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기 2018.10.10.


《타자기를 치켜세움》

 폴 오스터 글·샘 메서 그림/황보석 옮김, 열린책들, 2003.12.30.



서울마실을 다녀오면서 작고 도톰한 책을 하나 장만한다. 책은 작고 도톰한데 글밥이 몇 줄 없다. 글쓴이는 처음부터 이 책을 쓸 생각이 없었지 싶은데, 셈틀이 아닌 타자기로 글을 쓰면서 늘 곁에서 글벗이 되어 준 타자기를 보고 깜짝 놀란 어느 그림지기가 타자기를 그림으로 그려내면서 타자기하고 얽힌 발자국을 한 올 두 올 엮었지 싶다. 《타자기를 치켜세움》은 책이름 그대로 타자기를 치켜세우고 싶은 마음을 글하고 그림으로 담아낸다. 글을 짓는 사람 곁에서 기운을 북돋아 준, 글을 쓰는 사람 옆에서 상냥하게 일벗이 되어 준, 글로 살림을 지피는 사람한테 늘 새마음이 되도록 이끌어 준 타자기를 치켜세운다. 우리는 셈틀을 두고도 이런 글이랑 그림을 엮을 수 있을까? 연필 한 자루하고 종이 한 쪽을 놓고도 이렇게 연필하고 종이를 기리는 글이나 그림을 빚을 수 있을까?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한테도, 늘 마시는 바람한테도, 아침저녁으로 맞이하는 밥그릇도, 밤에는 지고 새벽에는 뜨는 해님한테도, 고마우면서 기쁜 웃음을 담아서 글 한 줄을 적어서 띄워 보면 뜻있으리라. “지우개를 치켜세움”도 “자전거를 치켜세움”도 “버선을 치켜세움”도 “도마를 치켜세움”도 “신을 치켜세움”도 모두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리라.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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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2018.10.9.


《최후의 사전 편찬자들》

 정철 엮음, 사계절, 2017.7.7.



오늘 한글날, 전남CBS하고 교육방송 두 군데 라디오에서 내 목소리가 흐른다. 전남CBS는 방송일꾼이 몇 시에 방송이 흐르는지 알려주지 않아 모르겠고, 교육방송은 저녁 여덟 시가 지나서 나온다고 한다. 내가 하는 일은 한국에 몇 사람 없는 ‘사전편찬자’란 이름인데, ‘편찬’이란 이름을 버거워하는 이웃이 많아 여러 해 앞서부터 ‘사전지음이’란 이름으로 고쳐서 쓴다. 지음이란 말을 쓰니 퍽 홀가분하다며 반겨 주니 나도 좋다. 지난해에 나온 줄 알았으나 깜빡 잊고 지나쳤던 《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을 어제 서울로 마실하는 길에 장만해서 오늘 아침부터 읽는다. 엮은이는 여러 어른을 만나서 사전 짓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 책에 흐르는 목소리를 읽으며 모처럼 ‘나랑 같은 일을 하는, 그러나 좀처럼 얼굴 보기도 어려운’ 분들 숨결을 헤아린다. 엮은이는 사전지음이를 사람문화재로 삼아서 나라나 지자체에서 도와야 한다고 외치는데, 어쩐지 찡하다. 그런가? 그렇기도 하겠네. 사전짓기란 온삶을 들여서 하는 일인 터라 참말로 사전지음이를 사람문화재로 바라보면서 아끼는 손길이 있으면 멋지겠지. 이런 손길을 타고 온갖 알차고 아름다운 사전이 태어날 수 있기를 빈다. 말꽃이 피는 사전을, 말꽃으로 말사랑을 지피는 사전을.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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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2018.10.7.


《리틀 포레스트 1》

 이가라시 다이스케 글·그림/김희정 옮김, 세미콜론, 2008.10.8.



