길’을 꼼꼼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매실을 설탕에 절이든 온갖 풀을 설탕에 절이든, 이렇게 절여서 물에 타서 누리는 마실거리를 놓고서 ‘타는길’을 생각할 수 있어요.


  아이들은 말타기를 즐깁니다. 말을 타서 ‘말타기’라면, 자동차를 타면 ‘차타기’가 되겠지요. 자전거를 타면 ‘자전거타기’입니다. 바람이나 물을 타면 ‘바람타기’나 ‘물타기’가 되어요. ‘물타기’란 말은 또 다른 곳에서도 재미나게 쓰지요.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은 ‘물살타기’를 잘 하는 셈입니다. 그러고 보면 널빤을 바닷물에 얹어 ‘물결타기’를 하고, 겨울에는 ‘눈타기(눈길타기)’를 하면서 놀아요. 바다에서도 물결타기를 하지만, 여럿이 어깨동무를 하며 ‘물결타기’를 하면서 놀 수 있어요.


 마음타기


  옷살림을 건사하던 어른들은 솜을 탔고, 실을 탔습니다. 어른들 곁에서 ‘타는’ 모습을 지켜보고, 손놀림을 어깨너머로 배웁니다. 이러면서 어른들이 삶자리에서 조곤조곤 나누는 말을 온마음으로 배웁니다.


  우리 손을 타면서 살림이 정갈합니다. 책 하나는 여러 사람 손을 타면서 빛이 납니다. 책숲(도서관)뿐 아니라 숱한 마을책집이며 헌책집은 사람들 손을 타는 책에 사람들 마음도 눈길도 타도록 징검돌이 되는, ‘마음타기 쉼터’인 셈입니다. 네 손길을 타고 이곳에 온 책은 제 손길을 타면서 아이들한테 흐릅니다. 이 흐름을 타고서 온갖 이야기가 자랍니다.


  이제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 볼까요. 저 별빛을 타고서 머나먼 별누리로 마실을 떠날까요. 우리 눈을 타고 이곳에서 싹이 튼 이야기 한 자락이, 여러 사람들 손길을 타고서 골골샅샅 퍼집니다. 작은 씨앗 한 톨은 숱한 새랑 풀벌레를 타고서 곳곳으로 흩어집니다. 저는 이 글자락에 제 걸음걸이를, 하루를, 살림꽃을 곱게 태워서 띄웁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사전을 쓰는 사람.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을 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라도닷컴> 2019년 6월호에 실은 글입니다.


+ + +


숲에서 짓는 글살림

33. 공놀이 좀 해볼랑가



  어릴 적에 살던 마을은 야구장하고 가까웠습니다. 저녁에 야구장에 불빛이 환하면 우리 마을에서도 알아볼 수 있었고, 때로는 야구장에서 들리는 우렁찬 소리를 들을 수 있었어요. 대단했어요. 다만, 제가 나고 자란 마을은 전라도 아닌 인천입니다. 제가 늘 지켜본 야구장에는 ‘삼미 슈퍼스타즈’라고 하는 이름으로, 늘 꼬래비에서 허덕이며 ‘언제 안 지는 모습을 볼 수 있나’ 싶은 기운이 흘렀습니다.


  오늘 저는 전라도에서 아이들하고 살아가는데요, 고흥 시골마을에서 야구를 보는 분은 없지 싶습니다. 괭이자루는 잡아도 공 치는 방망이를 잡을 일이 없겠지요. 그래도 인천에서나 전라도에서나 공을 치고받는 놀이를 바라보는 눈길은 매한가지라고 느끼면서 “자네, 공놀이 좀 해볼랑가?” 이야기를 적어 볼까 싶습니다.


 공을 치니께 야구요


  어릴 적을 떠올리면, 아무리 야구장 곁 골목집이나 기찻길집에 살던 동무라 해도 야구를 모를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오가지요. “야, 넌 야구도 모르냐? 야구장 옆에 살면서?” “야구가 뭔데?” “아이구 참, 공을 던지면 치는 거.” “공을 던지면 치는 게 야구라고? 그럼 공치기이네.” “‘공치기’하고 ‘야구’는 다르지.” “공을 친다면서? 공을 치면 ‘공치기’이지, 그게 뭐야.”


