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짓는 글살림
19. 책숲마실


  제가 어릴 적에는 어디를 갈 적에 그냥 ‘간다(가다)’고 했습니다. 그저 갈 뿐이었어요. 옆집에 가든 아랫집에 가든 동무가 사는 집에 가든 늘 간다고 했어요. 학교에도 가고 동사무소에도 가며 작은아버지네라든지 고모네에도 그저 갔습니다. 책방에도 가며 가게에도 가고 기차역에도 갔지요.

  좋아하는 곳이 따로 있어서 찾아간다고 하더라도 저뿐 아니라 둘레에서도 하나같이 ‘간다’고 했고, ‘가자’고 했으며, ‘갈까’ 하고 물었어요.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여행’이나 ‘산책’ 같은 한자말을 쓰는 분이 나타났습니다. ‘여행·산책’ 같은 말을 곳곳에서 쓰며 ‘간다’고 말하는 사람이 부쩍 줄었어요. 그러고 보면 “바람을 쐰다”고도 으레 말했지만, 이 말도 어느새 자취를 감춥니다.

  저는 책방을 매우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책방을 퍽 자주 갔습니다. 책방을 자주 가니 ‘드나든다’고 이야기하는 분이 있었고, ‘쏘다닌다’라든지 ‘들락거린다’고 이야기하는 분이 있었어요. 저로서는 그냥 ‘갈’ 뿐이지만 ‘드나들다·쏘다니다·들락거리다’라 말하는 분이 있으면 어쩐지 머쓱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자주 가는가 싶어 돌아보곤 했어요.

  스무 살이 넘은 뒤에도 책방에 늘 갔습니다. 이즈음부터 둘레에서 저한테 하는 말이 살짝 달라져요. ‘책방 순례’를 한다거나 ‘책방 여행’을 한다고 말하는 분이 생기더군요. 때로는 ‘책방 투어’라든지 ‘북스토어 투어’를 한다고 말하는 분이 있어요.

  깜짝 놀라서 손사래를 쳤습니다. “아니요, 아니라구요. 저는 책방에 그저 ‘갈’ 뿐입니다. 책방에서 저를 부르는 책이 있고, 저 스스로 배울 책이 많아서 책방에 즐겁게 ‘갈’ 뿐이에요.” 하고 말했어요. 그러나 제가 하는 말, “책방에 ‘간다’”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분이 거의 없었습니다. 저로서는 퍽 거추장스러운 ‘순례·산책·여행·투어·답사’를 쓰고 싶지 않은데, “책방에 간다”를 수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시는구나 싶어서 몇 가지 말을 지어 보았습니다.

 책방 나들이, 책방마실

  ‘나들이’하고 ‘마실’을 함께 썼어요. ‘나들이’는 세 글씨라 아무래도 “책방 나들이”처럼 띄어야 제맛이라고 느끼고, ‘마실’은 두 글씨라 “책방마실”처럼 붙여도 좋겠구나 싶었어요. 책방을 즐겁게 자주 다닌다면 ‘책방마실’이라 하고, 차 마시기를 좋아하면 ‘찻집마실’이라 할 만하며, ‘산마실·들마실·바다마실·일본마실·섬마실·제주마실·서울마실’처럼 쓸 수 있겠다고 여겼습니다.

  어느덧 ‘책방마실’이라는 이름을 써 본 지 스물다섯 해쯤 되는구나 싶어요. 2018년 1월에 강원도 춘천으로 책방마실을 다녀오는데, 춘천 어느 마을책집에 “싸목싸목 책방마실”이라는 이름이 붙은 알림종이가 있습니다. 전라도 광주에 있는 마을책방으로 싸목싸목 즐겁게 마실해 보자는 이야기를 담은 종이입니다. 깜짝 놀랐어요. 저는 스무 해 넘게 ‘책방마실’이라는 이름을 씁니다만, 이 이름을 곱게 여겨 받아들이는 분은 드문드문 보았거든요. 그런데 이 이름을 광주시에서 덥석 받아안아서 쓰네요.

  책방을 마실하자는 이야기를 공공기관 알림종이로 만나니 싱숭생숭했습니다. 놀랐습니다. 반가우면서 아리송했습니다. 그리고 이 이름 ‘책방마실’을 널리 받아들여 퍼뜨리기까지 스물다섯 해 즈음 걸렸네 싶어 새삼스러웠습니다. 더디다 싶더라도 때가 무르익으면 얼마든지 고이 품어 주는구나 싶었어요. 이러면서 생각을 하나 더 해 보았습니다. 둘레에서 아무도 ‘책방마실(책방 + 마실)’이라는 이름을 안 쓰던 무렵, ‘서점순례’나 ‘북스토어투어’나 ‘서점산책’이나 ‘북투어’ 같은 말만 쓴 지난날 ‘책방마실’이라는 이름을 혼자서 투박하게 써 왔다면, 이제 이 이름은 이웃 여러분이 쓰라고 내려놓고서 제 나름대로 새 이름을 지어서 쓸 수 있겠구나 싶어요.