큰아이가 ‘작은 숲’ 이야기를 반긴다. 곁님도 열 해 만에 ‘작은 숲’ 이야기를 만화로 다시 보더니 영화도 보려 한다. 문득 돌아보니 《리틀 포레스트》라는 만화책이 한국말로 나온 지 참말로 열 해가 되었다. 나는 이 만화가 갓 나왔을 적에 바로 장만해서 곁님하고 함께 읽었는데, 그무렵 2008년 언저리에는 이 만화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때 나나 곁님이나 둘레에 이 만화책을 보시라고 숱하게 여쭈었는데 그무렵에는 다들 시큰둥해 했다. 가만히 보면 2008년 언저리는 아직 한국에서 이러한 만화를 읽고 삭이고 생각하고 나누기에는 일렀지 싶다. 요즈막은 드디어 무르익은 때라고 본다. 어찌 모든 책이 갓 태어난 날부터 널리 사랑받을 수 있으랴. 뒤늦게 사랑받아서 읽히고 이야기꽃이 핀다면 이 또한 책 하나로서는 몹시 기쁜 일이 될 테지. 진작에 장만했던 《해수의 아이》도 다시 들춘다. 찬찬히 빚은 이야기 하나는 두고두고 꽃이 되어 빛난다. 즐겁게 엮은 이야기 둘은 오래오래 뿌리를 내려 나무가 된다. 꽃이 되는 삶이요, 나무가 되는 살림이다. 기쁨이 되는 하루요, 노래가 되는 나날이다. 곁에 무엇을 둘 적에 웃음이 피어날까? 웃음이 피어나는 곁에는 누가 있어 함께 손을 잡고 춤을 출까?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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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2018.10.6.


《히틀러의 딸》

 재키 프렌치 글/공경희 옮김, 북뱅크, 2008.12.5.



남녘이라는 나라에 박정희라는 독재자가 있었고, 이녁 딸이 있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이녁 딸은 감옥에 들어갔으면서도 스스로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아직 모르는구나 싶고, 이녁 아버지가 독재자인 줄 모르지 싶다. 사람들 사이에서 자라지 못했고, 사람들 곁에서 배우지 못한 탓일까. 참을 말하는 책이나 글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을까. 참을 말하는 책이나 글을 언뜻 마주했어도 이를 고스란히 받아들이거나 헤아리는 마음이 없었을는지 모른다. 《히틀러의 딸》은 어린이문학이다. 히틀러라는 끔찍한 독재자한테 딸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고 하나, 이 어린이문학은 ‘히틀러한테 딸이 있었다’는 한 줄을 실마리로 삼아서 아이들이 찬찬히 이야기를 엮어 나간다. 이러는 동안 아이들은 ‘어버이하고 아이’는 어떤 사이여야 하는가를 새롭게 느끼며 생각한다. 아이들은 저희 어버이가 히틀러라면 어떻게 해야 할는지, 오늘 저희 어버이가 어떤 생각이나 삶인가를 얼마나 제대로 알아야 하는가를 스스로 묻고 아파하면서 자라려 한다. 히틀러가 아버지라 하더라도 딸아이는 딸아이일 뿐인데, 누구보다 ‘히틀러 딸 아무개’가 아닌 ‘나는 나로서 나’라는 이름으로 씩씩하게 설 줄 알아야겠지. 삶을 읽는 눈이 아름답게 흐르는 멋진 책이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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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2018.10.5.

《유물론》
 테리 이글턴 글/전대호 옮김, 갈마바람, 2018.9.15.


아이들이 나날이 자란다. 눈에 확 보인다. 이 아이들을 졸업장 주는 학교에 보냈다면 나날이 새롭게 자라는 모습을 느꼈을까. 이 아이들이 졸업장 주는 학교에 다니는 몸이라면 참말로 나날이 눈부시게 자랄까.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늘고, 스스로 볼 수 있는 눈이 는다. 스스로 배우는 살림이 늘고, 스스로 짓는 이야기가 는다. 나도 이 아이들처럼 나날이 자라는 하루를 살아왔겠지. 어른이란 몸을 입고 살아도 늘 새삼스럽게 자라는 하루일 테고. 《유물론》은 글쓴이가 ‘유물론’이라는 철학을 ‘몸이란 무엇일까’ 하고 물으면서 새롭게 읽고 바라보려는 마음을 들려준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누구나 몸이 있다. 몸이 없으면 산 목숨이라 하지 않는다. 아파도 몸이 있기에 살아간다. 아프기에 몸을 더 낱낱이 느끼면서 산다. 손을 뻗어 손길을 느끼고, 발을 뻗어 발걸음을 헤아린다. 먹고 입고 자는 모든 살림을 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인다. 어쩌면 몸이란 배움덩이인 셈일까? 몸으로 이것저것 해보니까 더 깊거나 크게 느껴서 배우지 않을까? 뼈저리게 느끼거나 뼛속 깊이 깨닫는 하루가 된다. 몸으로 읽는 유물론이란, 몸이 있기에 서로 이웃으로 여기는 길일 수 있다. 몸으로 배우는 유물론이란, 몸소 겪으면서 단단히 거듭나는 노래일 수 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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