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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4. ‘따뜻함’을 잃으면서 망가뜨리는 말



  도시는 높직한 건물이 많고 찻길이 넓지만 곳곳에 나무를 심습니다. 도시를 처음 닦을 적에는 나무가 없어도, 어느 도시이든 스무 해쯤 지나고 보면 나무가 제법 우거집니다. 시골에도 나무는 많습니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해를 가려 그늘을 드리운다고 하기에 커다란 나무를 자꾸 베기 일쑤입니다. 들판 사이에 난 길에는 나무가 한 그루조차 없기도 합니다. 이 ‘나무’를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나무는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나무’입니다. 그런데 이 나무를 써서 집을 지으면 ‘나무집’이라 안 하고 ‘목조 주택’이라 일컫기 일쑤입니다. 나무를 만지는 사람을 두고 ‘나무꾼·나무지기·나무장이(나무쟁이)·나무님’ 같은 이름은 거의 안 쓰고 으레 ‘목수’라는 한자말을 씁니다. 나무로 집을 짓거나 예술을 할 적에도 ‘나무’라 안 하고 ‘목재’라는 한자말을 써요. 나무를 다루는 일도 ‘나무질·나무일·나무짓기’가 아닌 ‘목공·목공예’라고만 하고요.


  ‘고목나무’는 겹말입니다. ‘고목’이라는 한자말이 나무를 가리키니 ‘-나무’를 덧달 수 없어요. ‘동해·남해’가 바다를 가리키니 이대로만 써야 하는데 ‘동해 바다·남해 바다’처럼 얄궂게 쓰는 겹말하고 같은 얼거리입니다.


  ‘고목’은 무엇일까요? 한글로만 적으면 알 수 없습니다. ‘古木’은 “큰 나무”를 가리킨다 하고, ‘枯木’은 “죽은 나무”를 가리킨다 해요. 한자를 안 밝히면 ‘고목’이 어떤 나무인지 모르는데, 누구나 알기 쉽도록 ‘큰나무’나 ‘죽은나무’처럼 새 낱말을 지어서 쓸 만해요. ‘큰나무·죽은나무’처럼 쓰면 ‘古木·枯木’ 사이에서 헷갈릴 일이 없고, ‘고목나무’ 같은 겹말은 사라져요.


  어떤 일을 겪는다고 할 적에 한자말로 ‘체득·체험·경험’을 쓰기도 합니다. ‘체득’은 “몸소 체험하여 알게 됨”을 가리키고, ‘체험’은 “자기가 몸소 겪음. 또는 그런 경험”을 가리키며, ‘경험’은 “자신이 실제로 해 보거나 겪어 봄”을 가리킨다고 해요. 이러한 뜻을 살핀다면 세 낱말은 서로 돌림풀이인데, “몸소 체득하다”나 “몸소 체험하다”나 “몸소 경험하다”처럼 쓰면 모두 겹말인 줄 알 수 있어요. ‘몸소’라는 말을 쓰고 싶으면 “몸소 하다”나 “몸소 부딪히다”로 쓸 노릇이요, 한국말로는 ‘겪다’만 쓰면 됩니다.


  ‘망연자실’이라는 한자말이 있어요. 이런 한자말을 한국말사전에서 말뜻을 찾아보는 사람은 퍽 드물지 싶어요. 둘레에서 이런 한자말을 쓰니 그냥 따라서 쓰는 사람이 많아요. ‘망연자실’ 옆에 ‘茫然自失’ 같은 한자를 달아 놓는다고 해서 말뜻을 알 만하지 않아요. “멍하니 정신을 잃음”이란 말뜻을 밝혀 주어야 비로소 느낌을 헤아리겠지요. 이런 말뜻을 헤아려 본다면 “망연자실하여 넋을 잃었다”처럼 쓰면 겹말이로구나 하고 깨닫겠지요. 여기에서 더 생각할 수 있다면 “넋을 잃었다”만 써도 넉넉한 줄 알아차릴 테고, 비슷한말로 ‘멍하다·얼떨떨하다·얼떨하다’가 있어서, 이 여러 가지 낱말을 알맞게 쓸 수 있어요.