  생각해 보면 그래요. ‘야구’는 ‘野球’라는 한자로 적는데, 일본사람이 옮긴 한자말이겠지요. 영어로는 ‘baseball’이에요. 영어하고 한자말은 결이 다르지요. 영어라면 ‘깔개(base) + 공(ball)’이고, 한자말이라면 ‘들(野) + 공(球)’입니다. 어째 좀 엉성한 이름 아닐까요? 오늘날 우리는 그냥그냥 쓰지만, ‘공치기’라든지 ‘들공’이나 ‘들공놀이·들공치기’라 할 만도 하겠습니다.


 던지니께 투수요


  야구를 모르는, 그렇지만 ‘공치기’인 줄 알겠다는 동무를 불러서 한판 끼우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놀이를 하자면 사람을 채워야 하거든요. 꽤 많이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두 쪽으로 갈라 아홉씩, 모두 열여덟은 있어야 합니다. 이때 또 이런 말이 오갑니다. “근데 어떻게 하냐?” “어떻게 하긴, 투수가 던지면 타자는 쳐.” “‘투수’는 뭐고, ‘타자’는 뭐냐?” “참 나, 하나도 모르는구나. ‘투수’는 던지는 사람이고, ‘타자’는 치는 사람이야.” “뭔 말인지 모르겠지만, 던지는 사람이 던지고, 치는 사람은 친다는 소리이네?” “그래, 투수가 던지면 포수가 받지.” “‘포수’는 또 뭐냐?” “포수는 받는 사람이야.” “야, 무슨 공놀이를 하는데 이렇게 말이 어렵냐? 도무지 못 하겠다.”


  웃기자고 늘어놓는 말이 아닙니다. 참말로 이런 이야기를 한 적 있습니다. 야구장 옆에 살지만 야구에는 도무지 마음이 없는 동무를 데려와서 끼우려니 참으로 골이 아파요. 아니, ‘공격·수비’란 말도, ‘1루·2루·3루·홈’이란 말도, ‘스트라이크·볼·포볼·아웃·세이프’라는 말도, 공치기가 낯선 동무한테는 모두 어질어질할 뿐입니다.


  문득 생각에 잠깁니다. 동무 말이 틀리지 않아요. 던지는 사람이라면 ‘던짐이’라 하고, 받는 사람이라면 ‘받는이’라 할 만합니다. 치는 사람은? ‘침이’는 좀 엉성하고, ‘때림이’쯤이면 어울릴까요?


 죽었나 살았나


  공을 치고받는 놀이를 처음 하려는 동무하고 나란히 앉아서 지켜보기로 합니다. 같이 지켜보면서 하나하나 짚어 주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얼른 ‘송구’해!”란 말을 듣더니 ‘송구’는 또 뭐냐고 묻습니다. “‘던지라’는 뜻이야.” “던져야 하면 ‘던지라’고 하면 되지, 왜 이렇게 어렵게 말하냐?”


  타자, 아니 때림이가 방망이를 휘두릅니다. 누구는 ‘방망이’라 하고, 누구는 ‘배트’라 합니다. 섞인 두 말을 들은 동무는 또 묻지요. “‘방망이’는 뭐고, ‘배트’는 뭐냐?” “응, 둘 다 같은 걸 가리키는 말이야.” “같은 거라면서 왜 말이 다르냐구?” “그게, 하나는 영어이고, 하나는 우리말이야.” “뭔 공을 치는 놀이를 하면서 영어까지 다 써야 하냐. 우리말로는 못 하냐?” “난들 아니. 텔레비전을 보면 다들 두 가지 말을 써.”


  드디어 깡 소리가 나면서 공을 때립니다. 또는 칩니다. 통통 튀는 공을 받아서 던집니다. 어린이끼리 하는 공치기이니 으레 옥신각신합니다. “세잎이야!” “아니 아웃이야!” “아니야, 세이프라고!” “세잎!” “아우트!” 동무는 또 묻지요. 어쩔 수 없습니다. 어린이로서 ‘세입·세이프·세잎’하고 ‘아웃·아우트’란 말이 섞입니다. 게다가 “살았어!” “죽었어!” 같은 말도 섞여요. 동무가 묻기 앞서 손부터 살레살레 젓습니다. “공을 쳤으면 저쪽에 깔아놓은 천조각을 빨리 밟아야 해 …….”