  책숲마실, 책집마실

  여러 해 앞서부터 ‘책숲마실’이라는 이름을 곧잘 씁니다. 우리가 읽는 모든 책은 숲에서 옵니다. 책을 빚는 종이는 나무요, 책종이로 삼는 나무는 우거진 숲에서 자라요. ‘책 = 종이’라 할 수 있기에 ‘책숲마실’이라 할 만합니다. 더 헤아린다면 ‘책 = 숲’이니, ‘책집마실(책방마실) = 숲마실’이라고 할 수 있어요. 책을 손에 쥐는 우리는 숲을 마실하듯 삶을 읽고 사람과 살림과 사랑을 읽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책을 고이 갖춘 가게는 ‘서점·책방’이라는 이름이지만 ‘책숲’이나 그냥 ‘숲’이라고만 해도 되리라 여겨요. 이러면서도 나무가 아름다운 숲하고 다르게, 나무한테서 얻은 고마운 종이로 지은 책을 살뜰히 갖춘 곳(집)을 찾아갈 적에는 따로 ‘책숲마실’이나 ‘책집마실’ 같은 이름을 써도 어울리고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한 가지를 더 생각해요. 저는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을 꾸리기에,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한결 살뜰하면서 포근하게 가리키고 싶은 마음이기도 합니다. ‘책 = 숲’이라면, 숲이 깃든 집이면서, 숲이라는 책을 더 아끼려는 집이라면, 도서관을 ‘책숲집’이라고 가리키면 어떠할까 싶더군요.

  여느 책집은 책을 사고파는 구실을 맡으면서 꾸준히 새로운 책이 드나듭니다. 도서관은 책을 고이 건사하면서 두고두고 읽는 자리로 제구실을 합니다. 그래서 ‘책방 = 책집’으로, ‘도서관 = 책숲집’으로, 제 깜냥껏 새롭게 이름을 붙여 보고, 책방이나 도서관을 마실할 적에는 ‘책집마실·책숲마실’ 같은 말을 붙여 봅니다.

  여러모로 이웃님한테 낯설 수 있고, 좀 엉뚱한 이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가꾸는 살림을 돌아보면서 늘 새롭게 이름을 지으려 합니다. 다달이 받아서 읽는 잡지를 ‘월간잡지’라 하기보다는 ‘달책’이라는 이름을 저 혼자서 써 봅니다. 철마다 받아서 읽는 잡지는 ‘계간잡지’ 아닌 ‘철책’이라는 이름을 저 혼자서 써 봐요.

  숲을 사랑하는 책이라면 ‘숲책(←환경책)’이라고 해 봅니다. ‘살림책(←육아서)’이나 ‘밥책(←요리책)’이나 ‘이야기책(←에세이)’이나 ‘글책(←문집, 논문)’ 같은 이름도 붙여 봅니다.

  예전에는 ‘책방 사장님’이라고 말했으나 요새는 ‘책방지기’나 ‘책방지기님’이라고 써요. 그러고 보면 이 이름도 ‘책집지기·책숲지기’라 바꾸어 볼 수 있네요. 저는 ‘출판계’ 아닌 ‘책마을’을 말하고 싶으며, 책마을에서 책을 펴내는 분들한테 ‘책지기(출판사 직원)’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싶어요.

  책을 쓰는 이웃님이라면 ‘책쓴이(←필자·작가·저자·저술가)’라는 이름을 쓰고 싶습니다. 책을 쓰거나 책집·책숲집을 가꾸는 분은 ‘책길’을 걷는구나 싶고, ‘책넋’을 가꾸는 아름다운 일을 즐겁게 하는 ‘책벗’이자 ‘책동무’라고 느낍니다.

  책을 한껏 펼치기에 ‘책마당’입니다. 책으로 노래하고 춤추고 웃고 어우러지기에 ‘책잔치’입니다. 책을 이야기하는 자리는 ‘책수다’나 ‘책노래’라 할 만하고, 책을 놓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펼치니 ‘이야기꽃’을 연다고 느낍니다. ‘책밭’을 저마다 알뜰히 가꾸면서 아름다운 ‘책터’를 지어요. 이 땅에 꼭 책만 있을 까닭은 없으나 때로는 ‘책나라·책누리’가 될 수 있겠지요. 책집지기도 책숲지기도 책지기도 ‘책살림’을 여밉니다. 우리는 다같이 ‘책읽기’를 누립니다. 좋다고 여기는 책을 돌려읽으면서 ‘책나눔’을 하고, ‘책고을’이나 ‘책고장’도 하나둘 태어나요. 책을 아주 잘 아는 슬기로운 분이 있다면 ‘책님’이지 싶고, 아이들은 ‘책순이·책돌이’가 되어 ‘책꿈·책사랑’을 키웁니다.

  책으로 길을 열고, 책으로 숨을 틔우며, 책으로 배우기에 ‘책꽃’이 됩니다. ‘책나무’가 서고 ‘책씨’를 심으며 ‘책바람’이 불어요. 광주 이웃님이 문득 받아들여서 써 준 ‘책방마실’이라는 이름이 고운 징검돌이 되어 새로운 ‘책말’이 무럭무럭 자라나면 좋겠습니다. 2018.2.19.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말넋/말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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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18. 번역 말씨는 한국 말씨인가?



  제가 쓴 글을 받아서 신문이나 잡지에 싣는 곳에서 더러 글이름이나 글줄을 고칩니다. 그런데 글이름이나 글줄을 고치면서 고쳤다고 알리지 않기 일쑤입니다. 나중에 신문이나 잡지를 보면서 깜짝 놀라요. 저는 틀림없이 이렇게 안 썼으나 그곳 엮은이가 고쳤거든요.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가다듬거나 살피는 길을 걷는다는 사람으로서 엉뚱하거나 엉성한 글이 제 이름을 달고 나오면 매우 부끄럽습니다. 비록 제가 그렇게 안 썼다고 하더라도, 신문이나 잡지 엮는이가 한국 말씨를 제대로 짚지 않고서 고쳤으니 부끄럽지요. 그 엮는이는 틀림없이 다른 분 글도 엉뚱하게 고치겠지요. 이러면서 얄궂은 번역 말씨는 끝없이 퍼질 테고요.


  엮는이는 엮는이 나름대로 알맞게 고쳤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멀쩡한 글을 번역 말씨로 고친다거나, 입으로 말하듯이 썼는데 딱딱하게 고친다거나, 쉽게 쓴 글에 한자를 입힌다면 좀 따질 노릇이라고 봅니다.