따뜻하다 : 1. 덥지 않을 정도로 온도가 알맞게 높다 2. 감정, 태도, 분위기 따위가 정답고 포근하다

포근하다 : 2. 감정이나 분위기 따위가 보드랍고 따뜻하여 편안한 느낌이 있다

정(情) : 1. 느끼어 일어나는 마음 2. 사랑이나 친근감을 느끼는 마음

정답다(情-) : 따뜻한 정이 있다


  “따뜻한 정”이라는 말마디를 생각해 봐요. 사회에서 무척 널리 쓰는 말마디 가운데 하나인 “따뜻한 정”이에요. 도시에 있는 이웃님은 시골에 와서 “따뜻한 정”을 느낀다는 얘기를 흔히 하고, 도시에서는 서로 “따뜻한 정”을 찾자는 목소리가 높아요.


  그런데 말뜻을 찬찬히 짚으면 ‘따뜻하다 = 정답고 포근하다’라고 해요. ‘정답다 = 따뜻한 정이 있다’라고 해요. ‘포근하다 = 보드랍고 따뜻하여 편안하다’라고 해요. 말뜻이 빙빙 돌아요. 돌림풀이예요. 그러니까 “따뜻한 정 = 따뜻한 따뜻한 정”인 얼거리요, 다시 “따뜻한 따뜻한 따뜻한 정”처럼 끝없이 ‘따뜻한’이 되풀이되고 말아요.


  눈이 밝은 분이라면 이 대목에서 아하 하고 알아차리리라 생각해요. ‘정 = 마음’을 가리키니, “따뜻한 마음”이라고 하면 넉넉하네 하고 알아챌 만해요. 단출하게 ‘따뜻함’이라고만 해도 “따뜻한 마음”을 나타낼 수 있어요. 비슷하게 ‘따스함·다스함·따사로움·다사로움’을 쓸 수 있고, ‘포근함’도 좋아요. 이밖에 “따뜻한 기운”이나 “따뜻한 손길”이나 “따뜻한 눈길”이나 “따뜻한 품”이나 “따뜻한 숨결”이라고 해 볼 만합니다.


숙련(熟鍊/熟練) : 연습을 많이 하여 능숙하게 익힘

능숙하다(能熟-) : 능하고 익숙하다

능하다(能-) : 어떤 일 따위에 뛰어나다

익숙하다 : 1. 어떤 일을 여러 번 하여 서투르지 않은 상태에 있다

익다 : 1. 자주 경험하여 조금도 서투르지 않다 2. 여러 번 겪어 설지 않다

솜씨 : 1. 손을 놀려 무엇을 만들거나 어떤 일을 하는 재주 2. 일을 처리하는 수단이나 수완

재주 : 1. 무엇을 잘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과 슬기


  어떤 일을 훌륭히 할 적에 “숙련된 솜씨”라고 일컫곤 해요. 이 말마디도 한번 헤아려 봐요. ‘숙련’은 “능숙하게 익힘”을 가리킨다는데, ‘능숙’은 “능하고 익숙함”을 가리키고, ‘능하다’는 ‘뛰어나다’를 가리킨대요. 이모저모 따지면 ‘숙련(숙련되다)’은 ‘솜씨’ 있는 모습을 가리키기에 “숙련된 솜씨”는 겹말이에요. ‘숙련’이라는 한자말을 쓰고 싶다면 “숙련된 손길”이나 “숙련된 몸짓”이라 해야 올발라요. ‘솜씨’라는 한국말을 쓰고 싶다면 “빼어난 솜씨”나 “훌륭한 솜씨”라 해야겠지요.


