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 슬프고 안타깝도다. 구국의 영웅 이순신. 그의 삶이 참으로 애처롭구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안봤다. 그 때는 이순신에 대해 잘 몰랐다. 그저 임진왜란의 장수. 한산도대첩, 거북선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정도만. 아마 대한민국 국민이라도 이순신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그의 삶과 업적을 자세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순신에 대해 자세히 알았으면 좋겠다. 정말로.


 이순신은 전쟁을 준비하고 용감히 맞서 싸우고 승리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파직과 옥살이, 모진 형벌이었다. 선조의 질투, 의심, 불안과 원균의 합작품이었다. 다행히 우의정 정탁의 명문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아직 전시 상황이라 함부로 그를 죽이기 부담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이순신은 백의종군을 명받는다. 


 이순신은 효심이 대단했다. 백의종군길 도중에 어머님의 부음을 듣는다. 이순신은 마당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했다. 


 4월13일. 배에서 달려온 종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다. <난중일기>


 더욱 안타까운 일은 어머니 변씨가 의금부에 하옥된 아들을 보러 여수에서 나룻배를 타고 올라오다가 기력이 쇠약해져 배 위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자식 입장에서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도 슬프고 안타까운 일인데, 못난 자식 얼굴 한번 보겠다고 80대 늙은 노모가 무리한 길을 나서다 그만 돌아가신 것이다. 이순신의 어머니는 아마도 이순신이 죽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해서 죽기 전에 아들 얼굴을 보기 위해 나선 것이리라. 이순신의 마음을 생각하면 같이 억장이 무너진다.


 4월16일.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집에 이러르 빈소를 차리고 나니 비가 크게 쏟아졌다. 나는 기력이 다 빠진 데다 남쪽으로 떠날 길이 또한 급해서 소리 내어 울부짖었다. 다만 빨리 죽기를 기다릴 따름이다. <난중일기>



 아마 이 때부터 이순신은 임금, 조정에 대한 신뢰를 잃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하여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생에 대한 미련, 집착도 버렸을 것이다. 그저 나라와 백성에 대한 忠 만 남았으리라.



 원균의 트롤짓은 임진왜란 시작부터 칠전량해전의 대패까지 계속 된다.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술 쳐마시고 아몰랑 돌진으로 134척의 판옥선 중 122척을 잃고 조선수군 1만명을 잃었다. 일본 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다행인지 경상우수사 배설만이 원균의 명을 어기고 12척의 판옥선과 함께 진영을 이탈했다. 12척의 판옥선이 없었다면 노량해전도 없었다. 아니 임진왜란의 승리도 없었다. 


 선조실록에 기록된 한 사관의 원균에 대한 평을 들어보자.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 당초 이순신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칠천량)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선조실록 1598년 4월 2일. 사관의 논평>

 

 

 이순신은 지형을 이용한 전략, 전술로 단 한 척의 판옥선도 잃지 않고 압도적인 승리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원균은 대책도 없고 정찰도 없고 전략, 전술도 없이 무리한 출정을 하다 일본 함대에 포위당해 괴멸되었다. 그로 인해 전쟁 5년 동안 무사했던 호남지역은 쑥대밭이 되었다. 


 이순신은 홀로 수군을 재정비했다. 패잔병들과 민병, 승병들을 규합하고 군량미를 확보했다. 30일간 60km의 대장정이었다. 이순신이 보성에서 여러 장수들과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을 때 선조의 교지가 내려왔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수군의 전력이 약하니 권율의 육군과 합류해 전쟁에 임하라.' 


 이순신의 억장은 무너졌다. 수군이 육군에 합류하여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왜군이 서해 바다를 돌아 한강을 통해 한양으로 들어간다면 그때는 어쩔 것인가.