쓰레기를 생각해 본 적 있나 (글쓴이)

쓰레기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나 (엮는이 손질)


  “-에 대(對)해”나 “-에 관(關)해”는 번역 말씨입니다. 영어 ‘about’을 이 두 말씨로 옮기는 분이 많은데, 이는 알맞지 않아요. 자리에 따라 다르게 옮겨야 할 ‘about’인데 웬만한 자리는 ‘-을/-를’로 옮겨야 알맞습니다. 때로는 “-과 얽혀/-을 놓고”로 옮기지요. “-란 무엇인지”나 “-를 얼마나”로 옮길 수 있어요.


아이한테 말하다 (글쓴이)

아이에게 답하다 (엮는이 손질)


  저는 ‘-에게’라 글을 쓰지 않습니다. 글에서든 말에서든 늘 ‘-한테’만 써요. ‘-한테’는 입말이요 ‘-에게’는 글말이라고 사전풀이에 나옵니다만, 썩 알맞지 않은 풀이라고 느낍니다. 우리는 말하는 대로 글을 쓰면 됩니다. 광주사람이 서울말로 글을 쓸 까닭이 없고, 강릉사람이 굳이 서울말로 말을 할 까닭이 없습니다. 고장마다 즐겁게 고장말로 글을 쓰면 되듯, 입말·글말을 따지지 말고 부드러이 말하면 됩니다.


  제가 ‘-한테’로 쓰는 말글을 엮은이가 ‘-에게’로 고치는 몸짓이란, 고장말을 얕보거나 사람마다 달리 쓰는 말씨를 깔보는 셈이라고 볼 만하지 싶어요. ‘-한테’가 틀린 말이 아닌데 고치니까 말이지요. 오히려 ‘-에게’를 ‘-한테’로 고치면서 글도 한결 부드러우면서 술술 읽히도록 하는 길이 나을 수 있습니다.


어린 날 (글쓴이)

어린 시절 (엮는이 손질)


  저는 ‘시절(時節)’이라는 한자말을 안 씁니다. 쓸 까닭이 없다고 여깁니다. 제가 쓰는 말은 ‘날·나날·때·적·철·즈음·무렵·쯤’ 들입니다. 자리에 맞추어 알맞게 낱말을 골라요. “어린 날”을 왜 “어린 시절”로 고쳐야 할까요? 거꾸로 “어린 시절”을 “어린 날”이나 “어릴 적”으로 고쳐야 알맞을 텐데요.


해마다 천 권 (글쓴이)

매년 천 권 (엮는이 손질)


  제가 쓰는 말은 ‘날마다·주마다·달마다·해마다’입니다. ‘사람마다·책마다·마을마다’입니다. ‘매일(每日)·매주(每週)·매월(每月)·매년(每年)’을 구태여 써야 할까요? 한국말 ‘-마다’가 있는데 왜 꼭 ‘매(每)-’에 매달려야 할까요? 한자 ‘각(各)’도 ‘-마다’를 가리키는데, 이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면 “각 개인마다” 같은 겹말을 쓰지요.


누군가 울거든 (글쓴이)

누군가 울고 있거든 (엮는이 손질)


  말끝에 ‘있다’를 붙이면 겹말이자 일본 번역 말씨입니다. 일본사람은 영어 현재진행형을 ‘중(中)’이라는 한자로 옮겼고, 이를 지식인이 일제강점기에 ‘작업중·취침중·공부중·수업중’처럼 껍데기만 한글인 말씨로 받아들였어요. 이러다가 “작업하는 중”이라든지 “작업하고 있는 중” 같은 겹말이 번지기도 했다가 ‘중’을 ‘가운데’로 옮긴 “작업하고 있는 가운데”나 “작업하는 가운데” 같은 엉성한 말씨가 생기기까지 했습니다.


  한국말로는 “일하면서”나 “일하며”입니다. 한국말은 여느 말씨로도 ‘현재형·현재진행형·과거형’까지 모두 나타냅니다. 한국말은 말끝에 다른 말을 안 붙이고 결이나 흐름을 살펴서 때매김을 가릅니다. 이러한 한국 말씨를 헤아리지 않는 “-고 있다”는 찰거머리처럼 사람들 입에 들러붙고 말았는데요, 영어를 가르치는 자리에서도 자꾸 잘못 가르치고, 한국말로 문학을 하거나 여느 글을 쓰는 분마저 제대로 살피지 않는 탓에 끝없이 퍼지지요.


요가를 한다 (글쓴이)

요가를 하는 중이다 (엮는이 손질)


  저는 “한다”라고만 말합니다. “하고 있다”도 “하는 중이다”도 “하는 가운데이다”도 “하고 있는 중이다”도 “하고 있는 가운데이다”도 안 씁니다. “한다”처럼 짧게 끊으면 될 말에 군더더기를 늘어뜨리지 않아요.


  우리가 글쓰기나 말하기에서 헤아릴 대목이 있습니다. 군더더기를 붙이는 일은 멋이 아닙니다. 글맛이나 말맛을 더해 주지도 않습니다. 한국말은 군더더기 아닌 꾸밈말을 넣으면서 새롭고, 말끝을 살살 바꾸면서 즐겁습니다. “요가를 즐겁게 한다”나 “요가를 고요히 한다”처럼 꾸밈말을 넣어요. “요가를 하지”나 “요가를 하네”나 “요가를 하는군”이나 “요가를 하더라”나 “요가를 한단 말이다”처럼 말끝을 바꿉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온갖 버섯 이야기 (글쓴이)

당신은 잘 모르는 버섯의 모든 것 (엮는이 손질)


  저는 “온갖 버섯 이야기”라고 적었습니다. ‘온갖’을 덜고 “버섯 이야기”라고만 적어도 됩니다. 이를 일본 말씨 ‘-의’를 넣어 “버섯의 모든 것”이라고 고쳐야 할는지 아리송합니다. ‘-의’를 넣는대서 뜻이 살아나지 않고, 글이 멋있지 않습니다. 그저 일본 말씨일 뿐입니다.