  한자말을 쓰든 한국말을 쓰든 말뜻을 제대로 짚지 않거나 말결을 올바로 살피지 않으니 겹말 얼거리가 돼요.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슬기롭게 못 쓰지요. 말을 뛰어나게 하거나 훌륭하게 해야 하지는 않을 테지만 제대로 알맞게 살뜰히 가다듬을 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말솜씨’나 ‘말재주’가 모자라더라도 틀린 말이나 엉뚱한 말이나 얄궂은 말은 안 쓸 수 있어야지요.


  우리가 흔히 쓰는 말 가운데 ‘보통’이 있어요. 그러면 ‘보통’이란 무엇일까요? 한자말 ‘보통(普通)’은 “1. 특별하지 아니하고 흔히 볼 수 있어 평범함. 또는 뛰어나지도 열등하지도 아니한 중간 정도 2. 일반적으로. 또는 흔히”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평범(平凡)’은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를 가리킨다고 해요. 한국말사전 뜻풀이는 돌림풀이로군요. 그런데 ‘흔히’를 “보통보다 더 자주 있거나 일어나서 쉽게 접할 수 있게”로 풀이하고, ‘특별(特別)’을 “보통과 구별되게 다름”으로 풀이하기에 겹말풀이가 되기까지 합니다. ‘보통 = 특별하지 아니하고 흔히 볼 수 있어 평범함 = 보통과 구별되게 다르지 아니하고 + 보통보다 자주 볼 수 있어 + 보통임’인 꼴이기 때문이에요. ‘보통’을 풀이하면서 나타나는 세 가지 낱말이 모두 ‘보통’이거든요.


  자, 그렇다면 참말로 ‘보통’이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흔히’ 쓰는 ‘보통’은 어떤 낱말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래도 ‘흔히’라 할 수 있고, 때로는 ‘여느’라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수수한’으로 손볼 만한 자리가 있고, ‘으레’로 손보면 어울리는 때가 있습니다.


  ‘매일(每日)’은 “1. 각각의 개별적인 나날 2. 하루하루마다”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한국말사전에는 “≒ 일일(日日)·과일(課日)·식일(式日)”처럼 비슷한말을 싣는데 ‘일일·과일·식일’은 모두 “= 매일”로 풀이해요. 그러나 이 같은 한자말은 모두 털어내어도 될 만하다고 느낍니다. ‘날마다’나 ‘나날이’를 쓰면 되고, ‘하루하루’나 ‘늘’이나 ‘언제나’로 손질하면 돼요. 그나저나 이런 말뜻과 말결을 안 살피기에 ‘매일마다’ 같은 겹말을 쓰는 분이 퍽 많아요. 날마다 쓰는 한국말이지만 깊고 넓게 살피지 않는 탓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 모르는 사이에, 그러니까 시나브로 한국말을 날마다 망가뜨리는 짓을 하고 맙니다. 2016.11.16.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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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3. 억지로 ‘만들’ 수 없는 말



  오늘날 ‘어른’이라는 낱말이 제자리를 잃습니다. 어쩌면 ‘어른’이라는 낱말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어른다운 어른’은 없다고까지 할 만합니다. ‘어른’이란 누구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아주 많이 줄었고, 아이들한테 ‘어른 구실’을 가르치려는 어버이가 자꾸 줄어듭니다. 어른 자리에 서야 할 분들 스스로 ‘어른다이 살기’하고는 멀어지는구나 싶기도 합니다.


  ‘어른’이라는 낱말을 놓고 ‘얼운·얼우다’라는 옛말을 살펴서 말하기도 합니다. “혼인한 사람”이 어른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이러한 말밑풀이는 틀리지는 않습니다. 다만, 더 헤아릴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부터 어떤 사람을 놓고 ‘어른’이라고 할 적에는 혼인한 사람만 두고 가리키지 않습니다. 나이만 많이 든 사람이라고 해서 어른이라고 하지 않아요. 임금님 자리에 선대서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나이쯤 되기에 어른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혼인을 안 했대서 어른이 아니라고도 하지 않아요.


