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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라도닷컴> 2016년 9월호에 실었습니다. 누리사랑방에도 즐겁게 걸쳐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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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1. 손수 짓는 살림을 잃으며 말을 잃다



  한자말을 쓰는 일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영어를 쓰는 일은 대단하지 않습니다. 한자말하고 영어를 안 쓰는 일은 놀랍지 않습니다. 어느 말을 골라서 쓰든 우리 마음을 알맞게 나타내거나 즐겁게 쓸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내 마음을 알맞게 나타내거나 나로서는 즐겁게 쓰는 말이라 하지만, 내가 쓰는 말을 이웃이나 동무가 알아듣지 못하거나 어렵게 여긴다면 어떠할까요?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이들은 씨앗을 심습니다. 봄에 심은 씨앗이라면 으레 가을에 거두기에 가을걷이를 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골살림이 농협이나 대학교나 관청에 가면 달라져요. 농협·대학교·관청에서는, 또 책을 쓰는 지식인은 ‘흙’이 아닌 ‘토양’을 말합니다. ‘흙을 만진다’고 하지 않고 ‘토양을 관리한다’고 하지요. ‘씨앗을 심는다’는 말을 ‘파종을 한다’고 하고, ‘봄’을 ‘춘절기’라 하며, ‘거두기’를 ‘수확’이라 하고, ‘가을걷이’를 ‘추수’라 하지요. 한가을에 맞이하는 ‘한가위’를 놓고는 ‘추석’이나 ‘중추절’이라 해요.


  이리하여,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이는 씨앗을 심습니다. 봄에 심은 씨앗이라면 으레 가을에 거두기에 가을걷이를 합니다” 같은 말을 지식 사회에서는 “농촌에서 토양을 관리하는 자는 종자를 파종한다. 춘절기에 파종한 종자라면 의례적으로 가을에 수확하기에 추수를 한다” 같은 말로 바뀌곤 합니다.


  한가위를 앞두고 농협에서 ‘배추 모종’을 판다면서 마을마다 얼마쯤 장만하려 하는가를 이장님한테 여쭈고, 이장님은 마을방송으로 마을사람한테 여쭙니다. 그런데 ‘모종(-種)’은 “어린 식물”도 가리키지만 “어린 식물을 옮겨 심는 일”도 가리켜요. 더 헤아리면 ‘모’는 ‘묘(苗)’에서 왔다고도 하고, 둘은 다른 낱말이라고도 하는데, 한겨레는 예부터 ‘싹’이라는 낱말을 썼어요. 새싹이 돋는다고 하지요. 비슷하게 ‘움’이라는 낱말도 써요. 그러나 ‘모종’ 같은 말마디를 농협이나 관청에서 널리 쓰면서 ‘싹·움’ 같은 오랜 한국말은 빛이 바래거나 쓰임새를 잃습니다. 가만히 따지면, 밭에 옮겨서 심는 어린 풀포기는 ‘배추싹’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락을 심으려 할 적에는 ‘나락싹’을 키우는 셈이고요.


  저는 시골집에서 살며 우리 집 밭이랑 뒤꼍에서 풀하고 나무를 살핍니다. 우리 집에서 새로 돋는 풀을 보고, 우리 집 나무에서 새로 돋는 잎을 바라보기에 아이들하고 함께 풀하고 나무를 살피면서 “여기 보렴. 싹이 텄네. 자, 이 싹이 앞으로 어떤 풀로 자랄는지 알겠니?” 하고 묻습니다. 봄마다 나뭇가지를 살피고 겨울마다 나뭇가지를 어루만지면서 “날이 더 포근하면 이 움에서 어떤 숨결이 새롭게 터질까?” 하고 물어요. 먹고 입고 자는 터전에서 풀하고 나무를 언제나 마주하기에 ‘싹’이 무엇이고 ‘움’이 무엇인지 아이들이 몸으로 느끼고 겪으면서 배울 만해요. 이러한 낱말은 책이나 사전만으로는 배울 수 없어요.


  능금 한 알을 먹을 적에도 이와 같지요. 능금을 손수 베어서 먹어 보아야 능금을 알고 능금 맛을 말할 수 있어요. 복숭아나 배도 손수 베어서 먹어 보아야 복숭아나 배가 무엇이고 맛이 어떠한가를 알아요. 그림책이나 사진책으로는 알 길이 없어요. 인터넷으로 사진만 본대서 알 길이 없지요. 밀물이나 썰물을 두 눈으로 지켜보지 못하고서는 밀물하고 썰물이 어떠한 ‘물결’인가를 깨닫기 어렵습니다. 밤마다 쏟아지는 ‘미리내’를 그야말로 깜깜한 시골이나 멧골에서 올려다보지 못하고 책이나 사진이나 인터넷으로만 보았다면 “냇물처럼 흐르는 수많은 별무리”를 놓고 ‘미리내’라 하는 까닭을 알기 어렵지요. 또 ‘미리내’가 무엇인가 하고 어렴풋하게 이름을 외웠어도 이름 외우기로만 그쳐요. 날마다 밤하늘에서 미리내를 보며 자라는 사람일 때에는 ‘별내’라는 낱말을 새로 지을 수 있어요. ‘별도랑’이라든지 ‘별시내’ 같은 낱말을 새로 지을 수 있을 테고요.