  저는 ‘우리’라고 말을 했는데, 엮는이는 ‘당신(當身)’이라는 한자말로 고쳤습니다. 저는 한자말 ‘당신’을 안 씁니다. 저는 ‘이녁’이라 하거나 ‘너·자네·그대·너희’ 같은 한국말을 써요.


  잘 모르거나 잘못 알아서 틀리게 쓴 곳이 있다면 얼마든지 고쳐야지 싶습니다. 그러나 멀쩡한 글은 멀쩡하게 살릴 노릇이라고 봅니다. 아무리 번역 말씨가 널리 퍼지더라도 글쓴이나 엮는이나 교사나 교사나 지식인은 한국 말씨가 무엇인가를 찬찬히 돌아보고 곰곰이 되짚으면서 하나하나 새로 배우는 마음이 되어야지 싶어요. 2018.1.14.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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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17. 다람쥐를 다람쥐라 못하다


  2017년 가을께 전남 고흥군 고흥읍에 있는 시외버스역 뒷간에 ‘아짐찬하요’라는 글월이 붙었습니다. 뭔 뜬금없는 글월인가 하고 쳐다보니, 사내들이 오줌을 눌 적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면 ‘아짐찬하다’는 소리입니다. 다만, 고흥 바깥 전라말로는 ‘아심찬하다’로 씁니다.

  흔히 전라사람은 뭔 말을 할라치면 ‘거시기하다’라 한다고들 합니다. 고흥에서는 ‘거시기하다’라고는 거의 안 쓰고 ‘거석하다’라고 합니다. 사전을 살피면 ‘거석’을 경남말로만 다루는데, 경남말로만 여겨도 될까 아리송합니다.

  그리고 ‘거시기하다’는 전라말이기만 하지 않습니다. 온나라에서 두루 쓰는 말입니다. 고흥에서 흔히 쓰는 ‘거석하다’를 놓고 사전은 ‘거식하다’라는 표준말을 싣기도 합니다.

  더 헤아려 보면 ‘머시기’라는 말이 있고, 뭔가 뭉뚱그려서 말하는 자리라든지 또렷하게 안 떠오르지만 나타내고 싶은 말이 있을 적에 ‘무엇’이나 ‘거기’나 ‘그것’이나 ‘것’이나 ‘거’를 쓰곤 합니다. 고장마다 말씨가 살짝 다를 수 있어도 마음은 같을 터이니, 엇비슷한 말이 감칠맛나게 태어나고, 이런 감칠맛나는 말이 삶이나 넋을 한결 북돋아 주지 싶습니다.

mouse : 1. 쥐, 생쥐 2. [컴퓨터] 마우스
마우스(mouse) : [컴퓨터] 컴퓨터 입력 장치의 하나

  요즈음 셈틀을 안 쓰는 사람은 없다시피 합니다. 시골 할매나 할배를 뺀다면 참말로 거의 모든 사람이 셈틀을 씁니다. 셈틀을 쓸 적에는 두 손으로 글판을 두들길 테고, 한 손으로 작고 둥그스름한 뭔가를, 머시기를 쥐기 마련입니다. 이 머시기를, 또는 거시기를 뭐라고 할까요? 아니, 뭐라고 이름을 붙이면 어울릴까요?

  영어 이름 그대로 ‘컴퓨터’를 받아들인 이들은 ‘마우스’라는 영어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글을 치는 판을 놓고도 처음에는 ‘키보드’라는 영어를 그대로 받아들이더니, 요새는 ‘자판(字板)’이라는 한자말로 조금 손질해서 쓰곤 합니다.

  먼저 ‘판’을 놓고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윷판’ 같은 자리에서 쓰는 한국말 ‘판’을 받아들여, 글쓰기에서 새로운 자리를 여는 뜻으로 ‘글판’이라 해 볼 만합니다. 꼭 한자 ‘판(板)’만 써야 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셈틀’을 헤아려 봅니다. ‘셈 + 틀’입니다. 베틀이나 재봉틀처럼 사람이 손으로만 일하기에는 살짝 벅차서, 좀 수월하게 일할 수 있도록 마련한 연장을 ‘틀’이라 해요. ‘셈’은 ‘생각’하고 뿌리가 같은 낱말이고, ‘세다(셈)’는 ‘헤다(헤아리다)’하고 뿌리가 같습니다. 컴퓨터라는 기계는 2진법으로 움직여요. 다시 말해서 2진법 숫자(세다) 얼거리요, 생각을 넓히는(헤다) 틀거리입니다. 이런 짜임새와 구실을 돌아볼 수 있다면 ‘셈틀’이란 낱말은 참으로 멋지고 알맞습니다.

  이다음으로 ‘마우스’를 살필게요. 영어사전을 살피지 않더라도 영어 쓰는 나라에서는 생쥐도 ‘마우스’요, 셈틀을 다룰 적에 손에 쥐는 거시기도 ‘마우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생각해 보아야지요. 생쥐이든 쥐이든 다람쥐이든 숲이나 들이나 구멍에서 사는 짐승도 온갖 ‘쥐’요, 셈틀을 다루면서 곁에 두는 머시기도 ‘쥐’라 할 만합니다. 그냥 ‘다람쥐’를 움직여 셈틀을 다룬다고 해도 됩니다. 또는 ‘다람이’라는 이름을 써도 되고, ‘잡이쥐(잡고 쓰는 연장이되 쥐처럼 생겼다는 뜻)’라 한다든지 ‘셈쥐(셈틀을 다룰 적에 쓰는 연장이되 쥐처럼 생겼다는 뜻)’라 한다든지 ‘손쥐(손으로 쥐고 움직여 셈틀을 쓰도록 하는 연장이되 쥐처럼 생겼다는 뜻)’ 같은 새말을 빚을 만해요.