  어떤 사람이 어른일까요? 바로 “어른다운 사람”일 때에 어른인데요, ‘답다’라는 말이 붙는 사람으로 살자면, “어른 구실”을 해야 하고, 이 “어른 구실”이라고 한다면, 너그럽고 슬기롭고 따스하고 깊고 손수 살림을 짓는 사랑으로 살아가는 몸짓이나 모습입니다. 아무나 어른이라고 하지 않아요.


  예부터 어른 자리에 서려면 “철이 들어야” 한다고 했어요. ‘철모르쇠(철모름쟁이·철부지)’는 어른이 아닙니다. 스무 살이나 서른 살 나이입니다만 손수 밥을 지어서 먹지 못한다면, 마흔 살이나 쉰 살 나이입니다만 손수 집을 짓거나 옷을 지을 줄 모른다면, 예부터 이런 사람은 어른이 아니라고 했어요.


  밥과 옷과 집이라고 하는 살림살이를 스스로 짓기에 어른이라 했습니다. 철을 알기에 어른이라 했지요. 씨앗을 심고 가꾸고 돌보고 거두고 갈무리하는 철을 알기에 어른이라 해요. 그러면 아이(어린이)는 누구일까요? 아직 철이 들지 못하기에 아이예요. 나이는 많아도 철이 들지 못하면 그냥 ‘아이’라고 해요.


  어른이 맡은 몫은 무엇보다도 아이한테 삶을 물려주는 일입니다. 밥과 옷과 집이라고 하는 살림살이를 정갈하고 즐거우면서 아름답게 짓도록 가르치는 몫이 바로 어른이 할 일이에요. 이러면서 어른이 하는 일이 더 있어요. 바로 “아이한테 말다운 말을 물려주고 가르치는 몫”이지요.


  오늘날 수많은 “나이 많이 든 사람” 가운데 아이한테 말다운 말을 물려주거나 가르치는 분은 얼마나 될까요? 아무 말이나 그냥 쓰지는 않는가요? 어설픈 번역 말투나 외국 말투를 버젓이 쓰지는 않는가요? 한국말을 새롭게 가꾸거나 짓거나 보살피는 숨결을 아이한테 물려주는 “어른다운 어른”은 얼마나 있을까요?


  이제 간추려 보자면, ‘어른’은 철이 제대로 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철’이 제대로 든 사람은 ‘얼’이 곧게 서거나 든든히 들어선 사람입니다. “얼이 있는 사람”이 바로 ‘어른’이에요. 철이나 얼이 없으면 ‘철모르쇠(철부지)’이거나 ‘얼간이(얼 빠진 이)’입니다. ‘얼찬이’이 되어야 비로소 ‘어른’입니다.


첫날 : 1. 어떤 일이 처음으로 시작되는 날 2. 시집가거나 장가드는 날

시작(始作) : 어떤 일이나 행동의 처음 단계를 이루거나 그렇게 하게 함


  한국말사전을 살펴봅니다. ‘첫날’을 “처음으로 시작되는 날”로 풀이합니다. 한자말 ‘시작’은 “처음을 이루는” 모습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첫날’ 말풀이는 돌림풀이가 됩니다. 일본을 거쳐서 들어와 널리 퍼진 한자말 가운데 ‘시작’이 있는데, “준비 시작”이라든지 “시작해 봐”처럼 흔히 써요. “준비 시작”은 “요이 땅”이라는 일본말이 꼴만 바꾼 얼거리예요. 이런 말은 아직 한국말이 아닙니다. “자, 달려”나 “자, 가자”나 “하나, 둘, 셋”처럼 한겨레 살림새를 살피면서 새롭게 써야 비로소 한국말이 되어요. “시작해 봐”는 “이제 해 봐”나 “이제 하자”나 “자, 해 봐”로 새롭게 고쳐서 쓸 수 있어요.