 (중략)


 이순신은 교지를 받은 다음날 선조에게 장계를 올렸다.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전선의 수는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p301


 

 역사 속 명량해전은 영화보다 더 처절했다. 칠전량해전의 대패로 인한 사기 저하. 적은 300척이 넘는 대군인데 조선의 판옥선은 고작 12척이었다. 이순신에겐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서웠을 것이다. 바로 병사들의 공포감. 


정탐꾼 임준영이 전갈을 전해왔다.

"내일 일본군이 벽란진 쪽으로 싸움을 걸어올 것 같습니다." 

(중략)

 이제 일본군이 전라우수영을 공격하려면 울돌목을 지나쳐야만 했다. 이순신이 생각했던 전장은 울돌목, 즉 명량이었다. 역사적인 전투 하루 전인 1597년9월15일 밤, 이순신은 전라우수영에 모든 군졸들을 도열시켰다. 

 "죽으려고 하면 곧 살 것이요,

 살려고 하는 자는 곧 죽을 것이다."

 "능히 길목에서 한 명이 천 명을 막아낼 수 있으니 우리도 그렇게 막아 낼 수 있다."

 "내일 내 명령을 듣지 않으면 군법을 제대로 적용하리라." 

-p312



 하지만 그럼에도 병사들과 장수들의 공포감은 극복하기 힘든 것이었다. 생각해보라 13척으로(1척의 판옥선이 추가되었다) 300척이 넘는 일본함대를 막아야 한다. 모든 이들은 승산이 없다 생각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도망가고 싶었으리라.


 실제 전투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진격명령을 내렸는데도 대장선을 제외한 나머지 판옥선들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저 눈 앞에 다가오는 수많은 일본함대를 바라보며 죽음에 대한 공포로 떨고 있었으리라. 


 

 

 

 결국 이순신의 대장선만 앞으로 나선 채 일본함대의 선발부대 133척과 맞서 싸우게 된다. 몇 시간을 버티며 치열하게 싸움을 계속하자 거제 현령 안위와 중군장 김응함의 판옥선이 합류했다. 그렇게 3척으로 맞서 싸우다보니 정오가 되자 물살이 바뀌었다. 지금까지는 일본군이 순류를 타고 공격을 하고, 조선 수군은 역류에서 맞서며 몇 시간 동안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정오까지 버티자 이순신의 계획대로 물살은 조선 수군의 편이 되었다. 


 물살이 바뀌면서 난파된 세키부네의 잔해들이 거친 물살을 타고 일본 군 지영으로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뒤편에서 대기 중이던 일본의 100여 척의 함선들은 떠내려오는 자기 편의 난파선들을 피하기에 급급하였다. 반면 이순신과 안위와 김응함의 판옥선은 순류 물살을 타고 빠르게 전진하면서 함포 사격을 전개하였다. 

 3척의 판옥선이 승기를 잡자 후방에서 구경하던 9척의 판옥선들이 용기를 얻어 합류하였다. 이제야 12 대 133의 해볼만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p321

 

 울돌목은 우리나라에서 물살이 가장 센 곳이다. 지형이 좁아 일본군 함대가 조선의 함대를 에워쌀 수 없다. 그리고 물살이 바뀌면 조선군에게 유리했다. 절호의 위치 선정이었다. 결국 일본 함대는 역류 때문에 자기들끼리 부딪혀서 나아갈 수도 없고 판옥선의 포탄에 얻어맞는 샌드백이 되었다. 31척이 침몰되고 92척이 난파 되었다. 선발대는 괴멸하였고 후방에 있던 부대는 후퇴했다. 정말로 12척으로 300척을 막아선 것이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후 조선에 남아 있던 일본군들을 본국으로 송환시키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국토를 짓밟고 백성들을 유린한 일본군을 단 한 명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탈출하려는 자들과 그것을 막으려는 자들의 마지막 처절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뿐 아니라 세계 해전사에도 기록될 대전투였다. 일본전함 500척(고니시 300척 제외)과 조선 판옥선 83척, 명나라 호선 61척. 조선명연합군 2만명과 일본군2만명(고니시 1만 5천 명 제외)의 전투였다. 노량해전은 그전까지의 이순신이 싸워온 방식과 달랐다. 그 전까지는 유리하고 압도적인 승리를 취할 수 있는 싸움만 하였다. 하지만 노량해전은 달랐다. 한 명의 외적이라도 더 죽이겠다는 살기가 서린 섬멸전이었다. 처절한 전투 중 이순신 장군은 적군에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조명연합군은 대승을 거뒀다. 500척 중 살아서 도망간 함선은 50여 척에 불과했다. 고니시의 300척과 1만 5천명은 같은 편이 싸우는 것도 무시한채 혼란을 틈타 도망쳤다.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사들은 각 진영에서 통곡을 그치지 않았는데, 마치 자기 부모가 세상을 떠난 듯 슬퍼했다. 그의 영구 행렬이 지나는 곳에서는 모든 백성이 길가에 나와 제사를 지내면서 울부짖었다. 

