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짓는 글살림

24. 키



  우리 집 아이들은 ‘금연 구역’이라는 말을 못 알아봅니다. 다만, 이 말 옆에 나란히 있는 그림을 보면서 “저기, 담배에 연기 나는 그림에 빨간 줄로 찍 그었으니까, ‘금연 구역’은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뜻이야?” 하고 묻기는 합니다. 열한 살 큰아이가 들려주는 말을 듣고서 제 열한살 무렵을 떠올립니다. 그때에 제 또래 가운데 ‘금연·흡연’을 못 알아듣는 동무가 꽤 있었어요. 저도 때로는 무슨 말인지 헷갈렸습니다. 아무래도 열한 살 어린이가 ‘담배 피우다·담배 안 피우다’ 아닌 ‘금연·흡연’을 알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런 한자말을 아는 어린이가 더러 있을 수 있으나, 모르는 어린이는 어김없이 꽤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르는 어른도 제법 있지 않을까요?


  아이들은 ‘출입 금지’라든지 ‘통행 금지’라는 말을 쉽게 못 알아듣습니다. 이때에 우리 어른들은 생각해 볼 만하겠지요. 왜 저 아이들은 이런 말을 못 알아듣느냐고 말이지요. 그리고 달리 생각한다면, 왜 아이들이 못 알아들을 만한 말을 곳곳에 알림글로 쓰는가를 따질 수 있습니다.


  지난날에는 공공기관에서 쓰는 어려운 말을 나무라거나, 지식인이 쓰는 일본 한자말이나 영어를 놓고서 따지는 목소리가 거의 없었어요. 나라에서 쓰면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여기기 일쑤였고, 지식인이 쓰면 ‘배운 사람이 쓰는 말’이니 틀린 말이 없으리라 여기곤 했어요. 오히려 그런 어려운 말이나 일본 한자말이나 영어를 써야 사회를 잘 안다거나 똑똑하다고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이제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우리는 오늘 어떤 말을 써야 서로 즐겁고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울까요? 우리는 어제 어떤 말을 쓰면서 마음을 나눌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앞으로 어떤 말을 쓰면서 새롭게 삶을 지피는 길을 갈 만할까요?


  “키를 재다”가 아닌 “신장을 측정하다”라 해야 할 까닭이 있을까요? “몸무게를 달다”가 아닌 “체중을 측정하다”라 해야 할까요? 학교나 회사에서는 으레 ‘신체 검사’를 한다는데, 이는 “몸 살피기(몸을 살피다)”입니다. 우리는 왜 아이한테도 어른 사이에서도 ‘몸살피기(또는 몸 살피기)’나 ‘몸재기’처럼 쉽게 알아들을 만한 말을 안 썼을까요? 일제강점기에 스며든 일본 한자말이니 안 써야 한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잘 따져 보면 좋겠습니다. 예나 이제나 아이들은 ‘신체 검사’라는 말을 처음 들으면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해마다 이런 말을 듣고서 몸을 살피는 일을 겪고 나면 비로소 그 말이 그러한 뜻으로 그러한 자리에 쓰는구나 하고 어림합니다. ‘신체’하고 ‘검사’가 저마다 무슨 뜻인지를 새길 적에는 굳이 안 써도 될 말을 껍데기를 씌워서 쓰는 얼거리인 줄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숫자가 좀 많지만 국립국어원 사전에서 ‘신장’이라는 낱말을 찾아서 옮기겠습니다. 모두 열일곱 낱말이 나오는데, 이 가운데 몇 낱말이나 한국말사전에 실을 만한지 낱낱이 따져 보면 좋겠어요.


신장(-欌) : 신을 넣어 두는 장 ≒ 신발장

신장(申檣) : [인명] 조선 전기의 문신(1382∼1433)

신장(伸長) : 길이 따위를 길게 늘림

신장(伸張) : 세력이나 권리 따위가 늘어남. 또는 늘어나게 함

신장(伸葬) : [고적] = 펴묻기

신장(身長/身丈) : = 키

신장(信章) : = 도장(圖章)

신장(信藏) : [불교] 불도에 대한 신앙심에 일체 공덕이 포함되어 있는 것

신장(神將) : 1. [민속] 귀신 가운데 무력을 맡은 장수신. 사방의 잡귀나 악신을 몰아낸다 2. [불교] = 화엄신장 3. 신병을 거느리는 장수 4. 전략과 전술에 능한 장수

신장(神漿) : 1. 신에게 올리는 음료 2. 영험이 있는 음료

신장(訊杖) : = 형장(刑杖)

신장(晨粧) : 식전(食前)에 하는 화장(化粧)

신장(腎腸) : 콩팥과 창자라는 뜻으로, ‘진심(眞心)’을 이르는 말

신장(腎臟) : [의학] = 콩팥

신장(新粧) : 건물 따위를 새로 단장함. 또는 그 단장

신장(新裝) : 1. 시설이나 외관 따위를 새로 장치함. 또는 그 장치 2. 새로운 복장

신장(Xinjiang[新疆]) : [지명] =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


  신발장을 가리키는 ‘신장’은 사전에 실을 만합니다. 그런데 조선 무렵 사람 이름이라든지, ‘늘리다·늘어나다’라든지 불교에서 쓰는 말이라든지, 의학에서 쓴다는 말이라든지, 중국 땅이름을 굳이 한국말사전에 실어야 할는지 아리송합니다. ‘콩팥’이란 낱말이 어엿이 있는데 꼭 ‘신장’을 써야 할까요? 새로 꾸밀 적에는 “새로 꾸몄다”고 하면 넉넉하지 않을까요? “새로 열다” 아닌 “신장 개업”이라고만 해야 할까요?