 왼날개도 오른날개도 어지러워


  가만 보니 야구라 하는 공치기에 동무를 섣불리 끌어들일 수 없구나 싶습니다. 어쩐지 동무한테 미안합니다. 공을 쳐서 하늘로 뜨면 ‘뜬공’일 텐데 ‘플라이볼’이라고들 합니다. 공을 쳐서 땅을 구르면 ‘구름공(구르는공)’이나 ‘땅공’일 텐데 ‘땅볼·바운드볼’이라 합니다.


  저절로 한숨이 나옵니다. ‘포볼·볼넷’이라 섞어 쓰는 말도, 또 “들어왔어!” “안 들어왔어!” “스트라잌이야!” “볼이야!” 하고 섞어 쓰는 말도, 이밖에 이런저런 때에 쓰는 요런조런 말을 놓고서 머리가 핑핑 돕니다.


  같이 야구, 아니 공치기를 하던 동무들한테 미안하다고 말하고서 먼저 일어나기로 합니다. 야구장 옆에 살지만 야구를 모르는 동무를 집에 데려다주기로 합니다. 둘이 터덜터덜 걸으며 조용합니다. 할 말이 없더군요. 저는 다른 동무들하고 으레 공치기를 했던 터라 공치기에서 쓰는 온갖 말이 어떤 말인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서 그냥 썼어요. 어른들이 쓰는 말을 고스란히 따라서 썼지요. 바른 말 그른 말을 떠나, 한국말이냐 아니냐를 떠나, 왜 어떤 뜻으로 그 자리에 쓰는가를 제대로 짚는다거나 헤아린 적이 없구나 싶더군요.


  서로 처음 맞붙을 적에 외치던 ‘플레이 볼!’도, ‘좌익수·중견수·우익수’가 뭔지 풀이해서 알려주려던 말도, 어떤 어른이 왜 이런 이름을 붙여서 쓰는가를 참으로 그때까지 생각한 일이 없다고 새삼스레 깨달았습니다. 어른들이 그냥 쓰는 말을 멋모르고 따라하면서 ‘전문 야구용어를 쓰니까 멋지다’는 마음, 이른바 겉치레에 빠져들고서 겉치레인 줄 몰랐구나 싶었어요.


 ‘체육’은 뭘까?


  학교에 ‘체육(體育)’이란 이름인 수업이 있습니다. 학교에 ‘운동장(運動場)’이란 이름인 너른터가 있습니다. 학교를 다니며 이런 이름을 곧이곧대로 외워서 쓰기만 했습니다. 가만 보면, 교사인 어른 가운데 이런 이름을 제대로 풀이해서 들려준 분은 없었지 싶습니다. 어른들도 다른 사람들이 지어 놓은 이런 말을 그냥그냥 따라서 쓸 뿐입니다.


  몸을 가꾸거나 기른다면 ‘몸가꾸기’ 같은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요? 움직이는 곳이라면 ‘움직마당’ 같은 이름을 붙일 만할까요? 학교에서는 ‘몸가꾸기’라든지 ‘놀이마당·어울림마당’ 같은 이름으로 쉽게 고쳐서 쓸 수도 있습니다. 이른바 전문말이라 하더라도 전문꾼 자리에 선 사람끼리 알아들을 말이 아닌, 전문꾼 아닌 자리에 있는 여느 사람 누구나 곧장 알아들으면서 어깨동무할 만한 말을 새롭게 생각하고 살펴서 하나씩 보듬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길이름(도로명)으로 사는터(주소) 이름을 바꾸었는데, ‘광주’란 이름도 ‘빛고을’로 바꿀 수 있을까요? ㅅㄴ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에서 짓는 글살림

32. 실컷



  고흥읍에 볼일을 보러 가서 걷습니다. 세거리 한켠에 있는 밥집에 적힌 글월이 문득 보입니다. “무한리필(1인).” 우리 집 어린이는 이 글월을 못 알아봅니다. 적히기로는 틀림없이 한글이로되 ‘한국말’로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 집 어린이하고 “무한리필 고깃집”에 간 적이 없어서 이 말을 모를 수 있어요. 그러나 그곳에 간 적이 있든 없든 ‘무한리필’이라는 글월은 어른들이 썩 잘 지어서 쓰는 말씨가 아니라고 느낍니다. 어설프거나 서툴거나 엉성하거나 어리숙하거나 얕거나 모자란 채 쓴 말씨라고 느껴요. 또는 깊은 마음이나 사랑이 없는 채 그냥그냥 쓰는 말씨라고도 할 만합니다.


