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기 2018.4.25.


《회사를 해고하다》

명인 글, 삼인, 2018.4.1.



서울에서 고흥으로 ‘튄’ 이야기를 들려주는 《회사를 해고하다》를 읽는다. ‘말과 활’이라는 잡지에 “남쪽으로 튀어”란 이름으로 꾸준히 실은 글을 새롭게 묶었다고 한다. 고흥에서 살며 늘 잊는데 고흥은 한국에서 남녘 끝자락에 있다. 이곳에서 곁님·아이들하고 살림을 짓는 동안에는 ‘고흥’이나 ‘남녘’에 있는 줄 못 느끼고 생각조차 않는다. 우리 보금자리를 짓는 길만 바라본다. 다른 고장으로 마실을 다녀올 적에 비로소 ‘우리가 참 두멧시골에 사네. 우리 두멧시골이 참 아늑하네’ 하고 여긴다. 《회사를 해고하다》는 서울에서 몸이며 마음이 지친 두 어버이가 어떻게 서울살이를 확 접어치워서 새로운 길로 나아갈까 하면서 헤매고 다투고 부딪히고 넘어지다가 시나브로 일어서는가를 하나하나 그린다. 꼭지마다 글이 꽤 길기에 책을 읽기 살짝 벅차지만, 꼭지가 긴 만큼 글쓴이는 속내를 실컷 펼칠 수 있구나 싶다. 이 책에는 고흥살이 2013∼2015년 이야기만 다루고, 2016∼2018년 이야기는 끝말로 가볍게 다룬다. 어쩌면 처음 맞닥뜨린 크나큰 바윗돌 이야기가 도드라질 만할 테지만, 어느덧 자리를 잡는 요즈막 이야기를 새로 써서 붙이면 더 나았으리라 본다. 톱니바퀴를 즐겁게 내려놓는 이웃님이 늘어나기를 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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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2018.4.24.


《황색예수》

김정환 글, 문학과지성사, 2018.3.5.



1980년대를 가로지르면서 ‘황색예수’를 읊은 말마디는 그무렵 무척 새로웠으리라 느낀다. 그런데 그때에나 그 뒤 1990년대나 2020년대를 바라보는 요즈음에나 《황색예수》는 어쩐지 딱딱하다. 김정환 님 시를 읽을 때면 으레 문익환 님 시가 떠오른다. 김정환 님은 ‘봐줄 마음이 없이 딱딱하게’ 글을 여민다면, 문익환 님은 ‘너그러이 봐주고 싶은 마음으로 여리게’ 글을 여미지 싶다. 그렇다고 《황색예수》가 내내 딱딱하지만은 않다. “품에 안은 네 여자의 자궁처럼 진실이 추해 보이더라도(188쪽)”처럼 ‘여성 몸을 담아내는 글발’에서는 딱딱하지 않으려 하지 싶다. 다만 왜 남성 시인은 여성 몸을 이렇게 보고 재면서 빗댐말을 써야 하는지 아리송하다. 2018년 3월에 새옷을 입은 《황색예수》 첫머리를 보면 “이 책을 있게 한 모든 ‘분들과 것들’에 감사”라고 짤막히 말하는데, 새날을 앞두고도 김정환 님은 이렇게 딱딱하며 봐줄 마음이 없이 스스로 갇힌다. 이러다 보니 자꾸 어려운 낱말이나 말씨를 끌어들이면서 더 우물에 고이지 싶다. 문익환 님은 늘그막에 감옥에 갇혀 죽을 고비를 맞이했어도 외려 더 너른 품으로 따스하게 바라보았다는 대목이 새삼스럽다. 억지로 센 척하지 않아도 된다. 힘을 빼는 사람이 더 힘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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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2018.4.23.


《이임하의 여성사 특강》

이임하 글, 철수와영희, 2018.4.25.