  사전을 보면 ‘키’를 가리키는 한자말 ‘신장’은 “= 키”로 풀이합니다. 이는 한국사람이 쓸 낱말은 ‘키’ 하나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를 더 헤아리면 좋겠어요. ‘키’라고 할 적에 무엇이 떠오를까요? 소릿값 ‘키’로는 어떤 낱말이 떠오를까요?


 키 1 : 몸이 얼마나 높은가

 키 2 : 곡식을 까부르는 연장

 키 3 : 배가 가는 길을 다루는 연장


  한국말 ‘키’는 세 가지입니다. 제 어릴 적을 떠올리면, 저는 ‘키’라는 말을 들으면 내 몸높이가 얼마나 되는가를 먼저 생각했어요. 우리 어머니는 ‘키’라고 할 적에 곡식을 까부르는 연장을 먼저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씀했어요. “옛날에는 이부자리에서 쉬를 하면 머리에 키를 씌우고 집집마다 소금 얻으러 다니도록 했지.” 아마 우리 어머니는 머리에 키를 쓴 어린 날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릴 적에 머리에 키를 쓸 일이 없었습니다. 제 어릴 적은 어느새 키를 안 쓰는 도시살림이었어요. 우리 집이 시골이었다면 으레 키로 까부르는 키질을 했을 테지요.


  뱃사람이라거나 바닷가에서 산다면 또 다른 ‘키’를 먼저 생각할 만합니다. 저는 바닷마을인 인천에서 나고 자란 터라 셋째 키를 둘째 키보다 먼저 생각했습니다. 키질을 하는 배를 쉽게 보고 만지면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키질’을 놓고도 세 가지로 헤아릴 만합니다. 하나는 몸높이를 헤아리는 키질이요, 누구 키가 더 크거나 작은가를 따지는 몸짓입니다. 곡식을 까부르는 키질 둘에 배가 가는 길을 다루는 키질이 더 있어요. 그런데 있지요, 이런 ‘키·키질’보다 ‘열쇠’를 가리키는 영어 ‘key’가 익숙한 분이 부쩍 늘었습니다. 요새는 자동차를 몰건 아파트에서 살건 열쇠라는 한국말보다는 ‘key’라는 영어를 매우 쉽게 씁니다.


  어느 자물쇠이든 다 딸 수 있다면 ‘온열쇠’라 할 만하지만 ‘마스터키’라고들 합니다. ‘숫자열쇠’라 말하는 분은 드물고 ‘숫자키’라 하지요. 이밖에도 온갖 자리에서 키는 키대로 열쇠는 열쇠대로 자리를 빼앗깁니다. 설자리를 하나둘 잃으면서 쓰임새가 잊히고, 이러면서 새롭게 알맞게 즐겁게 짓는 말길이 조용히 막힌다고 할 만해요.


  얼마 앞서 어느 고장에 마실을 다녀오는데 “건너지 마세요”라 적은 알림글을 보았습니다. 찻길을 함부로 건너지 말라는 뜻으로, 찻길 한복판에 울타리를 세워서 글씨를 새겼더군요. 예전 같으면 “무단횡단 금지”처럼 딱딱하고 메마른 일본 한자말을 썼을 테지만, 어느새 부드러우면서 쉬운 말씨를 쓰는 손길이 되었구나 싶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가꿀 나라를, 삶터를, 마을을 곱게 그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롭고 아름다운 말길하고 글길도 곱게 그릴 수 있기를 바라요.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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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23. 모두


  ‘모두’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셔요. ‘모두’라는 소리를 들을 적에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는 무엇을 헤아릴까요, 또 어린이나 푸름이는 무엇을 그릴까요? 정치를 하거나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맡는 이는 ‘모두’라 하면 무엇을 생각할까요?

 모두 : 1. 일정한 수효나 양을 기준으로 하여 빠짐이나 넘침이 없는 전체 2. 일정한 수효나 양을 빠짐없이 다 ≒ 공히
 모두(毛頭) : → 털끝
 모두(毛頭) : [불교] = 모도(毛道)
 모두(冒頭) : 말이나 글의 첫머리

  한국말사전을 펴니 ‘모두’라는 소리로 적는 낱말을 넷 싣습니다. 이 가운데 “모두 있어”나 “모두 반가워”처럼 쓰면서 ‘무엇을 빠뜨리지 않고 아우르며 가리키는 낱말’이 첫째로 나옵니다. 둘째로 나오는 한자말 ‘모두(毛頭)’는 ‘털끝’으로 고쳐써야 한다고 화살표를 붙여 놓습니다. 셋째로 ‘모두(毛頭)’는 불교에서 쓰는 한자말이라 하고 ‘모도(毛道)’하고 같은 낱말이라는데, 이는 “[불교] 1. = 범부(凡夫 2. 선사에서, 삭발하는 일을 맡아보는 소임”을 나타낸다는군요. 넷째로 ‘모두(冒頭)’는 말이나 글에서 첫머리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자, 다시 헤아려 보면 좋겠습니다. 한국말사전에 ‘모두’ 소리가 나는 낱말을 넷 싣는데, 참말로 이 네 낱말을 다 쓸 만할까요? 이 네 낱말은 참말로 한국말사전이라고 하는 책에 올림말로 실을 만할까요?

  털끝을 가리킬 적에는 ‘털끝’이라 하면 넉넉합니다. 더도 덜도 아니지요. ‘모두(毛頭)’는 사전에서 아예 털어낼 만합니다.