 "공께서 우리를 살려주셨는데, 이제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나이까?"

 수많은 백성이 영구를 붙들고 울어 길이 막히고 행렬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징비록>


 아무것도 모르는 늙은이나 어린이들까지도 많이 나와 울었으니, 백성들에게 이와 같은 동정을 얻는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었을까. <이덕형의 장계>



 이순신 장군 묘소에 가본 적이 있는가? 

 갈 때 마다 항상 혼자였다.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는 평일에도 사람이 북적거린다. 

 그러나 현충사는 한적함이 좋다. 

 그게 서글프다. 

-p369 



 이순신 장군의 죽음은 전사설과 자살설이 있다. 저자는 전사설에 비중을 두고 자살설을 일축했지만 나는 자살설에 더 비중을 두고 싶다. 이순신 장군은 수군의 총대장이다. 과연 그가 자기 자신을 위험에 노출 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후방에서 지휘하고 방패 뒤에서 충분히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었다. 아니 그게 총대장이 마땅히 해야할 일이었다. 명량해전에서는 어쩔 수 없이 대장선 홀로 돌진할 수 밖에 없었지만 노량해전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순신 장군은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켰다. 여러 기록들이 이를 뒷바침 한다. 

 

 선조의 그간 행실을 봤을 때 이순신이 전쟁 후에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칫하면 역모죄로 자신 뿐만아니라 가족까지 연류될 수 있었다. 한창 전쟁 중일 때도 죽이려고 했는데 전쟁이 끝나면? 그의 인기와 역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절대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순신은 그것을 알고 있었고 평소에도 주위에 그렇게 말했다. 


 여러 기록들을 살펴보자. 먼저 이순신과 함께 싸우고 그를 존경했던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의 <제이통제문>을 보자. 


 평시에 사람을 대하면 '나라를 욕되게 한 사람이라, 오직 한 번 죽는 것만 남았노라' 하시더니 이제 와선 강토를 이미 찾았고 큰 원수를 갚았거늘 무엇 때문에 오히려 평소의 맹세를 실천해야 하시던고, 어허 통제여! -p376

 

 진린 역시 이순신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진린은 명나라 황제에게 진언하여 이순신이 전쟁 후에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이순신이 명나라 황제로부터 면사첩(죽음을 면해주겠다는 황제의 밀지)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비가 내렸다. 

 경리 양호의 차관이 초유문과 면사첩을 가지고 왔다. <난중일기 1597년 11월 17일>

 

 이순신의 면사첩이 확실하다는 주장말고 당시 친일했던 순왜자들을 회유하기 위해 초유문(용서하겠다)과 순왜자들의 면사첩(죽이지 않겠다)을 이순신에게 건네주었다는 해석이 강하다고 한다. 명나라에서 왜 순왜자들을 신경썼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순신의 부하로 총애를 받았고, 훗날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던 류형은 생전에 이순신이 했던 말을 기록하였다.