제과(製菓) : 과자나 빵 따위를 만듦

제빵(製-) : 빵을 만듦

제작(製作) : 재료를 가지고 기능과 내용을 가진 새로운 물건이나 예술 작품을 만듦


  한겨레는 아득히 먼 옛날부터 밥을 지어서 먹습니다. 한겨레 밥살림은 “밥을 지어서 먹기”, 곧 ‘밥짓기’입니다. 그런데 이 수수하고 흔한 ‘밥짓기’나 ‘밥짓다’는 한국말사전에 안 실립니다. ‘밥하다’라는 낱말은 겨우 실리지요.


  왜 한국말사전에는 ‘밥짓기·밥짓다’가 안 실릴까요? 이 나라 학자들이 여느 살림살이를 도무지 모르기 때문이요, 제대로 안 살피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날마다 밥을 먹지만 정작 밥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니 아주 쉽고 수수한 낱말을 한국말사전에서 빠뜨리고 말아요. ‘옷짓기·집짓기’도 한국말사전에 없어요. 이제 사람들은 스스로 옷이나 집을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집짓기’는 한국말사전에 실리기는 하지만, 아이들이 장난감 놀이를 하는 이름으로만 실려요.


  밥을 먹는 한겨레 삶에 과자하고 빵이 들어온 지 얼추 백 해쯤 됩니다. 과자하고 빵은 아주 빠르게 퍼져서 누구나 손쉽게 과자하고 빵을 사거나 집에서 구워서 먹어요. 그러나 이런 살림이 예부터 없었기에 이를 가리키는 한국말은 없었지요. 한국말을 새로 지어야 텐데, 이 나라에서는 ‘제과·제빵’ 같은 낱말을 일본을 거쳐서 받아들였습니다. 말풀이를 “과자 만들기”나 “빵 만들기”로 달고요.


  ‘만들다’하고 ‘짓다’는 다릅니다. 밥은 ‘만든다’고 하지 않습니다. 밥은 ‘짓는다’고 하지요. 옷도 집도 ‘만들’지 않아요. 옷도 집도 ‘지을’ 뿐입니다. 글을 쓰는 일도 ‘글짓기’나 ‘시짓기’나 ‘소설짓기’라고 했지, ‘글 만들기’나 ‘시 만들기’나 ‘소설 만들기’라 하지 않아요.


  왜 ‘짓다’라는 낱말을 쓸까요? ‘지음(짓다)’은 우리 삶을 이루는 바탕이 되도록 새롭게 일으키는 몸짓이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만들다’라는 낱말은 언제 쓸까요? 공장에서 물건을 내놓을 적에 ‘만들다’라 합니다. 뚝딱뚝딱 이것저것 맞추어서 ‘만든다’고 해요.


  요새는 “친구를 만든다”나 “영화를 만든다”나 “책을 만든다”나 “시간 좀 만들어 봐”나 “좋은 분위기를 만들자”나 “괜한 일을 만드네”나 “쉴 시간을 만들자”처럼 쓰기도 합니다만, 이렇게 쓰려면 쓸 수도 있습니다만, 그리 올바르지 않아요. 왜냐하면, “친구를 사귄다”, “영화를 찍다”, “책을 내다·책을 엮다·책을 짓다”, “시간 좀 내 봐”, “좋은 분위기로 바꾸자”, “괜한 일을 하네·괜한 일을 키우네”, “쉴 틈을 내자”처럼 쓰던 말이요, 이러한 말투가 올바르지요.


  한국말사전에 나오기에 그대로 써야 하지 않아요. 옳지 않은 낱말이나 말투조차 한국말사전에 실릴 수 있기도 해요. 아직 한국은 한국말을 사전이라는 그릇에 담는 손길이나 솜씨가 매우 모자라요. 앞으로 한국은 한국말사전을 새롭게 고치고 손질하고 가다듬고 갈고닦아야지 싶어요. 그나저나 ‘제과·제빵’은 어떻게 옮겨야 알맞거나 올바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과자를 굽다·과자를 짓다