  모두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영어로 ‘마우스’가 두 가지를 가리키듯, 한국말로 ‘다람쥐’가 두 가지를 가리켜도 즐겁습니다. 또는 한국사람 나름대로 슬기를 뽐내어 새로운 낱말을 지어도 즐거워요.

  전주마실을 하던 얼마 앞서 문득 “‘이무로운’ 사이”라는 말이 귓등을 스칩니다. 곁에 앉은 분들이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 이 말을 쓰는데, 이제 전라살이 여덟 해쯤 되는 저한테는 낯설면서 낯익은 말입니다. 제가 나고 자란 곳은 인천 바닷가라서 ‘이무롭다’라는 말을 들을 적마다 어쩐지 ‘이물·고물’이 퍼뜩 떠오르지만, ‘무르다’라든지 ‘물’이라는 낱말도 함께 떠오릅니다. ‘허물없다’라든지 ‘사이좋다’라고만 하기에는 살며시 결이 다른 ‘이무롭다’를 혀에 얹으면서 새삼스럽네 싶습니다.

  마치 ‘살갑다’하고 ‘슬겁다’가 뜻으로는 같다고 하더라도 결로는 달라서 혀에 감기는 이야기가 가만히 벌어지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나 겨레도 매한가지일 텐데, 영어라면 o 다르고 i 다르다 할 테고, 한국말에서는 아 다르고 어 다르다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쓰는 말은 품사나 맞춤법이나 문법이라는 이름으로는 가르거나 따질 수 없는 남다른 맛이 있어요. 서양 말법에 맞추어 과거형이나 현재진행형이나 동사나 형용사를 잘게 따져서는 말맛을 살리지 못한다고 할까요. 한국말은 예부터 임자말하고 꾸밈말하고 풀이말, 이렇게 크게 세 갈래로 나누던 말이기에, 이러한 결에 따라 이야기꽃을 살릴 적에 아이도 어른도 말을 한결 푸근하면서 무던히 익히거나 주고받을 만하지 싶습니다.

  이를테면 ‘자장면’이라 한들 ‘짜장면’이라 한들 대수롭지 않습니다. 저는 아이한테도 이웃한테도 ‘짜장국수’라고 말합니다. ‘냉면’이란 말도 잘 안 써요. 저는 ‘찬국수’라고 합니다. 예부터 한국사람이 즐겨먹은 국수라면 ‘잔치국수’라는 이름이 있지요. ‘막국수’란 두 가지로 읽힐 수 있는데, 하나는 투박하게 삶은 국수라면, 다른 하나는 이제 갓 삶은 국수입니다. 그래서 막걸리도 이처럼 ‘투박하게 거른 술’ 하나하고 ‘이제 바로 거른 술’ 두 가지로 읽을 만합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술이란 빨리 삭이지 못하는 마실거리이거든요. 마실 술이 되려면 꽤 오래 기다려야 하는데 막걸리는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마실 수 있어요.

  어쩌면 ‘막-’이라는 낱말은 투박한 맛하고 이제 바로 담근 맛을 아우르는 낱말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래서 ‘막’하고 ‘갓’은 서로 쓰임새가 아주 부드러우면서 새삼스레 갈릴 테고요.

  이 대목까지 생각줄을 이었으면 바야흐로 새롭게 말 몇 가지를 짓는 길을 열 수 있습니다. ‘막국수’에다가 ‘갓국수’를 쓸 수 있습니다. ‘갓’이라는 낱말은 투박한 결까지 담지는 않으니 ‘갓국수’라고 하면 그야말로 이제 바로 건진 뜨끈한 국수만을 나타낼 이름이 됩니다. 술을 놓고는 ‘갓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갓 지은 밥이라면 ‘갓밥’입니다.

  생각을 하기에 새로운 살림을 가꿉니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남이 시키는 일만 하기 마련입니다. 생각을 스스로 하려 하지 않으면, 남이 시키는 일만 할 뿐 아니라 모든 살림을 돈으로 사다가 쓰는 얼거리가 됩니다.

  남이 시키는 일만 해도 나쁘지는 않고, 모든 살림을 돈을 치러 사다가 써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때에는 나다움이란 없기 마련이에요. 남이 시키는 일만 할 적에 나다움이란 없지요. 공장에서 똑같이 찍은 것을 돈으로 사다가 쓰는데 나다움이 싹틀 자리란 없어요.

  ‘나다움’은 ‘아름다움’하고 이어집니다. 우리가 뭔가 보고서 아름답다고 느낀다면, 이 아름다움이란 ‘바로 그곳(거기·거시기)에만 있는 멋’을 느꼈다는 뜻입니다. “거시기 잘 모르겠지만 아름답네” 하고 느낄 적에는 스스로 새롭게 길을 열면서 환하게 웃음짓는 모습이라는 뜻이에요.

  아이들한테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가르치기 앞서, 아이들이 저마다 ‘아이다움’을 살릴 수 있도록 마음을 북돋우고 가꾸는 길을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우리 어른들도 스스로 새롭게 생각하고 하루를 짓는 즐거운 노래를 부르면 좋겠습니다. 고장말이란, 사투리란, 텃말이란, 스스로 제 보금자리를 새롭게 짓는 사람이 저마다 손수 지은 즐거운 말입니다. 2017.12.18.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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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15. 술잔을 부딪히는 한 마디



  사람들마다 쓰는 말이 다릅니다. 사람들마다 사는 고장이 다르고, 사람들마다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가는 터전이 다르거든요. 그런데 고장이나 삶터나 일터가 다르더라도 비슷하게 쓰는 말이 있어요. 이를테면 술잔을 부딪히면서 하는 말은 비슷하곤 해요. 요새는 “위하여!” 같은 말을 흔히 씁니다.