  불교에서 쓴다는 ‘모두(毛頭)’는 불교 전문용어로 여겨야 할까요? 아니면 불교에서 앞으로 쉽게 고쳐쓸 낱말로 삼아야 할까요? 절에서 머리카락을 미는 일을 굳이 ‘모두·모도’라 해야 하는지 곰곰이 따질 노릇입니다. ‘머리밀기’나 ‘머리깎기’처럼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낱말을 쓰면 불교라는 길을 가기 어려울는지 돌아볼 노릇입니다.

  정치를 맡는 일꾼이나 대학에서 가르치는 분은 으레 ‘모두(冒頭)’라는 일본 한자말을 씁니다. 이 일본 한자말을 털어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오랫동안 흘렀으나 이 한자말은 일본 한자말이 아닌 ‘토론·의회·회의 전문용어’로 여기는 분이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한자말 ‘모두’는 전문말일까요? ‘글머리·말머리’ 같은 쉬운 한국말은 전문말로 삼기 어려울까요? 어린이도 할머니도 알아듣고 함께 쓸 수 있는 쉬운 한국말은 전문말이 되어서는 안 될까요?

묘(墓) : = 뫼
묘지(墓地) : 1. = 무덤 2. 무덤이 있는 땅. 또는 무덤을 만들기 위해 국가의 허가를 받은 구역 ≒ 총지(塚地)
뫼 : 사람의 무덤 ≒ 묘(墓)·탑파(塔婆)
무덤 : 송장이나 유골을 땅에 묻어 놓은 곳. 흙으로 둥글게 쌓아 올리기도 하고 돌로 평평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대개 묘석을 세워 누구의 것인지 표시한다 ≒ 구묘(丘墓)·구분·구총(丘塚)·만년유택·묘지(墓地)·분묘(墳墓)·분영(墳塋)·유택(幽宅)·총묘(塚墓)

  ‘묘·묘지’하고 ‘뫼·무덤’이라는 낱말을 헤아려 봅니다. 사전을 곰곰이 살피면 ‘묘’는 “→ 뫼”요, ‘묘지’는 “→ 무덤”이로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라에서는 ‘나라무덤’ 같은 이름을 안 씁니다. ‘국립묘지’처럼 한자말을 씁니다. 쉬운 한국말이 아닌 꺼풀을 씌운 한자말을 써야 하는 줄 여겨요. 한자말만 전문말일 뿐 아니라, 한자말이어야 높이 섬기는 줄 여깁니다.

  사전 뜻풀이를 더 보면, ‘무덤’이라는 쉬운 한국말에 갖은 한자말을 비슷한말이라며 덕지덕지 붙이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덕지덕지 덧달아 놓는 한자말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곰곰이 돌아볼 노릇입니다. 저런 말을 굳이 써야 할까요? 저런 말을 쓰지 않는다면 무덤을 앞에 두고 제대로 나타낼 말이 없을까요?

  이제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 말 한 마디도 곰곰이 생각하고 찬찬히 헤아리며 가만히 살펴서 해야 할 때입니다. 몇몇 못난 사람만 나라를 어지럽히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전문용어라는 사슬’도 나라를 어지럽힌 줄 느낄 때입니다. 사회 곳곳에서 전문가라는 이름을 거머쥔 어른들은 ‘전문용어라는 주먹질’을 마구 휘두릅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어른들이 저마다 전문가로서 전문용어를 쓰니, 어린이나 푸름이는 이런 어른을 고스란히 따라서 ‘끼리끼리 쓰는 말’을 자꾸 지어냅니다. 전문말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전문가 사이에서 끼리끼리 쓰는 말입니다.

  눈을 들어 이웃나라를 바라보아야 해요. 중국이나 일본을 넘어서 온누리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해요. 온누리를 가로지르는 말이 ‘전문가 사이에서 끼리끼리 쓰는 말’이면 모두 평화나 민주나 평등하고 어긋납니다. 온누리를 아우르는 말이 ‘여느 삶자리에서 비롯한 쉽고 수수한 말’로 깊거나 넓은 전문 자리를 다루거나 나타낼 적에는 모두 평화나 민주나 평등으로 날개를 폅니다.

  철학이든 의학이든 과학이든 공학이든 농학이든 정치이든 경제이든 교육이든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전문가라는 자리를 권력 아닌 평화·민주·평등으로 바라보는 눈이 있다면, 누구도 넘볼 수 없도록 담을 쌓는 전문말을 쓸 일이 없습니다. 누구나 쉽게 배우고 쉽게 나누면서 쉽게 즐길 살림말이나 삶말을 쓰겠지요.

  책을 짓는 사람들은 ‘도비라·세네카’ 같은 일본말을 쓸 줄 알아야 마치 ‘책 짓는 전문가’인 줄 잘못 압니다. 아무것도 아닌 쉽고 수수한 일본말인 ‘도비라·세네카’를 가볍게 털어내어 우리 삶자리에서 널리 쓰는 낱말로 고칠 줄 아는 작은 몸짓으로 거듭나야지 싶습니다. “모두 발언을 하겠습니다”가 아닌 “첫머리를 열겠습니다”나 “첫마디를 하겠습니다”나 “첫말을 펴겠습니다”나 “여는 말을 하겠습니다”처럼 고쳐쓸 줄 안다면, 때나 자리에 맞는 새로운 말씨를 한결 넓게 북돋우거나 가꿀 수 있습니다.