아침에 미역국이나 무국을 끓일까 싶기도 하지만, 국물고기가 없으니 읍내에서 고기를 장만해 오면 하자고 생각한다. 얼음칸에 양송이스프 가루가 있기에 두 아이를 불러서 한 아이는 감자하고 당근을 다듬도록 심부름을 맡기고, 한 아이는 파란 물병을 채워서 햇빛이 드는 평상에 놓으라고 말한다. 심부름을 마친 두 아이는 방으로 쪼르르 들어가 저희 놀이를 한다. 오늘은 따로 밑밥을 마련하지 않으니 느긋하네. 빗소리를 들으며 가지를 어디에 옮겨심을까 헤아린다. 홀로 부엌에서 《이임하의 여성사 특강》을 읽으며 국이 눋지 않도록 숟가락으로 젓는다. 이임하 님은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옛날부터 이 땅에서 여성이 어느 자리에 있었는가를 짚는다. 때로는 남녀가 고른 자리에 있기도 했다지만, 고려를 지나면서 여성을 짓누르는 틀이 부쩍 높아졌단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틀이 더 단단해졌다는데, 전쟁 소용돌이를 지나면서 집안 기둥을 하는 여성이 늘며 조금씩 이 틀을 흔들었단다. 요즈음은 어떠할까? 이제 우리는 서로 고른 자리에서 어깨동무를 할까? 아직도 제국주의·봉건주의 가부장 틀로 윽박지르는 얼거리일까? 앞으로 역사는 ‘전쟁·궁중 남성사’가 아닌 ‘삶을 짓는 착한 사람 이야기’로 거듭나고, 삶터도 거듭날 노릇이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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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2018.4.22.


《조선견문기》

H.N.알렌 글/신복룡 옮김, 박영사, 1979.5.20.



1999년에 새로 나온 《조선견문기》는 1979년에 한국말로 나온 적 있는데, 이에 앞서 한국말로 더 나온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1900년대 첫무렵 이야기를 해묵은 글로 읽는다고 할 테지만, 1979년 박영사 손바닥책이 이쁘장하면서 반가워 고맙다. 자전거를 처음 본 사람들 모습, 다듬이질을 하다가 쉬는 모습, 구렁이가 몸을 사리든 말든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 모습, 가래를 써서 논일을 하는 모습 들을 참 단출하면서 정갈히 잘 담았지 싶다. 그리고 꽤 많은 이들이 고양이를 안 좋아했다는 대목을 새삼스레 읽는다. ‘도둑고양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까닭이 있네. 옛집에는 으레 구렁이가 함께 살았으니 딱히 ‘쥐잡이 고양이’를 둘 일이 없었구나 싶다. 더구나 온갖 새가 사람 곁에 잔뜩 살았으니, 구렁이에 새가 쥐를 냉큼 잡아서 치워 주었겠지. 그러나 《조선견문기》를 오늘날 젊은이가 읽기는 매우 어려우리라 본다. 우리 삶이나 살림이 대단히 바뀌었으니까. 한글로 적힌 책이라 해서 한국사람이 누구나 잘 읽을 만하지 않다. 이 책 하나를 읽으려면 적어도 몇 만에 이르는 책을 먼저 읽거나 우리 오랜 삶자국을 미리 살필 수 있어야지 싶다. 그러지 않는다면 거의 겉훑기로 그치거나 너무 어렵다고 여기거나 때로는 엉뚱히 읽을 만하리라.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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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2018.4.21.


《ぼおるぺん 古事記 1 天の卷》

 こうの史代(코노 후미요) 글·그림, 平凡社, 2011.5.25.



말을 알 수 있으면 더 많이 보고 배운다. 말을 알 수 없으면 코앞에서 보더라도 못 느끼거나 못 배우기 일쑤이다. 삶이나 살림은 말이랑 함께 보고 들으면서 배운다. 말이 없이는 삶하고 살림을 못 보거나 못 들으면서 못 배우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어떤 말을 익혀서 어떤 삶하고 살림을 찬찬히 익힐 적에 즐거울까? 《ぼおるぺん 古事記 1 天の卷》을 읽는다. 아니, 한자하고 히라가나를 살피고, 그림을 훑으며, 둘째 권하고 셋째 권도 이렇게 돌아본다. 이 책이 그림 아닌 글만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지 거의 모를 텐데, 그림이 있기에 어렴풋이 어림한다. 그러나 글을 낱낱이 짚지 않으면 그림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한결 깊거나 넓게 받아먹을 수 없다. 일본 학자 倉石武四郞(구라이시 다케시로) 님이 쓴 《한자의 운명》이 1974년에 한국말로 나온 적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권력자가 일부러 어려운 글을 내세워 사람들을 억누르고, 이 글힘으로 새로운 생각을 가로막았구나 하고 느꼈다. 하늘이란 뭘까? 하늘을 읽는 책이란 뭘까? 하늘을 누가 어떻게 읽어 말이나 글로 어떻게 아로새길 만할까? 하늘을 ‘하늘’이라 하지 않고 온갖 한자를 끌어들일 적에 우리 생각은 얼마나 하늘로 뻗을 만할까?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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