빵을 굽다·빵을 짓다


  과자나 빵을 놓고는 ‘짓다’라는 낱말을 잘 안 쓰지만 ‘밥짓기’처럼 ‘과자짓기·빵짓기’로 써야 올발라요. 다만, 이 말마디는 그리 익숙하지 않으니 ‘과자굽기·빵굽기’로 쓸 만합니다. 과자나 빵은 으레 ‘굽’거든요. “빵 굽는 마을”이나 “빵굼터” 같은 빵집 이름이 괜히 쓰이지 않습니다. 이런 이름을 살피면 빵을 굽는 사람을 ‘빵굼이’로 나타내 볼 만해요. 또는 ‘빵굼지기’나 ‘빵굼님’이라 해 볼 수 있어요. 생각을 활짝 펴며 새로운 말을 즐거이 짓습니다. 2016.10.18.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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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라도닷컴> 2016년 9월호에 실었습니다. 누리사랑방에도 즐겁게 걸쳐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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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1. 손수 짓는 살림을 잃으며 말을 잃다



  한자말을 쓰는 일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영어를 쓰는 일은 대단하지 않습니다. 한자말하고 영어를 안 쓰는 일은 놀랍지 않습니다. 어느 말을 골라서 쓰든 우리 마음을 알맞게 나타내거나 즐겁게 쓸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내 마음을 알맞게 나타내거나 나로서는 즐겁게 쓰는 말이라 하지만, 내가 쓰는 말을 이웃이나 동무가 알아듣지 못하거나 어렵게 여긴다면 어떠할까요?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이들은 씨앗을 심습니다. 봄에 심은 씨앗이라면 으레 가을에 거두기에 가을걷이를 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골살림이 농협이나 대학교나 관청에 가면 달라져요. 농협·대학교·관청에서는, 또 책을 쓰는 지식인은 ‘흙’이 아닌 ‘토양’을 말합니다. ‘흙을 만진다’고 하지 않고 ‘토양을 관리한다’고 하지요. ‘씨앗을 심는다’는 말을 ‘파종을 한다’고 하고, ‘봄’을 ‘춘절기’라 하며, ‘거두기’를 ‘수확’이라 하고, ‘가을걷이’를 ‘추수’라 하지요. 한가을에 맞이하는 ‘한가위’를 놓고는 ‘추석’이나 ‘중추절’이라 해요.


  이리하여,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이는 씨앗을 심습니다. 봄에 심은 씨앗이라면 으레 가을에 거두기에 가을걷이를 합니다” 같은 말을 지식 사회에서는 “농촌에서 토양을 관리하는 자는 종자를 파종한다. 춘절기에 파종한 종자라면 의례적으로 가을에 수확하기에 추수를 한다” 같은 말로 바뀌곤 합니다.


  한가위를 앞두고 농협에서 ‘배추 모종’을 판다면서 마을마다 얼마쯤 장만하려 하는가를 이장님한테 여쭈고, 이장님은 마을방송으로 마을사람한테 여쭙니다. 그런데 ‘모종(-種)’은 “어린 식물”도 가리키지만 “어린 식물을 옮겨 심는 일”도 가리켜요. 더 헤아리면 ‘모’는 ‘묘(苗)’에서 왔다고도 하고, 둘은 다른 낱말이라고도 하는데, 한겨레는 예부터 ‘싹’이라는 낱말을 썼어요. 새싹이 돋는다고 하지요. 비슷하게 ‘움’이라는 낱말도 써요. 그러나 ‘모종’ 같은 말마디를 농협이나 관청에서 널리 쓰면서 ‘싹·움’ 같은 오랜 한국말은 빛이 바래거나 쓰임새를 잃습니다. 가만히 따지면, 밭에 옮겨서 심는 어린 풀포기는 ‘배추싹’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락을 심으려 할 적에는 ‘나락싹’을 키우는 셈이고요.