  “한 우물을 판다”고 하지요. 전문가라는 자리는 ‘한우물’이 될 텐데, 오래도록 한우물을 파서 남다르거나 빼어나게 어떤 일을 이룬다 하더라도, 고인 물이 되면 그만 썩고 말아요. 말은 물과 같아서 넓고 깊게 흐를 적에 싱그러우면서 맑습니다. 고이는 한우물 아닌, 샘솟는 골짝물이자 흐르는 냇물이자 너른 바닷물이 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어린이나 푸름이가 거친 말을 마구 쓰기에 걱정스럽다면, 먼저 어른 스스로 제 모습을 돌아볼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우리 삶터에서 어른들은 저마다 ‘전문말’이라는 수렁에 갇히지 않았을까요? 널리 쉽게 쓰면서 어깨동무하는 말이 아닌, 몇몇 사이에서 우쭐거리는 말에 사로잡히지 않았을까요?

  시골 사투리를 귀여겨들어 보면 어느 고장에서 쓰는 사투리이든 따스하면서 넉넉하기 마련입니다. 손수 삶을 짓고 살림을 가꾸던 마음하고 눈길로 지은 말이 사투리이거든요. 처음에는 이웃 고장 사투리가 낯설 테지만, 시나브로 따스하며 넉넉히 스며들어요. 샘솟는 말이요, 흐르는 말이며, 너른 말인 사투리입니다. 이와 달리 전문가로 무리를 지어 외곬로 가두는 말은 새로운 넋이 샘솟지 못하도록 가로막거나 짓눌러요. 따스하거나 넉넉한 꿈이 자라지 못하도록 억누르거나 담을 쌓습니다.

  새 정치 일꾼이나 심부름꾼을 뽑은 마당이라면, 우리가 여느 자리나 전문 자리 어디에서나 두루 쓰는 모든 말이 바야흐로 평화하고 민주하고 평등에 걸맞도록 저마다 가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함께 할 일입니다. 우리 모두 새롭게 함께 즐겁게 지어서 노래하듯 나눌 말입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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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22. 길벗


  우리 삶터에서 말살림을 돌아보면 아직 우리 손으로 새말을 짓거나 가꾸는 힘이 모자라지 싶습니다. 손수 짓거나 스스로 가꾸려는 마음이 퍽 모자라구나 싶기도 합니다. 이웃나라에서 쓰는 말을 고스란히 따오는 분이 많은데, 우리 나름대로 새롭게 말을 지어서 쓰자는 생각이 처음부터 없구나 싶기도 해요. 정치나 행정, 초·중·고등학교하고 대학교뿐 아니라, 글을 쓰는 이까지, 제 나름대로 깜냥을 빛내어 말 한 마디를 새롭게 길어올리지 않기 일쑤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서양 삶말이 있습니다. 저는 ‘속담(俗談)’이 아닌 ‘삶말’로 고쳐서 쓰는데요, 한자 ‘속(俗)’은 ‘속되다’처럼 여느 사람들을 낮거나 하찮게 보는 마음을 담아요. 수수한 사람들이 수수하게 쓰는 말은 낮거나 하찮게 보면서, 힘을 거머쥔 이들이 쓰는 한자를 높이려는 기운이 서린 ‘속담’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속담이란 수수한 사람들이 저마다 삶자리에서 길어올린 짧은 말이에요. 삶을 지으면서 느끼거나 배운 이야기를 짤막히 간추렸기에 속담이라면, 이는 ‘삶이야기’, 곧 ‘삶말’이라 할 만하구나 싶어요. 삶말은 때로는 ‘삶노래’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서양 삶말 “새 술은 새 부대에”를 떠올린다면, 우리가 새로 맞아들이는 살림에 새로운 말을 붙여야 어울리겠구나 싶어요. 현대문명이라는 새로운 살림을 굳이 영어나 일본 한자말로 이름을 붙이기보다 우리 나름대로 이름을 붙여 볼 수 있습니다. ‘삐삐’나 ‘손전화·집전화’ 같은 말이 태어나듯이, ‘집밥’이나 ‘손글씨·손톱꽃’ 같은 말도 태어나듯이, ‘나들목’이나 ‘맞이방·마을쉼터’ 같은 말도 짓듯이, 서둘러 바깥살림을 들이기보다는 찬찬히 바깥살림을 헤아려 우리 나름대로 즐길 길을 살피면 얼마든지 멋지거나 좋거나 알맞거나 훌륭하거나 곱게 새말을 우리 슬기로 지을 만합니다.

  서두르기에 한국말로 새롭게 짓는 길을 안 걷는달 수 있습니다. 너무 빨리 바깥살림을 끌어들이려 하다 보니, 스스로 말을 짓는 마음을 잊는달 수 있어요. 한동안 느긋이 바라보거나 지켜보면서 마음을 기울이면, 누구나 어떤 것에든 알맞게 새말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삶말에서도 ‘부대(負袋)’는 일본 한자말이에요. ‘포(包)·포대(包袋)’도 한국말은 아닙니다. 이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한국말은 따로 있습니다. 예부터 누구나 흔히 쓰던 한국말이 있으니, 서양 삶말을 우리 삶자리로 받아들일 적에도 이 대목을 더 헤아릴 수 있으면 좋아요.

  한국말은 ‘자루’입니다. “새 술은 새 자루에”라 하면 됩니다. ‘자루’는 쓰임새가 넓으니, ‘비닐 봉지’는 ‘비닐 자루’라 하면 되어요.

 홈리스. 노숙자. 노숙인. 떨꺼둥이. 한뎃잠이

  집을 떠나거나 잃은 채 한길에서 먹고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을 두고 어떤 이름으로 가리켜야 알맞을까 하고 생각할 겨를이 없이 불쑥 ‘홈리스(homeless)’라는 영어가 들어왔고, 왜 영어를 쓰느냐고 따지는 사람이 나타나자 ‘노숙자(露宿者)’라는 한자말로 이름을 바꾸더니, ‘-자(者)’라는 한자가 낮춤말이라 하면서, 다시 ‘노숙인(露宿人)’으로 바꾸었지요.

