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짓는 글살림

28. 장문의 글



  요즈음 분들은 ‘긴글’은 잘 안 읽을까요? 손전화를 오래 손에 쥔 채 하루를 누리다 보니 ‘짧은글’에만 익숙한 채 조금이라도 ‘짧지 않다’ 싶으면 죄다 ‘길구나’ 하고 여기지는 않을까요?


  이웃님이 저한테 글월을 띄울 적에 저도 맞글월을 띄워 줍니다. 때로는 다른 일을 하느라 깜빡 잊고서 글월을 놓치기도 합니다만, 바로 글월을 적든 뒤늦게 글월을 띄우든 마음을 기울여서 온힘을 다해 쓰려고 해요. 이러다 보면 이 수다 저 얘기가 넘치곤 하는데, 이런 제 맞글월을 받는 분들이 으레 이렇게 말합니다.


 장문의 글을 답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말을 들을 적마다 적이 어지럽습니다. 어느 모로 보면 이 말씨가 요즈음 ‘관공서 말씨’이거나 ‘격식 말씨’인가 싶기도 합니다. 이렇게 써야 마치 다소곳하거나 얌전하거나 상냥하다고 여기시는구나 싶은데요, 이런 말씨는 하나도 안 다소곳하고 안 얌전하며 안 상냥합니다. 말이 안 되는 말씨일 뿐입니다. 이 말씨는 다음처럼 바로잡을 노릇입니다. ‘손질’ 아닌 ‘바로잡기’를 할 말씨예요.


 긴글을 보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긴글을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길게 얘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긴 얘기 고맙습니다


  아직도 퍽 많은 분들은 ‘한자말(일본 한자말+중국 한자말)’을 한국말로 풀어내면 길어진다고 잘못 알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한자말을 한국말로 풀어내거나 손질하거나 옮기면 훨씬 짧고 단출하며 쉽습니다. 이러면서 부드럽지요.


  그도 그럴 까닭이 한국사람이 쓰는 말이 ‘한국말’이니까요. 오랜 옛날부터 한겨레를 이룬 사람들이 쓰던 텃말이 한국말인 줄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분이 뜻밖에 대단히 많아요. 한문·한자말이란, 임금과 지식인과 벼슬아치 몇몇이 주먹힘을 거머쥐면서 그들 웃자리를 지키려고 쓴 바깥말인 줄 제대로 읽어내는 분이 매우 적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에서 어떤 말을 어떻게 쓸 적에 스스로 즐거우면서 아름다운가를 거의 못 배웠다고 할 만합니다. 어른부터 한국말을 한국말다이 배운 적이 없이 입시공부만 하면서 대학바라기를 하며 자란 터라, 이런 어른이 닦은 사회라는 곳에서 흐르는 말은 ‘삶말, 삶이 숨쉬고 피어나고 자라고 고운 말’이 아니기 일쑤예요. 딱딱한 질서와 메마른 틀과 차가운 계급과 위아래 신분으로 갈린 말씨이기 마련입니다. 이리하여 이러한 ‘사회 어른’이 엮은 교과서를 읽는 어린이·푸름이는 삶말도, 사랑말도, 참말도, 슬기말도, 살림말도, 고장말도, 꿈말도, 믿음말도, 놀이말도, 일말도, 나눔말도, 고운말도 모두 못 듣거나 못 배우곤 하지요.


  한자말을 쓴대서 잘못일 수 없습니다. 한자말을 쓴대서 틀리거나 바보스럽지 않습니다. 영어를 섞든 한자말을 섞든 그 낱말이나 말씨가 어떤 뜻이나 결인가를 제대로 짚고서 똑바로 다룰 줄 알 노릇입니다. 그리고, 한국말 아닌 한자말이나 영어는 바깥말이라는 대목을 깨달아, 바깥말로서 제대로 가르치고 배워야지요.


  앞서 “장문의 글”을 보기로 들었는데, 우리가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즐겁고 아름다이 배운 적이 있다면, 말뜻대로 고치는 글 말고 새롭게 써 볼 수 있습니다. 몇 가지를 들어 볼게요. 무엇보다 ‘장문 = 긴글’이니 “장문의 글”은 겹말입니다.


