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짓는 글살림

29. 집



  ‘장수’라고만 말하면 전라도에 사는 사람은 ‘전라북도 장수’를 먼저 떠올리지 싶습니다. 이다음으로는 “오랫동안 산다”는 뜻을 가리키는 한자말 ‘장수(長壽)’를 떠올릴 테고요. 그런데 사전을 살피면  “≒ 노수(老壽)·대수(大壽)·대춘지수·만수(曼壽)·만수(萬壽)·수령(壽齡)·영수(永壽)·용수(龍壽)·하년(遐年)·호수(胡壽)”라고 해서 비슷한말이라는 한자말이 잔뜩 뒤따릅니다. 지난날에 한문으로 글살림을 가꾼 분은 이렇게 갖은 한자말을 썼겠지요. 그러나 이 가운데 오늘날 우리가 물려받아서 쓸 만한 낱말은 하나도 없지 싶습니다. ‘장수’란 한자말조차 ‘오래살다’로 고쳐쓰면 그만입니다. ‘길게살다’나 ‘널리살다’나 ‘튼튼살다’처럼 오늘날 우리 살림살이를 헤아려 새롭고 재미난 말을 얼마든지 지어서 쓸 만하지요.


  사투리란, 우리 스스로 마음을 기울여서 삶을 가꾸다가 문득 새로 지은 말입니다. 이러다 보니 사투리는 고장마다 다를 뿐 아니라, 고을마다 다르고, 마을마다 다른데다가, 집집마다 달라요. 사투리가 이토록 다른 까닭은, 고장이며 고을이며 마을이며 집집이며 살림이 다 달라서예요. 다 다른 삶맛을 담아낸 말이니, 어느 곳 사투리를 들어도 맛깔나요. 다 다른 살림멋을 길어올린 말이기에, 어느 곳에서 어느 사투리를 들어도 재미있고 알차며 구성지고 신이 나기 마련입니다.


  ‘마병’이란 오랜 한국말이 있습니다. 한자말로는 ‘고물(古物)’이지요. 우리 스스로 오랜 살림을 가꾸는 길이었으면 ‘마병장수’라 했을 테고, ‘마병집·마병가게’라 했겠지요. ‘고물장수·고물상’이 아니고 말이지요.


  영어 ‘홈페이지’를 그냥 쓰는 분이 많지만, ‘누리집’이란 이름이 어엿이 있습니다. 누리그물로 들어가서 찾아가는 데가 누리집이에요. 누리판에도 집이 있다는 생각이 참 대단해요. 다시 말해서 ‘집’이라고 하는 오래된 낱말 하나를 오늘날에 새롭게 살려서 쓰니까, 이 쓰임새는 사전에 고스란히 담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 더 살피면 ‘어린이집’이 있어요. 어린이가 다니는 배움자리인데, 이곳이 ‘집’처럼 포근한 터전이 되기를 바라는 뜻을 담기도 합니다. 잘 생각해 봐요. ‘어린이집’이라 할 적하고 ‘보육원·보육시설’이라 할 적에 느낌이 얼마나 다른가요? 어른들은 어린이한테 어떤 이름을 붙인 터전을 물려주고 싶습니까?


  이렇게 이어가 보면 집을 놓고서 ‘학교’라 하겠는지 ‘배움집’이라 하겠는지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학교’ 같은 이름을 그대로 써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대로 쓰는 일이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나쁘지는 않아요.


  그대로 써도 나쁘지는 않으니 학교를 그냥 학교라고들 할 텐데, 오늘날 어린이하고 푸름이가 삶을 즐겁게 배우면서 살림을 사랑스레 배우기를 바란다면, 어떤 이름을 붙인 터전을 어린이하고 푸름이한테 물려주시겠습니까? 마치 집처럼 포근하면서 아늑한 배움자리라는 뜻으로 ‘배움집’ 같은 이름을 붙일 만해요. 한자말을 한국말로 고쳐쓰자는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혀에 얹어서 소리를 내거나 손에 연필을 쥐어 종이에 글씨를 그릴 적에, 느낌이 환하게 살아나면서 즐겁게 노래처럼 또르르 구르는 이슬같은 이름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할 노릇입니다.


  새말을 지을 적에는 ‘국어순화’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노래가 되는 이름’을 헤아려서 이렇게도 붙이고 저렇게도 지으면 되어요. 노래로 부르듯이 짓는 이름이니 억지로 꿰맞출 일이 없어요. 나긋나긋 상냥하게 부르듯이 짓습니다. 시원시원 씩씩하게 외치듯이 지어요.


  우리가 사는 곳은 어디일까요? ‘가정’일까요, 아니면 ‘살림집’일까요? 우리는 ‘주택’에 살까요, 아니면 ‘집’에 살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 ‘가정’이라면 ‘가장’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 ‘살림집’이라면 ‘살림꾼’이나 ‘살림지기’나 ‘살림님’이나 ‘살림벗’이 있어요. 우리가 살림집에서 산다면, 우리 집 어린이나 푸름이는 ‘살림순이·살림돌이’랍니다. 가시내한테 집일을 도맡기는 얼거리가 아닌, 가시내랑 사내가 어깨동무를 하면서 같이 살림을 가꾸는 ‘살림벗’으로서 살림길을 열 수 있습니다. 자, 어떤 집에서 살고 싶습니까.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아직 해남이란 고장을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해남에서 알뜰히 이야기꽃 한마당을 펼 수 있다면 그곳을 찾아가려고 생각합니다. 해남이라는 곳에는 여러 시인을 둘러싸고서 ‘생가’나 ‘기념관’이나 ‘전시관’이나 ‘문학관’이 있습니다.