  서둘러 말을 들여오려 하니 이렇게 뒤죽박죽이 됩니다. 더구나 서둘러 들여온 말을 놓고서 제대로 가다듬거나 손질하거나 지으려고 생각하지 않으니,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는데요, 이리저리 바꾸어도 그리 어울려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이름 ‘홈리스·노숙자·노숙인’을 바라보던 어느 두레에서 ‘떨꺼둥이’라는 오랜 말이 있는데 구태여 영어나 한자말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밝힌 적 있어요. 서울에서 집을 떠나거나 잃은 채 한길에서 지내는 이를 돌보는 일을 하는 두레에서 ‘떨꺼둥이’란 말을 찾아냈지요.

  그런데 ‘-둥이’란 말끝, ‘떨꺼-’란 앞말, 이 두 가지가 못마땅하다고 여기는 분이 있어요. 말은 삶결을 고스란히 담는데, 이러한 말결을 바라보지 못할 적에는 오랜 말이 있어도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안 받아들이더군요. 저는 이런 모습을 보고 ‘한데·한뎃잠’이라는 틀을 바탕으로 ‘한뎃잠이’란 낱말을 지어 보았습니다. 한데에서 지내니 ‘한뎃잠이’라 하면 되겠구나 싶었어요. 말끝을 살짝 바꾸어 ‘한뎃잠벗·한뎃잠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새말짓기를 멈추어도 됩니다. ‘떨꺼둥이·한뎃잠이’로 넉넉하다고 여겨도 되지요. 그리고 더 헤아리면서 새말을 지어도 됩니다. 길지 않으면서 뜻을 잘 담을 만한 결을 살핀다면, “길에서 사는 사람”이니까, 비슷한 틀로 다른 자리에서 사는 사람을 헤아리면 되어요. 이를테면 “들에서 사는 사람”이나 “집에서 사는 사람”을 헤아려 봅니다.

  자, 들에서 사는 일을 무엇이라 할까요? ‘들살이’라 합니다. 집에서 살림을 하면 무엇이라 할까요? ‘집살림’이라 합니다. 들에서는 ‘들살이·들살림’이지요. 집에서는 ‘집살이·집살림’입니다. 그러면 ‘들살이·들살림’에서는 ‘들살이벗·들살이님’에다가 ‘들살림이·들살림벗·들살림님’이라는 새 이름을 얻습니다. ‘집살이·집살림’에서는 ‘집살이벗·집살이님’하고 ‘집살림이·집살림벗·집살림님’이라는 새 이름을 얻어요.

  이제 길에서는 ‘길살이·길살림’이라는 말을 얻어요. 이다음으로는 ‘길살이벗·길살이님’하고 ‘길살림이·길살림벗·길살림님’ 같은 말을 얻습니다.

  말을 새로 짓기는 쉽습니다. 삶을 새로 짓기도 쉽습니다. 어렵지 않아요.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늘 어렵습니다. 씨앗을 심는 손길도 처음에는 낯설거나 어려울는지 몰라도, 한 걸음 딛고 두 걸음 딛다 보면 매우 쉬운 줄 알 수 있어요. 옛날부터 누구나 씨앗을 심어 흙을 보살피면서 먹을거리를 얻고 누렸어요. 이처럼 말이라는 씨앗도 누구나 마음밭에 심어 즐겁게 돌보면서 새롭게 열매를 거두듯, 알맞거나 좋은 새말을 얻을 만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말을 새로 지으면, 곁따라 다른 새로운 말을 두루 얻어요. 길에서 지내는 이웃을 생각해 보셔요. ‘길살이벗’이나 ‘길살림님’인 이들은 길에서 지내는 이웃이니 ‘길이웃’이라 해도 어울립니다. 길에서는 ‘길삶’을 짓습니다. 길삶을 짓는 이를 두고서 수수하게 ‘길벗·길님’이라 해도 됩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굳이 ‘길살이벗·길살림님’ 같은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됩니다. 단출히 ‘길벗·길님’이라 할 수 있어요. 처음부터 이렇게 수수하며 단출한 이름을 쓸 만했어요. 집에서 살건 길에서 살건 모두 같은 사람이요 목숨이며 사랑이거든요.

  길에서 지내는 이웃을 길벗이나 길님이라 한다면, 이때에 몇 가지 새말을 저절로 얻습니다. 한집에서 지내는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을 ‘집벗·집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 한자말 ‘가족’이든 한국 한자말 ‘식구’이든 고이 내려놓고서 오늘날에 걸맞게 새로운 이름으로 서로 부를 수 있습니다. ‘집벗님’이라 해도 어울립니다.

  눈을 돌려 숲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별에는 사람만 있지 않습니다. 푸나무가 있고, 벌레하고 짐승하고 새가 있어요. 풀밭을 바라보며 ‘풀벗·풀님·풀벗님’을 그립니다. 숲을 마주하며 ‘숲벗·숲님·숲벗님’을 생각합니다.

  이름을 불러 주셔요. 아무 이름이나 부르지 말고, 마음을 담아 사랑으로 지은 이름을 불러 주셔요. 이름을 지어 보아요. 아무 이름이나 짓지 말고, 생각을 실어 슬기롭게 이름 하나 지어요.