  그런데 저는 ‘위하다’라는 말을 아예 안 씁니다. 아이들 앞에서도 안 쓰고, 이웃 앞에서도 안 써요. 글을 쓰든 말을 하든 저로서는 ‘위하다’를 쓸 일이 없습니다.


  ‘위하다’는 ‘爲’라는 한자를 붙인 말씨예요. 공문서라든지 책을 살피면 “이를 위하여”나 “하기 위하여”나 “지원을 위하여”나 “여행을 위하여”나 “나라를 위하여”나 “꿈을 위하여”나 “사랑을 위하여”나 “시행하기 위하여”나 “보호하기 위하여”나 “발전을 위하여”나 “너를 위하여”나 “우리를 위하여”나 “평화를 위하여”나 “육성을 위하여”나 “출근을 위하여”나 “육아를 위하여”처럼 참말로 ‘위하다’는 이곳저곳에 안 쓸 수 없는 말인 듯 여길 만해요.


  이렇게 온갖 곳에 흔히 쓰는 말마디이니, 제가 이런 말마디를 안 쓴다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이 많습니다. 어떻게 그 말을 안 쓰면서 말을 할 수 있느냐고 아리송해 하시지요.


  이때에 저는 넌지시 되묻습니다. 어릴 적에 참말로 ‘위하다’라는 말을 꼭 쓰셨느냐 하고요. 옛날에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위하다’라는 말을 쓰셨는지 되묻기도 해요. 그리고 1970년대라든지 1960년대라든지 1950년대라든지, 또는 1980년대에 어린 나날을 보내면서 ‘위하다’라는 말을 쓴 적이 있는지 가만히 여쭙기도 해요.


  이렇게 여쭙거나 되묻는 까닭은, 저로서는 어릴 적에 ‘위하다’라는 말을 쓴 적이 참말 한 차례도 없기 때문이에요. 어른들 흉내를 내면서 물잔을 부딪힐 적에 “위하여!”라 말한 적은 있으나, 이 말이 도무지 무엇을 뜻하는지 알 길이 없었어요. 나중에 어른이 되어 사전을 뒤적여 보아도 우리가 왜 “위하여!”를 써야 하는지 알쏭했어요. 다만, ‘위하다’가 일본 말씨인 줄은 어른이 되고서 알았고, 이 일본 말씨는 공문서를 비롯해서 학문이나 책이나 방송에 어마어마하게 쓰는구나 하고 느꼈어요.


 이를 위하여 → 이 때문에

 하기 위하여 → 하려고

 지원을 위하여 → 도우려고

 여행을 위하여 → 여행 때문에 / 여행으로

 나라를 위하여 → 나라를 생각해서 / 나라 때문에

 꿈을 위하여 → 꿈을 이루려고 / 꿈 때문에

 사랑을 위하여 → 사랑을 이루려고 / 사랑 때문에

 시행하기 위하여 → 하려고

 보호하기 위하여 → 지키려고

 발전을 위하여 → 발돋움하려고 / 크려고

 너를 위하여 → 너를 도우려고 / 너 때문에 / 너를 생각해서

 우리 때문에 → 우리를 생각해서 / 우리 때문에

 평화를 위하여 → 평화를 이루려고 / 평화를 지키려고

 육성을 위하여 → 키우려고 

 출근을 위하려 → 출근하려고 / 일하러 가려고

 육아를 위하여 → 아이 때문에 / 아이를 생각해서


  하나하나 짚어 보니까 먼먼 옛날부터 이 땅에서 살아온 분들은 ‘위하다’라는 외마디 한자말을 쓸 일이 없었구나 싶어요. 일제강점기 뒤로 부쩍 퍼진 이 말씨는 그야말로 우리 말씨가 아니네 싶어요. 책이든 논문이든 방송이든 공문서이든 ‘위하다’가 끝없이 나오더라도 시골 할머니하고 할아버지 입에서 ‘위하다’가 나오는 일은 없어요.


  다만 농협 일꾼한테서 물들어 “마을을 위한 일”이라고 할 적에는 나타나지요. 그리고 이때에는 예전에 “마을을 생각하는 일”이나 “마을을 살피는 일”이나 “마을을 걱정하는 일”이나 “마을을 살리는 일”이라고 말했구나 하고 알아차렸어요.


  다시 말해서 지난날에는 때하고 곳하고 사람을 살펴서 알맞게 온갖 말을 마음껏 썼다고 할 만합니다. 오늘날에는 이도저도 아닌 채 어영부영 뭉뚱그리면서 ‘위하다’를 아무 자리에나 쓰는구나 싶어요.


  그러면 술자리 같은 데에서는 어떤 말을 써야 좋거나 즐거울까요? “위하여!” 같은 느낌을 살릴 만한 말씨는 있을까요, 없을까요?


  우리 스스로 새로운 말씨를 살리면서 뜻을 북돋우려고 하면 얼마든지 새롭거나 재미있거나 즐겁거나 뜻있는 말마디를 지을 만하리라 봅니다. 그러나 예전부터 썼다는 생각으로 그냥그냥 따라서 쓴다면 새로운 말마디를 못 짓겠지요. 더구나 예전에는 우리 나름대로 재미있거나 알맞게 쓰던 말씨가 있지만, 일제강점기나 미군정이나 군사독재를 거치는 동안 우리 말씨를 잊고 말아서, 외려 이제는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로 제대로 결이나 넋을 살리는 말을 생각하지 못할 수 있어요.