 자고로 대장이 자기의 공로를 인정받으려 한다면 생명을 보전하기 어렵다. 따라서 나는 적이 퇴각하는 날에 죽어 유감될 일을 없애겠다. 


 숙종 때 대제학까지 지냈던 이민서는 이렇게 말했다. 


 의병장 김덕령이 옥사하자 제장과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보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곽재우는 드디어 군직을 떠나 생식을 하며 당화를 했고, 이순신은 싸움이 한창일 때 스스로 갑옷과 투구를 벗고 적탄에 맞아 죽었다.


 어떤 의병장은 역모죄로 옭아매질까 두려워 전쟁 후 미친 적을 했다고도 한다. 


 끝으로 숙종 때 영의정 이여의 말을 들어본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순신은 얼마든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으나 스스로 큰 공이 용납되기 어려움을 알고 드디어 싸움터에 이르러서 그 몸을 죽였다고 했다. 장군의 죽음은 미리 결정된 것이다. 오호, 슬프도다.


 

 마지막으로 일본과 서양의 이순신에 대한 평가를 옮기며 글을 마무리 한다. 


 p395-396


일본의 사토 테츠타로는 이순신과 영국의 넬슨을 이렇게 비교했다.


 역사상 최고의 제독은 동방의 이순신과 서방의 호레이쇼 넬슨이다. 거기에 넬슨은 인간적, 도덕적인 면에선 이순신에 떨어진다. 조선에서 태어났다는 불행 덕분에 서방에 잘 알려져 있지 못하다. 

<제국국방사론>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는 러일전쟁 승리 직후 축사를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일본 조선사 연구소>


 제2차 세계 대전의 영웅이었던 영국의 버나드 몽고메리 역시 조선의 이순신을 알고 있었다.


 조선에는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전략가, 전술가이며 탁월한 자질을 지닌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계 제작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전쟁의 역사>


 해전사 전문가이자 해군 제독이었던 영국의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 제독은 이순신과 넬슨을 비교했다.


 영국인의 자존심은 그 누구도 넬슨 제독과 비교하길 거부하지만, 유일하게 인정할 만한 인물을 꼽자면, 한반도의 이순신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실수가 없었으며,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완벽해 흠잡을 점이 전혀 없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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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8-03 20: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독서인으로 하여금 책을 집어들게 하는
리뷰, 이러한 리뷰를 우리는 명문이라
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22-08-03 21:34   좋아요 1 | URL
칭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책이 좋아서 인용만해도 좋은 리뷰가 되는 거 같습니다. 이 책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mini74 2022-08-03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순신 일기에 진짜 원균 욕이 많더라고요 ㅠㅠ 선조가 김덕령을 참수한 일은 정말 열받더라고요. 라디오님 잘 읽었습니다 ~

고양이라디오 2022-08-03 21:35   좋아요 1 | URL
선조와 원균은 정말... 리더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순신의 대한민국의 영웅이자 저의 영웅입니다. 영화 <한산>을 재밌게 보고 이순신 장군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이순신의 바다>를 빌리고 <난중일기>를 구입했습니다. <이순신의 바다>는 한국사 강사이신 황현필님이 쓴 책입니다. 그림도 많고 좋습니다.  




 이순신을 제대로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보다 대단한 인물이 우리 역사 속에 있었음을 알게 하고 또 우리가 그의 후손이라는 것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역사서이지만 독자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고 눈시울이 붉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p05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순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았으면 합니다. 


 

 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벌벌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산하가 피로 물든다.

<이충무공전서> 중 '검명' 


 영화 <명량>에서 이 문구가 나왔던 거 같은데 맞나요? 