  우리가 부르는 이름은 늘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가 듣는 이름은 늘 우리 생각을 북돋웁니다. 흔한 살림이나 작은 세간에도 아무 이름이 아닌, 제대로 마음을 쏟아서 이름을 붙일 적에 삶이 새롭게 피어난다고 느낍니다. 이웃한테 어떤 이름을 붙이면 즐거울까요? 벗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면 반가울까요? 우리 이름은 우리 삶이요 사랑이며 슬기입니다. 2018.5.17.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숲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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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21. 막말잔치


  어릴 적에는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옛말을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어린이가 이 옛말을 알아듣기에는 어려울 수 있어요. 그러나 조금 더 생각을 기울이면 “바람이 살랑 분다”하고 “바람이 살랑살랑 분다”는 결이 다르니, 아 다르고 어 다른 까닭을 어렴풋이 헤아릴 만하기도 합니다.

  이른바 ‘말맛’입니다. 말끝을 살짝 바꾸면서 말맛이 바뀌어요. 다시 말하자면 말끝마다 말결이 달라 말맛이 다릅니다. 말끝을 바꾸기에 말결이 새롭고 말맛이 살아나면서 말멋까지 생길 수 있어요.

말잔치 : 말로만 듣기 좋게 떠벌리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막말 : 1. 나오는 대로 함부로 하거나 속되게 말함. 또는 그렇게 하는 말 ≒ 막소리

  말을 둘러싼 두 가지 낱말을 헤아려 봅니다. 먼저 ‘말잔치’입니다. 말잔치를 한다고 할 적에는 말로 즐거운 잔치가 아니라 떠벌이기를 가리켜요. ‘잔치’라는 말이 붙는데 뜻은 딴판이지요. 다음으로 ‘막말’을 헤아리면, 마구 하는 말이기에 줄여서 막말이에요. 이때에는 말뜻 그대로입니다.

  자, 그러면 새롭게 생각해 봐요. ‘막말 + 말잔치’로 새말을 엮는다면 어떠할까요? 언제부터인가 ‘막말잔치’라는 말을 쓰는 분이 있어요. 요새는 이 ‘막말잔치’를 무척 널리 씁니다. 아직 사전에 안 실립니다만, 사전에 실리든 말든 사람들은 이 낱말이 매우 어울린다고 여겨서 알맞게 써요.

  ‘끝말잇기’가 있어요. 아이들이 스스로 말을 익히도록 놀이로 삼는 끝말잇기입니다. 끝말잇기처럼 ‘앞말잇기’라든지 ‘샛말잇기(사잇말잇기)’도 할 만해요. 처음에는 ‘말’ 하나였습니다만, 어느새 여러모로 가지를 뻗어요. 말잇기놀이를 더 헤아리면 ‘텃말잇기’도 할 수 있습니다. 아직 텃말잇기를 하는 분을 못 보았습니다만, 표준 서울말 한 마디를 놓고, 다 다른 고장 사람들이 모여서 제 고장 텃말로 외치는 놀이예요. 여러 가지 표준 서울말을 놓고 제 고장 말마디를 얼마나 더 살피거나 헤아려서 말할 수 있느냐로 판가름하는 놀이예요.

  텃말잇기를 해 볼 수 있으면 ‘새말잇기’도 해 볼 만합니다. 아직 한국말로 슬기롭게 옮기지 못한 영어나 일본말이나 중국말을 놓고서, 저마다 한 마디씩 새롭게 한국말로 지어 보는 놀이예요. 반드시 국어순화를 해야 한다는 어깨짐이 아닌, 즐거운 놀이로 새말잇기를 해 본다면 뜻밖에도 무척 어울리면서 아름다운 새말을 얻을 만하지 싶어요.

  다시 ‘막말잔치’로 돌아가 볼게요. 한자말로는 ‘폭언·폭설·언어폭력’을 사람들 나름대로 슬기로우면서 알맞고 재미있게 걸러내거나 새로 지은 말씨가 바로 ‘막말잔치’입니다. 막말을 일삼는 사람을 참으로 부드럽게 나무라면서 ‘막말잔치’ 아닌 ‘꽃말잔치’가 되기를 바라는 뜻을 담았다고도 할 만해요. 참말로 ‘잔치’를 즐겁게 펼 수 있는 말을 하라는 뜻으로 ‘막말잔치’를 그만두라고 지청구를 한달 수도 있지요.

  어느새 새말이 하나 또 태어났습니다. 꽃말잔치. 꽃길을 걷듯 꽃말을 나누는 자리라면 이때에는 잔치라는 이름에 걸맞게 즐거운 꽃말잔치입니다. 더 나아가 ‘웃음말잔치·사랑말잔치·꿈말잔치’ 같은 말을 얼마든지 지을 수 있어요. 그리고 꿈말잔치에서 눈을 번쩍 뜬 이웃님이 있다면 ‘버킷리스트’ 같은 영어를 ‘꿈바구니’나 ‘꿈그릇’이나 ‘꿈꽃’처럼 새롭게 써 볼 만하겠구나 하고 느낄 수 있고요.

  말짓기는 참 쉽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살림을 짓고 사랑을 짓듯 부드러이 마음을 열면 언제 어디에서나 참하게 어울리는 새말을 지을 수 있습니다.

밤손님 : ‘밤도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밤손

  온누리 모든 말은 저마다 아기자기하면서 재미있는데, 한국말에서 재미난 대목이 있으니, 바로 ‘밤손님’ 같은 낱말입니다. 훔치는 짓을 일삼는 이를 두고 ‘도둑’이라고만 하지 않고 ‘손·손님’이라고 일컬은 셈인데요, 이 말은 오늘날 삶자리로만 생각해서는 제대로 알 수 없지 싶어요. 왜 그러한가 하면 ‘손’이라는 낱말은 “다른 곳에서 찾아온 사람”을 가리키는 오래된 말이에요.