  누가 저한테 묻는다면, 이를테면 술자리라든지 잔치마당에서 “이보게, 자네가 한 마디 할랑가?” 하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려고 생각해요.


 사랑으로! 

 꿈으로!

 웃음으로!


  잔을 부딪히는 잔치마당이라면 “사랑을 위하여!”가 아닌 “사랑으로!” 한 마디로 넉넉하지 싶어요. “마을을 위하여!” 같은 말을 외치고 싶다면 “마을사랑!”이라고 외칠 수 있어요. “우리 마을 좋구나!”라든지 “우리 마을 으뜸!”이라든지 “우리 마을 좋아!” 하고 외칠 수 있고요.


  가만히 보면 술자리에서 외마디로 외치는 말로 “지화자!”라든지 “좋구나!”라든지 “얼씨구!”를 읊는 분이 있어요. 이런 외침은 참 수더분하구나 싶어요. 이와 비슷하게 “좋아!”라든지 “좋지!”라든지 “좋네!”라든지 “좋다꾸나!”라든지 “좋지롱!”이라든지 “좋아뿌러!”처럼 말끝을 바꾸어서 외쳐 볼 수 있어요.


  “너를 위한다”고 할 적에는 너를 생각하거나 헤아리거나 아끼거나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한국말은 숨기지 않아요. 그래서 “너를 사랑해”라든지 “너를 아껴”라든지 “너를 좋아해” 하고 또렷하게 밝힙니다. 또는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가 아니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나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나 “생각해! 생각해! 생각해!”처럼 외칠 만해요.


  생각하기에 새로운 말이 태어납니다. 좋아하기에 알맞게 쓸 말을 떠올립니다. 사랑하기에 즐거이 나눌 말을 지을 수 있습니다.


  자, 한번 마음을 모아 봐요. 우리가 먼먼 날을 고이고이 가꾸면서, 앞으로 새로우면서 즐겁게 이어서 쓸 만한, 이쁘고 애틋하며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우면서 재미날 뿐 아니라, 싱그럽고 알뜰하며 즐거울 말 한 마디를 혀에 얹어 봐요. 우리가 주고받는 말은 언제나 가을하늘 같은 바람이 되고 노래가 될 수 있습니다. 2017.10.23.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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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16. 어정쩡한 겹말을 털고 말꽃으로



  2017년 10월에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이라는 글쓰기 사전을 한 권 써냈습니다. 이 글쓰기 사전에는 모두 1004가지 보기를 다룹니다. 어느 이웃님은 사람들이 어정쩡하거나 엉뚱하게 쓰는 겹말이 이렇게 많으냐며 놀랍니다. 그런데 저도 놀랐습니다. 느낌을 살리거나 힘주어 밝히려는 뜻이 아닌 자리에, 어정쩡하거나 엉뚱하게 말을 겹쳐서 쓰는 버릇이 대단히 널리 퍼졌을 뿐 아니라 숱하게 많은 모습을 보면서 저부터 제 글을 새롭게 가다듬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글쓰기 사전인 《겹말 사전》을 써낸 뒤에도 겹말 보기는 꾸준히 모읍니다. 그야말로 끝도 없이 나오는데요, ‘시시때때로’나 ‘삼시세끼’나 ‘한도 끝도 없이’나 ‘누군가가’나 ‘무언가가’나 ‘가끔씩’이나 ‘이따금씩’은 매우 귀엽다고 할 만합니다. 이런 겹말은 살짝 손질해도 쉬 고칠 만하고, 가볍게 알려주어도 고개를 끄덕이겠지요. 그러면 다음에 드는 보기를 함께 살펴봐요. 우리는 참말로 우리 스스로도 못 깨닫는 채 온갖 겹말을 쓰고 맙니다.



마침 타이밍 잘 맞췄네 → 마침 잘 맞췄네

사찰을 다 다녔으나 그 절은 못 찾다 → 절을 다 다녔으나 그 절은 못 찾다

그곳에서 시작한 것이 처음이다 → 그곳에서 처음 했다

두어 번씩 정기적으로 → 두어 번씩 / 두어 번씩 꾸준히


없는 척 가장하더라도 → 없는 척하더라도 / 없는 척 꾸미더라도

해안도로를 달리는 길 → 바닷가를 달리는 길 / 바다를 끼며 달리는 길

종류를 나누다 → 나누다 / 갈래를 짓다 / 갈래짓다

혼자라는 고독을 체감하다 → 혼자라고 느끼다 / 외롭다고 느끼다


침입해 들어오다 → 쳐들어오다 / 마구 들어오다

몸으로 실천하다 → 몸으로 하다 / 몸소 하다

힘든 노동일에 종사하다 → 힘든 일을 하다 / 힘든 일을 맡다

희게 탁해지다 → 허얘지다 / 뿌얘지다


겹겹이 포개다 → 포개다 / 겹겹이 두다

내 적성에 맞다 → 내게 맞다 / 나한테 어울리다

키 작은 관목 → 키 작은 나무 / 떨기나무

꾸미고 치장한다 → 꾸민다

소수의 몇 그루가 생존하다 → 몇 그루가 살아남다 / 몇몇 그루가 살아남다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할 일 → 무엇보다도 할 일 / 먼저 할 일