  분명히 말하지만 임진왜란 발발 전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아니라 경상좌수사나 경상우수사였다면 일본군은 조선땅을 상륙하기도 전에 바다에서 참패하고 일본 열도로 물러났을 것이다. 혹여 일부 부대가 상륙했다치더라도, 전진 기지를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고, 육지에 상륙한 일본 육군은 사기 저하와 보급품 부족으로 조선땅에서 빨치산처럼 살아가다 고사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임진왜란(1592~1598)은 우리에게 임진왜변(1592) 정도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경상좌수사 박홍과 경상우수사 원균은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 -p92 


 전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없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만 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못해봤습니다. 저도 저자와 같은 생각입니다. 이순신이 경상도 바다를 지켰다면 일본군은 조선에 상륙조차 힘들었을 것입니다. 경상우수사 원균과 경상좌수사 박홍은 일본과 교전도 하지 않고 달아나기 바빴습니다. 원균은 판옥선이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갈까 두려워 자신이 도망칠 판옥선 1척을 남기고 남은 판옥선을 모두 불태웠습니다. 참, 판옥선을 적에게 넘기지 않은 것을 잘했다고 칭찬을 해줘야하는건지.


 당시 전라좌수사인 이순신의 관활지보다 원균과 박홍의 관할지는 2-3배가 컸습니다. 그만큼 병력도 많았다는 소리고 판옥선도 많았다는 소리입니다. 이순신이 25척을 보유하고 있었으니 원균과 박홍의 판옥선만 합쳐도 최소 50척에서 많게는 100척 이상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방비로 적을 상륙시켰고 교전 한 번 하지 않고 달아나기 바빴습니다.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존경스러운 부분이 이순신 장군의 철저한 준비성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이미 일본군이 쳐들어 올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전쟁 준비에 소홀함이 없었습니다. 병사를 조련하고 판옥선을 건조하고 일본군의 전투에 대비해 거북선까지 준비했습니다. 충분한 대포와 화약도 준비했습니다. 원균과 박홍과 그의 병사들은 화들짝 놀라서 도망치기 바빴지만 이순신과 그의 병사들은 판옥선 25척을 이끌고 일본 함대를 차례로 격파해 나갔습니다. 


 가장 본받고 제가 개선해야할 점이 이순신 장군의 준비성입니다. 저는 항상 일이 터지고 나서야 수습하기 바쁩니다. 앞으로 미리미리 조심해고 준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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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2-08-02 20: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헤어질 결심을 보고 왔습니다

박해일님의 나이 들어 가는 모습을 보는것도 좋았어요
박해일 배우의 이순신장군의 모습도 기대됩니다

고양이라디오 2022-08-03 10:10   좋아요 3 | URL
헤어질 결심 또 보고 싶습니다.

한산도 재밌게 보세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힘들고 지겨운 길을 견뎌내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p92


 실제로 각오가 필요합니다. 굳은 다짐, 결심, 결단이 필요합니다. 요즘 매일 운동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런닝을 할 때도 있고 아침에 못하면 저녁에 할 때도 있습니다. 저는 아침잠이 많아서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가려면 정말 큰 각오, 결단이 필요합니다. 더 나은 체력을 가지고 싶다면 무겁고 힘든 첫 발걸음을 떼어야합니다.



 하루를 무의식적으로 시작하는 것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달리 말하면, 잠들기 전에 '다음날에 일어나서는 하루를 긍정적으로 능동적인 자세로 맞이하곘다' 라고 다짐하라는 뜻이다. -p130


 

 아래는 경청의 대화법에 관한 조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제대로 들었다면" 이라고 운을 뗀 후 그가 말한 것을 되풀이해보라. 그렇게 하면 당신이 상대의 말을 경청했고 올바르게 이해했다는 확신을 상대에게 전할 수 있다. 또한 상대의 의도와 상관없이 상대의 말투가 당신에게 어떻게 느껴졌는지 알려주는 효과를 긷대할 수 있다. -p148



 아래는 피드백에 관한 조언이다.


