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짓는 글살림
25. 님놈
고흥에서 순천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탑니다. 저는 짐을 도맡아 꾸리고 움직이느라 미처 깨닫지 못했으나 이 시외버스에 텔레비전이 있습니다. 텔레비전에 운동경기가 흐르고 광고가 섞입니다. 곁님은 저더러 버스 일꾼한테 텔레비전을 꺼 달라는 말을 여쭈라 합니다. 그렇지만 버스에 타서도 이것저것 챙기느라 바쁘니 곁님이 바로 버스 일꾼한테 텔레비전을 꺼 달라 말합니다. 버스 일꾼은 고맙게 꺼 줍니다.
우리는 집안에 텔레비전을 안 들이고 살기에, 어디에 갈 적마다 쉽게 마주쳐야 하는 텔레비전이 꽤 성가십니다. 시외버스에서는 텔레비전을 꺼 주십사 여쭐 수 있으나 손님이 많을 적에는 이런 말을 여쭈기 어렵습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시외버스나 고속버스는 손님을 헤아려 텔레비전을 켠다지만, 텔레비전을 안 보는 손님을 헤아린다면 어떡해야 할까요? 여기에 어린이를 헤아린다면?
서로 가시버시 사이로 지내는 두 사람은 사랑을 짓는 님이라고 여깁니다. 보금자리라는 곳에 사랑이 흐르도록 살림을 짓는 두 사람은 곁에서 지켜보고 돌보고 헤아리는 길을 걸으니 둘은 서로 ‘곁님’이 되어요. 때로는 벗님이 되고, 삶이라는 길을 함께 걸어가니 ‘길벗님’이나 ‘삶벗님’이 될 테지요.
보금자리에서 서로 지켜보고 돌보고 헤아리는 두 사람이 서로 곁님이라면, 두 곁님이 낳은 아이나 두 곁님을 낳은 어버이는 어떤 사이로 지낼까요? 한집에서 지내는 이들은 가시버시 못지않게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돌보고 헤아릴 텐데, 함께 삶을 바라보고 가꾸고 짓기를 바라는 마음이 흐르기에 ‘한집님’이나 ‘삶님’으로 어우러지지 싶습니다. 함께 살림을 지어 ‘살림님’이 되기도 할 테고요.
힘센 우두머리가 나라를 다스리던 무렵에는 임금 한 사람만 ‘님(임금님)’이었습니다. 그무렵에는 벼슬아치를 지내는 이들이 벼슬님 구실을 하며 사람들을 억누르기 마련이었고, 여느 자리 사람들은 ‘평민·백성’ 같은 이름이었지만, 때로는 ‘종(노예)’이나 ‘천한 것(백정)’이라는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윗자리하고 아랫자리로 갈린 곳에 ‘윗님’은 있되 ‘아랫님’은 없었달 수 있어요. 그때에는 ‘윗님·아랫놈’이나 ‘윗분·아랫녀석’으로 갈렸다 할 텐데요, 밑에서 내리눌리다가 크게 성을 내며 들고일어나면 윗님이나 윗분을 어느새 ‘윗놈·윗녀석’으로 여겨 끌어내렸어요.
생김새는 비슷한 외마디 말인데, ‘님’이 하루아침에 ‘놈’이 됩니다. 때로는 ‘남’이 되어요. 아끼고 싶은 사람이라면 님입니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기에 님이에요. 이와 달리 놈이라면 아끼고 싶을까요? 놈을 사랑할 마음이 생길 만할까요? 남도 비슷해요. ‘남’이 될 적에는 등을 돌리는 사이입니다. 모른 척하기도 하지만 굳이 가까이할 까닭이 없어요.
이 땅에서 삶을 짓고 사랑을 가꾸던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님’이라는 낱말을 지어서 썼을까요? ‘놈·남’처럼 생김새가 비슷한, 또는 소리가 비슷할 수 있던 낱말은 어떤 마음으로 지어서 썼을까요?
임금님이 서슬퍼렇던 지난날을 돌아보면, 그무렵에 사람들이 ‘님’이란 말을 아예 못 쓰지 않았습니다. 들을 가꾸면서 들님을 말했고, 비를 반기며 비님이라 했습니다. 바닷가에 살면서 바다님을 섬겼고, 멧골에서는 멧님을 모셨어요. 해를 보며 해님인 줄 알았고, 온누리를 헤아리며 별님을 살폈습니다.
집집마다 나물하고 밥하면서 꽃님이며 풀님이며 나무님을 가까이했습니다. 집에는 집님이라고 하는 집지기를 아꼈어요. 철 따라 찾아오는 꾀꼬리나 제비를 보면서 이들 새는 그냥 철새가 아닌 ‘철님’으로 여겼을 수 있습니다. 이들 새(새님)가 찾아오거나 떠나는 철을 살펴서 해마다 봄가을을 어떻게 건사하고 여름겨울은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를 알았겠지요.
우리 숨이 되는 바람을 마시니 바람님입니다. 한여름에 시원스레 그늘이 되니 구름님이요, 겨우내 내린 눈으로 들이 새봄에 한결 푸른 줄 알기에 눈님이라 했으리라 느낍니다.