  저는 시골집에서 살며 우리 집 밭이랑 뒤꼍에서 풀하고 나무를 살핍니다. 우리 집에서 새로 돋는 풀을 보고, 우리 집 나무에서 새로 돋는 잎을 바라보기에 아이들하고 함께 풀하고 나무를 살피면서 “여기 보렴. 싹이 텄네. 자, 이 싹이 앞으로 어떤 풀로 자랄는지 알겠니?” 하고 묻습니다. 봄마다 나뭇가지를 살피고 겨울마다 나뭇가지를 어루만지면서 “날이 더 포근하면 이 움에서 어떤 숨결이 새롭게 터질까?” 하고 물어요. 먹고 입고 자는 터전에서 풀하고 나무를 언제나 마주하기에 ‘싹’이 무엇이고 ‘움’이 무엇인지 아이들이 몸으로 느끼고 겪으면서 배울 만해요. 이러한 낱말은 책이나 사전만으로는 배울 수 없어요.


  능금 한 알을 먹을 적에도 이와 같지요. 능금을 손수 베어서 먹어 보아야 능금을 알고 능금 맛을 말할 수 있어요. 복숭아나 배도 손수 베어서 먹어 보아야 복숭아나 배가 무엇이고 맛이 어떠한가를 알아요. 그림책이나 사진책으로는 알 길이 없어요. 인터넷으로 사진만 본대서 알 길이 없지요. 밀물이나 썰물을 두 눈으로 지켜보지 못하고서는 밀물하고 썰물이 어떠한 ‘물결’인가를 깨닫기 어렵습니다. 밤마다 쏟아지는 ‘미리내’를 그야말로 깜깜한 시골이나 멧골에서 올려다보지 못하고 책이나 사진이나 인터넷으로만 보았다면 “냇물처럼 흐르는 수많은 별무리”를 놓고 ‘미리내’라 하는 까닭을 알기 어렵지요. 또 ‘미리내’가 무엇인가 하고 어렴풋하게 이름을 외웠어도 이름 외우기로만 그쳐요. 날마다 밤하늘에서 미리내를 보며 자라는 사람일 때에는 ‘별내’라는 낱말을 새로 지을 수 있어요. ‘별도랑’이라든지 ‘별시내’ 같은 낱말을 새로 지을 수 있을 테고요.


  한국 사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슬기롭거나 알맞거나 아름다운 한국말을 잊는다고 한다면, 학교를 안 다녔거나 책을 안 읽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느껴요. 한국 사회가 흐르는 결대로 말이 바뀌기 마련이라,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삶하고 동떨어진 지식’을 지나치게 많이 머리에 담기 때문에 말을 잃는구나 싶어요. 몸으로 느끼지 못하고 마음으로 어루만지지 못하며 생각으로 갈고닦지 못하는 수많은 정보와 지식만 머리에 담거든요. 이렇게 해서는 말을 익히지 못해요. 수많은 한자말이나 영어를 마음껏 쓸 수는 있어도 이러한 말마디를 이웃이나 동무하고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가를 모르기 일쑤예요. ‘나는 내 생각을 나타내는 말’을 쓴다고 여기지만, 이 말이 이웃하고 동무한테는 너무 어렵거나 동떨어지고 말아요.


  사진을 찍기에 ‘사진가’이고, 사진을 찍으려고 ‘사진기’를 손에 쥐어요. 그렇지만 꽤 많은 이들은 ‘포토그래퍼’라는 영어를 쓰고, ‘포토’를 ‘촬영’한다고 말해요. 사진기가 아닌 ‘카메라’를 쓴다고 밝혀요. 나라는 하나이지만 말은 둘셋으로 갈갈이 쪼개진다고 할까요. 어떤 말을 어느 자리에 알맞게 쓸 적에 스스로 생각을 북돋우는 길을 트는가를 깨닫지 못하는 셈이요, 이웃하고 기쁨으로 어깨동무하는 길조차 생각을 못하는 셈이에요.


  ‘허위(虛僞)’라는 한자말이 있어요.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인 것처럼 꾸민 것”을 뜻한다고 해요. ‘진실(眞實)’은 “거짓이 없는 사실”을 뜻한대요. ‘사실(事實)’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을 뜻하고, ‘실제(實際)’는 “사실의 경우나 형편”을 뜻한대요. 한국말사전에 나오는 말풀이는 빙글빙글 돌아요. 빙글빙글 돌지만 실마리를 찾을 수 없어요. 꼬리를 물고 무는 돌림풀이예요. ‘허위’ 같은 한자말을 쓰는 일은 틀리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습니다.