  달리 말해서, 피드백이라는 명목으로 상대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퍼붓고, 상대가 잘못하고 있다고만 지적한다면 상대는 당신의 피드백을 귀담아듣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공격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드럽고 배려하는 말투로 해결점을 지향하며 피드백한다면, 또 상대가 열린 마음으로 그 피드백을 받아들인다면 당신의 피드백은 상대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p149


 위 글을 읽으면서 반성했습니다. 상대의 잘못만 지적하지 말고 함께 해결점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풀어가야겠습니다. 



 더 나은 사회적 삶에 대한 조언입니다.


 낯선 사람에게도 인사하라.

 전에 만난 적이 없다고 해도 먼저 다가가 악수를 청하고 당신이 누구인지 소개하라. 그 사람이 평생 친구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p154 


 저는 초반에 낯가림이 심합니다. 집에서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도 인사를 하고 싶은데 순간 타이밍을 놓치면 뻘쭘해서 인사를 못합니다. 좀 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알라딘에서 마크베이어의 신간이 소개되어서 전 저작을 도서관에서 빌려보았습니다. 150p 밖에 못 읽었는데 반납해야겠습니다. 책 구입해서 다시 읽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노트도 준비해서 이 책에서 테스트, 평가하는 것들을 다시 해보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조언들을 메모해서 실천해봐야겠습니다. 


 

 

 












 <베스트셀프>들 다 읽고 소화한 후 <원 디시전>도 읽고 실천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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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5 1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7-05 16: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22-07-05 1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 봤다고 자랑하러 고양이라디오님 서재 들림이요^^

박해일, 탕웨이 배우 어찌 이리 매혹적일 수가요!!!!

이젠 탑건을 봐야겠어요. 대작과 함께 하는 즐거운 7월.
토르까지!

고양이라디오 2022-07-05 16:34   좋아요 1 | URL
악!!! 얄라님 축하축하!!!

저도 <헤어질 결심> 너무 재밌게 봤어요. 얼른 리뷰 올리려고요ㅎ
박해일, 탕웨이 bbb

곧 <토르>가 오네요^^ <탑건> 도 재밌게 보세요ㅎ
 
















 오랜만에 글을 쓴다. 오랜만에 책 한 권을 읽었다. 참으로 오랜만이다. 


 세계 2차 대전 당시의 처칠의 모습을 그린 영화 <디키스트 아워>를 재밌게 보고 처칠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그는 명연설가이자 노벨 문학상을 받은 명문장가가 아닌가. 그의 글을 직접 읽어보고 싶었다. 


 첫 책으로 <폭풍의 한가운데>를 골랐다. 다른 책들도 이어서 읽어보고 싶다. 


 




 











 <제2차 세계대전>은 처칠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하지만 두께가 만만치 않다. 일단 <윈스턴 처칠, 나의 청춘>을 먼저 읽어봐야겠다. 


 처칠은 매력적이다. 영웅의 풍모를 갖추고 있다. 그의 글에서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당당함, 진솔함. 거침없이 시원시원하다. 그리고 유머까지. 



 <폭풍의 한가운데>를 읽으면서 좋은 문장, 좋은 문단들이 많았다. 그 중 일부를 소개해보겠다. 책 초반부는 전쟁 속에서 다양한 일화들을 이야기하는데 개인적으로 전쟁 이야기들 보다는 책 후반부의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이 좋았다. 


 그는 아이젠하워가 평했듯이 "처질은 위대한 인물이다. ..... 그는 단지 작은 섬나라의 입장뿐 아니라 ..... 서구문명이라는 큰 틀에서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이젠하워도 처칠을 과소평가했던 거 같다. 그는 단지 서구문명이라는 입장 뿐 아니라 지구와 인류의 운명이라는 틀에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처칠의 비행기 조종, 벽돌쌓기, 그림 그리기를 취미로 가지고 있었다. 그의 취미 이야기들이 재밌었다. 그의 취미에도 그의 가치관과 철학이 묻어난다. 특히 그림 그리기는 나도 취미로 도전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림 그리기라는 취미를 찬양하고 매혹적으로 묘사하고 추천한다.