 실컷 먹으렴

 마음껏 먹자

 얼마든지 먹어

 배불리 먹으렴


  조금만 생각해도 ‘무한리필’이란 말씨가 퍼지기 앞서 우리가 어떤 말을 썼는지 알아낼 수 있습니다. 고깃집에서든 어디에서든 알맞을 뿐 아니라 아름답거나 즐겁거나 사랑스러운 마음을 나눌 만한 말씨를 헤아릴 수 있어요.


 먹고 싶은 대로 먹자

 먹고픈 대로 먹자


  가만 보면, 어느 풀그림에서 ‘무한도전’이란 이름을 써요. 끝없이 부딪힌다는 뜻으로 ‘무한도전’일 텐데, “끝없이 부딪히기”처럼 수수하게 이름을 쓸 수 있습니다. 짧게 네 글씨로 쓰고프다면 ‘끝장보기’이라 써도 어울립니다.


  어느 이름이든 처음부터 어울리거나 마음에 들 수 있어요. 때로는 쓰고 쓰면서 어울리는구나 싶거나 마음에 들곤 해요. 멋들어진 이름을 곧장 지어내어 널리 쓰기도 하지만, 수수하구나 싶은 이름을 지어서 쓰는데 시나브로 멋이 살아나면서 담뿍 사로잡히기도 해요.


  어떻게 먹으면 좋을까요? ‘배불리’ 먹을 수 있어요. ‘실컷’ 먹거나 ‘마음껏’ 먹을 수 있어요. 고깃집에서는 “배불리 드셔요”나 “실컷 드셔요”나 “마음껏 드셔요” 같은 이름을 내붙일 수 있습니다.


 세거리·네거리·닷거리


  길거리는 한길로 곧게 나기도 하지만, 두 갈래로 퍼지기도 하고, 세 갈래나 네 갈래로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때에 저는 ‘세거리·네거리·닷거리’라 말해요. 셋으로 갈리니 ‘세거리’이고, 다섯으로 갈리니 ‘닷거리’예요.


  자동차를 얻어타서 함께 갈 적에도 으레 ‘세거리’나 ‘네거리’라 말하는데, 이렇게 말하면 자동차를 몰던 분은 못 알아듣곤 해요. 그래서 ‘사거리·오거리’로 다시 말하기도 합니다. 한국말 ‘셋·넷·닷(다섯)’이 어려울까요? 아니면 우리는 한국말로 숫자를 세거나 거리를 읽는 눈썰미가 아직 없을까요? 길거리를 한국말로 읽을 줄 모르거나, 이렇게 읽는 깜냥을 익힌 적이 없는 셈일까요?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 둘이라 ‘두길(이차선)’이라 하고, 길이 셋이라 ‘세길(삼차선)’이라 하며, 길이 넷이라 ‘네길(사차선)’이라 합니다. ‘두길·세길·네길’은 교통방송 같은 곳에서 쓸 수 없는 말씨일까요, 아니면 앞으로는 쓸 수 있는 말씨일까요?


  이제 다들 아무렇지 않게 쓰는 ‘나들목’ 같은 이름은 1990년대가 저물 즈음 비로소 퍼져서 자리잡았습니다. 그래도 아직 영어로 ‘IC’나 ‘인터체인지’를 쓰는 분이 꽤 있습니다. 입이나 손에 붙은 말씨를 못 털어낸달 수 있고, 스스로 생각을 가누어 씩씩하게 새로운 말씨로 거듭나려는 몸짓이 못 된달 수 있습니다.


  꼭 이 말을 써야 하지 않습니다. 이 말에 얽힌 삶하고 살림을 헤아리면서 이 말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몸으로 녹여낼 적에 스스로 마음이며 삶이며 살림을 새롭게 가꾸는 길을 열 만합니다.


  집에서 살림하는 사람을 두고 ‘가정부’나 ‘주부’란 이름을 그냥그냥 쓰는 분이 많습니다만, 가시내뿐 아니라 사내 스스로 집에서 살림하는 길을 걷는다면 이런 말씨를 하루아침에 털어낼 만하리라 여겨요. 생각해 봐요. ‘가정부·주부’는 가시내만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사내가 집에서 살림을 한다면 이 이름이 안 어울릴 테지요. 그러면 어떤 이름을 쓰면 좋을까요?