  어른들은 이런 이름, 이른바 ‘생가·기념관·전시관·문학관’을 그냥 씁니다. 이런 이름이어야 어울린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는 어른들 생각입니다. 어른들 가운데에서도 한자말로 된 지식이나 학문을 익힌 사람들 생각이지요. 다섯 살이나 열 살 어린이한테 이런 이름이 마음에 와닿을까요? 열다섯 살 푸름이한테도 그리 안 쉽거나 마음에 안 와닿을 만한 이름이 아닌가요?


  이름이란 어떤 지식이 있는 어른한테만 쉽거나 와닿는 결로 붙이기보다는, 어떤 지식이 없어도 누구나 쉽게 받아들이거나 가슴으로 맞아들일 만한 결을 헤아려서 붙일 적에 서로 즐거우며 아름답지 싶습니다.


  생각해 봐요. 고정희 시인이나 김남주 시인이 살던 집에는 어떤 이름을 붙이면 어울릴까요? “고정희 살던 집”이나 “김남주 살던 집”이라 하면 되어요. 문학관이라면 “고정희 글숲집”이나 “김남주 글숲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정희 님이 쓴 글을 숲처럼 그러모은 집이란 뜻입니다. 이밖에 “김남주 살림숲집”이라 하면, 김남주 님하고 얽힌 살림길을 찬찬히 밝히면서 보여주는 집이란 뜻입니다. 이런 이름이 아니어도 “고정희 집”이나 “김남주 집”처럼 수수하게 이름을 붙일 만해요.


  집이에요. 오붓하게 오순도순 도란도란 즐거이 이야기꽃이 피어나는 집입니다. 집이지요. 누구나 기꺼이 맞아들여서 밥 한 그릇 나눌 수 있는 너른마당이 정갈하면서 고운 집입니다.


  집을 집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어느 집이든 집답게 가꾸는 손길로 나아간다고 느껴요. 집을 집 그대로 바라보기에, 집살림이며 옷살림이며 밥살림을 스스로 정갈하면서 알뜰히 여미거나 맺으리라 느낍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결을 이어서 말살림하고 글살림도 북돋우겠지요.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살림에서 피어난 꽃입니다. 살림꽃이 바로 말이에요. 기쁘게 주고받은 살림꽃이라는 말을 종이에 살포시 얹으니, 살림열매로 흐드러집니다. 글이나 책이란 살림열매라 할 만합니다. 살림을 고이 지어서 얻었기에 널리 나누는 열매가 바로 글이나 책이거든요.


  아침에 어느 책을 읽는데 ‘아수라장’이란 불교 한자말이 나옵니다. 사전을 뒤적였어요. 딱히 대단한 뜻이 없더군요. ‘싸움판’이라 하면 될 텐데, 불교라는 자리에서는 굳이 이런 이름을 쓸 뿐이네요.


  여기에서도 더 헤아려 보면 좋겠어요. 첫걸음은 ‘싸움판’입니다. 다음으로 ‘싸움마당’이나 ‘싸움터’예요. ‘싸움투성이’가 되기도 할 테지요. 마구 싸우면서 어지럽다면 ‘북새통·북새판’입니다. ‘북새마당’도 어울려요. 마구 싸워 어지러우니 ‘어지럼판’이자, 시끌시끌할 테니 ‘시끌판·시끌마당’입니다.


  밀이란, 말이 나오는 결을 살려서 술술 펴고 나누면 되어요. 꼭 어느 한 가지 말만 쓸 일이 없습니다. 삶을 이루는 터전을 바라보면서, 살림을 짓는 손길을 아끼는 마음이라면, 말길이 저절로 트여요. 사랑을 하려는 눈빛으로 슬기롭게 마음을 밝히면 갖은 글길이 환히 열립니다.


  책을 사고파는 곳이기에 ‘책집’이 됩니다. 또는 책을 짓는 곳이기에 ‘책집’이에요. 책을 다루는 길을 가니 두 곳이 모두 책집입니다. 갈래를 더 나눈다면, 책을 사고파는 일이란, 책을 나누는 길이니, ‘책나눔집’이라 할 만하고, 책을 짓는 일이란, 책으로 생각을 짓는 길이라서, ‘책짓는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을 거쳐서 들어온 한자말이든, 미국에서 들어온 영어이든, 그냥그냥 써도 나쁘지 않아요. 아직 모르겠으면 그대로 쓸 노릇일 터입니다만, 살짝 짬을 내어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스스로 생각해야 스스로 말을 지어요. 스스로 사랑하면서 생각해야 스스로 살림을 지으니, 우리를 둘러싼 모든 말, 예부터 사투리란, 바로 사랑어린 살림을 짓는 손길에서 스스로 기쁘게 지은 자취로구나 하고 함께 배우면 좋겠습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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