 이제 처칠의 문장 속으로 들어가보자. 


  두 가지 경우 모두, 구원은 언제나 내부로부터 성숙되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외부와 바닥으로부터 강요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p198

 

 독일의 U보트 잠수함이 영국의 상선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영국 해군의 수뇌부는 해군이 영국 상선들을 보호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호작전을 거부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영국 해군 말단 장교와 영국 정치인들의 객관적인 근거와 논리를 토대로 치열한 회의와 싸움을 거쳐 해군 수뇌부를 설득한다. 그리고 효과적으로 독일의 공격으로부터 상선들을 보호해냈다. 


 모든 조직이 그렇지만 군대는 특히 상명하달식의 수직적 위계 구조가 강한 집단이다. 말단 장교의 발언권보다 장군급의 발언권이 강한 것이 당연시 된다. 소위 '내가 짬빱이 얼만데 내 판단이 옳지! 너까짓게 뭘 안다고 나서?' 이런 분위기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위계질서보다 객관적 근거와 논리들이 받아들여져 좋은 변화를 만든 이야기이다.  




 아래는 처칠이 아일랜드와 평화협상을 진행하는 이야기 속 문장들이다. 

 

 마이클 콜린스는 영국 정부와의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하게 자기가 한 약속을 지켰다. 그에게 가해졌던 긴장과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과거 동지들의 끊임없는 살해 위협과 그에게 씌워진 배신과 거짓의 누명, 열댓 번이 넘는 실제 살인 음모, 그리고 자신의 절박한 선택으로 인해서 생겨난 마음속의 갈등이 그의 격정적인 성격과 어우러지면서 엄청난 부담이 되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증오해왔지만 결국에는 신뢰하게 되었던, 영국 정부의 각료들과 맺은 약속만큼은 철저히 지켜나갔다. 신뢰와 선의를 바탕으로 해서 성립된 협정을 위반함으로써 아일랜드라는 이름이 더렵혀져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결의가 그에게는 서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잘 압니다." 그가 협상이 끝나갈 무렵 나에게 한 말이다. "얼마 못 가서 내가 살해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오. 내가 살아서 할 수 있는 것보다는, 나의 죽음이 평화를 위해서 훨씬 더 많은 일을 해줄 수 있을 것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말이로." 그는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화해의 조약' 에 자신의 생명이 담긴 피로 서명을 대신했다. -p326

 

 잘 알려지지 않은 처칠의 업적 중 하나가 아일랜드와의 평화협상을 성사시킨 것에 있다.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가실 것이다. 아일랜드 정부에는 키플링이 얘기하는 "소총 개머리판의 쇠를 먹어 삼킬 만한" 증오심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일랜드 측의 마이클 콜린스는 평화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과거 동지들에게 자신이 배신자로 낚인 찍히더라도 신뢰와 선의를 바탕으로 한 평화를 꿈꾸며 협상에 나선다. 감동적인 영웅의 모습이었다.


  

 아래는 민주주의에 대한 처칠의 견해를 엿볼 수 있는 문장들이다. 


 의회주의 체제하에서 이러한 엄청난 과학적인 발견들이 미칠 영향을 심각하게 고려해 본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일같이 보이기도 한다. 도대체 이러한 천재지변에 해당하는 사항들에 대한 적절한 수용 방법을, 일반 대중이 선거에서 투표로 결정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미 세계 각국의 의회는 자국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현안인 경제문제를 처리하는 데 매우 부적합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이러한 심각한 문제들을 놓고 벌이는 선거유세의 인기 발언이나 언론의 줄타기 논조들은 자연히 시들해질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발전을 위한 동기나 견인차의 역할에는 비능률적이라는 사실은 이미 검증된 지 오래다. 보통선거권에 의해 공동체 사회의 지혜나 힘이 집약적으로 표현되었던 사례는 세계 어느 강대국의 의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강대국들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더 이상 유능한 인재나, 당면한 문제에 대한 전문가나 아니면 최소한, 일관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다.