  밤에 몰래 훔치려고 찾아온 이는, 이곳에 있던 이가 아닌 다른 곳에 있던 사람입니다. 다른 곳에서 이곳에 있는 알뜰한 것을 가로채려는 마음으로 모두 잠든 어두운 때에 찾아오니 ‘밤손’입니다. 게다가 이런 밤손에 ‘-님’을 붙여 ‘밤손님’이라고까지 했으니, 님은 님이로되 반갑지 않은 님이요, 이 반갑지 않은 님이 부디 여기 오지 말거나, 님다운 님이 되기를 바라는 뜻까지 담은 셈이에요.

  밤손님이 밤에만 슬그머니 다녀가는 사람이 되지 말고 떳떳이 얼굴을 드러내어 이웃‘님’이 되기를 바란다고 할까요. 똑같은 사람이지만 밤손님일 적하고 이웃님일 적은 사뭇 달라요.

  우리는 서로 어떤 님이 될 만할까요? 우리는 서로 어떤 님으로 어울릴 적에 즐겁거나 아름다울까요? 어깨동무를 하는 이웃님이 될까요? 목숨앗이 같은 밤손님이 될까요?

  ‘님’은 고이 여기거나 거룩히 삼으려고 할 적에 붙입니다. 상냥하거나 반가운 동무로 삼으려고 하면서도 붙입니다. 귀엽기에 붙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매우 싫거나 얄궂다고 여길 적에 넌지시 붙여요.

  지난날 사람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이를 놓고 ‘임금님’이라 불러야 했습니다. 님을 안 붙이고 ‘임금’이라고만 했다가는 끌려가서 볼기를 흠씬 두들겨맞았겠지요. 그런데 아 다르고 어 달라 재미난 한국말인 터라, ‘님’을 살짝 바꾸면 ‘놈’이 되어요. 나라를 슬기롭고 아름다우며 착하게 다스릴 적에는 ‘임금님’일 테지만, 나라를 엉터리로 휘젓거나 윽박지르거나 억누를 적에는 ‘임금놈’이지요.

  어느 모로 본다면 밤손님을 ‘밤손놈’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웃에 있는 분이 참으로 못마땅하면 ‘이웃놈’이라 할 수 있어요. 말끝을 살짝 바꾸는데 뜻이며 느낌이 사뭇 달라요. 이른바 ‘진상고객’이라는 요즈막에 새로 생긴 한자말이 있는데, 얼토당토않는 짓을 일삼는 손(손님)이 있다면 이이를 두고 ‘손님’ 아닌 ‘손놈’이라 하면 어울리겠구나 싶습니다.

  곰곰이 살피면 ‘선생님’을 놓고 ‘선생놈’이라 하기도 해요.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모자라거나 엉터리일 적에 이런 이름을 씁니다. 님은 어느 날 놈이 될 수 있습니다. 거꾸로 놈이 어느 날 님이 될 수 있어요.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은 아주 작은 한 가지 때문에 스스로 높아지거나 낮아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 아주 작은 곳부터 찬찬히 살피며 아낄 줄 아는 몸짓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주 작은 곳이라고 업신여길 적에는 바로 놈이 됩니다. 아주 작은 곳을 살뜰히 돌볼 줄 알기에 시나브로 님이 되어요.

  말 한 마디를 어떻게 다스리느냐는, 삶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하고 맞닿습니다. 작은 말 하나라고 대수로이 여기지 않으면, 우리 삶도 작은 곳을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 몸짓이에요. 말 한 마디는 생각 한 줌입니다. 말 한 마디를 슬기로이 다스리면서 생각 한 줌을 슬기로이 다스립니다. 말 한 마디를 알뜰히 가꾸면서 생각 한 줌을 알뜰히 가꾸어요.

  멋모르고 튀어나오는 막말잔치라기보다는, 여느 때에 삶을 마구 부렸기에 드러나는 막말잔치일 테니, 막말은 막삶에서 비롯합니다. 꽃말은 꽃삶에서 비롯할 테고, 사랑말은 사랑삶에서 비롯하겠지요. 넋과 말과 삶이 늘 한줄기인 줄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살펴서 스스로 아름다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18.4.18.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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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20. 글을 쉽게 쓰면 멋없을까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뜻을 헤아릴 줄 안다면, 어떤 낱말로 생각을 담아서 이야기를 할 적에 즐거운가를 느낄 만하리라 봅니다. 멋부리고 싶다면 멋있는 말을 찾을 테고, 치레하고 싶다면 치레하는 말을 찾을 테지요. 수수하게 이야기를 하려는 뜻이라면 수수하게 쓸 말을 찾을 테며, 즐겁게 이야기하려는 뜻이라면 즐겁게 쓸 말을 찾을 테지요.

  말에는 두 갈래가 있습니다. 하나는 쉬운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려운 말입니다. 다만, 쉽다고 좋은 말이 아니며, 어렵다고 나쁜 말이 아닙니다. 우리한테 낯익기에 쉬울 수 있고, 우리한테 낯설기에 어려울 수 있습니다.

  ‘쟁기’를 모르면 ‘보습’도 모르고 ‘극젱이’도 모릅니다. 이러한 말을 모르면 ‘골’이라고 할 적에 어떤 골을 가리키는지 모르기 마련입니다. 흙말이나 시골말을 모르는 이한테는 쟁기도 보습도 극젱이도 어려운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일면적·이면적·양면적·다면적’은 어떠할까요? 이 말씨를 쉽다고 여기는 이는 누구이며, 이 말씨를 어렵다고 여기는 이는 누구일까요?