본을 보이다 → 보기를 들다 / 보여주다 / 거울이 되다

날이 잘 서 예리하다 → 날이 잘 서다 / 날카롭다

딸기를 마음껏 만끽하다 → 딸기를 마음껏 먹다 / 딸기를 누리다


스케일이 크다 → 크다 / 통이 크다

이러한 일련의 글을 보면 → 이러한 여러 글을 보면 / 이러한 글을 보면

책의 저자입니다 → 책을 쓴 사람입니다 / 지은이입니다 / 글쓴이입니다

크게 심호흡을 하다 → 크게 숨을 쉬다 / 크게 들이마시다


조용히 침묵하다 → 조용하다 / 입을 다물다

남녀노소 누구나 → 누구나

서울로 상경하다 → 서울로 가다

시골로 낙향하다 → 시골로 가다


농사일로 바쁘다 → 농사로 바쁘다 / 흙짓기로 바쁘다

묵은 체증이 내려가다 → 묵은 것이 내려가다 / 얹힌 것이 내려가다

작은 형태의 책 → 작은 책

도중에 중퇴했다 → 중퇴했다 / 다니다 그만뒀다

직감적으로 느끼다 → 곧바로 느끼다 / 바로 느끼다



  우리는 왜 겹말을 쓸까요? 첫째로는 말이나 글을 쉽게 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쉽게 하면 될 말이나 글에 자꾸 뭔가 덧붙이려 하면서 겹말이 되고 맙니다. 뭔가 붙이거나 꾸며야 그럴듯해 보인다거나 뜻이 또렷하다고 잘못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큰 책이면 “큰 책”이라 하면 됩니다. 빠르게 달리면 “빠르게 달린다”라 하면 됩니다. “큰 형태의 책”이나 “빠른 속도로 달린다”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음으로 한국 사회는 ‘겹말 굴레’에 갇혔습니다. 겹말 굴레란, 쉽거나 수수하거나 또렷한 말로 생각을 나타내지 못하도록 얽매이거나 꼬인 굴레라 할 만합니다. 우리한테는 한국말이라는 텃말이 있습니다만, 예부터 권력자하고 지식인은 중국 한문을 높이 여겼습니다. 이러다 보니 ‘어머니·아버지’는 낮춤말로 삼고 ‘모친·부친’은 높임말로 삼고 말지요. 여기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말만 써야 한 서른 몇 해를 보냈고, 일본 한자말이 신문이나 책이나 방송을 거쳐 어마어마하게 밀려들었습니다.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다가 대학 학문까지 죄다 일본 한자말로 범벅이 되었지요.


  그리고 한국 사회는 조선 봉건 부스러기하고 일제강점기 찌꺼기를 털 겨를이 없었어요. 해방 뒤로는 독재와 새마을운동과 경제성장이라는 채찍질에 시달리면서 말을 말답게 건사하거나 글을 글답게 갈무리하는 살림을 못 지었어요. 이러면서 눈부신 인터넷 나라로 달라지는 동안 한국말은 ‘의사소통 도구’로조차 구실을 못할 만큼 나뒹굽니다.


 책의 작가·책의 작자·책의 저자·책의 필자 → 지은이·글쓴이·책쓴이


  불거지거나 늘어나는 겹말을 걷잡지 못하는 까닭을 하나 더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 스스로 새로운 낱말을 지어서 살찌우겠다는 생각을 못하기 일쑤입니다. 맞춤법하고 띄어쓰기하고 표준말이라는 데에 너무 얽매이지요. 서로 생각을 즐거이 나누도록 돕는 말법이 아닌, 틀에 맞추지 못하면 ‘틀렸어!’나 ‘잘못이야!’ 같은 손가락질을 하는 말굴레가 억누르기도 합니다.


  가만히 보면 고장말(사투리·텃말·마을말·시골말)은 문학에서도 버림을 받고, 책이나 교과서나 방송에서는 더더욱 못 나옵니다. 고장마다 말이 달라 ‘어머니’라는 표준말이 아닌 ‘어무이·오마니·어매·오마이·어마이·엄매·엄메·움마’ 같은 고장말을 쓰지만 정작 이러한 여러 고장말은 차츰 설자리를 잃습니다. 한국말에는 ‘진지’나 ‘여쭈다’나 ‘계시다’처럼 꼴이 아예 다른 높임말이 더러 있으나, 자리나 말씨에 따라서 여느 말도 모두 높이는 느낌을 나타내요. ‘어머니·어무이……’만으로도 얼마든지 높이는 말을 나눌 수 있어요. 토씨에 따라서도 높이고요. 이러한 말결을 제대로 못 가르치면 “저희 어머니 아무개 모친은” 같은 겹말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새로 나온 최신곡”이 아닌 ‘새노래’를 들으면 좋겠습니다. “바꾸고 교환하”지 말고 그냥 ‘바꾸’면 좋겠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옛이야기” 아닌 ‘옛이야기’를 들으면 좋겠습니다. “놀랍고 충격적”이라 여기지 말고 ‘놀랍게’ 여기면 좋겠어요. “반질반질 광이 나”게 안 닦아도 좋으니 ‘반질반질’ 닦으면 좋겠어요. “딱 잘라 거절하”지 말고 그냥 ‘딱 자르’면 돼요.


  학교나 사회는 ‘석차순’으로 사람을 가르곤 하는데 ‘석차’나 ‘성적순’으로는 이제 그만 가르면 좋겠어요. “작은 사이즈”인 옷을 입겠다며 “다이어트로 살을 빼”는 일을 굳이 안 해도 되지요. ‘작은’ 옷도 좋고, ‘살빼기’를 안 해도 좋아요. “늦게 핀 대기만성”이 아닌 ‘늦게 핀’ 꽃이거나 ‘늦꽃’일 뿐이에요.


  곱게 말꽃을 피우면서 어린이 눈높이를 헤아리며 쉽게 말하려고 하면 겹말은 말끔히 사라져요. 투박한 시골말을 쓰거나 수수한 고장말을 사랑할 적에도 겹말은 눈녹듯이 사라져요. ‘오밤중’도 ‘야밤’도 아닌 ‘한밤’에 별잔치를 보며 생각합니다. 겹말이나 군말에서 거품을 빼면서 홀가분하게 피어날 이야기꽃을 그립니다. 2017.11.21.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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