 민주주의 정부는 최소한도의 반발과, 근시안적인 정책, 선심과 자선,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사탕발림 수법 등을 수단으로 삼고서 표류하고 있다. 정부가 이토록 자신들에게 맡겨진 업무에 지속적인 대안 없이 표류한 적이 없는 판국에, 한 편에서는 전세계의 경제구조뿐 아니라 모든 가정의 사회적인 행동 양식이나 도덕적인 관점에도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올 대변혁이 물밀 듯이 빠른 속도로 밀려오고 있는 중이다. 공산주의자들만이 계획과 복음을 갖고 있는데, 불행하게도 인간의 자유를 질식시키는 계획이며 증오에 기초한 복음이니, 그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p402     


 처질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말들을 남겼다.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최고의 논리는 일반 유권자들과 5분간 대화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부 형태다. 그동안 채택되었던 다른 모든 정부 형태를 제외한다면."


 나도 처질의 생각에 동의한다. 민주주의가 최상의 제도이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채택된 것이 아니다. 다른 제도들이 더 최악이기 때문에 차선으로 선택된 것이다. 



 처칠이 취미생활에 대해 남긴 글 중 하나이다. 외국어 공부가 하고 싶게끔 만들어주는 글이다.


  하지만 외국어를 선택할 때에는 신중하고도 현명하게, 우선 한 가지만 고르는 것이 좋다. 일단 선택했으면 총력을 집중해서 연마하되, 그 외국어로 독서를 하면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기 전에는 절대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p437




 마지막으로 옮긴이의 말 속 한 구절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처질 전문가 제임스 뮬러 교수가 처칠의 1953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을 두고, 노벨상이 그를 영예롭게 만들었다기보다는 처질이 오히려 그 상의 가치를 높였다고 하는 것이 더 공정할 것이라는 평을 하고 있을 정도로 그는 특이한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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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2-06-08 16: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키스트 아워 재미있게 봤는데요 게리 올드만 못 알아보겠더라고요 킹스 스피치에도 처칠이 나오지요

고양이라디오 2022-06-08 18:01   좋아요 2 | URL
분장기술이 너무 뛰어나서 누군지 모르고 보면 절대 못 알아볼 거 같아요ㅎ

킹스 스피치도 보고 싶은 영화입니다^^

mini74 2022-06-08 18: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처칠이 평생 품고 살았다는 검은개가 생각나네요. 소개해주신 책들 관심가네요 ~~

고양이라디오 2022-06-09 17:21   좋아요 0 | URL
검은개 이야기는 이 책에 없던데 자서전에는 있을지도 모르겠네요ㅎ

얄라알라 2022-06-09 0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 반가우세요.

말씀하신 것 처럼, 참으로 오래만이십니다!^^
영화와 책이 엮어 짜내는 양탄자, 진정 책읽기를 좋아하시는 분의 독서법이네요

잘 지내셨는지요?

고양이라디오 2022-06-09 17:34   좋아요 0 | URL
잘 못지냈습니다ㅎ 앞으로 잘 지내보려고요^^

다시 책도 보고 영화도 보고요^^

얄라님은 잘 지내셨지요?
 
















  몰입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정한 규칙대로 움직이는 것' 이다.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방식대로 수행한다. 그 과정에서 기쁨과 성취감이 샘솟는다. 다른 누군가가 명령한 규칙에 따라 행동해서는 기쁨도 흥분도 느낄 수 없다. 


-p131



 인간은 무언가에 몰두, 몰입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거 같습니다. 쾌락과 엔돌핀이죠. 공감이 가는 글이라 소개해봅니다. 저는 스스로 정한 규칙을 지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규칙을 정해놓고도 금방 까먹거나 금방 어깁니다. 끊임없는 반복이지만 좋은 습관을 만들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오늘은 책도 반납할겸 오랜만에 도서관에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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