  예부터 쓰던 ‘살림꾼’을 쓰면 되어요. 집에서 짓는 살림을 즐겁고 슬기로우며 사랑스레 마주할 줄 안다면, ‘살림꾼’이란 이름을 ‘살림님·살림지기’처럼 손질해서 쓸 수 있어요. 때로는 ‘살림순이·살림돌이’처럼 쓸 수 있고요.


 시골순이·시골돌이


  어느 책을 읽는데 ‘촌부’란 낱말이 나옵니다. ‘촌부’는 뭘까요? 사전을 살피면 ‘촌부(村夫)·촌부(村婦)’ 두 가지가 있네요. 한자를 달리 적으면서 두 사람을 가리킨다는데요, 시골에서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또는 시골에서 지내는 아주머니 아저씨를 ‘촌부(村夫)·촌부(村婦)’라 가리키는 이름이 어울릴까요, 아니면 ‘할아버지·할머니’라 하거나 ‘아저씨·아주머니’라 할 적에 어울릴까요?


  때로는 ‘할배·할매’나 ‘할아방·할마씨’라 할 수 있겠지요. 고장마다 달리 쓰는 말씨를 살려서 할아버지나 할머니나 아저씨나 아주머니를 가리킬 만해요.


  글을 쓰는 분들은 글멋에 빠진 나머지, 몸으로 살림을 지으면서 입으로 나누던 수수한 말맛을 잊기 일쑤입니다. 우리 곁에 있는 고운 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시골에 사는 사람을 두고 ‘시골순이·시골돌이’라 할 수 있어요. ‘촌년·촌놈’이 아니고 말이지요. 이와 맞물려 서울에서 사는 사람을 두고도 똑같이 ‘서울순이·서울돌이’라 할 만합니다.


 살림말


  책으로 배운 분은 곧잘 ‘생활어·생활언어’를 이야기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쩐지 귀가 간지럽습니다. ‘생활어·생활언어’는 도무지 삶이나 살림이나 살갗에 와닿지 않아요. 어쩌면 삶이며 살림이며 살갗하고 동떨어진 말씨가 ‘생활어·생활언어’ 같은 모습이리라 느낍니다. 이런 말씨를 쓰는 분들은 삶하고 너무 먼 탓에 삶을 고스란히 담는 말을 느끼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나타내지도 나누지도 사랑하지도 못하는구나 싶어요.


  살림을 하면서 짓거나 쓰거나 나누기에 ‘살림말’입니다. 삶을 누리거나 짓거나 가꾸면서 쓰기에 ‘삶말’입니다.


  여기에 다른 말을 더 헤아리고 싶어요. 무엇보다 서로 사랑을 하면서, 스스로 사랑을 길어올리면서 ‘사랑말’을 쓰고 싶습니다. 함께 짓거나 스스로 이루려는 꿈을 바라보면서 ‘꿈말’을 쓰고 싶어요.


  잘잘못을 가다듬거나 손질하는 ‘손질말(순화어)’이 있어요. 손질해서 써도 좋지요. 그런데 어떤 말을 이래저래 손질하거나 말거나, 언제나 밑바탕에는 살림하고 삶하고 사랑을 두어야지 싶습니다. 살림꽃을 피우듯 말을 하고, 삶꽃을 나누듯 말을 하며, 사랑꽃으로 잔치를 벌이듯 말을 하면 좋겠어요.


  일부러 멋스러이 말을 하거나 글을 쓰지는 않기를 빕니다. 살림하듯 말을 해요. 살아가는 결을 고스란히 말로 담아요. 그리고 사랑하는 손길이며 눈길이며 마음길이며 발길이며 몸길이며 꿈길로 글 한 줄을 써요. ㅅㄴㄹ


숲노래 : 전남 고흥에서 ‘사전 짓는 책숲’을 가꾸면서 한국말사전을 새로 쓴다. 《우리말 동시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같은 책을 썼다. hbooklove@naver.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에서 짓는 글살림

30. 못 알아듣겠소만



  ㅇ이라는 매체에서 제 사진을 몰래 가져다가 쓰면서 그 사진이 마치 ㅇ이라는 매체 것인 듯이 다뤘습니다.


  자, 저는 두 가지 말을 썼어요. ㅇ이라는 매체가 “몰래 가져다가 썼다”는 말이랑 “저희 것인 듯이 다뤘다”고 했습니다. 이를 법으로는 “저작권 침해” 또는 “무단 도용”이라 하고, “성명표시권 위반”이라 합니다. 앞엣말은 우리 집 아이들한테도 들려줄 수 있으나, 뒤엣말은 아이들이 못 알아들어요. 더구나 뒤엣말은 곁님도 못 알아듣습니다.