  한국 사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슬기롭거나 알맞거나 아름다운 한국말을 잊는다고 한다면, 학교를 안 다녔거나 책을 안 읽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느껴요. 한국 사회가 흐르는 결대로 말이 바뀌기 마련이라,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삶하고 동떨어진 지식’을 지나치게 많이 머리에 담기 때문에 말을 잃는구나 싶어요. 몸으로 느끼지 못하고 마음으로 어루만지지 못하며 생각으로 갈고닦지 못하는 수많은 정보와 지식만 머리에 담거든요. 이렇게 해서는 말을 익히지 못해요. 수많은 한자말이나 영어를 마음껏 쓸 수는 있어도 이러한 말마디를 이웃이나 동무하고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가를 모르기 일쑤예요. ‘나는 내 생각을 나타내는 말’을 쓴다고 여기지만, 이 말이 이웃하고 동무한테는 너무 어렵거나 동떨어지고 말아요.


  사진을 찍기에 ‘사진가’이고, 사진을 찍으려고 ‘사진기’를 손에 쥐어요. 그렇지만 꽤 많은 이들은 ‘포토그래퍼’라는 영어를 쓰고, ‘포토’를 ‘촬영’한다고 말해요. 사진기가 아닌 ‘카메라’를 쓴다고 밝혀요. 나라는 하나이지만 말은 둘셋으로 갈갈이 쪼개진다고 할까요. 어떤 말을 어느 자리에 알맞게 쓸 적에 스스로 생각을 북돋우는 길을 트는가를 깨닫지 못하는 셈이요, 이웃하고 기쁨으로 어깨동무하는 길조차 생각을 못하는 셈이에요.


  ‘허위(虛僞)’라는 한자말이 있어요.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인 것처럼 꾸민 것”을 뜻한다고 해요. ‘진실(眞實)’은 “거짓이 없는 사실”을 뜻한대요. ‘사실(事實)’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을 뜻하고, ‘실제(實際)’는 “사실의 경우나 형편”을 뜻한대요. 한국말사전에 나오는 말풀이는 빙글빙글 돌아요. 빙글빙글 돌지만 실마리를 찾을 수 없어요. 꼬리를 물고 무는 돌림풀이예요. ‘허위’ 같은 한자말을 쓰는 일은 틀리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습니다.


  이쯤에서 한번 생각해 보아야지요. 왜냐하면 우리한테는 ‘거짓’이라는 낱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이라는 낱말도 있어요. ‘거짓·참’을 뒤로 밀어내고서 굳이 ‘허위·진실’이라는 한자말을 써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참말로 생각해 볼 노릇이에요. 말 한 마디를 쓸 적에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해요. 생각하지 않고서는 어떤 말도 제대로 못 써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이녁 말을 슬기롭게 가꾸지 못해요.


  잘 짚어야 하는데,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맨 처음에 어느 한 사람이 ‘생각’을 해서 지었어요. 생각하지 않고 태어난 낱말은 없어요. ‘바람’도 ‘하늘’도 ‘땅’도 ‘씨앗’도 ‘아이’도 ‘어른’도 모두 ‘사람’이 스스로 생각해서 지은 낱말이에요.


  선풍기를 보면 ‘미풍·약풍·강풍’ 같은 글씨가 적혀요. 겨울에는 ‘온풍기’를 쓴다고 말해요. 그런데 ‘산들바람·여린바람·센바람’처럼 선풍기에 글씨를 넣지 못해요. ‘따순바람’이나 ‘따뜻바람’ 같은 말마디를 한국사람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기 일쑤예요. 바다에서는 ‘바닷바람’인데, 이를 ‘해풍’이라고만 말하는 사람이 제법 있어요. 그러고 보면 바닷가는 ‘바닷가’이지만 이를 ‘해변’이나 ‘해안’이라고만 말하는 사람도 꽤 있어요. 이러다 보니 ‘해변가·해안가’ 같은 엉터리 겹말을 쓰면서도 엉터리 말인 줄 못 깨닫지요. 바닷가에 펼쳐진 ‘모래밭’을 보면서도 ‘모래사장’이라는 겹말을 엉터리로 쓰는 사람마저 매우 많아요. ‘사장’이라는 한자말이 바로 ‘모래밭’을 가리키는지 모르거든요.


  우리 집은 시골에 있어서 ‘시골집’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살기에 ‘시골사람’입니다. 우리 집은 ‘촌가’나 ‘농촌 주택’이 아닙니다. 나는 ‘촌사람’이나 ‘촌부’가 아닙니다. 시골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상경’도 아니고 ‘서울로 올라가는’ 일도 아닙니다. 그저 ‘서울로 가는’ 일입니다. 거꾸로 시골로 돌아오는 일은 ‘시골로 내려가는’ 일이 될 수 없겠지요.


  사람이 쓰는 말은 저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짓는 살림은 바로 우리 손으로 즐겁게 짓듯이, 말도 늘 우리 생각으로 즐겁게 짓습니다. 예부터 시골사람 누구나 살림을 손수 짓고, 흙을 손수 지으며, 말을 손수 지었어요. 생각도 마땅히 손수 지었을 테지요.


  오늘날은 밥이나 옷이나 집을 거의 다 ‘남이 공장에서 찍듯이 만들어’ 놓고, 이를 돈으로 사다 쓰는 얼거리입니다. 이러다 보니 손수 짓는 살림이나 생각에서 멀어지면서 ‘남이 만든 것을 돈으로 쓰는’ 흐름이니, 다달이 돈을 많이 버는 데에 생각을 온통 빼앗기면서 살림이나 삶이나 사랑을 손수 못 짓고 말아요. 이러면서 고운 말도 기쁜 말도 신나는 말도 몽땅 잃거나 잊어요. 작은 살림 한 가지라도, 좁은 텃밭 한 뙈기라도, 우리가 스스로 짓고 가꿀 때에 비로소 말을 살리면서 가꾸고 즐기는 길을 열 수 있다고 느낍니다. 2016.8.22.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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