아이들이 사귀는 놀이동무는 그냥 동무가 아닌 동무님이에요. 아이랑 어른이 마을을 이루어 살아가는 이웃은 언제나 이웃님입니다. 나그네나 떠돌이 같은 길손도 그냥 지나치기보다는 나그네님이나 떠돌이님이나 길손님, 또는 ‘길님’이라 할 만해요.
하늘에 계신, 또는 하늘 그대로 바라보면서 하느님(하늘님·한울님)이 됩니다. 땅에 계신, 또는 땅 그대로 마주하면서 땅님(따님)이 되어요. 마음으로 만나는 사이라 마음님이고, 사랑으로 사귀는 사이라 사랑님입니다. 노래를 좋아하거나 즐기거나 잘 불러서 노래님이고, 춤을 좋아하거나 즐기거나 잘 추어서 춤님입니다. 요즈음에는 글을 좋아하거나 즐기거나 잘 쓰는 글님이 있고, 사진을 놓고서 사진님, 책을 놓고서 책님, 만화를 놓고서 만화님, 연극을 놓고서 연극님도 있어요.
먼길을 함께 나서는 벗이라면 마실벗처럼 수수하게 이를 수 있고, ‘마실님’처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거나 듣는 ‘이야기님’이 있어요. 시골에 사는 이웃이라면 시골님이고, 서울에 사는 이웃이라면 서울님이에요. 우리는 한때 ‘시골뜨기’처럼 시골사람을 깎아내렸지만, 이와 맞서 ‘서울뜨기’라고도 하는데, ‘뜨기’보다는 ‘님’으로 서로 만난다면 즐거우리라 생각해요.
너른 숲을 놓고 한자말로 ‘대자연’이라 하는데, 저는 ‘숲님’이라는 이름을 곧잘 씁니다. 숲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숲님’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우리가 숲을 살뜰히 사랑한다면 사람으로서 ‘사람님’이 되리라 느껴요. 사람답지 못한 짓을 일삼으면 ‘사람놈’으로 굴러떨어질 테고요.
문득 생각합니다. 굴러떨어지지 말라고, 즐겁게 어깨동무를 하는 길을 가라는 뜻에서 ‘님·놈’ 두 마디에 ‘남’까지 늘 맞물리지 싶습니다. “고마운 님”이 될 수 있고, “고맙잖은 놈”이나 “고맙잖은 남”이 될 수 있습니다. “좋은 님”하고 “나쁜 놈”은 고작 한 마디에서 갈립니다.
늘 쓰는 말에서 새롭게 길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요리사나 셰프라고 하는 분을 보면서 ‘밥님’이나 ‘밥살림님’처럼 님이라는 이름을 붙여 보고 싶습니다. 옷을 곱게 지을 줄 아는 분을 보면 ‘옷님’이나 ‘옷살림님’처럼 이름을 붙이고 싶어요. 신나게 놀 줄 아는 아이나 어른한테는 ‘놀이님’이라고, 기쁘게 일할 줄 아는 모든 사람한테는 ‘일님’이라 하고 싶고요.
마을에 마을님이 있습니다. 나라에 나라님이 있어요. 고을에는 고을님이고, 누리(온누리)에는 누리님이 있습니다. 아, ‘누리님’은 누리그물(인터넷)에서도 쓸 만해요. ‘누리꾼’처럼 ‘-꾼’을 붙이는 이름도 나쁘지 않습니다만, 누리그물에서 서로 아끼며 돌볼 줄 아는 따사롭거나 살가운 이웃이라면 ‘누리님’이 걸맞아요.
〈전라도닷컴〉처럼 다달이 나오는 잡지를 사랑하는 이웃님한테는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요? 수수하게 잡지님이나 책님이 있을 테고, 다달이 나오는 책을 ‘달책’이라 한다면 ‘달책님’이라 할 만한데, 이보다는 다달이 벗으로 만난다는 뜻을 살려 ‘달벗님’이라 해도 어울리지 싶습니다.
어릴 적에는 님이라는 말은 함부로 못 쓰도록 둘레 어른한테 눌려 지냈습니다. 지난날 어른들은 님은 높은 어른한테만 붙인다고, 아이들이 멋모르고 써서는 안 된다고 여겼어요. 이제는 옛날이 아니요, 열린 누리에, 트인 터전이라면, 님을 홀가분하게 풀어놓아야지 싶습니다. 서로 ‘열린님’이 되면 좋겠어요. ‘맑은님’이나 ‘고운님’이나 ‘참한님·참님’이나 ‘밝은님’이나 ‘착한님’이 되어도 좋아요. ‘좋은님’도 될 테고, ‘기쁜님’이나 ‘웃음님’도 될 테고요.
아이들은 ‘어린님’입니다. 푸름이(청소년)는 ‘푸른님’입니다. 그리고 어른이 어른답게 ‘어른님’이 될 수 있기를 빌어요. 비는 마음으로 ‘비손님’이라는 꿈을 꿉니다. 함께 꿈을 짓는 ‘꿈님’이 되고, 같이 슬기로운 넋을 나누는 ‘슬기님’이나 ‘넋님’이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어떤 님이 될 만할까요? 우리는 서로 어떤 님으로 부르면서 이웃이나 동무가 될까요? 바보놈이나 멍청놈이 아닌, 걱정놈이나 근심놈이 아닌, 똑똑님·똑님이나 바른님으로, 산들님(산들바람님)·한들님(한들바람님)으로, 상냥님·넉넉님으로 하루를 지어 봅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