  제 사진을 몰래 가져다쓴 곳은 저한테 “잘못했습니다” 하고 밝히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사과’를 하지 않았어요. 이때에도 두 갈래 말이 있어요. 아이들은 ‘사과’라는 한자말을 못 알아듣기 마련입니다. 어른들이 으레 쓰니 그냥 따라서 쓸는지 몰라도 말뜻은 제대로 모르지요. 생각해 봐요. 아이들한테 ‘사과’란 ‘능금’이란 열매입니다. ‘능금’을 가리키는 ‘사과’도 한자말이지만, 먹는 열매인 ‘사과’는 누구나 알아들어요.


  아무튼 ㅇ매체하고 전화로 얘기를 할 적에 물어봤지요. “잘못을 한 줄은 아십니까?” 하고요. 이때에 그곳 기자는 “좋은 뜻으로 썼는데…….” 하고 대꾸합니다. 이런 대꾸를 들으며 매우 어이없기도 하고 바보스럽기도 하구나 싶었습니다. 좋은 뜻이라면 거꾸로 그 매체에서 쓴 글이나 사진을 제가 마음대로 가져다가 몰래 써도 되려나요? 설마 그러지는 않겠지요. 그 매체에 깃들어 일한다는 변호사 한 사람이 저한테 누리글월을 띄웠는데, 이 누리글월은 꼭 한 줄짜리입니다.


* 회사 내부 품의로 인해 금액 지급까지 다소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변호사는 이런 말을 쓰는구나 하고 새삼스레 생각했습니다. 이러니 여느 사람들이 법하고 얽힌 일이 생기면 매우 힘들어하는구나 싶더군요. 왜 이 나라 법마을은 잔뜩 부풀리는 한자말을 즐겨쓸까요?

  그런데 ‘품의’란 뭘까요? 이 변호사한테 맞글월을 띄워 ‘품의’가 무슨 뜻인지 물었으나 다시 대꾸를 하지 않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저 스스로 사전을 뒤적이기로 합니다.


 [품의(稟議)] 웃어른이나 상사에게 말이나 글로 여쭈어 의논함


  ‘품의’란 한자말을 처음 들었습니다. 이런 말을 쓰는 사람이 있는 줄 처음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한자말을 쓰는 사람이 있으니 그 변호사는 저한테 이런 한자말을 끼워넣은 누리글월을 띄웠을 테지요.


  자, 곰곰이 생각해 봐요. 웃사람한테 어느 일을 어떻게 해야 좋겠느냐 하고 말을 걸 적에 가리키는 높임말이 있습니다. 바로 ‘여쭈다·여쭙다’입니다. ‘품의’ 뜻풀이에도 ‘여쭈어’라는 대목이 나와요.


  예부터 웃사람한테는 ‘여쭌다’ 하고, 또래나 손아랫사람한테는 ‘묻는다’ 합니다. 법마을에서도 ‘여쭈다·여쭙다’를 쓰면 될 노릇이라고 여깁니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쓸 적에 아름다이 어깨동무를 하는 터전을 이루리라 봅니다. ‘여쭈다·여쭙다’가 아닌 ‘품의’를 써야 높임말이 되지 않습니다. ‘품의’를 써야 법마을다운 말씨가 되지 않습니다.


  얼마 앞서 《타인을 안다는 착각》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책이름은 영 엉성하구나 싶습니다. 이렇게밖에 설익은 이름을 붙이나 싶어 아쉽습니다. 이러면서 생각했어요. 저라면 책이름을 어떻게 붙일까 하고요.


 남을 안다는 설눈

 이웃을 안다며 설치기

 너를 안다며 설치다


  내가 아닌 사람은 ‘남’입니다. 나랑 맞댄다면 ‘너’입니다. 가깝게 여기고 싶으면 ‘이웃’입니다. 구태여 ‘타인’ 같은 한자말은 안 써도 좋습니다.


  다음으로 ‘설-’이란 말씨를 떠올립니다. ‘설익다’나 ‘설미지근하다’나 ‘설되다’나 ‘설자다’란 말이 있어요. ‘설다’에서 앞머리를 뗀 말씨예요. 제대로 되거나 있거나 하지 못하거나 않을 적에 ‘설-·설다’를 써요. 제대로 생각하지 않거나 바라보지 않는다면 ‘설생각·설살피다’나 ‘설눈·설짓’이라 할 만합니다. 그래서 설눈으로 본다거나 설짓을 일삼을 적에 ‘설치다’라 해요.