 넉넉한 말씀 고마워요

 넉넉히 들려준 얘기 고맙네요

 푸짐한 이야기꽃 즐거웠습니다

 푸진 글월 반갑군요


  글월을 주고받은 분이 서로 오랜 동무라면 말씨가 다를 수 있습니다. 또 몇 가지를 들어 볼게요.


 넉넉한 말 고마워

 넉넉히 들려준 얘기 고맙구나

 푸짐한 이야기꽃 즐거웠어

 푸진 글월 반갑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말을 배우거나 가르칠까요? 사람마다 다 다른 삶터에서 나고 자라면서 다 다른 꿈과 사랑을 키우고, 이를 다 다른 말씨로 담아내어 ‘다 다르면서도 다 같은 즐겁고 슬기로운 사랑이 꿈처럼 날개돋이를 하는 이야기’를 펼치는 말을 배우거나 가르칠까요? 아마, 아니지 싶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를 살펴도,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살펴도, 하나같이 너무 메마릅니다. 더욱이 말재주 부리기나 어려운 한자말로 논설·논술 펴기가 가득하고, 쉽고 부드러우면서 상냥하고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어깨동무를 들려주는 이야기는 한 꼭지조차 찾아볼 수 없다고 느낍니다.


  어른들이 부디 거꾸로 헤아려 보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초·중·고등학생이 배워야 하는 교과서를 어른들한테 건네면서 ‘자, 이 교과서로 공부하세요’ 하면 배울 맛이 날까요? 문학을 문학이 아니게 쪼개어 객관식 문제를 내고, 말을 말이 아니게 뒤틀어서 논설·논술로 꾸미는 국어 수업은 삶말하고는 매우 동떨어집니다.


  앞서 보기로 든 “장문의 글”을 다시 고쳐 보겠습니다. 여느 동무가 아닌 마음으로 사귀는 벗님하고 주고받는 글월일 적에는 이처럼 얘기할 수 있습니다.


 긴글 좋다

 긴글 좋았어

 긴글 고맙

 반가운 긴글


  우리 삶터에서 바로잡을 곳이란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느낍니다. 어느 곳이든 제대로 손보고, 슬기롭게 가꾸며, 즐거이 북돋울 노릇이라고 여깁니다. 뜻이 같은 줄거리를 펼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우리 마음을 담아내면 스스로 즐겁고 서로 기쁜가를 배우고 가르치는 길을 이제부터 열어야지 싶습니다.


  더 미루지 말 노릇입니다. 학교에서 정규 과목으로 어렵다면 ‘비정규 과목’으로라도 하루 빨리, 하루 정규 과목을 마치고 날마다 5분이나 10분 틈을 내어, 말을 말답게 가꾸거나 돌보면서 마음을 마음답게 살찌우거나 키우는 이야기꽃을 이 나라 어린이·푸름이가 듣고 익히도록 자리를 열어야지 싶습니다.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모든 말은 마음입니다. 껍데기 아닌, 주파수나 파동이나 소리값이 아닌 마음입니다. 우리 숨결은 잘생기거나 이쁘거나 못생기거나 못난 얼굴·몸매가 아닙니다. 그렇지요? 우리 숨결은 껍데기인 몸이 아니요, 이 몸을 감싼 옷이 아닌, 몸을 입고 옷을 걸친 속에 깃든 넋이요 얼이자 마음이요 꿈이며 사랑이고 생각입니다.


  ‘마음속’이란 낱말을 제대로 읽고 느끼면서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 삶터와 배움터와 마을과 집이 되면 좋겠습니다. 겉모습에 사로잡히지 말고, 마음속을 마음으로 마주하면서 손잡기를 바랍니다. 이제 가시내 누구나 마음껏 바지를 걸칠 수 있는 자유·민주·평화를 누리듯, 사내 누구나 신나게 치마를 두를 수 있는 자유·민주·평화로도 거듭난다면, 우리 삶터는 매우 재미나면서 웃음이 넘치고 아름다이 깨어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이곳에서 바로 껍데기를 벗어야지요.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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