왜 하는가 (글쓴이)
왜 하는 것인가 (엮은이 손질)

  제가 쓴 글을 받아서 싣는 곳에서 이 글월처럼 으레 고칩니다. 저는 ‘것’을 “네가 찾던 것이 여기 있네” 하고 말할 적에만 씁니다. 다른 자리에는 아예 안 씁니다. ‘것’ 쓰임새가 그렇지요. 아무 곳에나 ‘것’을 집어넣으면 말씨나 글씨 모두 거석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하거나 나타내야 하는가를 잘 살피지 않는 바람에 ‘것’ 말씨가 자꾸 퍼져요. 힘주어 말하려는 뜻이라면 “왜 하고야 마는가”나 “왜 굳이 하는가”나 “왜 애써 하는가”처럼 쓰면 돼요.

집에서 가르쳐야 하는 까닭 (글쓴이)
하우스 트레이닝을 해야 하는 이유 (엮은이 손질)

  저는 영어를 싫어하지 않으나 영어로 얘기해야 할 자리가 아니라면 굳이 안 씁니다. 저는 “집에서 가르치다”라고 말을 하고 글을 씁니다. ‘하우스 트레이닝’이라는 말을 처음 듣고 깜짝 놀랐어요. 어버이로서 아이를 집에서 가르치는 분 가운데 이런 말을 쓰는 분이 참말 있는가 보군요. 또는 고양이나 개를 아끼는 분 가운데 집고양이나 집개를 가르치는 일을 놓고 ‘하우스 트레이닝’이라 말하는 분이 있는가 보네요.

오직 석 줄로 (글쓴이)
단 석 줄로 (엮은이 손질)

  다른 분은 ‘단(單)’을 좋아할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저는 ‘오직’이나 ‘오로지’를 씁니다. 때로는 ‘꼭’이나 ‘딱’이나 ‘다만’이나 ‘다문’을 씁니다. ‘그저’를 쓰기도 합니다.

가시내 (글쓴이)
여자 (엮은이 손질)

  시골에서는 으레 ‘가시내’라 합니다. 가시내이니 가시내라 하지만, 서울에서는 ‘가시내’라 하면 낮춤말이나 비아냥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왜 텃말은 낮춤말이나 비아냥으로 여기고 ‘여자·여성·여인’ 같은 한자말은 아무렇지 않게 여길까요? 그렇다면 ‘사내·머스마’도 낮춤말이나 비아냥말인 셈일까요?

새를 지켜보는 화가 (글쓴이)
화가의 새 관찰일지 (엮은이 손질)

  ‘관찰(觀察)’이라는 한자말은 어른한테 쉬울는지 모르나, 아이들은 좀처럼 못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보다·바라보다·살펴보다·지켜보다·들여다보다’를 그때그때 알맞게 골라서 씁니다. 그런데 엮은이는 ‘지켜보다’를 ‘관찰’로 바꿀 뿐 아니라, ‘-의’를 집어넣는 말씨로도 바꿉니다. 왜 이럴까요?

아이한테 이렇게 물어볼까요 (글쓴이)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해 볼까요 (엮은이 손질)

  아이를 낳아 돌보거나 가르치는 어른이라면 아이한테 섣불리 ‘질문(質問)’이라는 한자말을 안 씁니다. ‘묻다·물어보다’를 쓰겠지요. 또 아이들한테 ‘여쭈다·여쭙다’를 함께 들려주면서 어른한테 달리 쓰는 말이 있다고 가르치겠지요. ‘밥’하고 ‘진지’처럼 ‘묻다’하고 ‘여쭈다’를 쓰도록 이끌 줄 알아야 슬기로운 어른이 되리라 봅니다.

얼음에 홀로 선 펭귄 (글쓴이)
얼음 위에 홀로 선 펭귄 (엮은이 손질)

  얼음 ‘위’에는 못 섭니다. 왜 그러할까요? 얼음 위는 하늘이거든요. 서려면 ‘얼음에’ 섭니다. 나비가 머리에 앉습니다. 그리고 나비는 ‘머리 위’에서 날아다닙니다. ‘위’라는 말을 영어 ‘on’처럼 아무 데나 붙이면 틀립니다.

청소년이 흔들리는 까닭은 자라고 싶어서 (글쓴이)
청소년들이 흔들리는 까닭은 자라고 싶어서 (엮은이 손질)

  ‘들’을 붙인다고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 말씨로는 ‘들’을 웬만해서는 안 붙입니다. 저도 말이나 글에서 ‘들’을 거의 안 씁니다. 글쓴이가 틀리게 쓰지 않았다면 엮은이가 섣불리 고치지 않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새는 집을 놀랍게 짓는다 (글쓴이)
새들이 보여주는 놀라운 건축기술 (엮은이 손질)

  집을 짓습니다. 집을 ‘건축(建築)한다’고 말할 분이 있을까 모르지만, 사람도 새도 집을 ‘짓는다’고 하면 됩니다. 그리고 ‘새’라고만 하면 되어요. ‘새들’처럼 ‘들’을 굳이 붙이지 않아도 됩니다.

이 우산가게는 우산이 조금 남다릅니다 (글쓴이)
이 우산가게의 우산은 조금 특별합니다 (엮은이 손질)

  저는 ‘-의’ 없이 말을 하기에 “우산가게의 우산”처럼 제 글을 함부로 고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특별하다(特別-)’는 ‘다르다’를 뜻할 뿐인 한자말입니다. ‘남다르다’를 애써 한자로 바꿀 일이란 없습니다.

  글을 쉽게 써도 얼마든지 멋있습니다. 텃말로 수수하게 쓰는 글도 얼마든지 곱습니다. 한자말이나 영어여야 멋있어 보인다고 여기면 좀 낡은 생각이리라 봅니다. 다 같이 즐거우면서 쉽게 쓰기를 바라요. 2018.3.14.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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