  ‘설-’을 붙이는 말씨를 새롭게 생각하노라니, ‘살-’을 붙이는 말씨는 어떤가 하는 생각이 잇따릅니다. ‘살-’을 붙인 낱말로 ‘살얼음·살얼음판’이 떠오릅니다. ‘살얼다’라 쓰는 분이 드문드문 있으나, 사전에는 이 낱말이 올림말로는 없습니다. “살짝 얼다”는 뜻으로 ‘살얼다’를 다룰 만합니다.


  이 얼거리를 바탕으로 “살짝 보다”를 ‘살보다’라 하거나, “살짝 읽다”를 ‘살읽다’라 할 만해요. 맛보기를 하듯 살짝 먹을 적에는 ‘살먹다’라 할 수 있어요. 낱낱이 듣지는 않지만 가볍게 듣거나 살짝 들으니 ‘살듣다’라 할 수 있고요.


  살짝 읽으니 ‘살읽다’라면, 어설피 읽으니 ‘설읽다’입니다. 살짝 들으니 ‘살듣다’라면, 어설피 들으니 ‘설듣다’예요. 아 다르고 어 다른 말씨라 하듯, ‘살-·설-’을 사이에 두고 요모조모 쓰임새가 맞도록 여러 말을 즐겁게 지을 수 있어요. 밑글을 가볍게 쓸 적에는 ‘살쓰다’요, 글을 썼다지만 영 어설프다면 ‘설쓰다’입니다. 가볍게 맛을 본 ‘살먹다’라면, 어설프게 먹어 맛도 모르겠고 배도 고프다는 ‘설먹다’가 되어요. 가볍게 ‘살웃음·살웃다’라면, 웃는지 우는지 영 아리송한 ‘설웃음·설웃다’가 되어요.


  ㄷ이란 일터에서 ‘내부고발’을 했다는 분이 여러 해째 모질게 시달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잘못이 바로잡히기를 바라면서 속얘기를 밝혔다는 그분은 끔찍하도록 들볶인다고 해요. 나라를 다스리는 꼭두머리를 갈아치워도 이런 일은 끊이지 않는다니 안타깝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어떤 이웃님은 ‘내부고발’이 아닌 ‘공익제보’를 했다고 말해야 올바르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그렇지요. ‘공익’을 바라는 목소리를 냈다고 여겨야 알맞겠지요.


  한 가지 일을 놓고서 바라보는 눈이 달라요. 이러면서 우리가 쓰는 말도 다릅니다. 꾸밈없이 밝히거나 보여주는 말이 있다면, 뭔가 가리거나 꿍꿍이를 담은 말이 있습니다. ‘내부고발’하고 ‘공익제보’는 서로 어떤 목소리일까요?


  그런데 있지요, 두 가지 말 모두 아이들한테는 어렵습니다. ‘공익제보’로 쓰면 한결 낫기는 할 테지만, 아이들 자리에서 보면 이 말이나 저 말이나 무엇을 나타내는지 헤아리기가 만만하지 않아요.


 참소리. 참말


  바깥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참되지 않다면, 이는 거짓모습입니다. 여느 사람들은 참모습을 모르는 채 거짓모습을, 이른바 허울이나 껍데기만 본다고 할 만합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참모습을 늘 지켜보거나 알 테지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는 참모습을 밝히는 목소리라면 ‘참소리’라 할 수 있어요.


  바깥으로 알려지지 않은 모습을 환히 드러내려는 목소리를 ‘참소리’라 하면 어떠할까요? ‘내부고발’이나 ‘공익제보’를 이런 말씨로 담아내면 어울릴까요?


  아이들하고 함께 나눌 말씨를 헤아리니, 저라면 ‘참소리’나 ‘참말’이란 낱말을 쓰겠습니다. 때로는 ‘참외침’이나 ‘참뜻’이나 “참을 밝히다”라 할 수 있어요. 어른끼리만 나눌 말이 아닌, 어린이하고 어깨동무할 말을 쓰고 싶습니다. 못 알아듣겠는 어른 무리 말씨라든지, 슬픈 떼거리 얄궂은 말씨는 땅에 파묻어 거름이 되도록 하고 싶습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