  이쯤에서 한번 생각해 보아야지요. 왜냐하면 우리한테는 ‘거짓’이라는 낱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이라는 낱말도 있어요. ‘거짓·참’을 뒤로 밀어내고서 굳이 ‘허위·진실’이라는 한자말을 써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참말로 생각해 볼 노릇이에요. 말 한 마디를 쓸 적에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해요. 생각하지 않고서는 어떤 말도 제대로 못 써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이녁 말을 슬기롭게 가꾸지 못해요.


  잘 짚어야 하는데,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맨 처음에 어느 한 사람이 ‘생각’을 해서 지었어요. 생각하지 않고 태어난 낱말은 없어요. ‘바람’도 ‘하늘’도 ‘땅’도 ‘씨앗’도 ‘아이’도 ‘어른’도 모두 ‘사람’이 스스로 생각해서 지은 낱말이에요.


  선풍기를 보면 ‘미풍·약풍·강풍’ 같은 글씨가 적혀요. 겨울에는 ‘온풍기’를 쓴다고 말해요. 그런데 ‘산들바람·여린바람·센바람’처럼 선풍기에 글씨를 넣지 못해요. ‘따순바람’이나 ‘따뜻바람’ 같은 말마디를 한국사람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기 일쑤예요. 바다에서는 ‘바닷바람’인데, 이를 ‘해풍’이라고만 말하는 사람이 제법 있어요. 그러고 보면 바닷가는 ‘바닷가’이지만 이를 ‘해변’이나 ‘해안’이라고만 말하는 사람도 꽤 있어요. 이러다 보니 ‘해변가·해안가’ 같은 엉터리 겹말을 쓰면서도 엉터리 말인 줄 못 깨닫지요. 바닷가에 펼쳐진 ‘모래밭’을 보면서도 ‘모래사장’이라는 겹말을 엉터리로 쓰는 사람마저 매우 많아요. ‘사장’이라는 한자말이 바로 ‘모래밭’을 가리키는지 모르거든요.


  우리 집은 시골에 있어서 ‘시골집’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살기에 ‘시골사람’입니다. 우리 집은 ‘촌가’나 ‘농촌 주택’이 아닙니다. 나는 ‘촌사람’이나 ‘촌부’가 아닙니다. 시골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상경’도 아니고 ‘서울로 올라가는’ 일도 아닙니다. 그저 ‘서울로 가는’ 일입니다. 거꾸로 시골로 돌아오는 일은 ‘시골로 내려가는’ 일이 될 수 없겠지요.


  사람이 쓰는 말은 저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짓는 살림은 바로 우리 손으로 즐겁게 짓듯이, 말도 늘 우리 생각으로 즐겁게 짓습니다. 예부터 시골사람 누구나 살림을 손수 짓고, 흙을 손수 지으며, 말을 손수 지었어요. 생각도 마땅히 손수 지었을 테지요.


  오늘날은 밥이나 옷이나 집을 거의 다 ‘남이 공장에서 찍듯이 만들어’ 놓고, 이를 돈으로 사다 쓰는 얼거리입니다. 이러다 보니 손수 짓는 살림이나 생각에서 멀어지면서 ‘남이 만든 것을 돈으로 쓰는’ 흐름이니, 다달이 돈을 많이 버는 데에 생각을 온통 빼앗기면서 살림이나 삶이나 사랑을 손수 못 짓고 말아요. 이러면서 고운 말도 기쁜 말도 신나는 말도 몽땅 잃거나 잊어요. 작은 살림 한 가지라도, 좁은 텃밭 한 뙈기라도, 우리가 스스로 짓고 가꿀 때에 비로소 말을 살리면서 가꾸고 즐기는 길을 열 수 있다고 느낍니다. 2016.8.22.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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